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낭왕(狼王)
공동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곧장 문파로 돌아왔다. 만나는 문도들마다 예상외의 성과를 거둔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다들 소요파의 실력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내 실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이대제자들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
심결을 익힌 문도들은 곧장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다들 사냥은 잠시 접어두고 문파 연무장에서 요결을 익히는 데 매진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공, 방, 점, 충, 유, 회 등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소요파 문도들이 퀘스트를 마친 지 이틀 후, 현운자가 무당산에서 돌아왔다.
“어떻게, 잘 풀렸어요?”
바쁜 일정이었을 텐데도 현운자는 피곤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짐작케 하는 얼굴이었다.
“그럭저럭이요. 소요파 분들은 어때요? 성과가 좀 괜찮았어요? 무당파는 지금 말도 못할 지경입니다.”
현운자가 무당파 사정을 본인 입으로 먼저 꺼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 태극권을 익힌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무당파 본산제자만이 아니라 호북, 호광, 심지어 북경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들더라구요. 우진궁(무당파 본궁) 앞이 완전 시장판이더군요.”
“흐음… 뭐, 태극권은 원체 유명하니까요. 같은 진결급이라도 육합권이나 삼재검보다야 인기 있는 게 당연한 거겠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사람들이 요결을 어느 정도나 얻었는지는 알아보셨어요?”
“뭐, 저야… 묻지 않아도 스스로 밝혀 오는 사람들이 원체 많으니까요.”
하긴 무당 제일고수 현운자라면 가만히 아랫목에 앉아만 있어도 정보가 들어올 것이다.
“자랑은 그만 하고, 일단 자리 좀 옮깁시다.”
한참 짝을 지어 대련에 집중하던 문도들은 우리 주위에 몰려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성과에 대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나눌 이야기를 이들에게 모두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우린 간만에 포매향에 들렀다.
원래 유저 없는 감숙이었지만 최근 들어 더욱 난주에서 일반 유저들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어쩌다 가끔 신규 유저들이 멋모르고 난주를 시작 도시로 선택하곤 했지만, 상황을 알고 나면 가차 없이 캐릭터를 삭제해버렸다.
덕분에 포매향에는 오늘도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오랜만입니다, 형님!”
‘얜 또 왜 이래?’
포매향 점소이 우칠이 현운자를 보고 전쟁터에서 살아온 제 형님 보듯 인사하고 있었다.
“어째… 둘이 친한가 봅니다?”
자리에 앉으며 현운자를 보고 물었다.
“저 친구가 그래도 심성이 고와서요. 친한 건 아니고, 술 몇 잔 같이 한 게 전부죠.”
아주 가지가지 한다. 보나마나 저 녀석한테 은자 몇 냥씩 쥐어주면서 우호도 올렸겠지.
‘시간이라곤 내가 무림맹 가입하러 낙양 갔다 올 때밖에 없었을 텐데, 그럼 그때 여기서 죽치고 있었구만? 작업장 하나 찾아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더니.’
그걸로 현운자 놀려 먹을 생각을 잠깐 했지만, 접었다. 따지고 보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어서 주점에서 청승맞게 시간 보낸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자세히 좀 알려 주세요. 아무래도 제 이야기가 더 길 거 같으니깐 현운자 님 얘기부터 듣도록 하죠.”
현운자가 주섬주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파에서 잠깐 들었던 그 이야기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럼 심결태극권을 얻은 사람이 족히 천 명은 된다… 이 말인가요?”
“아마도요. 그리고 어쩌면 전체 유저들의 태반이 심결 무공을 익힐지도 모르구요.”
“아니, 그게 말이 돼요? 그럼 다른 무공들은 어쩌라구요? 심결까지 이르는 기본 무공들은 몇 종류 되지 않잖아요? 며칠간 대련하면서 느낀 건데, 솔직히 심결이 다른 무공보다 좀 낫긴 합니다. 하지만 강호 최강 무공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데 말입니다.”
“글쎄요. 모든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니니까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사람들이 심결 쪽으로 많이 전향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강호 최강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 당장엔 가장 대중적이면서 강력한 무공이니까요.”
현운자는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무당산에 몰려든 그 대인파를 직접 보지 못한 내겐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조연 님은 몇 개나 통과하셨어요?”
“여섯 개요.”
요결을 몇 개나 얻었느냐 하는 건 굳이 내세워 자랑할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 문도들은 내가 6개의 요결만 얻은 줄 알고 있었다.
숨긴 건 묘, 무진 요결뿐만이 아니다. 내가 신안을 익히고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고, 천잠보의도 마찬가지였다. 금강저의 경우야 전투 중에 보일 수밖에 없으니 숨길 수 없는 노릇이었고.
“뜻밖이네요? 전 여덟 개 다 얻으신 줄 알았는데.”
현운자가 웃으며 하는 소리에 난 깜짝 놀랐다. 요결의 개수가 모두 8개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현운자 님은 그걸 다 얻으셨다는 말인가요?”
“네.”
과연 랭커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나 보다. 담담하게 인정하는 그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안심하세요. 여덟 개 다 얻은 사람은 제가 알기론 저밖에 없으니까요. 혹시 모르죠. 숨기고 있는 사람도 있을는지요. 하여간 제 밑으로 가장 많이 얻은 사람들은 기껏해야 대여섯 개예요.”
현운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전 제대로 연습도 못했단 말입니다. 당분간 조연 님이 심결 대련 상대가 돼주셔야겠어요.”
“그건 제가 할 소리였습니다. 문파 연무장은 보는 눈이 많으니, 성 밖으로 나가서 하죠.”
난주성 북문을 나와 인적 없는 공터에 자리 잡았다. 현운자와의 대련은 그동안 종종 해왔기에 서로의 공격 패턴엔 익숙한 상태였다.
처음엔 공, 방, 점, 충 이렇게 4가지 요결만을 가지고 대련했다. 언제가 그들을 만났을 때 대비하기 위해서 가상으로 보통의 심결 무공 수련자들을 설정한 것이다.
대련은 아무래도 요결에 조금이라도 더 익숙했던 나의 일방적인 우세로 시작했다. 현운자도 나름대로 연습했었겠지만, 난 이틀간 문도들과 쉼 없이 공박을 주고받은 상황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겨우 한 시간이 지났을 때부턴 서서히 현운자도 요결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났을 때엔 처음으로 내가 패배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아, 거참! 완전 반칙 아닙니까?”
“왜요? 아무거나 다 써도 상관없다면서요? 우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연위갑에 강기성형만 해도 제가 훨씬 뒤처지는데, 부적술에 강신술까지 쓰면 제가 무슨 수로 이깁니까!”
“조연 님…….”
“왜요?”
“범은 토끼를 잡더라도 전력을 다하는 겁니다.”
현운자가 정색하며 대답한다. 여태 이기기만 하다가 딱 한번 졌을 뿐인데, 그 얼굴을 보자니 왠지 밉다. 많이.
“쩝… 그럼 이번엔 토끼한테 죽어보세요. 이제부턴 요결 다 쓰기로 하죠. 할 수 있는 것도 다 하구요. 환혼신단을 먹는다고 해도 뭐라 안 하겠습니다. 독공을 쓰더라도 상관 안 하도록 하죠. 대신!”
“대신 뭐요?”
“지는 사람이 내일 하루 동안 이긴 사람 심부름해주기!”
“뭘 또 부려먹으려고 이러실까? 굳이 대련이 아니라 말로 꼬셔도 될 텐데…….”
“그럼 승낙한 걸로 하고, 이제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각오하세요!”
무당의 태극권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 적합한 무공이다. 육합권은 방어보다는 공격에 더 적합하고 말이다. 무공의 전투력 자체에 있어서는 두 무공이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현운자에게는 낮은 공격력을 보완할 수 있는 방편이 2가지나 있었다.
내게 없는 강기성형, 그리고 데미지 반사 기능을 탑재한 사기 아이템 연위갑. 그래서 공격력도 방어력도 나보다 낫다.
똑같이 공격을 주고받는다면 무조건 내가 진다. 물론 나는 산수도 못하는 바보가 아니다.
십여 장 거리를 마주 보고 섰다. 공격은 내가 먼저 시작했다.
탓-
궁신탄형을 시전하여 재빨리 현운자 앞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러자 현운자의 양손이 회전하며 전방에 태극 문양을 그린다. 공격 목표로 지정되자마자 태극권의 기수식이 펼쳐진 것이다.
태극권을 상대할 땐 절대 붙지 말아야 한다. 특히 직선 공격이 주를 이루는 육합권은 태극권에겐 훌륭한 먹잇감밖에 안 된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말이다.
먼저 간단한 일권이 현운자의 상체를 노리고 들어갔다. 짐작대로 현운자가 왼손을 내 주먹 안으로 끼워 넣고 밀어치는 수법인 수휘비파(手揮琵琶)의 초식으로 대응해왔다.
지금까지는 수십 번도 더 겪어봤던 지겹기 그지없는 동작들.
‘순식간에 끝내주지!’
현운자의 왼팔이 내 금강저에 붙자 그가 점(粘)자 결로 날 묶으려 했다. 보통 이럴 때 난 뒤나 앞으로 한 걸음 움직이면서 이어질 몸통 공격에 대비하거나 충(衝)자 결로 점자 결을 와해시키는 수법을 썼었다.
이번엔 다르게 갔다.
점자 결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기다렸다. 그 찰나였다.
현운자가 점자 결로 금강저를 쥔 내 오른손을 묶고는 빠르게 내 품으로 들어와 몸통 치기를 가해왔다.
신안을 통해 현운자의 에메랄드빛 오러가 급속히 단전에서 오른쪽 어깨로 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힘을 발출하기 직전, 기를 비축하는 과정은 모든 무공에서 가장 취약한 순간이다. 내가 노린 건 이 순간이었다. 즉시 묘자 결을 운용했다.
묘자 결은 다른 요결과 확연히 다르다. 처음엔 어떤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이 요결은 순간적인 기의 흐름을 살짝 흔드는 방식이었다. 상대의 초식이 변화하기 바로 직전, 가장 취약한 순간에만 성공적으로 발동이 되었다. 하지만 사용하기 불편한 만큼 위력은 강력해서, 일단 시전이 성공하면 영문도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는 수법이 바로 이 묘자 결!
정확한 타이밍에 점자 결에 억눌려 있던 오른팔이 안으로 굽어지고, 아직 자유로운 왼 주먹이 현운자의 어깨를 강타했다.
파각-
공격이 적중되자 연위갑 때문에 나도 약간의 충격을 입었다. 하지만 지체 없이 오른 다리가 사선으로 미끄러져서는 현운자 옆으로 돌아갔다.
“어!”
현운자가 다급히 경호성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눈에 보이는 현운자의 오러는 격랑에 휩싸인 것처럼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뒤늦게 한 걸음 발을 빼며 날 정면에 세우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내 편. 권기를 가득 실은 주먹이 현운자의 뒤통수를 노리며 들어가고, 왼 다리가 곧게 뻗어 호선을 그렸다.
퍽! 파각-
그렇게 연속으로 서너 번 공격을 적중시켰다.
공격에만 리듬이 있는 게 아니다. 수비에도 리듬이 필요하다. 현운자도 나름 랭커인지라 태극권의 요결을 이용해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겐 다 보였다. 터무니없이 강한 몬스터가 아닌 한 유저들의 대련에서 신안은 가공할 기술이었다.
“강신! 현천상제!”
결국 맥을 잃고 허우적대던 현운자가 필살기를 구사했다.
“참 나, 이대로 그냥 끝내주시지!”
강신법을 시전한 현운자에겐 백약이 무효다. 그냥 손 털고 10분이라는 시전 시간이 지날 때까지 구경하는 수밖에 없다. 현운자는 저러고 계속 서 있으라 하고, 난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하려는데 현운자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진다.
“그러는 조연 님은요! 여섯 개가 전부라면서요? 그런데 그 묘자 결은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헉!
‘어떻게 안 거지? 애들이랑 대련할 때는 아무도 몰랐는데?’
“현운자 님! 그건 좀 미안하게 됐습니다만… 아시잖습니까! 강호 생활하려면 실력의 삼 푼은 숨기라고…….”
“흥!”
현운자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린다. 저 양반이 소심한 거 나도 알지만서도…….
그나저나 제대로 대련한 적도 없다는 현운자가 묘자 결 운용법은 어찌 알아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대련이 아닌 한, 그것도 빡센 대련을 통해서만 감을 잡을 수 있는 게 묘자 결인데 말이다.
현운자는 단단히 삐쳤는지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지루했던 10분이 지났다.
기세 좋게 펄럭이던 현운자의 장포가 잦아들고, 푸르게 빛나던 눈동자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난 틈을 노리고 선공을 가하지 못했다. 마치 거짓말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흐음…….”
현운자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마저 대련이나 끝내도록 하죠.”
낮게 깔린 그의 어조가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만큼이나 멋지게 들려온다.
현운자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먼저 선공을 취해야 했다.
아까와 똑같은 수법이 재차 펼쳐졌지만, 이번엔 내 뜻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묘자 결을 운용하긴 했지만, 집중력이 떨어진 탓에 정확한 맥을 짚지 못한 것이다.
퍼펑!
현운자의 강기가 어깨를 후려갈기더니 이번엔 몸통 치기로 날 십여 장이나 튕겨 내버렸다. 내 몸뚱이가 오뉴월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허공을 날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식하게도 박아버리네.’
현운자가 삐친 척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 그럴 사람은 아니다. 되레 숨긴 재간을 우리 같이 공유합시다, 하는 생각이 잘못이다. 그가 약간 서운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번 공격을 봐줬으니 그걸로 께름칙함은 벗어버렸다.
더 이상 현운자를 상대로 심결 요결을 테스트할 마음은 없었다. 신안을 지닌 내가 정색하고 달려든다면 아무리 현운자라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건 이미 확인했기에 괜스레 확인하려 들 필요는 없었다.
아니, 아직 확인 못한 게 한 가지 있긴 했다. 무진 말이다.
무진(無盡).
심결 무공 최종 비기. 이것만은 요결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초필살기라고 부르는 게 더 옳다.
모든 내력을 소모해 상대를 일격에 없애버리는 궁극의 필살기다. 아직 유저를 상대로 무진을 테스트해본 적은 없다. 난주 인근의 약한 몬스터들을 상대한 경험밖에 없어서 과연 현운자가 이걸 맞고 버틸 수 있을는지 미지수였다.
그나저나 현운자도 분명 8가지 요결을 전부 익혔다고 했다. 그 말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무진을 습득한 상태라는 것.
무진은 다른 무공들에 비해 사전 동작이 크다. 무진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말이다. 즉, 사용하려고 폼만 잡아도 현운자는 이미 눈치 채고 피할 수 있다는 소리.
현운자에게 거짓말을 들켜 버려서 그런지 비무의 승패를 가리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운을 하늘에 맡기고 무진끼리 격돌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현운자를 보고 외쳤다.
“현운자 님! 놀이는 그만두고 무진으로 끝을 봅시다!”
현운자는 별말 없이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난 그가 내 말을 알아들었다고 판단했다.
현운자를 타깃으로 잡고 무진을 시전했다.
오른발과 어깨가 뒤로 조금 밀린다. 조금 벌어진 주먹이 기를 모으듯이 허공을 잠깐 휘젓고…
정면을 향해 진각을 밟자 굉음과 함께 무진이 발출됐다.
슈우우웅-
콰광!
기 덩어리가 현운자와 충돌하더니 사위가 빛에 잠식됐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빛이 비무장을 감쌌다.
‘……?’
그런데 이상했다. 내게 날아온 무진은 없었던 것이다!
‘현운자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나?’
그건 아니었다. 눈을 따갑게 만들던 백색 섬광은 이내 사라졌고, 난 일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저게 뭐야!’
묘했다. 살다 살다 저런 무공은 처음 봤다.
묘한 구체(球體)가 현운자를 감싸고 있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꼬리를 물고 있는, 무당의 태극 문양이 표면에 새겨진 반투명한 구형 막이었다. 그건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배리어(Barrier) 마법 같았다.
‘강신술 같지는 않고, 새로 배운 부적술인가?’
어쨌든 이번 비무는 내 패배였다. 현운자는 저 처음 보는 기술로 내 무진을 막아내 버렸다. 보아하니 어떤 데미지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대체 어떤 기술이길래 심결 최종 비기를 간단히 막아낼 수 있는 거지?’
현운자가 지금 사용하는 기술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생고생해서 얻은 무진을 간단히 막을 정도라면, 그 기술은 ‘사기’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무진은 강력한 파괴력만큼이나 그에 버금가는 제약이 있었다. 기술을 쓰고 나면 내력이 0이 돼버린다.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는 거야?’
현운자는 배리어 같은 마법구 안에서 태극권 기수식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오로지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아차!’
그 모습을 보다 난 아직 비무가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소림소환단을 꺼내 먹고 바로 운기 조식에 들어갔다.
저 사기 무공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무진을 막을 정도로 강력한 수비식이라면 그에 버금갈 만한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것. 일단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제약은 분명해 보였다.
이제 3성의 경지에 오른 반야심공이 손실된 내공을 급속히 복구하기 시작했다. 소환단에 절정심법을 운용한 터라 현운자가 제약에서 풀려날 즈음엔 난 이미 무진을 재차 시전할 준비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사기 스킬을 연달아 시전하지는 못할 테니 승리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내 것이었다.
배리어가 깨지자마자 난 무진 시전에 들어갔고, 막 강기가 발출되려는 찰나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현운자 님이 항복했습니다. 비무에서 승리했습니다.]
허무하게 상황이 종료됐다. 타깃 지정은 해소됐고, 막 발출 직전까지 갔던 무진도 깨져 버렸다.
“쩝… 확실하게 보내드릴 수 있었는데.”
“역시 최종 비기까지 다 습득하신 거군요. 치사합니다!”
“제가 좀 그렇습니다. 새삼스럽게 일러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습죠.”
“끙…….”
비무는 끝났다.
현운자가 마지막에 구사한 기술은 내 짐작처럼 부적술이 아니었다. 강신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태극권 최종 요결인 만벽(萬壁)이었다. 효력은 방금 보았다시피 모든 공격에 대한 완벽한 방어. 초사기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내공이 깡그리 소모되는 구명절초였고, 더구나 현천상제 강신술처럼 움직이지 못한다는 극악의 페널티가 존재했다. 거기에 만벽 유지 시간은 겨우 1분. 유저들과의 싸움에서 그다지 효용성이 뛰어난 기술은 아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유저를 상대할 때에 국한된 이야기였다.만벽의 진정한 가치는 머지않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난 현운자에게 명확히 일렀다. 묘자 결과 마지막 비기는 절대 발설하지 말자고.
어쨌든 비무는 내가 승리했다. 현운자는 내일 하루를 내게 맡겨야 했다.
소요파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결 무공을 익힌 사람들은 이제 요결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끼리끼리 뭉쳐서 파티 사냥을 하러 떠났다.
설립한 지 한 달이 지난 표국은 아직까진 별 탈 없이 잘 커가고 있었다. 문파엔 각 단에서 차출된 대여섯 명의 문도들이 항상 상주해 있다가 새로운 표행을 얻어 길을 떠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젠 표국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난주에서 걷는 세금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표행은 일러준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문도들은 표물 운송보다 NPC들의 레벨 업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한 달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NPC들 레벨이 200을 넘어섰다. 이렇게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소요파 NPC들의 무력이 언젠가 공동파에서 봤던 절정무인들 못지않을 때가 곧 올 것이다.
하지만 문파의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사냥터 문제가 가장 시급했다.
각 단에서 매일 5명의 인원이 감숙성 곳곳을 누비고 다녔지만, 좋은 사냥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간혹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했다는 전서구가 날아오긴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기껏해야 청랑채와 비슷한 수준의 녹림채였고, 끽해야 고목문 정도였다.
내가 원하는 곳은 그런 정도의 사냥터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작업이 가능한, 문파 전체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고레벨의 사냥터. 파신묘처럼 레이드 몹이 존재하는 사냥터였다.
그리고 난 어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말이다.
분명 감숙에도 레이드 몬스터는 존재할 것이다. 한 군데일지, 혹은 그 이상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감숙의 소요파 영역이 아닌, 바로 가욕관 바깥에 있다는 말이 된다. 파신묘의 위치가 하남성의 대도시들과 한참 떨어진 곳이라는 점을 빗대어보면, 이런 판단에 힘이 실렸다.
혹시라도 가욕관 이남에 다른 장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 별로 기대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 어쩌겠나?
꼭 감숙에서만 바늘 찾기를 할 필요는 없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을 선점하면 된다.
감숙 아래에는 사천이 있다. 하지만 사천은 일단 제외다. 경쟁자가 너무 많다. 혹 전쟁이라도 터진다면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다.
동남쪽은 섬서다. 섬서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저들에게 인기 많은 화산파가 있다. 거기에 종남파까지 있어 사천만큼은 아니지만 진출하기엔 역시나 껄끄럽다.
서쪽은 청해성이다. 유저 시작 도시가 없는 지역이다. 큰 세력이라고 해봐야 구대문파인 곤륜파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곳의 입지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다. 청해는 감숙성의 사황성 영역. 그리고 사천과 맞닿아 있다. 잘못하면 끼어 죽을 수 있다.
북쪽은 만리장성에 가로막혀 있고, 그 위론 사막이다. 사막에도 던전이 있을 수 있지만, 왠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렇다면 오직 한 곳뿐.
영하성(寧夏省).
어딜 둘러봐도 이만한 곳이 없었다. 영하성의 북쪽은 몽골이고, 경계면의 태반이 감숙에 인접해 있다. 감숙 외엔 오직 섬서에서만 길이 통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영하엔 거대문파도 없었다. 말 그대로 무주공산. 먼저 집어먹는 놈이 임자인 땅이었다.
심결 요결을 연습하는 와중에 영하성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흑점에서 얻은 건 아니었다. 강호 녀석이 날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알려 줄 것 같지 않았고, 더구나 내 입으로 더 이상 용문객잔엔 가지 않겠다고 약조까지 해버렸다. 또, 낙양 흑점 분점의 당 형도 이런 사냥터 정보에 대해서는 전부터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기댈 곳이 꼭 흑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前) 광풍단 부단주였던 사풍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사풍이 떠나기 전 친구 등록을 해놓은 게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강호에선 친구 등록된 사람들끼리만 전서구를 날릴 수 있다).
사풍과 적월, 일향들은 떠나기 전 말했던 대로 아직도 여행 중이었다. 감숙 북쪽 신강과 청해를 돌아보고 이젠 사천을 지나 운남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처음 들렀던 지역이 바로 영하성이었다.
내가 현운자의 하루를 빼앗아간 곳이기도 했다.
“저긴가 봅니다.”
아침에 접속하자마자 줄창 달렸다. 난주에서 영하성이 있는 북동 방향의 관도를 타고 무려 5시간 동안 쉼 없이 달렸다. 성계(省界)인 육반 산맥의 주맥(主脈)을 넘자 영하성에 연하는 산맥의 꼬리가 보인다.
멀리서 보면 얼핏 절벽 위에서 만월(滿月)을 보고 짖는 늑대가 연상되는 산. 목적지인 낭산(狼山)이었다.
사풍이 보내온 전갈에는 영하성의 주요 사냥터가 스무 곳이나 됐다. 그는 이번 경우만 무료로 정보를 제공한다고 했다. 다음부터는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여간 그가 보내온 사냥터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이곳 낭산이었다. 몹이라고는 죄다 늑대들뿐이라는 사냥터.
낭산에 올라가는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범상치 않은 산세만큼이나 인간의 발길에 쉽사리 비처(秘處)를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은 인간들의 세상이 아닌 것처럼.
짐승들 사는 곳에 인간이 닦은 길을 찾으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산을 한 바퀴 뱅 둘러보고 나서야 짐승들이나 나다닐 만한 아주 좁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도나 오솔길이 아니었다.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잡풀이 무성한 짐승 길이었다.
“허허! 정말 그 사람들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런 길로 올라가볼 생각을 했는지.”
현운자가 감탄하면서 한 소리 한다.
“명색이 오지 탐험가 지망생들인데, 그 친구들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나 보지요.”
미심쩍긴 했지만, 길이 맞았다. 길 같지도 않은 길은 끊어지지 않고 낭산 정상을 향해 뻗어 있었다.
정상에 반 어림이나 왔나 보다. 첫 손님들이 찾아왔다. 은빛 늑대들이었다. 크기가 송아지만 한 놈들 3마리가 으르렁 소리와 함께 엄청난 도약 공격을 선보였다.
퍽! 퍼펑!
깨갱- 깽깽-
싱거운 놈들. 위풍당당하게 등장해서는 일합에 가죽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심할 수도 없었다.
이곳은… 몹이 너무 많았다. 겨우 십 보 전진하면 어김없이 늑대 무리가 공격해왔다. 처음엔 가볍게 때려잡았지만, 어느 선을 넘어가니 은빛 늑대가 아니라 검은 늑대들이 달려들었고, 그놈들은 전의 놈들보다 셌다.
검은 늑대 다음은 붉은 늑대였다. 붉다고 해서 저레벨에 잡던 그 혈랑은 아니었다. 낭산 놈들은 혈랑들보다 족히 몸집이 3배는 더 컸다.
그리고 이 거대 혈랑들부터는 잡스런 몹들이 아니었다.
콱! 쿠르르르-
달려드는 놈을 막느라, 옆구리에 주둥이 박고 도리질하는 놈을 때려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맹수가 인간과 다르다는 걸 확연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인간이 상대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선 순간적인 힘의 집중을 가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놈들은 다르다. 크게 벌린 입으로 몸뚱이를 물고는 아무리 때려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잘못하면 정상 구경도 못해보겠는데요!”
현운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도 설마 이런 미물들한테 길이 막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눈앞에 낭산의 정상이 보인다. 겨우 백 보밖에 남지 않았건만, 거대 혈랑들의 공세는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하는 데까지는 해봅시다!”
딱히 무공 고수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애써 배운 심결 요결은 써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묵묵히 본신의 방어력과 공격력만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때려잡는 속도보다 새로 가세하는 거대 혈랑들의 숫자만 더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얘들 뭔가 이상해요!”
이상한 감은 시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폭젠(몹이 같은 장소에서 대량 출몰하는 현상)이 아니었다.
“물러납시다!”
몸뚱이에 놈들을 붙인 채 조금씩 뒷걸음치면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후퇴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은 낭산 입구까지 쫓아왔다가 우리가 관도로 빠졌을 때에야 되돌아갔다.
“휴우… 판단이 조금만 늦었어도 얄짤없이 뼈 묻을 뻔했습니다.”
이거 참 만만치 않았다. 늑대 한 놈, 한 놈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었다. 사람으로 치면 기껏해야 일류 중급 정도였다. 문제는 쪽수.
“아무래도 산 전체가 동족 인식이 되는 것 같은데요?”
현운자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현운자 생각과 같았다.
“어떡하죠? 시작부터 이렇게 애먹는데, 설령 올라간다 해도 위험 부담이 크지 않겠어요?”
“음… 그것도 그러네요. 어쩔 수 없게 됐어요. 문도원들을 소집하는 수밖에는…….”
“제 생각에도 그 수밖에는 없을 것 같네요.”
전서구를 날렸다. 그렇다고 총동원령을 내린 건 아니었다. 낭산이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정도로 큰 산은 아니니 말이다. 일단 척살단과 각룡이 형이 단주로 있는 청룡단만 불렀다(단 명칭은 단주 나이순으로 정했단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람들이 도착할 동안 우린 재차 낭산 등반에 도전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을 쳐들어갔다가 패퇴하기를 거듭했다. 그동안 나온 아이템이라곤 늑대 이빨과 늑대 가죽이 전부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소소 누님이었다.
“여기가 거기야?”
그런데 다른 단원들은 다 버려두고 혼자만 왔다.
“애들은 어쩌고요?”
“애들? 아마 오고 있을걸? 그나저나 여기가 그 레이드 몹이라는 놈이 있다는 곳 맞어?”
단주라는 사람이 왜 이리 책임감이 없는 건지. 그리고 난 가능성이 있다고만 했을 뿐이지, 확실하다고는 안 했는데?
“일단 사람들 다 오면 확인해봐야죠. 그나저나 누님은 어째 신수가 더 훤해졌습니다?”
“그럼, 그럼! 가끔 사냥하다 보면 나비들이 몰려들어서 미칠 정도라니깐. 내가 꽃인 줄 아나 봐?”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똑같은 유저일 뿐인데, 다른 여성 유저들보다 훨씬 예쁜 얼굴을 가지게 된 이유를 모르겠다. 주안술이라도 익힌 걸까? 설마 흡정대법?
몇 번 얼굴을 익힌 사이였지만, 누님과 현운자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었을 뿐 서먹서먹했다. 현운자야 원래 성격이 그런 줄 알고 있었지만, 아무한테나 막 대하는 누님이 조용한 건 의외였다. 현운자가 상위 랭커라서 말 붙이기 어려운 것인가?
요즘엔 어떻게 지내는지 몇 마디 말을 나누는 사이에 다른 문도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광도 왔고, 각룡이 형도 청룡단을 모두 거느리고 도착했다.
상황 설명을 하고 진형을 짰다. 길 폭이 좁은 관계로 실제 전투에 임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대여섯이 전부였으니 체력 안배에 집중해야 했다.
“사냥이 아니라 전투에 임한다고 생각해주세요! 언제 상황이 돌변할지 모르니 체력 안배에 신경 써주시고요! 그럼 갑니다!”
문도들이 오열을 맞추어 전진했다. 선봉은 나와 현운자가 맡았다.
이미 한 번 왔던 길, 지체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몹을 만나도 무시하고 앞으로 달렸다. 뒤에 있던 문도들이 흘려보낸 잡몹들을 가볍게 한 대씩 때려 주면서 따라왔다.
역시 사람이 많으니 좋았다.
팡팡!
깨갱- 깽-
으르르릉- 서걱!
전열은 거대 혈랑들의 틈을 뚫고 전진하고, 공격은 후열에 맡긴다. 혈랑 무리가 끊임없이 도발해왔지만 놈들이 몰려오는 속도보다 때려잡는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둘이서 올라갈 때는 그렇게 애먹었던 길이었는데 겨우 5분 남짓 달리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뭐냐? 저런 늑대들도 감당 못해서 우릴 부른 거였어?”
소소 누님이 기고만장해서 큰소리를 쳤다.
“두 명만으로 뚫고 올라오시면 제가 뽀뽀해드리죠.”
“미안해.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낭산 정상은 산세만큼이나 범상치 않았다.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었다. 족히 천 평은 넘어 보이는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가 올라온 길을 제외하면 산 중턱까지 깎아지른 절벽이 삼면을 이루고 있었다.
눈앞에는 사방 일 장은 됨 직한 거대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사풍 일행도 거대 혈랑 떼에 막혀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다. 저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소요파에 점거된 상태에서도 낭산 정상에선 꾸준히 늑대들이 리젠되고 있었다. 모두 일반 몬스터들뿐이라 특별한 아이템은 건지지 못하겠지만, 이놈들만으로도 레벨 쌓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 같았다.
“각룡이 형! 단원 다섯만 추려서 뒤에서 쫓아오는 놈들 전담하라고 해주세요!”
“알았다!”
“나머지 분들은 신속히 동굴 안으로 진입하도록 합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동굴 입구에 다가서니 처음으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낭왕혈(狼王穴)>
동굴 외벽에 던전 이름이 굵은 글씨로 패여 있었다.
“요즘 늑대는 글자도 새길 줄 아나 보네?”
은소소가 중얼거리자 광견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중얼거린다.
“게임이잖수.”
사람이 만든 동굴이 아니다. 파신묘처럼 유등(油燈)이 걸려 있을 리가 없다. 횃불을 가지고 있는 문도도 없었다(잡화점에서 횃불을 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다행히 현운자가 부적을 날리며 소리쳤다.
“화광(和光)!”
그에게 라이트(Light) 마법이 있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뒤에선 부적술을 처음 보는 문도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늑대들의 으르릉 소리가 연신 들려오고 있었지만, 조심스레 전진하고 있는 동굴 속에서는 그 어떤 몹들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빈집인가?’
현운자의 라이트 마법에 의지해 50여 명의 소요파 문도들이 묵묵히 전진하기를 3분여. 드디어 두 번째 레이드 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통로를 지나자 광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광장은 밝았다. 현운자의 임시 횃불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반구형 외벽으로 둘러싸인 천장은 뻥 뚫려 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빛이 광장 구석구석을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광장 반대편에만 더욱 강렬한 빛이 내리쬐는 것 같았다. 마치 눈 똑똑히 뜨고 보라는 듯이, 세상에 이런 놈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놈의 대가리 위에 놓인 글씨는 자신이 이 동굴의 주인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낭왕(狼王).
푸른색 갈기로 뒤덮인 거대한 늑대, 낭왕의 몸집은 황소 따윈 저리 가라였다. 코끼리보다도 컸다.
“허허. 저게 늑대야, 공룡이야?”
“저 발톱 좀 봐요. 내 검보다 더 길어!”
문도들이 놈의 크기에 놀라서 수군거렸다.
낭왕은 누워서 자고 있었다. 둥글게 몸을 말아 머리를 꼬리에 박은 자세로 말이다.
분명 레이드 몬스터라는 건 확실했고, 이제 이 던전이 우리 땅이 된 건 맞는데…….
‘저걸 잡아야 하나?’
원래 의도는 레이드 몹이 있는 사냥터 발견이었지, 잡아버리자는 계획은 아니었다. 애초에 둘만 탐색하러 온 이유도 그것이었고, 50이 넘어가는 인원이 투입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난 지금 조심해야 할 때다. 아직 심결육합권이 1성밖에 안 된단 말이다!
현운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이 마당까지 와서 왜 꺼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같은 입장이었으니까.
현운자가 가볍게 웃으며 위안을 한다.
“저게 건달바왕보다 셀까요?”
절대 그렇게 생각할 순 없지. 풍기는 포스부터가 다르다. 나는 도리질을 했다.
“그럼 간단하네요? 우린 그때보다 더 강해졌고, 저놈은 건달바왕보다 약하니까요. 그리고 조연 님에겐 혼천귀원단이 있잖아요? 전 만벽이 있구요. 거기다가 뒤를 보세요.”
현운자가 손가락으로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를 가리켰다. 내가 뒤돌아보자 현운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처럼 입구가 막히지도 않았잖아요.”
정말이었다. 아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 동굴에 문이 달려 있을 턱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도 뒤에선 거대 혈랑 무리가 띄엄띄엄 달려들고 있었다.
사실, 현운자가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잡아야만 했다.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이나 달려서 왔는데, 이대로 돌려보낸다? 두고두고 욕먹을 게 뻔했다.
문도들이 모두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이광이 놈들만 예전 건달바왕의 위력을 직접 겪어선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심은 섰다. 문도들을 바라보고 크게 외쳤다.
“이미 겪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레이드 몬스터를 처음 볼 겁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기 낭왕이라는 녀석이 그 레이드 몬스터입니다. 건달바왕이 얼마나 셌는지 들어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어쩌면 저놈이 더 셀지도 모릅니다!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죽기 싫으신 분들 계십니까?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사냥이 아니라 문파대전입니다! 오늘 전투로 소요파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될 것입니다!”
몇 번이나 작업장의 중요함에 대해서 말해왔다. 각 단에 소속된 인원들은 모두 한 번쯤 사냥터 정탐을 떠난 경험도 있다. 모두들 지금 이 순간이 문파대전보다 더 중요한 결전이 되리란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각 단주와 장로들은 앞으로 나오세요! 청룡단 중간 간부들도 나오세요! 나머지 문도들은 절대 앞으로 나가지 말고 자리 고정하고 계세요!”
이광과 소소 누님, 각룡이 형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청룡단 십장 넷도 모였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순서를 정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날 때쯤에 조용히 있던 현운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요?”
공식 석상에선 언제나 돌부처인 양 있던 현운자라 모두 신기하다는 듯이 일제히 눈을 돌렸다.
“뭐가요?”
“낭왕 뒤에 조그만 동굴이 있어요.”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현운자가 말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정말이다. 숨 쉬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낭왕의 몸뚱이 뒤로 벽면의 색이 다른 곳이 있었다. 현재 우리 위치에서는 낭왕이 숨을 내쉴 때만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숨겨져 있었다.
주위 벽면보다 조금은 어두운, 분명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와 비슷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동굴은 3개나 됐다.
하여간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다. 통로 윗부분만 희미하게 보일 뿐인데, 그걸 알아차리다니.
“음… 그럼 저 낭왕은 보스 몹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건가? 동굴 입구는 우리가 들어온 곳뿐이니 저게 입구일 리 없고, 낭왕은 겨우 광장을 지키는 몹인 건가…….”
하지만 현운자는 다르게 생각했나 보다. 그리고 그 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아니요, 분명 던전 이름이 낭왕혈이었잖아요. 그럼 저 낭왕이 최종 보스가 맞겠죠. 그리고 낭왕이 겨우 입구를 지키는 녀석이라면, 다음 코스로 이동할 통로가 세 개나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둘 중 하나겠죠. 보물 창고거나, 부하들 둥지거나요.”
끙. 드래곤이 보물 모은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늑대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내 기억에 없다.
하긴 왕이라는 놈이 친위대 하나 없다는 것도 이상하다. 앞마당의 늑대들은 아무래도 호위병이라고 하기엔 급수가 떨어지니 말이다.
계획은 전면 수정됐다. 동굴이 3개니 최소한 중간 보스급이 3마리는 기본으로 나온다는 소리였다. 놈들을 맡을 전담조가 새로 편성됐다.
몹 몰이 역할을 담당할 간부들에게 환혼신단을 나눠줌으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모든 문도들이 각자 자기 조별로 파티를 맺고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조심들 하시고, 그럼 시작해봅니다!”
첫 몰이꾼으로 뽑힌 사람은 각룡이 형이었다. 형이 먼저 뛰쳐나갔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나머지 문도들이 그 뒤를 이었다.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자, 낭왕이 갑자기 울음을 토하면서 벌떡 일어섰다.
캬오오-
[공포에 걸렸습니다. 10초간 움직이지 못합니다.]
‘제길.’
광역 기술이었다. 낭왕의 울음소리에 뛰어가던 모든 문도들의 동작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하지만 대비주에 비하면 데미지도 없는 이따위 주술은 애교에 가깝다.
“창룡음!”
[공포가 해제되었습니다.]
“어그로 먹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지만 상황이란 항상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었다.
캬릉! 퍽-
각룡이 형의 검이 낭왕의 허벅지를 가격하자 놈이 뒷발길질을 했다. 그 단순한 일격에 형이 끈 떨어진 연처럼 튕겨나 버렸다.
“돌겠구만.”
겨우 공격 한 번에 저렇게 튕겨 나가버리다니!
더구나 이놈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무척이나 빨랐다.
쌔애액-
퍽! 퍼퍽!
잔영(殘影)을 남기며 빠르게 움직이는 놈이 아무렇게나 앞발을 휘젓고 다녔다. 단순한 일격이었지만 쾌속 무비한 공격엔 어쩔 수 없었다. 속절없이 문도들이 이리저리 튕겨져 버리고 있었다.
혼란 속에 문도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는데,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낭왕 뒤편의 동굴에서 놈의 조력자들이 튀어나온 것이다. 청랑이라는 놈들이었다.
이제 상황은 더욱 혼미해져 갔다.
“견제 팀들! 빨리빨리 움직여 주세요! 정신 차리고 낭왕이랑 떼어놓으세요!”
난장판 속에 내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그나마 다행히 눈치 좋은 문도들 몇몇이 새롭게 가세한 녀석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청랑들 3마리는 낭왕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단, 그 크기가 낭왕의 반 정도였다.
녀석들은 우리에서 뛰쳐나오자마자 앞으로 솟구쳐 회전하는 공격을 했다. 요요처럼 회전하는 움직임을 따라 놈들의 발톱이 칼날 같은 기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카카카칵-
채채채챙-
하지만 청랑의 공격은 낭왕처럼 튕기는 효과는 없었다. 한없이 뒤로 밀리기는 했지만, 방어가 가능했다. 최소한 녀석들의 관심을 고정시킬 수는 있었다.
“누가 자리 좀 바꿔줘!”
“몸 사리지 말고 공격해요!”
[공포에 걸렸습니다. 10초간 움직이지 못합니다.]
“창룡음!”
정신이 없었다. 오십이나 되는 인원이 우왕좌왕 제 역할을 찾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청랑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서서히 안정을 찾고 있었다. 청랑 견제 팀은 놈들을 끌고 광장 한쪽 구석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낭왕, 이놈이 문제였다. 몰이꾼으로 낭왕의 눈을 돌리는 작전은 물 건너갔다. 낭왕은 도망가는 몰이꾼을 단 한 번의 도약으로 따라잡고 앞발로 패대기쳐 버렸다.
다행히 낭왕의 공격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은 듯했다. 나동그라진 문도들은 곧바로 일어나 다시 공격에 합세하고 있었다.
공격을 개시한 지 3분쯤 지나자 서서히 내 우려가 불식되기 시작했다.
‘허허, 내가 문도들을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던가?’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낭왕을 담당하는 서른다섯의 문도들은 어느새 효율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아무런 요령도 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체력이 소모된 사람들은 한쪽 구석에서 운기 조식을 하고 다시 합류했다. 워낙 참가 인원이 많다 보니 그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이 버텨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낭왕의 어그로를 먹지 못하는 게 오히려 상황을 좋게 만들고 있었다. 모두 고만고만한 데미지를 줘서인지 낭왕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못했다. 겨우 한 명에게 한 번의 공격을 가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공격은 더욱 짜임새 있게 변해갔다. 현운자는 최전선에서 위급한 상황에 처한 문도들을 지켜 내고 있었다. 부적술을 사용해 낭왕의 공격을 잠깐 지체시키기도 했고, 때론 운기 조식 중인 문도에게 달려가는 놈을 가로막기도 했다. 눈에 띄는 활동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목숨을 건진 문도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 지 5분쯤 됐을 때엔 상황이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청랑들이 그때가 돼서야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청랑들이 모두 몰살되자 견제 팀이 본진에 합류했다. 총 오십의 인원이 모두 낭왕에게 공격을 집중할 수 있게 되자 공격도 방어도 한결 여유가 있었다.
파쾅!
충자 결로 순간 공격력이 2배 증가된 내 금강저가 놈의 옆구리에 작열했다.
‘드디어 한번 맞아보는 건가?’
여태 창룡음만 날리고 있다 제대로 된 가격은 처음 해봤다.
하지만 놈은 내 기대를 무시했다. 갑자기 놈이 공격을 멈추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아우우우우우울-
절벽 위에서 달 보고 짖는 늑대의 울음소리……. 왠지 소름 끼치는 기분이다.
[낭왕의 포효에 걸렸습니다. 10초간 아무 행동도 못합니다.]
‘마지막 필살기인가?’
놈의 포효에 몸이 굳었다. 창룡음도 구사할 수 없었다.
낭왕의 울음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소요파 문도들은 모두 얼음 땡 놀이를 하듯이 굳어버린 상태였다.
‘굳혔으면 공격을 할 것이지, 왜?’
의문은 바로 확인이 됐다. 바야흐로 결전이었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로 거대 혈랑들이 떼거리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운자와 내가 처음 낭산에 발을 들여놓을 때처럼.
문젠 반대쪽 입구다. 거기선 청랑들이 혈랑들만큼이나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숫자를 가늠할 필요가 없었다. 광장은 순식간에 늑대들로 가득 찼다. 광장에 난입한 늑대들이 문도들을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퀴기 시작했다.
[낭왕의 포효가 해제됐습니다.]
내 주위에도 늑대들로 빽빽했다.옆구리에 주둥이 박고 있는 혈랑 한 놈을 노리고 충자 결을 시전했다.
파캉!
깨갱-
단 한 대에 놈이 사라져 간다. 그런데… 어라?
“잡몹 무시하고 낭왕만 공격하세요! 저놈 체력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 늑대들은 환영이었던 것이다. 파신묘의 유령들처럼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환영이 확실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이게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걸 눈치 채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의 공격력이나 방어력은 그대로였고, 보다 큰 문제는 요놈들 때문에 낭왕에게 다가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낭왕 주위에 있던 유저들이 간헐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전체 공격력은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혈랑들이야 그렇다 쳐도 청랑들의 공격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청랑 떼에 둘러싸인 문도들은 정신없이 공격은 포기한 채 연신 수비 동작만 취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 가다간 아무리 체력이 얼마 안 남은 낭왕이라 해도 놈을 쓰러뜨리기 전에 문도들의 피해가 막중할 것 같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가급적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무진의 공격력은 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다. 하지만 이 한 방으로 낭왕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다.
놈을 타깃으로 잡고 무진을 펼치려는데, 이런! 나보다 현운자가 더 빨랐다!
“만벽!”
솔직히 의아했다. 현운자는 낭왕의 공격을 받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강호 전체 유저들 중에서 최고의 방어력을 지닌 상태. 그가 낭왕의 직접 공격이 아닌 한 만벽을 사용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유는 있었다. 현운자가 만벽을 시전하자마자 주위의 늑대들이 모조리 현운자를 바라봤다.
‘광역 도발?’
보통 게임에서 어그로를 끌어오는 스킬을 도발이라고 한다. 현운자의 만벽엔 이런 도발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좁은 범위가 아니었다. 수백이나 되는 늑대들 전부가 일제히 현운자를 보고 달려들었다!
“어, 어?”
문도들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말고 낭왕만 때려잡으세요! 저놈만 잡으면 잡몹은 사라집니다!”
늑대들이 일제히 한쪽 방향만 보고 달려들자, 꽉 막혔던 길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낭왕도 현운자에게 붙어 있었다. 모두들 낭왕만 노리고 가장 강력한 무공들을 시전했다.
펑! 퍼퍽!
추아악! 쉬쉭!
나도 동참해서 가장 강한 데미지를 주는 충자 결 공격만 했다. 그런데도 낭왕의 어그로는 계속 현운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 체력도 얼마 안 남은 상태인 녀석이었다. 낭왕은 금세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레벨이 366에서 368로 상승했습니다.]
[명성이 782 상승했습니다.]
놈은 늑대라서 그런지 그냥 죽었다. 아무런 말없이.
“우아아! 잡았다!!”
“하하하! 레벨이 3이나 올랐어요!”
처음으로 레이드 몹을 잡아본 문도들이 결과에 놀라고 있었다.
레벨 올라가는 거나, 명성치로 보나 확실히 이놈은 건달바왕에 비할 놈이 아니었다. 물론 건달바왕 때와 달리 이번엔 경험치와 명성치를 수십 명이 나눠 먹은 셈이었지만.
모두들 현운자가 마지막에 구사한 무공에 관심을 내비쳤고, 우린 부적술이라고 대답해줬다. 덕분에 문도들의 부적술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커질 것도 같았다. 뭐, 들통 나는 건 나중 문제다. 하하.
낭왕이 드롭한 아이템은 역시 레이드 몹답게 5개였다. 그리고 3마리 청랑들도 아이템들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청랑들이 떨어뜨린 아이템은… 짜증나는 물건들이었다.
[발도아(拔刀牙)
강력한 공중회전 무공. 무엇이든 베어버린다.
수련 제한:야수 체질
수련 제한:무영각 10성
수련 제한:Lv. 300
수련 제한:지능 20 이하]
어쩐지 청랑 기술이 낯이 익더니…….
“야수 체질… 지능 20 이하라… 이걸 누가 배우라고? 강호에 모글리나 타잔도 있었나?”
발도아 무공서가 각각 1개씩 총 3개였고, 따로 최상급 늑대 가죽이 몇 개 됐다.
강호에도 제작 시스템이 있긴 하다. 단, 병장기는 불가능했고, 오직 피복류에 국한되어 있다.
나도 전에 백호피로 옷을 지어 입어봤다. 예전에 마천채에서 작업하면서 얻은 걸로 말이다. 부가 능력이라고는 약간의 방어력 증가뿐이고, 디자인이 구려도 너무 구렸다. 꼭 에스키모가 된 기분. 한마디로 그런 거 입고 다니면 망신살 뻗는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이 정도 몹이 준 가죽이니 제법 쓸 만할지도…….
낭왕이 준 건 괜찮았다.
환생단 1개, 환혼신단 6개, 나머지 3개는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
[피독주(避毒珠)
착용 효과:절정독 이하를 무효화시킨다.
착용 제한:피수주, 피화주, 피독주는 서로 중복 장착하지 못한다.]
[낭왕피의(狼王皮衣)
늑대들의 제왕, 청낭왕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 성능은 좋으나 왠지 입기엔 더울 것 같다.
착용 효과:방어력 +2,500
수련 제한:내공 -5,000]
[푸른 늑대 조각상
청옥으로 만들어진 세공품.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소지 효과:내공심법 수련 속도 10% 상승
특수 기능:???]
이탈자 하나 없이 끝난 사냥에 아이템도 짭짤했으니, 여러모로 기분 좋은 사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