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4장. 표행 (24/62)

제24장. 표행

표국 일은 바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난주를 벗어나 사냥할 정도로 여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기에 문파에서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첫 표행을 시작하고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몇 개의 의뢰가 새로 추가되었고, 난 그 의뢰들을 받아다 표국에 새로 등록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당연히 사냥하러 갈 엄두가 생길 리 없었다.

그사이 레벨이 오른 NPC 문도는 없었지만, 표행 중에 사망한 NPC도 없었다. 소요표국은 순조롭게 커가고 있었다.

처음엔 양가죽과 목화부터 시작한 표물의 종류도 점점 수준이 높아졌다. 양가죽은 가죽 제품으로 바뀌고, 목화는 면직물로 대체되었다.

표물이 원료품에서 가공품으로 바뀐 만큼, 한번 표행에 필요한 수레 숫자는 줄었고, 의뢰비는 늘었다. 덕분에 소요표국은 사흘 만에 적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매번 표행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표국 명성이 조금씩 올랐다. 명성이 오르면 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뢰가 출현했고, 난 그 의뢰들을 받으러 꼬박꼬박 황금산장 분점에 들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좀 달랐다. 여느 때처럼 의뢰 게시판이 있는 후원 쪽으로 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 문주님,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라? 이놈이 웬일이지?”

이곳 난주분점의 NPC 총관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느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총관이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안내를 했다.

‘흠, 좋은 일인가?’

총관 집무실은 비록 낙양의 황금산장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호화로웠다. 벽면마다 진귀한 서화가 걸려 있고, 검게 옻칠한 탁자와 의자에선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의자에 앉자 어디선가 시비가 들어와 차를 쪼르륵 따르고 나간다. 그때까지도 총관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상인 집단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무림 문파와는 천양지차였다.

손을 받치고 차를 한 모금 홀짝거린 총관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차가 입맛에 맞나 모르겠습니다.”

“푸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놈은 맛을 알아서 저런 소리를 하나? 강호에선 맛을 느낄 수 없다.

총관은 내가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용건부터 이야기하시죠.”

“아, 네. 조 문주님이 바쁘신 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지체했군요. 죄송합니다.”

알면 좀 빨리빨리 시작하자.

“다름이 아니라, 좀 어려운 표행을 하나 맡아주셨으면 해서입니다. 촉견 천 필을 옥문관에 머무르고 있는 서역상단에 넘기는 일인데, 그걸 소요표국에서 해주셨으면 합니다.”

엥? 그걸 왜 우리한테 맡기려고 하지?

“음,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황금산장에도 표국이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비단이라면 운송비도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신생 표국에 일을 맡기려고 하는 거죠?”

상당히 미심쩍은 의뢰였다.

“지금 이 일을 맡겠다는 곳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가욕관을 넘어서는 표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곳은 완전 무법천지 상태랍니다. 조그만 상단부터 본장처럼 큰 상단까지, 최근 몇 달간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 실정인지라 본산장의 중원표국마저도 가욕관을 넘는 의뢰는 처음부터 받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시 사황성이 문제였다. 그런데 얼마나 악랄하게 털어먹었으면 총관이 우리같이 허접스런 표국한테까지 달라붙는 거야?

“그럼 비단 안 팔면 그만 아닌가요?”

“대진국에 선물로 보내는 물건이라서 말입니다. 조정의 의뢰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요. 조 문주님! 지금 중원에선 이번 표행을 맡겠다는 곳이 없답니다. 소요표국마저 외면한다면 황금산장은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제발 이번 의뢰를 받아주세요!”

잘하면 바짓가랑이 잡고 애원하겠네. 망하든 말든, 그거야 당신 사정이지.

“일단 조건이나 봅시다.”

그러자 눈앞에 의뢰 게시판에서처럼 투명한 화면에 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뢰자:황금상단

목적지:감숙성 옥문관 연래객점

표물:비단 1천 필(20수레)

기한:한 달

의뢰비:2백만 냥

난이도:일급]

총관이 애걸조로 이야기한 것과는 달리 의뢰비가 많은 건 아니었다. 억 단위 돈을 굴리던 내게 저 2백만 냥의 의뢰비는 떡고물 정도도 안 됐다.

의뢰비는 통상적으로 표물 가치의 1할로 책정된다. 거리와 표행의 어려움, 표국의 신뢰도 등 다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하지만, 보통은 그 선에서 매겨진다. 그렇다면 이 의뢰를 실패한다면 못해도 2천만 냥의 배상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표국의 생명은 신용. 이제 갓 사업을 시작한 신생 표국에 있어서 의뢰 실패란 곧 재기 불능이란 말과 진배없었다.

‘흠, 일급이라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소린데 말이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잠깐 생각이 필요했다.

일단, 여태 해왔던 대로 표국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굳이 무리하게 이 의뢰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이번 의뢰를 수락하면 계획했던 시간을 상당히 단축시킬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표국을 설립한 이유는 NPC들의 실력 증강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표행은 아주 기초적인 배달 업무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표물의 수준이 떨어지니, 표물을 노리고 달려드는 도적단들도 똑같이 수준 낮은 놈들뿐이었다. 결국 NPC 문도들이 도적단을 잡아서 레벨 업한다는 계획은 지금 상태로는 무리였다.

아마 시간이 지나서 표국 명성이 오르면, 의뢰 수준도 점차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만큼 표물을 노리는 강도들도 강해질 것이고, NPC들도 적절히 커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게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일까? 확실히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란 없었다.

그럼 시간을 단축한다는 명분과, 이번 표행의 위험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것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은 사황성의 약조를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쪽도 아직은 전쟁을 하고 싶진 않을 테니 말이다.

“받아들이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의뢰만 성공한다면, 낙양 본장에 알려서 최대한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조치해드리겠습니다.”

총관은 과장된 표정으로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휴…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의뢰를 받아들고 문파로 돌아왔지만, 생각해보니 또 골치가 아파진다. 문주는 표행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광 이 망할 놈들은 불러봤자 안 올 게 뻔하고, 이번엔 간만에 소봉이 얼굴이나 봐야겠다.”

부려먹을 사람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소봉이한테 전서구를 보냈다.

이번 표행은 나도 따라가 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사황성 애들 분위기는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것보다 한 번쯤 직접 눈으로 봐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현운자한테 사흘쯤 있다가 보자고 했는데 벌써 오늘이 그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번 표행이 며칠이나 걸릴지 몰라서 일단 현운자에게도 전서구를 띄웠다. 생각 있으면 같이 놀러가자고 말이다. 아직 나도 가욕관 바깥엔 가본 적이 없으니, 놀러간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현운자가 먼저 도착했고, 소봉이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표국 시스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약간의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현운자야 어차피 나랑 같이 소봉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지만, 소봉이한테는 이광에게 들은 대로 세세한 부분까지 일러줘야 했다.

“자, 그럼 소봉 표두님, 출발합시다!”

내가 만일 정말 표사였다면, 첫 표행이란 설렘과 놀라움이 가득한 그런 꿈같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표사가 아닐지라도, 동료들과 함께 그 먼 옥문관까지 유유자적 도보 여행을 간다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 심심해 죽겠다.”

세상이 온통 누렇다. 누가 그랬던가? 사막은 하늘 빼곤 다 누렇다고. 그거 다 헛소리다. 감숙의 사막은 하늘마저도 누렇다. 흙먼지 잔뜩 머금은 바람에 하늘마저도 그 색을 잃은 곳이 감숙의 사막이다.

“아, 심심해라. 이광 놈들 말대로라면 서너 시간에 한 번씩은 습격이 있어야 하는데, 그놈들은 다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는 거야!”

심심해서 입을 놀려 보지만 받아주는 이가 없다. 떠드는 것도 일이었다. 현운자나 소봉이는 진즉에 포기하고 묵묵히 발을 옮길 뿐이다. NPC 문도들 데리고 노는 것도 재미없고 지겨웠다. 걔들은 총관만큼 머리가 좋지 않았다.

표행은 별 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첫날은 무위(武威)까지 진행한 뒤 모두 함께 접속을 종료했고, 이튿날은 장액(張掖)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오늘로써 표행은 사흘째로 접어들었다. 오늘 목표는 국경 관문이라는 가욕관이었다.

“연이 형!”

앞서 가던 소봉이가 갑자기 날 불렀다. 녀석도 심심했나?

“왜! 너도 심심해? 첫사랑 이야기라도 해줄까?”

“그건 벌써 백삼십사 번은 들었어요! 그게 아니라, 저 앞에 뭐 안 보이세요?”

소봉이가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욱한 모래바람 사이로 희끗희끗 뭔가가 보인다. 한참을 쳐다보니 대충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몇 그루가 뱅 둘러싸고 있는 작은 호수였다. 호수 주위엔 사람이 사는 듯, 집도 몇 채 세워져 있었다.

“오아시스 같은데… 왜, 잠깐 쉬었다 갈까?”

“그래요. 사막 길 걷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옆에서 걸어가던 현운자가 먼저 대답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아마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음, 난 죄 없다. 같이 갈 거냐고 물어봤을 뿐이지, 가자고 강요한 적은 없으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아직 오아시스에 들른 적은 없었다. 보통은 그냥 지나쳐 버렸지만, 이번까지 그러기엔 다들 너무 지쳐 있었다. 갈증과 피곤만이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오아시스는 가욕관으로 향하는 관도와는 조금 어긋난 방향에 있었다. 소봉이가 관도를 벗어나 그쪽으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비단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관도가 아닌 모랫길이라 수레바퀴가 푹푹 땅으로 파고들었고, 그만큼 속도도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거리가 그리 먼 것도 아니어서 별생각 없이 이동했다. 그런데 오아시스하고 거리가 대충 2백여 장쯤 남았을 때였다.

뿌우우우-

갑자기 표행 선두에 있던 NPC 표사가 뿔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뭐지?”

며칠 동안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연이 형! 마적 떼예요, 마적 떼!”

소봉이가 대열 앞에서 튀어나와 다급히 외쳤다.

“야, 그럼 일러준 대로 전투 대형으로 얼른 바꿔! 시간 없다. 빨리 해!”

이 상태로 전투가 벌어지면 표물에 손상이 갈 수도 있었다.

소봉이가 NPC 표사들에게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리자, 표사들은 또 쟁자수들에게 뭐라고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쟁자수들이 바삐 움직이면서 수레들을 둥글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적단은 다들 말에 올라탄 상태였고, 곧 우리 쪽을 향해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말까지 탄 기세로 봐서는, 분명 이류급은 넘어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놈들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서 이젠 채 50장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바퀴가 푹푹 빠지는 모랫바닥 때문에 아직 표차들은 방어진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운자 님, 아무래도 힘 좀 써야 할 것 같네요. 죽이지는 말구요. 문도들 밥이니까요.”

“심심하던 차에 오히려 잘됐네요. 간만에 몸 좀 풀죠.”

현운자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뛰쳐나가버렸고, 죽이지는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끼럇!”

두두두둥-

거리가 가까워지자 도적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들려왔다. 놈들과 거리가 줄어드니 그제야 도적 무리의 숫자가 가늠 잡힌다. 족히 50은 될 정도로 규모가 큰 마적단이었다.

“먼저 뚫고 갈게요!”

허허. 저 아저씨, 너무 무모한 거 아닌가?

현운자는 금세 돌격해오던 마적단 무리 앞에 도달했고,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허공에 부적을 한 장 내던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공중에 떠 있던 부적이 픽, 하고 불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현운자의 신형은 어느새 마적단 중심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히히히잉-

갑자기 뛰어든 사람에 놀란 것인가, 아니면 부적의 영향 탓일까? 돌격해오던 말들 중 선두에 섰던 몇 놈이 울음소리와 함께 앞발을 쳐들었다.

선두의 뒤만 보고 따르던 말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애써 피해보려고 했지만, 달려오던 힘을 주체할 수 없어 그대로 앞 열을 처박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자 당연하게도 인마들의 연쇄 충돌이 시작됐다.

“어이쿠!”

“으아악!”

쿠당탕탕!

퍼퍽!

히이잉!

마치 거대한 해일이 덮치기라도 한 듯 앞에서부터 대열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앞발을 치켜든 말에서부터 시작된 파동은 눈 한 번 깜박일 시간 동안에 마적단 대열 전부를 붕괴시켜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에 처박힌 말들이 일어나려고 바동거리는 가운데, 곳곳에선 낙마한 마적들의 고함 소리와 신음 소리가 아수라장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거, 이거… 애들 죽이지 말라니까요!”

아직 살아남은 말들을 때려죽이고 있는 현운자에게 소리쳤다.

“저도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어요!”

현운자도 마주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아직 죽은 놈들은 없잖아요! 조연 님도 말 때려잡기나 해요!”

현운자가 외친 대로, 다행히 아직 죽은 놈들은 없었다.

‘그래, 현운자가 잘하고 있는 거겠지. 아무래도 말 탄 녀석들을 NPC들만으로 감당하는 것은 무리니까.’

50중 연쇄 추돌 사고가 벌어진 사이, 표차들은 계획대로 둥근 방어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무공이 없는 쟁자수들은 뺑 둘러쳐진 수레 안쪽에 몸을 숨기고 있고, 표사들은 그 바깥에 서서 싸움이 벌어지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소봉아! 표사들만 이리 보내!”

전투 명령을 받은 표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동안, 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마적들 사이를 발 바쁘게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팡! 팡! 퍼퍽!

지나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마적들에게 주먹을 한 대씩 날려 주었다. 안 아프게!

지금 우리 표사들은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고, 마적단은 오십이나 된다. 표사들을 지키려면 현운자와 내가 몸빵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열다섯 정도나 날 인식하게 만들었을까? 그때서야 NPC 표사들이 전장에 들이닥쳤다.

“현운자 님! 뭉칩시다!”

현운자도 나만큼이나 도적 떼를 붙여 놓은 상태였다.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현운자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둘이 등을 맞대고 정신없이 쏟아지는 도적들의 칼질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채쟁! 챙챙!

픽! 쉬익-

눈앞에선 날카로운 칼들이 춤을 추며 꽂아 내리고 있었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금강저를 쥔 주먹이 마치 권막이라도 된 듯 철통같은 방어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아시스에 가서 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노는 것도 재밌네요! 하하.”

등 뒤에서 현운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부턴 오아시스 만날 때마다 둘러볼까요? 그나저나 아까 부적은 뭐예요? 처음 보던 거던데요?”

“조잡한 거예요. 투명막을 잠깐 만들어주는 건데, 공격용이라기보다는 도망갈 때 더 요긴한 편이죠.”

“허허. 조잡하기는요! 효과가 보통이 아닌데요?”

잠깐 대화하는 동안에도 표사들과 마적들의 흉험한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가 붙잡아두고 있는 마적이 서른쯤 됐고, 소봉이가 또 열 정도를 맡고 있었다.

남은 마적은 겨우 열. 놈들이 일류급이 아닌 한 표사 스물을 감당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적들이 하나 둘 뜨거운 사막 모래에 차례차례 몸을 뉘였다. 처음엔 한둘씩 쓰러지다 곧 꼬꾸라지는 것도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뭐 이리 빨리 끝난다냐? 몸도 안 풀렸는데.”

“싱거워요!”

“그래도 지겨움은 좀 가시네요.”

각자 한마디씩 던진다. 전투가 겨우 5분도 채 진행되지 않았지만, 현운자 말대로 심심함은 좀 가셨다.

“갈 길 머니까, 얼른얼른 정리하고 떠납시다.”

이광이 들려주길, 관도를 따라 길을 가다 보면 저절로 도적 떼가 출현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가욕관을 향해 뻗은 관도 위에서 그 어떤 도적 떼도 만나볼 수 없었다. 내 생각으론 황금상단이 의뢰주인 탓이거나, 조정의 물건이라서 도적들이 지레 겁을 먹고 달려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놈들이 알아서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우린 한 번 겪어본 게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전부 마적단 소굴인 건 아니었지만, 그중에 절반쯤은 그러했다. 가욕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아시스가 눈에 보이기만 하면 족족 찾아가서 마적단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결국엔 표행이 사흘째 되는 그날, 소요표국 설립 이래 처음으로 NPC 무사들의 레벨 업을 이룰 수 있었다.

겨우 다섯이 1레벨 업을 했을 뿐이지만, 내가 10레벨을 올린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꿈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표행 나흘째 되는 날은 가욕관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부터 시작됐다. 다행히 조정의 의뢰품이어서인지 별다른 제재 없이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통행료도 내지 않았다.

순탄한 시작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긴장해야 했다. 여기서부턴 말 그대로 관외(關外). 때론 명나라 영역이기도 했지만, 아닐 때도 많았다. 그리고 이광의 말대로라면 게임 강호에서 가욕관 바깥은 명제국의 영역이 아니라고 봐야 했다. 즉, 이곳은 무법자들의 소굴, 마적들이 주인인 세계였다. 그리고 무림 서열 2위, 사파의 거두인 사황성의 영역이기도 했다.

그런 세상에서 값비싼 비단을 바리바리 싣고 가는 표행이란,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는 소리나 진배없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 바닥이 명나라 땅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가욕관이 채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마적단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놈들도 우리가 반가웠겠지만, 우리도 녀석들이 고마웠다. 애써 오아시스 따윌 찾아가지 않아도 됐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번 마적단은 여태 만났던 오아시스 패거리들보다 실력이 나았다. 일류는 아니었지만, 이류 상급의 수준은 돼 보였다. NPC 표사들 밥으론 딱 좋은 상태랄까?

알아서 찾아주는 밥들 덕분에 표행길이 조금은 즐거워졌다. 그런데 즐거워도 너무 자주 즐거웠다. 오늘 목표는 안서(安西)로, 어제 이동했던 거리보다 오히려 짧았다. 그런데도 한나절이 지나도록 목표했던 거리의 채 절반도 이동할 수 없었다. 마적들의 습격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이거 참, 좋다고 해야 되나, 짜증난다고 해야 되나?”

벌써 12번째 습격이었다. 한 10분 이동하면 전투가 벌어지고, 또 20분가량 이동하면 마적단과 부딪쳤다.

“그러게요. 그래도 심심한 것보단 낫잖아요? 하하.”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한차례 또 시끌벅적한 전투를 치른 쟁자수들이 수레를 움직여 다시 원래 대열로 맞추고 있었고, 소봉이는 마적들이 흘린 아이템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재미없는 일에 끌려온 현운자에게도 미안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소봉이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봉아, 미안해! 이번 일 끝나면 당분간은 안 괴롭히마!”

그 당분간이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인데요,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고.

전투 정리가 끝나자, 다시 표차들이 뿌연 황사 바람을 맞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1분이나 이동했을까?

“연이 형! 또 오는데요?”

소봉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어라? 이번엔 빨라도 너무 빠른걸?”

소봉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표차들을 세우고 다시 방어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현운자와 나도 자동적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라? 그런데 이번엔 마적이 아니다. 붉은 아이디가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일반 유저. 사황성 인물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먼저 건넨 건 그쪽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새우 님.”

전성기 시절의 이광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흉악한 면상의 소유자였다. 귀여운 아이디와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얼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새우라는 사람은 겨우 인사만 던졌을 뿐, 그 이후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음? 왜 이렇게 조용하나… 아차차! 아직 우리가 소요파라는 것도 모르는 거 아냐?’

마음을 가다듬고 소개했다.

“새우 님, 우린 난주 소요파 사람들입니다. 상어 님이나 가물치 님한테 이야기 들은 적 없나요?”

그러자 새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소요파요? 황금룡 조연 님의 그 소요파요?”

“네, 그 소요파 맞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조연이고요. 다시 인사드릴게요. 난주 소요파 문주 조연이라고 합니다.”

주먹을 맞잡고 정중히 포권으로 인사했다. 그러자 새우도 당황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를 해왔다.

“네, 네, 저는 사황성의 새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조연 님.”

깍듯이 인사하는 새우를 보고 있자니, 어째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이제 갓 열서너 살 먹은 어린애를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그나저나 먼저 이야기할 것 같지가 않다. 결국 화제는 내가 먼저 끌고 가야 했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상어 님한테 이야기 들은 게 없나요?”

새우가 내 질문에 머뭇머뭇하더니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어 형한테 이야기 듣긴 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고요. 여기는 그냥… 그냥…….”

“그냥 상단인 줄 알고 공격하러 오셨단 말씀인가요?”

“네…….”

새우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겨우 대답했다.

‘하하. 정말 애인가?’

전신에 마기가 철철 넘쳐흐르는 흉인을 보고 어찌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이디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꼭 어린애를 보는 것 같았다.

달리 소요파에 목적이 있어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자, 다들 잠시나마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다시 표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우는 상황이 그러자 인사를 하고 가버리려 했다. 하지만 난 그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잠시 아동 유괴범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새우는 같이 가자는 내 말에 오히려 기쁘다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마치 기다리고 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말이다.

관도를 걸으며 몇 마디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처음엔 벙어리처럼 꼭 다문 입이었지만, 말이 오가면서 새우도 차츰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빗장을 풀기가 어려웠지, 한번 열린 입에선 쉼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요,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꼭 좀비 영화 보는 것 같았다니까요? 막 다리에 붙고, 팔에 붙고…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무서운 데다가 멋있기까지 한 좀비라…….’

새우는 신강의 어느 던전에서 만난 수백의 좀비 떼와의 전투를 설명하고 있었다. 말로는 그 분위기를 전하기가 힘들었는지, 손발까지 허공에다 허우적대면서 설명하려 애썼다.

‘얘하고 놀아주는 사람이 없나?’

하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원체 사람이 없는 동네인 데다가 상어나 가물치 같은 사람들한텐 말 한마디 제대로 하기도 힘들 게 뻔하니 말이다. 쬐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새우가 합류하고 나서 대략 30분 정도 지났나 보다. 그사이에도 마적단은 줄기차게 우릴 찾아왔고, 표사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 슬슬 작업을 걸 만한 시간이 됐다.

“바쁘지만 않다면 언제 상어 님 얼굴 보러 사황성에 한번 놀러가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놀러오세요! 형들이 좀 바쁘긴 하지만, 조연 님이 오신다면 좋다고 할 거예요.”

“근데 가는 길을 까먹었거든요. 하하. 한 번 듣긴 들었는데 제가 머리가 좀 안 좋다 보니…….”

“그러세요? 음… 그럼 좀 어렵겠네요. 길이야 다시 알려 드릴 수 있지만, 말만 듣고 찾기는 어렵거든요.”

“그래도 다시 한 번 일러주세요. 헤매다 보면 길이야 찾아갈 수 있겠죠. 그때 상어 님 말로는 대충 요 근처라고 하신 거 같던데…….”

“음, 글쎄요. 근처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잘 들으세요! 돈황 남쪽 성문에서 쭉 올라가시다 보면 큰 건물이 하나 있거든요? 그 건물 오른쪽 뒤로 가면 벽이 무너져서 구멍이 하나 나 있어요. 그리고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가면 또 큰 건물이 있어요. 천장이 다 무너져 가지고 잘못 보면 입구가 안 보이는데, 잘 보면 입구가 보여요. 거기로 들어가면 우리 사황성이에요.”

‘다 무너진 건물에 그렇게 큰 문파가 들어설 수 있나? 어쨌건 안 까먹게 잘 기억해둬야겠다.’

그러고 나서도 살살 거짓말을 쳐 가며 알짜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실제 인원이 어느 정도고, 담경이나 십이전사라고 불리는 인물들의 무공 실력이 어떠한지. 세세한 능력까지야 알 수 없지만, 우연히 입수한 정보치고는 믿어볼 만했다.

담경의 실력은 얘들 서열 2위인 상어와 서열 3위인 가물치가 합세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고, 상어와 가물치 수준은 얼추 각룡이 형보다 조금 윗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 어쨌건 그 셋은 확실한 절정급이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신기한 건, 새우가 무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강호를 플레이하면서 처음 만나는 주술사였다.

“와우! 주술사라면 마법도 쓸 수 있는 거예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단 놀라는 척은 해줬다. 애들은 띄워주면 알아서 다 말해주니까.

“그럼요! 속도도 빨라지게 할 수 있고요, 공격력도 올라가게 할 수 있고요, 체력도 빨리 차게 할 수 있어요!”

음, 음… 그게 마법이냐? 마법이라면 자고로…….

“얼리고, 태우고 그런 건 못해요?”

“무협 게임에서 그런 게 어딨어요!”

그렇지, 여긴 무협 게임이었지. 그런데 그런 전투 보조 기술만 가지고 어떻게 상단을 털어먹을 생각을 했을까?

살짝 도발하자 새우가 발끈해서는 다음에 마적단이 나오면 자기한테 맡겨 보라고 했다. 어떤 기술을 선보일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우리 표사들이 먹을 밥인데 전부 다 줄 수는 없었다. 한 10마리만 떼어주기로 합의를 봤다.

“잘 보세요! 아마 이런 건 처음 볼걸요!”

마적단이 모습을 드러내자 새우가 쌩긋 웃으며 소리쳤다. 얘 입장에선 나름대로 웃는다고 지은 표정이겠지만, 지 얼굴 지가 좀 봤으면 싶다.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찢어진 입으로 드라큘라처럼 튀어나온 송곳니가 보인다. 그렇다고 애한테 차마 면상 치우라고 말할 수도 없고…….

새우가 뛰어가고, 현운자와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가던 새우가 부적을 던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다.

히이히잉~

역시 봤던 장면이다. 우당탕 소리를 내면서 마적단이 쓰러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현운자가 날 보더니 히죽 웃는다. 하는 짓이 귀엽다는 뜻일까? 어쨌든 사파인도 정파인 무당파와 같은 부적술을 쓸 수 있다는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럼 또 다른 기술은 뭐가 있으려나?

현운자와 난 지겹도록 익숙해진 작업을 시작하면서 내심 기대했다. 어쩌면 현운자가 더 궁금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못 도망가게 말들을 먼저 다 때려잡고, 약속한 대로 마적들 10마리만 남겨 뒀다. 소봉이도 계획을 알고 있어서 NPC 무사들을 새우가 맡은 쪽으론 보내지 않았다.

이제 본편이 시작되려나 보다. 새우가 품 안에서 이상한 작대기 여러 개를 꺼내 뿌리면서 외쳤다.

“무계진(無界陣)!”

파파파팍-

공중으로 높이 솟구친 젓가락들이 곧 방향을 바꿔 땅바닥에 박혀 갔다. 널따랗게 박힌 작대기는 마치 마적들을 포위하는 형세를 만들고 있었다.

“마환진(魔幻陣)!”

그리고 새우의 손이 재차 품속을 들락거리더니 새로운 진법을 펼쳐 냈다. 이번에 뿌려진 작대기들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마적들을 빙 둘러싸는 방원진을 만들어냈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진세가 다 구축된 거 같은데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아마도 진법 때문인지 마적들이 포위된 작대기 안에서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사람들처럼.

그때, 새우가 또 작대기를 꺼내들고는 이번엔 날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부터 볼거리가 시작된다는 걸 알려 주듯이.

“이건곤(離乾坤)!”

다시 작대기들이 땅바닥에 박혔고, 그제야 우린 진법의 효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서로 뒤엉킨 마적들이 갑자기 바로 옆에 있는 동료를 향해 칼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당파에도 저런 거 있어요? 지들끼리 싸우네요.”

“글쎄요, 진법은 저도 처음 보는걸요.”

마적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기도 전에 이미 우리 쪽은 정리가 다 끝난 상태였다. 투기장 관람석에 앉아 검투사들 혈투를 구경하듯이 놈들이 벌이는 꼬라지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흥미가 생겼다 뿐이지, 사실은 마적들 무공 실력이 뭐 볼 거 있겠는가. 썩 재밌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류급 NPC들의 전투라 빨리 끝나지도 않았다.

어쨌든 간에 결과는 나왔다. 한 마적이 동료의 가슴팍에 칼을 쑤셔 넣고 토너먼트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혼자 남은 저 녀석은 어찌 해결하려나?

“능파(凌波)! 감격(感格)!”

새우가 이번엔 젓가락이 아닌 부적 2장을 꺼내들고는 자기 가슴팍에다 붙였다. 그리고는 홀로 남은 마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지가지 하네요.”

현운자가 새우의 귀에 들릴세라 조그맣게 말했다.

새우는 주술을 쓰고도 체력이 아마 바닥일 게 뻔한 이류 마적을 상대로 한참이나 드잡이를 벌였다. 무공이라 보기 어려운 몸놀림, 주나 마나 한 타격. 왜 사황성 패거리와 같이 움직이지 않고 혼자서 상단이나 털어먹고 있는지 알 만했다.

“어때요? 멋있었죠?”

이류 마적을 상대로 혈투를 끝내고 돌아온 새우가 숨을 헐떡이면서 내게 물었다. 꼭 심부름 갔다 와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 같다.

“그렇다고 치죠.”

“쳇! 그런 말이 어딨어요? 멋있으면 멋있는 거지!”

몇 번 투닥거리다가 마지못해 인정을 해줬다. 그러자 의기양양해서 방방 뛰는 모습이 정말 애 같았다.

그럼 몸값도 받았겠다, 이제 그만 애는 집으로 돌려보낼 시간이다.

“새우 님, 오늘은 너무 늦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또 뵙기로 하고 여기서 헤어집시다. 안서까지 가야 하거든요.”

생각 밖의 말이었는지, 싱글벙글하던 새우 입가에서 웃음이 싹 사라진다.

“같이 안서까지 가면 안 돼요?”

새우가 시무룩해져서 물었다.

정말 같이 놀아줄 사람이 없나 보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갈 길이 바빴으니까.

“그럼 언제 놀러오실 건데요?”

“문파가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요. 아, 그리고 상어 님한테 이야기해두세요. 조연이가 왔다 갔다고요. 약조는 꼭 지키시라고.”

“알았어요.”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새우도 아는지 안색이 굳어 있었다.

‘언젠간 보겠지. 좋게든, 나쁘게든.’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 갈 길로 찢어졌다. 우리는 서쪽으로, 새우는 동쪽으로 새 먹잇감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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