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용문객잔(龍門客棧)
무협 소설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객잔. 그 객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이 어디일까?
바로 용문객잔이다.
무협 좀 봤다는 사람치고 용문객잔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체 이 안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에서처럼 손님을 잡아다가 만두소로 만들어버리는 사악한 여주인이 있을까? 동창에 쫓기는 무림 협객은?
삑-
[광우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객잔 입구에 서서 현운자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서구가 날아 들어왔다. 아침에 접속하자마자 이광에게 용문객잔에 대해 아는 게 있냐고 물었었다. 그 대답이 이제 도착한 것이다.
<수신자:조연
문주 형! 거긴 어떻게 간 거예요? 거기 발견하기 무지 힘든 곳인데 용하네요. 하여간 들어갈 생각 마세요. 퀘스트 주의 사항 읽어보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정말로 들어가면 맘대로 못 빠져나와요. 거기다가 퀘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금도 이해 못하고 있어요. 저랑 견이랑 거기서 세 번씩 죽었거든요? 하여간 들어가실 생각이라면 말리고 싶네요.
혹시 정 들어가실 생각이라면 제 말 잘 들으세요. 거기 들어가면, 일단 서비스로 차가 나오거든요? 그거 먹으면 죽어요. 그거 안 먹고 버티면 주문할 거냐고 묻는데, 뭘 시키든 간에 음식은 만두만 나오거든요? 그 만두도 먹으면 죽어요. 일단 그렇게 버티면, 갑자기 밤이 됐다고 들어가서 자라고 하는데요, 그냥 자기만 해도 죽어요.
우린 여기까지밖에 진행 못했어요. 차 마시다가 죽고, 만두 먹고 죽고, 잠자다가 죽고, 그렇게 세 번 죽은 셈이죠. 저 같으면 죽어도 그 퀘스트 안 합니다. 보잘것없는 사막 객잔에서 주는 퀘스트 깨봤자 보상이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하여간 알아서 하시겠지만, 정말 말리고 싶네요.
발신자:광우>
“이놈이 날 지들 수준으로 아나. 용문객잔이 사람 고기 파는 곳인 줄도 모를 줄 알았냐?”
“어라? 알고 계셨어요?”
광우 놈을 씹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현운자였다.
“그거야 당연하죠. 원작인 용문객잔은 못 봤지만, 임청하랑 장만옥 나오는 신용문객잔은 몇 번이나 봤으니까요. 현운자 님도 알고 있지 않았어요? 어제 눈치 보니까 알고 있는 것 같던데.”
“하하. 역시 전직 장사꾼답게 예리하시네요. 전 이름만 들어봤어요. 영화는 보지 못했구요. 대충 스토리 정도야 알고 있지만요.”
왜 걸핏하면 장사꾼이라고 걸고넘어지는 건지.
“하여간 어쩔래요? 들어갈래요, 말래요?”
단시간에 끝날 퀘스트 같지가 않다. 현운자가 들어가기 싫다고 하면 나도 굳이 하고 싶은 퀘스트는 아니었다. 광우 말대로 사막의 허름한 객잔에서 주는 퀘스트 보상이 대단할 리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뭐, 조연 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면 죽을 염려는 없지 않겠어요?”
현운자가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퀘스트를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죽어도 제 책임 아닙니다!”
“뭐, 같이 죽는다면야 상관없어요.”
끙. 이 사람 원래 성격이 이랬나? 첨엔 안 그러더니만, 요새 들어서 자꾸 말을 신경 쓰이게 하네. 재미 붙인 건가?
하여간 들어가 보자구!
객잔 문을 열자, 어젯밤에 본 그대로 퀘스트 정보창이 떴다. 다시 한 번 정보창을 봐도 역시나 별 내용이 없다.
발을 들어 객잔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딛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퀘스트:용문객잔’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네!”
“네.”
우리 둘 다 동시에 대답을 하고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겨우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인데 세상이 확 바뀌었다. 객잔 문을 열었을 땐 그저 시커먼 암흑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겨우 한 걸음 사이에 여느 보통의 객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마적단처럼 보이는 인물들과 사막의 여행객들, 그리고 허름한 옷차림의 점소이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마적단과 상인처럼 보이는 NPC들이 한 공간에서 술을 기울이는 모습이 조금 어이없어 보이기도 했다.
‘적대적인 관계인데도 별 소란이 없다면, 역시 객잔 주인의 통제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이야기인가?’
객잔 안은 꽤 넓었다. 하지만 그 넓은 객잔에 빈자리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잠시 서서 점소이가 안내하길 기다리는데, 이놈들이 옆으로 지나다니기만 하고 말 한마디 거는 놈이 없었다. 알아서 앉으라는 소리 같았다.
1층엔 빈자리가 없어서 2층 쪽으로 올라갔다. 구석의 빈 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객잔 주인인가 봐요?”
의자에 앉자마자 현운자가 턱짓으로 1층의 한 탁자 쪽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역시나 이 용문객잔이 그 용문객잔이 맞나 보다. 현운자가 가리킨 NPC는 이곳에 있는 NPC 중 유일하게 머리 위에 이름을 달고 있었다, ‘금양옥’이라는 이름을. 영화 용문객잔에 나오는 그 주인 이름 그대로였다.
‘어디 얼굴이나 볼까?’
내가 강호에서 본 NPC 중에서 예쁘기로는 단연 진진이 최고였다. 꼬마 진진이 아니라 신안 퀘스트를 준 그 진진 말이다(나 로리콤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 아가씨,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까? 날 마지막으로 더 이상 퀘스트 진행을 안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래층에서 엉덩이 살살 흔들며 마적들의 술시중을 들고 있는 금양옥은 그 진진에 버금갈 만한 미인이었다. 진진이 부용화와 수국을 합쳐 놓은 듯 순수하면서도 화려한 여인이었다면, 금양옥은 거친 들장미에 화중왕인 모란을 섞어놓은 것만 같았다. 걸치고 있는 옷은 평범했지만, 그 안에서 발산하는 체향이 내가 앉아 있는 2층까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 정도로 금양옥의 용모가 주는 느낌은 당당하고 화려했다.
“뭐 해요? 반했어요?”
“점수 매기고 있어요.”
그 말에 현운자가 키킥 웃더니, 다시 묻는다.
“몇 점이나 줬어요?”
“구십구 점.”
“백 점이 아니라?”
“음… 백 점 줘도 될 만한 얼굴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저 사람보다 더 맘에 드는 사람을 이미 봤거든요. 금양옥보다는 그 사람이 더 제 취항에 가깝네요.”
“누군데요, 그 사람이? 그렇게 예쁘면 저도 한번 구경 갑시다!”
허허, 이 사람도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부류인가?
“알아봤자 만나긴 힘들걸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진이라는 이름의 NPC였어요. 특수 퀘스트 할 때 만났죠. 아마 그 사람 얼굴 보긴 힘들 겁니다.”
“푸하하하!”
아니, 왜 웃는 거야? 내가 NPC 따위한테 반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참 사람 무안하게 웃던 현운자는 여전히 잔웃음을 흘리면서 다시 말했다.
“하악, 하… 아이고, 웃겨라. 아, 그러니까 백 점짜리라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란 건데, 그게 사람도 아니고 NPC였어요? 으하하하!”
거참, 그렇게 웃으면 허파에 구멍 난다구, 이 양반아!
땟물 질질 흐르는 점소이가 차를 내올 때까지 현운자는 포복절도해가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꾀죄죄한 옷차림에 세수도 1년에 두 번만 하는 듯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점소이가 찻잔 2개와 주전자를 가지고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던 현운자는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꼭 이럴 때만 도사라는 신분을 자각하는 것 같다.
탁- 탁-
점소이가 묵은 때로 검게 변한 나무 탁자 위에 접시 2개를 내려놓는다. 그리곤 그 접시 위에 조악한 찻잔을 내려놓고는 들고 있던 주전자를 기울여 찻물을 따랐다.
볼품없는 삼류객잔의 싸구려 차일 뿐이지만,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찻잔을 채워가는 찻물을 보자니 잠깐이나마 전통찻집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점소이는 주문도 받지 않고 제 볼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바로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모양새는 그럴싸한데요?”
현운자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눈앞으로 가져가 바라본다.
“그럴싸해야 의심 없이 마실 테고, 그래야 이 집도 먹고살겠죠.”
난 광우한테 들은 바가 있어 이 차를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현운자는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런데 내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챈 것일까? 현운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찻잔을 들고만 있을 뿐, 입가로 가져가진 않았다.
사실, 강호에서 차나 술 따위는 마셔 봤자 아무런 맛도 안 난다. 나도 주루에 가서 가끔 술을 시켜 놓고 정작 마시지는 않을 때도 있으니, 현운자가 저러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말뜻을 알아차렸든 아니든지 간에 마시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한참 쳐다만 보던 현운자가 찻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쳇! 알고 있었군요? 이거 사실은 독물이라는 거. 알면서도 미리 알려 주지 않다니, 너무합니다.”
“현운자 님도 알고 계셨잖아요? 피장파장이죠.”
만두를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현운자가 이 정도도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 놀래주려고 찻잔 들고 쇼하는 것도, 사실 눈치 채고 있었다.
별로 할 이야기도 없고 할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시간 때우기가 영 지루한 건 아니었다. 우리 둘 다 금양옥이 얼굴을 쳐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눈은 왕조현 닮았네요.”
“내가 보기엔 좀 사나운 게 한예슬 닮은 거 같은데요?
“…….”
“어어! 봤어요? 금방 저 마적 두목 새끼가 양옥이 가슴에 손 넣는 거! 저, 저런 망할 새끼!”
어이 형씨, 왜 그래? 마적이 뭐 다 그런 거지. 왜, 당신도 한번 저 품속으로 손 집어넣고 싶었나?
“기분 나쁘면 가서 저 마적 놈 모가지 날려 버리시든가요.”
“…….”
금양옥이는 마적 두목 품에 안겨 온갖 교태를 다 부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일 때마다 에로 비디오급은 아니었지만, 대충 걸친 옷가지 사이로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현운자는 그 광경에 몰입해 있었다.
‘순진한 건지, 색광인 건지 모르겠네.’
뭐, 현운자를 탓하는 것도 조금 우습다. 나도 금양옥의 미모에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이지 생동감 있게 잘 만들어진 그래픽이다. 움직임도 실제 사람처럼 부드럽기 그지없고, 음성마저도 NPC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다.
‘응? 이제 시작하는 건가?’
마적 두목 품 안에서 정신없이 허우적대던 금양옥에게 점소이가 다가가고 있었다. 주인의 낯 뜨거운 짓에도 얼굴 하나 꿈쩍하지 않는 점소이가 금양옥에게 귓속말로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말을 마친 점소이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금양옥은 잠깐 고개를 들어서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어어? 나한테 반했나 봐요! 아이고, 내 얼굴 뚫어지겠네!”
현운자가 재미 들렸는지 그런 금양옥에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자, 자, 웃어줍시다. 뭐 해요? 미인이 쳐다보는데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되는 거라구요!”
‘아주 꼴깝을 해라.’
현운자가 그러고 있는 사이에 금양옥은 정신없이 자기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던 마적의 손을 뿌리치고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온다! 온다!”
“아! 그만 좀 해요! 재미없어요.”
현운자에게 면박을 주고 있는 동안에 금양옥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우리가 자리한 탁자에 도착했다.
금양옥이 붉은 입술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우릴 찬찬히 살펴본다. 누가 주객인지 가늠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녀를 보고 했던 짓을 이번엔 그녀가 하는 것일까.
‘현운자보단 내가 좀 더 잘생겼지.’
금양옥도 내 생각과 같았나 보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살짝 벌려지더니 날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어머! 우리 용문객잔엔 처음이신가 봐요? 그나저나 차가 식었네요. 다시 내드리라고 할게요. 아참, 주문은 하신 건가요?”
생김새와 달리 금양옥의 목소리는 과장된 데다가 시끄럽기까지 했다.
‘얼굴 예쁜 사람치고 목소리 고운 사람 없다더니. 알고서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가?’
“정정할게요. 구십이 점.”
“네? 무슨 말씀이신지… 구십이 점이란 요리는 처음 들어보는걸요?”
“아, 아, 아니에요. 이 사람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세요.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예요. 주문이나 받으세요. 만두 주세요, 만두.”
현운자가 날 흘겨보고는 대신 무마했고, 금양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1층으로 내려갔다.
“으이구! 여자 앞에서 그런 말은 실례라구요!”
“쟤가 어디 여잔가? 그냥 프로그램이지.”
“참 나, NPC 따위한테 반했다는 사람이 말하는 거 봐요. 그냥 좀 머리 나쁜 아가씨라고 생각하면 재밌잖아요.”
그러고 싶어도 머리 나쁜 여자는 여자로 안 보이는 걸 어떡하냐?
현운자가 타박을 늘어놓는 사이에 아까 차를 내왔던 땟국물 질질 점소이가 만두를 가지고 왔다. 어른 주먹만 한 큼지막한 만두가 쟁반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현운자가 만두 한 개를 집더니 반으로 쪼갰다. 그러고선 또 실없는 소리를 한다.
“이렇게 다져 놓으면 사람 고기인지 어떻게 알죠?”
“고기로는 모르죠. 가죽 벗겨 놓으면 소고기랑 구분하기 힘들다고도 하니까. 머리카락 있나 봐봐요. 아니면 손톱 같은 거나.”
이 양반, 반우스갯소리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다.
현운자는 반드시 머리카락을 찾고 말겠다는 듯이 만두 속을 한참 헤집었다.
사실, 만두 속에 머리카락이 들어 있다고 해서 사람 고기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럼 울 엄니가 해준 음식에 머리카락 들어 있으면?
현운자가 삽질하고 있는 와중에 객잔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져 갔다. 그 많던 손님들이 어느 틈엔가 수가 줄어서 지금은 겨우 10명 남짓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고, 마적단도 업무를 시작하려는지 주섬주섬 병장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광이 말한 대로 밤이 되어가는 분위기였다. 강호에서의 하루는 현실 시간으로 겨우 2시간일 뿐이니, 얼추 맞는 것도 같다. 우리가 여기 들어왔을 때가 아침나절이었으니 말이다.
금양옥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고, 점소이들이 분주히 오가며 청소를 시작한다.
우리 자리로도 점소이 한 녀석이 청소를 하려는지 다가왔다.
“손님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숙박하실 건가요?”
청소하려는 게 아니었다. 퀘스트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는 그저 탐색전이었을 뿐, 이제부터는 어떻게 진행될지 이광이도 모른다고 했다.
내 대답은 당연했다.
“일단 하룻밤 묵고 가겠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방을 알려 드리죠.”
숙박비가 얼마인지, 만두 값이 얼마인지 그런 건 말하지도 않고 점소이는 앞장서서 안내했다.
현운자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머리카락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2층 구석의 널따란 방을 알려 준 점소이가 접대용 멘트를 날리곤 총총히 사라졌다.
“휴우… 그럼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죠?”
“현운자 님 생각은요? 저도 여기서부턴 아는 게 없어요. 분명한 건,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 채 밤을 보내면 확실히 사망해버린다는 것 정도? 그리고 밤은 길지 않아요. 한 시간밖에 없어요.”
퀘스트가 게임 속 시간으로 진행된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주인공 이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과 똑같다면, 성격도 비슷하게 설정해뒀겠죠?”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렇겠죠.”
“그럼 용문객잔 스토리는 아세요?”
“대충요. 동창하고 다툼이 있던 무림 고수들이 용문객잔에 머무르죠. 그리고 이 사람들 잡으러 온 동창 고수들하고 싸우게 되고요. 금양옥은 무림 고수들 쪽 대장을 사모하게 돼서 끝에 가서는 동창과 반대편에 서게 되고요. 근데 결말은 어떻게 되더라? 다 죽게 되던가…….”
하도 오래전에 본 거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다 죽진 않아요. 마지막에 동창 제독이랑 싸우다가 무림 협객들은 죽지만, 대장은 살아요. 아마 금양옥이도 살걸요? 동창 제독은 죽고요.”
듣고 있자니 어렴풋이 기억이 살아난다. 그때, 무림 협객들 틈에 임청하가 주인공을 사모하는 여자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마지막에 주인공 살리려다가 죽게 되는 것도.
그런데 용하네?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고. 영화도 안 봤다면서.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요? 암만 스토리에서 힌트를 얻으려고 해도 전 통 감을 못 잡겠는걸요.”
“으이구, 그 똑똑하신 조연 님은 어딜 가신 걸까! 정말 모르겠어요?”
“…….”
“스토리대로라면, 곧 동창이 쳐들어오겠죠? 수도 만만치 않을 테고, 감당 못할 고수들도 떼거리로 몰려올 거예요. 어쩌면 천하제일고수라는 동창 제독이 직접 출현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하여간에 동창이 나온다고 가정을 하면, 걔네들 물리치는 게 퀘스트 통과하는 걸 거예요. 여기까진 이해되죠?”
“그럴싸하네요.”
“그럴싸한 게 아니라 그렇다고 해야죠. 그럼 우리 둘만으로 동창의 그 많은 고수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절대 못하죠. 그래서 영화에서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금양옥이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해요. 뭘 어떻게 도와줄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일단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이란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그래서 뭘 어쩌라구요? 현운자 님 말이 다 맞다고 칩시다. 그럼 그 금양옥이를 어떻게 우리 편으로 돌릴 수 있다는 거죠? 헉! 설마……!”
“후후후, 역시 조연 님다워요. 그 설마가 맞아요.”
끙.
“미인계!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이야기하는 건데요?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현운자 님이 가서 꼬시면 되잖아요.”
난 꼬심을 당하고 싶은 사람이지, 번거롭게 꼬시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현운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이 몸은 풀만 먹고 사는 도인. 청정계를 어기면 그동안 닦은 도가 물거품이 되는지라… 아무래도 속인인 시주께서 나서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되는구료. 더구나 조 시주께선 본 도보다 더 뛰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지 않소이까.”
아주 쇼를 해라.
“필요할 때만 도사라는 신분을 자각하시는구료.”
“아무쪼록 작업이 성공하시길 바라겠소이다.”
어차피 둘 중의 누군가는 작업을 하러 가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더 적임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 봐온 현운자는 낯선 사람에겐 꽤나 말을 아끼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요샌 걸핏하면 날 가지고 놀려고 해? 이젠 만만하다 이건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방을 나가는데, 현운자의 약 올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여자란 조그만 선물에도 쉬이 마음이 넘어가곤 하니 유념하시구려, 조 시주.”
쾅!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용문객잔은 객잔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어서, 대충 눈에 보이는 방만 해도 20개가 넘었다.
금양옥이 어느 방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 방문이나 열어봤다가는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고.
일단, 계산대로 나갔다. 당직인 듯한 점소이 하나가 계산대에 머리를 처박고 자고 있었다.
“어이!”
“…….”
“야, 일어나 봐!”
귓가에 대고 고함을 지르자 녀석이 그때서야 깨어났다.
“왜 그러시는데요, 손님?”
“금양옥이 어딨어?”
“왜요?”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어딨는지나 알려 줘봐.”
오밤중에 여주인을 찾는 손님을 녀석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용건도 말하지 않았는데 선선히 데려가는 걸 보니, 현운자의 짐작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역시 금양옥이를 꼬시는 것부터 퀘스트가 시작되는 건가?’
점소이가 안내해준 방은 주방 바로 옆에 위치한 곳이었다.
“여기예요, 손님. 그런데 조심하세요. 밤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걸 겁이라고 주는 것인지, 녀석은 그 말만 쏙 하고는 다시 계산대 쪽으로 가버렸다.
“그래도 주의는 들었으니 준비는 해둬야겠지?”
일단 신안을 켜고 손가락을 풀어줬다. 지금은 완전히 강호 컨트롤러에 적응이 돼서 생각과 동시에 무공이 펼쳐진다. 금양옥이 만약 절정급밖에 안 되는 NPC라면 결코 내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방 안에 얼마나 무서운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지 모른다. 잔뜩 긴장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열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드는 생각!
‘금양옥이 암살하는 것도 아닌데 왜 도둑놈처럼 들어가려고 했지?’
아까 그 점소이 놈이 던지고 간 말 때문에 실수할 뻔했다. 누굴 죽이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 아군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야밤에 혼자 자는 여인네 침소에 몰래 들어가서는 우리 친하게 지내봅시다, 그러라고? 괜한 놈의 말 때문에 정말로 큰 실수할 뻔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똑똑-
반응이 없다.
똑똑-
그래도 반응이 없다. 다시 쾅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두드려 봤지만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금 소저! 들어가도 되겠소?”
큰 소리로 외쳐 봤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강호의 밤은 짧다. 겨우 한 시간짜리 밤이다. 그마저도 이제 40여 분밖에 남지 않아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의는 차릴 만큼 차렸다.
방문을 열어젖히고 미지의 퀘스트를 시작했다.
‘제길!’
암흑천지인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새빨간 오러가 날 향해 날아오는 게 보였다. 급히 바닥을 굴러서 피했다.
파파팍!
날 노린 비도가 방문에 연달아 박혔다.
“흥!”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비도가 날아왔다.
쐐애액-
이번엔 단순한 직선 궤도가 아니라 몸을 피할 방위마저 차단한 완벽한 곡선의 비도술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막으면 되는 거지!”
금강저의 방어력을 믿고 비도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땅! 땅! 땅!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비도였지만, 어렵지 않게 금강저로 막아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런 암흑 상태에서 쏘아지는 비도를 절대 피할 수 없으리라. 나 역시도 신안이 아니었다면 점소이 말대로 내일 아침 시체로 발견됐을 것이다.
“제법!”
비도술이 통하지 않는 걸 안 금양옥이 이번엔 다른 무기를 꺼내들었다. 허리에 매고 있던 채대를 풀어 공격해온 것이다. 채대 끝엔 비도가 매어져 있었다.
채대가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눈앞을 어지럽혔다. 쉭쉭, 소리를 내면서 달려드는 비도가 예리하게 날 파고들었지만, 어쩐지 우스웠다. 무공을 완전히 폼으로 펼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나름대로 장병기에 속하는 채대를 쓰다니 말이다.
채찍이나 철편처럼 휘어지는 병장기는 건물 안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다. 건물 안의 물건들 때문에 사용하기에 까다롭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도술도 통하지 않는 내게 그보다 속도가 더 떨어지는 병기를 사용하는 것도 우스웠다. 네임드 몬스터라고 해서 제법 머리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장병기를 구사하는 자들의 약점은 파고드는 공격이다. 금양옥의 공격이 내게 적중되려는 찰나, 방바닥을 굴러서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훗!”
그런데 내가 뛰어든 것과 동시에 그녀는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이 뒤로 미끄러지듯 피해버렸다.
대단한 신법이었지만,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고른 건 그쪽.
내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비수를 슬쩍 피하고 다시 그녀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아직 그녀는 채대를 회수하느라 내 공격에 대응할 수 없는 상황!
이번에도 그녀가 예의 신법을 사용해 뒤쪽으로 물러서는 데 성공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남은 공간이란 없었다. 나는 다시 몸을 띄워 그녀에게 돌진했다.
공간이 없다는 걸 알고 그녀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이 근거리에서 비도를 던졌다. 하지만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간단하게 금강저로 튕겨 버렸다.
원래는 일단 패고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마 손이 나가질 않았다. 아무리 인공지능의 제어를 받는 일개 NPC라고 하지만, 금양옥은 너무 예뻤다.
금나수를 전개해 그녀의 양 손목을 제압했다. 양팔을 벌린 자세로 내게 제압된 모습이 딱 그 장면이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강제로 뽀뽀할 때 써먹는 그 장면.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의 거리 차는 불과 20센티 남짓.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요염한 몸에선 체향이 풍겨 오는 것도 같다.
‘거참, 뽀뽀해버리고 싶어지네.’
그런 내 착각을 깨준 건 이 아름다운 여인네의 입에서 튀어나온, 상상도 못할 말이었다.
“개새끼! 죽이려면 빨리 죽여, 이 자식아!”
정정. 난 이렇게 사나운 여자랑 뽀뽀하고 싶지 않다.
“금 소저, 난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들어왔을 뿐입니다. 다짜고짜 먼저 공격을 한 건 그쪽이구, 난 당신을 해치려는 마음이 추호도 없어요.”
“훗. 그런다고 내가 주 공자의 행방을 발설할 것 같으냐! 어서 죽여. 어차피 동창 제독을 그 꼴로 만들고서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어!”
그녀가 말하는 걸 듣자니, 내가 동창 제독을 암살한 대가로 파견된 살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금 소저, 난 당신이 말하는 주 공자의 행방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아요. 그걸 묻고 싶어서 이 밤중에 찾아온 것도 아니고요. 난 그저… 그저…….”
‘미치겠다. 뭐라고 말해야 NPC를 꼬시는 건데?’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금양옥 때문에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놀러왔어요.”
하아… 나온다는 소리가 겨우 놀러왔다는 소리라니.
내 말에 충격을 먹었나, 계속 거친 소리를 내뱉던 그녀가 잠잠해졌다. 아마 강호 인공지능이 지금 내 말을 해석하느라 애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어버린 듯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야 내 말에 대응할 방법을 찾은 것처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동창의 위사라는 걸 증명하긴 쉬워도,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는 어려운데?”
내가 놀러왔다는 말은 해석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뭐 어려울 게 있나요? 금 소저는 금방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이미 죽은 목숨, 내게 한번 맡겨 봐도 상관없잖아요? 금 소저 말대로 조만간 동창 위사들이 쳐들어올 텐데, 그때가 되면 내 말의 진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그녀가 다시 입을 꼭 다문다. 그리곤 고개를 살짝 떨구며 내 제안을 골똘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어둠에 잠긴 미녀의 방에 우리 둘의 숨소리만 들려올 뿐, 침묵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정적을 깨는 소리는 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 소리였다.
“휴… 그렇게 하지요. 내 무공으론 공자의 터럭도 건들지 못한다는 걸 알았으니, 우선은 공자의 말에 따르도록 하지요.”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말투였지만, 그 정도면 괜찮았다. 최소한 이젠 칼부림 날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믿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 손부터 풀어줘요.”
다시 공격을 할까 경계했지만, 손이 풀린 금양옥은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이젠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금양옥의 호의를 얻었으니 대충 최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으로 돌아가자니 아무래도 미진했다.
금양옥은 다시 자려는 듯 침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잠자리에 들지 않고 침대 머리맡에 있던 호롱불에 불을 붙이는 게 아닌가.
‘이야기하자는 것인가?’
짐작한 대로였다. 금야옥의 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저 좋기만 했죠. 조 태감이 죽고 나면 세상이 조금은 살기 편해질 줄 알았어요. 하지만 바뀐 게 하나도 없더군요. 조소흠이 죽자 이번엔 그 자리를 금전이라는 내시 놈이 꿰차더군요. 조소흠이 일궈놓은 동창을 거저먹은 셈이죠. 주 공자는 여기서 몇 달간 머물렀어요. 내각대학사에게 편지도 보내보고, 전에 알고 지내던 금군교두에게 연락도 해봤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죠. 주 공자의 수배는 풀리지가 않더군요. 더 이상 머물러봤자 제게 해가 된다는 걸 알고는 어느 날 인사도 없이 사막 저쪽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아시겠어요? 윗대가리 하나 제거한다고 해서 이 썩어빠진 세상을 구제할 수는 없다는 걸요.”
금양옥은 기회라는 듯이 내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한숨을 내쉬면서 나직한 어조로 말을 풀어가는 그 모습이 사뭇 애처로웠다.
“그런데 왜 동창에서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악독한 전임 제독이 죽고 그 자리를 똑같은 놈이 차지했다지만, 굳이 북경에서 이 먼 감숙까지 쳐들어올 리는 없지 않나요? 금전이라는 놈이 무슨 대단한 의협심이 있어 복수를 하려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렇죠. 금 태감은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건 주 공자가 내각대학사에게 올린 편지 때문이었어요. 내각대학사와 동창은 정적 관계. 조소흠이 죽고 나자 그동안 숨어 지내던 내각대학사가 그때서야 큰소리를 내게 됐죠. 황제를 만나 동창 폐지론을 주장한 거예요.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어요. 황제는 사실 동창의 악행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거든요. 보는 눈이 있어 대놓고 말은 못하고 있었지만요. 신하가 아무리 바른 소리를 해도, 황제의 속뜻과 다르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따름이죠. 그 때문에 결국엔 내각대학사마저도 동창에게 제거당하고 말았어요. 주 공자의 편지 한 장이 애꿎은 내각대학사마저 죽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정치판 더럽기는 게임 속이라도 마찬가지네.’
잠시 쉰 금양옥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동창에서 주 공자를 노리는 건 그 때문이에요. 아직 남아 있는 반대파들에게 또 빌미를 제공할까 봐서죠. 아마 놈들은 주 공자가 여길 떠났다는 것도 모를 거예요. 설사 그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용문객잔을 가만히 두진 않겠죠. 반대파의 거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 속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하나 끼어 있었다.
“아니, 그럼 왜 떠나지 않는 거죠? 어차피 동창이 오늘 내일 쳐들어오는 것도 아닐 텐데, 아직 도망갈 시간이 있지 않나요? 이 넓은 사막에서 당신을 어찌 찾겠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서쪽으로 떠나는 건 어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금양옥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왠지 그윽한 느낌을 주는 눈이다.
“당신은 정말 동창 사람이 아니군요.”
‘아니라고 말했잖아!’
“공자의 마음은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저 금양옥은 용문객잔의 금양옥이니까요. 뜨내기손님밖에 없는 곳이지만, 그 뜨내기손님들은 용문객잔이 언제나 이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오는 거니까요.”
참 말은 예쁘게 잘한다. 그 뜨내기손님 잡아다가 고깃국 끓여 먹는 사람 입에서 어찌 저런 뻔뻔한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퀘스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됐다.
[금양옥과의 관계가 ‘적대적’에서 ‘우호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녀와 싸움을 멈출 때부터 적대 관계가 풀린 줄 알았더니 이제야 우호적으로 바뀐 것이다.
금양옥의 말은 계속됐다.
“그리고 공자의 말씀 중엔 잘못된 점이 하나 있어요. 동창의 위사들이 이미 용문객잔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아마 내일쯤이면 도착할 테고, 휴우… 강호에서 용문객잔이란 이름은 자취를 감추겠지요.”
불과 하루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지만 오히려 다행으로 들렸다. 이제야 퀘스트가 어떻게 돼가는지 감이 잡혔다. 내일이라고 해봤자 그건 게임 속 시간이고, 실제론 한두 시간만 지나면 된다. 그때쯤에는 어떻게든 결판이 난다는 이야기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꼭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이런 살인마 따위는 죽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역시 예쁜 여자는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금양옥은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 말이 없는 걸로 봐서는 이걸로 퀘스트가 일단락 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금 소저도 맘 편하게 가지고 이젠 쉬도록 해요. 밤중에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금양옥은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방금 전 이야기를 끝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은 다 했다는 투였다.
목석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흥미가 없다. 약간 찝찝한 느낌을 가지고 돌아서는데, 문득 현운자가 해준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여자란 조그만 선물에도 쉬이 마음이 넘어가곤 하니 유념하시구려, 조 시주.’
연애 게임물에선 흔히 상대의 마음을 사는 데 장신구 따위의 아이템을 선물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여자의 호의를 살 만한 장신구가 하나 있긴 했다.
‘언젠가 긴요히 쓰일 날이 있을 거예요.’
진진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준 사향 주머니 말이다. 다행히 지금 내겐 그 사향 주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진진은 선견지명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마치 내게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 짐작한 것처럼 말했었으니 말이다.
사실, 사향 주머니는 평범한 아이템이다. 드물긴 하지만 잡화점에 종종 매물로 나오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템이라고 해서 실제로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강호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기능은 지원되지 않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환심을 살 만한 상황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나도 그때 진진이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걸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버려도 퀘스트는 아마 별 이상 없이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현운자가 해준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어차피 아깝지도 않은 아이템이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금양옥에게 써보기로 결심했다.
행낭에서 사향 주머니를 찾아들고 금양옥에게 다가갔다.
“금 소저, 야심한 시각에 무례를 저지르게 된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릴게요. 너무 미안해서 그러니, 보잘것없더라도 이걸 받아주셨으면 해요.”
일단 말은 했지만 반응이 금방 오는 건 아니었다. 금양옥의 눈앞에 대고 사향 주머니를 살살 흔들어 보였다.
‘물어라, 제발!’
목석처럼 공허한 눈에 생기가 도는 것 같더니, 금양옥이 입을 열었다.
“어머, 사향이네요? 공자가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인 줄은 몰랐는걸요? 어쨌든 고마워요. 잘 쓰도록 할게요.”
후후. 미끼가 좋은 건지 이 여자가 단순한 건지 모르겠다. 반응이 촌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낚긴 낚은 거다.
[금양옥과의 관계가 ‘우호적’에서 ‘친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침 올라오는 시스템 메시지에 담긴 숨은 뜻을 하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반 NPC들에게 아무리 거액의 뇌물을 갖다 바쳐 봤자 우호적 상태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처음으로 친밀한 상태가 돼본 것이다.
‘아마도 내일 아침엔 고기반찬 정도는 올라오겠지.’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금양옥은 마치 석상인 양 자리를 지켰다.
나는 현운자에게 상황 보고를 하러 방으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