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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장. 엽사 (45/62)

제43장. 엽사

“그럼 다 찾으신 겁니까?”

너부데데한 얼굴의 중년 사내, 황금전장 난주 분점주가 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아직요. 혹시 여기서 물품 배달도 가능합니까?”

중원표국은 황금전장과 같은 그룹의 계열사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다.

“물론입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융통성이 있어야 하죠.”

“그럼 제 계좌에서 일천만 냥 빼서 사풍이라는 사람에게 입금시켜 주세요.”

“네. 그런데 어느 분을 말씀하시는지?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이 여덟 분이나 됩니다만.”

그나마 다행이다. 여덟 명밖에 없다는 게.

“감숙 출신이고 성별은 남자, 그리고 지금은 요동 지역에 있을 겁니다.”

전장주가 알아들을 만한 걸로만 골라 말했다. 그러자 그가 감탄사를 내뱉으며 되물었다.

“아! 그분이라면 잘 알고 있습죠. 표풍객(漂風客) 사풍 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표풍객? 사풍이 그새 별호를 얻었단 소린가?’

별호를 얻으려면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를 단독으로 죽여야 한다. 그것도 일반 몬스터가 아닌 보스급의 유니크 몬스터를 잡아야 했다.

나 같은 경우에도 과거 특급 현상 수배범 무영신투를 잡았을 때, 그때 한 번만 별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 별 효과도 없는 별호를 획득하는 건 어떻게 보면 초절정 무공 비급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사풍이 벌써 별호를 획득했다니?

‘역시 그도 놀고만 다니는 건 아니었군.’

“네, 그 사람이 맞습니다.”

표풍(漂風)이라는 별호에 가장 잘 어울릴 사람이 사풍 외에 누가 있겠는가?

은행 간 계좌 이체가 되는 세상이 아닌지라 표물 운송비로 10만 냥이라는 거액의 수수료를 지불하고서야 사풍에게 돈을 입금할 수 있었다.

문파를 해산하면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폐업 정리가 이렇게 시간 잡아먹는 일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동안 레벨 업에 치중하느라 창고에 쌓아두기만 했던 아이템이 수백 개가 넘었다. 순전히 내 개인 소유물이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엔 문파 운영비 명목으로 문도들에게 강탈한 골동품이나 보물들도 상당했다.

잡템들이야 어느 상점에서나 동일한 가격으로 팔 수 있으니 일종의 현금과 다름없었지만, 문제는 재료 아이템과 무공서, 병장기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소요파가 망하게 됐기 때문에 이 아이템들을 수월히 팔아치울 수 있었다.

소요파가 문파대전에서 밀리기 시작한 이후로 감숙성엔 섬서, 하남 등지에서 유저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과거 사황성의 격문을 보고 유입됐던 마인들의 수효는 저리 가라였다. 대문파 소속의 유저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부 조직인 중소 문파들, 그리고 그 지역의 일반 유저들이 하루에만 수백 명씩 쏟아져 들어왔다.

어쩌면 소요파 멸문이 특정 지역에 쏠린 인구 과밀 현상이 해소되는 시발점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들에게 말만 절정이고 최절정인 비급을 팔아치운 것이다. 물론 생각 없이 최고급 용독술이나 고급 부적술 이상의 비급을 뿌릴 순 없었다. 그것들을 뿌리는 순간 소요파의 재건은 물 건너간 셈이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금강조(金剛爪)나 무영각(無影脚), 발도아(拔刀牙) 따위의 무공 비급이 수백, 수천만 냥에 팔려 나갔다.

그렇게 난주 상점가에서 일주일간 죽치고 장사만 했다.

그리고 모든 정리가 끝났을 때 내 손에 쥐어진 액수는 겨우 57억 냥. 진득이 시세 조절해가면서 제값 받고 판다면 족히 100억 냥은 만들 자신이 있었지만 그러려면 한 반년은 장사만 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접을 때도 됐다. 이미 고목존자를 잡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곧 소문이 돌 것이다. 그 아이템들의 가치는 거의 쓰레기급이라고.

하여간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장사를 접었다. 50억 냥은 전장에 예치하고 나머지는 소요파 문도들에게 부쳐 주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 돈 가지고 무슨 짓을 하든 그건 그 사람들 마음이다.

“그럼 슬슬 가볼까? 장사만 했더니 몸이 찌뿌드드한 게 여엉 짜증나는구만.”

행낭이 터질 정도로 여행 물품을 가득 채웠다. 배고플 때 먹을 육포가 한가득, 아플 때 먹을 환혼신단이 또 한가득이다. 거기에 폼 나라고 허리엔 최고급 청강검을 비껴 찼고, 가슴속엔 피독주, 야명주가 탑재 중이고 천잠보의까지 걸쳤다.

속 내용은 그렇지만 겉으로 봐서 과거 소요문주 조연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명병기 금강저는 행낭에 고이 모셔 둔 데다 소요파를 떠올리게 하는 청학이 새겨진 도포는 벗어 던지고 민무늬 낡은 청포를 걸쳤다. 거기에 문파 해산으로 얼굴도 살짝 맛이 간 상태다.

목적지는 인적 없는 두메산골. 천산(天山), 혹은 곤륜산(崑崙山)이라고 불리는 곳.

처음 가보는 생소한 그곳을 파도가 건넨 일천만 냥짜리 정보 하나만 믿고 찾아갈 예정이었다.

그렇게나 한산했던 난주성이 여느 중원의 대도시들처럼 행인들로 북적거린다. 서역풍의 복색을 한 외국인과 낙타 떼가 이곳저곳에 묶여 있다. 나로선 너무도 익숙한 난주의 풍경이지만 이제 갓 정착을 시작한 중원의 유저들에겐 그 모든 게 신기한가 보다.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이곳을 눈에 새기면서 천천히 난주성 남문으로 걸어갔다.

‘응?’

그런데 둔감한 사람이라도 알아차릴 그런 이상함이 느껴졌다.

난주엔 성문이 두 곳 있다. 북문과 남문. 보통 사냥터로 가기 위해선 북문을 이용하고, 남문은 다른 지역으로 갈 일이 있는 사람만 이용한다. 요 며칠 간은 타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꽤 됐던 탓에 남문 이용자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것도 난주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뿐,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게 정상일진대… 오늘따라 유독 눈에 잡히는 사람들의 행로가 나와 같았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절대 정상적이지 않았다.

‘역시 시작한 것인가?’

구대문파 녀석들이 날 이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던 바다. 다행히 떠나보낸 문도들에겐 아직 어떤 해코지도 없었다지만 문주인 난 다를 것이다. 내게 죽은 랭커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속으론 긴장도 하고 그만큼 준비도 단단히 했지만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다. 묵묵히 남문을 향해 갔을 뿐이다.

남문을 통과했어도 별다른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하긴 여기서 일 벌이면 관병이 출동하겠지.’

경공을 일으켰다. 부우웅 소리와 함께 바람이 머리를 훑고 지나간다.

탓!

땅을 박차고 신형을 앞으로 쭈욱 뽑아 올렸다.

12성의 유운신법은 그리 대단한 경공이 아니다. 구대문파엔 이보다 나은 경공술이 무수하다. 그렇지만 어중이떠중이 낭인들의 것보단 나아서 십여 분을 내리 달렸을 땐 추격자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중간 중간 방향을 바꿔가면서 한참을 달리고서야 드디어 판 벌이기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관도에서 벗어난 지는 한참 오래전. 의도하지 않고는 절대 찾아들 사람이 없을 한적한 공터에 도착한 것이다.

경공을 멈추고 신형을 곧추세웠다. 뒤돌아보니 따라오던 사람들 수가 또 줄어 있다. 나와 같은 속도로 달리다 10보 밖에서 멈춰 선 이들이 서른 남짓, 그리고 살짝 뒤처진 속도로 따라붙은 이들이 스물 정도 돼 보였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다.

뒤처졌던 놈들은 곧 도착했고, 난 전투 준비를 마쳤다.

신안을 발동시키고 행낭에선 금강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자, 그럼 시작해봅시다!”

녀석들은 전혀 겁먹은 기색이 없는 날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다.

“아! 구경하러 왔다는 핑계는 하지 맙시다. 딱 다섯 세줄 테니 자신 없는 사람들은 맘 고쳐먹으세요.”

“하나! 다섯!”

기회는 충분히 줬다.

“갑니다!”

구경하러 왔다? 그건 누가 죽어 아이템이라도 떨어뜨리면 날름 주워 먹을 심보밖에 안 된다. 그런 박쥐 같은 놈들을 고이 보내줄 정도로 난 착하지 못하다.

바로 짓쳐 들어가자 녀석들이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쪽수를 믿는 듯 당당하게 맞부딪쳐 오는 놈들도 있었다.

쾅! 취리릭- 팍!

큰 소리 한 번 울리자 겁 없이 돌진해온 놈들은 여지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묘자 결의 위력.

몸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싸움이라는 게 꼭 쪽수 많다고 유리한 건 아니다. 늑대 1백 마리라면 충분히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모두 제 역할을 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말 그대로 어중이떠중이. 미리 합격진이라도 연습해놓지 않은 이상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계수(溪水)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숲을 휘젓는 바람처럼, 놈들 틈새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굳이 금강저를 들이대 공격을 할 필요도 없다. 오면 오는 대로 묘자 결로 슬쩍 경력(經力)을 흘려 보내주면 된다.

녀석들은 제 힘을 주체 못하고 쓰러지고 난 다시 바람처럼 다른 놈들 속으로 흘러갔다.

“피하지 말라고! 몰아넣기만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어떤 녀석인지 몰라도 착각이 심하다. 설령 포위에 성공한다고 해도 놈들이 날 어찌해볼 능력이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심결육합권의 최강의 비초(秘招)는 무진이 아니라 묘자 결 같다. 겨우 일류급밖에 되지 않는 불영보를 밟지만 신안과 묘자 결이 결합되니 난 완전 기름 바른 미꾸라지나 다름없었다.

한 5분쯤 활개치고 돌아다니자 드디어 놈들의 기세가 움츠러드는 게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하기야 이젠 몸성히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이 겨우 10명밖에 남지 않았으니 겁먹을 만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연기가 시작됐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니 이젠 조금씩 허점을 보여 줘야 했다.

“좋아! 이제 저놈도 지쳤다! 좀만 더 힘내봅시다!”

가끔씩 공격도 맞아주면서 힘겹게 놈들을 상대했다. 물론 녀석들의 공격은 간지러움 그 이상은 되질 못했다. 천잠보의에 금강저까지 들고 있는데 녀석들의 평범한 공격이 데미지나 줄 수 있을까?

절정급 무공이 아닌 한, 강기를 발출할 실력이 못 되는 한 내게 데미지를 주겠다는 건 요원한 일이다.

열이 아홉이 됐다가 곧 다섯이 됐다. 내 연기가 얼마나 탁월했는지 놈들은 이젠 주위에서 제대로 서 있는 동료 보기가 불가능해졌는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둘만 남았을 때 연기를 때려치우고 강기 먹인 충자 결로 녀석들의 희망에 배신을 때려 주었다.

“끄… 윽… 사기… 꾼…….”

흠흠, 저 소리를 또 듣게 되다니. 하도 자주 들어서 이젠 귀에 못이 박히겠다.

공터엔 시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50명이 몰려와서 나 하나 잡지 못하고 전멸했다.

“겁 좀 줬으니 이젠 쉽게 도발할 수 없겠지?”

절정급 무인 하나 끼어 있지 않는 한심한 추격대라지만 오십이란 숫자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다.

이제 날 잡고 싶으면 못해도 1백 명 이상의 인원에 절정급 이상의 고수를 동반해야만 가능하다는 걸 놈들도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내 행선지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1백 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할 수는 없을 테니 내가 귀찮음을 살 일은 없으리라.

그런데 녀석들이 오십 가지고 날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게 그들의 착각이었다면, 내가 놈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건 내 착각이었다는 걸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곤륜산은 청해성에 있다. 난주에서 곤륜을 가기 위해선 쭉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감숙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한 방향만 보고 달릴 수가 없었다. 조용히 곤륜산에서 폐관수련을 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러다 내 행보가 읽히기라도 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관도를 벗어나 인적 없는 들판만 골라 가욕관 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추격대와의 첫 전투가 벌어진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두 번째 추격대를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 몰려든 놈들은 앞서의 어중이들보다 더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 수도 겨우 스물 남짓. 아직 놈들은 첫 사망자들의 경험담을 듣지도 못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녀석들의 전멸일 수밖에 없었고.

두 번째 전투를 치렀을 때만 해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오늘의 수고로움이 내일의 편안을 보장해준다는 뭇 선현들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전투가 끝나고 겨우 30분도 되지 않아 소림 척살단의 공격을 받게 되자 슬슬 귀찮음과 짜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림 척살단(그들 말로는 혈승대(血僧隊)라고 한다)은 앞서 놈들보다 짭짤한 재미를 선사해주었다. 비록 상점에 팔아버릴 정도로 후지긴 했지만 아이템도 떨어뜨려 주셨을 뿐 아니라, 유저들 잡느라 폭락한 명성치도 소폭이나마 상승시켜 주셨다. 앞으로 날 찾는 놈들이 죄다 구대문파 척살단이었으면 하는 욕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소림 놈들 다음은 이름 좀 날리는 놈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물론 혼자서 도전하는 간 큰 놈들은 없었다. 못해도 셋이었고, 보통은 다섯이었다. 놈들은 모두 절정무공 소유자였다. 개중엔 심결 무공을 익힌 녀석도 있었고, 최절정급에 육박한 놈들도 있었다. 거기에 잔머리꾼들도 심심찮게 출현했다.

“제길. 이놈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평범한 성질머리의 소유자라면 진즉에 접속 종료했을 것이다. 오전엔 그래도 얘들 잡는 맛이 쏠쏠했는데, 그것도 오후에 들어선 여엉 꽝이다.

얼마 전부턴 죄다 나보다 경공이 뛰어난 놈들만 나왔다. 놈들은 온갖 지저분한 짓거리만 골라서 했다. 산공독은 기본이고, 어디서 배워먹은 싸가지인지 독암기만 뿌리고 그 잘난 경공으로 도망을 가버리곤 했다.

피독주가 없었다면 난 일찌감치 감숙의 이름 모를 들판에서 해골로 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발밑엔 천잠보의에 맞아 후두둑 떨어진 독질려가 수북했다. 암기를 뿌린 녀석들은 저만치 떨어져서 날 놀리듯이 쳐다보고 있고.

제 놈들 딴에는 내가 산공독에 당해 내력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나 본데, 아쉽게도 녀석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피독주엔 산공독마저 무마시키는 효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 자식들아! 이따위 잡짓은 때려치우고 한판 붙자니깐! 쪽수도 많으면서 뭘 그리 겁내!”

“메롱!”

망할 자식들.

속 터지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놈들 입장에선 잘하고 있는 셈이다.

그나저나 저 자식들은 어떻게 내 위치를 용케 알아내 찾아오는 걸까?

‘고민은 나중에 하자. 지금은 저 자식들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나보다 잽싼 놈들이니 쫓아갈 방도는 없다. 그러니 놈들이 다가오게 만드는 수밖에. 다시 초절정 사기꾼 연기가 시작됐다.

“으… 으윽……. 개자식들.”

그러고 쓰러졌다. 진짜 독에 당한 것처럼.

“크크크, 질긴 놈. 드디어 뻗었구만?”

“야, 아직 죽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명성치도 안 떨어졌어. 내공만 다 소모됐나?”

“뭐? 어라? 정말 그러네? 저 새끼 혹시 죽은 척 연기하는 거 아냐?”

‘제기랄, 의심도 많은 놈들.’

“그래도 명색이 랭커였는데 그런 조잡한 수를 쓰겠냐?”

‘그래, 설마 내가 그런 조잡한 수를 쓰겠어? 제발 믿어줘라.’

놈들 대화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고 있는데, 드디어 녀석들 발걸음이 내게로 향하는 게 보였다.

‘그나마 두 놈뿐이라서 다행이네.’

녀석들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한 놈이 확인 사살이라도 할 것처럼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위장으로 여겼으면 다가오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찔러보겠다는 건 뭔가?

하여간 울 어머니는 밥은 제때 챙겨 먹으라고 하셨다.

“까꿍!”

선풍각을 올려 차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헉!”

녀석은 얼마나 놀랐는지 치켜든 검을 황급히 치웠다. 그냥 그걸로 찌르지 이제 와서 빼는 건 또 무언가?

그런데 녀석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충분히 놀랐을 텐데도 그 짧은 순간에 도망갈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 낚은 놈인데, 놓치면 안 되지!’

선풍각은 빗나갔지만 독사출동의 수는 제대로 먹혀 들어갔다.

독사가 쏜살같은 기세로 굴 밖을 튀어나오듯 금강저가 쾌속무비한 속도로 놈의 등판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억’ 소리를 흘리며 금세 쓰러지기라도 할 듯이 휘청거렸다.

여태 이 자식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곱게 보내주기 싫었지만 여기서 더 머무적거리다간 또 무슨 경우를 당하게 될지 모른다.

아직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노리고 육합권을 연달아 펼쳤다.

거의 한 시간이나 끌었던 신경전에 비하면 결말은 너무 싱거웠다.

녀석은 맞서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도주에만 집착하다 단 한 번의 반항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엎어져 버렸다.

그때, 다른 녀석은 내가 일어서는 걸 보자마자 잽싸게 도망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50보가량 떨어진 곳에서 동료의 사망을 훔쳐봤다.

그러다 친구가 죽는 상황을 끝까지 다 보고는 그때서야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빠른 경공술을 믿고 그런 여유를 부린 것이겠지만, 그게 놈의 죽음을 재촉했다.

녀석은 까먹고 있었다. 내가 무진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허점이 다 공개되어버린 무진이지만, 저렇게 뒤만 보이고 줄행랑치는 녀석에겐 여전히 효력이 있었다.

쓩, 소리를 내며 날아간 강기 덩어리가 놈의 등짝에 격중되면서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놈은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된 건지도 모를 것이다. 겨우 빛에 감싸이고선 바로 로그아웃되어버렸을 테니.

그렇게 고단했던 전투를 끝낸 난 바닥난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 소환단을 물고 운기 조식을 취했다.

그나저나 큰일이다. 지금이야 녀석들이 실수한 탓에 무진으로 끝낼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매번 이런 행운이 따라주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뭇매엔 장사 없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천리종무영만 배웠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을 텐데.

“흐유, 그나저나 미치겠네! 나 정말 곤륜 갈 수 있는 거 맞아?”

난주성에서 나온 이후로 벌써 여섯 번이나 전투를 치렀다. 놈들이 날 괴롭히는 수법은 갈수록 지능적으로 변했고, 이번엔 사기를 쳐야만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몰렸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가보는 데까진 가보자.”

나도 피곤하지만 허허벌판에서 나 찾아다니는 놈들은 더 피곤할 것이다. 이건 인내력 싸움인 것이다.

내 독기가 더 강할 거라는 그 희망만 믿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길을 잡아 한 시간가량이나 되었을까? 슬슬 놈들이 나올 때가 되었다는 긴장감과, 드디어 놈들이 추격을 포기했다는 희망이 교차되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역시 세상은 넓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칠보단장산에 중독되었습니다.]

경공을 써서 달리는데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발을 멈추고 시스템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칠보단장산(七步斷腸散)이란 이름도 심상치 않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독에 걸렸다는 것.

피독주를 소지하고 있는데도 독에 걸렸다는 건 칠보단장산은 못해도 절정급의 독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은 드디어 내 도주행이 끝났다는 것도 의미했다. 절정급 이상의 독은 독문 해독약으로만 풀 수 있으니.

중독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붉은 시계가 나타났다. 시계는 내게 남은 시간이 겨우 3분밖에 남지 않았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어차피 죽을 거 무덤 동료라도 만들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독을 푼 녀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오라고! 어차피 죽으면 아이디 들통 날 텐데 숨긴 왜 숨어!”

소리쳐 봤지만 녀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었다. 독은 이미 몸속을 파고들어와 체력과 내공을 소진시키고 있었다. 해독약이 없는 한 운기로 버티는 수밖에.

소환단을 먹고 가부좌를 틀었다. 반야신공의 황금빛 서기가 몸을 감싸고 곧 떨어져 가던 체력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절정급 내공심법인 반야신공이라면 칠보단장산을 해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으로 체내공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운기를 통해 회복되는 게 더 빨랐으니까 말이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갑자기 파공성이 들려왔다.

그리곤 곧 강전(强箭)이 날아오더니 푹 소리를 내며 가슴에 꽂혔다.

[운기 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곧 주화입마 상태에 빠집니다.]

시스템 메시지 출력과 함께 운공이 강제로 중지되었다. 반야신공이 발산하는 황금빛 기류는 바람에 쓸리듯 사라져 버렸고, 그 사이로 강전이 다시 날아왔다.

푹- 푹!

강전 두 대가 사정없이 복부와 가슴에 꽂혔다. 세 대의 화살을 급소에 맞자 체력이 크게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 다시 화살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난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주화입마에 빠진 이상 그 어떤 행동도 무의미했다.

전투 중에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그 순간 이미 시체와 다름없다고 봐야 했다. 내공은 아예 사용하지 못하고, 모든 능력치가 10분지 1까지 떨어진다. 애당초 회피가 안 되니 피하려고 맘먹을 생각도 못한 것이고, 극강의 방어력도 저 강전 앞엔 종잇장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내 목숨을 앗아간 것은 강기에 덮인 강전이었다. 푸른 강기처럼 보이는 화살은 정확히 내 목을 노리고 쏘아졌고, 그게 내가 죽기 전에 봤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엽사 님에게 죽었습니다.]

* * *

“아, 씨팔!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 난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거칠게 고글을 벗어 던졌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 왜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나만 가지고 지랄이야!”

짜증 섞인 고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우씨! 에이, 씨팔!”

한참 동안 욕이 계속 나왔다.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무명소졸한테 죽은 것도 그렇지만, 끝내 그놈 면상조차 보지 못했다는 게 더 열 받는다.

더구나 독이라니! 대체 놈이 무슨 수로 날 중독시켰을까?

경공을 쓰면서 계속 뒤를 확인하고 달렸다. 내 뒤를 몰래 따라오다가 독을 뿌린 건 아니라는 소리다.

아는 모든 수를 대입해보았지만 답을 알 길이 없었다.

한 번 당했는데 두 번 당하지 말란 법이 없다. 영문도 모른 채 죽는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실감해야 했다.

재접속까지는 네 시간이나 남은 데다 밤이 늦어서 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암담한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젯밤엔 흥분으로 잠을 이루기 힘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격정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대충 끼니를 때우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겪은 일은 모든 게 비정상적이었다. 난주를 벗어나자마자 정신없이 쫓기고 또 싸우느라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날 쫓았던 사람들은 구대문파 문도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일반 유저들이었다. 일반 유저들이 겁도 없이 강호 최고수일지도 모를 날 쫓는다?

설령 쪽수를 믿고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강호의 극심한 사망 페널티를 생각하면 두 번째 전투 이후에 도발한 놈들의 생각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첫 전투 이후로 도발해온 놈들의 수는 끽해야 10명가량밖에 안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선 풀어야 하는 점은 일반 유저들이 날 쫓는 이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누군가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음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유저들이 죽음 정도는 간단히 여길 정도의 상당한 액수로 말이다.

어차피 그거야 확인해보면 알게 될 일이다.

“우선은 지금 내 위치부터.”

지금은 게임에 접속하는 것보다 정보 취합이 더 중요했다.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서 키워드를 입력하자 수백 개가 넘는 게시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역시…….”

보통 고수들은 홈페이지에 글을 잘 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사흘 전에 개방의 이룡이 올린 글이 가장 조회 수가 많았다.

<번호:5,718,130 작성자: 이룡

개방 후개 이룡입니다. 긴말 않고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멸문한 소요파 문주 황금룡 조연 목에 현상금 걸었습니다. 금액은 1억 냥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소림의 공갈대사 님, 화산의 무룡 님도 동일 액수로 걸어놓았으니 모두 합쳐 3억 냥짜리입니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 더 추가해드리겠습니다. 조연을 처음으로 잡으신 분에겐 개방의 절정급 무공 비급을 드리겠습니다.

조연이가 무진 스킬을 떨어뜨릴 때까지 무한 척살할 테니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흠…….”

갑갑했다. 이룡은 날 무한 척살하겠다고 써놨다. 그렇다면 어제 날 죽인 엽사라는 놈이 현상금을 타먹었다고 해도 지금 또 현상 수배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는 말이 된다.

“거액에 비급까지 준다니 인간들이 그렇게 몰려든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아니구만.”

절정급 비급은 아직도 일반 유저들에겐 꿈같은 물건이다. 더구나 같은 절정급 비급이라도 개방의 것이다. 허접한 비급과는 질이 다른 물건인 것이다.

“응?”

이룡이 올린 글에 비하면 조회 수가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유독 눈에 띄는 게시물이 있었다.

<번호: 5,719,313 작성자: 선견지명

강호 랭킹 게시판을 믿을 수 없다는 건 공통된 의견일 것이다. 결국 직접 붙어봐야 알 수 있을 건데, 그동안 통념상으로는 소림의 공갈대사나 무당의 현운자가 강호 최고수라고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일전의 소요파 문파대전에서 소요문주 조연이 보여 준 위세는 누구도 범접치 못할 가공할 경지였고, 다들 천하제일고수는 황금룡 조연이라는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물론 그때 죽었던 사람들이나 그들이 속한 문파에서 정상적인 심결 요결인 무진을 사기 스킬이라고 폄훼하면서 조연의 실력을 무시하는 일도 있긴 하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이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린 또 다른 영웅을 맞이해야 했다. 강호 최고수인 조연을 잡은 엽사라는 무명 캐릭터를 말이다. 비록 그가 독궤라는 레어한 아이템과 연환노라는 암기를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실력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조연이 금강저라는 보물과 무진이라는 남들에겐 없는 기술을 가지고 구대문파 고수들을 이긴 것과 동일한 조건인 것이다.

어제부터 올라온 여러 게시물을 보자면 엽사가 순수한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 같다. 다들 인정할 건 인정하는 자세를 보여 주었으면 한다.

지금 당장의 천하최고수는 엽사가 맞다. 훗날, 아니 오늘 당장이라도 조연이 엽사를 찾아 복수를 한다면 다시 조연에게 천하제일의 자리가 돌아갈 것이지만 말이다.>

“허허, 이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겨? 순위를 매기려면 제대로 붙고 난 다음에나 할 것이지, 안 보이는 데서 활이나 쏘는 놈보고 천하제일 자리를 주겠다고?”

당시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얼핏 선견지명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자 말이 맘에 안 든다고 해서 내가 답글을 달아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봤자 결국 패자의 변명으로 취급당할 게 뻔했다.

맘에 안 드는 글이었지만 최소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강호 홈페이지엔 아이템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기능은 없었지만 이미 소유자가 있는 아이템의 경우는 정확한 이름만 입력하면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강호 아이템 검색란에 독궤와 연환노를 쳐서 어떤 물건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독궤(毒櫃)

독이 담긴 상자. 사용하기 위해선 독을 탑재해야 한다. 매설 물품. 일회용

사용 제한:덫 설치(고급)

사용 제한:용독술(고급)

특이 사항:범위 안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게 해를 입힌다(매설자 포함).>

<연환노(連環弩)

기계식 노의 최종 진화형. 전국시대 귀곡자가 고안했다는 설이 있다. 노의 시간 제약이 없다(일반 활과 동일 속도로 발사할 수 있다).

공격력: 5,000

사용 제한: Lv 300

사용 제한:지능 100

사용 제한:힘 100

특수 효과: 노(弩) 수련 12성이 되면 연사(連射)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용 제한:강기성형 없이 강기전(쾝氣箭)을 사용할 수 있다(연사와 중첩 사용할 수 없다).>

꽤 특이한 물건들이었다. 천사교에서의 경험으로 강호란 단순히 무공만 쓰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이런 물건을 사용하는 인간이 있을 줄은 또 생각도 못했다.

“활도 아니고 노(弩)? 노 수련이라는 게 있다는 건…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무인이 있다는 소리? 거기에 덫 설치까지 있다면 결국 사냥꾼 클래스라는 소리네…….”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엽사라는 놈이 사냥꾼이라면 난 전투에 진 게 아니라 사냥당한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엽사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인정해야 했다. 랭커도 아니고 여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낭인 캐릭터지만 그는 충분히 강했다.

누구도 생각 못한 방식으로 강호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력만 믿고 까부는 이룡 같은 놈에 비하면 그는 온전히 제 실력으로 날 상대한 것이다.

반드시 복수할 대상이었지만 왠지 그가 싫지만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밖에서 볼일은 다 봤다. 오늘은 또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기다릴지 모른다. 잔뜩 기합을 불어넣고 강호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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