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장. 재회 (32/62)

제31장. 재회

진진이었다.

그녀는 그때처럼 붉은색 고운 비단에 흰 배꽃 문양이 점점이 박힌 화사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한 번 곱게 말아 올려 늘어뜨린 풍성한 머리칼 역시 그대로였다.

“또 뵙네요, 연 공자.”

진진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인사해왔다. 인사도 나누기 전에 그 미소에 또 혹해버렸다. 그녀는 여전히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 아, 그러네요. 오랜만입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마주 인사를 했다.

‘진진이 왜……?’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짧은 생각의 정리 역시 그녀가 해주었다.

“연 공자, 많이 당황하셨죠? 공자 성격에 참고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서둘러 왔답니다.”

‘내 성격이 어때서? 얼마나 친했다고 내 성격을 알고 있는 거야?’

그건 그렇고… 그냥 참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진 소저, 그럼 다시 퀘스트를 치를 수 있게 해준단 말입니까?”

“네, 지금 이 공간의 제어권은 제게 있습니다. 강호는 당분간 들어올 수 없어요.”

오호라, 그럼 이제 맘 편히 퀘스트를 정상적으로 치를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곳은 제가 만든 공간이 아니니까요.”

그녀가 말을 끝내면서 살짝 한쪽 눈을 감는다.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숨은 뜻이 있다는 듯이.

‘그럼 이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가 기록에 남는다는 것인가? 운영자들이 지금 두 눈 부릅뜨고 우릴 살펴보고 있는 거고?’

하긴 생각해보니 내 짐작이 맞는 것도 같다. 전에 진진이 분명히 말했었다. 신안 퀘스트를 줄 때 아직은 자기가 담당하지만, 곧 유사한 퀘스트를 강호가 주재할 것이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땐 그냥 무신경하게 넘어가고 말았지만, 이후 흑점 본점에서 강호까지 만나고 나서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호에는 인공지능이 2개나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서로 전혀 별개인 데다, 어쩌면 서로를 적대하고 있는 느낌의 프로그램이.

‘그런데 왜 이런 번거로운 시스템을 적용한 거지? 오히려 문제가 더 생기지 않나? 자료 백업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지금 강호에는 창조주가 둘이나 되는 것이다. 이게 정상적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봤자 내 일도 아니지. 신경 끄자.’

시스템이 혼란스러우면 내겐 좋은 일일 뿐. 앞일이 산적해 있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다.

“연 공자, 일단 마루에 앉아서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방 안엔 아직 광성자가 있다. 통제권이 진진에게 넘어온 데다 그 광성자는 아무 사고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었지만, 우리 둘 다 방 안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젊은 처녀 총각이 대화 좀 하겠다는데 노인네가 옆에 있으면 안 될 일이지.’

초옥 툇마루에 신체 건강한 남녀가 나란히 앉았다.

그녀와 나 사이는 겨우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난 예전에 했던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다시 보니까 금양옥과는 너무 차이가 있다. 감히 금양옥 따위를 진진에게 견줄 수는 없었다.

가을 산 계곡물 같은 맑고 청아한 그녀에 비하면 금양옥의 화려함은 퇴폐에 가까웠다.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녀의 몸짓과 하늘하늘 움직이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보지 못한 이질(異質)의 것이었다.

“언제 봐도 진 소저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매료시키네요.”

“자주 보면 닳아요. 염치껏 보세요.”

후후, 인공지능의 급도 다르다. 강호에서 만난 그 어떤 NPC가 이런 식으로 농담을 할까?

“우선 공자께서 알고 계셔야 하는 게 있어요. 지금부터 진행되는 일들은 모두 기록에 남아요. 퀘스트를 만든 사람은 프로그래머들이지만, 운영은 강호 메인 프로세서가 맡고 있어요. 전 그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구요. 저도 잘해야겠지만, 공자도 잘해주셔야 돼요.”

그들을 돕는다? 대체 강호에서 그녀가 맡고 있는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나보고 잘하라니? 내가 또 1등 했으면 하고 바라는 건가?

“그럼 시작할게요. 궁구(窮究)하지 않으면 얻어도 제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공자께선 지금 심득을 얻어 진경(眞境)에 이르길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집 나간 소를 잡으러 가려면 제 소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 하겠죠. 공자는 육합심결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진진이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질문이라면 이미 충분히 공부해뒀다.

내 대답은 바로 이어졌다.

“형(形)을 익히는 것은 처음 단계, 형을 잊는 단계가 두 번째 단계,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다시 형으로 돌아가는 단계겠죠. 심결이 마지막이라는 가정을 둔다면요.”

“그럼 육합권의 형을 알고는 계신가요?”

“하늘과 땅, 동서남북이 육합(六合)이지요. 나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 즉 외부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게 육합입니다. 하지만 무공에서라면 육합의 의미는 내삼합과 외삼합을 아울러 말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습니다. 무공에서의 육합에선 나를 환경과 떨어뜨려 보지 않고 포함시키고 있으니, 정기신(精氣神)과 형의 일체를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대답을 마치고 그녀를 보자 어쩐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진진이 약간 아쉬운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대답이 별로 탐탁지 않았나 보다.

“공부 많이 하셨나 보네요. 그런데 육합에서 합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둘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한 걸 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둘이지만 결국은 하나가 될 수도 있는 걸 합이라고 하지요. 합쳐지지 않는다면 합이 될 수 없고, 합이 된 후 분리될 수 없다면 또 합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엔 내 대답이 썩 괜찮았던지 진진이 쉬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그럼 어떤 건 합이 되고, 또 절대 합이 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처녀와 총각은 맺어질 수 있지만, 고양이와 개는 맺어질 수 없는 거죠.”

“후후, 연 공자 말은 너무 재밌어요. 음양(陰陽)의 이치를 잘 알고 있나 보죠? 그럼 당대(唐代)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은 어떻게 보세요? 후대인들은 사랑이라 그러지만, 사실은 며느리와 시아비 관계잖아요. 그건 합이라고 볼 수 있나요?”

어째 질문이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데?

“시아비와 며느리라는 관점에선 합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남녀 관계에선 합이 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원칙적으로 시아비와 며느리라는 가름보다 그 이전의 가름은 남녀가 맞을 것이니 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공자의 말씀은 참 그럴듯하군요. 무언가를 가름하려면 선후 관계를 따져 봐야 한다는 거군요? 그럼 이건 또 어떨까요? 마공(魔功)과 정공(正功)이 합이 될 수 있을까요?”

“안 되지요. 괜히 주화입마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선인들이 걸어왔던 길을 무시해선 안 되는 것이죠. 더구나 이 강호라는 시스템에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것 같고 말입니다. 정과 마는 상성이 전혀 맞지 않아요.”

“가름 이전에 선후를 따져야 한다면서요? 둘 다 무공인 건 매한가지인데 왜 합이 되지 않는 건가요? 주화입마는 정공만 수련하더라도 찾아오는 거랍니다.”

“무공보다 더 이전을 생각해보면 제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공은 자신을 지키고 성(性)과 명(命)을 닦는 것이고, 마공이란 타인을 해치고 욕망에 충실한 것이니 처음부터 전혀 다른 것이지요.”

“흐음…….”

말발로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다면 삼천갑자 이전에 도달했을 나다.

진진은 뜻대로 되지 않는지 고운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후우, 역시 연 공자의 입심은 당해내기 힘들겠어요. 그럼 대화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해요. 그리고 공자께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이야기했으니 과연 그건 얼마나 대단한지 살펴볼까요?”

조금 처진 기색이던 그녀가 금세 밝은 얼굴이 돼서 말해왔다.

진진은 예전에 NPC를 소환해서 퀘스트를 진행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직접 대련할 생각이었나 보다.

그녀가 마루에서 내려가더니 마당에 자리를 잡고 섰다.

“진 소저! 직접 가르침을 주실 생각입니까?”

“네, 왜요? 싫은가요?”

싫을 리가 있나! 감사하지!

“제가 선공하도록 할게요. 굳이 육합권만 사용하실 필요는 없어요. 가진 재간을 전부 쏟아보세요. 그럼 준비 다 되시면 말씀하세요.”

진진은 내가 잡기들을 다 발동시킬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신안을 발동시켰는데도 그녀의 오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입을 열어 알려 주었다.

“원래 그런 겁니다.”

하긴 강호 메인 시스템의 하나인 그녀에겐 굳이 오러라는 개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창조하는 신에게 기(氣)가 무슨 필요겠는가.

“다 됐습니다.”

조용히 말하자 진진이 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 주위에서 빛 무리가 춤을 추며 그녀의 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환한 빛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반딧불이 수천 마리가 그녀의 팔에 몰려든 것 같았다.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섬섬옥수를 덮었던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완전히 빛의 제압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우윳빛 백색 장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살짝 반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고수가 아무리 봐도 개세의 보검으로밖에 볼 수 없는 무기까지 들었다. 물론 나도 강호 최강급 무기인 보리금강저를 들고 있긴 하지만, 금강저와 장검은 길이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맨손보다는 이게 더 좋을 거예요.”

누구한테 좋은 건지?

“그럼 시작할게요.”

진진이 검자루를 쥐고 있던 손을 살짝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손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자 검극이 정확히 내 머리를 향하는, 흔히 볼 수 없는 기수식이 취해졌다.

“전 심결복마검법만 사용할게요. 공자께 많은 깨달음이 있길 바랄게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장검이 쏜살같이 내게 내질러졌다.

푸욱-

“……!”

별로 빠르지도 않았다. 기세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윳빛 장검은 가볍게 불영보를 파훼하고 금강저를 지나쳐 내 어깨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한차례 내 몸을 훑고 간 검이 다시 길게 호선을 그리며 다가왔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반사적으로 나려타곤을 시전했다. 한차례 땅바닥을 구르고 그녀의 전면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쉬이익-

갑작스런 내 돌진에도 그녀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공격을 회수하지도 않았다. 그녀 팔의 각도는 분명히 내 뒤통수를 노리고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그녀가 물러나는 순간을 노려 공격을 가할 속셈이었는데, 그녀의 이런 행동은 내 판단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몇 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단전에 주먹을 내지르지도 못했고, 다시 한 번 땅을 굴러 공격을 피하지도 못했다.

부우웅-

몸이 저절로 뒤로 밀렸다. 오러가 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수법이 어떤 것인지 이해 못할 내가 아니다.

그것은 호신강기였다.

‘이크-’

몸이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자마자 재빨리 나려타곤으로 그녀의 우측으로 숨어 들어갔다. 간신히 등 뒤를 노리던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복마검만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호신강기까지 사용하면 내가 어찌 공격하란 말입니까!”

“누가 공격하라고 했나요? 그럴 능력이 없다면 피하기라도 해보시지요.”

‘제길, 피하는 건 더 힘들단 말이다!’

그녀의 몸이 한차례 회전하더니 이번엔 횡으로 베기가 시전됐다. 간단한 초식이었지만, 보이는 건 그렇지 않았다. 흰색으로 빛나는 가공할 만한 검벽이 옆에서 짓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건가!’

지금 내 방어력은 아마도 강호 유저들 중에선 최강일 것이다. 금강저 부가 옵션 2천에 천잠보의 5천, 거기에 철포삼과 사상검진까지 발동된 상태다.

하지만 본신의 방어력만 믿고 저 검벽에 맞부딪칠 엄두는 전혀 나지 않았다.

바늘 하나 통과하지 못할 검벽이 만들어지자마자 무영각을 시전했다. 신형을 끌어올려 그녀를 향해 쾌속의 발차기를 날렸다.

파파파파팍!

호신강기 때문에 제대로 타격을 입히진 못했지만, 옆에서 휘둘려지는 검벽은 피할 수 있었다. 무영각 시전이 끝났을 즈음엔 검벽 역시 내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간 상태였다.

“제법 임기응변은 뛰어난 편이네요?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시죠.”

갑자기 진진의 신형이 주욱 뒤로 미끄러졌다. 유령처럼 발동작도 없이 말이다.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뒤로 물러난 그녀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내 두 눈이 부릅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빚어졌다. 초승달 모양의 커다란 검기 2개가 연달아 쏘아져 온 것이다.

서슬 퍼런 검기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기묘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크기도 크기려니와 굉장히 빨랐다!

쌔애액-

콰쾅!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뒤늦게 금강저로 검기들을 막아내긴 했지만, 폭발의 여력에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제기랄! 이게 무슨 복마검이야!’

몸뚱이가 오 장은 날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이건 뭐 환관 앵도나 동방불패보다 더하다. 공격하자니 호신강기 때문에 전혀 먹히지 않고, 막자니 공격이 너무 무지막지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련이다 보니 그녀가 조금 여유를 주고 있는 듯 아직은 체력 손실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2할가량이 깎였을 뿐이었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궁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녀가 재차 초승달 검기를 쏘아 보내며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이 조언인지 아닌지 생각할 여력조차 없다. 검기들이 내 몸뚱이를 잘라버릴 때쯤에서야 간신히 나려타곤으로 피할 수 있었다.

‘미치겠네.’

정말로 미치겠다.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바로 눈앞에 또 다른 검기들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게 보였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콰콰콰쾅!

어떻게 막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금강저에 부딪힌 검기가 산산이 깨지면서 이리저리 튄다. 몸은 또 공중으로 부웅 떠올라 그녀와 거리를 더 벌렸다.

탁-

뒷걸음쳐지던 몸이 무언가에 걸린 듯 우뚝 멈췄다. 초옥의 기둥에 닿은 것이다. 살짝 체력 게이지를 보니 이번 공격으로 이제 체력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 몰래 얼른 환혼신단을 꺼내 먹었다.

[체력이 5할 회복되었습니다. 재사용 시간이 한 시간 남았습니다.]

다행히 아이템 사용의 제한은 없었다. 이 정도쯤 허용한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공격으로 거리가 너무 벌어져서 진진은 종전 같은 정신없는 기 폭풍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공격 방식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진이 방금 전에 외친 소리는 분명 힌트일 것이다. 제발 생각하라고. 생각하면 파훼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이 단순 무식 과격한 공격에 어찌 대응할 것인가. 막자니 뒤로 튕기고, 그렇다고 흘려보내는 수법은 내게 없다. 피하자니 또 너무 빠른 공격이다.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상일이 간단한 게 없는 법이죠.”

그건 아가씨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어느새 십 장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가 예의 초승달 검기를 다시 발출했다.

‘왜 자꾸 똑같은 공격만 하는 거야!’

분명 같은 패턴의 공격을 계속하는 건 무학에서 금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진진은 똑같은 공격을 벌써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분명 이 공격에 퀘스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뜻!

콰쾅!

기 파편이 다시 비산하고, 내 몸은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번엔 여태와는 달리 체력이 크게 떨어졌다. 앞서 공격보다 절반쯤은 더 닳았다.

‘이런 데서도 물리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냐!’

등이 초옥의 기둥을 맞대고 있었다. 공중으로 날아올라 충격 흡수를 못하니 데미지를 더 크게 먹은 것이다.

진진의 백색 검이 다시 휘둘려지고, 그녀 주위에서 또다시 2개의 검기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빠른 공격이라도 자주 보면 눈에 익는다. 시속 160킬로를 던질 수 있는 강속구 투수라도 직구만 계속해서 던지진 않는다. 결국은 타자에게 익히고 말기 때문이다.

이제야 진진이 구사하는 무공이 눈에 익기 시작했다. 진진에겐 오러가 없지만, 그녀가 빚어내는 초승달 검기는 푸른빛 오러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이 기 덩어리들은 단순한 기의 응집체가 아니었다.

지그재그로 춤을 추며 날아오는 검기가 내 눈앞에 이르러서야 진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콰쾅!

또다시 공격에 격중됐고, 체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남은 체력은 6할. 잘 버텨야 세 번의 공격 정도만 막을 수 있는 정도였다.

좀 더 시간을 벌어볼 요량으로 위치를 바꾸고 싶었지만,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또다시 그녀의 검기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한 번 더 보니 확실했다.

두 검기는 분명 같지 않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호응하고 있었다! 검기들이 지그재그로 꺾여서 들어오는 모습은 두 검기들의 밀고 당기는 작용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몇 번의 공격을 더 허용했을 때에야 진진의 검공에 숨어 있는 비밀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 시전자의 내공에서 빚어낸 동일한 검기들이다. 그런데 같은 성질의 검기인데도 거리가 가까우면 서로를 밀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진 검기들은 그 거리가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다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검기들이 코앞에까지 다다랐을 때 난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두 검기 사이에 흐르는 미약한 푸른 기류를 말이다.

‘아까 대화 속의 합(合)의 의미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가?’

분명 그런 것 같았다. 다르지만 같은 검기의 움직임이 확신을 주었다.

내 스스로 저 검기를 막을 힘이나 피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검기의 작용을 알았으니 파훼법은 간단했다.

또다시 날아오는 검기들 중 한쪽을 타깃으로 잡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빠르게 다가오는 한쪽 검기의 회전 중심부를 향해 금강저를 갖다 댔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두 검기를 상충(相衝)시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콰쾅!

이젠 정말로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숨을 가다듬고, 재차 날아오는 검기를 노려봤다. 목표한 기 덩어리 옆면을 살짝 밀어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직각에 가깝게 비껴 친다면 데미지도 입지 않을 것이다. 분명 이 공간은 물리 법칙이 통하는 곳이니깐!

‘박자만 잘 맞추자. 리듬을 타야 돼!’

고속으로 다가오는 물체를 눈으로 확인하려면 늦는다. 다행히 검기는 계속 같은 속도, 같은 모양으로 다가왔고, 이미 내 몸은 그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쐐애애액-

‘지금!’

검기가 채 다가오기도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왼다리를 옆으로 빼자 자연히 내 몸은 검기의 진행 방향과 비껴 선 자세가 되었고, 곧 금강저가 검기의 진로를 예상하고 내질러졌다.

부우웅- 콰쾅!

‘휴우.’

성공이었다.

금강저가 한쪽 검기의 진로를 살짝 틀자 두 검기의 호응이 깨졌다. 검기 하나는 초옥 기둥에 부딪혀 깨졌고, 다른 하나는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져 버렸다.

사실은 요행에 가까웠다. 검기가 구형이 아니라 납작한 모양이었던 탓에 횡 베기가 종 베기가 되어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검기는 더 이상 쏘아져 오지 않았다. 진진은 그녀의 공격이 파훼되자마자 검을 내려뜨리고 공격을 멈추었다.

‘이걸로 끝난 것인가?’

진진이 내게 걸어왔다. 그리고 살포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운이 좋군요.”

운으로 돌리기엔 진진이 너무 많이 도와줬다. 만약 광성자가 퀘스트를 담당했다면 이렇게 데미지 약한 공격을 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번 건은 이걸로 마치도록 할게요.”

다행이었다. 체력이 정말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심결육합권 요결‘유(流)’를 습득했습니다.]

드디어 다섯 번째 심결 요결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쉬세요. 체력이 회복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단계?’

그녀의 말 속엔 이 이상의 요결 또한 존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조용히 운기 조식을 했다.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자, 운기를 하면서 정리해둔 질문을 던졌다.

“진 소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

“원래 기(氣)라는 게 방금 전 진 소저가 뿌린 검기처럼 가까우면 밀어내고, 멀어지면 끌어당기는 성질이 있는 겁니까?”

“아니요, 보통은 끌어당기는 성질만 있지요.”

더 이상의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진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 역시 강호처럼 내 입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럼 진진이 파훼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설정한 것인가?’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쉬었으면 일어나시죠?”

쳇! 들켰다.

운기 조식으로 채울 수 있는 체력은 전체의 8할뿐이다. 나머지 2할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채워진다. 그녀에게 질문하면서 궁금한 것도 해결하고 체력도 회복할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내 계획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와 마주 섰다. 역시 진진은 이쁘다.

모든 일은 시작이 좀 힘들 뿐이다.

이후 대련들은 앞서 유자 결을 얻은 대련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진진의 구사하는 각각의 무공 초식들은 요결에 맞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파훼법은 그 특성만 알아낸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자 결 다음 요결은 회(回)자 결이었다. 회자 결의 경우 예전 신안 퀘스트를 치를 때의 경험이 있어서 조금은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회자 결은 기를 발출할 수 있게 만드는 요결이었다. 그렇다고 탄지신통 같은 공격 기술은 아니다. 회자 결 대련에서 진진은 검을 버리고 권장(拳掌)을 구사했다.

그녀가 박투술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몇 번 공격을 받아 자신의 몸에 타인의 기가 쌓이면 회자 결로 방출하는 식이었다. 즉, 전투 중에 체력의 일정 부분을 회복하는 기술이었다(그녀는 모든 체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저들에겐 그런 효능이 있을 리가 없다).

덕분에 내 공격이 꽤나 그녀에게 적중됐는데도 진진은 시종일관 처음처럼 펄펄 날았다.

처음엔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서 희희낙락하다가 내공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에야 난 상황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간신히 파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유자 결과 회자 결을 얻고 그다음으로 묘(妙)자 결도 입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요결인 무진(無盡)까지 얻으면서 장장 두 시간에 걸친 퀘스트가 끝났다.

“축하드려요, 연 공자. 이걸로 모든 퀘스트가 완료됐어요.”

날 때려죽일 것처럼 매섭게 공격하던 기세는 어디로 가버린 건지, 진진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건넸다.

이번엔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내공도 체력도 완전히 소실된 상태에서 그녀의 무식한 공격에 악다구니로 달려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그녀가 공격을 멈추고 퀘스트 통과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결육합권 요결 ‘무진(無盡)’을 습득했습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정말로 이번 대련도 무사통과가 된 것인지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이로써 난 심결 요결 8개를 모두 익히게 되었다.

“역시 공자는 남다른 면이 있어요.”

그녀의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 진 소저 덕분이죠. 광성자였다면 이런 결과는 절대 얻지 못했을 겁니다.”

‘아닌가?’

진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정식대로 했습니다. 대련에는 이상이 없었어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공자가 네 가지 기본 요결을 습득한 상태라 그 부분은 건너뛰고 시작한 것뿐입니다. 덕분에 대련이 더 어려웠을 거예요. 다만, 대련 이전의 대화를 잘 풀어가서 제 공격력은 상당히 낮춰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원래 퀘스트에 적용되어 있는 내용일 뿐이니 제가 특별히 잘 봐준 건 없었답니다. 모두 연 공자가 잘해서 그런 거예요.”

아마도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녀는 알게 모르게 꽤 내게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공자께서 강호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랄게요. 그리고… 예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진진은 그 말만 던지고 사라져 버렸다. 예고 없이 찾아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엔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예전에 했던 말? 그게 뭐였지?’

퀘스트를 마치고 초옥 밖으로 나왔다.

들어가고 나서 꽤 시간을 잡아먹었는데도 문도들이 날 기다려 주고 있었다.

문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과연 진진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퀘스트 진행 방식은 모두 나와 같았다. 내가 미친 광성자를 만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다만 대화 패턴만이 달랐는데, 모든 대화는 처음 대화의 핵심 주제를 물고 늘어지는 식이었다.

대련 방식은 똑같았다. 똑같은 초식을 시전하고, 그걸 파훼하는 형식이었다. 한 번의 대련이 성공리에 마무리되면 쉴 틈을 주는 것도 같았다. 진진이 날 위해 일부러 퀘스트를 바꾼 건 아니었던 것이다.

문도들의 성과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여섯의 문도 중에 조자건은 유자 결까지 얻었고, 일대제자들 셋은 모두 4가지 요결을 얻었다. 그리고 이대제자들도 3가지 요결을 얻었으니 강호 홈페이지에서 본 다른 문파 사람들에 비해선 월등히 좋은 성과였다.

내 성과에 대해선 다들 놀람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6가지나 되는 요결을 얻었냐고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귀찮아 죽을 뻔했다.

* * *

IGM Observer No.4 팀.

“팀장님.”

이 대리가 열심히 지뢰를 찾고 있는 강 팀장을 부르고 있었다.

“아, 왜 또! 지금 최고 기록 달성하려던 참이었단 말이야!”

강 팀장이 짜증을 내면서 이 대리를 돌아봤다. 근무 시간에 게임하고 있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 대리는 속으로 근무 태만 상사를 욕하며 종이 뭉텅이를 건넸다.

“2팀에서 올라온 겁니다. 퀘스트 도중에 사라가 출현했다네요.”

2팀은 강호가 직접 운영하는 퀘스트만을 관찰하는 옵저버 팀이었다.

“그래? 오랜만이네? 사라가 퀘스트에 끼어들다니 말이야. 내용은 봤어?”

“볼 수밖에 없었죠.”

게슴츠레 눈을 뜨고 물어보는 강 팀장의 말에, 퉁명스레 대답하는 이 대리였다.

“쩝, 그럼 가서 일 봐.”

사실, 강 팀장은 이 대리가 싫었다. 옵저버 4팀은 자기 혼자만 있어도 충분히 놀면서 일할 수 있는 아주 아주 널널한 부서였다.

처음 팀장이 됐을 때는 의욕적으로 사라와 강호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인공지능들을 어떻게든 분석해보려고 날밤 새가며 공부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강호와 사라, 특히 사라라는 인공지능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노력의 성과가 보이지 않자 의욕은 사라졌고, 결국은 이렇게 게임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대리라는 인물이 부서에 배속되면서 맘대로 지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상사라 해도, 회사의 월급을 받아먹는 입장에서 부하 직원의 눈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대체 무슨 이유로 밥벌레를 둘이나 키우는 건지……. 당최 이해가 안 가.’

강호 인공지능의 감시는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강 팀장은 이곳이 할 일 없는 부서라 해도, 그 임무가 가볍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명이나 되는 인력을 투입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사라는 시범 퀘스트 끝나고 나서 계속 잠수만 타고 있더니, 갑자기 왜 튀어나온 거야?’

강 팀장은 의혹을 품으며 이 대리가 넘긴 서류 뭉치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거기엔 조연이 광성자의 초옥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모든 대화 기록이 적혀 있었다.

1시간 후.

“그래서 강 팀장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IGM 사장 정지훈은 강 팀장이 올린 파일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도대체 이 양반이 알고 묻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항상 사장을 만날 때마다 곤혹스러운 강 팀장이었다. 연배 차이는 얼마 나지 않지만, 사장과 부하 직원의 사고는 갭이 너무 컸다.

“경고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는지…….”

“경고요? 누구한테 보내는 경고요? 제대로 이야기해보세요. 알 만큼 다 알잖아요?”

사장의 추궁에 강 팀장은 진땀을 흘렸다.

사장이 자신을 옵저버 4팀에 배치한 이유는 자신을 신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임도 면에서는 다른 과장, 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은 밥벌레였다. 그리고 밥벌레들은 원래 눈치가 좋다. 강 팀장은 강호가 시작부터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메인 프로세서 강호에게 던지는 경고가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엔 강호 알고리즘이 잘못 진화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강 팀장이 한계 지점에서 춤을 추는 듯한 답변을 하자, 정지훈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내려가서 일 보세요. 제가 봐도 이건 문제가 있어 보이니깐 알고리즘에 손을 좀 보겠습니다.”

강 팀장이 인사를 하고 사장실에서 나가자, 정지훈은 인터폰으로 비서를 불렀다.

“선미 씨, 옵저버 4팀 이초원 대리 좀 올려 보내세요. 강 팀장 모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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