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실마리
얼른 솥단지에서 뛰쳐나왔다. 뜨겁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난데없이 솥에서 튀어나온 날 보고도 주방의 숙수들은 그저 열심히 칼질만 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현운자가 재접속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고… 역시 난주로 돌아가는 게 아무래도 낫겠지?”
용문객잔 퀘스트를 하느라 시간을 엄청 잡아먹은 기분이었지만, 사실 플레이한 시간은 얼마 안 됐다. 겨우 5시간 남짓? 아직 잘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다.
일단, 오랜만에 전 문도 소집령을 내렸다. 전서구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장관이 펼쳐졌다.
‘참 개념 없는 게임이란 말이야. 어떻게 건물 안에서 전서구가 날아갈 수 있는지, 원…….’
내가 난주에 도착할 때쯤이면 문도들이 모두 소집되었을 것이다.
한참 달릴 준비를 하고 객잔 문을 열었다.
“엥?”
문밖에 현운자가 있었다. 그는 쪼그려 앉은 자세로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놀고 있었다.
현운자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지 내가 나온 기척도 알아채지 못했다.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리자, 그제야 현운자가 날 알아보고 반긴다.
“아! 퀘스트 클리어하신 거 맞죠? 그런데 왜 이제 나오세요! 한참 기다렸다고요! 지루해 죽을 뻔했네!”
현운자가 환하게 웃으며 투정을 부렸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죽으면 문파로 돌아가는 거 아니에요?”
문파에 가입하면 사망 시 본파에서 부활한다. 접속 금지 시간 4시간이 지나서 말이다.
“저도 몰라요. 왜 이렇게 됐는지. 죽으니까 바로 객잔 밖으로 나오던데요?”
‘퀘스트 공간에서 죽어서 그런 것인가?’
“사망 페널티는 어떻게 됐어요?”
“아이템은 떨구지 않았는데 나머진 뭐, 페널티 받았죠.”
쩝. 이렇게 또 하나의 혼천귀원단이 사라지는구나…….
이제 2알밖에 안 남은 절세영단을 내밀자, 현운자는 사양하는 시늉도 없이 날름 집어갔다.
“이거, 자꾸 미안한데요?”
운기와 레벨 복구를 마친 현운자가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조금 밉살스러웠다.
“맞아요. 미안해야지요.”
“윽!”
“그러니 다음부턴 좀 죽지 좀 마요. 이제 귀원단도 한 알밖에 안 남았다구요!”
“흑흑… 누군 죽고 싶어서 죽었나. 너무하십니다. 흑흑.”
아주 쇼를 해라.
“재미없고요, 얼른 집으로 갑시다. 문도 소집령 풀었어요.”
* * *
안서 근방에서 난주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난주에서 낙양 가는 길보다 더 멀었다. 그날 밤중까지 달려도 난주에 이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에 접속해서도 두어 시간을 더 달려서야 겨우 문파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문파에 발을 들이자, 간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난주 일통에 힘을 모았던 일 대 제자들, 그리고 간부들. 모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문도들과 인사를 나누며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는 취의청으로 들어갔다. 문도가 원체 많아져서 이제 취의청은 간부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 상태였다.
제일 먼저 반긴 사람은 소봉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반긴 건 아니었다.
“아놔! 연이 형! 그렇게 가버리고 아무 소식도 안 해주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음, 그랬나? 전서구 보낸 것 같은데… 깜박했나?”
“아무 연락도 없었다구요!”
얘 정말 걱정 많이 했나 보다. 무지 화내네. 뭐, 살다 보면 깜박할 수도 있는 거지.
“야, 그건 그렇고 표행은 어떻게 됐어?”
“쳇! 혼자서 멍청한 NPC들 끌고 마적 떼랑 싸우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요?”
“그럼 알지. 얼마나 고생했을지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옥문관 연래객점은 잘 찾았냐? 의뢰비는 제대로 받았고?”
“의뢰비는 제가 받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된 건진 모르죠. 뭐, 국주한테 자동으로 넘어갔겠죠. 연래객점 찾는 건 별문제 없었고, 표물도 제대로 전달했어요. 근데 연이 형 말대로 거기서 여기 오는 표행은 없던데요? 그냥 단발 표행이었어요. 뭐, 그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었지만요.”
그래도 무사히 별 탈 없이 끝나서 다행이었다.
소봉이는 일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었지만, 이 표행은 자칫하다간 소요파 기둥뿌리를 말아먹을지도 모를 표행이었다. 명색이 나라 간의 예물인 셈인데, 그걸 강탈당하기라도 하면 단순히 배상의 문제를 넘어서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돼버리는 것이다.
소봉이와 몇 마디 나누고 소요표국주를 만났다. 비단 표행의 결과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표행으로 인해 얻은 이득 중의 가장 큰 것은 새로운 정기 표행을 확보한 것이다. 특수 표행과 똑같은 행로인 옥문관까지의 비단 표행이었고, 표물 의뢰주는 황금산장이었다. 황금산장 난주분국주가 잠깐 언급했던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 표국 명성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그동안 다른 자잘한 표행도 잘 진행돼서인지 지금 표국 명성은 무려 8천. 며칠 사이에 거의 7천이나 상승한 것이다. 비단 표행이 원체 힘든 난이도였던 데다 아마도 특수한 표행이어서 폭등한 것 같았다.
세 번째 변화는 내가 제일 기대하고 있던 결과였다. 바로 NPC 무사들의 레벨 상승이었다. 다른 표행을 하고 있던 NPC 무사들의 레벨은 여전히 기본 레벨인 150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비단 표행을 다녀온 무사들은 크게는 5레벨, 적게는 3레벨씩 올라 있는 상태였다.
‘이 정도면 기틀은 잡힌 셈이군.’
문도들을 소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바로 이 표국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표국을 키워서 NPC 무사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제 시운전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였다.
그때, 밖에서 문도들과 놀고 있던 이광이 취의청에 들어와 모든 문도가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난주를 통일하고 나서 처음 갖는 전체 모임이었다. 유저들의 수는 전과 다름없이 2백이었지만, 문파를 들락거리는 NPC들까지 합치면 총 5백의 인원.
2백의 인원이 다 취의청에 모일 수 없어서, 이번 회합은 연무장에서 해야 했다. 만약 3백의 NPC를 전부 유저로 바꾼다면, 아마 우린 문파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며 모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2백 명이나 되다 보니, 확실히 통제가 잘 안 된다. 특히 나중에 받은 신입 문도들은 더욱 그랬다.
“아, 참! 여보세요! 거기 뒷줄에 계신 분들,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
“거기, 우주 씨! 조용히 하시라니까요? 그렇게 떠들면 회의는 언제 시작하겠어요!”
연무장에 모인 지 10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통제가 안 됐다. 슬슬 머리에 피가 몰린다.
군기반장의 감투를 쓴 이광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조용해질 것 같지 않았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포기하고, 그냥 일방적인 통보 형식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에, 오랜만입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쪽에 선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대부분 일 대 제자들이었다.
내가 입을 떼서인지 주위가 조금 조용해지자, 뒤쪽에 서 있는 이 대 제자들이 떠드는 말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사냥 중에 뭔 소집이냐고 구시렁대는 소리였다.
“거기 뒤쪽에 계신 분들 가운데 급히 사냥을 가셔야 되는 분 있어요? 말씀만 하세요. 보내드릴게요.”
손만 들면 바로 파문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용케 분위기를 알고는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흠, 좀 조용해졌네요.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다들 아시다시피 문파에 표국이 하나 생겼습니다. 이름은 소요표국이고, 제 돈만 투입해서 만든 표국입니다. 문파 표국이 아니라 제 표국이지요. 표국 운영에서 나오는 수익금 역시 제 개인 이득입니다.”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보니 다들 문주가 미쳤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게 사업을 하다 보니까 그렇더군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을 소집했습니다. 지금 표행은 NPC들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수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문도들이 조금 협조를 해줘야겠습니다. 계속 그런 건 아니고, 아마 한 두어 달만 도와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은 쉽습니다. 그냥 옥문관까지 왔다 갔다만 하면 됩니다. 매번 하라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하시면 될 겁니다. 월급은 드리겠습니다. 대략 한 번 표행에 따른 이득이 삼십만 냥쯤 되니, 십만 냥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특별한 사정이 있어 표행에 참여 못하시겠다는 분 계시나요?”
문도들은 대체 문주의 의도가 무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일 뿐, 질문하는 이도 없었다. 심지어 간부들조차.
“그럼 오늘부터 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오늘 표행은 무작위로 뽑아서 보낼 겁니다. 급한 일 있으시면 미리 말씀해주세요.”
그제야 문도들이 웅성웅성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말이야? NPC들끼리 잘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왜 필요해?”
“보수가 적지는 않지만, 옥문관까지 갔다 올 시간이면 그 정도 돈은 벌고도 남지 않나? 레벨 업도 못하는 걸 생각하면 순 적자잖아.”
“문주님이 이렇게 막가파식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오늘따라 왜 저러지?”
‘슬슬 태클 걸 놈들이 생길 때가 됐는데…….’
역시… 배짱 있는 한 문도가 손을 들었다. 발언하라고 이야기하자 녀석이 볼멘소리로 불만을 쏟아낸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문주님 말하는 걸로 봐서는 급한 일 같아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문도들한테도 나름대로 강호 생활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두 달 동안이나 표국 일에 묶어두시면 우린 언제 레벨을 올리라는 소립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표국에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파 전쟁이라면 기꺼이 시간을 내겠지만,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뭐,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건 아니지만… 아니, 오히려 기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듣고 보니 좋은 기분은 안 든다. 이놈은 날 너무 띄엄띄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저놈 낯도 익숙지 않다. 이 대 제자였다.
“다음부턴 문파 회의에 참가했으면 아이디 푸세요. 아이디 숨겨 놨으면 말할 때 소개부터 하시고요. 저 머리 나쁩니다. 이백이나 되는 문도들 얼굴 다 기억 못해요.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문파에 들어온 이상 개인 생활은 없습니다. 그게 싫다면 계속 낭인 생활을 하셨어야죠. 지금 들어오신 지 한 달쯤 되셨나요? 그동안은 자유로웠죠? 하지만 오늘부턴 자유보다는 조직과 규율이 우선인 문파가 될 것입니다.”
문도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게 확연히 보인다. 나 같아도 내가 한 소리를 들었다면 자리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은 간부들과 회의를 거쳐서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오로지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하지만 한 문도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문파의 앞길을 정하는 장문인으로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계신 일 대 제자나 간부들은 제가 잘못된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다른 경우의 수가 있다면 미리 묻고 자문을 구하겠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급적 따라주셔야 합니다.”
“문주님! 아무리 그래도 게임에서까지 이렇게 팍팍하게 해야 하나요?”
아까 태클 건 그 문도가 또 한마디 한다.
‘넌 찍혔다.’
“음… 그럼 이렇게 하죠. 정말 못하겠다, 문파대전엔 참가하겠지만 표국 일은 무리라고 판단하는 분들은 지금 서 계신 곳에서 오른쪽으로 나와주세요.”
방금 전 뭐라 뭐라 이견을 제시한 문도가 거침없이 대열을 이탈해 오른쪽으로 가 섰다.
아마 저 문도도 자기가 지금 썩 좋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분명 자기는 불평불만 분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한다고 생각하겠지. 내심 좋은 문파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반대 세력의 의견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시위하는 것일 테고. 후후. 그럼 네가 문파를 세울 것이지, 왜 문도가 되었냐구.
자리에서 이탈하는 문도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일 대 제자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나중에 받은 이 대 제자들 중 스물가량만 대열을 빠져나가 재정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굳은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데, 일 대 제자들과 간부들 몇몇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고 있다는 투였다.
“지금 대열 이탈하신 분들, 후회 없으시겠죠? 그럼 파문 조치해드리겠습니다.”
경악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이탈자들을 모조리 파문시켜 버렸다.
“일단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문도님들은 어디 가지 마시고 잠시 대기하면서 간부 회의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소요파 아닌 분들은 지금 문파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간부들은 전부 취의청으로 모여 주세요.”
여기저기서 이 새끼, 저 새끼 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난 취의청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요파 취의청.
“쩝.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만, 조금 걸리긴 하네.”
각룡이 형은 내가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뇨, 전 잘했다고 봐요. 문주가 까라면 깔 것이지, 뭔 말들이 그리 많은 건지.”
광견이 놈이다. 이놈 제대한 지 아직 1년밖에 안 됐다.
“갈 길 바쁜데 말 안 듣고 신경 쓰이게 하는 사람들 데리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내가 너무 싸가지 없게 말하긴 했지만, 뭐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으니 개의치 않는다.
“연아, 그래도 미리 경고도 하지 않고 내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걔들은 아직 문파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일 대 제자들하고는 달리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있었잖아. 한번 잘 다독여서 지금이라도 반성하는 애들은 받아주는 게 어때?”
소소 누님이 웬일로 착한 척을 다 한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설령 제가 잘못하고 있더라도 일단은 따라줄 사람이 필요하지, 시작부터 의심하고 반대하는 사람들하곤 같이 일할 수 없어요. 나이 스물이 넘은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가르치려 들려고 하는 것도 우습고요. 그냥 보내는 게 나아요.”
“음…….”
누님은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판단을 내리진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결국 파문 사건은 각룡이 형이 나서고서야 겨우 정리가 됐다.
“그래, 연이 말대로 그런 사람들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다른 곳처럼 수천 명씩 사람을 받는 곳도 아니고, 최정예로 꾸리는 게 당연하지. 이제부터 다독거리면서 언젠가 정예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계속 데리고 갈 순 없다고 본다. 아예 지금처럼 덜 친했을 때 안 맞는 사람은 내치는 게 낫다고 보고. 난 연이가 한 일에 찬성이다. 그런데 연아, 최정예로 꾸릴 생각이라면 이야기 안 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뭐요?”
“이백 명 가지고 대문파들하고 싸우려면, 이대론 부족하지 않겠어?”
후후. 그거야 당연한 말씀.
“그거야 당연하죠. 나름대로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일단 정리부터 하고 난 후에 이야기할 문제고요, 일단 회의 시작하죠. 먼저 보고드릴 게 몇 가지 있어요. 잘 들으세요. 이제 표국도 건설했고, 조만간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모르겠지만 압박이 좀 들어올 겁니다.”
간부들에게 그간 문파를 떠나서 겪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낙양에서 무영신투를 잡은 일부터 시작해 무림맹 가입 조건, 파신묘에서 겪었던 레이드 사냥, 그리고 현운자(그도 간부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표국 건설 이후 표행에서 겪었던 이야기 등등.
“와! 정말 바빴네요? 난 순 놀러만 다니는 줄 알았더니.”
“소봉이 이놈아, 원래 윗대가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바쁜 법이야. 나 고생하는 거 알았으면, 다음부턴 일 시키면 군말 없이 그냥 따라줘라, 제발.”
“끙.”
“자, 자, 제 이야긴 다 했고, 제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 중에 간부님들이 알고 계셔야만 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선, 내일이라도 무림맹에 가입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사고 친 것 때문에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비용 문제는 표국 운영이 정상 궤도에 올라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림정의 구현단이 다시 출현할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다. 일단은 출현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사실 그놈들한테 죽는 일은 그렇게 큰일이 아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문파 입장에서 말이다.
겨우 나 하나의 죽음이 두려워서 무림맹 가입이라는 문파의 큰일을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만약이라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문파대전 중에 이놈들을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문제는 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파의 문제가 돼버리는 것이다.
무림맹 가입은 그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고민한 결과였다. 설마 정의를 표방하는 무림정의 구현단이 마찬가지로 정의를 표방하는 무림맹 구성 문파의 장문인을 암살하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만난 그 강호라면 그런 판단 따윈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주술사를 양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엥? 주술사요?”
다들 놀라서 외쳤다. 아마도 강호에서 주술사라는 직업 이름은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 제 옆에 계신 현운자 님 같은 경우엔 무당파에서 부적술과 강신법이라는 비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표행길에서 만난 사황성의 새우라는 사람도 비슷한 부적술과 진법을 배운 상태였고요. 대단위 문파전이 벌어졌을 때, 주술사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겁니다. 어쩌면 독술도 나올지도 모르구요. 훗날을 대비해서 그런 잡기술을 배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황성의 담경은 이미 이런 작전을 진행 중이었다. 어쩌면 새우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무당파에도 현운자 외에 전문 부적술사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사천 당문 같은 경우엔 절정의 독을 사용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문파 간의 싸움을 생각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미리 대비해야 했다.
“난 안 합니다! 다른 사람 시키세요!”
눈치 빠른 광견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술이나 독공이 인기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저 녀석한테는 애초 시킬 생각도 없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일은 아니고, 그 문제는 차차 진행합시다. 아직 사냥하다가 정파용 주술 비급을 본 적도 없으니까요. 일단 비급을 구하고 나서 결정하기로 하고, 그럼 정말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까 각룡이 형이 물어보신 걸 생각해봤는데요, 이제 문도 수가 이백 명. 뭐, 사라진 스무 자리는 곧 채우면 되는 거고……. 하여간 이백이나 되는 문도를 이대로 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을 구성해야겠어요.”
“역시 연이 형! 나도 단 하나 맡겨 주세요!”
광견이다.
“넌 인마, 안 돼.”
“왜요!”
“인상이 더럽잖아. 자고로 대중 앞에 서는 사람은 면상이 받쳐 줘야 돼.”
“그래도 성형 수술해서 많이 나아졌는디…….”
이놈 말은 씹자.
“한 사십 명 정도씩 나누고, 단주는 각룡이 형, 자건이랑 립산이, 그리고 소봉이가 맡아.”
“엥? 제가요?”
“야, 난 왜 빼는 건데!”
소봉이는 깜짝 놀랐고, 소소 누님은 화를 냈다. 소봉이는 아직 문파에서 나이 어린 축에 드는 자기가 사람들을 이끌 자질이 없다는 뜻이었고, 소소 누님은 뭐… 권력욕이다.
“소봉이도 장로 자리에 있으면서 맨날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 나이 어린 친구들 위주로 해서 잘 꾸려 봐. 그리고 누님은 따로 맡을 게 있어요. 전에 한 번 꾸린 대로 척살단을 정식으로 운용해야겠어요.”
“카오 되라고? 싫어!”
“설마 제가 무식하게 그런 일 시키겠어요? 그냥 특수 부대라고 생각하세요. 새로운 사냥터를 물색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고급 무공 탐색, 혹은 적대 문파 동향 파악, 뭐 이런 잡일을 하는 거죠. 인원은 열 명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그리고 지원은 빠방하게 해줄게요.”
“흐흐흐. 그러면야 우리가 빠질 수 없지!”
이번에도 광견이다.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럼 단 구성에서 명칭까지 다들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단 구성한 다음부터는 일주일씩 교대로 표국 일에 협조 좀 해주세요. 표국 일을 하는 단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세 개 단들은 단별로 집단 사냥을 해주시구요. 가급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힘든 사냥터에서 하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제가 이야기했던 건 어떻게 됐어요? 감숙성에서 새로운 던전이나 이상한 장소 같은 거 발견한 적 없어요?”
낙양에 가기 전에 새로운 사냥터 모색 좀 해달라고 했었다. 매일 똑같은 사냥터에서 같은 문도들끼리 몹 가지고 신경전하는 건 짜증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요새 기련산에서 놀고 있긴 한데, 거긴 그냥 청랑채랑 똑같은 일반 사냥터일 뿐이고…….”
“누님, 기련산 작업장 수용 인원은 얼마나 되는데요?”
“음… 한 이십 명?”
한숨이 나온다. 청랑채나 고목문도 그 정도밖에 안 되고, 장성 인근에 출현하는 혈랑 떼나 비풍단 같은 경우는 지금 문도들 수준보다 너무 떨어져서 갈 수가 없다.
신경 쓸 일 없이 맘껏 레벨 업할 수 있는 작업장을 갖는 건 모든 길드의 소원일 것이다. 지금처럼 이미 알려진 세 사냥터 같은 경우엔 일반 유저들과 공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소요파 독단적으로 새로운 사냥터를 발견할 수 있다면,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광아! 너넨 어디 좋은 데 모르냐? 돈 잘 벌리고, 레벨 잘 오르고, 아는 사람들은 없는 그런 데 말이야.”
얘들이 그래도 제일 발이 넓었다.
“알 턱이 있겠수? 우리 주특기는 사냥이 아니라 약탈이었는데.”
“미안하다. 물어본 내가 미친놈이다.”
“뭐, 듣기로는…….”
짜식이 궁금하게 말 줄이기는.
“듣기로는 뭐?”
“대설산에 작업장이 하나 있다고 하고, 또 뭐더라? 명사산이던가? 거기 돈황 근처에 던전이 있다던데요? 꽤 큰 던전이라서 렙 좀 되는 낭인들은 거의 그쪽에서 사냥한다고 하더라구요.”
쩝. 안타깝게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대설산 작업장 역시 청랑채 수준밖에 안 되고, 명사산에 있다는 막고굴 던전 역시 너무 알려진 곳이다. 더구나 그곳들은 가욕관 바깥. 사황성과 약속한 대로 우린 진출할 수 없는 지역이다.
“별수 없구만. 일 좀 맡기려고 해도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아이고, 맨날 나만 바쁘네!”
“그렇죠. 윗대가리에 있는 사람은 원래 바쁜 법이죠.”
소봉이마저도 광견 자식한테 물이 들었나 보다. 아까 내가 한 소리를 되돌려 준다.
“그럼 단별로 단체 사냥하자는 것도 거의 물 건너간 거네요. 정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습니다. 각 단별로 다섯 명씩 차출해서 매일 정찰 보내세요. 제가 하남성에서 겪은 파신묘라는 던전은 이름도 없고 겉보기엔 허름한 사당이었을 뿐입니다. 전혀 던전 같지 않았죠. 그러니까 돌아다니면서 일단 건물 비스무리한 곳은 무조건 들어가 보세요. 동굴도 당연히 포함되고, 이름 모를 산이라도 길이 그쪽으로 나 있으면 일단 탐험해보세요. 아시겠죠?”
“네!”
다들 큰 소리로 대답을 하긴 하는데, 어째 별로 믿음이 가질 않는다.
회의 종료를 외치자마자 단주로 임명받은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나갔다. 쓸 만한 사람들을 먼저 채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평소 조용하던 각룡이 형이나 조립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밌네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문파 회의하는 걸 구경하던 현운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 재미없어요. 뭘 시키면 좀 들어줘야 되는데, 다들 투덜거리고 놀 생각만 한단 말입니다. 사냥터 물색 좀 해달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대로인지, 원.”
“사람들이 다 그렇죠, 뭐. 그래도 문도들을 파문해버린 건 별말 없이 이해해줬잖아요. 보통 문파에선 보기 드문 일일 거예요.”
그런가?
“그나저나 현운자 님은 이제 뭐 하고 노실래요? 전 곧바로 낙양 가서 무림맹 가입하고 올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아! 아닙니다. 그냥 왔다 갔다만 하면 되는데 괜히 시간 아깝기만 할 것 같네요. 그럼 다른 간부들하고 같이 사냥하고 계실래요? 매일 저하고만 붙어 지내서 다른 사람들하곤 별로 친해지지 못했잖아요. 어때요, 그러실래요?”
“아니에요. 그냥 주변에서 혼자 사냥하고 있을게요. 낙양 갔다가 돌아오시면 다시 연락 주세요. 그 안에 좋은 사냥터라도 하나 발견해놓고 있을게요.”
“하하! 겨우 하루면 갔다 오는데 그 사이에 어떻게 발견해요? 정 그렇다면 그냥 편히 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취의청을 나오니까 이건 무슨 초등학교 입학식을 보는 것 같다. 이리저리 단별로 사람들 가르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소소 누님은 이미 남의 단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다짜고짜 끌고 가버리고 있었고, 서로 친한 사람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단주와 단체 협상을 시도하는 단원들까지 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낙양 가기 전에 잠깐 만나볼 사람들이 있었다. 취의청에서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미처 잡아놓을 새도 없이 뛰쳐나가버린 인간들이었다.
“야! 광우야, 광견아! 잠깐 이쪽으로 와봐라!”
은소소 곁에서 신입 척살단원들을 협박하고 있던 이광이 구시렁대면서 달려왔다.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알았다. 니네들 지금 무공 배웠어?”
“배웠죠. 그럼 설마하니 무공 하나 없이 그대로 있었을라구?”
“뭐 배웠어? 계열은 어떻게 하려고?”
“권 배웠어요. 진결육합권. 계열은 불가로. 왜요?”
광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왠지 그 모습이 귀엽다. 불가 계열이라면 순전히 내가 등록한 무공들뿐인데, 나를 따라 한다는 게 조금 찝찝하다는 건가? 하하.
“잘 선택했다. 사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려면 내가 등록한 것들로만 배우는 게 낫긴 하지. 그럴 줄 알고 있었고. 그럼 이거 받아라.”
다른 무공을 배우고 있던 사람들에겐 진결육합권도 별 이점이 없지만, 이광처럼 죽어서 무공을 전부 상실한 사람들에겐 나를 따라 하는 게 가장 빨리 과거 상태를 회복하는 길이었다.
내가 건넨 물건은 대력금강장이었다. 무림정의 구현단 보스를 잡고 먹은 그 최절정급 비급 말이다. 내가 배울 생각도 해봤지만, 곧 심결육합권을 배울 마당인데 이건 별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권 계열 무공도 아니고 장법이었다.
“엥? 그냥 주는 거예요? 공짜로?”
광우와 광견이 미심쩍다는 듯이 날 바라본다.
당연히 의심해야지! 크크큭.
“그거 수련 조건이 나한권 십 성이거든? 소림 절정무공은 전부 나한권을 배워야 가능하니까, 일단 나한권부터 수련해라. 그리고 누가 배우든지 간에 선택해야 돼. 그거 배운 사람은 앞으로 장법 계열로 쭉 밀고 가기로. 문파에 이것저것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야 하니까 말이야. 그럼 누가 배울래? 지금 정해라.”
놈들은 그제야 이 절정 비급이 사실은 미끼라는 걸 눈치 챘다. 문파에 다양한 무공을 등록하기 위한 문주의 계략이라는 걸 말이다.
“제가 배우죠. 솔직히 문주 형 하던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별로 재미없었어요.”
의외로 광견이 도전 정신이 있었다.
“그래? 그럼 좋아. 선택해준 보답으로 이것도 주마.”
역시 그때 같이 얻은 일급 경공 비급인 세류표를 광견에게 건넸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왜 자꾸 얘만 밀어주시는 거예요!”
광우가 뭐라 소리치는 걸 무시하고 이번엔 소소 누님에게 갔다. 한번 아이템 뿌리기 시작하니 필요 없는 다른 물건도 그냥 나눠줘 버리기로 했다.
“소소 누님!”
“응?”
“받아요.”
“어? 검이네?”
백야를 받은 누님이 잠깐 옵션을 살펴보더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너무 좋은 거 주는 거 아냐? 우리 문주가 이런 거 공짜로 주는 사람이 아닌데… 뭐 또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거야?”
누님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계산적으로 살았었나? 나 정말 그런 놈이었나?
“그냥 주는 거예요. 우연찮게 얻은 건데, 제가 뭐 검 쓸 일이 있어야죠.”
“흠, 그래도 나만 주는 게 왠지 의심이 가는걸? 검 쓰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야? 솔직히 말해, 부려먹을 일 있으면!”
“하하. 정말 아니래두요. 누님 말대로 검 쓰는 사람이 많긴 하죠. 그래도 그 사람들 중에서 어디 누님만큼 예쁜 사람이 있나요? 예뻐서 드리는 겁니다.”
“호호호! 그렇다면야 당연히 내가 받아야지! 연아, 고마워! 잘 쓸게!”
누님이 예쁘게 생긴 건 맞지만, 그래서 주는 건 아니다. 오래전 광풍단을 상대로 척살단을 운용할 때 다음에 좋은 물건 주기로 약속한 적이 있는데, 오늘에서야 그 묵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당장 할 일도 많은 데다 현운자가 기다리고 있어 한눈팔지 않고 바로 무림맹으로 갔다.
접객당주 노대광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친근하게 굴었다. 명성이 더 올라서 그런지, 아니면 문파 등급이 전보다 더 높은 상태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 문주님,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계세요. 바로 맹주님께 연락 취해드리겠습니다.”
살갑게 맞아주던 노대광이 전형적인 원스톱 행정을 선보여 준다.
역시 내 위상이 높아진 것일까? 노대광이 집무실을 나간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맹주 접견 승인이 떨어졌다.
시비의 안내를 받아 저번처럼 호위무사들의 검색을 거치자 의천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노대광과 달리 무림맹주 조운학은 여전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납시었소, 조 문주?”
“무림맹에 가입하려고 왔습니다.”
“오호! 좋은 결정하셨습니다. 아무렴, 칼을 든 자라면 마땅히 사마 척결에 앞장서야지요. 그렇잖아도 당금 강호 정세 돌아가는 게 영 심상치 않았는데, 아주 무림의 홍복입니다. 훌륭해요, 훌륭해!”
맹주는 그 긴 수염을 들썩거리면서 꽤나 흐뭇해했다.
‘제 놈 세력이 커가는 일이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바로 가입하겠냐는 메시지가 떠야 하는데, 이상하다. 아무런 시스템 메시지도 출력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맹주가 얼굴에 가득하던 웃음을 갑자기 싹 지워버리더니 꽤 심각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 문주, 듣자하니 귀하께서 꽤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더이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허허! 시치미 떼실 요량이오이까? 한 달 전 감숙성에서 있었던 그 사건을 모른 척하실 생각이오? 듣자하니 무림 정의를 다시 세우느라 고생하던 협객들이 귀하의 손속에 해를 입었다고 하던데… 그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미치겠네. 무사히 넘어가나 했더니…….’
“사실은 그 일 때문에 맹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실수가 몇 번 겹쳤죠.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강호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짜 아닙니까? 설마 그 무영신투가 의적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현상 수배 의뢰를 받은 게 죄라면 죄지요. 하지만 모르고 저지른 일을 죽음으로 갚으라 하니, 어찌 칼을 든 무인이 그대로 있겠습니까? 그 일은 그렇게 된 겁니다. 아무쪼록 맹주님이 잘 좀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흠… 알고 보니 조 문주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구려. 흠, 좋습니다. 세상에 명분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자기 실력도 모르고 고수에게 섣불리 덤빈 그 협객들에게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겠지요. 알았습니다. 그 일은 맹에서 처리해드리지요. 귀 문파에선 그저 유가족에게 적절한 보상금만 지원하시면 될 겝니다.”
‘유가족? 보상금? 대체 얼마나!’
그때서야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무림맹 특별 맹비로 은 1억 냥을 지불하시겠습니까?]
휴… 한시름 놓았다. 감당치 못할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불하려고 해도 지금 내게 그만한 돈은 없었다. 문파 창고에나 돈이 있을 뿐.
맹주한테 그렇게 말하자, 의외로 맹주는 그럼 문파 창고에서 돈을 인출해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맹주의 그 말을 듣자, 왠지 지금 내 눈앞의 NPC가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여간 문파 창고에서 1억을 무림맹으로 계좌 이체했다. 그리고 무림맹 1년 회비로 2백만 냥을 더 지불하고 나서야 소요파는 무림맹에 속하게 되었다.
생각 밖의 지출이 있었지만, 골치 아픈 문제가 일단락돼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문파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전서구 한 마리가 내게 도착했다.
<수신자:조연
어디세요? 문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연락 주세요.
발신자:조자건>
급한 일이라면 용건이 적혀 있을 텐데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고 조자건 성격에 별일 아닌 일로 전서구를 날리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급한 일도 아니고, 별일도 아닌 그런 일이 도대체 무엇일지 너무 궁금했다.
일단 언제쯤 도착할 거라고 연락을 하긴 했는데, 도무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소요파에는 다른 문도는 보이지 않고 조자건만이 외로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단주라는 직책을 맡게 돼서 바쁠 텐데도 말이다.
“무슨 일이야?”
“휴가 좀 주세요. 연이 형하고도 관련 있는 내용이에요.”
“이유가 뭔데?”
“심결 무공이 풀렸어요.”
자건의 말을 듣자마자 난 심결육합권 비급을 맡겨 둔 표국 창고로 달려갔다.
[육합권 심결(心結)
육합권의 최종 진화형. 길을 나서면 되돌아보지 않는다.
수련 제한:육합권 진결 12성
봉인 상태
봉인을 해제하려면 광성자를 찾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