소설리스트

제44장. 도주 (46/62)

제44장. 도주

죽었으니 확인을 해야 했다.

“캐릭터창 오픈!”

[조연

신분:일반

호칭:일수경천

레벨:403

상태:정상

힘:108

지능:100(+20)

체질:100

근성:105

추가 능력:0

체력:152,109/152,109

내공:449,870/449,870

명성:89,781]

레벨이 10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체력과 내공도 하락한 상태였다.

“무공 상태창 오픈!”

[무공 상태

-병기 숙련

권:10성 0.00% 검:2성 13.01%

-무공 숙련

육합권(심결):2성(現) 攻, 防, 粘, 衝, 流, 回, 妙, 無盡

나한권:11성

삼재검:4성

내공심법:나한기공 11성

내공심법:반야신공 3성(現)

경공법:유운신법 9성(現)

보법:불영보 12성(現)

잡기:금나수 12성

잡기:철포삼 11성

잡기:지청술

잡기:진법(中), 사상검진 10성

잡기:음공(中), 일성소

일격기:독사출동 12성

일격기:비룡재천 10성

일격기:팔방풍우 11성

일격기:태산압정 11성

일격기:선인지로 10성

일격기:원앙각 12성

일격기:무영각 9성

일격기:이어타정 10성

일격기: 이어번신 11성

일격기:궁신탄형 9성

체질:천무지체(天武之體)

체질:불가(佛家), 양강지체(陽强之體)]

“후아… 미치겠다.”

불안해하면서 열어본 무공 상태창인데 역시나! 였다.

사망이라면 예전에 고목문에서 한 번 죽어본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주화입마 상태에서 사망하면 페널티가 더 심해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숙련치가 그대로인 것도 있지만, 심한 건 3성이나 떨어져 있었다. 특히나 올리기 힘든 반야신공이 3성이나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제 10성이 되어 호신기공 효과를 맛볼 수 있을지 암담했다. 페널티를 복구하려면 2주가량은 밥만 먹고 사냥을 해야 할 정도였다.

그다음 단계로 행낭을 열어본 난 정말로 게거품을 물면서 쓰러질 뻔했다.

만약을 대비해 행낭엔 온갖 잡동사니를 넣어 다니고 있었다. 주루에서 파는 각종 음식부터 시작해, 거울이나 노리개 같은 잡화까지 그 개수가 1백 개에 가까웠다. 죽었을 때 떨어뜨리는 아이템의 개수는 3개니 최대한 고급 아이템 드롭률을 줄이기 위한 꼼수였다.

그런데 재수 없는 놈은 뭘 해도 재수 없다고 하더니 하필이면 내가 그 짝이었다. 다른 두 가지야 잡템일 뿐이었지만, 다른 한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이거 참, 떨어Em려도 하필이면 천잠보의냐.”

지금 현운자가 착용하고 있는 연위갑과 달리 천잠보의는 구할 수 있는 물건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할 수 있다는 의미였지, 마음먹는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매물 자체가 거의 없는 물건이었다.

아예 써본 적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천잠보의의 효능을 실컷 맛본지라 내 머릿속엔 ‘무조건 복구!’라는 글귀가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어차피 지난 일이다.’

지난 일이라고, 잊어버리자고 생각하지만 마음이 머리를 따라가 주진 않는다. 인간인 이상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그때였다.

더 이상 문파 소속원이 아닌 탓에, 사망하면 문파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사망 지역의 가까운 유저 생성 도시에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지금 난 감숙의 유저 생성 도시인 난주로 돌아와 있었다.

남문로 상점가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데, 내 앞으로 행인 둘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내 관심을 끌었다.

“절초야, 조연이 죽은 자리가 무안평(貿雁坪)이라고 했지?”

“어, 그렇게 들었어.”

“그럼 난주에서 부활했겠군. 슬슬 걔 재접속할 시간도 됐겠네. 가자, 천하선관으로.”

두 유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선 성 동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천하선관? 거기랑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천하선관(天下先觀)은 난주의 유일한 도관(道觀)이었다. 강호에서 특별히 맡은 역할이 없어서 처음 난주성을 살펴봤을 때 외엔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녀석들의 뒤를 쫓아갔다.

도덕경에 도가삼보(道家三寶)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중 세 번째가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인데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 즉 마음을 물과 같이 낮은 곳에 두라는 상선약수(上善若水, 處衆人之所惡)의 이치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경구의 앞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도관이라는 곳이 감히 천하선(天下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사이비 냄새를 대놓고 물씬 풍기는 도관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렇게 따라간 천하선관 앞에는 앞서 들어간 두 유저들 말고도 다른 유저들이 꽤 많았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그들은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거나 조용히 좌정한 채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반은 일반 유저들이었고, 또 반수는 구대문파의 복색을 하고 있었다.

난 그들 앞을 조용히 가로질러 도관 안으로 들어갔다. 설령 내 정체를 들킨다 하더라도, 설마 성내에서 공격받을 리는 없다고 여겼기에 내 걸음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힐끗힐끗 곁눈질을 받으며 도관 안에 들어가자 그 안에서도 줄지어선 유저들이 보였다.

‘도대체 뭣 때문에 갑자기 유저들이 이렇게 몰려든 거지?’

강호 홈페이지에서도 천하선관에 관한 정보는 볼 수 없었다. 더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 난주의 지배문파 문주였던 내가 천하선관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의 알 수 없는 일들은 최근에 생겨났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조용히 대열 맨 끝에 붙었다.

한 일 분여나 지났을까? 내가 대기줄에 합류했을 때, 관주와 대화를 나누던 유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찝찝한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리면서 도관 밖으로 나갔다.

“여기에 있다는 말이 뭐야? 난주에 있다는 말인가?”

줄은 빠른 속도로 짧아졌고, 드디어 내가 관주 앞에 서게 되었다.

도관주와의 대화는 유저와 NPC만의 독립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터라, 난 그때까지도 천하선관이 뭐 하는 곳인지 몰랐다. 바로 앞에 선 이가 말하는 것도 듣지 못했던지라, 도관주와 대면할 때 내가 할 말은 많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진인.”

우선 인사부터 하고, 슬슬 달래서 이곳의 정체를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관주의 태도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 같은 배덕자가 올 곳이 아니다! 냉큼 사라지지 못할까!”

느닷없이 쏟아지는 고함 소리에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이내 관주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고, 얼마나 성이 났는지 수염마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다가 종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서 삿대질까지 했다.

“냉큼 꺼지지 못할까! 가라! 가서 기다려라! 천사님이 네놈을 반드시 징치해주실 것이다!”

‘천사? 천사… 헉! 천사교!’

그랬다. 심상치 않던 도관 이름처럼 이곳은 정상적인 도관이 아닌, 바로 천사교의 도관이었던 것이다.

천사란 이름은 머릿속에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모든 의문을 한순간에 풀어주었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저들은 현재 이곳에서 내 위치를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교가 그걸 알려 주는 이유란 분명 과거 영하성에서 쌓은 천사교와의 적대도 때문이고 말이다.

어찌 됐든 깊게 생각할 시간도, 그리고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었다. 지금 관주의 이야기는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어서 주위 유저들이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더 자리 지키고 있다간 내 정체가 발설될지도 몰랐다.

난 이내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겨우겨우 관주의 입막음에 성공하고 도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얼른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는.

하지만 저들도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이들이 아니었다.

“어이, 그쪽!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제길…….’

누군가가 날 불러 세운 것이다. 뒤돌아보니 화산파 유저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문제는 검병(劍柄)에 손을 얹은 그 자세도 살벌했지만, 그가 말함과 동시에 내 주위를 다른 유저들이 다가오더니 둥글게 포위해버린 것이다.

비록 아니꼽고 귀찮기 그지없었지만, 일단은 대답을 해줬다.

“왜요?”

“아이디 좀 봤으면 합니다만.”

역시 불러 세운 이유는 그것이었다. 내가 조연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말이다.

“왜요?”

건방지고 퉁명스런 어조로 다시 반문하자, 유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녀석도 보통 심기가 아닌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연인지 아닌지 확인만 하면 됩니다. 아이디를 밝히지 않겠다면 조연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겠습니다.”

놈은 이곳이 언제든지 관병이 출병할 수 있는 성안이라는 걸 무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현상금이 놈의 이성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말한 대로 하겠다는 듯 검집에서 검을 뽑아 올렸다.

슥! 스스스슥! 챙-

녀석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모두 일제히 각자의 성명병기들을 꺼내 들었다.

내 주위를 포위한 유저의 수는 대략 스물대여섯. 천잠보의를 잃어버린 상태라지만, 결코 그들이 두렵진 않았다.

하지만 녀석들은 감히 성안에서 칼부림을 한 대가를 감수할 수 있다지만, 난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만 해도 망할 천사교 때문에 이런 수고로움을 빚고 있는데, 관부마저 등을 돌리게 할 수는 없었다.

녀석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조용히 환경 설정창을 소환했다.

그리고 그동안 꺼두었던 옵션에 체크를 했다. 그러자 아무런 표시도 없던 내 머리 위로 스르르 글자가 떠올랐다.

“일수경천?”

“뭐야? 조연이 아니잖아?”

별호란 게 이런 점이 좋다. 강호에선 아이디를 밝히기 싫을 때 별호로 대치할 수 있었다. 물론 별호와 아이디 둘 다 출력할 수도 있다.

녀석들은 일수경천이 내 이름인지 별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들은 별호 시스템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조차도 모르는 평범한 유저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알더라 하더라도 그들의 뇌리엔‘조연은 황금룡’이라는 공식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들도 꽤 긴장을 했는지 긴 숨을 내쉬며 포위를 풀었다. 그렇다고 미안하다며 사과해오는 놈은 없었다. 무리를 지으면 도덕심이 떨어지기 때문일지, 아니면 원래 그런 놈들만 모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의 행패는 비단 나에게만 그친 게 아니었다. 도관 앞에 자리한 유저들 중에 아이디를 노출하고 있던 유저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히 제 놈들끼리도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 모두 천선관주에게서 ‘조연은 이곳에 있다’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 놈들끼리 아귀다툼을 하든 말든 상관치 않고, 난 곧바로 몸을 돌려 포매향으로 향했다.

객점에 이르자 점소이 우칠에게 은자 몇 냥을 쥐어주고 방을 하나 빌렸다.

대강 천하선관이 뭐 하는 곳인지 짐작은 갔지만, 향후 내 행보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더 확실히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소요파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나와 마찬가지 꼴이었으니 제외하고, 파도와 현운자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현운자는 접속 상태가 아니었던지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다행히 파도는 답서를 보내주었다.

파도 또한 구대문파의 견제를 받으며 영하성에서 잠적하고 있었던 탓에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가 알아봐준 정보만으로도 꽤 충분했다.

파도의 말에 의하면, 원래 각 성의 대도시마다 존재하는 도관에는 돈을 받고 점(占)을 쳐주는 기능이 있었단다. 단, 여기도 우호도의 영향을 받았고, 그 우호도를 올리기 위해선 이런 유의 NPC가 다 그렇듯이 상당한 액수를 들이부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쏟아 부어봤자 점을 칠 수 있는 질문이란 대상이 물건이나 사람일 때의 행방에 국한됐고, 애써 답을 얻었다 해도 ‘북쪽’, 혹은 ‘강 건너’ 이런 식이었다. 한마디로 실컷 돈만 처먹고 막상 써먹을 데는 없는 정보만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도관의 기능을 알아낸 유저라고 할지라도, 곧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고 마는 게 불과 얼마 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 잊고 지내던 기능이 처음으로 제대로 발휘된 게 이번 사건이었다. 바로 ‘조연 추색 작전’ 말이다.

천화선관이 유독 특별해서 내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여타 모든 도관에서 조연의 행방을 물으면, 세세히 어느 지역의 어느 방향으로 몇 분 거리에 있는지 정확히 읊어준다는 것이다.

하여간, 한마디로 나란 놈의 위치는 인공위성의 추격을 받는 것처럼 완벽하게 공개되어 있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으아아!! 이, 이 망할 천사교!!!”

파도의 전서를 보다 일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인지 알게 됐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는 도교였고, 그중에서도 천사도의 성세가 가장 컸다. 전에 현운자가 일러준 말대로라면 천사도가 사교(邪敎) 무리는 아니었고, 그런 천사교를 적대시한 대가는 지금의 나처럼 천하 모든 도관의 공분을 사게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유저들이 내 위치를 정확히 알고 쫓아왔는지, 어떻게 엽사가 덫을 설치해놓고 날 기다릴 수 있었는지, 바로 어제 있었던 그 말도 안 되는 추격전의 전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잘나봤자 결국 천사교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난 외통수에 걸리고 말았다.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지금이야 사람들 속에 숨어서 아닌 척하면서 버틸 수 있었지만, 도시 밖으로 나간다면 결국 정체를 들킬 수밖에 없었다. 허허벌판 외진 곳에 홀로 다니는 여행객과 조연이 그 지역에 있다는 정보가 겹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상황이란 지금처럼 모른 척 잡아뗄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난주성 근처에서 들락날락하면서 날 잡겠다고 모이는 놈들을 겁주는 방법이라도 써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많고 많던 명성은 문파 해산으로 인해 반 토막이 나버렸고, 그나마도 어제 추격전을 치르면서 다시 반 토막이 나버렸다. 이제 남은 명성이라곤 겨우 9만 가량.

하지만 그것도 다가 아니다. 금강저를 착용하기 위해선 명성이 5만은 되어야 하니 결국 4만밖에 여유가 없었고, 때문에 내가 잡을 수 있는 유저의 수도 4, 50이 한계였다.

“후우… 이거 참,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하는 건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그래도 어제의 울분이 조금은 풀렸었는데, 어느새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 게임 계속해야 하나?”

심지어 이런 말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에도 없이 그냥 나오는 소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갑갑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무조건 죽는 상황이었다.

난 문파대전에서 내가 보인 위용을 일반 유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무진을 노출하는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구대문파 수장들을 때려죽인 이유가 있었다.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공포를 심어주면 운신의 폭이 훨씬 커진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놓은 공포심은 어제 엽사가 날 죽이면서 모래성 허물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사망하면서 무공 숙련치도 떨어진 상태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은 나보다 저 하이에나 같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난주에 모인 유저들은 어제보다 배는 많아 보였다. 정말로 나가면 죽는다.

한 시간가량을 포매향 객방에 틀어박혀 요리조리 궁리를 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아… 넘어갈 수 없다면 돌아가라고 했던가……. 에라이 모르겠다. 제 놈들이 지치나, 내가 지치나 두고 보자.”

게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별수 있나? 그냥 나가버리면 그만이지.

난 곧바로 로그아웃을 해버렸다.

하지만 먼저 지친 건 나였다. 그다음 날도 날 잡겠다고 모인 유저들의 수는 변동이 없었고, 오히려 늘어나는 분위기였다. 그 바람에 그날도 성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건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이야 사망에 대한 큰 부담 없이 심심풀이 이벤트 몹 사냥하는 기분으로 날 노리고 있었지만, 난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강호에서 시간은 금보다 귀했으니까. 더구나 난 문도들과 시간 약속까지 해둔 상황이었다.

성공보단 실패의 확률이 높았다. 거기에 저번의 경험도 있어서 행낭에서 비싼 아이템은 전장에 모두 맡겨 버렸다. 행낭은 오로지 육포와 쓰레기 잡템으로만 가득 채워졌다.

몸을 가볍게 만들고 나자 이번엔 남문이 아닌 북문으로 출구를 바꿨다.

내심 기대를 하고 갔건만, 북문에도 남문만큼은 아니었지만 유저들이 있었다.

성문에 이유 없이 유저들이 서 있을 리 없다. 녀석들은 분명 날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었다. 괜히 접근했다가 얼굴 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이 어슴푸레 보일 정도로 거리를 멀리 두고 이름 모를 건물들 사이의 좁은 틈새로 들어갔다.

이젠 조용히 시간만 기다리면 됐다. 놈들이 자리를 비울 시간을.

그런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십여 분이 지나자, 북문 앞으로 점점 유저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달려오던 녀석들이 북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놈들과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그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길, 역시 안 되는 건가.’

시작도 못한 채 계획이 망가진 것이다. 천하선관 점쟁이가 그새 내 위치를 설토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주 상세한 위치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는지 다들 북문 근처에 서성이는 사람을 검문하거나 그 주변을 뒤지기만 했다.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수색하러 오는 놈들은 없었다.

난 갈등했다.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면 모를까, 천하선관주의 말이 달라졌기에 놈들은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나흘 동안 기다리다 이제야 움직임을 포착했는데 쉽사리 포기할 리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성문 주위로 이동했으니 그게 난주성 탈출을 꾀한다는 것 또한 당연히 알 수밖에 없었다. 혹여 내가 게임을 포기한 게 아닌가 하고 회의적이었던 놈들도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마치 섣불리 풀 섶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한 형국이었다.

‘어쩔 수 없지. 강행하고 싶어도 지금은 수가 너무 많다.’

일단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포기는 종전과 달랐다. 정말로 더 이상 시간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됐다.

바로 접속 종료를 하고 난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시계 알람을 오전 5시에 맞추고 말이다.

보통의 온라인 게임이 다 그렇듯이 이른 아침은 유저 수가 가장 적은 시간대. 더구나 난 강호를 시작한 이래 그 시간에 게임을 해본 역사가 없다. 분명 녀석들은 내 평소 접속 시간대를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난 녀석들 생각을 역으로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띠링띠링, 띠리리링~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 시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넉넉히 시간을 맞춰놓고 잤다지만, 수년간 길들여졌던 습관이 쉽게 깨질 리가 없다.

몸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무기력하고 눈꺼풀은 풀을 먹인 것처럼 떼어지지 않는다.

“아아… 일어나야 되는데…….”

신음처럼 핑계 소리가 흘러나온다.

개길 만큼 개기다가 이불을 걷어차고 대충 세수를 하기까지는 알람이 울리고도 40분이나 지나고서였다.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지…….”

지금의 내게 강호를 플레이한다는 건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어 졸린 눈을 비벼 가면서 강호에 접속했다.

난주성은 공포영화에나 나올 만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난 여전히 이름 모를 건물 틈새에 서 있었고, 북문 앞은 간혹 수레를 끄는 인부나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유저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 시간에 성문이나 지키고 있을 놈은 미친놈밖에 없겠지.”

무슨 게임이 군대도 아니고, 불침번을 세울 리가 없다. 설사 불침번이 있다 해도 달려올 오분대기조 숫자야 뻔했고, 그 뻔한 숫자로 날 어찌해볼 깜냥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 두 번, 세 번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경공을 일으켰다.

최대한 빨리 난주성에서 멀어져야 했다. 곧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눈에 불을 켠 추살대가 붙을 것이다.

난주성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청해성이 있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요전번처럼 괜스레 방향을 꺾으며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그런 기분으로 달려 본 적이 없었다. 평소의 장거리 여행이란 지루함의 그 자체였고, 보통은 그 긴 시간을 헛된 망상이 쉼 없이 솟아나와 지루함을 대신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엔 지루함도 아니었고, 언제 전투에 돌입될지 모르는 전전긍긍의 상태도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론 청해성 성도(省都)인 서녕(西寧)까지 직선로가 그려져 있었고,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 위치가 실시간으로 수정되고 있었다. 관도를 따라가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눈앞에 산이 보이면 산을 넘고, 개천이 보이면 개천을 뛰어넘었다.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은 질주였다.

그러나 이 수고스러운 도주는 결코 생각만큼 빠르지 못했다. 유운신법은 절정은커녕 일류급에나 간신히 들어갈 수준의 경공이었고, 그렇잖아도 느린 경공도 요전의 사망으로 인해 9성으로 성취가 깎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출 처음의 한 시간이 지났을 땐 그간 벌어놓은 거리로 뿌듯했던 마음이, 날이 밝았을 때에는 서서히 시작됐을 녀석들의 추격 생각에 답답함과 조급함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붉고 메마른 대지가 색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사막과도 같던 황토 지대에 드문드문 키 작은 풀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무릎 어림의 관목들로 대치되었다. 드디어 감숙성을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청해성으로 진입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긴장, 초조만 가득했던 마음에 실낱같은 안도감이 깃들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비록 청해에 진입했다고 해서 추격자들을 뿌리칠 수 있다는 착각 따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턴 사망해도 도로 난주에서 재접속하지 않아도 됐다. 부활 지점이 청해성의 성도인 서녕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 말은 설령 이번은 실패한다 해도 다음번엔 확실한 탈출이 가능하다는 걸 의미했다. 구대문파 놈들이 결코 나 하나 잡기 위해 서녕에 진을 칠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직 청해성은 그 어떤 세력도 점거하지 않은 중립지대다. 청해성 북쪽은 사황성 영역이었고 남동쪽으론 사천, 그리고 동쪽으론 감숙과 맞닿아 있다. 세 거대세력의 완충지대인 것이다.

시작도 어려웠지만, 목표의 반을 돌파한 지점부터는 더욱 정신이 바짝 들었다. 청해성은 강호에서 운남만큼이나 미개척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몹들의 수준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일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찰 정도로 강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고수라 할지라도 까딱했다간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곳에서 누가 레벨 업을 하겠는가? 강호 최고수들의 레벨 업 장소로 설정된 곳이긴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해성에서 만난 첫 번째 몹은 낯익은 놈들이었다.

그렇다고 반갑지는 않았다. 놈들은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관도상의 일반 도적 떼였다.

옛날 생각하면서 방심했다면 놈들의 도끼질에 장작 패이듯 쪼개져 버렸을 것이다. 사풍을 통해 청해의 상황을 몰랐다면, 분명 그런 꼴이 됐을 것이다.

녀석들은 마치 예전 복우산의 마천채를 처음 사냥하던 때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그때보다 상황이 더 엄엄했다.

놈들의 경공은 나보다도 빨라서 도망도 칠 수 없었다. 더구나 내겐 그때처럼 믿음직스러운 조추산 형님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그래도 한때나마 뭇 강호인들의 두려움을 샀던 천하제일 일수경천이 아니겠는가.

녀석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그대로 맞부딪칠 공력은 없었지만, 그 공격을 흘려버릴 능력은 있었다. 실제 빠르기는 미치지 못했지만, 신안(神眼)을 통해 놈들의 공격로를 읽을 수 있었다.

신안과 유(流)자 결이 결합되어 미꾸라지처럼 놈들의 틈을 파고들 수 있었고, 묘(妙)자 결을 이용해 놈들을 상잔(相殘)시킬 수 있었다. 용문객잔의 혈투 이후로 난 NPC의 무위를 믿지 않게 되었다. 하물며 이런 산적들 따위에게 어찌 겁을 먹겠는가.

땀에 흠뻑 적셔질 정도의 혈투를 치르고서야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고생한 걸로 치면 놈들 하나하나는 거의 최절정급에 맞먹었다.

하지만 놈들이 떨어트린 아이템의 수준은 결국 녀석들의 본질은 산적이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관도엔 고급 방편산, 고급 낭아곤 따위의 잡템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서녕 가는 길은 마치 지옥행 열차를 탄 기분이었다.

평소 어느 정도 레벨이 오르고 나서는 감히 언감생심 덤벼 볼 생각조차 못해본 산적들이 기회랍시고 달려들었다. 매번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치르고서야 간신히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편했다. 날 이렇게 고생시키는 녀석들이라면 언제 뒤에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저 구대문파 놈들을 충분히 쫓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성이 21 증가했습니다.]

[레벨이 403에서 404로 올랐습니다.]

“호오. 힘든 만큼 경험치는 쏠쏠하다 이건가?”

피곤이 가시는 기분이다. 감숙에선 1레벨 올리기가 고욕 그 자체였었는데, 이곳 청해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새벽같이 일어나 접속하고 나서 단 일 분도 쉬지 않은 채 오로지 강호만 하고 있었다. 그 덕에 지금은 지평선 멀리서나마 서녕성의 윤곽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직선거리로 치면 겨우 네 시간도 안 되는 난주와 서녕 사이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여덟 시간이나 걸렸다. 모두 이 망할 우악스런 도적 떼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짓도 끝이다. 조금만 더 달리면 드디어 일수경천 조연의 난주 대탈출 작전이 완료되는 것이다!

“좀만 가면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지.”

여태 굶었다. 게임도 밥을 먹어야 할 수 있다. 배고파 죽겠다.

다시 경공을 불러일으키고는 관도를 차고 뛰었다.

지평선에 껌 딱지처럼 찰싹 붙어 있는 것 같던 서녕성이 조금씩 키를 키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시가 가까워서인지 도적 떼의 출현은 더 이상 없었고, 드디어… 드디어! 도시의 완벽한 전경(全景)을 볼 수 있게 됐다.

서녕성은 난주성과 동일한 구조의 토성(土城)이었다. 내가 서녕에 도착했을 때는 당연하게도 성의 동쪽이었고, 때문에 내부로 진입하기 위해선 성벽을 빙 둘러 남문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을 만난 건 그때였다.

아치형 남문 주위엔 갈의(葛衣)를 걸친 인물들이 서 있었다. 처음엔 모두 NPC들인 줄 알았다.

갈의라는 건 미적 감각이 결여된 사람들이나 입을 물건이다. 유저들이라면 절대 입지 않을 정도로 촌스러운 물건이다.

하지만 간혹 미적 감각이 제로인 사람도 만날 수도 있는 게 세상. 그것도 일곱 명 전원이 그런 인간들로만 구성될 수도 있는 게 강호라는 세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성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젊은 사내가 대열 앞으로 한 발짝 튀어나오더니 인사를 건네 왔다.

젊은 사내는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뱁새눈과 얇은 입술이 잔혹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 독사를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취한 행동은 이미 지척인 성문을 궁신탄형의 수법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엇!”

“저, 저!”

다급한 경호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고, 날 막으려는 동작들이 취해졌다. 하지만 그들이 늦었다.

내 몸은 이미 성문을 통과해 서녕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공격을 한다면 서녕성에 주둔한 관군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난 최후의 저지선을 뚫고 탈주에 성공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엔 간혹 미친놈들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응?”

녀석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일제히 손을 뿌렸다. 놈들 손을 떠난 희고 검은 물체들이 날 향해 쏘아졌다. 암기였다.

놈들은 분명 나보다 빠를 테고, 원거리에서 암기를 쏘아낼 수 있었다. 등을 보이는 건 내 패배를 의미했다.

탓!

바로 자리를 박차고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뿌린 암기는 철접(鐵蝶), 철질려(鐵?藜), 그리고 단혼사(斷魂沙) 따위였다.

세상에 이런 종류의 암기 무공을 구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뿐이다.

사천당문(四川唐門)!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놈들에게 달려들었지만, 손은 애꿎게 허공만 그었다. 놈들은 그사이에 뒤로 수삼 보나 물러섰고, 재차 암기를 날렸다.

온갖 종류의 암기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시야를 가득 메웠다.

속도도 방향도 제각각인 일종의 만천화우였다. 금강저와 천잠보의를 지니고 있었다면 이쯤이야 간단히 무시하고 돌진할 수 있을 텐데 지금 난 완전히 빈손, 빈 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겨우 방자 결과 유자 결을 믿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샤샤샤샥! 피피픽- 다닥- 따다당!

빗살처럼 암기들이 흘려 가고 튕겨 갔다. 원체 많은 수였던지라 개중의 몇 개는 방어를 뚫고 몸에 꽂히기도 했다.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 한들 놈들의 공격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난 또 한 번의 사망을 예감했다. 놈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직 놈들은 주특기인 독공은 사용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고슴도치처럼 웅크려 놈들의 공격을 버텨 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만!”

아군인가? 아니면 또 다른 적의 출현인가?

암기 세례는 고함 소리와 함께 멈췄고, 녀석들은 날 에워쌌다.

뒤돌아보았다.

허허! 산 넘어 산이라더니. 늑대 무리에 호랑이가 가세했다.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이였다. 그땐 적이 아니었지만 이젠 적이었다.

지그시 날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조 문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조금은 미안합니다.”

그는 사천 무림 연합의 맹주이자, 당문 소속 유저 중의 최고수 강호제일이었다.

강호제일이라면 강호 공식 랭킹 5위의 실력자. 아니, 이젠 랭킹이 떨어진 나와 자리를 바꾸어 4위에 랭크되고 있었다. 거기에 독과 암기를 쓰는 고수들이 실제 랭킹보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는 걸 생각하자면 공갈대사나 현운자보다 뛰어난 고수일지도 몰랐다.

그와는 불과 한 달 전에 사천 연합의 힘을 빌리기 위해 당문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비록 힘은 빌리지 못했지만, 오늘 이렇게 칼을 겨눌 정도로 헤어지지는 않았었는데…….

“왜 나를 적대하는 겁니까?”

지금 당문이 날 대하는 태도는 이해 안 되는 처사였다.

오히려 저들은 암중으로 날 응원해야 했다.

저들이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소요파는 해산된 지 오래였고, 나는 악에 받친 복수자다.

그들의 향후 경쟁자인 하남 무림 연합을 괴롭혀 줄 방해꾼을 지원해야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가.

도무지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전, 조연 님을 적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싫어하는 감정도 없구요.”

강호제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전에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진중했다.

평소 말을 아끼는 성격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어물쩍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 그도 알고 있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전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천하제일 자리를 엽사 같은 놈에게 줄 수는 없다고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기가 찼다. 이 작자는 머리가 나쁜 것인가, 아니면 자기합리화의 천재인 것인가? 천하제일이라는 허명이 그렇게 좋다면 엽사를 찾아갈 것이지 왜 내게 오는 것인가?

하지만 굳이 논리를 따지기엔 내 꼴이 더 비참해질 뿐이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놈은 뒤돌아 걸어가고 있었다. 암기를 뿌리기에 적절한 거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핑계는 중요치 않았다. 이미 우린 돌아설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이 자식은 나쁜 놈이었다. 졸개들에게 당해 체력이 깎인 상태인데 먼저 선공을 하겠단다. 암기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거리까지 만들어놓고 말이다.

시작은 당문 비전의 철질려였다.

졸개들은 거무튀튀한 철질려였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퉁겨 낸 철질려는 짙은 녹색의 오러로 덮여 있었다.

‘독강(毒쾝)?’

극독이 포함되지 않았다면 어찌 강기가 녹색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의심 따윈 하지 않았다. 방어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몸을 반사적으로 땅바닥에 굴렸다.

강호제일이 시전한 무공은 독강이 맞았다. 구경하던 당문 제자들이 우두머리의 진면목을 처음 본다는 듯이 크게 외쳤다.

“와우! 독강이다!”

“헉! 벌써 독강을 배웠단 말이야?”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주위의 반응에 의기양양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싸움을 벌이는 우린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상황은 일초 일초에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철질려는 그저 내 반응을 보는 수준이었을 뿐이다. 첫 수가 무위로 돌아가자 이번엔 혈접(血蝶)이 뒤를 이었다.

핏빛처럼 붉은, 나비 모양의 면철(面鐵)들이 괴이한 움직임으로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어떤 건 빨랐고, 어떤 건 느렸다. 그리고 그 모든 혈접들엔 독강의 녹색 오러가 덮여 있었다.

혈접들은 봄날 아지랑이에 몸을 떠는 나비처럼 너풀너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의도가 불분명했다. 날 공격하진 않고 그저 주변 공간을 떠돌기만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잔뜩 곤두선 상태로 억겁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강호제일은 또 무슨 수를 계획하고 있는지 손을 품 안에 집어넣은 상태로 날 노려보고 있었고, 수십의 혈접들은 놀러 나온 것처럼 내 주위를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들의 몸은 굳은 상태로 기회를 노리고만 있었고, 오직 혈접들만 움직이고 있었다.

상황은 강호제일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시작부터 거리를 제압당한 난 손해를 막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제 시간마저 자신 편으로 돌렸다.

긴장으로 뒤틀린 근육이 점차 고통으로 변해갔다.

‘힘들군.’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몸이 굳어 제때 반응을 보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혈접들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그때였다. 눈앞에서 노닐던 혈접이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춘 채 고정된 것이다. 처음이 느렸지 이후는 빨랐다. 다른 혈접들도 동일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핀으로 고정시킨 박제처럼 혈접들이 날개를 활짝 편 채 허공에 멈춰 섰다.

‘폭발인가? 아니면 쇄도?’

긴장은 더욱 증폭됐고, 머릿속에선 경종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그때였다.

“끝났군.”

싸움이 벌어진 이래 처음으로 강호제일이 입을 열었다.

“잘 가시오, 조 문주.”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탈혼(奪魂).”

강호제일의 나직한 외침과 동시에 난 붉은빛 속으로 빠져 들었다.

[혈접비기 탈혼(奪魂)이 발동됐습니다.]

[독 내성이 절정 미만입니다. 사망합니다.]

[강호제일 님에게 죽었습니다.]

‘이런 개사기…….’

그렇게 난 강호 생활 세 번째 죽음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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