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2장. 일보전진, 이보후퇴 (44/62)

제42장. 일보전진, 이보후퇴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오늘만큼 그 말이 여실히 느껴지는 날도 없을 것 같다.

내일 있을 문파대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백발이 성성한 노도사(老道士)가 찾아왔다.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 긴 수염이 배꼽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데다 눈썹도 길게 늘어진 모습이 속세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노인이었다. 변변찮은 장식 하나 안 달린 남루한 청색 도포 소맷자락엔 희고 검은 음양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운자와 같은 문파, 무당파의 도사였다.

갑자기 들어온 노도사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순간 멈칫하는데, 나보다 먼저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현운자였다.

“어? 스승님!”

현운자가 깜짝 놀라 외쳤다. 그리고는 스승이라는 노도사를 향해 넙죽 절부터 하는 것이었다.

스승이라고는 섬겨 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그의 행동이 언뜻 과해 보일 정도였다.

현운자는 절을 하고, 노도사는 아무 말도 없이 제자의 배례를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

‘혹시 무당파에서 도움 주려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현운자를 이런 고수로 키워낼 정도라면 스승이라는 사람이 무당에서 맡고 있는 직책이 결코 낮지는 않을 터.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일 뿐이라는 걸 곧 알 수 있었다.

“현운아, 무당으로 돌아가자.”

‘저, 저 노인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두 눈 부릅떠진 건 나뿐이 아니었다.

현운자는 입을 크게 벌린 채 멍한 상태가 돼버렸고, 함께 있던 소요파 사람들도 숨을 죽였다. 현운자의 능력을 모르는 일도회 간부들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스, 스승님!”

“어허!”

제자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호통을 친 노도사가 이번엔 날 노려보았다.

“조 문주! 내 제자에게 속세의 먼지를 더 묻혀야겠소?”

노인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요파의 일은 소요파의 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 도사를 데려다 동도(同道)의 길을 걷는 도반들을 해치게 한 일을 모른다고 할 셈이오?”

“…….”

노도사는 공동파와의 문파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묻고 있었다. 그때 현운자는 노도사의 말대로 동도의 길을 걷는 도반에게 해를 입혔다.

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충분히 내게 따져도 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스승님, 그건 제가 원해서 한 일입니다! 조 문주에겐 죄가 없단 말입니다!”

내 침묵에서 위험을 느낀 것일까? 현운자가 고함을 치듯이 노도사에게 대들었다.

제자의 반항에 노도사의 얼굴이 대번에 붉으락푸르락해진다. 수염을 부르르 떨면서 화를 못 이긴 노도사의 입에서 결국은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현운! 정녕 파문이라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것이냐! 네놈 하나 때문에 지금 문파가 어떤 꼴인지 알고서 이러는 것이냐!”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마 그 꼴이 어떤 꼴인지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대(對) 소요파 전선에서 무당파가 빠진 이유는 현운자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현운자가 이렇게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있다지만 그는 역시 무당파 유저의 대표였고, 그에 걸맞은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무당파가 단풍의 계략에 휘둘리지 않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필경 단풍이라는 놈은 무당파만 홀로 빠진 그 이유를 알고자 했을 것이고, 결국은 현운자가 지금 소요파에 빈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쯤은 간단히 알아냈을 것이다.

무당파의 도사가 일개 중소 문파의 빈객으로 있으면서 같은 구대문파의 지위에 있는 공동파를 적대시한다? 노도사 말대로 당장 파문을 당해도 한마디 변명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파문이라는 말의 무게 때문인지 흉흉했던 취의청이 일순간에 싸늘해졌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가슴속에 무언가가 교차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파문 운운까지 온 마당이다. 게임은 끝났다.

가볍게 웃으며 현운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가세요. 파문당해 아무런 힘도 없는 현운자 님은 제게 필요 없습니다. 가서 때를 기다리세요.”

악수하자며 건넨 손을 현운자가 물끄러미 쳐다만 본다.

일수유가 억겁 같다. 조용히 내 손을 바라만 보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쉰다.

“휴우…….”

“어서요.”

“이것밖에 없는 걸까요?”

“네, 이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요.”

그래도 현운자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렇게 하지요.”

내민 손을 그가 맞잡는다. 체온도 느껴지지 않건만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림자 같던 그가 이젠 내 곁을 한동안 떠나 있으려 한다.

“하하! 이거 분위기 왜 이렇습니까? 조연 님! 현운자 님! 아직 갈 길 멀다니까요? 일보전진(一步前進), 이보후퇴(二步後退)란 말 모르십니까? 살아 있으면 됩니다. 강호만 접지 않으면 언젠간 다시 보게 된단 말입니다.”

헛웃음을 지으며 파도가 침울해진 분위기를 희석시키려고 나섰다.

“그래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고 그래요? 자, 자, 웃으면서 보내드립시다.”

파도의 행동에 광우까지 합세했다.

만약 어제 파도가 했던 말이 아니었다면 정말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그를 떠나보냈을 것이다.

비록 지금 벌어진 일 때문에 계획이 또 수정되겠지만, 어차피 현운자는 문파 외부인. 그가 없어도 소요파의 지난한 싸움은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현운자가 떠났다.

현운자를 데리러 왔던 노도사의 정체는 무당 장문인보다 한 배분이 더 높은 전대 장로였다. 그것도 단순한 장로가 아니라 장로 중의 우두머리인 대장로(大長老)였다.

도호(道號)가 양진(養眞)인 노도사는 현운자가 무당산에 오를 때부터 섬겼던 무공 사부였으며, 또 무당의 부적술을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이였다. 현운자는 그렇게나 대단한 양진자의 단 하나뿐인 전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이어 소요파의 운명을 결정지을 문파대전이 벌어졌다.

문파대전을 선포한 문파는 공동파, 개방, 화산파, 종남파, 소림파 5개 문파였다. 파도가 들려준 이야기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황금산장이야 문파가 아니니 그렇다 치더라도 하북팽가와 제갈세가가 빠진 것이다.

아마도 아직 유저 수장들의 세가에 대한 영향력이 문파대전을 결정할 정도로 크지 않았던 탓 같았다.

하지만 팽가와 제갈세가에서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비록 NPC를 동원하지는 못했지만 양 세가에서 출전 가능한 유저들은 전부 소요파로 몰려와 있었다.

아마 난주가 생긴 이래, 아니 감숙 역사상 그렇게 많은 캐릭터가 몰려든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이다. 강호 역사상 최대 인원이 참가한 문파대전이었다.

우리 쪽은 소요파의 일천 문도와 일도회의 일백 유저들이 소요파 내부에서 대기 중이었고, 바깥에서는 감숙의 중소 문파에서 지원 나온 일만 명가량의 NPC가 호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솔직히 그들에게는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다.

상대로 나선 5개 문파의 세력은 모두 삼만. 그중에 유저들만 해도 못 잡아 오천이 넘어 보였다. 유저 수로 비교하면 삼백 대 오천이었다.

문파대전 시작 전부터 소요파 정문 앞은 유저와 NPC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총관에게 일러 우릴 지원할 감숙의 중소 문파들을 일찌감치 불러 모았던 탓에 적아(敵我)조차 구분되지 않는 난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문파대전이 시작되었다.

정문은 문파대전이 시작됐다는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채 몇 초도 되지 않아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NPC들을 동원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들은 한판 싸움의 흥을 돋우기 위한 장식품들일 뿐, 문파대전은 시작부터 유저들끼리의 혈전으로 시작되었다.

“조금만 뒤로! 일도회 분들, 조금만 더 뒤로 오세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수천의 목소리가 한데 엉킨 터라 내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오천이 넘는 유저들 중에서 문파대전을 겪어본 사람이라고는 오직 소요파 이백과 공동파 몇 명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거라고는 수십 번에 걸쳐 문파대전을 치른 우리 문도들의 경험뿐이었다.

다행히 내 의도를 알아챈 문도들이 일도회 사람들을 추슬러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방(防)! 방! 벽(壁)! 벽!”

2선에 자리한 술사들이 그들의 후퇴를 돕는 부적을 정신없이 날린다.

“됐습니다! 그렇게 자리를 지켜 주세요!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이제야 진형이 갖춰졌다.

문파 정문을 틀어막는 고전적인 수법은 지금 상황에 맞지 않았다. 적들은 NPC가 아니라 유저들이다. 그런 수를 썼다간 순식간에 일점 집중을 당해 죽어버릴 것이다.

지금 우린 정문을 입구로 삼는 커다란 주머니 같은 진형을 만들었다. 일명 포낭진(包囊陣). 적들은 정문 때문에 허리가 잘록한 호리병 같은 모양새였다.

외부의 적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안쪽의 삼백 아군은 주머니 안에 들어온 일백 명가량의 적만 상대하면 되는 것이다.

“연환진(連環陣)! 집원(輯原)! 연신(煉神)!”

고현이 아군의 전력을 상승시켜 주는 부적술을 아낌없이 뿌렸다.

단주의 동작에 맞춰 각 단에 소속된 부적술사들도 분분히 부적을 날렸다. 주변은 눈발처럼 흩날리는 부적으로 가득 찼다.

쾅! 파캉! 쉭- 쉬쉭-

온갖 버프 기술을 받자 문도들이 시전하는 무공이 눈에 띄게 강력해졌다. 그렇잖아도 적들보다 레벨도 높고 전투 경험도 많던 소요파다.

문도들과 직접 맞부딪쳤던 적의 제일선이 순식간에 전멸해버렸다.

사실 적에겐 대열이란 것도 없었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쉼 없이 밀어붙이는 놈들의 인해전술은 끝이 없었다. 눈앞의 놈을 죽이면 뒤에서 다른 놈이 밀려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퍽! 차캉! 츄악!

서걱- 슷-

“개자식들! 실력도 안 되는 놈들이 쪽수 믿고 밀어붙이냐!”

“쪽수도 실력이다, 새캬!”

“야, 인간아! 주딩이 놀릴 시간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죽여!”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살점 갈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거기에 욕설까지 난무한다.

문도들은 아주 신이 났다.

그동안 문파대전을 수없이 해봤다지만 대부분 NPC를 상대했을 뿐, 실제 유저들과의 문파대전은 백무의 광풍단 이후로 간만이었다.

거기에 저들은 강호 최강의 집단들이라는 구파일방. 그런 대문파의 잰 체하는 놈들이 우리의 전투력에 순식간에 당해 꼬꾸라진다.

지금 소요파 문도들이 보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개개인 모두가 일기당천(一騎當千).

“별것도 아닌 것들이! 어딜 기어들어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5개 대문파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

문도들은 기대감에 들떠 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저들은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도 문파대전이 시작되고 한 시간가량은 소요파의 완벽한 우세로 진행되었다. 운기 조식을 하기 위해 예비 병력과 자리를 교체하는 작업도 그때까지는 특별한 위험 없이 잘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한 시간이 지났을 때엔 결국 구대문파의 정예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녀석들이 마침내 그 대책 없는 인해전술을 포기한 것이다.

아마도 밖에서 호응하던 일만의 감숙 중소 문파 NPC들을 전멸시켜 여유를 찾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저들의 수뇌부가 드디어 제대로 해볼 마음을 먹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제 시작되는 것인가…….”

밀물처럼 몸을 들이밀던 적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격랑처럼 요동치던 전장이 순식간에 적막감에 휩싸였다.

굳이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문도들 모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우리의 힘을 빼기 위한 것일 뿐, 이제부터가 본게임인 것이다.

“온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에 맞춰 술사들이 쏘아낸 방어용 부적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정문으로 향했다.

콰가강!

“집중해! 예비대 준비해라!”

번쩍번쩍 빛을 내던 부적들의 폭발이 잦아들자 난입한 놈들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외양은 방금 전의 놈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 소림, 개방, 공동 따위의 문파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썅!”

욕이 나올 만했다. 난입한 적의 수효는 겨우 일백. 하지만 그 수가 전부 최절정급 고수들뿐이었다.

태반이 각 대문파의 장로급 NPC. 그 사이사이 부적술을 구사하는 제갈세가의 유저들이 끼어 있었다.

일대일로도 감당키 어려운 놈들이 버프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더구나 그들에게 인의 장벽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놈들은 포위진을 훌훌 뛰어넘어 장내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전군 후퇴! 취의청까지 달려!”

술사들을 호위한 채 다들 재빠르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문파 내부로 난입한 구대문파 장로들의 힘은 대단했다.

일검, 일검마다 눈부신 검강이 어려 있었다. 그 빛무리가 한번 뿜어져 나오면 어김없이 누군가의 피가 튀었다.

쾅! 쾅!

검강에 파인 땅이 폭음을 내질렀다. 최절정 고수들이 애꿎게 땅을 때릴 리는 없다. 그 소리는 하나의 생명이 스러졌다는 걸 뜻했다.

전열은 순식간에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목표를 해치운 적들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소요파 경내 곳곳으로 스며들어갔다.

그나마 NPC들을 후미에 세워두지 않았다면 아무도 취의청으로 후퇴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파 NPC들이 구대문파 장로들의 먹잇감이 되어준 덕택에 겨우 반수 남짓한 문도들이 취의청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단주들은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운기 조식들 하세요.”

더 이상 나도 지휘를 한답시고 뒤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야말로 옥쇄(玉碎)밖에 생각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가운데에 내가 서자 좌우로 파도와 일협이 붙는다. 우리 뒤로는 살아남은 일도회와 소요파의 간부들이 도열했다.

[천사연환진이 발동됐습니다. 1시간 동안 방어력과 회피력이 10% 상승합니다.]

[집원부가 발동됐습니다. 10분간 체력이 회복됩니다.]

[연신부가 발동됐습니다.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20% 증가합니다.]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온다. 고현이 부적술을 써준 것이다. 녀석은 파도와 일협에게도 부적을 붙여 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운기에 빠졌다.

“갈 때 가더라도 제대로 보여 주고 가야지요.”

밖을 바라보고 있던 파도가 조용히 읊조렸다.

“다음엔 이런 상황에서 싸우고 싶진 않아요. 그래주실 수 있죠?”

날 쳐다보지도 않고 그가 재차 말했다.

“그래야죠.”

타인의 기대를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건 파도의 말은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었다.

밖에서 그나마 남아서 버티던 문파 NPC들도 전멸을 했는가 보다. 띄엄띄엄 들리던 소리들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난 처음으로 이 상황을 만든 놈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연 님.”

“첨 뵙습니다, 조연 님.”

스물 남짓한 유저들이 취의청으로 다가서더니 인사를 건네 왔다. 난입했던 장로급 NPC들은 어느새 뒤로 물러서 그들 뒤에 시립해 있었다.

‘거지같은 놈은 이룡이라는 놈이겠고, 부채 들고 있는 새끼는 와룡이라는 놈이겠군.’

“개방 후개 이룡이라고 합니다. 조연 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첫 만남이 이런 상황이라니 참 안타깝기 그지없네요.”

욕이 비어져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제 놈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고 모른 척하다니. 종종 이룡의 활약상을 듣고 즐거워했던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정도다.

“이거, 이거 일도회 분들도 계시네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그려.”

일대일이라면 설설 길 놈이 계속 이죽거린다. 일도회가 소요파에 합류한 것쯤이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을 텐데도 새삼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놀리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이룡의 이죽거림은 계속되지 않았다.

이룡의 옆에 서 있던 젊은 도사가 한 걸음 나섰다.

‘이자는… 무룡인가?’

분홍색 매화 문양 다섯 개가 소매에 또렷이 박혀 있다.

화산파의 서열은 매화 문양의 개수에 의해 결정된다. 다섯 개나 된다면 장로급 인사다. 저처럼 젊은 나이에 장로에 오른 이는 화산 최고의 후지기수라는 무룡밖에 없었다.

“조연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승패는 갈린 것 같은데 말입니다. 조연 님의 실력에 대해선 몇 번 들은 바가 있는데 한번 손을 섞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제가 진다면 화산파를 뒤로 물릴 수 있습니다만…….”

무룡의 말이 우습다. 그의 말대로 이미 승패가 결정 난 마당이다. 그 상황에서 화산파가 빠진다고 해서 대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저자는 자신의 호승심에 내가 맞장구쳐 주길 바랄 뿐이었다.

무룡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흥미로운 눈길을 보내온다. 놈들도 이미 문파대전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터. 마지막에 눈요기라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좋을 게 없다는 투다.

“조연 님이 무룡 님의 제안에 승낙한다면 저희 종남도 병력을 뒤로 물리도록 하지요.”

이번엔 또 다른 놈이 한마디 거든다.

‘쥐새끼 같은 놈.’

종남을 입에 올렸으니 아마 삼절검이라는 놈일 것이다.

공동파와 아옹다옹할 정도로 유저 수가 적은 종남이다. 아무리 문파의 일인자라고 해도 이놈은 급수가 다른 놈이다.

실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녀석일 텐데도 상황을 등에 업고 난 체하고 있는 것이다.

‘훗.’

놈들을 지그시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볼까? 간혹 무공만으로 따지면 무룡이 강호 제일이라고 하는 헛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기분이 좀 안 좋았어. 이번 기회에 누가 강호 최고 고수인지 가려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하하! 이제 막판이라고 반말하는 건가? 뭐, 어쨌든 좋아. 그 주둥이가 맘에 안 들긴 하지만 곧 조용해지겠지.”

“글쎄? 어느 쪽이 조용해질지는 두고 봐야겠지.”

무룡이 말꼬리 잡고 물어지는 날 노려봤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고 구경꾼들이 원하는 건 눈싸움이 아니라 주먹다짐.

놈이 몸을 홱 젖혀 뒤로 돌아갔다. 아마도 약속을 지키려는지 뒤쪽에 시립해 있던 장로급 NPC에게 짧은 명령을 내렸다.

“만약 제가 지면 화산파 소속 무인들은 전부 문파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다른 사람들 말은 들을 필요도 없고, 지체 없이 움직여야 할 겁니다.”

모두들 똑바로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전하는 무룡이었다.

무룡의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삼절검도 마찬가지로 종남의 NPC를 잡고 똑같이 말했다.

그리고 임시 비무장이 만들어졌다. NPC들이나 유저들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멀찍이 자리를 비켜 충분한 공간을 만들었다.

난 그걸 본 후 파도와 소요파 사람들에게 말했다.

“전투 대형 그대로 유지하고 기다리세요.”

우리 쪽 어느 누구도 내가 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가 질 수 있을까? 부적술에 연위갑, 8단계 심결 요결까지 익힌 공식 랭킹 1위인 현운자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가까이 오지.”

한판 어우러질 무대가 완성되자 무룡이 거만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왠지 긴장은커녕 비웃음만 나올 뿐이다.

자리를 벗어나 무룡을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조용히 신안을 켰다.

‘역시 최절정급이었군.’

잘 정제된 푸른 오러가 보인다. 거기에 호신강기까지 발동시킨 듯 오러가 갑옷처럼 그의 몸을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공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탓! 파팍!

“훗! 육합권 따위!”

‘웃지 마라.’

칠절매화검은 과연 대단했다. 괜히 화산 제일 검공(華山第一劍功)이 아니었다.

갑자기 서릿발 같은 검강이 수십 개나 뻗어 나와 내 전신을 뒤덮었다.

그러나 그런 단순하기만 한 패도적인 공격으로 날 어찌할 수는 없었다.

콰콰쾅! 쾅! 콰콰쾅!

요란한 굉음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깨져 나간 검강이 파란 스파크를 방출하며 급격히 기세를 잃었다.

“푸하하!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겨우 육합권이었어?”

제대로 보지도 못한 삼절검이 비아냥거렸다.

‘네놈은 찍혔다.’

무룡의 강기공을 와해시키긴 했지만 충격파로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틈을 노리자니 한 호흡이 모자랐다.

그 사이를 먼저 장악한 것은 무룡이었다.

그가 갑자기 뒤로 훌쩍 세 걸음 정도 물러섰다. 간단한 몸놀림이었지만 나로선 처음 보는 동작이었다. 과거 금양옥이 시전한 것과 같은 초절한 신법이었다. 분명 화산의 장로급은 돼야 배울 수 있는 일격기일 터.

드디어 무룡의 위명에 걸맞은 무공이 뿜어져 나왔다.

포퐁- 포퐁-

물방울 터지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더니 광점(光點)들이 생성되었다. 급속히 수가 늘어난 광점들이 끼리끼리 결합하더니 곧 큼지막한 그물을 만들었다.

강기로 이루어진 검망(劍?)이었다. 그 푸른 강기의 검망이 날 감싸 안듯이 떨어져 내렸다.

촤아아악!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군.’

보기에 좋다고 모든 게 강한 것이 아니다. 무룡이 강기성형을 배운 유저들과 제대로 된 비무를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검망이라고 해봐야 결국 강기의 다른 모습일 뿐, 그것도 면적이 넓어진 탓에 힘이 분산된 한심한 수법.

궁신탄형으로 땅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카캉!

충자 결이 주입된 금강저와 무룡의 검망이 부딪쳤다.

차라리 앞서의 공격이 더 위력적이었다. 검망은 너무도 간단히 뚫려 버렸고, 난 다시 궁신탄형을 시전해 무룡의 코앞까지 짓쳐 들어갔다.

“억!”

이렇게 간단히 와해될 거라곤 생각 못한 무룡이 다급히 보법을 밟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법은 놈보다 더한 고수들과 무수히 싸워본 내게 너무 가소로운 동작일 뿐이다.

신안이 놈이 의도하는 방향을 재빨리 읽는다.

‘좌로 이 보(步).’

그래도 역시 한가락 하는 놈이었다. 놈은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사이에도 공격을 가해왔다. 하긴 공방일체(攻防一體)의 묘(妙)도 모른다면 강호팔룡이 아닐 것이다.

두 동강을 내버릴 기세로 무룡의 검이 거세게 옆으로 쳐들어온다.

내 취미가 NPC랑 농담 따먹기라면, 특기는 일수유(一須臾) 같은 시간을 쪼개기다.

무룡의 검이 내 앞에서 검영(劍影)을 토해내며 분리될 찰나, 묘자 결이 시전됐다.

키긱- 푹!

금강저가 무룡의 기가 변화되는 순간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러자 무룡의 검이 땅바닥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억!”

“피해욧!”

구경꾼들의 외침과 무룡의 판단 중 어느 쪽이 더 빨랐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 금나수가 가장 빨랐다는 것.

뱀이 나무를 타듯이 무룡의 우수(右手)를 거슬러 올라간 금나수가 놈의 어깨 견정혈을 짚었다. 그렇잖아도 검이 땅에 처박혀 버려 당황하던 무룡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검을 든 오른쪽 팔은 완벽히 봉쇄된 데다 아직 내가 가한 공격의 여력도 수습하지 못한 무룡은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려 아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을 든 놈이 할 수 있는 공격이라고는 어차피 제한적이다. 기껏해야 발차기 공격이 놈이 할 수 있는 발악의 전부였고, 그것마저도 신안으로 놈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리는 내겐 전혀 의미 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놈이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이면 무릎으로 놈의 허벅지를 차댔고, 그렇게 놈이 조용해지면 금강저가 무룡의 복부와 안면 깊숙이 파묻혔다.

타타탓- 퍼퍽!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에 파육음이 요란하다.

무룡이 벗어나려 애쓰면 고의로 놈의 안면을 두들기고, 좀 얌전하다 싶으면 복부를 두들겼다.

결국 무룡이 반항을 포기했다. 하긴 더 이상 반항할 여유도 없었다. 신안에 비친 놈의 오러는 호신강기는커녕 조금의 내공도 끌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활력을 잃은 상태였으니.

마지막이 확실하다 싶은 그 순간, 놈의 어깨를 봉쇄하고 있던 금나수를 풀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상황에 눈이 화등잔만 해진 놈의 안면에 원앙각(鴛鴦脚)이 작렬했다.

빠캉!

“꾸르… 륵.”

경쾌한 타격음과 놈이 죽어가면서 흘리는 거품 무는 소리, 오직 그 소리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놈을 응원하던 구대문파 유저들의 외침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격타음마저 사라진 지금, 오직 숨죽일 듯한 적막만이 존재했다.

“어, 어떻게 육합권 따위에 칠절매화검이…….”

“저래도 되는 거야?”

놈들은 계속 지껄이라 그러고 난 몸을 돌렸다.

취의청 문가에 서서 비무를 바라보던 친구들은 내가 이기고 돌아왔는데 환호성도 지르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겨우 그 말뿐이었다.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던 파도가 한 걸음 물러서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이건 사기야! 어떻게 최절정 무공이 겨우 육합권 따위에 무너질 수 있느냐고!”

다른 놈들은 무룡의 패배에 내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한 놈만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냥 취의청 안으로 들어가려다 잠깐 고개를 돌려 놈의 낯짝을 확인했다.

‘또 저 자식이야?’

종남의 삼절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깜빡했다. 저놈이 1초라도 더 소요파 영내에 발을 붙이는 게 싫었는데 말이다.

자세를 잡았다. 오른 다리가 뒤로 미끄러졌다가 당겨졌다. 그리고 놈의 면상을 향해 강기 폭탄이 날았다.

퍽!

게임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시체가 수박 터지듯 갈기갈기 찢겨진다면 놈들이 조금은 더 날 존경스러워할 텐데 말이다.

장내는 섬광에 잠식당했다. 미리 대비를 하지 못한 탓에 다들 눈을 뜨지 못했다.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십여 초가 흐르고 난 이후였다.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무룡이 죽고 채 1분도 되지 않아 종남의 우두머리마저 시체가 됐다. 놈들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놈들이 놀라 자빠지고 있을 때, 난 이미 취의청 안으로 조용히 들어와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운공이 끝날 때까지도 적들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취의청의 살아남은 아군의 수는 겨우 일백. 그에 반해 적들의 수는 몇만이나 되었지만 놈들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푸헤헤헤! 이놈들아! 그러게 어쭙잖은 실력 가지고 감히 대(大)소요파를 건드리랬더냐!”

“그러게 말이야! 푸하하!”

이광이 잔뜩 움츠러든 놈들을 도발했다.

내가 빠진 취의청 입구는 각룡이 형이 메우고 있었다.

내공을 회복한 내가 형에게 다가갔다.

“각룡이 형, 자리 좀 내주세요.”

“왜? 좀 쉬지 않고?”

“한 게 있어야 쉬든가 하죠. 아직 할 일도 남았구요.”

각룡이 형이 다시 뒤로 빠지고 내가 그 틈을 메웠다.

그사이 소요파는 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적들이 들어와 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길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다시금 적들의 위세를 보자니 지푸라기 같은 희망조차 내 곁을 떠났다는 걸 느껴야만 했다.

패배가 기정사실이라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절대 소요파가 실력이 모자라 놈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각인시켜 줘야 했다.

‘이번엔 어떤 놈으로 할까나?’

먹잇감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무룡과 삼절검을 제외한 나머지 문파의 수뇌들이 모여서 쑥덕공론을 벌이는 모습이 보인다. 못난 놈들 중에서도 유독 거지 놈이 눈에 띄었다.

‘결정.’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놈들이었지만 취의청과의 거리는 좁히지 않고 있었다. 그 거리는 대충 30보가량.

슈웅-

무진이 발출되었다. 그리고 곧,

쾅!

“으헉!”

“또야!”

겨우 침착을 찾아가던 놈들이 화려한 강기 폭발 속에 개미 떼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바보들아, 이제 좀 정신이 번쩍 드냐?’

무진은 꼭꼭 숨겨 둔 비기. 오직 현운자만 그 정체를 알고 있었을 뿐, 우리 문도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비기를 연달아 사용했으니 아무리 둔감한 문도들이라 할지라도 무진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파도와 일협, 이광과 각룡이 형 할 것 없이 날 쳐다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그런 초필살기를 여태껏 숨기고 있었느냐 하는 얼굴이었다.

쳐다보는 눈들에 의심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굳이 말로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상황이 그런 거 설명하고 설명 들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다들 인식하고 있었다. 나도 그냥 어깨를 으쓱해주고 말았다.

문도들은 알아차렸지만 한눈팔던 저 구대문파 놈들은 아직도 어떻게 자기들이 픽 하고 쓰러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놈들은 우리가 대포라도 사용하는 줄 알 것이다.

난 다시 안으로 들어가 내공을 회복했다. 그동안 모아둔 소환단은 많았다. 아낌없이 꼭꼭 씹어 먹으며 운기 조식을 했다.

무룡과 삼절검, 이룡, 그다음은 공갈대사였다. 놈들은 거리를 더 벌려 이젠 취의청에서 50보까지 물러났지만 그래도 무진을 피할 순 없었다.

“와우! 이런 식이라면 저놈들 다 잡을 수도 있겠어요!”

절대강자의 대명사로 불리던 공갈대사마저 맥없이 죽어버리자 문도들의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소봉이가 들떠서 소리쳤다.

“글쎄다.”

무진은 결코 사기 스킬이 아니다. 구명지초(求命之招)라고 하는 게 옳았다. 일대일이라면 충분히 초필살기 역할이 가능하지만 적이 둘만 되어도 시전자 또한 뼈를 묻을 수밖에 없는 기술이다. 더구나 정체를 들키면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운 게 이 무진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정체를 들켰나 보다.

팽가의 천하도를 노리고 날린 무진이 또다시 장엄한 폭발을 일으켰지만, 빛이 사라지자 천하도가 두 다리로 굳건히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그는 무진이 발출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한 발 옆으로 옮겨 간단히 피해버린 것이다.

‘다 끝났군.’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나야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지만 조금은 희망에 부풀어 있던 다른 이들의 표정은 대번에 죽상이 되어버렸다.

한 번 시전하고 재차 발출하는 데 적어도 30초가 걸리는 데다 원거리 공격이라지만 직선 공격, 거기에 꽤 긴 사전 동작. 놈들은 무진의 약점을 모두 알아버렸다.

드디어 정체 모를 두려움에서 벗어난 구대문파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정말 소요파의 마지막 혈전이 벌어졌다.

괜한 공명심으로 앞장서던 대문파 유저들은 다시 뒤로 물러섰고, 최절정급 NPC들이 선두에 섰다.

NPC들의 무공이 고절하다지만 우리 문도들도 약하지는 않았다. 최절정급인 NPC들을 상대로 절정급에도 못 미치는 소요파 문도들이 비등하게 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취의청 입구에 만들어진 전열은 조금씩 뒤로 밀려만 갔다. 그리고 문파 입구에서 벌어진 모습이 다시 재현되었다. NPC들이 방벽 위로 날아가 배후로 침입한 것이다.

그다음은 아수라장이었다.

강기 파편이 이리저리 비산하고, 곳곳에서 살 갈리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열이 붕괴되었지만 경험 많은 문도들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살아남은 문도들이 삼삼오오 뭉쳐서는 서로 등을 맞대고 놈들에게 저항했다.

누구도 간단히 쓰러지지 않았다.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목숨을 끝내기 위해서 놈들은 서너 개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하지만 될 수 없는 일은 될 수 없는 법.

결국 소요파는 전멸했다. 파도와 일협도 사망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내가 환생단을 먹어가면서 끝까지 버텼지만 패배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문파를 세운 이후 처음으로 겪는 패배였다.

문파 등급은 하락하지 않았다. 그저 문파 명성만이 깎였을 뿐이다. 그러나 등급이 하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패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항상 승리만을 거두다 이제 겨우 한 번 패배한 것이지만, 이 한 번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매번 승리를 거두다 단 한 번의 패배로 사라진 영웅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문파대전 다음 날, 감숙의 중소 문파 연합에서 사절이 왔다.

결맹을 파기한다는 통보였다. 별로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이었지만 문도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패배하긴 했지만 문파대전에서 우린 할 만큼 했다. 소요파의 무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강호 홈페이지에서는 내 무진 스킬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고, 소요파의 부적술도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런 관심 덕택에 난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파도는 이번에 쳐들어온 문파들은 무림맹 전체라기보다는 사천 무림에 대항하는 하남 무림 연합에 가깝다고 했다.

우리의 힘이 이토록 강하다는 걸 의미 있게 여기는 곳이 있지 않을까?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었다.

적의 적은 아군. 사천 무림계의 리더 격인 당문의 강호제일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계획은 순전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한심한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하남 문파 연합이 소요파를 공격한 건 더 크기 전에 싹을 제거하겠다는 심보였다. 그런데 그 생각은 사천 무림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향후 대문파의 중대한 적이 될 게 뻔한 유저 문파보다 하남 문파들의 진영에 가세할 마음까지 내비쳤다.

그랬다. 사천과 하남은 적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경쟁자였고, 언제든지 손을 잡을 수도 있는 기득권 세력이었을 뿐이었다.

소요파는 정말로 고립무원이 되었다.

애써 키운 문파 NPC는 한 번의 문파대전으로 전멸당했다. 새 NPC를 받지는 않았다. 소요파에는 오직 유저들만 남은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넋 놓고 당할 수만은 없었다.

소요파의 전 인원, 이백의 유저들과 일도회의 일백 유저들이 두 번째 문파대전 전날 모종의 장소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섬서성 종남산. 종남파가 자리한 그곳이었다.

적들이 소요파에 결집한 사이, 적의 배후를 습격한다는 작전이었다. 종남은 공동만큼이나 약했지만, 공동만큼 준비도 못한 상태였다.

오직 그 방법만이 소요파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종남의 장문인만 무진으로 잡아버리면 전패(全敗)를 면할 수는 있었다. 다른 문파들에겐 패배하겠지만 대문파와 소요파의 문파 등급 차를 고려하자면 문파 명성이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만약 그 방법이 성공한다면 이후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안 것인지 종남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삼삼오오 흩어져서 이동을 한 터라 적들이 절대 눈치 챌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녀석들의 정보력을 너무 우습게본 탓일까?

과거 공동파를 농락했던 방법을 종남산에서 행할 수는 없었다. 그땐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일반 유저들도 있었던 데다 준비할 시간도 넉넉했다. 국면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그러나 이번엔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사람도, 시간도.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전투가 벌어진 지 두 시간이 지났을 즈음엔 같은 섬서성 대문파인 화산파 도사들까지 합세했다.

NPC들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종남에서 공격을 받고 난 후에 연락을 취한 게 아니었다. 도저히 그렇게 해서는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나올 수 없었다.

우리가 종남산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소요파의 행적은 들통나버렸던 것이다.

지리에도 어두웠던 데다 무력으로도 밀렸다. 겨우 2개 문파만을 상대했는데도 위기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번째 문파대전도 소요파의 전멸로 끝이 났다. 완벽한 패배였다.

* * *

종남산에서도 패배를 당하자 문도들의 사기는 그야말로 완전히 바닥을 기었다. 누구도 웃지를 않았다. 차라리 거짓웃음을 지으며 떠들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굳게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고 딱딱해진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그나마 문파를 탈퇴한다거나 접속을 안 하는 문도가 없는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예고된 파멸이 소요파에 무겁게 자리 잡았다.

소요파(逍遙派) 취의청(聚議廳).

아무리 분위기가 처져 있다고 해도 이곳은 게임 속. 현실에서 밥 벌어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듯, 이곳 강호에서 살아가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사냥은 해야 한다.

평문도들은 모두 사냥을 나갔고, 간부급들만이 취의청에 남아 대책을 궁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싸매고 고민한다고 해서 그 대책이란 놈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질 리가 없다. 터무니없는 실현 가능성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결국은 다들 제 풀에 지쳐 합죽이가 되고 말았다.

“이광아!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우리 같은 무뇌아들이 이럴 필요 있겠어? 사냥이나 가자.”

여태 지루함이라는 녀석과 악전고투를 벌이던 소소 누님이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누님 말마따나 그들이 있어봤자 별 뾰족한 수가 생길 리도 없었다.

예의상 자리를 지키던 그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났는지 이광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누님 말대로 사냥을 가고 싶다는 눈치.

‘결국 처음 계획대로 해야 하는 건가?’

현운자가 스승 손에 끌려 무당으로 돌아가기 전에 반은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계획이 있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될 때마다 그 농담은 계속 살을 붙여 나갔고, 현실성 있는 계획으로 변해갔다. 첫 문파대전도, 두 번째 문파대전도, 그리고 사천 무림과의 연합이란 계책보다도 그 농담 같은 계획이 먼저 세워졌었던 것이다. 물론 그땐 순전히 농담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젠 그 계획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짝! 짝!

손뼉을 치자 막 엉덩이를 들려던 세 사람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광, 은소소, 독각룡, 조씨 형제, 소봉, 고현, 그리고 파도와 일협. 열 쌍의 시선에서 열망이 느껴진다. 문주가 이번에야말로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아냈길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내가 할 이야기는 그들의 희망 사항과는 일만 광년쯤은 떨어진 이야기였다.

열기 가득 담긴 그 눈들이 날 잠시 머뭇거리게 했다. 하지만 결국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에… 아무래도 말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말이죠. 뻔한 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뻔한 수?”

“아, 뭐야! 말할 거면 빨리 하라고! 뜸 들이지 말고!”

각룡이 형의 조용한 반응에 비해 소소 누님의 반응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문파 해산하겠습니다.”

결국 말했다.

좌중이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누구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또 누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도 아무런 말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너무 어이없는 소리를 들어서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충격 요법은 이 정도로 끝내고.’

더 이상 장난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이젠 차분히 설명을 해줘야 할 차례.

“오해는 말고요,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랄까? 뭐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내… 내가 바, 방금 말했지? 뜨, 뜸 들이지 말라고!”

아직도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소소 누님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

“지금 우린 어떻게든 문파 해산 안 당하려고 싸우는 거죠?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는 그 결과를 피할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고 있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꼭 문파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소요파가 해산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우리가 전처럼 사냥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들도 아니죠. 문도들 입장에선 해산이 꼭 나쁠 것도 없어요. 파문이라면 문파 무공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해산은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쉬운 사람이 딱 둘이 있다. 나와 각룡이 형. 호위무사를 부릴 수 없어지니까 말이다. 거기에 난 사재를 털어 만든 표국까지 날리는 셈이니 돈으로 따지면 피해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된다고 해서 마음까지 따라가는 건 아닐 것이다.

소요파엔 유독 그런 감성이 발달된 사람이 있다. 소소 누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도! 지금 무공 사라지는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세상에 어느 가장이 오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집을 팔자고 하냐고! 내 눈엔 문제를 회피하려는 걸로밖에 안 보여!”

‘가장이라… 대우는 해주지도 않으면서 이럴 때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게 가장 대우인가?’

저 꽉 막힌 아줌마를 또 어찌 달래야 하나 난감해하는데 다행히 내 대신 나서주는 이가 있었다. 각룡이 형이다.

“누님, 조금만 진정해봐요. 전 조연이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형의 말에 누님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그리고 아직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말하기를 포기하고 자리에 앉고 말았다. 이젠 철이 좀 들기 시작한 것인가?

몇 마디 말로 누님을 조용히 만든 형이 다시 날 바라보고 말했다.

“연아, 내 생각엔 그리 간단치 않은 계획인 거 같은데 말이야. 해산한다고 해서 저놈들이 우릴 가만히 내버려 둘까?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역시 각룡이 형은 믿음직스럽다. 문제의 핵심을 정말 잘 짚어주었다.

“물론 그렇겠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혹 우리가 다시 재기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여지없이 추살령을 내리겠죠. 그래서 생각해봤는데요, 이왕 망하자고 마음먹었으면 확실하게 망하는 걸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 계신 분들이 작업을 잘 해주셔야겠어요.”

“뭘?”

“완전히 지리멸렬하게 망하는 연기를 말입니다. 우선 일도회 분들은 오늘 당장 난주를 떠나세요. 이후 행보는 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생각나실 겁니다. 그다음은 간부들 중에 한 분이 친한 사람 몇 분 데리고 문파를 떠나세요. 그렇게 며칠 간격으로 간부들이 한둘씩 떠나면 됩니다. 문도들을 어떻게 다독일지는 알아서 생각하세요. 절 욕해도 상관없고, 나가서 다른 문파를 세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혹 떠나겠다는 사람은 굳이 잡지 않아도 돼요. 진실은 은폐하시고요. 이런 일이 비밀 유지가 될 거라곤 생각 못하거든요.”

“흐미, 연기 수준이 아니잖아요. 나중에 다시 뭉친다는 말도 못하는데 어떻게 잡아두란 말이에요?”

소봉이가 기가 질린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그거야 네 능력에 달렸지. 굳이 잡아두려고 애쓰지 마. 눈치 좋은 문도라면 날 믿고 기다릴 테고, 아니라면 떠나겠지. 문도들은 별로 중요치 않아. 이번에 확실히 느꼈지. 나 혼자서 구대문파 전체를 상대할 능력이 안 되는 한 문도들에게 기대는 건 무리라고 말이야.”

강호는 어디까지나 실력이 모든 걸 말해준다. 지금의 난 구대문파 장로급을 상대하는 게 한계다. 이미 허점이 드러난 무진만을 믿어서는 곤란했다. 문주인 내가 진정한 강호 최강자로 바로 섰을 때 최강의 문파가 성립되는 것이다.

소봉이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그건 여기 간부들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미덥지 못하면 굳이 소요파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전 소요파 출신이라면 다른 문파에서 분명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여러분의 능력이야 충분히 보여 줬으니까요.”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한 건데 꼭 태클 거는 놈들이 있다.

“흐흐흐. 역시 연이 형 잔머리 하나는 대단해. 문도들 속이기 전에 우리들부터 속이려 드네?

“그러게 말이다.”

이광 이놈들… 같이 생활한 지 1년이 다 돼가니 이젠 눈치가 9단이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하여간 일 년 안에 연락이 안 간다면 재회란 없다고 생각하세요.”

“일 년이라고? 난 안 해!”

“나도!”

“연아, 그건 솔직히 직무 유기다.”

끙. 좀 편히 지내보려고 넉넉히 불렀더니만 태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국 6개월로 합의를 봤다.

‘아직도 날 알려면 한참 멀었어.’

말이야 쉽지, 6개월간이나 어떻게 기다리겠는가? 움직여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내 생각으론 3개월이 마지노선이다. 그 이상 끌었다가는 문도들뿐 아니라 나까지 지칠지도 모른다.

하여간 모두 계획대로 움직여 준다고 약속을 받아냈다.

그날 바로 일도회가 소요파를 떠났다.

소요파 다음엔 그들이 공격 목표가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잠수를 타겠단다. 다만, 소요파처럼 이산가족 흩어지듯이 뿔뿔이 쪼개진 게 아니라 모든 인원이 하남에서 영하성으로 근거지를 옮겼을 뿐이다.

일도회는 낭산 소요파의 작업장들을 물려받았다. 그들은 소요파에게서 레이드 몹이 나오는 낭산과 천사교를 인수했다.

이미 한 번 실수를 겪어본 난 천사교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물론 그들이 천사교와 친하게 지내면서 낮은 수준의 부적술에 만족할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최고급 부적술을 얻을지는 전적으로 그들 책임이었다.

일도회가 떠나고 간부들도 문도들을 데리고 문파를 떠나기 시작했다.

모두 나름대로 연기를 잘해주었다. 잘한 정도가 아니라 진심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놈들이 많았다.

고현 이놈은 강호 홈페이지에다 날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문의 글을 남겨 주었고, 이광 이놈들은 나와 걸판지게 싸우는 모습을 전 문도원들에게 보여 주고 떠났다. 놈들이 말을 어찌나 싸가지 없게 했던지, 너무 열이 뻗친 난 놈들을 정말로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이 세 놈들은 다시 안 봤으면 했다.

문도들이 모두 떠나기까지 두 번의 문파대전을 더 치러야 했다. 단번에 해산하자니 의심을 살 것 같아 찔끔찔끔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일도회가 떠나고 2주 후,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봐주던 각룡이 형이 남은 청룡단 인원 전부를 데리고 문파를 떠났다.

그렇게 소요파의 1년 남짓 짤막했던 역사가 일단락되었다.

“총관아, 잘 있어라. 담에 또 볼 수 있음 보자고.”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려. 그럼 시작해라.”

“네.”

[소요파가 해산되었습니다.]

[문파 해산의 책임으로 현재 명성의 절반이 사라집니다.]

* * *

IGM.

회사 업무 시간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났다. 평상시라면 야간 근무 들어온 GM들과 서버실의 당직자들만이 건물에 남아 있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사장인 정지훈이 아직 퇴근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지금 오래전부터 지켜보던 일이 오늘 일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일은 이미 낮에 끝난 것인데 왜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보고를 받으려는 것일까? 혹시 직원들의 눈을 피해야만 하는 일인 것일까?

여하튼 보고를 기다리면서 내일 업무를 미리 보고 있던 정지훈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들어오세요.”

정지훈의 음성이 널따란 사장실에 울려 퍼지자, 곧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른 초반의 호리호리한 사내였다.

그런데 분명 부하 직원인데도 사내가 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스럽지 않다. 그가 히죽히죽 웃으며 정지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걸어왔다. 사내는 보고를 올린다고 했는데도 서류 파일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점점 재밌게 돼가네요, 정 사장님.”

“아, 그래요? 낮에 듣기론 소요파가 해산됐다고 하던데 그게 일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초원 씨?”

정지훈을 만나고 있는 사내는 바로 옵저버 4팀의 이초원 대리였다. 어쩐지 둘의 대화를 보자면 일개 대리와 사장의 관계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겨우 강호의 무수한 문파 중의 하나일 뿐인 소요파 해산이 사장이 직접 거론할 만큼 대단한 일이었나?

“아, 이야기 안 드렸나요? 이번 일에 강호도 개입돼 있거든요.”

“강호가요? 설마 또 저번처럼 직접 개입한 건가요?”

저번이라면 강호가 조연의 퀘스트에 직접 끼어들어 페널티를 줬던 일을 말한다. 그때 사건으로 강호는 자아가 생기기 전으로 강제 롤백을 당했었다.

“녀석도 머리가 있는 놈인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겠죠. 그때 손을 좀 본 탓도 있고요. 하는 짓 봐서는 사라 따라 하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통 감을 못 잡겠네요.”

“녀석이 저희 쪽 의도를 알았다는 걸 뜻하죠.”

“그 말은…….”

“실수를 만회하려고 반전을 꾀하는 거죠. 명백한 승리, 본체를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 주고 싶어 한다는 거죠.”

“허… 그놈이 정말 프로그램이 맞는 거예요? 아니, 어떻게 그런 판단까지 할 수 있죠?”

정지훈은 오한이 드는 느낌이었다.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이번엔 확신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너무 위험했다.

불안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정 사장에게 이 대리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정 사장님? 다시 롤백할까요?”

시간을 되돌리는 건 간단하다. 그런데 이미 한 번 했음에도 그 결과가 이렇지 않은가. 다시 롤백한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정지훈은 또 실패하고 말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휴… 이대로 갑시다. 조 과장 이해시키기가 힘들다는 거 알지만, 이젠 그래야 될 것 같습니다.”

정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라? 보고라니? 이 대리가 또 보고를 올릴 곳이 있었던가?

하여간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 대리가 정 사장을 만난 이유는 강호의 롤백 여부를 묻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대리는 정 사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사장실을 나왔다.

“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알려나 모르겠네.”

고생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 대리였지만 왠지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희망 가득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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