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0장. 광성자(4권) (31/62)

제30장. 광성자

심결 무공이 풀렸다. 강호가 새로운 격랑을 맞게 됐다.

낙양 흑점에서 당빈은 그렇게 말했다. 절정무공을 배운 사람이 100명이 되면 심결이 풀릴 거라고.

이제야 절정무공을 익힌 사람이 100명이 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생각보다 늦었다는 것. 그만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주님.”

어느새 취의청에 들어온 조자건이 날 부르고 있었다.

“응?”

“전 광성자 찾아가라고 써 있던데 문주님은 어때요?”

엥?

“왜 너도 광성자야?”

“문주님도 광성자예요?”

조자건뿐만 아니라 나도 이상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조자건이 익힌 건 삼재검이다. 내가 익힌 건 육합권이고. 서로 다른 무공이 똑같은 조건을 달고 있다?

“아무래도…….”

“일종의 승급 퀘스트 같은 걸로 보이네요.”

자건이 말대로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든다. 단순히 진결 무공을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게 아니라 다른 속뜻이 있는 것 같다.

‘하기야, 간단히 그 정도라면 골치 아프게 봉인이니 뭐니 하면서 묶어두지도 않았겠지.’

“어떻게 하죠? 같이 가실래요?”

“뭐, 급할 건 없지. 여태까지 기다려 왔는데, 새삼 시간에 쫓길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이건 빨리한다고 좋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조자건은 내 말이 무슨 의민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럼 제가 괜히 전서구를 날린 건가 봅니다.”

“괜히는 아니지. 그 전서구가 아니었으면 아마 몇 달이 지나도록 몰랐을 수도 있으니까. 하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분간 더 지켜보다가 시작할까요?”

급할 것 없다고 자건에게 말하긴 했지만, 얼마나 상황을 오래 지켜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흠… 우선은 문파에서 진결 무공 배운 사람들 확인부터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 짐작으론 우리 둘만 익힌 건 아닐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현운자 님에게도 연락을 취해봐야겠지. 하여간 시작은 하남이나 사천에서 어떻게 진행이 됐는지 파악하고 나서도 늦지 않을 거야. 뭐, 하루나 이틀만 지켜보면 대충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대충 내일모레쯤에 출발하면 되지 않을까?”

남보다 먼저 잡아야 할 몬스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타인과 경쟁해서 이겨내야 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심결 퀘스트는 자격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그간 겪어본 강호 시스템이라면, 이번 일은 빠르다고 좋을 게 없었다. 어쩌면 섣불리 도전했다가 괜한 페널티만 자초할 가능성이 많았다.

문도원 전체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진결 무공을 대성했다고 연락해온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일대제자가 3명, 이대제자가 2명이었다. 간부들 중엔 아직 대성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 이틀 후에 문파에서 모이기로 했다.

현운자에게도 따로 연락을 취했다. 현운자는 내 연락을 받자마자 사냥터에서 바로 무당산으로 출발했다. 심결 비급을 본산에 맡겨 두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태극권 심결의 봉인 해제 요건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진결을 대성한 사람들은 노심초사 홈페이지만 들락거렸다.

처음엔 감감무소식이던 게 하루가 지나자 서서히 정보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퀘스트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1. 퀘스트는 비급의 종류가 아니라 각 유저들이 적을 두고 있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즉, 감숙성의 모든 심결 무공 퀘스트는 광성자가 주관을 하고, 하남성은 무림맹주인 검신 조운학이 주관자였다.

2. 퀘스트는 몇 가지 질문이 먼저 있고, 이후에 대련을 통해 진행되는 방식이다. 현재까지 참가자들 중에 퀘스트에 실패한 사람은 없다. 즉, 무조건 통과하는 방식이다.

3. 무조건 통과가 가능하지만, 결과가 모두 동일하지는 않다. 진진의 퀘스트처럼 심결 퀘스트 역시 성적에 따라 각자 얻어가는 게 다르다.

4. 심결 퀘스트를 완료하면 새로운 개념의 무공이 생긴다. 기존의 육합권처럼 연속기 개념의 무공이 아니라 특수한 요결을 얻는다. 요결은 일격기처럼 시전자가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요결은,

공(攻):상대의 공격을 무시하고 맞공격을 한다. 방어 동작을 취하지 않는다.

방(防):진행되는 투로를 강제로 멈추고 방어에 주력한다.

점(粘):상대의 공격을 잠시 묶는다.

충(衝):공격이 적중했을 때 순간적으로 강한 데미지 공격을 가한다.

예전 일격기 무공들이 강호에 업데이트되면서 전투 형태가 많이 달라졌다. 이번 심결 무공 업데이트는 강호의 전투가 또 한 번 탈바꿈하게 됐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요결은 모두 넷.

대부분의 경우 2개나 3개의 요결을 얻었을 뿐이고, 4개를 얻은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공, 방, 점, 충 외에도 더 높은 등급의 요결을 얻은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홈페이지로만 정보가 공유되는 지금으로선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른다 해도 숨겨진 요결을 얻은 사람이 그 사실을 발설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강호란 실력의 삼 푼쯤은 감춰야 하는 곳이니까.

약속했던 이틀이라는 대기 시간이 지나자 나를 포함해 소요파 문도원 일곱이 문파를 나섰다.

그런데 막 문파 정문에서 경공을 시전해 달리려는데 문도 한명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묻는다.

“문주님! 그런데 광성자가 정말 공동파에 있을까요?”

다른 지역과 달리 감숙성은 심결 퀘스트의 주관자인 광성자가 어디에 있는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 동네가 원체 사람이 적기도 했고, 그중에서도 심결 무공을 익힌 낭인들의 숫자가 적은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이미 광성자를 만나 퀘스트를 해결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꼭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서 그의 위치를 밝혀야만 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광성자의 위치를 예측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간단히 그 답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낙양에선 무림맹주였고, 호북에선 무당 장문인이었다. 사천은 당문 가주였고, 요동에선 장백파 문주였다. 그럼 뻔하지 않은가?

감숙성에서 제일 큰 문파인 공동파밖에 더 있겠는가?

이미 문도원들에게 우리의 목적지가 공동산이라는 건 밝혀 둔 상태였다.

질문을 던진 문도는 이대제자였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제가 개발자도 아닌데요.”

길게 답해주기 귀찮다. 짐작과 사실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깐.

어디까지나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건, 날 불신하기 때문이다. 문주가 문도한테 신뢰를 받기 위해서 길게 말을 늘어놓아야 할까? 귀찮다.

괜히 질문했다가 내 퉁명스런 대답을 들은 문도의 얼굴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그냥 무시하고 다시 경공을 시전하려는데 그 문도에게 하는 소리인 듯, 뒤에서 다른 문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문주님만 믿고 가세요. 저 양반이 말은 저렇게 해도 엄한 길로 데리고 갈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놈이야?’

뒤돌아서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싸가지 없는 발언을 한 인간을 찾았다.

낯이 익다. 일대제자다. 아이디도 눈에 익다. 고현이라는 놈이었다. 예전 광풍단하고 2차 문파대전을 벌일 때 태클 걸던 그 녀석 말이다.

저놈하고는 말 나눠봤자 입만 아프다.

“그럼 이제 달립니다. 공동산까지 안 쉬고 달릴 테니깐 다들 잘 따라와 주세요. 뒤처지면 버리고 갑니다. 그럼 가봅시다!”

* * *

공동산(퉃?山).

황제 헌언씨가 광성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이다.

광성자가 이때 전한 가르침은 황제, 노자로 이어지고 도교의 전신인 황로 사상을 이룬다. 즉, 중국 도교의 시작이 이 공동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전설로 인해 공동산은 도가제일산(道家第一山)이 되었다. 훗날 도교팔선의 일인인 종리권 역시 공동산에서 신선 비결을 입수하게 된다.

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의 고사가 우연히 공동산과 만나지는 않는다. 그만큼 공동산은 수도하기에 좋은, 선기(仙氣가) 넘쳐흐르는 산이었다.

공동산 처처에 암자와 수련 동굴이 숨겨져 있고 도궁(道宮)이 즐비하다. 진한(秦漢) 시절부터 청대(淸代)까지 오랜 세월 동안 세워진 건물들이 봉우리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8대(臺), 9궁(宮), 18원(院), 24사관(寺觀)이 있었다고 하니 가히 공동산색천하수(??山色天下首)라는 말 그대로다.

공동산은 감숙성과 사천성의 성계(省界)에 위치한다. 난주에서 촉 땅으로 향하는 관도를 따라 쭉 내려오다, 탕창(宕昌) 인근에서 갈림길을 타 또 한참을 들어가면 민산 산맥의 끝자락에 자리한 도가제일산을 만날 수 있다.

난주에서 6시간가량을 달리고서야 공동산 초입에 이르렀다.

공동산은 넓다. 넓은 만큼 길도 많다. 잘 따라오라는 말만 던지고 여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혼자 앞만 보고 달려갔다가는 뿔뿔이 흩어질 것 같다. 경공을 멈추었다.

뒤돌아보니 조자건은 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일대제자 둘과 이대제자 한 명이 보인다. 일대제자 한 명, 이대제자 한 명이 못 따라오고 뒤처진 것이다.

내가 발길을 멈추자 조자건도 따라서 가던 길을 멈추었다.

“좀 쉬어.”

“금방 올 겁니다.”

자건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안심하라고 말을 건넨다.

“흠, 내가 너무 빨리 달렸나? 그래봤자 겨우 유운신법일 뿐인데, 이걸 못 따라오나?”

그냥 한마디 던졌는데 날 바라보는 자건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문주님, 이건 신법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

“내력의 문제죠. 문주님, 내공이 지금 몇이에요?”

“나? 한 35만쯤 되려나? 너무 많아서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허! 너무 많으면 그렇게 무신경하게 삽니까? 우리가 난주에서 몇 시간 전에 출발한 줄 아세요? 여섯 시간 전입니다, 여섯 시간! 게임 속 시간으로 치면 이틀하고도 한나절이죠. 그 시간을 한 번도 안 쉬고 달리는 무인이 어디 문주님 같은 괴물 말고 또 있겠어요?”

“야, 야, 자건아, 너 혹시 차 운전해봤냐?”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갑자기 차 운전은 왜요?”

“원래 오토보다 스틱이 기름 덜 먹는다. 넌 내가 무슨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도 되는 줄 아냐? 그러는 너는 내가 한 번도 안 쉬고 달리는 동안 어떻게 따라왔는데? 네가 배운 비풍표나 내가 배운 유운신법이나 속도 차이는 전혀 없거든? 내공 탓이 아니라는 말이지. 달리면서 내공 안배를 적절히 하면 너도 한 번도 안 쉬고 달릴 수 있었을 거다. 뭐, 그래봤자 몇 번 운기 조식하고 전력으로 달리는 너나 한 번도 안 쉰 나나 결국은 그게 그거일 뿐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경공에서 속도 조절은 전용 컨트롤러가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럼 이 게임에선 스틱이 오토매틱보다 더 비싸다는 셈인가?

“그럼 결국은 별 차이 없다는 건가요? 근데 문주님은 왜 한 번도 안 쉬고 달린 겁니까? 별 차이 없다면서요. 몇 번 쉬어주면서 문도들이랑 같이 갔으면 좋았잖아요?”

“귀찮거든.”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를 하는 와중에 바로 뒤를 따르던 문도들이 도착했고, 한 5분 정도 지나자 뒤처졌던 문도 둘도 모습을 드러냈다. 난주에서 출발할 때 내게 질문했던 그 이대제자와 일대제자 고현이었다.

“문주님, 그래도 고현이가 말은 평소에 싸가지 없게 해도 나름대로 후배들 챙기는 멋은 있네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챙기는 놈이 앞에서 달린다(강호에선 경공을 시전하면 뒤를 돌아볼 수 없다)?

“아!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고현이 도착하자마자 멋쩍게 머리를 긁는다.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장장 삼십 분이다, 이놈아!”

“문주님! 정확히 삼십사 분입니다.”

자건이가 맞장구를 쳐 준다. 고현이는 더욱 무안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크큭.

“그러냐? 오래 기다리느라 열 좀 받았나 보네, 그런 걸 다 기억하고? 하여간 지난 일은 다 잊고… 지금부터 다들 내 말 잘 들어요. 공동파 안에 들어가면 절대 침묵! 다른 사람들한테 대답도 하지 말고 물어보지도 마세요. 설령 NPC라도!”

공동파와 소요파가 같은 무림맹 구성 문파라 해도, 따지고 보면 적이다. 공동파에 가입한 유저가 몇 없다지만, 괜한 말실수로 그들에게 책잡힐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다들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공동파는 공동산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더 가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봉황령(鳳凰嶺)을 지나 마종산(馬?山)에 이르니 울울창창한 거목들 사이로 공동파의 진궁(眞宮)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주문에 들어서니 현판에 금가루를 잔뜩 입은 ‘공동파’라는 글귀가 우리를 맞았다.

그 앞엔 2명의 공동파 NPC 문도들이 서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웃음을 지으며 인사해왔다.

“반갑습니다. 소요파 문주님께서 귀한 발걸음을 하셨군요.”

“반갑습니다, 조 문주님. 먼 길 행차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역시 사람은 이름을 팔고 볼 일이다. 아이디도 감춘 상태인데 용케 공동파 도사들이 알아본다.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혹시 귀 문파에 광성자라 불리는 분이 계신지요?”

“아, 조사님을 뵈러 오셨군요?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짐작이 맞았나 보다. 이름만 듣고 타 지역의 상황만 보고서 대충 짐작만 했지만, 내심 걱정이 들긴 했었다.

일주문을 벗어나 산비탈에 놓인 좁은 길을 한참 따라갔나 보다. 그간 지나친 도관이 몇 개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즈음에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눈앞에 아름드리 대들보 수십 개가 거대한 지붕을 받들고 있었다. 전각 정면엔 상청궁이라는 금빛 현판이 용사비등의 필체로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안내하던 접객 도사들이 여기까지가 자신들의 소임인 양 상청궁을 향해 손짓했다.

상청궁 안에는 노도사 다섯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중앙에 앉아 있는 이는 공동파 장문이었고, 장로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장문인 좌우에 둘씩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공동파 장문인의 이름이 예상을 깼다. 광성자라는 아이디 대신 해광이라는 아이디가 노도사 머리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가 본데요?”

해광의 아이디를 본 자건이가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니 해광이 인사를 해왔다.

“아! 조 문주님, 어서 오세요. 어쩐 일로다가 이런 누추한 곳에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소요파 취의청보다 족히 3배는 커 보이는 이곳이 누추한 곳이 맞나 모르겠다.

“예, 진인을 뵙게 돼서 기쁩니다. 그런데 일이 있어야만 꼭 공동 문중에 발을 들여놓는 건 아니지요. 오늘은 그저 문안 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

“허허허. 이거 제가 실언을 한 꼴이 돼버렸군요. 맞지요, 맞아요. 무림 동도의 발걸음을 붙잡을 게 무에 있겠습니까.”

해광 진인은 내 말이 흡족했는지 몇 가닥 남지 않은 백염을 들썩이며 웃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고급 NPC들과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는 건 언제나 재밌다. 투입과 산출이 꼭꼭 맞아떨어지니 말이다.

자주 올 일이 없는 곳이니 그럼 또 말장난이나 해볼까?

“진인, 근자에 듣자 하니 장성 이북에서 사마들의 발호가 거세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상단이나 표국에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고요. 중원제일상단이라는 황금산장마저도 그 피해가 극심하다 하니 다른 곳의 처지야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알다마다요. 공동 문중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해광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를 쳐왔다. 내 의도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진인, 아시다시피 이 척박한 감숙에서 민초들이 그나마 연명할 수 있는 건 다 서역과의 교통에서 이문을 취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한데, 상황이 이래서야 도저히 민초들의 삶이 유지될 도리가 없지요. 진인께서도 방금 전 공동에서도 피해가 막중하다고 하셨는데 어찌 이를 두고 보시는 겁니까? 공동에서 앞에 선다면 미력하나마 소요파도 같이할 의향이 있습니다.”

“으음… 조 문주님 말씀이야 잘 알겠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맞는 말이라고 항상 행동에 옮겨야 하는 건 아니랍니다. 장성 너머의 사마들은 사황성의 비호를 받고 있고, 지금 감숙 무림은 사황성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그거야 나도 알고 있지.

“하오면 사황성이 본격적으로 감숙 무림을 휘젓는 상황에서야 공동 산문의 빗장이 풀어진단 말입니까? 진인! 소요파가 불과 얼마 전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십니까? 사황성의 사주를 받은 감숙맹이라는 문파 때문에 큰 곤욕을 치렀습니다. 공동에서 손을 놓고 있는 와중에 사황성은 중원 침공, 감숙 공략을 쉼 없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 사황성이 가욕관을 넘어온다면, 이미 감숙 무림에 대한 그 책략이 완성돼 있는 상황일 게 뻔합니다. 지금도 또 어느 문파가 사황성의 사주를 받고 분란을 획책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건 또 금시초문이군요. 감숙맹이라는 곳이 사황성의 하수인이었다니요? 물론 조 문주님이 허황된 소리를 하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건은 따로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어쨌든 조 문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만간 사람을 풀어 장성 바깥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크하하! 이걸로 됐다.

정확히는 감숙맹이 사황성의 하수인이 아닌 단순한 동맹관계일 수도 있겠지만, 정황은 그런 오해를 충분히 살 만했고, 혹 공동이 자세히 알아보려고 해도 이미 망해버린 감숙맹에서 뭘 건져낼 수 있겠는가?

다만, 공동파 사람들이 장성 이북을 조사한다는 말은 기쁘기 그지없다. 반드시 사황성과 충돌할 게 뻔하고, 범과 곰이 싸우면 즐거운 건 나 같은 여우들이니까 말이다.

그럼 확실한 매듭을 위해 한마디 더 붙여 줘야겠다.

“진인께서 관심을 가져 주신다니 천만다행입니다. 본파에서는 이미 사람을 풀어 사황성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으니, 부디 출새(出塞)하실 분들께서는 본문에 들러 정보를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길잡이로 쓸 문도들도 준비해두고 있겠습니다.”

“허허, 꼭 그렇게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가까운 시일 안에 소요파에 들러보긴 하겠습니다.”

자건과 다섯 문도들은 내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감을 못 잡는 눈치였다. 그나마 자건은 계산을 때려 보는 듯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지만, 일반 문도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와 해광의 대화를 흘려듣고 있었다.

그럼,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본래 용건으로 돌아가 볼 시간이다.

“진인, 그럼 저희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벌써 일어나시렵니까? 여독이라도 풀고 돌아가시지…….”

“그럼 저도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만, 일이 너무 밀려서 말입니다. 아! 그리고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광성자 님께 문안 인사라도 드리고 가고 싶은데, 어르신께서 거처하시는 곳까지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암, 그래야지요. 그렇잖아도 요새 갑자기 어르신 찾아오시는 분들이 꽤 되던데, 조 문주님도 조사님에게 용건이 있으셨군요. 조사님이 머무시는 곳은 가까운 곳이 아니니 장로 한 분이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해광이 그렇게 말하자 바로 왼편에 앉아 있던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 따라오시지요.”

상청궁을 나와 장로의 안내를 받으며 공동파 깊숙이 더 들어갔다.

공동파는 구대문파답지 않게 사람이 썩 많은 게 아니었다. 강호 문파 랭킹 20위 안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가끔 지나치다 만나는 사람들은 죄다 NPC 캐릭터일 뿐, 유저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눈에 띄질 않았다.

더구나 위태위태한 바위산 틈샛길에 접어들자 NPC들마저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 눈엔 그저 갈라진 바위틈에 모질게 뿌리박고 있는 푸른 소나무들만 들어올 뿐이었다.

폭 한 자밖에 되지 않는 좁은 길을 십여 분 정도 따라갔나 보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눈앞에는 싸릿대로 만든 낮은 울타리가 보였고, 그 안에 겨우 세 칸짜리 초옥 하나가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안내하던 공동파 장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장로가 사라지자마자 함구령에서 풀려난 조자건의 질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휴우, 갑갑해 죽을 뻔했습니다. 문주님! 대체 방금 전에 공동파 장문인하고 나눈 이야기가 뭐예요? 어떻게 NPC들하고 그런 대화가 가능하죠? 왜 공동파 장문인이나 되는 사람이 문주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구요? 정말로 사황성하고 당장 전쟁할 준비가 돼 있긴 한 거예요?”

자건이 입을 떼자 다른 문도들 역시 너도나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사황성하고 전쟁할 능력이 있긴 한 건가요?”

“문주님, 우린 아직 그런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끄러워 죽겠다. 한 명이 입을 떼자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듯 내 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음… 자건아, NPC나 우리나 강호 세계에서는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는 걸 알아둬. 둘을 가름한다면 결코 높은 곳에 이르진 못할 거다. 그리고 사황성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간단히 말할게요. 그리고 당분간 이런 식의 대화는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어요. 정 궁금한 게 있으면 공동파에서 벗어난 뒤에 물어보도록 하세요.”

“…….”

“방금 전 대화를 들어서 알다시피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린 언제까지나 새우로 살 겁니다. 고래들을 싸움 붙이고 우린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 생각처럼 공동파와 사황성 사이에 너 죽고 나 죽기 식으로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고요. 감숙 무림 전부가 합심해도 아직 사황성엔 무리가 있거든요. 강호 인공지능이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삽질은 안 하겠죠.”

“엥? 그러면 왜 그랬어요?”

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진다.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손해 안 보는 짓이라면 다 해보는 거죠. 사실, 저도 조금 놀랐습니다. 의외로 해광 진인이 제 말을 잘 들어주네요. 어쨌든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지금 우리 소요파 전력으론 단독으로 사황성은커녕 공동파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걸요. 구대문파는 절대 녹록한 곳이 아닙니다.”

사실, 공동파 산문에 오를 때부터 신안으로 상대의 수준을 살펴보고 있었다.

일주문에 대기하던 두 문도들의 수준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문도들과 거의 수준의 차이가 없었지만, 상청궁 근처에 지나다니던 NPC들은 전혀 달랐다. 거의 대부분이, 아니 전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든 인물들이 절정의 경지를 돌파한 사람들뿐이었다.

거기에 상청궁 안에 있던 장문인과 장로들의 경지는 아무리 못 봐준다고 해도 최절정의 경지였다. 개개인 모두 용문객잔에서 겪었던 그 절대고수들에 뒤질 바 없는 잘 정제된 오러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 만나러 가는 광성자라는 전대 고인의 경지는 또 어떻겠는가? 조사라고 불린다면 그 경지는 최절정을 넘어섰을 게 뻔한데, 그럼 초절정이란 말밖에 더 되겠는가? 어쩌면 동방불패나 환관 앵도보다 더 높은 수준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흔히 말하길, 구대문파엔 이렇게 숨어 있는 은거 기인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수두룩하다고 하지 않는가?

유저들에게 인기 없는 문파라고 해도 역시 구대문파의 벽은 아직 우리가 넘보기엔 까마득하게 높았다.

하지만 암만 벽이 높다고 해도 두드리다 보면 언젠간 허물어진다. 물론 두드리는 건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이 해주겠지만!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는 문도들은 아직 궁금증이 다 해결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말로 길게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문제다.

“자,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퀘스트할 준비나 합시다. 우선 퀘스트 진행 방식은 다 숙지했죠?”

퀘스트는 1차는 구술시험이고 2차는 실기시험이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 몇 가지 해드릴게요. 우선 시간제한은 없다는 걸 생각하세요. 충분히 생각하고 난 다음에 광성자의 질문에 답변하시고, 혹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시면 얼른 정정하세요. 그냥 편하게 주위 친구들하고 농담 따먹기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까 제가 공동파 장문인하고 이야기하듯이 두루뭉술하게 적당히 둘러치는 게 최고입니다. 뭐, 그렇다고 이도저도 아니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문제겠지만요.”

왠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자니 고3 애들 면접 요령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된 것 같다.

“그리고 대련에 들어가면 되도록 최대한 버텨 보세요. 광성자를 잡으려고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버티는 데 주력해보라는 겁니다. 어쩌면 이 퀘스트는 적당히 시간만 버티면 클리어되는 형식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이거 하나씩 받아가세요.”

대련에 아이템 쓰는 게 반칙일지도 모르겠지만, 문도들에게 환혼신단을 나눠줬다. 혹 아이템 사용이 불가능하다면 반납을 원칙으로 삼고 말이다.

“자, 그럼 들어갑시다. 무운을 빕니다. 자, 자, 퀘스트는 어떻게 한다고 했죠?”

“얍삽하게!”

“좋아요, 얍삽하게! 꼭 기억하세요.”

사립문을 열어 앞으로 한 걸음 발을 내딛자 용문객잔에서처럼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퀘스트:심결 무공 봉인 해제 퀘스트(광성자)

출입 제한:진결 무공 12성

주의 사항:진입 시 탈출 불가능

퀘스트 완료 후 탈출 가능]

[퀘스트 ‘심결 무공 봉인 해제 퀘스트(광성자)’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네.”

도전하겠다는 대답을 하자 주위에 서 있던 문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초옥 마당 한켠에 나 홀로 서 있었다. 용문객잔처럼 동행 퀘스트가 아니었던 터라 모두 격리된 퀘스트 공간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그럼 고사장으로 가볼까나?”

다른 사람들은 아마 잔뜩 위축돼서 시험장으로 갔을 테지만, 난 오히려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왜냐고? 매번 1등만 한 사람은 시험이 즐거운 법이거든.

좁은 마당을 가로질러 초옥 툇마루로 올라갔다.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간 게 살짝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어차피 게임이라 벗어지지도 않는다.

조심히 문을 열었다.

드르륵-

방 안엔 죽기 일보 직전의 깡마른 노인네 하나가 책상다리로 앉아 있었다. 도복도 도관도 챙겨 입지 않은 갈의(葛衣) 노인은 구대문파 조사라기보다는 봉양할 자식 하나 없는 산골 늙은이, 딱 그 행색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그 모습을 보자니 행낭에 쌀이라도 몇 줌 있다면 직접 죽이라도 끓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행색이 그렇다고 해서 무시해도 될 만한 할아범은 아니었다. 누에 같은 굵은 흰 눈썹이 신선의 그것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데다, 살며시 켜 놓은 신안에 비친 노인의 오러는 여태 봐왔던 그 어떤 오러하고도 달랐다. 오러의 원래 뜻인 아우라(Aura)에 딱 맞는 그 오러였다.

물빛으로 빛나는 은은한 오러는 어디가 그 경계인지 모르게 주위에 동화되어 있었다. 분명 존재하긴 하나 굳이 경계를 짓기는 힘든 그런 오러였다.

광성자의 오러를 보자니 왠지 이 광성자가 그 광성자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제와 면담했다는 그 광성자.

‘아무리 무개념 게임이라고 해도 그건 좀 무리인가? 황제 시절부터 명나라 때까지 살아 있다면 대체 몇 살이야? 반만년?’

손님일지 침입자일지, 하여간에 누군가 들어온 기척이 있으면 뭔가 말 한마디라도 오고 가야 할 텐데, 광성자는 감고 있는 눈을 뜨지 않았다.

“진인, 퀘스트하러 왔습니다.”

내가 먼저 말했을 때에야 광성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말을 꺼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갑자기 손님이 미어져 들어오네. 저쪽 방 애들부터 먼저 치르고 자네 봐줄 테니깐 조금만 기다려 봐.”

‘끙.’

광성자는 도로 눈을 감아버렸다. 미동도 없었다. 숨도 안 쉬었다.

대기표도 없이 무작정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됐다. 5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났다. 30분이 지났다…….

“어이, 학생, 그만 일어나야지?”

기다리다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광성자가 날 흔들어 깨웠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일었다. 그렇다고 시험관한테 따질 수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다.

“늦어서 좀 미안해. 그럼 시작해볼까?”

능글맞게 웃어대는 노인네 표정이 별로 미안한 마음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보자, 그러니까… 배운 게 어떤 무공이라고?”

“육합권이요.”

“육합권? 육합권 좋지! 그럼 사문(師門)은 어떻게 되는가?”

사문? 나한테 사문이 있었나?

“그냥 책 보고 배웠는데요. 그게 혹 문제가 되나요?”

“응? 뭐, 문제 될 게 있겠나. 다들 책 보고 배우는걸. 난 또 어디 무관에서 배운 줄 알았지.”

“근데 그걸 왜 물어요? 무관에서 배우면 뭔가 다르나요?”

“아니, 같아. 풀빵 찍어낸 것처럼 똑같지.”

‘풀빵? 이 동네에도 붕어빵이 있냐?’

그나저나 미치겠다. 당최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걸까?

“보자… 그건 그렇게 넘어가고, 그럼 수련 기간은 얼마나 됐는가?”

이 질문엔 한참을 계산해야 했다. 게임 속 시간으로 대답해야 했으니.

“처음 익힌 건 팔 년이 됐고, 대성한 건 벌써 육 년째네요. 육 년간이나 오늘이 오길 기다린 셈이죠.”

“헐헐, 그렇게나 오래토록 기다려 왔다니 자네도 보통이 아니구먼그래? 그럼 그사이에 다른 무공이라도 배운 건 없었고?”

“없습니다. 남자라면 한 우물만 파야죠.”

“좋아, 좋아. 암, 고추 달린 사내라면 그 정도 끈기와 자존심은 있어야지. 그럼 됐네. 시험은 이만 마치도록 하지.”

[심결 육합권 요결‘공(攻)’을 습득했습니다.]

[심결 육합권 요결‘방(防)’을 습득했습니다.]

[심결 육합권 요결‘점(粘)’을 습득했습니다.]

[심결 육합권 요결‘충(衝)’을 습득했습니다.]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올라왔다.

처음엔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내용을 확인하고 미칠 뻔했다.

“이런, 망할 광성자!”

이게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분명! 대련을 해야 퀘스트가 끝나는 거라고 들었는데!

더구나 내가 받은 질문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냥 요식 행위일 뿐인 그런 질문이었는데, 이걸로 끝이라니! 난 겨우 4가지 요결로는 만족할 수 없단 말이다!

광성자는 그 말을 끝으로 미동조차 않고 아까처럼 쥐 죽은 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내가 혹 실수를 했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그것부터 분석해야 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 싸매고 고민해 봐도 내가 내린 결론은 뻔했다.

난 애당초 실수할 시간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혹시나 다른 문도들 상황은 어떤지 물어보고자 전서구를 날렸지만, 퀘스트 공간이라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분명 퀘스트는 끝났다. 이 퀘스트 공간을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여태 알려진 요결 중 전부라는 4단계 요결을 다 입수하기도 했다. 확실히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는 건 나로선 용납 못할 일이다. 한 번 끝낸 퀘스트에 재도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평생 이 4가지 요결만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건데, 그건 내 뜻과 다르다.

목석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광성자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치고 한참 지랄 발광을 했다. 그래도 놈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무 반응이 없다 보니 때리는 나도 점점 힘이 빠졌다.

“빌어먹을 강호 새끼! 밸런스가 그렇게 중요하냐!”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인공지능의 계략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자식보고 뭐?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인간에 가깝다고?”

안 되는 걸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게 밸런스 맞추기였던가? 튀는 놈은 정으로 때려서 집어넣는 게 이놈의 방식이었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게임은 왜 하는 건데?

‘이놈은 전생에 나랑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렇게 매번 훼방을 놓는 거란 말이냐!!’

“어이, 강호 씨, 잠깐 좀 나와 봐.”

막가는 마당에 예의 차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광성자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놈의 면상에다 대고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때려 줬다.

그래도 놈은 반응이 없었다. 인간이라면 기분 나빠서라도 무표정이 일그러질 짓이었건만!

“야, 이 나쁜 새꺄! 좋은 말 할 때 나오라고!”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비어져 나온다.

‘아니, 매번 이런 식으로 나만 가지고 태클을 걸어대면 날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미치겠네, 정말!’

운영자를 호출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 생각은 지워버렸다. 운영자한테 이야기했다가는 강호가 나만 특별히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운영자도 알아차릴 게 뻔하고, 그렇다면 다음엔 강호와 운영자 모두를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난 여태 게임하면서 운영자랑 친해져 득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내 장대한 계획을 생각하자면 더욱 그렇다. 원래 큰일을 하는 사람들이란 뒷구멍이 구린 법이니까.

‘별수 없는 건가… 이대로 물러서야 되는 건가…….’

아쉬움이 가득하다. 또 한 번 광성자의 면상을 째려봤지만, 놈은 여전했다. 묵묵부답.

상심에 젖어 문을 열었다.

초옥을 나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언가!

분명 나와 광성자 외엔 들어올 수 없는 절대금지(絶代禁地) 퀘스트 공간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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