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장. 사면초가
공동파와의 문파대전은 우리 소요파의 승리로 끝이 났다. 비록 그 와중에 현운자가 죽었지만 마지막 남은 혼천귀원단으로 페널티는 무마할 수 있었다.
문파대전이 종료되고 하루 뒤, 내 앞으로 무림맹주의 친서가 도달했다.
그 친서엔 맹의 원로들도 소요파의 실력이 공동파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고, 앞으로 양 문파 간의 문파대전에 무림맹이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림맹이란 잠재적 위험이 제거되자 그때까지 눈치를 보고 있던 감숙의 중소 문파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힘의 저울추가 완연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느낀 탓일까? 녀석들은 상당한 군자금을 들고 찾아왔고, 이후로도 계속 자금을 제공할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그 돈을 그대로 놈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돈이라면 나도 부족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대신 난 다음 문파대전에는 그들의 확실한 참여를 강요했다.
겨우 단 한 번의 문파대전으로 공동의 진정한 능력을 다 알았다고 할 순 없었고, 이미 드러난 실력만 해도 그들은 결코 우리의 아래가 아니었다.
장로급만 해도 나나 현운자가 아닌 한 일대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아직 한 번도 출현하지 않았지만 그들보다 더 강력할 전대 장로급이나 은거고수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비록 결맹 문파에 공동의 장로급에 견줄 고수라고는 겨우 서넛에 불과했지만, 1만이 넘어가는 일반 문도들은 소요파에게 더없이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최소한 공동의 속가들만 견제해주어도 소요파가 운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황성과 무림맹의 간섭은 없고 감숙 무림계의 든든한 지원도 보장받았다. 다음 주의 문파대전은 이번처럼 무진이나 만벽 같은 사기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정면 대결로 승리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 * *
문파대전 다음 날.
두통에게 이름 모를 공동파 NPC가 찾아왔다.
“참마단주님, 장문인께서 찾으십니다.”
NPC 도사는 간단히 장문인의 명만을 전달하고는 되돌아갔다.
그인들 장문인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지나간 일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말이다. 죽어나간 문도들의 충원 문제도 있었고, 공동의 숨겨진 전력의 출도를 강변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분명 머리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고 있는데도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제길,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무인도 신세로구만.’
공동의 상황이 이렇다는 거야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공동 소속의 유저들이 이십은 됐다. 하지만 어제 문파대전에서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는 주호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아예 문파대전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제 집이 불타는 상황에서 도망갈 생각만 하는 놈들이었다.
‘정신머리가 그 상태니 결국 공동파 따위에나 들어왔겠지!’
자신이 공동파에 들어온 이유는 그런 패배주의자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두통이었다.
“이런 놈의 문파 따위에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어휴!”
한탄해보는 두통이었지만 그의 발길은 상청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와주는 이 없어 갑갑하긴 했지만 그래도 적은 적이었고, 싸워야 할 때인 것도 맞았으니까.
상청궁엔 되살아난 장문인과 장로들이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얘가 왜?’
말을 건네온 건 주호였다. 주호는 그가 오기 전에 장문인과 한바탕 이야기를 나눈 듯한 눈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주호의 실력이 유저들 중에서는 강호 전체를 통틀어서도 발군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봤자 공동에서 맡고 있는 역할은 일개 복마금검대의 대원일 뿐이다. 그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굳이 장문인에게 할 말이 있다면 자기를 거쳐서 하는 게 더 편한 일일 텐데…….
“그래, 그런데 어쩐 일이냐?”
“자세한 건 장문인께 직접 들으시죠.”
녀석이 말하는 태도가 어쩐지 맘에 들지 않는다. 왠지 어제까지의 주호가 아닌 것 같다.
주호의 말인즉슨 자신이 상을 다 차려 놓았으니 당신은 먹기나 하라는 소리와 같았다.
‘이놈이 이런 놈이었나?’
두통의 머리가 갑자기 지끈거린다. 세상에 간단한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갑작스레 어디서 이런 놈들만 자꾸 나타나나 싶다. 웬수같은 조연부터 시작해, 이번엔 동생처럼 여기고 있던 놈마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주 대주(隊主)의 말을 듣자 하니 우리가 소요파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났다네. 그래서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야. 장로들도 하산시키고 말이지. 그래도 안 된다면 은거했던 선배님들께도 부탁해볼 생각이야. 그런데 그분들이 워낙 세속 일엔 무감하신 분들이라서 조금 미덥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말인데, 듣자 하니 두 단주의 지난날이 꽤나 화려했다고 하던데, 내 부탁함세. 두 단주가 이번 일에 힘을 좀 써주시게나.”
해광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두통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대주는 도대체 뭐고, 내 과거는 또 어떻게 안 거야? 그리고 무슨 힘을 써달라는 거야!’
무엇보다 그를 혼란케 한 건 ‘지난날’ 운운이었다. 그의 지난날을 두통 자신이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겨우 게임상의 인연일 뿐인 주호가 알 리는 만무했고, 일개 NPC에 불과한 해광은 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다.
두통은 이 강요된 침묵에 이마를 찌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별생각 없는 해광이 이 침묵을 해결해줄 수는 없는 노릇. 어색한 분위기를 깨줄 수 있는 건 그나마 주호였다.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무언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것 같네요. 대주 자리는 방금 전에 장문인께서 제게 맡기신 거랍니다. 아무래도 NPC가 맡는 것보단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이 맡는 게 지금 상황을 타개하는 데 더 적당한 일일 테니까요.”
두통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겨우 대주 자리를 어떻게 주워 먹었냐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알았냐고 추궁하기도 좀 그렇다. 되레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통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해광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간단히 대답하고 상청궁을 나왔다.
상청궁 밖 하늘이 푸르다. 그나마 하늘이라도 푸르기에 세상이 덜 복잡해지는 것일 것이다.
두통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히는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주호였다.
‘이 녀석의 정체는 대체 뭘까? 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그러고 보니 자신은 주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적한 공동파가 좋아서 들어왔다. 물론 때가 무르익으면 날개를 펴고 강호를 질주할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들어와서 많은 노력을 했다. 겨우겨우 유저들을 규합해서 장문인을 찾았고, 그렇게 참마단을 승인받았다. 단주의 자리에 오른 덕분에 남다른 무공도 배울 수 있었다. 최소한 공동에서만은 일인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벌써 금검수의 자리에까지 오른 유저가 있었고, 그는 갑작스런 첫 만남부터 동생처럼 살갑게 굴었다.
그렇게 제법 잘 행세해오던 녀석이 이젠 그를 이상한 곳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혹시 이 녀석에게 자기는 그저 이용물에 불과한 것일까?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라.”
퉁명스런 두통의 대답에 주호가 움찔한다. 그제야 뭔가 실수한 게 있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호가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전에 두통이 걸음을 옮겼다. 당분간은 정말 바쁠 것이다.
두통이 길을 재촉한 곳은 하남성 낙양이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무림맹에 가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찾아간 무림맹에서 그가 받은 대접이라곤 삭막한 인사와 싸늘한 축객령뿐이었다.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소요파와 공동파 어느 쪽의 내왕도 받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왔소. 두 단주는 그만 돌아가 보시오.’
무림맹 무사의 안내를 받아 접객당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최소한 맹주의 얼굴은 볼 줄 알았다. 하지만 접객당주는 정말로 그 말을 끝으로 그를 맹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문파대전 한 번 졌다고 해서 공동의 단주가 겨우 이런 대접밖에 받지 못한단 말인가?’
장문인 면전에서야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고 장담을 했지만, 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았다.
형식상 구대문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그 울타리 안의 공동파의 위세란 실상 별 볼일 없었다.
감숙은 중원이라기보단 변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고, 이런 상황에 손 벌릴 만큼 교류가 있던 문파도 없었다. 거기에 두통 자신의 강호에서의 인연이라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다.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해!’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을 되뇌는 두통이었다.
무림맹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두통은 하남 문파들을 직접 찾아가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황금산장이었다.
* * *
“어라? 갑자기 무슨 일이지?”
혈지주(血蜘蛛)를 난도질하던 일협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면서 중얼거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파도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도 전서구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수신자:파도
금일 오후 9시까지 무림맹 오룡각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하남 무림계 전체에 관한 중요한 일이니 필히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발신자:단풍>
“흐음…….”
파도가 전서를 확인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파도를 보고 일협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룡이 웬일일까요? 말하는 걸로 봐서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은룡(隱龍)이라면 강호 초창기에 강호팔룡이라고 불렸던 이들 중의 일인. 전서를 보낸 단풍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는 현재 강호의 모든 유저들 중에서 가장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무림맹의 총사라는 직위가 그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무림맹의 총사라면 구대문파, 팔대세가의 수장들과 동급이었다. 그것 한 가지만 봐도 은룡이란 유저의 수완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쎄다. 일단 가봐야 알 수 있겠지. 어쩌면 그가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고. 하여튼 괜한 일에 섣불리 발을 담그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일도회는 바깥일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으니까.”
“그럼요, 어떻게 만든 건데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일협이 대꾸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될는지는…….
파도와 일협은 간만에 무림맹에 들렀다. 예전에야 무림맹 절정무사 임대권을 사러 종종 들렀지만, 최근엔 무사 소환을 할 경우란 거의 없어서 정말로 간만에 들른 셈이었다.
오룡각 3층의 총사 집무실엔 짐작대로 그들 말고도 쟁쟁한 무림인들이 가득 있었다.
그런데 전서대로라면 하남의 무림인들만 모였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섬서의 화산과 종남, 호북의 무당과 제갈세가, 하북의 팽가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
집무실에 모인 사람은 모두 열하나. 누구 하나 빠짐없이 강호에서 이름자만 대면 알아볼 수 있는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강호팔룡 중에서 가장 신비한 사람인 은룡(隱龍) 단풍. 강호 유저 중 최초로 무림맹에 들어간 이로 이후 승승장구. 결국 오늘날 대무림맹의 총사 자리를 꿰찬 야심만만한 사내였다. 무공 수위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강호에 몇 안 되는 최절정급 유저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마찬가지로 강호팔룡의 한자리를 차지했었던 와룡(臥龍) 제갈량이었다. 세가에서 따로 맡은 직위는 없었지만 그는 제갈세가를 대표할 만한 자격이 충분했다. 강호에 최초로 진법술과 부적술의 존재를 알린 이가 그였으니 말이다.
참석인 중 세 번째로 강호팔룡에 속한 이는 개방의 이룡(異龍)이었다. 그는 좀 특이한 사람이다. 강호에서 가장 태평하게 게임하는 사람이 그였고, 일반 유저들이 가장 좋아하는 절대강자였다. 그가 강호에서 벌인 사건 사고는 끊임없이, 현재까지도 인구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는 강호 오픈 일주일도 안 되어 개방의 후개(後쾬) 자리를 접수하고 전무후무한 꼼수의 지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소림의 공갈대사와 함께 동문의 척살단들을 사냥하고 다녔던 이야기는 한때 강호를 경악에 빠뜨리기도 했다. 지금은 청룡과 봉황 같은 신수(神獸)를 잡아보겠다고 사방팔방으로 거지들을 파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언뜻 바보짓 같아 보이지만 강호 최초로 인면지주(人面蜘蛛)와 이무기를 잡은 경력이 있으니 꿈같은 일이라고 치부하는 강호인은 없었다.
이 자리에 나온 사람 중 강호팔룡 소속의 마지막 인물은 화산에서 온 무룡(武龍)이었다. 무룡은 개방의 이룡과 마찬가지로 팔룡의 호칭과 이름이 똑같은 이였는데, 그 이름처럼 무에 대한 욕심 하나는 최고라고 할 만했다.
혹자는 잡기를 제외한 순수한 무공만으로 비무를 한다면 우승은 무룡이 차지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그의 칠절매화검(七絶梅花劍)은 현재 나온 무공 중에선 강호 최강이라고 평가받고 있었다.
이들 넷 외에도 강호 랭킹 7, 8위이자 하남 중소 문파 연합인 일도회(一道會)의 회주, 부회주인 파도와 일협. 그리고 지금은 무당의 현운자에게 밀려 2위지만 한때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소림의 공갈대사도 참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종남에서는 삼절검, 무당에서는 왕지락, 팽가에서는 천하도가 참석했다. 유일하게 무림 문파가 아닌 곳에서 참석한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황금산장의 호상단주를 맡고 있는 엽청이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지만 일도회 분들까지 오셨으니 이만 시작해볼까 합니다.”
파도 일행이 가장 늦었나 보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사람들을 소집했던 단풍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 시작을 알려 왔다.
사람들은 각자 편한 대로 자리를 잡았다. 파도와 일협도 방 한편에 털썩 주저앉아 단풍의 말을 기다렸다.
단풍이 좌중을 한차례 쓰윽 훑어보고는 비로소 안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들 시간이 금쪽같으신 분들이니 인사는 나중에 하고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바로 그제 있었던 일입니다. 공동파가 문파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유저가 극히 적은 공동파였다. 그리고 소요파도 문도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던 탓에 문파대전 결과가 홈페이지 같은 공개 장소에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단풍이 꺼낸 이야기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공동파가 어떤 곳인가? 수백 년 전통을 간직한 구대문파가 아닌가?
단풍은 짧게 운을 떼고 중인들의 반응을 기다렸고, 역시나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사황성이 본격적으로 중원 공략을 시작했다는 겁니까?”
종남의 삼절검이 크게 놀란 목소리로 단풍에게 되물었다. 그는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동이 무너진다면 사황성의 다음 목표는 섬서에 속한 종남과 화산이 될 것이니 그가 대경(大驚)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 모두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구대문파를 상대할 곳은 사황성 같은 거대 세력일 뿐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단풍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혼자만 아는 정보란 때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우월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법. 단풍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이거,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했나 봅니다. 사황성이 아닙니다. 여러 분들이 알고 있듯이 공동파와 사황성이 전쟁 중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던 과거의 상태로 되돌아간 상황이죠. 아마도 당분간 사황성이 중원 일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분간은요.”
다행이었다. 큰 놀람은 가셨지만, 그럼 대체 누가 공동파를 그런 꼴로 만들었는지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사람들이 그나마 친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는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단풍, 이제 쇼는 그만 하고 이야기하지.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네 장난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란스러움을 지운 건 여태 미동도 않던 화산 무룡의 딱딱한 말이었다.
그 말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여태까지의 장난스런 표정을 지우고 단풍을 쳐다보았다. 물론 개중엔 무룡의 ‘쇼’란 말을 이해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단풍, 난 개방의 후개야.”
무림맹의 정보망이 클까, 개방의 그것이 더 클까? 지금 상황에서 그걸 따지는 건 무의미할 것이다.
구대문파가 끼어든 문파대전이라면 무림맹, 개방 양쪽 다 모를 리가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구대문파 중의 유력 문파라면 그 정도 정보쯤을 입수할 조직은 갖춰져 있다. 화산파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게 당연했다.
단풍의 비밀스런 체하는 꼴을 장난으로 맞장구쳐 주고 있었던 이들이 배신을 때렸다.
무안함을 느껴야 하는데도 그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가 보다. 단풍이 속내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무룡 형은 언제 봐도 잘 벼린 칼 같단 말입니다. 매사 그렇게 태클을 걸다 보면 장가도 못 갈 겁니다.”
“나 장가갔다.”
다들 큭큭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떤 이는 무룡에게도 저런 면모가 있었나 하고 쳐다보고, 어떤 이는 단풍의 똥 씹은 표정을 보고 웃는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공동파가 소요파에 깨진 게 우리 전부를 소환할 일인가? 단풍, 들어봐서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면 십만 거지 떼의 침 세례를 받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거야.”
질질 끄는 분위기가 맘에 안 들었던지 이룡이 비아냥거림인지 농담일지 모를 소리를 했다.
‘소요파? 조연 님이 벌써 공동파를 넘볼 정도가 됐단 말인가?’
무룡이나 이룡과는 달리 정보 조직이 없는 일도회였다. 파도는 이룡을 통해 처음으로 소요파의 위업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 파도를 향해 일협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들과 조연은 모른다고 할 수 없는 관계. 아니, 친구 등록까지 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일 생길 때 손 벌릴 든든한 우호 세력이 생긴 것이다.
친우의 문파가 강해졌다는데 어느 누가 흐뭇하지 않을까?
이룡의 이죽거림까지 받고서야 단풍이 정말로 본내용을 토하기 시작했다.
“저도 그런 변방 이야기는 별생각 없이 넘기려고 했습니다. 오늘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죠. 사황성 침공이야 어차피 예정되어 있는 이야기고, 솔직히 다들 기대하고 있는 일이지 않습니까? 정사대전이 없는 강호란 너무 재미없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오늘 낮에 두통이라는 공동파 유저가 무림맹에 찾아온 다음부터는 갑자기 다른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공동에도 유저가 있었나?”
지금 강호에서 가장 인기 없는 문파는 바로 공동파.
삼절검의 말은 단순한 유저가 아닌 무림맹에 들락거릴 정도로 실력 있는 유저가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삼절검을 보고 단풍이 말을 이었다.
“저도 좀 의아스러웠죠. 그 친구 실력도 여기 계신 분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말입니다. 소요파를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되겠다는 겁니다. 잡초는 어릴 때 뽑아야 하는 법이죠.”
단풍이 이번에 한 말은 제대로 충격을 주는 말이었다. 산만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증발해버리고 침묵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소요파(逍遙派).
그곳이 어딘가?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가 아닌가.
강호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곳이 아니던가.
강호 최초의 유저 설립 문파. 강호 최초로 문파대전을 시작한 문파. 강호 최초로 유저 표국을 설립한 문파. 그리고 이번엔 강호 최초로 구대문파를 상대로 문파대전에 승리한 문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주인은 황금룡 조연. 지금 이 자리에도 강호팔룡 중 넷이나 자리하고 있지만,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조연은 그들과는 급이 다른 용중룡(龍中龍)이라는 걸. 어느 누가 조연과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무림맹 총사 단풍이나 개방의 후개인 이룡의 강호에서의 지위는 분명 조연보다 높았지만, 그건 강호 초창기부터 한 우물만 판 결과일 뿐, 조연처럼 매번 새로운 우물을 파고 파는 우물마다 맑고 맛있는 물이 나오게 할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조연의, 그 소요파를 지금 무너뜨리자고 하는 것인가?
단풍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중인들은 그가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인 그들은 강호의 기득권 세력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들이 바로 구대문파, 오대세가다.
하지만 강호의 모든 유저들은 잘 알고 있었다.
게임 강호가 지향하는 곳은 거대 집단의 지배로 유지되는 강호가 아닌 유저들이 세운 조그만 문파들의 세상이라는 걸. 지금이야 중소 문파들을 핍박하면서 그들의 세를 과시하고 있지만, 머잖아 그들은 대단한 반격에 직면할 것이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 낭인들도 배울 수 있는 심결 무공 때문에 대문파의 지위는 손색이 가기 시작했다.
각 문파의 최고 수준의 무공이 아닌 한 심결 무공에 대응할 수단은 없었다. 그리고 그 최고 수준의 무공이란 말 그대로 비기(秘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나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문파의 모든 유저들이 습득하기란 불가능했다.
소문은 당사자가 가장 늦게 듣는다고 했다. 소요파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강호의 일반 유저, 중소 문파들은 소요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낙양의 무림맹이 아닌 새로운 무림맹을 꿈꾸고 있었고, 소요파가 당연히 새로운 무림맹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잠재적인 적이자, 지금은 경쟁자인 이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흐음, 흥미가 동하긴 하는걸? 그런데 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야? 지금 소요파를 발라버리려고 해도 무림맹은 이번 일에 불개입하기로 결정 난 것으로 아는데?”
각자의 이해관계를 따져 보는 시간은 지났다. 이룡은 좋은 방법만 있다면야 단풍의 생각에 동참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다른 이들의 의견은 듣지 않았다. 단풍이 사람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부터 제가 드릴 이야기는 밖으로 새나가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제 생각이 탐탁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밖으로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확실한 결정을 하라는 소리였다.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파도와 일협이었다. 그들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파도가 단풍과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도회에서 도움 드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집안일이 밀려 있는 마당에 바깥일까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무쪼록 다들 원하시는 바를 얻길 바라겠습니다.”
파도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그 뒤를 일협이 따랐다.
파도의 뒤를 이어 일어난 이는 무당의 왕지락이었다.
파도의 경우는 그저 하남의 유력 인사라 예의상 부른 것. 그가 이끄는 일도회만을 생각하자면 이 자리에 올 자격은 없었다. 때문에 그가 반대한 것은 별 의미를 주지 못했지만, 왕지락이 일어선 것은 너무 뜻밖이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왕지락의 입만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다른 일이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도움 드리겠지만, 이번 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무당의 일인자는 제가 아니라 현운자 님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운자 님이 소요파에 관한 일이라면 적대하지 말라고 예전에 미리 명을 내렸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왕지락은 떠났고, 남은 이들은 침음성을 토했다.
현재 강호에서 가장 많은 유저들이 가입한 문파는 무당파였다. 종남과 화산을 합해도 무당파의 성세엔 대적할 수 없었다. 무당에 견줄 문파는 겨우 소림 정도였으며, 그것도 조금은 손색이 있었다. 그만큼 무당의 이탈이 주는 충격은 컸다.
짝! 짝!
분위기가 처진다 싶자 단풍이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더 이상 이탈자가 없다는 걸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자리에 남은 분들은 제 생각에 전적으로 따라주신다고 여기겠습니다. 그럼 남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단풍의 이야기는 꽤 길었다. 가끔 착각에 빠지는 습관이 있긴 하지만, 무림맹의 총사는 거저주워 먹은 자리가 아니라는 듯 단풍의 이야기는 꽤 논리적이고 자세했다.
“…날짜와 시간을 제대로 맞춰주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소요파가 망하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 되긴 했습니다만, 보안 문제는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조연의 잔머리가 강호 제일이라는 걸 다들 아시죠? 사전에 정보가 노출되면 그가 또 무슨 궤계(詭計)를 꾸밀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지. 그럼 다 끝난 건가?”
“네, 별다른 질문이 없다면요.”
“그럼 난 이만. 요새 용 찾는 중이라. 수고해라. 다른 분들도 즐강호 하시고요. 형님, 그만 갑시다.”
이룡이 일어났다. 오늘은 제발 용 제보가 들어오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가 일어서자 찰떡궁합 공갈대사도 따라 일어섰다. 그들의 태도는 여태 했던 이야기보단 정말 용 찾기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이룡 일행이 집무실을 나가자 다른 이들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내 단풍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하아, 정말이지 먹고살기 힘들구만. 이렇게들 말발이 안 먹혀서야.”
* * *
일단 자리를 피하긴 했지만 파도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일도회는 여러모로 바쁜 시기였다. 집안일이 산적해 있다는 말은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쁘다고 해서 소요파를 이대로 망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요파가 이런 견제를 받는 건 그들이 너무 잘나서다. 대문파 입장에선 모난 돌이겠지. 그리고 언젠간 일도회도 마찬가지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파도도 조연처럼 강호 시작부터 유저 문파를 세우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었다. 최강의 유저 문파가 되겠다는 것도 똑같았다. 다만, 그는 스스로 그만한 역량이 갖춰졌을 때를 기다렸던 것이고, 조연은 일단 일을 벌인 것이 다를 뿐이었다.
결국 처음엔 작게만 보였던 그 차이는 지금 소요파와 일도회의 강호에서의 위상으로 변해버렸지만 말이다.
“형! 설마 이대로 모른 척하는 건 아니겠죠?”
옆에서 같이 걷고 있던 일협이 마치 따지는 듯한 어투로 물어왔다. 일협도 소요파에 파도만큼의 호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말에 파도가 걸음을 멈추고 일협을 응시했다.
일협도 호응하듯이 멈춰 섰다.
“우리 망해도 좋을까?”
짧은 말에 담긴 의미가 간단치 않다.
그런데도 일협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인생 뭐 있습니까? 재밌으면 됐죠.”
파도가 씨익 웃는다.
“역시 넌 또라이야.”
“형두요.”
지킬 것이 많은데도 거침없이 위험을 감수한다.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사람을 충분히 무모하게 만들 수 있다.
더구나 그들에겐 그가 있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자가.
* * *
감숙.
“파도가 무슨 일이지?”
한참 환생단 작업을 하고 있는데 파도의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친구 등록을 해놓긴 했지만 그에게서 전서구를 받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낭에서 전서를 꺼내 읽다가 난 ‘억!’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수신자:조연
조연 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때 같이 건달바왕을 공략했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강호를 하면서 그때만큼 즐거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소요파에 한번 놀러가야겠다는 이야기를 일협이와 종종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매번 생각에 머물고 마네요. 가지 못하면 소식이라도 자주 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구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쩌죠? 이렇게 처음으로 연락을 하면서 안 좋은 소식을 알리게 돼서 말입니다.
방금 전에 은룡 단풍(그가 무림맹 총사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이 주위 대문파들의 수장들을 소집했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죠. 그 자리에서 단풍이 한 이야기가 제가 이렇게 조연 님에게 연락을 취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단풍은 소요파를 적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뉘앙스로 봐서는 무림맹 차원의 대응은 아닌 것 같지만, 그 자리에 있던 문파 대부분이 단풍의 생각에 동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림, 개방, 종남, 화산, 제갈세가, 팽가, 황금산장이 그들입니다. 무당파는 어째서인지 이번 일에서 발을 빼기로 했습니다.
조연 님! 힘드실 테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강호의 모든 중소 문파들이 소요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 거대 문파들의 횡포를 보란 듯이 밟아주세요! 그들에게 유저 문파의 무서움을 보여 주세요! 조연 님에겐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는 걸 저 파도와 일협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급한 상황이라 일단은 이렇게 글로 보냅니다만 곧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발신자:파도>
“장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너무 기가 막히면 화낼 힘도 없어진다. 지금 내 꼴이 딱 그 격이다.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이놈들이 대체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러는 거야!’
“뭔데 그래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현운자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에게 조용히 파도의 전서를 건넸다.
그러자 현운자도 금세 나와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잠시 동안 우리 둘 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
현운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나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무림맹은 개입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맹주를 다시 만나보는 건 어때요?”
“…….”
그럴 수 없다는 건 현운자도 잘 알 것이다. 지금 사태는 공동파의 경우처럼 각 문파들 개개의 문제이다. 무림맹은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하아… 정말… 수가 없는 건가요?”
현운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갑갑한 건 내가 더하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찬 것인지 무겁고 어지럽다.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머리를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자식이 이 빌어먹을 상황을 만들어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 하나는 제대로 만들어놨다. 간단하고 확실하게 날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일단 움직여 보긴 해야겠죠. 저들을 일일이 다 만나기는 불가능하니깐 은룡을 만나야겠습니다. 저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면 피해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말처럼 일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넋 놓고 있기엔 지금까지 쏟아온 수고가, 걸어온 길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해서 결과까지 꼭 절망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소요파는 그렇게 녹록치 않은 곳이란 말이다!
소요파는 비상사태에 빠졌다. 연락을 받자마자 모든 문도들이 급히 문파로 되돌아왔다. 마음 편히 사냥이나 하고 있을 정신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난 무림맹 총사 단풍을 만나러 낙양으로 떠났다. 술사단주 고현은 화산과 종남을 수습하러 섬서로 향했다. 조자건과 조립산은 팽가와 제갈세가로 떠났다.
수세에 몰린 우리에게 공동파와의 다툼은 나중 문제였다. 공동파와의 휴전을 위해 소소 누님을 파견했고, 미약한 가능성을 믿고 각룡이 형이 사황성으로 급파됐다.
그러나 만족스런 대답을 가지고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풍은 날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건 다른 대문파들을 찾아간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소요파의 접근을 피했다.
공동파는 기회다 싶어 더욱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고, 사황성은 손사래를 치며 발을 뺐다.
천지간에 손 벌릴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상황을 뒤로 물릴 수는 없었고, 이제 남은 건 이대로 부딪쳐 가는 것뿐이었다. 그야말로 소요파는 백척간두(百尺竿頭),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것이다.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될 만한 일도 있기는 했다. 문파대전 이틀 전, 낙양의 파도가 일도회 회원 일백을 데리고 합류해온 것이다.
그들이 왔다 해서 국면이 희망적으로 변할 리는 없지만,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우릴 위해 달려온 그들이 눈물 날 정도로 고맙고 또 고마웠다.
하지만 애꿎게 죽을 게 뻔한 그들이었기에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소요파 일에 참견한 죄로 그들마저 파멸할 게 뻔했다. 그들을 돌려보내야 옳았다.
“각오하고 온 겁니다. 설령 이번에 패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기나긴 전쟁의 서막일 뿐입니다.”
파도의 그 말이 날 일깨워줬다. 정신없는 혼란에 굳어버린 머리가 파도의 한마디에 산산이 깨져 나갔다.
그야말로 패배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가 아닌가. 두 다리를 잃은 손빈은 결국 방연을 잡지 않았는가 말이다.
파도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아마 난 다음 날에 일어난 그 사건으로 정말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