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장. 삐끗
공동산 상청궁.
단아하게 치켜 올라간 처마엔 수천 년간 이어 내려온 수도(修道)의 예기가 뿜어져 나오고, 도궁 옆 수령(樹齡) 오백 년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에선 그윽한 솔향이 도학(道學)의 정화(精華)처럼 산사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다. 도가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솔향은 상청궁을 한 바퀴 휘돌더니 돌계단을 타고 내려와 계율전(戒律殿), 복마당(伏魔堂), 삼청전(三淸殿)으로 파고든다.
공동 제일의 무력 집단 거처답게 웅혼한 기세를 뿜어내는 복마당 전각 앞엔 석판으로 이루어진 사방 삼십여 장은 됨 직한 연무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검을 찬 청년 도사들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누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무얼 생각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고, 누구는 건방지게 팔괘(八卦)를 의미하는 선대의 석조물에 팔짱 낀 자세로 몸을 기대고 있다.
지금은 난주 소요파와 일대결전을 벌이는 긴박한 상황. 그런데도 이들의 모습에선 그 어떤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대(對) 소요파와의 문파대전의 총괄 지휘자 참마단(斬魔團) 단주 두통 앞으론 쉼 없이 전서구가 날아들고 있었고, 들어온 만큼의 숫자가 떠나가고 있었다.
<수신자:공동 참마단주 두통
마종산 일주문에서 적도의 수괴 조연 일행과 조우. 반 각 추격 후 전투 돌입. 복마금검수 3인 전멸. 적은 봉황령으로 도주. 생존 은검수 45인 현재 적 추격 중.
발신자:공동 복마단 819호>
조연과 한판 어우러졌던 공동 도사 NPC 중 일인이 보낸 전서구였다.
복마금검대는 공동파 최강의 무력 집단인 복마궁 소속의 특급 고수들이었다. 그 수라고 해봐야 겨우 오십밖에 되지 않지만, 오백의 은검대나 이천의 철검대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최절정급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날다람쥐처럼 내빼기만 하는 소요파 놈들에게 강력한 뒤치기를 할 생각으로 내보낸 금검수 셋이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두통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전서구에 적힌 내용은 이미 십 분이나 과거의 것. 그가 전서구를 다시 날린다고 해봤자 조연 일행을 추격하는 문도들이 내용을 확인하는 것도 앞으로 십 분 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땐 이미 공동산의 이름 모를 언덕에서 그들이 차디찬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게 뻔했다.
대전이 벌어지기 전엔 자신들의 필승이라고 여겼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 갔다. 이런 식으로 공동파의 인원이 계속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조연을 잡지 못하는 한 문파대전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형님! 소요파 놈들 올 때쯤 안 됐어요?”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두통에게 도관 대신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젊은 청년 도사가 다가와 물었다. 금검을 차고 있는 걸로 보아 복마금검대 소속인 문도인 듯했다.
그런데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유저인데도 벌써 복마금검대라니!
복마금검대의 무위가 최절정급과 우열을 따지기 어렵긴 했지만, 기실 확실한 최절정의 경지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최절정의 경지라고 하면 공방 기술뿐 아니라 신법, 보법, 경공술 등 모든 재간이 이전 단계와 확연히 금 그을 정도로 차이가 나야 하는데, 복마금검대는 단지 파괴력 강한 공격과 강한 체력에만 치중된 무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새외 세력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공동이다 보니 미래의 초절정 고수 대신 현실의 최절정급 고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강호 유저들의 평균치를 생각해보자면 유저가 최절정급 무위를 지녔다는 건 대단한 일임이 분명했다.
“글쎄,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아마도 안 올 것 같다.”
두통이 질문을 던진 젊은 도사, 주호를 향해 다 읽은 전서를 건네며 대답했다.
주호가 전서를 쓱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잔머리로 밀고 나가네요. 조연 이놈 못 잡으면 지게 생겼잖아요.”
이미 살해당한 공동파 문도의 숫자만 일백이 넘어갔다. 그에 비해 소요파의 피해는 겨우 열둘. 상황을 뒤집어엎으려면 조연을 잡는 길밖에 없었다.
조연이 소요파 거점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동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자칫 자충수가 될 수 있는 일. 그럼에도 두통은 공동의 절대고수들을 풀어 조연을 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한해 한시적으로 공동의 총지휘를 맡고 있다지만, 그가 명을 내릴 수 있는 건 복마당 소속의 무사들밖에 없었다. 복마당 외에 공동의 스물 남짓한 유저들의 모임인 참마단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복마금검대 소속인 주호를 제외하면 아직 절정도 되지 못한 하수들뿐. 머리는 도움이 될지언정 그들의 검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진정한 고수들인 장로원 소속의 전, 현직 장로들은 장문령으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어쩌면 소요파가 경내에 난입하더라도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용하기엔 너무 무거운 공동파의 꼴은 딱 수렁에 빠져 들어가는 금불상 같았다. 입가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해탈의 경지를 보여 주지만, 제 몸뚱이가 곧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그 꼴말이다.
“형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속가 애들 불러들이죠?”
골똘히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 보던 주호가 결연한 낯빛으로 두통을 보며 말했다.
지금 감숙과 인근 사천, 섬서, 하남, 영하성에서 모여든 공동 속가와 지파무인들의 수효는 모두 5천. 결코 적지 않은 이 대군은 지금 공동파에 있지 않았다. 문파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소요파를 향하고 있었다.
두통은 속가와 지파에서 지원 나온 이들을 믿고 있었다. 그가 알기로 소요파의 실제 전력은 2백 명가량의 일반 유저, 나머지 8백에 달하는 NPC 문도들은 소요파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들을 털어먹는다면 문파대전이 판정으로 가더라도 공동이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주호는 그 유일한 승부수를 되돌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두통의 눈길을 받고 주호가 말을 덧붙였다.
“만약 조연이 소요파에 웅크리고 있었다면 금검대를 총출동시켜서 잡아버린다면 일이 간단했을 거예요. 속가무인들의 포위망을 뚫을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녀석도 그걸 알고 있었던 듯해요. 그러니 튼튼한 우리를 뛰쳐나온 거겠죠. 주인 없는 소요파를 공략할 필요가 있을까요?”
언뜻 괜찮아 보이는 제안이었지만 두통은 주호의 말에 이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판정으로 간다면 복마금검대를 지금이라도 소요파로 보내는 수도 있잖아?”
“지금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복마금검대 말고 더 있나요? 설마 은검대나 철검대 나부랭이들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죠? 금검대를 소요파로 돌리면 우리에겐 조연의 침탈을 막아낼 병력이 없게 된다구요. 그렇다면 결국 속가무인들만으로 소요파를 뚫어야 하는데,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죠. 적들보다 우리 쪽 피해가 더 많을 테니까요.”
두통은 주호의 말에 머릿속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주호의 말대로라면 지금 소요파로 향하는 속가무인들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호가 미처 다 하지 않은 뒷말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지금 공동산에는 소요파에 우호적인 일반 유저들의 천라지망 같은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넘어선 역(逆)천라지망세를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공동산에 큰길, 작은 길이 무수하다지만, 5천에 달하는 속가무인들이라면 쥐새끼 하나 새지 못하도록 공동산 전역을 철통같이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재주가 아니라면 조연이 놈은 공동산에 뼈를 묻게 되겠지.’
주호의 의견을 좇기로 결정한 두통이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품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손엔 금으로 조각된 복마상(伏魔像)이 들려 있었다. 바로 이번 문파대전의 총지휘를 맡은 두통의 지위를 상징하는 지휘령(指揮令)이었다.
“출병한 군대는 황제의 명이라도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전서구를 날려 봤자 행보를 잠시 묶어둘 수밖에 없을 것이야. 당장 전서구를 날릴 테니까 주호 너는 이걸 들고 속가무인들을 이끌고 있는 해령 진인을 찾아가 병력을 되돌리도록 해라. 늦어도 문파대전 종료 세 시간 전까지는 공동산에 도착해야 할 것이야.”
“늦지 않겠습니다!”
주호가 두통이 내민 지휘령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챙기고 큰 소리로 복명했다.
* * *
“이 분 전에 스물세 명이 지나갔습니다!”
갈림길에 숨어 있던 낭인 유저가 튀어나오더니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지금 우리 뒤를 쫓는 공동 도사들의 수는 열다섯. 오십이 넘는 수가 이젠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미약한 병력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낭인 유저가 알려 준 방향으로 문도들을 이끌었다.
지금 내 머릿속엔 미리 숙지해둔 공동산 전역이 한 장의 지도를 펼친 형태로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에 이렇게 유저를 만날 때마다, 그리고 가끔씩 전서구가 도착할 때마다 각 조의 현재 위치가 수정되고 있었다.
‘녀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곧 날 잡으러 오겠지.’
공동의 객관적인 전력은 소요파의 10배가 넘는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객관적인 전력. 두통이 녀석이 중간에서 어떤 꼼수를 부린다 해도 사황성의 흑룡처럼 전권을 휘두르는 위치가 아닌 한 최후에 잡아먹힐 자는 공동파다.
“그대로 쳐!”
2분 전에 지나갔다는 공동 도사들이 백호단과 어우러져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번 산길은 조금은 넓은 공간이어서 스물의 백호단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공동 도사들은 단 한 명도 쉬는 이 없이 바삐 검을 놀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시끄럽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고, 햇빛에 반사되는 검광이 눈을 괴롭히고 있었다.
굳이 내 명령이 아니더라도 다들 이미 전권(戰圈)에 뛰어들고 있었다. 고현은 부적을 만천화우처럼 흩뿌리고 있었고, 광견의 대력금강장과 광우의 진결육합권이 거세게 공동 도사들의 등판에 작렬하였다.
“수고들 많으십니다!”
광우가 백호단의 문도들을 향해 웃음 지으며 외쳤다.
우리가 들이닥치자마자 간신히 유지되던 공동 도사들의 전열 곳곳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한시가 아까운 상황에 나는 다시 문도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지체 말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세요! 지금처럼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달고 오던 공동 도사가 마침 지척까지 접근한 상태. 우린 그들을 달고 뛰었고, 백호단 문도들도 상대를 떨쳐 내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공동산 전역이 소요파와 공동파가 일으킨 자잘한 충동으로 들썩였다.
곳곳에서 잠깐잠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리를 바꾸어 또 충돌을 야기하고 있었다. 한번 충돌이 벌어질 때마다 공동파 도사들의 머릿수는 눈에 띄게 줄어만 갔고, 그렇게 3시간가량이 지났을 즈음엔 절정의 경지인 공동 도사들의 무한한 내력마저도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내공이 완전히 소진된 공동 도사들은 걸어서 우릴 쫓다가 내공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다시 뛰기를 거듭했다. 그 시점부터 우린 그들과 싸우기를 그만두고 약속된 장소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월석협(月石峽)에 이르자 백호단 단주 조자건이 나와서 인사를 건넨다.
“그래, 수고 많았어. 상황은 어때?”
“백호단은 전부 모였고 현무단도 다 모였습니다. 이제 소소 누님네 조하고 주작단 2개조만 더 모이면 됩니다.”
“그래? 생각보다 늦네. 일단 어느 쪽에서 올지 모르니까 마종산 쪽으로 애들 돌려세우도록 하자.”
천혜의 지형이 있다면 이곳, 월석협을 이르는 말일 것이리라.
좌로는 공동산을 빠져나가는 관도로 통하고, 가운데 길은 봉황령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측의 소로를 빠져 돌아가면 공동파가 자리한 마종산이다.
어떤 대응이라도 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월석협이었다.
다른 단주라고는 나이 어린 소봉이뿐이었던 터라 집결한 문도의 지휘는 자건이 맡고 있었다.
조자건이 이리저리 분주히 뛰어다니더니 곧 문도들 전체가 마종산 방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왼쪽을 맡기로 하지.”
뒤돌아서 우리 조원들을 보고 말했다.
여태까지의 움직임은 각 조장들의 판단에 따라 유동적인 움직임을 보였지만 지금부터의 진행은 모든 문도들이 숙지하고 있었다.
좌측의 관도로 향하는 산길로 일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시작됐다. 얍삽한 작전이 말이다.
내공이 깡그리 사라져 순한 양이 되어버린 공동 도사들을 밀어내고 길에 인의 장막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불도저에 흙이 밀리듯이 오십은 족히 됨 직한 공동 도사들이 힘없이 우리 기세를 당하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공사 완료!”
“이쪽도 완료!”
곳곳에서 흙 고르기 작업을 끝낸 불도저 1, 2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야, 이놈들아! 우리 들어갈 길은 터놔야지!”
막 작업을 끝냈는데 인간 담벼락 뒤에서 앙칼진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서 뚫고 와요!”
뭐라 뭐라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동 도사들의 장벽 한 곳이 허물어졌다. 그러자 소소 누님의 척살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작할 땐 여덟 명이었는데 남은 인원은 겨우 넷뿐이었다.
같은 척살단원인 이광이 눈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소소 누님이 손사래를 치며 힘없이 말한다.
“웬 황금검 든 놈들 때문에 넷이 죽었다. 더 이상은 묻지 마라. 귀찮다.”
넷이 자리를 비웠다지만 우리도 애먹은 금검수를 둘이나 제압했다는 건 굳이 직접 보지 않았어도 대단한 사투였다는 걸 충분히 짐작케 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소소 누님네 조는 공동 도사들도 끌고 오지 않았다. 그런 걸 신경 쓸 정도의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하긴 겨우 네 명만으로 공동산을 돌아다니는 일은 자살 행위나 진배없었을 것이다.
문도들이 쳐 놓은 방어진 안에서 기진맥진한 소소 누님네 조원들이 운기 조식을 시작했다.
그들이 겨우 정신을 추스를 즈음, 이번엔 초췌한 모습의 조립산이 진영으로 돌아왔다.
조립산 일행의 수도 겨우 여섯. 그들도 금검수들을 만나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끝내 주작단의 1개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단주인 조립산이 전서구를 날려 보았지만 묵묵부답. 그쪽 조는 전멸했다는 걸 의미했다.
월석협에 살아서 모인 문도는 모두 117인. 소요파를 지키고 있는 청룡단을 제외하면 서른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생각보다 피해가 심한 편이었지만 작전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다. 길목을 틀어막을 정도의 병력만 존재한다면 이 얍삽한 작전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말이야.”
월석협에 소요파가 집결해 있다는 이야기는 공동파 내부에서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주인 내가 있다는 것 역시도.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들은 반드시 이곳으로 병력을 내보낼 것이다. 나 조연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대단한 고수들이 출진할 것이냐는 것.
금검수들을 능가하는 장로급 고수들이 내려온다면 월석협에 흐르는 계수(溪水)는 붉게 물들 것이다. 우리 소요파의 피로.
“연이 형! 시작한 것 같은데요?”
이제 문파대전 종료까지 세 시간 즈음이나 남았을 시각이었을까? 마종산 방면을 맡고 있던 소봉이 뒤돌아 소리쳤다.
고개를 빼서 바라보니 푸른 도포를 휘날리며 수백의 공동 도사들이 산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공동 본산의 제자들이었다. 개중엔 우릴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금검수들도 띄엄띄엄 보이고 있었다.
‘금검수들이라면 많이 붙을수록 고마울 뿐이지.’
금검수의 경신법 수준은 이미 겪어봤다. 저들은 결코 밀집된 공동 도사들의 장벽을 넘어오지 못할 것이다.
“신경 쓰지 마! 벽 넘어오는 놈들은 없을 거야!”
그렇게 소봉이 녀석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번엔 현운자가 옆구리를 찔러온다.
“이쪽도 오는데요?”
척살단이 맡은 관도 쪽에서도 새로운 인물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수가 몰려든 것인지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 복색도 가지가지. 공동의 속가문파들이었다.
산길 꺾이는 곳까지 빽빽이 적들로 가득 찼다. 보이지 않는 곳엔 또 얼마나 많은 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몇 만이 모이든, 몇 억이 숨어 있든 그들과 손을 섞을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우리에겐 최강의 방어막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공 제로인 적군이라는 방어막이.
어쨌든 이제 때가 무르익은 것 같다. 아궁이에 불 지핀 지는 오래였고, 밥은 뜸까지 다 들여 놨다. 이젠 주걱 들고 솥뚜껑을 열어젖힐 때였다.
“시작해도 될 것 같네요.”
현운자를 바라보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자 현운자가 입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리더니 고개를 까닥인다.
하루 종일 날 따라다니기만 했지 막상 손도 풀어보지 못한 그였다. 이제 그 심심함을 보상받을 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현운자의 행보도 사실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그가 내릴 결정이 얼마나 그를 힘겹게 할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운이 좋으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정말 재수가 없다면 그의 파멸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현운자는 같은 구대문파의 지위에 있는 공동파를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얼른 끝내야 할 것 같네요. 저쪽도 패는 다 보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현운자가 손가락을 들어 척살단이 맡은 관도 쪽 허공을 가리켰다.
신인(神人)인 것일까?
어풍비행술(御風飛行術) 같은 사기 무공은 아니었지만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산길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공동 속가무인들의 어깨, 머리를 밟고 이곳으로 짓쳐들어오고 있는 세 인영(人影)이 있었다.
몇 번 견식한 적 있던 구대문파 장로급의 경공술이었다. 저들은 아마도 속가문파들을 책임지고 있는 수장들일 터.
“고수들이 옵니다! 단주들은 다들 준비해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모두 초절한 경공술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나마 공동 본산의 장로급 고수들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본산의 장로들이라면 겨우 셋이 아니라 서른이 넘는 숫자가 출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최절정급 고수 셋이 추가됐다지만 상황이 힘겹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공동 도사들의 지원이 없는 이들의 단순한 난입은 의미 없는 행동일 뿐이다. 소요파 일백 무인들은 겨우 ‘셋’만 상대하면 되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체가 되어주는 일뿐이었다.
“그럼 우린 가보겠습니다. 잘 막고들 계세요!”
사람 머리를 징검다리 삼아 날아오는 놈들은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것이다.
난 현운자를 끌고 봉황령으로 뻗은 가운데 길을 선택했다. 이쪽도 맥 빠진 공동 도사들이 장벽을 이루고 있긴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해 그 수가 적었다.
문도들이 잠깐 내준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공동 도사들의 몸뚱이가 묵직한 타격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고개를 떨구고 축 늘어진 놈을 잡아끌어 뒤로 흘려보내고 다시 앞길을 뚫기 시작했다.
큰 위험 없이 월석협의 포위를 뚫을 수 있었지만 공동산은 갑자기 미어져 들어온 공동 속가제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때론 맞아 싸우고, 때론 꽁지 빠져라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30분가량을 공동산에서 헤매고서야 우린 공동 본산이 자리한 마종산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끄윽… 끅…….”
강인한 인상의 중년 검객이 허리를 접고 무너져 내렸다.
‘하아,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만.’
마종산까지 산개하고 있던 마지막 공동 속가무인이 정리됐다. 다른 적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나올 것 같지는 않네요.”
현운자가 손을 탁탁 털면서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가만히 고갤 들어 그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말 안 하는 게 나으려나.’
지금 현운자의 얼굴은 한 시간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단정하고도 청수했던 얼굴은 어디 가고, 냉혹하고도 강퍅한 사내의 얼굴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죽인 도사의 수는 채 열도 되지 않는다. 그동안 쌓아놓은 명성치가 벌써 다 사라질 리는 없었다. 현운자가 이렇게 변한 건 무당 문도인 그가 같은 구대문파를 적으로 삼은 결과로 보였다.
“들어갑시다. 상청궁 위치는 잘 알고 계시겠죠?”
“그럼요. 입구 막히기 전에 빨리 들어가죠.”
산문을 통과해 산길을 바람같이 내달렸다.
공동파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우윳빛 백색 장검을 비껴 찬 도사들이 정문 안팎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설마 단독으로 쳐들어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녀석들은 어슬렁거리고만 있었지 자신들 몸으로 공간을 틀어막고 있지는 않았다.
‘너희들의 방심이 파멸을 자초할 것이다.’
과연 NPC는 역시 NPC일 뿐이다. 놈들은 우릴 발견하자마자 호각을 불고 맞서 싸우려고 달려들었다. 절대 유저들이라면 하지 않을 동작들.
“그대로!”
현운자는 좌로 꺾었고, 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갔다. 경계무사들이 검을 휘둘러보기도 전에 우리의 신형은 그대로 공동파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 * *
<수신자:두통
월석협은 철통같이 틀어막았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조만간 조연의 목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신자:주호>
“으하하! 드디어 쥐새끼 같은 조연 이놈이 외통수에 걸렸군.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수천의 무사를 뚫고 나올 수는 없겠지!”
전서구를 받자 호탕하게 웃어재끼는 두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나 있을까? 그가 외통수로 밀어 넣었다고 하는 그 작전이 조연의 미끼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수천의 병력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걸린다라? 겨우 이백도 안 되는 놈들인데 무슨 시간이 걸린다는 거야? 아니지, 놈들이 제법 한가락 하는 모양인데, 숨통을 끊으려면 확실히 끊어줘야겠지.”
어차피 공동파 내부에는 병력이 많았다. 두통의 지휘하에 있는 복마당을 제외하고도 장로원에 호법당도 있다. 거기에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이대제자들의 수는 좀 많은가?
빠른 결말을 보기 위해 남은 금검수들을 모두 내보내기로 마음먹은 두통.
그가 금검수들의 우두머리인 복마금검대주에게 막 명령을 내리려는 때였다.
삐- 익! 삑! 삑!
“……?”
갑자기 웬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정문에서 날다람쥐 같은 인영 두 개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상청궁 방면으로 잽싸게 뛰어간다.
두통은 순간적으로 눈을 비볐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함도 잠시. 두통이 고함을 지르면서 냅다 괴인영들을 쫓기 시작했다.
“금검대주! 애들 전부 데리고 따라와!”
괴인영들은 어느새 거리를 50여 장이나 벌려 놓고 있었다. 그들은 한눈을 팔지도 않았고, 허둥대지도 않았다.
막아서는 문도가 있으면 옆으로 피해가거나 머리를 뛰어넘었다. 조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줄곧 앞만 보고 달렸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상청궁이었다.
“조연이다! 적의 수괴가 쳐들어왔다!”
어슬렁거리던 이대제자들이 괴인영의 정체를 알아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거리가 멀어 괴인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두통도 침입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저놈이 어떻게? 월석협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갑작스런 상황에 크게 놀란 두통이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이번 전쟁의 총지휘자다웠다.
“그만! 금검대주! 멈춰라!”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두통이 복마금검대 전원을 멈추게 했다.
“교란책이다. 금검대주는 금검대 전원을 데리고 입구를 틀어막아라.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자리를 이탈해서는 안 될 것이야!”
두통은 옳은 판단을 하고 있었다. 상청궁으로 향하는 적도는 겨우 둘. 그곳엔 지금 공동의 장로들과 장문인이 거처하고 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난입을 감행했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옥에 발을 담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금검대주가 검배를 취하고 명을 받았다.
금검대가 떠나는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서야 두통은 천천히 놈들이 향한 상청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또라이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네. 하긴 또라이 생각을 누가 알겠어?”
한껏 조연의 행각을 비웃어주면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두통.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상청궁 앞 돌계단에 도착해서 두통이 본 것은 빼곡히 궁 입구를 에워싸고 있는 공동 문인들이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왜 안 들어가고 있어?”
하지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이름도 없는 무명 NPC일 뿐이라 두통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들 이대제자들에 대한 지휘권은 그에게 없었다.
별수 없이 두통은 고개를 빠끔히 내밀어 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가 보이겠는가? 그 앞에 가리고 선 문도들의 수만 해도 얼추 백이 넘는데 말이다.
‘조연이 놈이 또 무슨 사악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볼 수 없으니 갑갑하다. 그리고 갑갑한 마음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NPC 문도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입구가 봉쇄됐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상청궁의 입구를 틀어막으려면 적어도 세 명이 필요했다. 들어간 적은 둘인데 어찌 세 명이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장로와 장문인이 입구를 막고 있는 적들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도 없었다.
문도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도 난마처럼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공동파가 소요파와의 문파대전에서 패배했습니다.]
[공동파의 문파 명성이 100,000 하락했습니다.]
[공동파의 모든 문도원의 명성이 크게 하락했습니다.]
갑자기 신호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됐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두통의 얼굴이 경악에서 분노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야!”
분노를 표해도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자식들! 야, 이 새끼들아 비키라고!”
안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문도원들은 상청궁 입구를 막고 있었다.
“이, 이, 이!”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뭐라 욕을 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제대로 토하지도 못하는 두통이었다.
그렇게 문파대전이 종료된 지 한 30초나 흘렀을까?
그때서야 공동파 NPC 문도들이 입구를 풀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통이 해산하는 문도들을 헤치고 상청궁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다.
그 안에서 그가 본 장면은…
이미 죽어 시체가 되어버린 장문인 해광, 그리고 소요파 문주 조연뿐이었다.
“어, 두통 님이네? 간만입니다!”
남은 열 받아 죽겠는데 조연은 장난으로 대응한다. 기가 막힌 두통은 할 말을 잃고, 조연은 그 옆을 유유히 지나쳐 상청궁을 빠져나간다.
“조연 이놈!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냐!”
이미 계단에 발을 얹고 있는 조연을 향해 두통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열심히 궁금해해보세요. 두통 생길 때까지.”
조연의 이죽거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