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5장. 무림정의 구현단 (25/62)

제25장. 무림정의 구현단

“안서까지 데려갈 줄 알았더니, 왜 보내셨어요?”

터벅터벅 수레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현운자가 물어왔다.

“그냥요.”

“하하하!”

내 대답이 그렇게 재밌었나? 왜 웃는 거야.

“어쨌든 재밌는 친구였어요. 사파에 몸담고 있는 사람치고 순진한 면도 있고요.”

끙. 이 사람은 게임이랑 현실이랑 착각하는 것도 아주 습관이다. 재미로 사파를 선택했을 뿐이지, 정파 사람보다 인간성이 못됐다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죠. 너무 순진해서 미안할 정도죠.”

“흐흐흐.”

또 웃네. 그나저나 안서는 아직 멀었나?

결국 오늘 목표인 안서까지는 못 가게 생겼다. 저 멀리서 10명가량의 무인들이 놀라운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황성일까요?”

“모르죠.”

왠지 불안하다. 정말 대단한 경공이었다. 땅을 박찰 때 생기는 흙 파편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허공을 딛고 오는 것 같았다.

표행은 다시 멈췄고, 현운자와 난 황급히 대열 앞으로 나갔다.

괴인영들이 시야에 들어와 우리들 앞에 도착한 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정도로 놀라운 경공이었다. 도무지 유저들이라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이들이 절대 사황성 사람들이 아니란 걸 확신했다.

“현운자 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유저들 같지는 않으니 긴장하세요.”

그리고 소봉이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혹여 전투가 벌어진다면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말이다.

다행히 이 사람들의 외양은 사마외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눈에는 정기가 흘렀고, 서 있는 자세에도 한결같이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집단에 속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들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몇몇은 도관을 쓴 도사 차림이었고, 어떤 이는 비구니, 또 어떤 이는 소림의 승려인 듯 한쪽 소매가 없는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관도를 막고 우릴 멈춰 세운 괴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람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마에 9개의 계인이 선명하게 박힌 중년의 소림승이었다.

소림승이 들고 있던 선장을 땅바닥에 쿵, 하고 찧고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일수경천!”

난 깜짝 놀랐다. 일수경천이란 별호는 현운자한테만 알려 주고 아직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다면 역시 NPC란 말인가?

“왜 그러십니까!”

“일 년 전 낙양에서 있었던 사건을 알고 있겠지?”

1년 전? 그땐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아닌데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허허! 이놈이 누굴 속이려 드느냐! 그렇게 죄를 무서워하면서 어찌 그런 패악을 저질렀단 말이냐!”

허허! 이 양반 왜 이래?

그런데 왠지 내가 계산을 잘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라? 일 년 전이란 게 현실 시간이 아니라 게임 속 시간을 말하는 건가? 대충 그러면 낙양에 있었던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대체 왜 날 핍박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계속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정말로 아닌데요. 사람 잘못 보고 오신 거 아닌가요?”

정말 같잖아 보이는 NPC라면 무시하고 지나가버렸을 텐데, 놈들의 위세가 보통이 아니다. 일단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네 이놈! 네놈이 저지른 패악이 영원히 숨겨질 줄 알았더냐! 무림정의 구현단의 이름으로 의협(義俠) 무영신투를 해한 네놈을 치죄(治罪)하리라!”

으악! 무영신투!

오리발 작전은 통하지 않았다. 소림승이 치죄 어쩌고 하는 사이에 이미 뒤에 있던 NPC들이 날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흉흉한 창검들을 세우고!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놈들의 생김새로 봐서는 저들 중에 한 놈도 감당키 어려웠다.

“현운자 님! 도망갑시다!”

머리에 쏟아져 내리는 도검을 나려타곤으로 피하면서 외쳤다.

다행히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몸뚱이를 일으켜 세울 여유는 없었다. 정신없이 떨어지는 도검을 피해서 이리저리 뒹굴어야 했다.

“완형!”

그때, 현운자가 날 공격하던 녀석들에게 부적을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잠깐 놈들의 공격이 주춤했고, 그사이에 난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조연 님, 도망갑시다!”

현운자가 재차 부적을 뿌리면서 앞서 갔다. 나도 경공을 시전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애초에 우리들 경공으론 놈들을 뿌리칠 수 없었다. 더구나 내 유운신법은 현운자가 배운 제운종보다도 한 단계 낮은 경공술이었다.

겨우 1백 보나 갔을까? 등 뒤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이 그려 내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취익-

“큭.”

오른쪽 어깨에 검상을 입고 말았다.

‘미치겠고만! 아니, 현상 수배범 잡았다고 이렇게 보복하는 게 어디 있냐고!!’

욕이 치밀어 올랐지만, 일단은 살고 볼 일이다. 재차 등 뒤에서 검이 내리쳐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까. 아무리 뒤에서 따라오는 놈하고 수준 차이가 심하다곤 해도, 예상했던 공격도 피하지 못한다면 여태 밥 먹고 산 게 아까울 것이다.

다시 나려타곤을 이용해 앞쪽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뒤돌아볼 여유는 없다. 잠깐 지체한 사이에 놈들이 더 달라붙었을 테니 말이다. 궁신탄형으로 앞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고 다시 경공을 시전했다.

하지만 역시 또 얼마 가지도 못하고 놈들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화가 난다. 이런 식으로 도망쳐 봤자 살아날 것 같지도 않다. 여긴 허허벌판 사막이 아닌가.

길은 보이지 않고 내 꼴이 우스워져서 막 체념하려던 찰나, 앞서 달려가던 현운자가 내 쪽으로 되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대로 달리세요! 제가 잠깐 묶어둘게요!”

현운자는 그렇게 외치고선 내 뒤로 연달아 부적을 날렸다. 품속을 오고 가는 손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란했다.

순식간에 10장이 넘게 부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곤 하늘을 뒤덮듯이 놈들을 덮쳐 갔다. 만천화우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방벽! 완형! 만! 벽! 방! 방! 금쇄! 방벽!”

귓가로 현운자의 고속 주문이 들려왔다. 인간의 입으로 저렇게 빨리 주문을 외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도망치는 일이라면 나보다 현운자가 더 잘할 것이다. 경공도 빠른 데다 부적술도 있으니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나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 길을 한 30분은 달렸나 보다. 그동안 몸을 피할 곳이라곤 한 군데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무작정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달려 버린 터라, 그 많던 내공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현운자가 잘 막아준 탓인지 더 이상 뒤쫓아 오는 놈들은 없었다.

“휴우… 드디어 따돌린 건가?”

내공이 바닥난 지금 상태로 더 달렸다간 체력까지 떨어져 버릴 듯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일단 운기 조식을 하기로 했지만, 놈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소림소환단를 꺼내 먹었다.

[소림소환단을 복용했습니다. 1분간 운기 속도가 10배 증가합니다.]

2성의 반야신공을 불러일으키자 황금색 기류가 회오리치듯이 날 감싸기 시작했다.

반야신공의 내공 회복력은 그야말로 발군. 거기에 소환단의 효능까지 겹쳐져 엄청난 속도로 내공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32만이나 되는 내공이 다 차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30초 남짓이었다.

더 달렸다간 자칫 현운자하고 길이 엇갈릴 수도 있고, 운기조식을 했다지만 아까 도망치다가 놈들에게 맞은 상처가 전부 회복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일단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하릴없이 허허벌판 사막에 홀로 앉아 있자니 슬금슬금 짜증이 밀려왔다.

“아니, 대체 그 자식들 뭐야? 무영신투 그 새끼 뒈진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복수 운운하고 자빠졌어!”

순조롭게 잘 진행되던 표행이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너무 화가 뻗쳐서 절로 욕이 나왔다.

단순히 반항 한 번 못해보고 30분을 내리 도망만 다녀서 열 받은 건 아니었다. 도망치면서 내내 생각했다. 놈들이 날 잡으러 온 것쯤이야 그럴 수도 있다. 그래, 무영신투가 강호에 친구가 많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놈들과 한 패거리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다 좋단 말이다. 문젠, 지금은 요행히 도망칠 수 있다손 하더라도 다음엔 또 어쩌란 말인가.

놈들은 NPC였다. 저 남쪽의 해남도에서 신강까지 1초 만에 오고 갈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한테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나마 바로 눈앞에 출현하지 않고 이렇게 무공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음… 그럼 천리종무영만 배우고 나면 놈들을 뿌리칠 수 있다는 건가?’

아니다. 단순히 경공의 문제가 아니다. 때론 도망칠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을 수도 있으니.

“아… 미치겠네, 정말!”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천리종무영을 배우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설마 레벨 500이 될 때가지 계속 쫓겨 다녀야 하나? 그 안에 아마 수도 없이 죽을 게 뻔한데!

“엥? 잠깐, 잠깐! 이런, 바보 같으니! 내가 왜 이렇게 착각하고 있었지?”

생각해보니 우습다. 무림정의 구현단인가 하는 놈들은 어차피 게임 속 인간들. 내가 한 번 죽든 열 번 죽든 그걸 알 수 있을까? 그냥 한 번만 죽어주면 되는 문제가 아닐까?

‘그래, 아마도 그게 맞겠지. 내가 뭐 무영신투를 두 번을 죽였어, 열 번을 죽였어? 목숨 한 개당 목숨 한 개면 공평한 거래지!’

확신할 순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불안감이 완전히 사그라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뭐 해요?”

땅만 쳐다보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앞에서 누가 부른다. 기다리던 현운자였다. 무사히 잘 따돌렸는지 현운자 뒤론 그 망할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괜히 나 따라와서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다. 나는 일단 생각했던 걸 현운자에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현운자 님, 어차피 지금은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간 또 부딪칠 게 뻔합니다. 매번 현운자 님의 도움 받아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아예 지금 죽어주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뭐, 한 번 죽는 것보다 무영신투 잡아서 이득 본 게 더 많았잖아요? 더구나 지금 제겐 혼천귀원단도 있고 말입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했는데, 현운자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다음번에 만나면 죽으세요. 오늘은 아닌 것 같네요. 하하하!”

“네? 완전히 따돌린 건가요?”

“아뇨. 맛좋은 먹잇감을 왜 그냥 버려요? 이미 양념 다 뿌려 놨으니까 익는 것만 기다리면 돼요.”

걔들이 먹잇감이라고? 아무리 못 봐줘도 절정급 NPC가 10마리나 되는데?

“아! 마침 저기 한 놈 오네요. 전 구경만 할 테니까 혼자서 잡으세요. 아시죠? 전 명성이 낮아서 잡으면 큰일 난다는 거.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현운자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오는 놈은 동료를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달랑 혼자였고, 우린 둘이었으니까. 정 안 되면 다시 도망가면 될 일이다.

잡기는 신안만 쓰기로 했다. 겨우 한 놈을 상대로 철포삼이나 일성소를 쓰기엔 아까웠다. 그리고 금강저가 있으니 동급의 NPC라면 그리 겁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달려오는 NPC 도사가 조금 이상했다. 현운자가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처음 만났을 때 같은 무지막지한 빠르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겨우 내가 유운신법을 펼칠 때와 비슷하려나?

대체 무슨 짓을 했냐고 현운자에게 물어봤지만, 그저 씨익 웃어줄 뿐이었다.

속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놈은 무인이다. 1백여 장의 거리가 금세 10여 장밖에 남지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금강저에 기를 불어넣었다. 기성형이 발동되자 예의 지이잉,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진다. 녀석의 떨림이 몸 전체로 번져 갔다.

탓!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꽈앙!

녀석은 막지 못했다. 막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5장이나 날아가 버렸다. 날 타깃으로 잡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실력 차인진 알 수 없었다.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놈이 일어나려는 순간에 맞춰 궁신탄형으로 놈에게 짓쳐 들어갔다.

퍽!

이번엔 날아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놈의 복부에 금강저가 제대로 박혔다. 완벽한 정타(正打)에 녀석의 허리가 굽혀지자, 놈의 안면을 향해 무릎을 쳐올렸다.

그러자 빠각, 소리와 함께 이번엔 고개가 뒤로 꺾인다. 굳이 일격기를 쓸 필요도 없었다. 12성 대성한 진결육합권이 한판 춤사위라도 펼치듯 놈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퍼퍽!

빠각!

푸욱-

‘이거 왜 이리 약해? 전혀 반항을 못하잖아. 내가 이놈들 실력을 잘못 봤나?’

그러고 보니, 이놈은 처음부터 상태가 영 안 좋았다. 절정을 넘긴 무인의 오러는 일류고수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일류급이 되면 장작불처럼 기가 활활 타오르지만, 절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기세가 사라지고 대신 전신을 감싸는 듯한 모습으로 바뀐다. 색은 더 선명하고 곱게 변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오러는 분명 도가 계열의 절정급인 것처럼 코발트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기의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생물인 것처럼 오러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대체 현운자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애를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버리다니!’

그나마 조금씩 꿈틀대던 오러가 이젠 거의 멈췄다. 죽을 때가 된 것이다.

팔꿈치가 가슴을 가격하고 그 기세 그대로 주먹이 얼굴을 강타하자, 놈은 꾸르륵 소리를 내며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명성이 1천 하락했습니다.]

휴, 다행이다.

혹시 무영신투를 잡았을 때처럼 명성이 크게 떨어지는 건 아닌가 했는데, 일반 유저를 잡았을 때랑 똑같이 떨어진다. 물론 이것도 보통의 NPC들보다야 훨씬 많이 떨어지는 거지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죽으면서 헛소리를 늘어놓지도 않네? 이름 없는 무명 NPC인가? 그래서 그런 건가?

“어때요? 할 만하죠?”

“뭐, 그럭저럭요. 그런데 이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아! 그건 나중에 물으시고, 일단 아이템 수거하고 얼른 움직입시다. 쟤들 또 왔네요.”

현운자가 내 물음에 대답은 안 하고 손가락으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방금 죽은 한 녀석을 빼고 9명 전부가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제길.”

무명 도사가 흘린 아이템을 확인도 않고 수거했다. 그리고 다시 달렸다. 뒤처리는 현운자가 알아서 해주겠지.

“이번엔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현운자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한 10분만 달렸다. 대체 어떻게 막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궁금해도 되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이번엔 얼마 쉬지도 않았는데 현운자가 되돌아왔다.

“준비하세요. 이번엔 두 놈입니다. 아까 보니까 두 마리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끙. 고생하는 건 나라고.

현운자 말대로 이번엔 두 놈이 같이 왔다. 평범한 백의장삼의 검수와 여승이었다.

하나가 둘이 됐다고 해서 상황이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다. 단지 아까와는 달리 가끔씩 방어 동작도 취해야 했을 뿐이다.

녀석들의 방어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공격력 하나는 역시 절정무인답게 꽤 묵직했다. 공격을 막아가는 손에 얼얼한 타격감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럼 뭐 하나? 공격이 너무 느려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는데.

별다른 위험 없이 간단하게 두 절정무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이놈들이 쓰러질 때쯤 나머지 떨거지들이 몰려왔고, 난 또 도망갔다.

그렇게 두 번의 작업을 끝내자, 최종 보스를 만날 수 있었다. 첫 대면에서 내게 말을 걸었던 그 소림승이 마지막 인물이었다.

여태까지 놈들보다야 살짝 나은 감이 있었지만, 이 녀석도 어차피 똑같은 상태였다. 몇 번 주먹질을 허용하긴 했지만, 결국 승리는 내 편이었다.

“으윽… 마… 군의 세상이… 천하가… 피에 잠기겠구나…….”

이름 달린 NPC답게 말하고 죽는다. 그런데 듣다 보니 열 받는다.

“이 자식이 누구보고 마군이래? 가만히 있는 사람 건든 건 니들이었잖아!”

더구나 이 녀석은 무영신투 때와 마찬가지로 명성이 5천이나 떨어졌다. 결국 무림정의 구현단을 전부 때려잡는 데 명성이 1만 4천이나 하락한 셈이었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꽤 타격이 될 만한 피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깎이고도 아직 명성이 5만이 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식들 잡은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왠지 인생 꼬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어때요? 제 말대로 됐잖아요.”

“뭐, 그렇긴 하네요.”

‘당신이야 별 부담 없겠지만, 일이 나중에 어떻게 꼬일지 어찌 아냐고!’

생각이야 그렇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나 때문에 현운자가 고생한 건 너무 잘 안다. 그리고 죽는 것보단 역시 사는 게 좋다.

“그럼 전리품을 나눠볼까요? 대충 보니까 장난이 아니던데요.”

절정급 무인들이라 그런지 아이템도 그만큼 값을 하는 것들뿐이었다.

백운(白雲)이라는 보검이 2자루, 일급 경공술인 세류표(細柳飄), 최절정급 장법인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 그리고 강기성형(쾝氣成形)이었다. 이것들 말고도 소림소환단 같은 잡다한 일회용 아이템들도 몇 개 됐다.

“흠…….”

현운자도 내가 바닥에 늘어놓은 아이템을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왠지 자꾸 말리는 기분이다.

“갖고 싶은 만큼 다 가져가세요.”

이번엔 양보할 수 없다. 현운자에게 가장 좋은 아이템을 넘겨주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에 건진 물건은 욕심 부릴 만큼 대단한 것도 없었다. 언젠가는 구하게 될 강기성형이나, 권법도 아닌 대력금강장 따위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죠.”

현운자가 짧게 말하고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날 약 올리는 건가? 손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더니, 아이템은 집지도 않고 날 보며 실실 웃는다.

“얼른 골라요.”

현운자 성격에 배우지도 못할 대력금강장을 가져갈 리는 없고, 무당의 일급 경공술인 제운종을 배운 상태라 굳이 세류표 따위가 필요치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져갈 물건은 뻔했다.

소환단 몇 개를 집고, 2자루 보검 중에 한 자루를 가져갔다.

‘검법도 할 줄 아나?’

자기 입으로 배운 건 태극권뿐이라고 했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 아마 패검으로 쓰려는가 보다.

“이거 안 가져가면 정말 삐치겠죠? 하하.”

그래, 안 가져가면 가슴이 아프다.

현운자는 결국 강기성형을 가져갔다.

‘거 참, 주기로 마음먹긴 했어도 살짝 아쉽네.’

나란 놈도 참 간사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꾸역꾸역 살아나려는 욕심을 고갯짓 한 번으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갈 그 길 앞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유저들과 싸워야 하고, 또 NPC들과도 싸워야 한다. 나 혼자 애써서 천하제일문파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란 건 사람의 힘만으로 성사되진 않는다. 강호처럼, 언제 어떻게 새로운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천운이라는 것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현운자는 천운이나 다름없다. 이 사람 때문에 계획이 앞당겨졌고, 이 사람 때문에 근심거리가 줄었다.

우리 소요파가 움직이지 못할 때, 외부 사람인 현운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설령 그럴 경우가 생기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무당파를 적으로 상대하는 것만은 방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요파의 친구인 그가 강해질수록 내 운신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좋게 생각해야 한다. 겨우 이 정도 아이템 때문에 쉽게 만나기 힘든, 좋은 사람을 잃는 우를 범하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니 말이다.

“그럼 이제 어쩌죠? 표행을 계속해야 하나요, 아니면 난주로 돌아갈까요?”

현운자의 질문에 꼬리를 물던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건 다음 문제고, 약속은 지키셔야죠?”

무슨 소리냐는 듯이 현운자가 날 바라본다.

“말해주셔야죠. 어떻게 놈들의 힘을 빠지게 했는지요.”

“아! 그게 그렇게 궁금했어요?”

“뭐, 궁금하다면 궁금한 거고, 알아두면 좋은 거죠. 나중에 저 혼자 저 녀석들을 만났을 때 써먹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후후, 역시 전직 장사꾼다워요. 하하.”

내가 너무 계산적이라고 약 올리는 건가?

“별로 대단한 술수를 부린 건 아니에요. 약 좀 먹였을 뿐이죠. 아시죠? 산공독이라고.”

현운자는 달랑 그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머지는 내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고목문에서 둘이 작업했을 때, 현운자가 용독술 상급 비급을 쓸 만하다면서 가져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재미 삼아 배우려는가 보다 하고만 생각했다. 용독술은 나도 전에 이미 익혀 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낌상으론 꽤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현운자도 곧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공독은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약이다. 일종의 금제(禁制)라고나 할까? 보통의 독이 절정고수한테는 먹히지 않는 반면, 무협 소설에서 산공독은 경지와는 무관하게 통하는 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공을 소모시키는 산공독의 효능이라면 충분히 그런 양상을 만들어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이 떨어진 무영신투의 움직임을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확실히 무림정의 구현단 고수들의 움직임은 무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정말로 내공이 완전히 소진된 무인들처럼 말이다.

용독술 비급을 입수했을 때부터 이런 산공독이나 미혼약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알아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머리 나쁜 사람이라도 독술이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가지는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겨우 그런 생각 하나 못해봤을까?

하지만 게임에서 무협에서처럼 보이는 효과가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을 곧 갖게 됐다. 그건 너무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그런 내 생각이 맞았다.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홈페이지에서 별로 많지도 않은 독술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강호에서 독술의 사용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다.

우선 독을 사용하기 위해선, 내가 사상검진이나 일성소를 사용할 때처럼 기본적으로 진법이나 음공 기술 같은 용독술 기술을 익혀야 한다.

용독술에는 몇 개의 등급이 존재하고, 각각의 등급마다 사용할 수 있는 독의 종류가 다르다. 하지만 용독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어떤 독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독술이라는 게 무공보다 더 비인부전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있고, 수련자가 더 적은 이유도 있다. 그 때문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독의 종류도 지극히 편협한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하오문의 독약들뿐이었고, 운남 오독문이나 사천 당문에서 사용한다는 절정급 독들은 그저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접근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독술에는 실질적으로 상당한 페널티가 존재했다. 바로, 사용할 때마다 명성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게 어느 정도인가 하면, 범위 공격용 독술은 중독된 사람이 많을수록 그만큼 더 떨어지고, 강력한 독술을 사용할수록 더 많이 떨어진다. 거기다가 독으로 인해 사람이 죽는다면 그야말로 급전직하, 딱 그 꼴이 되어버린다.

한마디로, 독공으로 천하제일고수가 될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정파인 행세할 생각은 애초에 때려치워야 되는 것이다.

물론, 적절하게 무공과 병행해서 잘 쓸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듣자하니 사천 당문의 고수들은 암기술과 독술을 적절히 병행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의 방식처럼 힘들 때만 독술을 사용한다면 강호 생활이 엄청 편할 것이다.

나라고 그네들처럼 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처음 용독술 비급을 접했을 때도 내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적절하게만 사용한다면 그렇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방법만 알고 있을 뿐이지, 독공고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이라서가 아니다. 그냥 싫었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내가 황금충의 길을 포기한 것처럼, 독공으로 천하제일 자리를 꿰찬다 해도 진정한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자구요.”

현운자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그래, 가야지.’

일어나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현실이라면 걸어온 길에 발자국이라도 남아 있겠지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우리, 어디서 왔죠?”

그렇게 현운자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강호에 지도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별 필요가 없어서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가격도 엄청 비쌌고 말이다. 보통은 관도를 따라가거나 일반 유저들에게 물어보면 해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글쎄요, 제 생각에는 저쪽으로 왔던 거 같은데……. 안서로 가려면 저쪽이지 않겠어요?”

현운자가 손가락을 들어 내가 앉았던 뒤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방향도 잊고 있었는데, 용케도 현운자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갈까요, 아니면 표행을 따라갈까요?”

내 욕심으로는 표행에 합류해 옥문관 상황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덜미 잡혀 따라온 현운자의 입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저야 조연 님 없으면 심심할 뿐이죠. 알아서 하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구요.”

어찌 내 마음을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접대용 멘트인가?

하여간 현운자가 그리 말했으니 그렇게 하고 볼 일이다. 솔직히 이대로 돌아가기엔 영 찝찝했다. 황제가 맡긴 표행에 성공한다면 뭔가 좀 색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 길로 우린 머물렀던 자리에서 안서 방향으로 이동했다.

약간 길치에 가까운 나로서는 현운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 있게 말했으니 믿어도 될 듯했다. 나중에 길이 어긋나면 괜히 믿었던 내 탓일 수도 있지만.

경공을 시전해서 달리기를 2시간쯤 했을까? 황량한 벌판밖에 없던 곳에 주변과 동화되지 않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현운자도 눈이 있으니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가까이 가면 정체를 알 수 있을 테니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괴물체의 흐릿했던 윤곽이 점점 선명해졌고, 곧 건물의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가 건물을 확인해본 우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량한 사막에 서 있던 그 물체는 놀랍게도 객잔이었다. 사막에 세워진 건물답게, 진흙으로 만들어진 토담집이었다.

강호에선 처음 보는 흙집 객잔이었다. 그것도 족히 사오십의 인원이 머물 만큼 꽤나 컸다.

‘이런 사막에, 더군다나 관도를 한참 벗어난 곳에 객잔이라니!’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객잔 이름도 요상했다.

용문객잔(龍門客棧).

뭐랄까? 개미지옥을 만난 느낌이랄까, 아니면 금광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재밌네요.”

용문객잔 앞에 선 현운자가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재미라… 전 불안하기만 한데요?”

그 말에 현운자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다는 내 말에 수긍하면서도 재밌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들어가 볼까요?”

“그러죠. 어차피 오늘은 더 이상 게임하기엔 시간도 너무 늦었으니까요. 안에 들어가서 로그아웃해야겠어요.”

하루 종일 표행을 하고, 또 싸우느라 많이 피곤했다. 목표인 안서까진 도달하지 못했지만, 시계 바늘은 이미 밤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객잔의 문짝은 나무로 만들어진 여닫이문이었다. 대체 사막 어디에서 나무를 구해왔나 신기할 따름이다.

끼이익-

기름칠이 안 된 문짝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어라? 띠리리링,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으로 정보창 하나가 떠올랐다.

[퀘스트:용문객잔

인원 제한:4인 이하 동행

주의 사항:진입 시 탈출 불가능

주의 사항:퀘스트 성공, 혹은 사망 시 탈출 가능]

“이게 뭐죠? 이런 식으로 퀘스트 발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내가 겪어본 퀘스트는 황금산장에 가입하러 갔을 때 한 번뿐이었고, 표국의 의뢰라거나 현상 수배 의뢰는 퀘스트라 보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그냥 일감 수준이랄까? 건달바왕이나 비사문천은 퀘스트가 아니라 그냥 레이드 사냥이었고 말이다. 지금처럼 대놓고 ‘나 퀘스트요’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저도 처음인걸요.”

현운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고민했다. 왜냐고? 자러 갈 시간이니 말이다.

“일단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해요. 그사이에 정보라도 좀 알아두고요. 아무래도 용문객잔이라는 이름이 심상치 않네요.”

내일 만날 시간을 정하고 우리는 같이 로그아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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