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9장. 뒤통수 (40/62)

제39장. 뒤통수

해운이 돌아가자, 척살단을 소환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많은 인원을 투입하는 것보단 소수 정예가 나았다. 어차피 그쪽 인원도 10명 정도라고 하니, 그리 문제없는 인선이었다.

그때 즈음엔 더 이상 결맹을 요청해오는 NPC 문파도 없었고, 혹시나 찾아오는 문파가 있다면 우선은 미뤄두라고 총관에게 일러두었다.

열넷의 척살단은 도착하자마자 시작부터 툴툴거렸다.

“아! 정말이지 왜 이렇게 우리만 괴롭히는 겁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도 부려먹으라고요!”

광견이 놈 시비 거는 말투야 원래 그랬으니 별 신경도 안 쓰인다. 문제는 요놈.

“저는 왜 오라고 한 겁니까? 전 이제 척살단이 아니라 술사단이라구요! 더구나 단주! 함부로 몸 굴리던 예전의 고현이 아니란 말입니다. 강호 최초의 최고급 부적술사란 말입니다!”

이놈 이거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 건방지다. 누구 때문에 그 최고급 부적술사가 된 건데!

다행이랄까? 나만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나 보다. 광견이 놈이 고현을 보고 한마디 한다.

“어쭈, 고현? 많이 컸다? 그럼 넌 함부로 몸 굴리는 인간이 아니고, 나 같은 일반 단원은 막 움직여도 된다는 소리냐? 요새 비급 몇 개 날로 챙겨 먹더니만 아주 뵈는 게 없나 봐? 그리고 문주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문주 형 성질 드럽다는 거 잘 아는 놈이 파문당하고 싶어서 그러냐?”

광견이 이놈도 만만치 않다. 고현이 놈 갈구는 건 좋은데, 내 성질 더러운 건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 이것들이 짜고 날 골탕 먹이는 건지 도대체가 분간이 안 간다.

하여간, 이놈 기세가 만만치 않다. 환생단 덕택에 마인 체질은 풀렸다지만, 여전히 아이디는 빨간 광견이다. 거기에 인상도 여전히 더럽다.

박자감 잘 살린 양아치 특유의 말본새에 고현이 놈이 움찔한다. 찍소리 못하는 걸 보니, 은근히 광견이를 두려워하고 있었는가 보다. 크크큭.

“다들 장난은 그만 하고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 이번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척살단다운 임무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한참 동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해줬다.

“그러니깐 저놈들이 먼저 계약을 위반했다는 거네요?”

조용히 듣고 있던 광우가 예리하게 중요한 부분을 짚어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그런데 꼭 위반이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어. 애초 불가침 조약의 원래 의도는 양쪽에서 선점하고 있던 사냥터나 이권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야. 사황성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히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지. 저쪽에서 그런 식으로 변명을 한다면 더 이상 따지기에도 무리가 있어. 더 따지려 한다면 적대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그럼 연이 형 생각은 아직은 적대감을 드러내선 안 된다, 이건가요?”

“맞아. 계략이 아니라, 자체 전력으로 사황성을 상대할 정도가 될 때까진 서로 편하게 지내야 하지.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사황성과 전쟁하면 필패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야. 개인들의 전투력은 우리 소요파가 월등히 낫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전쟁이 항상 전면전만 있는 것도 아니고, 게릴라전으로 진행된다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럼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네요. 싸워서도 안 되고, 사황성을 원래 자리로 보내긴 해야 하고. 결국은 말로 잘 타일러서 되돌려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

“결국은 그렇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로 해서 보낼 방도가 없다는 거야. 저쪽이 달랑 열 명만 보냈다는 건, 그만큼 녹록치 않은 간부급이 내려왔다는 말이고, 또 공동파 코앞에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그만큼 각오도 단단히 하고 왔다는 말이니까. 단지 말만으로 되돌리기엔 힘들지 않을까?”

사황성 애들을 말로 포기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고 말이다. 차라리 공동파의 의뢰를 안 받고 말지,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 그 수밖에 없겠네요.”

고현이었다. 모두 녀석을 쳐다보자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문주님 잘하시는 거 있잖아요.”

“내가 뭘?”

“사기요. 평소 문주님이 보여 준 사기술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뭐, 예를 들어서 이런 식이죠. 우리가 공동파에 압박을 받았다. 너희들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우린 공동파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전 가능하다고 보는데요.”

“글쎄? 사기라는 건 들킬 염려가 전혀 없을 때만 쓸 수 있는 필살기야. 사황성이 진실을 안다면 그걸로 끝장이야.”

“그러니까 그걸 잘해야죠. 우리 같은 민간인들이야 무리가 있겠지만, 문주님이라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떨떠름했지만 일단은 고현의 말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서 돌려보내는 수 외엔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공동산으로 이동했다. 척살단과 현운자, 그리고 나. 총 16명의 인원이 10명의 사황성 문도를 쫓아 보내기 위해 출동했다.

넓디넓은 공동산에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들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때문에 공동산에 도착한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공동파로 직접 찾아간 것이었다.

“조 문주, 이렇게 도움을 주시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상청궁 안으로 들어가자 공동 장문 해광이 크게 반겨 주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진인, 사안이 막중하니 지금부터 당장 일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도 이 넓은 공동산에서 열 명 남짓한 무리를 아무 정보도 없이 찾으려니 너무 막막합니다. 본파에서 듣기로는 그들이 출몰한 지도 꽤 오래됐다고 하더군요. 놈들의 주 출몰지만 안다면야 한결 편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렇게 오시자마자 바로 일을 착수하시겠다는 데야, 조 문주 정성에 당연히 화답해드려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조 문주께서 오실 때가 된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단한 친구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해광이 말한 사람이 올 때까지 전황과 공동의 향후 대응에 관해 들었다. 그렇게 5분쯤 기다렸을까? 해광이 말한 대단한 친구라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아, 이제야 오는군요. 두통아, 인사드려라. 난주 소요파에서 오신 조 문주와 일행 분들이시다.”

묘한 분위기의 친구였다. 장로급 인사를 붙여 줄 줄 알았는데, 젊은 친구였다. 공동의 표식이 달린 도포를 입고 있긴 했지만, 다른 공동파 문인들의 모습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아, 소요파 조 문주셨군요. 조연 님 이야기는 자주 듣고 있었습니다. 전 공동 참마단의 단주를 맡고 있는 두통이라고 합니다.”

‘참마단?’

공동에 단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수염도 안 난 젊은 도사가 단주를 맡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단주라면 명색이 장로와 버금가는 직책이 아닌가 말이다.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런데 젊으신 분이 단주를 맡고 계시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럼요. 저 친구야말로 공동의 와룡 봉추지요. 입산한 지 십 년도 안 됐는데 벌써 단주 자리를 차지했으니까요. 조만간 제 자리도 저 친구에게 물려줘야 하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랍니다.”

해광이 과하게 칭찬을 하자, 두통이 손을 내저으며 겸손을 떤다.

“하하, 장문인도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리고 제가 아무리 와룡이라도 황금룡에겐 감히 견줄 수 없지요.”

그가 황금룡을 운운하지 않았다면, 난 계속 착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 별호는 일수경천이다. 황금룡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 내 별호를 아는 사람은 현운자밖에 없었고, 일반 유저들은 날 아직도 황금룡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두통이라는 인물이 NPC라면, 마땅히 황금룡이 아니라 일수경천이라고 불렀어야 옳았다. 결론은 그는 NPC가 아니라 유저라는 이야기.

공동에도 유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까 두통님, 봉황령(鳳凰嶺) 인근의 도관들부터 시작됐다는 거죠?”

우린 두통과 함께 공동파를 나왔다. 두통이 우릴 안내한 곳은 봉황령이었다. 첫 전투가 시작된 곳부터 차근차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네. 시작도 그곳이고, 가장 자주 출현한 곳도 그곳입니다.”

“그리고 전투가 있었던 다른 곳은 월석협(月石峽) 인근의 도관들하고 천장애(千丈崖)의 암자들, 그리고 황룡천(黃龍泉)에서는 딱 한 번 있었다는 거구요?”

“네. 봉황령에서 일곱 번, 월석협에서 세 번, 천장애에서 네 번, 그리고 황룡천에서는 한 번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거참,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네요. 그런데 어떻게 수색을 했기에 아직 한 번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수색이라고 해봤자 결국은 NPC들이었으니까요. 아시다시피 공동엔 유저가 얼마 없지요. 저희만으로 잡아낼 것 같았다면, 굳이 조연 님에게 요청하지도 않았겠죠.”

봉황령 능선에는 도관이 네 곳이 있었다. 그 네 군데 도관들 중 털리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평균 거주자의 수는 5, 6명이었다.

무공 수위는 모두 절정급 이상. 그중엔 무운 진인 정도인 대단한 고수도 한 명쯤 섞여 있었다. 사황성 게릴라들의 무공 수위가 결코 얕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봉황령을 훑어보고 다른 곳도 모두 살펴보았다. 그동안에 사황성 무인들은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지 못했다.

수색을 제대로 하려면 인원을 분산시켜야 맞을 텐데, 그럴 수는 없었다. 사황성 무사들은 모두 뭉쳐 다닐 게 뻔했고, 괜히 병력을 나눴다가는 각개 격파를 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모두 뭉쳐서 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니 하루 종일 수색을 한다고 했는데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습격이 없는 날도 있었나요?”

사냥도 아니고, 제대로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지루함이 사람들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잠깐 쉬기로 하고 옆 자리에 앉은 두통에게 물었다.

“그런 날은 없었습니다. 매번 같은 시각은 아니지만, 보통은 저녁에 침탈이 잦은 편이었죠.”

“그런데 참마단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감숙에서 이렇게 다른 유저 분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거든요. 제 생각으론 두통 님의 참마단이 공동의 유저들 모임 같은데, 혹시 제 짐작이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실상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건 아니에요. 이런 말 하면 자기 비하처럼 들리겠지만, 솔직히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곳이나 다름없죠. 소요파에 가입 못한 사람들, 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캐릭터 삭제하고 다시 시작한 사람들, 뭐 그런 사람들만 모인 곳이죠.”

두통의 말이 한숨처럼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려나?

하지만 그의 말처럼 공동파에 가입한다는 것은 어중이떠중이가 되는 것이 맞았다.

대문파에 가입하는 이유는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힘을 갖기 위해서다. 하지만 공동파는 힘이 없었다. 아무리 NPC들의 권력이 대단한 강호라지만, 결국은 유저들의 힘이 권력을 창출한다. 그런 면에서 유저의 수가 적은 공동은 오히려 소요파보다 힘이 없다고 봐도 됐다.

더구나 지금 공동은 사황성과 전쟁 중이다. 머리 달린 사람이라면 이 전쟁이 결국은 공동파의 궤멸로 이어질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두통도 뻔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공동을 살리기 위한 방도를 찾을 수가 없다. 그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는 아주 좁고 엄격했다.

“시작했나 보군요.”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두통이 적막을 깨고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조연 님, 가시죠. 이번엔 천장애랍니다.”

두통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전서구가 도착한 것이다.

천장애까지의 거리는 경공을 시전해서 달려도 10분이나 걸린다.

연락을 받자마자 급히 뛰어갔지만, 역시나 사황성 마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그저 싸늘하게 식어버린 노도사 넷과 수발을 들던 어린 시종의 시체만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막상 살인자의 모습은 터럭도 볼 수 없자, 다들 힘이 쫙 빠져 버렸다.

아무래도 이 이상 진행하기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두통도 문도들의 피곤한 기색을 보고 오늘은 이만 철수하자고 했다.

다들 내일 같은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난 문파로 돌아가려는 두통을 잠깐 불러 세웠다.

“이대로 가기엔 시간이 어정쩡하네요. 요 주위에서 제가 사냥할 만한 곳이 있으면 좀 알려 주시겠어요? 앞으로도 계속 놈들 뒤를 쫓아야만 할 텐데,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을 때 경험치라도 올려 둬야죠.”

“글쎄요. 성에 안 차실 텐데요. 사냥터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거기 가봤자 아이템이라곤 쓰레기 잡템만 나오고, 몹도 많이 나오는 게 아닌데요. 거의 버려진 사냥터죠. 이름도 없고요. 그래도 정 가고 싶다면, 황룡천 뒤쪽으로 5분 정도 가시면 됩니다. 제일 작은 소로를 따라서 가세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두통이 사라지고, 다른 문도원들도 모두 접속을 종료했다. 남은 사람은 나와 현운자뿐이었다.

“갑시다.”

현운자를 돌아보고 말했다.

우리가 간 곳은 황룡천이 아니었다. 공동파도 아니었고, 봉황령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문파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봉황령에서 황룡천으로 가다 보면 샛길이 하나 나온다. 그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검은 두루미 수백 마리가 살고 있는 소나무 숲이 나온다. 두통에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두었던 터라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현학(玄鶴)이 살고 있는 노송들을 헤치고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큰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현학동(玄鶴洞)이다.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네? 뭐가요?”

“사황성 사람들 말입니다.”

현운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본다.

“전 황룡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왜 여기가 그곳이라는 거죠?”

이 양반, 정말 오랫동안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젠 꽤 예리해졌다.

넌지시 두통에게 사냥터 운운하면서 내가 황룡천을 의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더니, 그걸 용케 알아본다. 문제는 그게 낚시였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현운자 님은 어때요? 게임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겠어요? 바로 시간이죠. 아무리 대단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람이라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분명 사황성 사람들은 임무를 끝내는 틈틈이 근거지 주변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아까 제가 두통 님한테 물어본 황룡천이었구요. 하지만 그 자리에 있을 가능성은 없지요. 뻔히 짐작이 가능하니까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그 황룡천 사냥터하고 거리가 경공으로 10분 이상이라면요.”

현운자는 내가 말한 10분의 의미를 재깍 알아들었다.

“허, 여기서 망보는 사람이 있어서 황룡천 사냥터에 있는 사람들한테 전서구를 날린다, 이건가요?”

“빙고! 그렇죠. 잘 보세요. 여기 현학동으로 빠지는 갈림길은 황룡천하고 이어져 있어요. 얼핏 보기엔 갈림길이지만, 잘 보면 뱅 둘러가는 길이죠. 일종의 순환로라는 거예요.”

“분명 황룡천으로 가는 사람이라면 직선길을 따라갈 테고, 그걸 확인한 사람이 여기 뒷길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전서구를 보낸다, 그리고 그 사이에 황룡천 사람들은 뒷길을 통해 빠져나온다, 이 말이네요?”

“네. 처음에 망보는 사람을 못 세워서 황룡천 인근에서 첫 전투가 벌이진 것이고, 이후엔 그들 생각대로 진행된 것이죠.”

“하지만 왜 황룡천이 아니라 현학동이 근거지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기억나세요? 새우라는 친구가 진법을 사용했던 걸요. 그때 그 친구가 환술 계열의 진법을 구사했던 걸 전 기억해요. 하지만 그 환영진을 몹이 출몰하는 지역에 설치할 순 없죠. 분명 진에 빠져든 몹은 이상한 행동을 보일 게 뻔하고, 결국은 들킬 수밖에 없죠. 그런 식이라면 관도도 불가능하구요. 관도엔 공동 도사들이 종종 오가니까 결국 의심을 살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공간도 아니고 적당한 사냥터가 가까운 곳, 여기 현학동밖에 더 있을까요? 현학동 동굴 깊숙이 진법을 깔아둔다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요? 공동 도사들이 황룡천을 의심하고, 현학동을 의심해도 동굴 깊숙이 들어와서 직접 더듬지 않는 한 그들을 발견하기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겁니다.”

“허! 듣고 보니 정말 그럴싸하네요.”

현운자가 감탄을 한다.

“그럴싸한 제 이야기가 정말로 맞을지는 확인해봐야 알지요. 우리가 여기서 대화하는 동안 이미 망보는 사람이 황룡천의 동료들한테 전서구를 날렸을 겁니다. 제 짐작대로라면 현학동 안으로 숨어들었을 거구요.”

“하하! 조연 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맞겠죠. 어서 가보죠.”

검은 두루미들이 몹이 아닌지 어쩐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린 하늘을 날아오를 재주가 없었으니.

하지만 푸른 하늘을 수놓는 녀석들의 몸짓은 충분히 한 폭의 풍경화라고 할 만했다. 우린 현학동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검은 두루미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몸짓에 흠뻑 빠져들었다. 발걸음을 멈춘 채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았다.

“과연 도가제일산이라 부를 만하네요!”

“저도 강호에서 이런 비경(秘經)은 처음 봅니다. 여태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게 한심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한 순간일 뿐. 곧 발걸음을 옮긴 우리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현학동 앞에 섰다.

“들어갑시다. 특별히 위험할 건 없겠죠.”

혹여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아쉬운 건 그쪽이다. 나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현운자와 함께라면 그들이 초절정고수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았다.

현학동은 그리 긴 동부(洞府)가 아니었다. 채 스무 걸음도 안 되는 짧은 공간을 지나자 우린 동굴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는 동굴 벽을 향해 내가 외쳤다.

“소요파 조연입니다. 사황성 분들 잠시 나와 주시죠!”

그렇게 외치고 잠시 기다려봤지만, 대꾸가 없었다.

내가 다시 외쳤다.

“알고 왔습니다. 진을 파훼할 방법도 있으니 잠깐 나와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사실 파진(破陣)할 능력은 없었다. 현운자가 배운 건 부적술이지 진법은 아니었다. 그들이 우릴 무시한다면 무턱대고 기다릴 방도밖에 없었다.

한 3분쯤 지났을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현운자를 돌아보며 눈짓을 했다. 그러자 현운자가 눈치 좋게 부적을 꺼내들고 자세를 잡아갔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 순간, 꽉 막힌 동굴 벽 뒤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합니다.”

“…….”

사내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시간을 끌더니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아이디에 흉흉한 안광. 마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모습이 오래전 난주에서 본 적 있는 영락없는 사황성 사람이었다. 사내의 아이디는 잉어.

“인사드리겠습니다. 난주 소요파 장문인 조연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분은 본파 빈객으로 계시는 무당파의 현운자 님입니다.”

나야 방금 전에 이야기를 해서 알고 있었겠지만, 사내는 현운자의 소개를 듣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현운자는 강호 제일 고수였으니까. 업계 1, 3위 고수들이 한데 모였으니 긴장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반갑습니다, 조연 님, 현운자 님. 사황성의 잉어라고 합니다.”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줄 자세는 되어 보인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생각인데, 잉어 님이 책임자신가요? 아니시라면 뒤에 계신 분들도 인사를 받았으면 합니다만.”

어차피 다 알고 온 걸 잉어도 알고 있을 터, 그가 결국은 다른 사람들도 다 불렀다.

사황성 패밀리가 모두 생선 아이디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나는, 나중에 나온 사람들 중에 메기라는 친구만 잉어와 마찬가지로 흑룡의 심복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일은 저희 사황성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부디 조연 님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선제공격은 잉어가 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뻔했고, 아쉬운 건 그쪽이니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왜 오셨는지 아시는 것 같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사황성 분들은 그만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서로의 용건을 밝혔다.

그들이 우리 사냥터를 침범한 것도 아니고, 직접적인 손해를 끼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난주하고 거리가 먼 공동산이라지만 이번 일은 그들과 우리가 정한 영역을 침범한 행위였다.

그러자 잉어가 이미 예상해뒀던 핑계를 댔다.

“조연 님, 조연 님도 잘 아시다시피 지금 사황성은 공동파하고 전쟁 중이고, 지금 상황은 사황성에게 극히 힘든 상황입니다. 문파의 존립을 위해서 잠깐 공동산에서 작전을 수행 중일 뿐인데, 조연 님이 이렇게 영역권을 주장하시면 저희에게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더구나 전 소요파는 동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혹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게 있었나요?”

“아닙니다. 실수도 하지 않으셨고, 사황성의 상황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사황성과 공동파만의 일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할 일 없어서 이렇게 잉어 님들을 찾으러 다니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그리고 동맹이라고 하셨으니, 좋습니다. 저 역시도 사황성을 동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맹이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사황성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 쳐다본다.

그럼 이제 고현이 말해준 대로 사기를 쳐봐야겠다.

“얼마 전에 공동파에서 노도사가 한 명 찾아왔습니다. 아, 그 전에 한 가지 이야기를 드려야겠군요. 요새 소요파가 한참 문파대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덕분에 감숙에선 공동파 다음으로 세력이 크지요. 아마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공동에서 노도사가 와서는 저희보고 사황성 분들에게 어떻게 조취를 취해달라고 하더군요. 자기들은 전쟁을 나가야 하는데 뒤가 불안하다면서요. 아마 소요파가 그저 그런 문파였으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겠죠. 하여간에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자기들이 무너지면 어차피 소요파도 무너지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리고 감숙 제이의 문파가 이 정도 일도 안 해준다면, 소요파를 본보기로 밀어버리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릴 밀면 다른 감숙의 중소 문파들이 잘 따를 거라는 속셈이겠죠. 잉어 님, 잉어 님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기는 진실 90퍼센트에 거짓말 10퍼센트를 섞으라고 했다. 난 선인들의 말씀을 잘 새겨듣는 사람이다.

잉어와 메기는 자신들만큼이나 소요파의 상황도 썩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둘은 몇 마디 소곤거리더니 한참 고민에 빠졌다.

그렇게 장고를 하던 잉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조연 님, 소요파의 상황도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급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알고 계실 게 뻔하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흰 공동파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다만, 공동파가 무너지고 무림맹이 끼어들까 우려할 뿐입니다. 저희가 이대로 물러서면 공동파는 대규모 인원을 보낼 테고, 결국 공동은 무너지겠죠. 다음 수순은 뻔하지 않습니까? 무림맹이 감숙에 진출할 테고, 그러면 분명 소요파도 전쟁에 참가하라고 강요할 텐데, 그땐 어쩌시겠습니까? 설마 그렇게 사황성과 척을 지려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사황성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설령 무림맹이라도요. 다만 껄끄럽게 생각할 뿐입니다.”

잉어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기색으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한숨이 나온다. 소요파의 상황을 과장되게 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잉어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물러설 순 없었다. 사기가 안 된다면 낚시질이라도 할 수밖에.

“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네요. 아무래도 적당히 합의를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떻게 말입니까?”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서로에게 좋은 일. 잉어가 화색을 띠며 묻는다.

“소요파와 사황성이 겹치는 곳은 공동파죠. 그리고 누구도 공동파가 무너지는 걸 바라지는 않죠. 그렇다고 지금 공동파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미 전쟁은 시작됐고, 어떻게든 끝은 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요.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어떻게든 공동파와 싸워야 한다는 건데……. 싸우는 대상이 굳이 사황성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잉어가 웬 뜬금없는 소리냐며 쳐다본다.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욕관 북쪽의 일반 유저들보고 공동파를 치라고 하세요. 공동 도사들을 해치면 명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듣자 하니 일반 문도들은 악명 쌓기가 힘들다면서요? 제 경험으론 명문대파의 고수들일수록 일반 NPC보다 더 많은 명성치 하락이 있었던 걸로 기억나네요. 거기에 짭짤한 비급도 많이 쏟아질 테니 일반 유저들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겠죠.”

일반 문도들은 잘 봐줘야 일류 수준. 하지만 그들의 수는 공동보다 훨씬 많다. 눈앞의 이득에 눈이 먼 불나방들의 인해전술이라면 공동파를 지옥의 늪에 빠져들게 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소속이 없는 일반 유저들에게 피해를 입는다면, 공동파가 무림맹에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사황성이 일반 유저들을 규합하고 조련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상황은 한결 나을 것이다.

일반 유저들은 어차피 향후 사황성에 가입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사실 그들도 우리 소요파의 잠재적인 적이라고 봐야 했다. 내 의도는 순수하게 사황성에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분명 유저들은 대량 학살을 당할 것이고, 결국은 장래 사황성의 전력에 약간이나마 차질을 빚게 할 것이다.

잠시 생각해보던 잉어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 공동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유저들이 섣불리 그런 모험을 할까요? 공동파가 정식으로 출진한다면 1만이 넘는 대군일 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소문을 잘 퍼트려야죠. 사실대로만 퍼트리면 됩니다. 장로급을 잡으면 최절정 비급을 얻는다고 말이죠. 어차피 공동파는 망할 테고, 장로급 NPC를 잡아 공동의 절정 비급을 얻어도 해코지를 당할 염려는 없다고 말입니다.”

어디서 이런 간악한 꾀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내 말의 그럴싸함에 사황성 무사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좋습니다. 확실히 황금룡의 지혜는 변함이 없군요. 역시 소요파는 사황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조연 님의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잉어가 만족스러운지 정중히 포권을 해왔고, 뒤에 시립해 있던 다른 사람들도 내게 인사를 해왔다.

내가 절을 받을 만한 사람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잉어는 그 길로 무사들을 데리고 현학동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문파로 돌아왔다.

* * *

공동파 상청궁 장문인실.

장문인실로 상기된 얼굴로 뛰어드는 젊은 도사가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했다.

청년 도사는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감히 장문인 해광의 면전까지 경공으로 치달았다.

“장문인!”

사내의 외침이 상청궁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해광의 눈이 번쩍 뜨이자, 청년 도사 두통이 격노한 음성을 토해냈다.

“역시 제 짐작이 맞았습니다! 모든 건 조연의 계략이었던 겁니다!”

“무슨 말인가? 혹시 자네가 전에 조 문주를 의심했던 그 이야기 말인가?”

“네! 분명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조연이는 분명 사황성과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었던 겁니다! 조연의 행색이 의심스러워 뒤를 밟았더니, 글쎄 놈들이 현학동에서 만나서 본파를 파멸시킬 계략을 꾸미고 있었단 말입니다!”

두통은 자신이 조연을 미행해서 봤던 광경을 해광에게 낱낱이 고했다.

멀어서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어색하지 않던 모습하며 헤어질 때 정중히 인사를 보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적대 문파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사실, 두통의 말은 섣불리 조연이 이적행위를 했다고 증명하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해광은 자 문파의 단주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누구인가?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던 공동의 와룡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구나 두통은 듣지도 못했던 조연과 잉어의 대화를 사실처럼 꾸며 말했으니 해광이 믿지 않으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더구나 두통이 전쟁의 시발점이 됐던 사황성에서 죽은 무운 장로의 이야기를 언급하니 의심은 확신이 되어버렸다.

“후우. 조 문주를 그렇게 안 봤는데……. 어찌해서 무림의 기린아가 그런 흉악한 계략을 꾸밀 생각을 했을꼬…….”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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