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장. 용문객잔 vs 동창 (27/62)

제27장. 용문객잔 vs 동창

방문을 열자마자 현운자의 집요한 질문이 쏟아져 왔다.

“어떻게 됐어요? 그냥 덮쳤어요, 아니면 그 화려한 말발로 먼저 뿅 가게 하고 나서 덮쳤어요? 아, 궁금해요! 얼른얼른 이야기 좀 해줘요!”

‘얘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다냐… 아무리 여자에 고파도 그렇지, 내가 NPC 따위나 덮칠 놈으로 보이더냐!’

“도사라면서요? 아니, 도 닦는 사람이 왜 그렇게 그쪽에 관심이 많아요?”

“음, 도의 그물은 성길지라도 그 무엇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속의 일을 완전히 끊고 산중 수련만 한다는 건 그저 헛된 공염불일 따름이지요. 이것저것 다 겪어보는 게 참된 도에 이르는 길이랍니다, 조 시주. 그러니 얼른 이야기 좀 해줘요!”

첨에 나 등 떠밀어서 보낼 때완 정반대인 헛소리를 한다. 그땐 뭐랬더라? 청정계를 깨면 그동안 닦은 도가 아깝다고?

“어느 문파인진 모르겠지만, 참 유연한 계율을 가지고 있는 문파네요. 완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니 말입니다.”

“그렇죠. 만상(萬象)에 도가 깃들지 않은 것이 없지요. 그나저나 말 안 해줄 거예요? 안 해주면 저 삐뚤어져 버릴 겁니다!”

지금은 안 삐뚤어져 있나?

“아, 말해줄 테니까 일단 나가죠. 날도 밝았는데 남자랑 여관방에 있고 싶지 않네요.”

“윽.”

뭐라 뭐라 구시렁대는 현운자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주루는 아침이라서 그런지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다.어쩌면 동창이 곧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 것도 같았다.

어제 앉았던 탁자를 잡고 앉아서 현운자에게 밤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에게게! 그게 뭐예요! 멍석까지 다 깔렸는데 그냥 나왔단 말이에요?”

“현운자 님, 대체 뭘 바라는 거예요? 무슨 에로 비디오 찍을 일 있어요? 강호에서 그런 기능도 지원하나 모르겠지만, 정 아까우면 본인이 직접 사향 주머니 사들고 다시 퀘스트 해보시든가요.”

재미도 없는데 자꾸 놀리려 드는 현운자에게 한마디 톡 쏘아주었다. 현운자는 그제야 조금 무안해졌는지 쉴 새 없이 놀리던 입을 멈췄다.

“주문하시겠어요?”

언제 온 것인지 점소이가 탁자에 찻잔을 놓으며 물었다.

“아무거나 되는 대로 가져와요.”

“아무거나, 라는 메뉴는 없습니다.”

이게 언제적 개그더라…….

“만두나 가져와.”

점소이가 사라지자, 우린 여태까지 했던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때려치우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동창 때려잡기를 말이다.

일단은 객잔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동창에서 얼마나 많은 숫자가 몰려올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열은 넘을 게 분명했고, 어쩌면 백 단위가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대병력을 상대로 이쪽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현운자, 그리고 금양옥과 용문객잔의 일꾼 10여 명이 전부였다. 거기에다 NPC들의 무공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전 계획을 NPC들이 알아들을 리는 없으니, 계획은 처음부터 우리 둘이 동창의 모든 인원을 감당하는 쪽으로 짜야 했다.

“일단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같이 객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합시다. 아마 예고 따윈 하지도 않고 쳐들어올 것 같으니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거예요. 어쨌든 일정상으론 오늘이라고 하니까 두 시간만 잘 버텨 보도록 해요.”

출입구가 하나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입구를 지키러 막 일어나려는데 주문한 만두가 왔다. 그런데 들고 오는 사람이 점소이가 아니라 금양옥이었다.

“조 공자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금양옥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현운자가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묘한 미소를 던진다. 꼭 그 웃음이 ‘사실은 어젯밤에 뭔 일 있었던 거 아니야?’라는 소리로 다가온다.

“네, 금 소저도 밤새 편안히 잤나요?”

“그럭저럭요. 그런데 식사도 안 하고 어딜 가시려고요?”

엉거주춤 서 있는 날 보고는 금양옥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어젯밤에 금 소저를 지켜 주기로 약조했잖아요. 동창이 언제 올지 모르니 지금부터 준비하려고 했지요.”

금양옥은 내 말에 감동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는 현운자가 노골적으로 킥킥거렸다.

“고마워요, 조 공자님. 그런데 혼자서 무거운 짐을 다 떠맡으실 생각은 마세요. 제게도 무림동도라는 친구들이 몇 있으니까요. 따라오세요. 소개시켜 드릴게요.”

조력자가 더 있다는 말이었지만, 좋은 기분은 안 들었다. 아군이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적이 출현할 게 뻔하니 말이다. 더구나 우리 계획은 저런 NPC들의 협조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한마디로, 실제 전투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들 때문에 상황이 더 위험해졌다는 말이었다.

생각은 그렇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금양옥을 따라 주루 1층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앉아 있던 2층의 탁자 바로 밑에 4명의 NPC 무인들이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주루에 손님이라곤 우리들뿐이었는데, 그새 다른 손님이 생겨난 것이다.

NPC들이 앉아 있는 위치상 우리가 몰랐을 수도 있지만, 왠지 금양옥이 2층에서 내려오면서 급조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라버니들, 인사들 나누세요. 절 도와주시겠다고 난주에서 오신 소요문주 조연 님이세요.”

내 신분을 밝힌 적도 없건만 잘도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사내들 넷이 분분히 일어서더니 내게 포권을 해왔다.

“안녕하시오. 조 대협의 의기에 감읍하는 바이오. 북협 곽정이라고 하오.”

“동사 황약사라네.”

“서광 양과라고 합니다.”

“남승 일등이라고 하네. 아미타불.”

이거 참,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아주 가지가지 별별 짓을 다 하는 용문객잔이었다.

난 기가 막혀서 꿈쩍도 않고 있는데, 현운자는 이 양반들이 재밌나 보다.

“저기요, 아저씨들, 근데 중완동은 왜 안 왔어요? 그리고 신조 대협은 왜 부인하고 같이 안 오셨구요? 곽 대협도 황 여협을 제쳐 두고 혼자 오신 거예요?”

참 물어볼 것도 많다. 얘들이 혼자 오고 싶어서 왔겠냐? 개발자가 그렇게 만들어놨으니 그런 거지.

그런데 가관이다. 신(新)무림사절은 현운자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게 아닌가.

“소용녀는 지금 애를 보고 있어서 말입니다.”

“황용은 지금 개방 대회합 때문에 몸을 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통이 그 자식이 어디 가서 뭐 하고 사는지는 나도 몰라.”

마지막 말은 황약사가 한 말이다.

NPC들의 말에 잠깐 재미가 있긴 했지만, 내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연 님, 왜 그러세요? 엄청난 강자들이 도와주러 왔잖아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미안하지만, 난 전혀 그런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그거야 일이 닥쳐 봐야 알겠지만, 절대 긴장을 풀지 마세요. 퀘스트가 쉽다면 무림사절이 도와주러 오지도 않았을 테고, 우리는 구경만 하고 단지 무림사절의 힘만으로 퀘스트가 통과될 리도 없죠. 지금 제 생각으론 어쩌면 최소한 저들 수준 정도는 돼야 도전할 수 있는 퀘스트라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저 무림사절보다 더 강한 자들이 없을 것 같아요? 혹시라도 동방불패급 고수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수도 있고, 만약 개발자가 사이코라면 드래곤이 출현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말해놓고 보니까 정말로 드래곤이 출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미 무개념 퀘스트가 되어버렸지 않은가.

현운자가 그제야 상황 파악을 했는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무림사절은 더 이상 우리와 나눌 말이 없는지 자리에 앉아서 자기들끼리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아서 원래 계획대로 현운자와 나는 입구를 지키러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금양옥이 내 소매를 슬며시 잡아끌었다.

‘뭐지?’

“잠깐만 따라오세요.”

영문을 모르겠다. 금양옥의 얼굴엔 의미 모를 간절함이 가득했다. 금양옥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따라오라는 말뿐이었다. 현운자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고 있고, 금양옥은 막무가내였다.

별수 있나? 미녀가 가자는데 따라갈 수밖에.

그녀가 데려간 곳은 어제 그 방이었다. 금양옥의 침실 말이다.

‘다시 멍석을 깔겠다는 것인가?’

내가 좀 매력남이긴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서 그 짓을 하기란 영 껄끄러운데…….

방 안에 날 우두커니 서 있게 만든 그녀가 침상 옆의 서랍장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안에서 꺼낸 물건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얇은 쇠갑옷이었다. 전신을 가리는 장군용 갑주가 아니라 상체만 가릴 수 있는 흉갑.

‘어째 생김새가 그것하고 비슷한걸?’

“연위갑(軟蝟甲)이에요. 북협 곽 대협께서 절 생각해서 가져오신 물건이죠. 공자께 드릴게요. 부디 거절치 마시고 받아주세요.”

‘크하하하!’

속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마구마구 울려 퍼진다. 연위갑이라니! 연위갑이라니!

무림에 기진이보(奇珍異寶)가 셀 수 없이 많다지만, 연위갑은 그중 단연 최상급. 모든 갑옷류에서 최고라고 할 만한 물건이다. 김용의 영웅문에서 동사 황약사가 딸 황용의 호신을 위해서 건네준 물건이고, 이 연위갑 덕택에 황용은 수많은 위기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금양옥은 곽정의 아내인 황용이 자기의 안전을 생각해서 남편 손에 연위갑을 들려 보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신무림사절이 출현하게 된 건 원래 계획된 일이고, 이 연위갑이야말로 금양옥과의 친밀도가 상승한 효과란 말이 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걸 날름 받아먹어야 될지, 몇 번 사양하고 받아야 할지 모르겠네.’

미치겠다. 눈앞에 맛있는 떡이 ‘어서 잡숴주쇼’ 그러고 있는데 섣불리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설마 입속에 들어간 떡을 토하라고 하진 않겠지!’

연위갑만 얻을 수 있다면 사망 따위야 무방했고, 이 퀘스트를 영원히 실패한다고 해도 내겐 이득이었다.

“맛있게 잘 먹겠소.”

‘헉, 이게 아닌데!’

떡 생각을 하다가 그만 말실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말실수쯤이야!

“고마워요, 조 공자. 부디 다치지만 말아줘요.”

아무래도 이 퀘스트를 만든 사람은 신파극을 좋아하나 보다. 아니, 사람 잡아먹는 객잔 주인이 저런 말을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하다니! 이건 신파극 수준이 아니라 아예 코미디였다.

금양옥은 선물만 주고 곧 방을 나가버렸다. 바쁘긴 나도 마찬가지. 언제 동창이 쳐들어올지 모른다. 그렇잖아도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연위갑(軟蝟甲)

고슴도치 모양을 한 무림 최강의 방어구. 천잠보의만이 견줄 수 있다.

계열:갑옷

방어력:5,000

착용 효과:근접 박투술(권, 장, 조, 퇴법 등)에 한해 받은 공격의 30%의 데미지를 되돌린다.]

NPC들은 지들끼리 계속 놀게 하고, 현운자와 나만 객잔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와 보니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이 휘이잉,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피워 올린다. 날은 따사해 보이는데, 그 흙먼지가 분위기를 소슬하게 만들었다.

마음이 급해서 연위갑은 입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동창 녀석들이 몰려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지금에서야 착용할 짬이 났다. 그런데 행낭에서 연위갑을 꺼내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퀘스트를 통과하려면 우리 둘 모두 잘 버텨야 하는데, 굳이 내가 입어야 될 필요가 있을까?’

나야 금강저도 있고 신안도 있으니 현운자보다 더 오래 버틸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체력이나 내공도 현운자보다 많은 상태가 아닌가. 현운자의 태극권이 분명 수비하는 데 유리한 무공이고 그의 부적술이 믿을 만하긴 하지만, 버티는 일이라면 아무래도 내가 나았다.

아니, 그가 전에 건달바왕을 잡을 때 사용했던 그 강신법이라면 오히려 현운자에게 이걸 입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위갑을 입고 저 객잔 문짝에 버티고 선다면, 가히 장판교의 장비가 현신한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나는 연위갑을 꺼내들고 현운자에게 건넸다.

“받으세요.”

“그게 뭔데요?”

현운자는 철침이 무수히 박힌 연위갑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연위갑이라고, 갑옷이에요. 아까 금양옥이가 주더라구요. 아무래도 현운자 님이 입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저번에 건달바왕 잡을 때 무슨 강신법 쓰셨잖아요. 이거 입고 저기 객잔 문에서 그 강신법을 쓴다면 퀘스트가 한결 쉬어질 것도 같은데요.”

현운자가 내 손 위에 놓인 연위갑을 집어갔다.

아이템 능력을 보느라 잠시 조용히 있던 현운자가 입을 열었다.

“와우! 엄청난걸요? 고마워요, 조연 님! 역시 조연 님 따라오길 잘했단 말입니다. 하하하!”

‘어어! 어이, 그거 빌려 주는 건데…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주는 거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현운자의 이어지는 말이 내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사실, 제가 레벨에 비해서 체력이 많이 부족한 상태거든요. 더구나 조연 님도 아시다시피 태극권이 공격력은 좀 떨어지는 무공이잖아요. 진결이 됐어도 방어 기술만 좋아졌다 뿐이지 공격력은 별로 좋아지지도 않았구요. 정말 제게는 아주 맞춤인 아이템이네요. 고마워요, 조연 님. 절 이렇게나 신경써주셔서요.”

아아아아아! 미치고 팔짝 뛸 일!

‘지금이라도 말할까, 빌려 주는 거라고?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는데…….’

결국 달라는 소리는 하지 못했다. 빌려 주는 거라는 소릴 하지 못했다. 그동안 현운자가 내게 양보한 게 한둘이 아닌데,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속에선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그저 팔자려니 해야 했다.

그런 나를 염장 지르는 것인지, 현운자가 하는 말.

“연위갑을 걸쳤으니 이제부터 조 대협을 더 잘 보필해드리지요.”

‘먹고 날르지만 마라.’

희희낙락 입이 귓가에 걸린 표정으로 현운자가 연위갑을 걸쳤다.

가슴이 쓰린 상태라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괜히 입을 열었다간 쓰린 마음 내비칠까 봐 굳게 입을 다물었다.

중천에 걸려 있던 해가 어느덧 서녘을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점점 키를 키우더니 주인인 나보다 더 길어졌다.

“곧 오겠네요.”

“조연 님은 너무 걱정이 많아요. 어차피 게임이란 건 재미로 하는 거잖아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

내가 침잠된 어조로 말하자, 현운자가 걱정을 덜어주려고 그렇게 답한다. 현운자는 내가 퀘스트를 걱정해서 분위기가 처진 줄 아나 보다. 그게 아닌데.

어쨌건 현운자의 말이 맞긴 하다. 게임은 즐기려고 하는 거지.

그러고 보면, 현운자는 참 게임을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아이템 욕심도 없고, 그저 재밌을 것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날 따라온 걸 보면 말이다. 겨우 연위갑 따위에 마음 쓰는 내가 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아직도 진정한 재미를 느끼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소요파를 천하제일문파로 만들고 천하제일인이 되었을 때쯤이면 나도 현운자처럼 유유자적 강호를 즐길 수 있겠지. 소항의 기녀들하고 뱃놀이도 하러 가보고, 남만의 밀림도 탐험하러 가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친구들은 계획대로 오지 탐험 제대로 하고 있나 모르겠네.’

사풍과 그 친구들인 일향, 적월이 생각난다. 그 친구들도 얽매인 것 하나 없이 세상을 주유하고 싶다고 했었다. 어쩌면 지금쯤 남만의 독충과 뒹굴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저 멀리 장백산이나 곤륜산에 다다랐을지도 모르겠다.

‘기회가 되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왔네요.”

땅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상념에 젖어 있는데, 현운자가 어깨를 두드리며 날 깨웠다.

앞을 바라보니, 시커먼 피풍의와 죽립을 쓴 검은 인영 수십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두 말을 타고 있는 기마병들이었다.

모든 무협 소설에서 공공의 적. 절대 착한 역할은 맡지 못하는 단체. 동창 놈들이었다.

놈들의 대오는 눈앞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 종렬로 다가오는 녀석들의 꼬리는 끝이 날 것 같다 싶으면 다시 새로운 인영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엄청나네요.”

“현운자 님은 안으로 들어가서 금양옥한테 준비하라고 일러두세요. 전 끝까지 보고 나서 들어갈게요.”

“그러죠. 조심하세요.”

검은 부대의 선두는 용문객잔과의 거리가 1백여 장 정도 남았을 때에야 진군을 멈추었다. 멈춘 선두 뒤로 후열이 차곡차곡 따라붙어서는 장방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 개의 장방진이 만들어지자 그 오른쪽으로 마차 한 대가 튀어나왔고, 마차의 오른쪽으로 또 하나의 장방진이 만들어졌다. 대충 세어봐도 한 개의 장방진당 1백 기(騎). 마차를 둘러싼 호위무사들을 제외하고도 도합 2백이나 되는 무인들이었다.

‘참 나, 동창 위사들이라면 못해도 일류급 이상일 텐데, 저 숫자를 어떻게 감당해?’

무림사절 때문에 숫자가 더 늘었다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일당백, 일당백 그러지만, 아직은 그런 고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단 말이다!’

놈들도 날 일당백의 고수로 만들어줄 생각이 없었나 보다.

시작은 아주 아주 정석대로였다. 기마병 2백이 좌우에서 돌격해온 것이다.

객잔과의 거리가 50여 장밖에 남자 않자 드디어 공격이 시작됐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화살비!

츄욱! 츄! 츄! 츄츄츄-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해마저 무수한 화살에 가려 그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화살 공격 따윈 광풍단과 겨루면서 이미 한 번 겪어봤지만, 이번 공격이 그때처럼 약하리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하늘을 꿰뚫어버리겠다는 듯이 치솟은 화살들이 드디어 하강하기 시작한다. 신안을 켜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화살이 쏟아지기만을 기다렸다.

쉬이익-

퍽! 퍼퍼퍽! 퍼퍼퍼퍼퍽!

‘제기랄! 괜히 버텨 볼 생각했네!’

도무지 회피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생각을 잘못한 것이다!

회피라는 것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짓이다. 2백이나 되는 무인들이 쏘아낸 화살을 겨우 한 사람이 다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때문에 불영보는 자동적으로 회피 동작 펼치기를 중단해버렸고, 난 오로지 본신의 방어력만을 믿고 버티는 형국이 되었다.

퍼퍼퍼퍽! 퍼퍼퍽!

화살이 사정없이 날 두들기고 튕겨져 나갔다. 금강저의 방어력 증가 옵션이 아니었으면, 난 순식간에 가시가 2백 개쯤 달린 고슴도치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태반은 튕겨 냈지만, 개중 몇 개의 화살이 내 팔뚝에 꽂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급소를 가격당한 것도 아니고, 겨우 체력이 약간만 떨어지는 팔에 맞았을 뿐이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저 자식들은 도무지 화살 날리기를 그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가 주먹 한 번 섞어보지 못하고 여기서 뼈를 묻게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처럼 한 번에 2백여 발에 이르는 검은 화살비가 쏟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초당 10대에 가까운 화살이 끊임없이 내게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도망갈 생각으로 뒤돌아선다면 그 즉시 꼬치에 꿰인 산적 꼴이 될 수밖에 없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금씩 뒷걸음쳐서 객잔 문에 등을 붙이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문을 열려면 어쩔 수 없이 등을 보여야 했다.

객잔 안에선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 방도가 없다. 조금씩 몸에 박히는 화살들이 수를 늘려 가고 있었고, 체력도 이젠 눈에 띄게 떨어진 상태였다.

“아, 미치겠네! 화살이 멈추든가, 문이라도 열어주든가!”

소리친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다. 겨우 몇십 센티 뒤에 아군이 있다지만, 이놈의 게임은 문짝으로 가로막히면 청천벽력이라도 들리지 않는다.

녀석들은 우리에 갇힌 짐승 사냥하듯이 날 계속 옥죄어오고 있었다.

아마 한 5분은 동창 기마병들의 놀림감이 되었나 보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화살비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가지고 온 화살이 다 소진된 듯!

하여간에 이걸로 됐다. 어느새 말에서 뛰어내려 날 향해 달려오는, 저 2백이나 되는 시커먼 놈들과는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재빨리 바로 등 뒤에 있던 문을 따고 안으로 데굴데굴 굴러 들어갔다.

객잔 안에는 아군들이 긴장된 자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현운자 님! 옵니다! 막아요!”

내 외침에 현운자가 재빨리 나와 자리를 바꾸었다. 금양옥을 도우러 온 무림사절도 입구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휴…….”

저들이라면 당분간은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림맹 무사를 소환하고는 그 자리에 앉아 운기 행공을 시작했다. 체력이 절반 넘게 소진된 상태였다.

소환단을 복용하고 운기를 한 터라 불과 10여 초 만에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운기가 끝날 즈음에 아군과 동창 위사들 간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채채챙! 픽! 파팍!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아군이 점한 위치는 세 사람이나 공격이 가능한 자리였고, 반면 동창 무인들이 서 있는 곳은 딱 문지방이라 겨우 한 명만 서 있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동창 위사 한 명이 아군 3명을 당해내야만 하는 위치였다. 자리 하나는 잘 잡은 것이다.

현운자는 태극권과 연위갑의 위세를 빌어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공격은 양옆에서 곽정과 양과가 해주고 있었다.

곽정의 손에선 누런 용의 형상을 한 기운이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외팔이인 양과는 하나 남은 손으로 시커먼 중검을 띄엄띄엄 휘두르고 있었다.

분명 약하지 않을 동창 위사들일 테지만, 그렇다고 한때나마 천하제일을 다투던 고수들에겐 감히 견줄 수 없었다.

현운자가 놈들의 공격을 막는 사이, 두 절대고수들의 일격이 한 번씩 내리쳐졌다. 그러면 동창 위사들은 꾸르륵 소리를 내며 저승 구경을 하러 떠났다.

마치 레밍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처럼 한 놈이 죽으면 다른 놈이 들어와서 한 대 맞고 죽고, 또 와서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왠지 여태 긴장해왔던 게 아까울 정도로 전투는 싱겁게 진행됐다.

“현운자 님, 체력 좀 떨어지면 자리 바꿔줄게요. 미리미리 말하세요.”

“아직 백분의 일도 안 닳았습니다.”

벌써 20명은 잡은 것 같은데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떨어졌다는 말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연위갑의 위력인가, 아니면 진결태극권의 위력인가? 아마도 둘 다겠지.’

이 셋은 3분가량을 똑같은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그사이에 죽어나간 동창 위사의 숫자는 거의 1백에 다다를 정도. 반수가 그 짧은 사이에 씨 몰살당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딱 절반의 적이 사라졌을 때, 사단이 벌어졌다.

어이없게도 사단은 북협 곽정에서부터 비롯됐다. 갑자기 잘 싸우던 곽정이 뒤로 몸을 빼버린 것이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곽정이 빠진 틈을 바로 일등대사와 황약사가 메우긴 했지만, 그 짧은 사이에 대열은 이미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전열이 입구에서 한 발이나 후퇴한 것이다.

맞서 싸워야 하는 동창 위사는 셋, 그리고 방어해야 하는 방위는 다섯! 이미 사고 친 놈이 있어 양과도 믿을 수 없게 됐다. 때문에 언제라도 자리를 맞바꿀 수 있게 양과 뒤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역시나! 양과마저도 갑자기 몸을 뒤로 빼버렸다.

양과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재빨리 그 자리로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이 눈으로 보고 움직이는 것과 컴퓨터의 연산 속도는 애당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과의 자리는 이미 동창 위사가 점해버렸고, 난 그저 그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옆자리는 가장 가까이 있던 객잔의 점소이 하나가 메워주었다.

양과와 곽정이 왜 몸을 뺐나 싶어서 잠깐 뒤를 돌아본 난 복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세상에, 이 자식들이 운기 조식 중이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이 어떤 마당인데 운기 조식이냔 말이다! 전투 중에 운기 조식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는가! 저런 개념 없는 놈들이 한때 무림사절로 불렸던 그놈들이 맞는지 기가 막혔다.

설령 개념은 그렇다 치자. 아니, 자신들보다 적어도 몇 단계는 더 떨어지는 하급 무인들을 상대로 겨우 1백 마리 잡을 내공밖에 없단 말인가? 그것도 합공이었는데?

‘망할 개발자 같으니!’

유저들이 우리처럼 꼼수를 쓸 줄 알고는 미리 내공을 대폭 떨어뜨려 놓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겨우 그런 거 가지고 복장 터질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복장 터질 일은 바로 옆에 있던 점소이 놈에서 시작됐다.

일이란 게 한 번 꼬이면 계속 꼬인다고, 동창 놈이 어찌 알았는지 제일 약한 점소이만 노리고 공격하고 있었다. 처음 내가 상대한 동창 위사는 공격 몇 번 가하고 죽일 수 있었지만, 다음 놈도 어째 앞서 놈하고 똑같이 점소이를 공격했다.

그렇게 세 번째 동창 위사를 맞았을 때, 결국은 점소이가 죽고 말았다. 점소이치고는 나름대로 선전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게 아니지 않은가! 구멍이 또 하나 생겼고, 전권(戰圈)은 더 넓어졌다.

이번엔 금양옥과 다른 점소이가 넓어진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왔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현운자 님, 곧 난전으로 바뀔 겁니다! 준비했다가 구석으로 피하세요!”

퀘스트 완료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금양옥을 살려야 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거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죽으면 퀘스트든 뭣이든 간에 그걸로 끝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나저나 저 개념 없는 고수들은 언제 운기 조식이 끝나는 거야!’

내 마음속 외침을 들었나? 곽정과 양과가 그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참 인생 편하게 사는 놈들이라는 욕이 절로 비어져 나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번에 가세한 점소이가 몇 합 버티지도 못하고 죽어버리자 드디어 용문객잔의 혈투가 시작된 것이다.

“현운자 님, 이리로!”

일단 다른 사람들은 다 무시하고, 금양옥 옆으로 다가섰다.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셋이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금양옥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미리 소환해둔 무림맹 무사와 나, 그리고 현운자가 금양옥을 호위하듯이 둘러쌌다.

용문객잔 입구를 둘러싼 방어진은 아직 완전히 붕괴된 건 아니었다. 무림사절은 동창 위사들쯤은 거뜬히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꼬라지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곳곳에 뚫린 구멍으로 동창 놈들이 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자리를 지켜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

결국 NPC는 NPC일 뿐이다. 놈들의 이름이 내 이름보다 비싸다고는 하지만, 결국 별 도움 안 되는 NPC일 뿐인 것이다.

금양옥의 무공은 꽤 훌륭했다. 어젯밤 날 상대했을 때보다 오히려 더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비도 3자루를 눈 깜짝할 사이에 날리고선 어느새 채대로 마무리 공격을 하고는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우린 죽을 맛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금양옥을 호위하느라 동창 위사들의 공격에 일일이 대응하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제발, 제발!’

성깔이 없으면 이런 사막에서 객잔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금양옥은 사막 객잔주의 성깔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 주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주 돌겠구만!’

정신은 산만하고 몸은 바빴지만, 아직은 그래도 괜찮았다. 적들이 금양옥만 따로 공격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도 살아서 저항하는 점소이들도 몇 됐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제 동창 위사들의 숫자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객잔 1층에서 벌어진 혈투는 어느새 2층까지 번져 있었다. 위사들의 거침없는 공격에 점소이들 몇몇이 2층까지 도망가자, 위사들이 그들을 상대하러 따라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금양옥이 객잔 식구들의 위험을 막기 위해서인지 객잔 2층으로 뛰어올랐다. 주루의 지붕을 받치고 있던 대들보에 채대를 감고는 휘리릭 소리를 내며 바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멋들어졌지만, 눈 동그랗게 뜨고 감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서둘러 우리도 2층으로 올라갔다.

빨리 움직인다고 했는데도 우리가 2층에 올라왔을 때엔 이미 상황이 종료된 상태였다. 3명의 동창 위사들의 주검이 널브러져 있고, 2명의 점소이도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금양옥뿐이었다.

또 어디로 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금양옥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는 걸로 봐서 체력이 많이 소진된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뛰어다니면서 펼치는 무공이니 남들보다 체력이 더 빨리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사절과 달리 금양옥은 운기 행공으로 체력을 회복하진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자연적으로 체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휴… 이제 좀 숨 돌리겠네요.”

현운자도 금양옥을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내공을 회복할 요량인지, 현운자는 가부좌를 틀고 운기 행공을 시작했다. 소환단을 먹고 하는 운기 행공이라 위험한 행동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잠시 쉬고 있는 사이 전장을 한번 훑어보았다. 2층이어서 전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절대고수들은 달라도 확실히 다르구만.’

네 사람 모두 예닐곱이나 되는 동창 위사들을 달고 있었는데도 유리한 공방을 펼치고 있었다. 위사들의 움직임 또한 아까 포위를 당했을 때보다 더 요란했지만, 너끈히 그 공격들을 무위로 돌리고 각자의 성명절기들을 화려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곽정의 장법이나 양과의 검법도 대단했지만, 내겐 일등대사의 일양지가 가장 멋있게 보였다. 양손의 흰 빛 무리가 덧입혀진 검지가 춤을 출 때마다 동창 위사들의 몸뚱이에선 때론 점으로, 혹은 선 모양으로 빛자국이 새겨지고 있었다. 이펙트 효과 하나는 최고였다.

‘대충 이대로 정리가 됐으면 좋겠는데.’

이미 주루의 소란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살아남은 동창 위사의 수는 겨우 10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난 일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객잔 밖에서 본 그 마차를 타고 온 인물들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놈이 분명 퀘스트의 최종 보스일 것이다.

“거의 다 끝났네요? 거봐요, 괜히 조연 님이 걱정하신 거라니까요.”

운기를 마친 현운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 사람은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여기까진 전초전이고, 곧 고수들이 몰아닥칠 겁니다. 설마 이백이나 되는 위사들이 왔는데 우두머리가 없겠어요?”

“……?”

밖의 상황을 모르는 현운자는 설마 그렇겠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왔네요. 어서 내려갑시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위사가 곽정의 항룡십팔장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순간, 기다리고 있던 동창의 간부들이 출현한 것이다.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에 동창 간부들과 무림사절 간의 싸움은 벌써 시작된 상태였다.

동창 간부의 숫자는 모두 여덟이나 됐다. 넷은 통일된 복색의 무명 NPC였지만, 가지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나머지 넷은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그 넷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난 개발자라는 인간을 또 한 번 저주할 수밖에 없었다.

금륜법왕, 구양봉, 임아행. 그리고 어이없게 정파의 인물인 주백통마저도 동창 진영에 끼어 있었다.

4명의 네임드 몬스터 중 누구 하나 무림사절에 견주어 부족하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 무림사절 각각마다 동창의 네임드 몬스터 한 마리에 무명 간부 한 명이 더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

“현운자 님, 우선 임아행부터 잡아요!”

일월신교 교주인 임아행은 아무래도 다른 셋에 비해 제일 약하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소설상에서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린 계획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막 움직이려는 찰나에 새로운 인물들이 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들어온 놈들의 아이디를 읽었을 때, 난 이놈의 퀘스트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난이도의 퀘스트인지를 새삼 느껴야만 했다.

동방불패, 그리고 앵도라는 환관이었다.

“흠,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비루한 역적 놈들 따위한테 이렇게 시간을 소모해서야 쓰겠는가 말이야. 쯧쯧쯧! 여태 밥 먹은 게 아깝구만, 아까워.”

수염 한 점 없이 잔혹한 인상의 환관이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다른 NPC들은 여전히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현운자와 나는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두 놈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동방불패 한 놈만 해도 미치겠는데, 저 앵도라는 놈은 뭐야!’

동방불패는 영화에서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붉은 옷을 입고 길쭉한 사모를 걸친 그놈은 꼭 종놈처럼 앵도 뒤에 시립하고 있었다. 척 봐도 앵도가 동창 놈들의 대장이었다.

“어떡하죠?”

현운자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하지만 딱히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지금 당장은 저 절대고수급인 두 사람이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지만, 괜히 우리가 섣불리 행동했다간 놈들이 움직일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둘만으로 저 둘을 감당할 능력이 못 됐으니, 최대한 무림사절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 그런데 상황이 계속 이대로 흘러간다면 무림사절은 단 한 명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현운자도 그 정도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조연 님, 제가 최대한 막아볼 테니까 일단 싸움판 정리 좀 해주세요.”

현운자의 말대로 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제발 놈들이 무식하게 세지만 않길 기원하며 임아행을 맞아 싸우는 곽정 옆으로 몸을 띄웠다.

곽정은 둘이나 되는 적들을 상대로 아직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임아행과 동창 간부가 오히려 밀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와 무림맹 무사가 한 일은 간단했다. 임아행의 퇴로를 막고 간부를 전장에서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둘의 연수합격 때문에 곽정이 임아행을 빨리 해치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림맹 무사는 간부를 상대하게 만들고, 난 곽정과 협공해 임아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력자가 사라져 버린 임아행은 조금씩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벽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팡! 팡! 펑! 퍽!

용호상박이 따로 없었다. 임아행이 비록 곽정보다 못한 실력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름난 고수. 두 사람의 손발이 얽힐 때마다 번쩍번쩍하면서 강기의 파편이 이리저리 튕겼다.

아직 강기 발출도 못하는 나였지만, 나름대로 꽤 용을 썼다. 전후좌우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임아행의 허점을 가격했다.

하지만 가끔씩 놈의 장법에 부딪힐 때마다 금강저를 쥔 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이놈들의 무공과 내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꽝!

서서히 자세가 흐트러지고 있던 임아행이 결국은 곽정의 장법에 정통으로 격중되어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곽정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또 운기 행공을 시작했다.

‘얘들 자꾸 왜 이러지? 삼류 NPC도 안 하는 짓을 왜 자꾸 하는 거야!’

그렇다고 내가 주저앉은 놈을 일으켜 세울 재간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아직 상황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리했고, 나는 급히 움직여야만 했다.

“조연 님! 이놈들 움직여요!”

현운자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주루 입구를 보니, 여태 가만히 있던 동방불패와 앵도라는 환관이 무공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묶어두려고 현운자가 놈들을 향해 부적을 날렸다.

“잠깐만 버텨 보세요!”

현운자가 불안하긴 했지만, 그쪽보다 지금 내 옆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더 급했다. 무림맹 무사를 붙여 멀리 떨어뜨려 놓은 동창 간부가 그사이에 상대를 해치우고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놈이 노리는 사람은 바로 운기 행공 중이라 무방비 상태인 곽정이었다!

급히 몸을 돌려 동창 녀석의 검을 막아갔지만, 아뿔싸! 내가 조금 늦었다!

깡!

‘……?’

쇳소리 비슷한 소음은 어이없게도 앉아 있던 곽정에게서 난 소리였다. 곽정이 운기를 하는 그 자세에서 머리 위로 내리쳐지는 검을 막은 것이다!

그제야 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왜 전투 중에도 거침없이 운기를 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이놈들은 그래도 되는 놈들이었던 것이다!

아마 저들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나도 똑같이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운기할 때마다 주화입마에 빠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공격을 받은 곽정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동창 간부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밀려나는 불쌍한 동창 간부를 바라보다 현운자 쪽을 살폈다. 두 고수들을 상대로 이리저리 뒹굴고 있긴 했지만, 조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현운자의 상황은 분명 위태로웠다. 하지만 위태롭긴 저쪽이 더했다.

주백통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동사 황약사였다. 이쪽은 곽정과는 정 딴판으로, 일방적으로 황약사가 밀리고 있었다. 황약사의 민활한 신법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결단이 났을 법한 상황이었다.

급히 달려가 가세하긴 했지만, 우리 둘만으로 주백통 하나를 당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동창 간부 놈까지 달라붙어 있는 상황이라 이번엔 이리저리 바쁘게 피하기까지 해야 했다.

그래도 내가 가세해서 황약사가 한숨을 돌린 건 확실했다. 계속 싸우기만 하다가 이젠 욕까지 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무리 네놈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지만 어떻게 동창의 개가 돼서 나타날 생각을 한단 말이냐!”

“어? 왜 그래, 황 노인! 사실 너희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쪽이 더 재밌어 보이는 걸 어떡하란 말이야!”

황약사는 열불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주백통은 그저 크게 웃을 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열이 뻗친 황약사가 인정사정없이 무공을 펼치고 나 또한 발악을 해봤지만, 둘만으로 주백통을 감당키란 정말 힘들었다.

“주 형! 정말 이러기요?”

“어라? 곽 아우도 있었어?”

그때, 동창 간부를 잠재운 곽정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주백통에게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주백통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곽정에게까지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의형제끼리 치고받고, 잘들 한다.’

하여간 곽정이 가세한 덕분에 승기는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말만은 친한 척 주고받은 이들은 죽기 살기로 서로를 향해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때쯤 일등대사는 구양봉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금륜법왕을 담당하던 양과도 거의 전투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2 대 1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상대를 이겨 낸 것이다.

‘어째 소설 속이랑 똑같냐?’

어쩐지 각본대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도 일등대사의 일양지는 구양봉의 합마공에 극성이었고, 금륜법왕은 양과에게 죽임을 당했지 않은가.

상황이 완전히 우리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두 내시 놈들을 담당하는 현운자 쪽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현운자는 여전히 정신없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아, 미치겠어요! 얼른 한 마리만 좀 떼어가세요. 정신없어 죽겠어요!”

현운자가 얼마나 급했는지 우는 소리를 했다.

나는 동방불패를 맡기로 마음먹었다. 앵도라는 환관은 최종 보스인 만큼 얼마나 셀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방불패는 현운자를 공격하느라 내가 뒤쪽으로 접근하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놈의 등짝에다 권기를 가득 담은 육합권을 펼쳤다.

퍽!

그러자 갑작스런 공격에 놀란 동방불패가 몸을 홱 젖히곤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비겁한 자식 같으니! 이거나 먹어라!”

‘음? 아직 고자는 아닌가 보네? 남자 목소리인 걸 봐서는.’

눈꼬리를 잔뜩 치켜세운 동방불패가 양손을 벌리더니 내게 뭔가를 뿌렸다. 바늘이었다.

‘제길, 역시나!’

짐작하긴 했지만, 어떻게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작은 바늘 세례를 무슨 수로 다 피할 수 있겠는가!

칙! 치익!

피한다고 몸을 뒤척이긴 했지만, 몇 개의 바늘이 내 몸을 꿰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놀라온 관통력!

하지만 원체 작은 무기여서 그런지 체력이 크게 깎이진 않았다. 버틸 생각만 한다면 무림사절이 합류할 때까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공격해보겠다고 폼 잡았다가 더 호된 꼴을 당하기 전에 마음을 그쪽으로 돌려먹었다.

동방불패의 바늘 공격은 막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무공이 아니었다. 한두 개만 날아온다면야 금강저로 튕겨 보낼 수 있겠지만, 최소 예닐곱 개의 바늘이 몸 구석구석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온다. 도저히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별수 있나? 나도 현운자를 따라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 놈을 잡는 건 무림사절이 대신 해줄 것이다.

무림사절이 가세한 건 한 30번쯤 바닥을 굴렀을 때였다.

파팡! 퍽! 쾅! 츄앗-

사방에서 절정무공들이 현란한 그림을 그리며 동방불패에게 적중됐다. 막강한 우군이 도착해서 한시름 놓으려는데, 이건 또 무언가? 동방불패의 공격 패턴이 바뀌었다.

날 상대로는 10개에도 못 미치는 바늘을 날리거나, 혹은 바늘을 검처럼 곧추세워서 요혈을 찌르는 공격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가세하자마자 만천화우처럼 수백이 넘는 바늘을 흩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늘은 지들이 벌 떼라도 되는 양 무리를 지은 채 살아서 움직였다.

최초의 희생자는 양과였다. 양과는 수백의 바늘들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들자 장법과 검법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모두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바늘들은 검이 오면 흩어졌다가 지나가면 다시 뭉쳤다. 그리곤 수백이나 되는 바늘들이 곧 양과의 몸을 모조리 꿰뚫고 지나가버렸다.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 죽는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양과처럼 수백이 넘는 구멍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죽는 장면은 들어보지 못했다. 기이하기보다는 끔찍했다.

‘아, 정말 이 퀘스트 만든 인간은 대체 어떤 놈이야! 이기어침술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어검술이라면, 검 하나만 막으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혹은 정 안 되면 피할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조그만 바늘들이 막아갈라 치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데, 그걸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정말로 동방불패라는 이름을 가질 만했다.

하지만 되든 안 되든 넋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세 무림 고수들은 양과의 죽음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바늘 떼가 공격해오면 피할 뿐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동방불패에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양과가 가장 먼저 죽음을 당한 건 그의 신법이 다른 이들보다 못해서였다. 살아남은 세 사람은 바늘 공격에 어이없게 즉사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민활한 신법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바늘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바늘은 때론 하나, 때론 수백으로 나뉘어 무림삼절을 끝없이 괴롭혔다.

조금 시간이 지나 곽정마저 죽게 되었을 때였다. 이젠 정말 가망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앵도를 맡고 있던 현운자가 다급히 날 불렀다.

“조연 님, 잠깐 자리 좀 바꿔요!”

다행히 난 동방불패의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다. 현운자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자리를 옮겼다.

앵도라는 환관의 공격 자체는 별게 없었다. 특이한 무기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놀라울 정도로 빠른 몸동작도 아니었다.

“공격할 생각 마세요! 이놈, 공격력이 정말 장난 아닙니다! 어그로 먹고 나면 무조건 피하기만 하세요!”

내가 착각할까 봐 현운자가 미리 일러주었다.

현운자의 말대로 첫 공격을 먹이곤 바로 도망만 다니기 시작했다.

앵도의 공격이 사라지자 현운자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바로 그 앞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자세였다. 피한다고 했지만, 체력 손실이 극심했었나 보다.

곧 운기를 마치고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현운자는 동방불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먼저 부적 몇 개를 날리고는 진결태극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동방불패는 금방 현운자를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일등대사와 황약사가 입힌 데미지가 꽤 누적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큰 데미지는 아니었지만 수비의 부담 없이 연타를 먹이던 현운자를 향해 동방불패가 돌아섰다. 그러자 현운자가 양팔을 벌리고는 크게 외쳤다.

“강신(降神)! 현천상제(玄天上帝)!”

현운자의 두 눈이 시퍼런 광망으로 번득이면서 도포 자락이 부풀어 올랐다. 기가 잔뜩 들어간 모습! 전에 건달바왕을 잡았을 때 봤던 그 강신법이었다!

현천상제는 오래전부터 무당파에서 섬기는 도교의 신으로, 바로 북극성의 화신이다. 강신의 효과는 북극성의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현천상제가 강신되면 단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 대신에 방어력은 몇 배나 증가하고 말이다. 유저들 간의 전투에선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을지 몰라도, 극강한 NPC를 상대로 하는 데엔 최고의 무공이라 할 만했다. 더구나 지금 현운자는 연위갑까지 걸치고 있지 않은가!

따당! 땅! 땅!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양과와 곽정마저도 꿰뚫어버린 무시무시한 바늘 공격마저도 지금의 현운자를 어쩌지는 못했다.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방어력!

그러자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일등대사와 황약사가 그제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젠 복수라도 하듯이 가진 재간을 모조리 토해내기 시작했다.

파팍! 쾅! 쌔애애액-

따당! 땅! 당!

잘 짜인 역할 분담이었다. 극강 방어력의 현운자가 몸방을 담당하고, 괜찮은 데미지 딜러가 둘이나 되다 보니 천하의 동방불패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간간이 어그로가 다시 NPC 무인들에게 돌아가긴 했지만, 그럴 때면 현운자가 무당의 침투경을 발출해서 동방불패가 다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결국 동방불패도 죽었다. 여태 강호를 플레이하면서 겪어본 최고수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네 사람은 퀘스트 최종 보스 앵도와의 결전에 돌입했다.

앵도의 무공은 특별하지 않았다. 기진이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현란한 이펙트를 동반한 무공도 없었다. 그저 잘 뛰어다녔고, 공격력이 강할 뿐이었다.

황약사와 일등대사가 뛰어든 덕분에 난 겨우 한숨 돌리고 일어설 수 있었다.

“조연 님! 최대한 버티기만 하세요.”

아직도 붙박이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현운자가 날 보고 소리쳤다.

‘현천상제 강신하면 십 분간 못 움직인다고 했었나? 그럼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잖아!’

팍!

현운자의 말을 듣고 이제 본격적으로 앵도를 때려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큰 파육음이 들려왔다.

끔찍한 광경이 빚어지고 있었다. 망할 앵도 놈이 황약사의 목을 따버린 것이다. 팍, 하는 소리는 황약사의 머리통이 벽면에 부딪혀 난 소리였다.

‘제기랄, 이번엔 구음백골조냐!’

갑자기 앵도의 손이 변해 있었다. 푸르딩딩 길쭉한 손톱을 보자 대번에 전의가 무참히 깎여 나갔다.

아까 동방불패의 경우엔 그래도 무림사절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이 앵도 놈은 대체 누가 잡으란 소린가? 내겐 그럴 능력도 없고, 설사 10분을 무사히 버텨 내 현운자가 가세한다 하더라도 쉬이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무도 간단히 황약사가 죽어버려서 잠깐 멈칫하는 사이, 다시 앵도의 손톱이 일등대사를 긁었다.

서걱-

족히 두 근은 됨직한 살덩어리가 제자리를 떠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급소에 격중된 공격이 아니었음에도 일등대사 역시 그 공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공격력 자체가 너무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돌겠구만.’

무림사절은 전멸했다. 더 이상의 조력자는 없었다. 금양옥은 대체 어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창 간부에게 목숨을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설령 일이 있어 사라졌다고 해도, 금양옥이 가세해봤자 상황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앵도는 아직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손을 길게 늘어뜨린 채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놈이 한 발, 한 발 전진할 때마다 난 놈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으란 소리야!’

“조연 님! 맞상대하지 말고 일단 시간 끌어봐요!”

현운자가 아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내 실력으로 현운자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까? 어쨌든 나 혼자보단 현운자와 합세하는 게 1푼의 희망이라도 더 있을 것이다. 최대한 버텨 보기로 마음먹었다.

취익!

앵도가 갑자기 쾌속무비한 속도로 구음백골조를 펼쳤다. 가공할 빠르기. 그저 빛살이 내게 쏘아지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난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나려타곤으로 바닥 구르는 수법은 꼴이야 우스울지 몰라도, 실상 구사하기 상당히 힘든 무공이다. 시야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상대의 투로를 읽으면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때론 변초에 속을 수도 있고, 때론 잘못 움직여서 상대의 공격에 몸을 갖다 붙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저들은 나려타곤을 1회나 2회만 펼칠 뿐, 현운자나 나처럼 연이어 펼치지 못한다. 내겐 신안이 있어 이런 동작이 가능한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투로가 아닌 오러를 통해 진정한 공격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운자도 분명 제 나름의 수법이 있을 테고 말이다. 그 정도는 돼야 상위 랭커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몇 번 바닥을 구르고 보니, 확실히 이 방법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현운자가 먼저 이렇게 피하는 걸 보고 따라 한 거지만.

놈의 손톱이 제아무리 길어봤자 검이나 창 같은 병장기를 들지 않는 이상은 계속 누워 있는 내게 공격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날 공격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기껏 할 수 있는 수단이라곤 몸을 뛰어서 공격하는 건데, 그 동작은 나보고 ‘알아서 피해라’ 하고 일러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서 집중했다. 손에선 긴장감으로 땀이 줄줄 흘렀다. 그 땀 때문에 컨트롤러가 미끄러웠지만, 손바닥 닦을 여유 따윈 전혀 없었다.

왠지 잘하면 현운자가 강신에서 풀릴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말이다. 현운자만 가세한다면, 그땐 정말로 이 극악 난이도의 퀘스트를 끝마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툭-

‘엉?’

한참 오른쪽으로 나려타곤을 시전하는데, 뭔가에 부딪혀서 몸이 굴러가지 않았다. 환관 놈이 어떤 재주를 부린 것인지, 내 진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몸놀림이었다.

쐐애액-

집중력을 끌어올릴 대로 올린 상태라 이변이 발생한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하긴 했다. 하지만 온전히 피할 순 없었다.

츄악-

어깨를 구음백골조가 조금 스치고 지나갔다. 단 한 대뿐이었다. 그것도 정타가 아니라 비껴 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공격에 체력의 5할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 괴물 같은 새끼!’

대체 어떻게 놈이 내 진로를 예측하고 막아선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순 없었지만, 일단은 피하고 볼 일이었다.

다시 나려타곤을 펼치면서 단축키에 지정해둔 환혼신단을 먹었다.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긴 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언제라도 정타를 허용한다면 단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툭-

‘제기랄!’

또 막혔다. 이번에도 앵도가 기이한 신법으로 내 앞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한 번 당해봤기 때문에 더 조심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앵도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날을 잔뜩 세운 손톱이 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쐐애액!

그나마 다행이라면 즉사는 면했다는 것. 이제 남은 체력은 4할.

‘이제 이걸로 끝이고만.’

즉사는 면했다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지금의 앵도 놈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현운자도 지금 내 상황이 어떤 꼴인지 잘 보고 있을 것이다. 먼저 죽겠지만, 곧 현운자도 내 뒤를 따라야만 할 것이다.

이젠 어떤 희망도 남지 않았다. 도망도 못 가고, 맞서 싸우지도 못한다. 그냥 두 눈 부릅뜨고 내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앵도의 손을 바라봤다.

섬전처럼 쏘아지는 공격에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이렇게 무식한 놈을 어떻게 잡으란 말이야!’

죽음은 기정사실. 괜스레 개발자 욕만 나왔다. 그런데,

챙-

‘음? 무슨 소리지?’

살이 찢겨지는 소리가 아니라 웬 쇳소리가 들린다.

조심히 눈을 떴다.

내 머리 바로 앞에 앵도의 독수, 그리고 그걸 가로막고 있는 기다란 막대기, 검이 보였다.

“조 공자! 아직 괜찮은 거죠? 무사하신 거죠?”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양옥이었다. 금양옥 옆에서 검을 들고 앵도를 막고 있는 사람은 주회안이라는 아이디를 달고 있었다.

‘살아난 건가?’

걱정스런 표정이 얼굴에 가득한 금양옥을 보니 안심하라는 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요.”

그동안 친해졌던 땅바닥과 이별을 고하고 간만에 일어섰다. 이리저리 뒹구느라 갑자기 피가 쏠려 어지럼증이 생길 정도였다.

싸움은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주회안도 앵도도 공격을 그만두고 자세를 고쳐 잡았지만, 섣부른 공격은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조연 님, 시간을 좀 더 끌어보세요!”

현운자가 했던 소리를 또 한다. 하지만 현운자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NPC는 없었다.

“앵 태감, 이제 그만 합시다! 내가 졌소! 내 순순히 당신들을 따라갈 테니, 이들은 놓아주구려.”

뜬금없이 주회안이 앵 태감에게 항복 선언을 했다.

“조 공자는 그냥 이대로 있어요.”

혹시 나설까 봐 금양옥이 내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설마 날 살리려고 주회안을 팔아먹은 건가?’

방금 전에 앵도의 공격을 막아낸 주회안의 무공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주회안과 우리 둘이 합심한다면 앵도를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금양옥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놈들은 결국 NPC였다. 금양옥에게 설명을 해봤지만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 고민하는 척하던 앵도가 우리를 쓰윽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래야 사내대장부답지. 암, 약자와 여자를 보호하는 건 협객의 기본 마음가짐이지. 하하하.”

앵도가 간사하게 웃는다. 사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저 내시 놈한테 약자란 소릴 들으니 썩 좋은 기분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야, 번거롭게 네놈을 북경까지 압송할 필요는 없지. 그저 머리통만 들고 가면 될 일이야. 어떤가, 이 자리에서 죽어줄 수 있겠는가?”

뭔가 꼼수가 있어 보이는 말!

“저 자식 말 듣지 말아요! 우리끼리 잡을 수도 있다구요!”

하지만 이놈들은 역시나 NPC. 절대 승낙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주회안은 전혀 듣지 못한 척했다.

“확실히 약조하시오. 다른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기로!”

“아, 그야 당연하지. 사나이 입으로 어디 두말하겠는가!”

‘이놈들은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냐!’

주회안은 앵도의 말을 믿겠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쥐고 있던 검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곤 몸을 꼿꼿이 세우고 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금양옥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난 앵도의 다음 수작이 염려스러워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츄악-

앵도의 구음백골조가 전개되자, 주회안의 머리통이 주인을 잃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저 자식이 약속을 지킬 놈이 아닌데, 왜 저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거야!’

앵도는 주루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주회안의 머리통을 주워들고는 상투를 풀어 제 놈 허리춤에 매어 달았다. 잔인하고도 무식한 놈이었다.

앵도가 일을 마치고 다시 우릴 바라보았다. 쭉 찢어진 입이 살짝 말려 올라가자 잔인한 웃음이 놈의 더러운 면상을 가득 메웠다.

“크크큭.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그럼 그렇지!

앵도 놈이 다시 공격 준비를 했다. 금양옥이 기가 막혀서 이런 게 어디 있냐고, 약조하지 않았냐고 소리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난 사내가 아니거든. 네놈들 말로 고자일 뿐이야.”

어이없는 답변뿐이었다.

“흑흑! 주 공자, 미안해요. 주 공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헛된 죽음으로 만들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주 공자.”

역시 금양옥이 사라진 건 주회안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주회안을 넘겨주고 날 살리기 위해서. 그게 퀘스트에 원래 있었던 각본인지, 아니면 내가 친밀도를 올려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버티기만 하세요.”

“……?”

현운자였다. 마침 현천상제 강신에서 풀려난 것이다.

“왜요? 아까부터 자꾸 버티라고만 하는데, 이유가 뭐예요?”

난 여태 현운자가 했던 말이 자기가 강신법에서 풀려날 때까지 버티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풀려난 지금도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독 먹였어요.”

“크큭. 역시 대단하네요.”

역시 현운자였다. 아마도 처음 그놈들이 객잔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살포했을 것이다. 저런 괴물 같은 놈에게도 산공독이 통할지 어쩔지는 모를 일이지만, 믿어볼 건 이제 그것밖에 없었다.

간사한 내시 놈의 첫 타깃은 눈물을 짜내느라 정신없는 금양옥이었다. 놈의 손톱이 금양옥을 노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와 현운자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파각!

현운자가 조금 더 빨랐다. 구음백골조는 현운자의 태극권에 막혀서 주인에게 돌아갔다.

현운자는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듯 크게 휘청거렸지만, 앵도의 모습도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꽤 타격을 입은 듯 뒷걸음질을 한 것이다.

연위갑의 부가 기능으로 인해 빚어진 현상이었다. 바로 박투 기술에 한해 데미지의 30퍼센트를 시전자에게 되돌리는 그 효과 말이다.

하지만 애당초 앵도와 현운자의 체력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3할의 데미지를 되돌린다고 해도 그 3배가 넘는 데미지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현운자로선 오래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걸 아는지 현운자가 다시 강신법을 행했다.

“강신! 현천상제!”

강신을 하자마자 현운자가 날 보며 소리쳤다.

“제가 버티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공격해보세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앵도의 공격이 다시 현운자를 향했고, 우린 마지막 싸움을 시작했다.

금양옥은 여전히 질질 짜고 있었다. 아마도 저렇게 울다가 앵도의 손에 죽는 게 마지막 임무인 것처럼 보였다.

쾅! 파각! 퍼퍽! 퍽!

앵도의 공격이 현운자에게 가해졌지만, 아까처럼 뒷걸음칠 정도로 반사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다. 분명 현운자의 방어력이 올라간 만큼 되돌리는 데미지도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우린 무식한 난타전을 벌였다. 현운자는 제자리에 서서 태극권을 구사하고 있었고, 난 신안으로 보이는 앵도의 약점(재수 없게도 회음혈이 이놈 약점이었다)을 집중 공격했다.

하지만 연위갑의 반사 데미지 때문에 앵도는 단 한 번도 날 인식하지 않았다. 어그로를 무시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자, 일격기까지 섞어서 최대한 데미지를 입히는 데 주력했다.

현운자의 방어력이 암만 강하다고 해도, 역시 인간의 체력으로 저 괴물 같은 내시 놈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환혼신단으로 체력을 채워놓은 현운자였지만, 결국 그 난타전을 버티지 못하고 강제 종료를 당하고 말았다.

‘미치겠네. 역시 이놈한텐 산공독이 안 통한다는 소린가?’

현운자가 죽었다고 해도 별로 안타깝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곧 그 꼴이 날 것이니 말이다.

퍽! 츄욱!

죽음을 각오한 마지막 일격이 놈의 가슴을 가격했고, 구음백골조는 내 어깨를 후려쳤다. 어깨를 제대로 가격당하자 체력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갔다.

‘뭐지? 안 죽었어?’

체력 게이지를 확인한 순간, 난 맞대응을 포기하고 얼른 나려타곤이 지정된 단축키를 눌렀다. 이번 공격에 겨우 체력이 3할밖에 안 떨어진 것이다! 이제야 산공독의 효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없이 몸을 굴려 놈과의 거리를 떨어뜨렸다. 역시 독 때문인지 놈의 움직임이 많이 느려져 있었다. 여느 때처럼 재빨리 내 쪽으로 붙지 못했다.

하지만 독의 효력이 나타났다고 해도, 아직 성급히 승리를 자신할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 내 체력은 겨우 1할. 아무리 앵도 녀석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 해도,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질 판이었다.

“그래, 좋다! 어차피 더 해볼 짓도 없다!”

거리를 좁혀 오는 놈을 향해 궁신탄형의 수법으로 뛰어들었다.

퍼퍽! 파각! 퍼퍽! 탁!

잔뜩 긴장돼 있어서 집중감이 극도로 올라간 상태. 앵도의 공격이 몇 번 가해졌지만, 다행히 금강저가 놈의 잔혹한 공격을 튕겨 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파팍! 퍽! 파강! 피픽!

놈의 약점인 회음혈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사이사이 놈의 공격이 적중될까 두려웠지만, 요행인지 매번 금강저로 막을 수 있었다.

온 신경을 극도로 집중한 상태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어쩐지 놈의 공격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분명 녀석이 죽어가는 징조였지만, 난 긴장을 놓지 않았다.

파강! 팍! 퍽! 까강!

정신없이 공수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어느덧 남은 체력은 이제 2푼도 되지 않았다. 체력 게이지가 바닥을 드러내자 귓속으로 삑삑, 하는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다신 이놈의 퀘스트 하나 봐라!’

속으로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는데 결국 죽었다, 놈이.

[‘퀘스트:용문객잔’을 매우 성공리에 완수했습니다.]

[금양옥과의 관계가 ‘친밀함’에서 ‘매우 친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명성이 10만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335에서 365로 상승했습니다.]

[퀘스트 성공으로 인해 용문객잔에 상시 출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작가 註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합니다.

무림사절:김용의 영웅문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 화산논검을 통해 가려졌다. 그중 으뜸은 전진교주 중신통 왕중양이고, 다른 네 사람은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지흥(후에 출가하여 일등대사), 북개 홍칠공이다. 중앙의 방위를 차지한 왕중양은 다른 네 인물과 급이 다른 고수이고 나머지 넷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왕중양을 포함하면 무림오절이 되지만, 중신통은 일찍 죽어서 보통은 무림사절이라고 불린다.

신(新)무림사절:중신통과 북개, 서독이 죽고 난 후 2차 화산논검을 통해 가려졌다. 왕중양의 사제인 노완동 주백통이 중완동이란 별호로 으뜸이 되었고, 동사 황약사, 남승 일등, 북협 곽정, 서광 양과가 신 무림사절이 되었다. 위와 마찬가지로 노완동이 빠진 진형이라 신무림사절이라고 표현했다.

기타:동방불패는 환관이 만든 규화보전을 배워 천하제일고수가 되었지만, 남성을 잃었다. 이야기 속의 환관은 규화보전을 만든 그 환관이다. 앵도라는 환관의 이름은 작가의 허구다.

용문객잔:홍콩의 호금전 감독이 1966년 영화로 만든 이야기. 후에 서극 감독이 신용문객잔으로 리메이크했다. 분위기는 다르나 내용은 비슷하다. 훗날 동사서독에도 용문객잔이 등장하며 무협 소설,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객잔 이름이다. 장소는 모름. 감숙성 어딘가에 있음. 스토리는 알아보시길.

글 속의 퀘스트는 영화 신용문객잔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시간상으로 1년 정도 흐른 뒤를 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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