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2장. 비사문천 (22/62)

제22장. 비사문천

“후우…….”

건달바왕이 쓰러질 때는 막상 좋았지만, 곧 기뻐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광이야 죽을 걸 이미 각오했기에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둘은 그렇지 않았다.

랭커들은 죽음에 민감하다. 죽음을 각오하고 그 무모한 강신술을 사용했다지만, 아무리 사람 좋은 현운자라도 기분이 좋을 리가 있을까?

일협에겐 더욱 미안하다. 분명 내가 아니라 파도를 믿고 왔을 텐데… 이광이 어처구니없이 먼저 사망해버리는 통에 일협의 사망까지 이어진 격이었다.

도대체 이광은 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일까?

“조연 님, 일단 아이템부터 수거하죠.”

잠시 숨을 고른 파도가 내게 말했다.

“네, 그럽시다. 일단 아이템부터 걷읍시다.”

거대 야차는 아무런 아이템도 주지 않았지만, 맥없이 죽어버린 사공척은 의외로 아이템을 주었다. 들었던 대로 환생단과 최절정 비급 한 권,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혈정(血精)이었다.

건달바왕은 레이드 몬스터답게 떨어뜨린 아이템 숫자가 5개나 됐다. 환혼신단 10알, 환생단 2알, 최절정 비급, 그리고 무기 하나, 마지막으로 금강멸정(金剛滅定)이었다.

파신교주가 준 최절정 비급은 마인들이나 쓰는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주술이었다. 상점에 내다 팔면 꽤 많은 돈을 받을 순 있겠지만, 무공서로서의 가치는 없었다.

반면, 건달바왕이 준 비급과 아이템은 파신교주의 것과 급이 달랐다.

[보리금강저(菩提金剛杵)

불법승 최강의 무기.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 낼 최고의 동반자.

계열:권(拳)

공격력:3,000

방어력:2,000

항마력:10,000

착용 효과:지능 +20

사용 제한:불가(佛家)

명성 50,000]

[달마 세수경(達磨 洗髓經)

달마가 역근경과 함께 전한 최고의 내공심법. 소림사에선 실전됐다고 전해진다.

12성 대성하면 최절정의 경지에 오른다.

수련 제한:불가(佛家)

명성 50,000

지능 100

근성 100

특수 효과:모든 불가 계열 무공의 수련 속도가 5할 증진된다.

특수 효과:사망 시 세수경에 한해 숙련도가 떨어지지 않는다.]

보리금강저는 신기하게 무기인데도 방어력과 항마력이라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항마력은 분명 마교 인물이나 마물을 상대할 때 적용되는 옵션일 것이다. 하지만 1만이라는 큰 수치가 붙어 있는데도 내겐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것보단 방어력 2천이 더 크게 보였다.

강호라는 게임은 공격력보다는 회피력과 방어력이 더 중요시된다. 무공의 경지를 말할 때도 회피를 중점으로 두지, 공격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방어력 2천이라는 수치는 공격력 3천보다 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세수경의 경우는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다만, 12성 대성에 최절정의 경지에 오른다는 문구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천리종무영의 경우, 분명히 비급 설명에 초절정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 세수경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천리종무영을 익힌다고 해서 초절정의 경지가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난 반야심경을 익혀서 절정의 경지가 됐다. 그렇다면 절정급 이상의 경지는 내공심법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공격기나 잡기 무공 비급에 표현되는 최절정이니 초절정이니 하는 것은 그저 무공의 급수를 표현하는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단 말이니, 어쩐지 일리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 내 반야신공은 아직도 1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중인데, 저 최절정 비급인 세수경을 어느 세월에 12성 대성할 것인가? 혹여 초절정 내공심법이라도 나온다면, 그건 또 어느 세월에 대성해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강호 개발자들은 이 게임을 1백 년은 해야 초절정의 경지에 이를 거라고 설정해뒀단 말인가?

“조연 님?”

파도가 잡념에서 날 깨웠다.

“네?”

“아이템 분배 어떻게 할까요?”

그래, 전쟁이 끝났으면 전리품을 나눠야지.

‘음… 일협 몫이야 파도가 알아서 챙길 테고, 이광이야 내 맘대로 하면 되는데…….’

문제는 현운자다. 랭킹 2위의 사망에 적합한 몫이 있을까?

“흠… 일협 님 몫은 파도 님이 알아서 챙기시면 될 테고, 이광이랑 제 몫은 애초 말한 대로 환생단이면 만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운자 님 몫이네요. 우선은 일단 확실한 몫부터 나눠보죠.”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현운자 님이 다시 여기까지 오시려면 하루는 걸릴 테니, 대략이나마 아이템을 정해두는 게 낫겠죠. 혹 나중에 현운자 님이 다른 거 원하시면, 그때 다시 조정하도록 하고요.”

환생단 3알은 우리 몫으로 떨어졌고, 파도는 건달바왕에게서 나온 보리금강저와 세수경을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파도가 불가 계열 무공을 익혔다는 건 신안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이 당연하게 생각됐다.

그런데 파도가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고를지, 초코 아이스크림을 고를지 하는 행복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획득한 아이템 중에서 저 두 아이템이 가장 좋은 것. 일단 둘 중 하나는 사망한 현운자에게 양보하는 게 정상인데, 그가 자리에 없으니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현운자가 나중에 질 떨어지는 물건을 넘겼다고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사실, 현운자는 두 아이템 다 필요 없을 거라고 말해줄까? 아니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필요 없으면 팔아버리면 되니까.’

“이거, 어느 걸 선택해야 될지……. 하하! 그래도 역시 무기보다는 비급이 낫겠죠?”

파도가 장고 끝에 세수경을 취했다.

“그럼 금강저는 현운자 님 몫으로 해도 되나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일협이까지 큰 거 챙기면 너무 욕먹을 짓 같네요. 대신 환혼신단은 일협이한테 넘기죠.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뭐,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저기 사공척이 준 비급도 일협 님한테 드리죠. 그래야 얼추 세 분이 균형이 맞을 것 같으니까요.”

파도는 흔쾌히 승낙했다. 족히 수천만 냥은 할 비급이니 일협도 사망의 대가를 톡톡히 받은 셈이다. 더구나 환혼신단은 못해도 한 알에 1천만 냥의 가치는 있었다. 아이템 배분에서 섭섭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알 수 없는 아이템인 혈정과 금강멸정뿐이었다.

요걸 어찌 해결할까 내심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파도가 선선히 물러섰다.

“이건 그냥 조연 님 가지세요.”

“네?”

“하하,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당연한 거죠. 조연 님이 비급은 포기한다고 미리 말해서 제 욕심으로 좋은 아이템만 쏙 빼먹었지만, 사실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조연 님이 제일 고생하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 없을 거예요. 환혼신단과 창룡음 준비에, 이광 님들도 데려오시고, 준비하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조연 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제의했다면, 전 건달바왕 잡을 생각은 절대 못했을 겁니다. 서버 초기에 조연 님이 보여 주셨던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기꺼이 함께한 겁니다. 벽력수 경매는 나중에 좀 당한 느낌이 들었지만요. 하하. 어쨌든 조연 님이 이번 파티의 대장이시니까, 저 알 수 없는 아이템들은 가지고 가세요. 저걸로 또 다른 재밌는 이야기 만들어 오시면 기꺼이 참가해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뭐, 한두 번 죽는 걸로 세상 뒤집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처럼 재밌기만 하면 됩니다. 하하!”

제법 호쾌하게 파도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 양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날 뭘로 보고! 내가 능력이 있긴 하나,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란 말이다.

“그럼 이젠 어쩌실 거예요? 다시 건달바왕 잡으실 건가요?”

파도의 말 속에서 다시 한 번 건달바왕을 잡고 싶은 열망이 느껴졌다.

“글쎄요. 한 번 더 잡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문도원들하고 약속해둔 시간도 있고, 좀 힘들 것 같네요. 나중에 사망자 없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때나 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이 정도 소득이면 만족합니다. 그런데 바로 난주로 가실 건가요?”

“네, 그래야 될 것 같네요. 현운자 님만 만나면 곧바로 올라가야 될 것 같아요.”

“그럼 다음에 또 낙양에 들르시면 연락주세요.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파도가 포권을 해왔다. 나도 마주 인사했다.

인사를 마친 파도가 친구 등록 신청을 해왔고, 난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한동안 고난을 같이했던 파도는 잠깐 엷은 미소를 보여 주고 이내 교주 방을 나가버렸다.

“후우… 갈 사람은 갔고, 이제 좀 돌아다녀 볼 차례인가.”

파도는 이곳엔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냥 가버렸지만, 내 판단으론 우린 아직 파신묘의 진실 언저리에도 못 가봤다. 파신묘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교주 방에서 시작될 것이었다.

교주가 처음 앉아 있던 태사의 뒤쪽에 역시나 짐작대로 진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아이템이 하나 흘려져 있었다. 교주의 일기처럼 보이는 작은 책자였다.

<이미 늦었다. 굴러가는 바위를 내 미약한 힘으로 어찌 막을 수 있을까.

비사문천을 섬긴 지 삼십 년. 내가 왜 갑자기 그런 불측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 내가 왜 그렇게나 많은 양민들을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일까? 산속의 도관을 버리고 어찌 지하로 숨어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아직,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을 때 기록을 남긴다. 연자여!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천마의 희생양일 뿐이다. 내 번뇌, 내 파멸은 모두 천마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천마의 꼬임에 빠져 비사문천을 석상에 결박하고, 결계를 구축해 비사문천의 권속인 야차들을 막고, 원귀를 불러내 인간들의 출입을 막은 것 모두 천마의 계략이다.

내가 천마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안타깝지도 기쁘지도 않다. 다만, 지금의 내 행동이 내 의지가 아님을 단 한 명이라도 알아주는 이가 있길 바랄 뿐이다.

비사문천이 결박된 석상은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젖히면 통로가 열린다. 석상 앞 제단에 내 품 안에 있던 혈정을 놓으면 천계의 신장이 악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다.

-현현진인 사공척->

왠지 너무 뻔뻔하다는 느낌이 드는 일기장이었다. 사공척 이놈 말대로라면 1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살인 교사했다는 것인데, 아무리 자기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도 닦는 놈이라면 진즉에 대들보에 머리 박고 자살이라도 했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3층의 야차들이 사신교 놈들이 소환한 애들이 아니라 비사문천을 구하러 온 착한(?) 녀석들이라는 건 조금 신기하다. 그러고 보니 유독 3층의 야차들은 가까이 가도 선제공격을 잘 안 했는데, 이 일기에 적힌 대로인가?

‘그럼 비사문천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볼까?’

사공척의 말대로라면 석상에 감금된 상태라고 하니 별로 위험할 것 같지 않았다.

일기에 적힌 대로 의자를 조금 뒤로 잡아당기자, 스르륵 소리가 나면서 돌바닥이 좌우로 벌어지고 시커먼 입을 드러냈다.

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계단은 매우 좁았다. 나선형으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1분쯤이나 내려갔을까? 드디어 최종 보스 비사문천의 방에 이를 수 있었다.

석상의 크기는 건달바왕만큼이나 컸다. 거의 3장은 됐다. 그것도 석대(石臺) 위에 좌정한 상태에서 그 정도였으니, 일어설 수 있다면 그 키가 족히 5장은 될 것 같았다.

석상은 왼손에 창을 들고 있고, 오른쪽 손바닥 위엔 작은 탑을 올려놓고 있었다. 4층 벽화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얼굴이 분노상인 데다가 전신에서 붉은 혈기가 배어져 나오는 게, 천계의 신장답지 않아 보였다.

“여기다가 혈정이란 걸 놓으면 되는 건가?”

석상 앞에 돌로 만든 작은 제상(祭床)이 하나 있었다. 그 제상 위에 혈정을 놓으면 사공척 말대로 비사문천이 속박에서 벗어날 것이다.

“풀어주는 거니까, 설마 싸우자고 달려들진 않겠지?”

건달바왕의 위력을 접해봤기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보다 더 세다는 사천왕이고, 사천왕 중의 우두머리인 비사문천이 아닌가.

행낭에서 챙겨 놓은 혈정을 꺼냈다. 내심 신급 아이템을 선물로 받을 걸 기대하면서 조심스럽게 혈정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쉽게 진행돼서 경각심이 살아난 걸까?

“이상하네? 빨간 놈한테 빨간약 먹이면 더 빨개지는 거 아냐?”

그랬다. 아무리 봐도 이 붉은 비사문천상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천마의 사악한 주술로 오염된 모습이었다.

이런 오염된 상태에 이름만 봐도 사악한 기가 느껴지는 혈정을 바친다? 불난 집에 휘발유 뿌리는 격이잖은가.

그러고 보니, 문득 파도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분명 공갈대사와 개방의 이룡이라는 사람도 파신교주를 잡고 이 혈정을 얻었다고 했다. 그들이 이 지하 5층을 정말 발견하지 못했을까?

‘모를 리가 없겠지. 나도 별 고생 없이 찾을 수 있었던 아주 간단한 트릭이었으니까.’

그들도 분명 여기까진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혈정을 바쳤냐, 아니냐였다. 만약 바쳤다면 그런 이야기를 파도에게 해줬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공갈대사는 여기까지 와서 그냥 구경만 하고 혈정을 바치진 않았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 미심쩍긴 해도, 확인하기 위해서 바치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 둘의 사망일 테고 말이다.

왜 그들은 자기들이 죽었단 이야기를 파도에게 전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교주 잡고 먹은 아이템까지 다 발설해줬으면서, 가장 중요한 위험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았을까?

‘후후, 간사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네. 자기들도 죽었으니 파도도 한번 죽어봐라… 이런 심사인 건가?’

뭐, 물론 깜빡하고 이야기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만날 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굳이 공갈대사의 경우를 미리 짐작하지 않더라도 내 감은 이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천마의 사술에 사로잡혔다고 말한 놈이 쓴 일기장에 현혹되는 건 웃긴 일이다.

“그럼 뻔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정상적인 것 같고 말이야.”

혈정은 행낭에 도로 집어넣고, 금강멸정을 꺼내들었다.

금강멸정을 제상에 올려놓고 손을 떼자, 역시나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비사문천상이 부르르 떨더니, 붉게 물들어 있던 석상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엔 거미줄처럼 미세하던 균열이 점점 그 굵기가 커지더니, 이내 쩍쩍 소리를 내면서 석상의 전신으로 번져 갔다.

균열이 석상을 완전히 뒤덮었을 때, 제상 위에 놓인 금강멸정이 픽,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석상의 균열된 틈에서 황금빛 광채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콰쾅!

요란한 굉음와 함께 석상을 덮고 있던 껍데기들이 갈가리 찢겨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러자 석상을 덮고 있던 요사한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대신해 그윽한 황금빛 서기가 자리 잡았다.

번쩍!

굳게 닫혀 있던 석상이 살아 있는 것처럼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으음… 천마 녀석의 잔재주에 놀아나는 것도 재밌긴 했어. 어쨌든 그대가 혹여 본 신장이 법계에 누를 끼칠 만한 일을 미연에 막아준 일은 고맙게 생각하네. 오랜만에 인간 세상 구경도 해봤으니, 이젠 다시 업무에 복귀해야겠군. 자네, 수고했네.>

어, 어? 이게 아닌데!

“야, 이놈아! 가긴 어딜 가! 하다못해 은도끼라도 주고 가야지!”

그렇다고 이미 정해진 연출대로 움직이는 저 자식이 내 말을 듣고 멈출 리는 없었다. 앉아 있던 그 자세 그대로 구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우이 씨! 이런 게 어딨냐고!”

금도끼가 좋으냐 은도끼가 좋으냐, 이런 질문 정도는 받을 줄 알았는데…….

비사문천이 별말 없이 가버려서 아무 대가도 못 받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가 손오공이라도 된 것처럼 구름 타고 사라져 버린 비사문천을 허망하게 보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앞을 바라보자, 제상 위에 아이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성질부린 게 조금 미안해졌다.

[혼천귀원단(混天歸源丹)

사용 시 가장 최근의 사망 페널티가 무효화된다.

주의:운기 조식 상태에 빠지므로 전투 중 사용 금지]

아이템 효과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모든 소모성 아이템 중에선 가히 신급 아이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가 아닌가! 더군다나 한 알도 아니고 3알이나 됐다.

“하하하! 비사문천 이 자식! 이름값을 하는구나!!”

사실, 이때는 몰랐다. 건달바왕이 준 보리금강저나 달마 세수경, 그리고 비사문천이 준 혼천귀원단이 최초로 공략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베푼 일종의 일회성 보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허황될 정도로 너무 좋은 아이템이 나와서, 잠깐 건달바왕 사냥을 더 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미 결정해둔 일. 이제 난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이광과 현운자에게서 전서구가 날아왔다. 이광에게는 곧 난주로 돌아갈 테니 사냥이나 하고 있으라고 말해두고, 현운자에게는 낙양으로 와달라고 이야기했다.

무당파가 자리한 호북성 균현에서 하남성 낙양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현운자의 걸음으로 겨우 6시간 남짓 걸릴 뿐이었다.

사냥할 만큼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문파에서 들고 온 돈이 꽤 많이 남아 있긴 했지만, 공금이다 보니 그걸 가지고 쇼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문파에 빚진 돈이 얼마더라… 기억이 안 나네?

현운자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서 잠시 접속을 끊고 식사와 샤워를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때문에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강호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동안 눈만 뜨면 강호에 접속하느라, 그리고 접속을 끊으면 곧바로 쓰러져 자느라 홈페이지에는 잘 들어가는 편이 아니었다.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접속해보곤 했지만, 소요파가 있는 감숙성 게시판은 한 달에 새 글이 겨우 두세 개 올라오는 꼴이었고, 사람 많은 다른 성의 경우라도 쓸 만한 정보라곤 거의 없었다. 죄다 가십거리에, 칭얼대는 하소연 일색이었다.

지금 당장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할 짓이라곤 홈페이지 검색밖에 없다 보니 평소 안 보던 게시판들을 돌아다니게 됐다.

그러다 전체 자유 게시판의 작은 세부 게시판인 강호 기행담에서 재미난 글을 하나 발견했다.

<번호:2,631,293 작성자:선견지명 등록일자:XX.03.24

제목:흑점에 1억 바치고 얻은 결론

가상현실 게임 강호의 환상은 이제 많이 걷힌 상태다. 아마 지금쯤은 많은 유저들이 나와 같은 의문을 갖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타 다른 게임과 달리 강호는 길드 차원의 세력 싸움보다는 개인적인 면이 강한 게임이다. 본인도 그 점이 좋아서 강호에 매달리고 있다.

‘강호의 최강자가 누구냐’라는 점은 모든 유저들의 공통된 의문 사항일 것이다. 알아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흑점에 의뢰하면 된다.

어제 본인이 흑점에 1억 냥을 투자해서 알아낸 정보를 알려 드리겠다. 액수에 놀라지 마시라. 여기에 올려 보겠다고 2달 동안 사냥도 포기하고 장사만 했다(장사 노하우는 비밀이다).

본인이 흑점의 결과를 보고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공식 랭킹 1위와 10위 안의 모든 랭커끼리 붙여 보았다. 1위 공갈대사는 2위 현운자에게 지지만 3위인 강호제일한텐 이긴다. 그리고 현운자는 강호제일한테 진다. 서로 맞물리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0위 안의 모든 랭커들에게서 유사하게 나온다.

심지어 과거 팔룡의 일원이었던, 현재 공식 랭킹 209위인 와룡제갈량이 3위 강호제일을 이긴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물론, 본인이 벌인 이 삽질은 그저 가상의 시뮬레이션 결과일 뿐이다. 실제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일면 타당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개인적 역량을 중요시하는 본인으로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들 상위 랭커들이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전투를 벌일 가능성은 아주 아주 희박하기 때문이다. 활동 지역도 제각각이고, 중앙에서 비무 대회를 개최해도 오가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저 아무런 의미 없는 허수아비 랭킹만을 봐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IGM에선 상위 랭커들의 정기적인 비무 대회를 개최해주면 어떨까 싶다.>

비무 대회를 열어달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물론 나도 글을 올린 이 사람처럼 진정한 강호 최강자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궁금하다는 건 내가 구경꾼일 때의 입장이고, 참가자 입장에서는 절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단지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나가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나가도 무조건 1등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누가 나가겠는가. 아마 상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린 랭커들은 분명 회피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겠다. 우승 상금이 1천억 냥쯤 걸렸다면 말이다. 하하.

비무 대회보다는 이 사람이 1억이나 투자해서 알아낸 그 정보가 더 재밌었다. 나도 한번 흑점에 가서 날 상대로 랭커들과 가상 비무를 붙여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후후.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이 사람 말대로 그저 ‘시뮬레이션’일 뿐이다. 더구나 비무라는 것도 사실 아무 쓸모없는 한낱 유희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실전에서 이기는 것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다른 성의 게시판도 훑어보았다. 조금씩 유저들이 문파를 건설하고 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웃기는 건, 그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 중의 하나가 ‘소요파를 넘어서는’ 문파 건설이란다. 웃기다고 해야 하나, 기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유저 문파들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이었다. 소요파의 잠재적인 적은 구대문파, 오대세가와 같은 거대 NPC 문파들이니, 유저 문파와는 척을 질 경우보단 손을 잡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설령 연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가상의 적에게 잠재적 위협이 된다면 나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큰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게시판을 훑어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그렇게 글들을 읽다 보니 어느덧 현운자가 도착할 시간이 됐다.

* * *

접속을 하고 현운자에게 다시 전서구를 날렸다. 현운자는 이미 낙양에 도착한 상태였다.

다시 만난 현운자는 인사보다 질문을 먼저 던져 왔다.

“어떻게 됐어요? 잡은 거 확실해요?”

전서구를 통해 이미 결과는 알고 있다지만, 믿기지 않는가 보다.

“하하, 설마 거짓말했겠어요? 일단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해요.”

일단 가장 가까운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음, 일단 선물부터 드릴게요. 우선 방이나 하나 잡죠.”

현운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봤지만, 그냥 웃어주기만 했다.

객잔에 요금을 치르고 2인실짜리 방 하나를 빌렸다. 현운자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군말 없이 따라왔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현운자에게 혼천귀원단 한 알을 건넸다.

“드세요.”

현운자가 날 한 번 보고, 혼천단을 한 번 본다. 얼빠진 듯한 얼굴이 볼 만했다. 하하.

“이, 이런 사기 아이템도 줬단 말입니까!”

현운자도 이게 사기성 아이템이라고 인정했다.

“건달바왕이 준 건 아니고, 비사문천이 준 겁니다. 일단 복용하고 나면 이야기해줄게요.”

현운자가 가부좌를 틀고 단약을 복용했다.

혼천귀원단은 발동 효과도 볼 만했다. 일반적인 운기 조식 상태에 보이는 기가 소용돌이치는 모습이 아니라, 주위의 기가 정수리 백회혈을 통해 현운자에게 흡수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대략 3분쯤 지나자 기이한 현상이 끝났고, 현운자가 벌떡 일어났다.

“후후, 좋네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이 오는 거니까요. 아직 드려야 할 게 또 남았어요. 이것도 받으세요.”

이번엔 보리금강저를 건넸다. 하지만 현운자는 아까처럼 쉽게 받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요, 안 됩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닙니다.”

“받으세요. 저번에 황금배첩하고 천리종무영도 제가 가졌잖아요. 이번엔 받으세요. 그리고 팔아먹든 엿 바꿔 먹든 맘대로 하세요. 전 절대 신경 안 쓸게요.”

“아, 이걸 제가 어찌 받습니까! 여기 똑똑히 불가 계열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모르세요? 저 무당파 도인이라구요! 팔아먹어봤자 그 돈 어디 쓸 데도 없는 사람입니다. 안 돼요, 정말 못 받습니다!”

“허허, 현운자 님. 현운자 님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제가 이거 먹으면 저 나쁜 놈 되잖아요. 팔기 싫으면, 지나가다 맘에 드는 사람 아무한테나 선물로 줘버리세요.”

“하아… 조연 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그럼 좋습니다. 누가 가져가도 욕먹는 물건이니, 상점에 팔아서 반으로 나누지요. 이러면 되지요?”

현운자는 화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금강저를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

미치겠다. 정말 상점에 팔 생각인가 보다.

황급히 현운자를 쫓아갔다. 방을 나와 주루로 나가 보니, 현운자가 객잔 주인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물건을 팔 때는 아무 NPC 상점에나 들러도 된다. 객잔 주인한테도 금강저를 팔 수 있다는 말이다.

“허허,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만두세요!”

막 객잔 주인에게 금강저를 넘겨주려는 현운자를 제지하면서 소리쳤다.

“그럼, 조연 님이 가지시는 거죠?”

현운자가 날 바라보면서 묻는다. 아까 방을 뛰쳐나갔을 때는 화난 표정이었는데, 어째 지금은 실실 웃고 있다.

‘당한 건가…….’

“뭐 해요? 안 가져가고. 하하.”

어쩔 수 없이 보리금강저는 다시 내 손으로 들어왔다.

현운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날 데리고 아까 잡아놓은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방에 도로 들어서자, 현운자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역시 부처님 가운데 토막 행세는 조연 님하고 맞지 않아요. 그건 제 전매특허라구요. 크큭.”

아,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보리금강저가 분명히 내겐 최고의 무기가 되겠지만, 어차피 신외지물(身外之物). 무공과 달리 죽어서 흘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번에도 현운자에게 큰 빚을 졌으니 도대체 어찌 갚아야 할까? 갚을 수 있다고 해도 저렇게 욕심 없는 사람이 그때 가서도 안 받으려고 한다면?

“왜 그러세요? 삐쳤어요?”

“삐치긴 누가 삐쳐요? 좋아서 그럽니다. 아무래도 현운자 님이랑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녀야겠는걸요? 매번 양보만 하시니, 완전 도깨비 방망이 하나 얻은 것 같잖아요!”

“하하. 도깨비 방망이는 제가 아니라 조연 님이죠. 전 그냥 구경꾼에 부지깽이입니다. 부엌이 바쁠 때 쓸모도 없으면서 도와주는 척하는 부지깽이요. 하하.”

정말이지 이 사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 보리금강저라면 못해도 시가 5억 냥은 넘을 텐데. 아니, 10억 냥 이상 할지도 모른다. 그런 큰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설마 현실에선 재벌 2세?

하여간 대충 아이템 문제는 정리가 됐다.

나는 현운자에게 그가 사망하고 난 이후 어떻게 전투가 진행됐는지를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일협도 죽었다는 걸 알고 현운자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자기 혼자 죽은 줄 알고 있었나 보다.

어찌어찌 건달바왕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사공척에게 깜빡 속을 뻔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하하! 역시 대단하네요! 역시 조연 님입니다. 처음부터 사공척의 일기에 감춰진 트릭을 간파한 사람은 강호에 조연 님 하나뿐일 겁니다. 하하!”

내가 좀 잔머리가 유독 발달한 편이긴 하지. 현운자의 칭찬 속에 살짝 놀리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까짓것 무시해주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제 궁금한 걸 물어봐야겠다. 원래는 파도한테 질문했어야 하는데, 파도는 미처 질문을 하기도 전에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현운자 님, 그런데 물어볼 게 있네요. 거 왜 있잖아요, 대비주. 그거 공격받았을 때 말입니다. 저랑 파도 님만 안 튕기고, 일협 님하고 현운자 님은 튕겨 나갔잖아요. 기억나세요?”

“기억나죠. 나동그라지고 후다닥 일어나려고 얼마나 낑낑댔는데.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죠. 그런데 왜요?”

“이상하지 않아요?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혹시 그때 대비주 한 방에 대충 얼마쯤 체력이 깎였는지 보셨나요?”

“봤죠. 대략 이 할쯤 됐나? 혹시 데미지 때문에 튕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흠, 데미지일 수도 있고… 체질 문제일 수도 있고요. 아니, 같은 건가?”

그런가? 아니, 분명 그 이유밖에 없는 것 같다. 파도와 나는 불가 체질이라서 불교의 신장인 건달바왕의 공격에 내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도 같다. 난 대비주에 1할만 깎였고, 현운자는 2할이 깎였다고 하니 말이다. 판타지에서 속성 저항력이 있으면 마법 데미지 감쇠 효과가 생기는 것과 같았다.

‘그럼 이광이 죽은 건 혈마지체 때문인 건가? 사공을 익힌 상태라 그 거대 야차와 똑같이 취급받은 것 같은데…….’

왠지 그런 것 같다. 아! 그런데 체질 이야기하니까 현운자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가 또 하나 생각났다.

“현운자 님, 혹시 말입니다. 지금 절정 경지인가요? 전 반야신공이라는 내공심법 수련하고 절정 경지에 이르렀는데 말입니다.”

“음… 절정 맞아요. 양의심공 배우고 절정에 올랐죠.”

대문파의 경우엔 명성을 쌓아야 다음 단계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던가? 분명 현운자는 전에 자기 명성이 보잘것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절정의 내공심법을 어떻게 배운 걸까? 물어보면 대답해주려나?

현운자의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명성으로 무공을 배우지만, 자기는 아니란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비밀이라나?

이야기가 잠깐 샜다. 원래 묻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말이다.

“현운자 님, 그럼 혹시 절정 되면서 체질이 바뀌지 않았나요? 전 천무 체질로 바뀌었는데, 도대체 이게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네요.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나요?”

현운자는 내 질문의 정답을 알고 있었다.

현운자의 지금 체질은 태극지체. 처음엔 그도 절정의 경지를 달성하면서 얻은 이 체질의 효능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한참을 고생하고 테스트해보면서 알아낸 태극지체의 효능은 주술 숙련도와 도가 계열 무공의 숙련도가 50퍼센트 증가, 거기에 무공과 주술의 능력치도 꽤 증가했다고 한다.

다만, 강호의 유저 상태창엔 공격력과 방어력 등이 표시되지 않아서 얼마나 증가됐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충 2할이나 3할쯤 증가됐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라고. 거기에 또 무슨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고 말이다.

그런데 현운자는 자신의 체질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무지체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천무지체의 효능은 모든 정파, 낭인 무공의 숙련 속도 백 퍼센트 향상과 모든 능력치의 2할 상승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천무 체질이 되고 나서 기존에 배운 무공의 숙련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난 그게 최근에 급등한 레벨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체질의 효과였던 것이다.

“그런데 천무 체질을 어찌 그리 잘 알아요?”

“아, 무당파에 천무 체질인 사람이 몇 명 있어요. 태극 체질은 저 혼자뿐이고요. 아마도 배운 무공이라곤 태극권밖에 없어서 이런 체질이 된 것 같고요. 아마 파도 님도 천무 체질일걸요? 제 생각으론 꾸준히 내공이랑 공격 무공을 같은 계열로만 익히면 천무 체질이 되는 것 같고, 저처럼 특수 체질은 그것보다 더 순수하게 수련해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서 불가 계열이라도 음양이 있지 않겠어요? 만약 음 계열의 불가 무공만 꾸준히 배웠다면 더 특수한 체질이 됐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별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특화됐다는 것뿐이지, 태극 체질이 천무 체질보다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

음, 확실히 현운자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주술 따위를 배우지 않은 내겐 태극지체 같은 특수 체질보단 무공 숙련도가 2배나 빠른 천무 체질이 더 좋게 느껴지니 말이다.

그리고 솔직히 같은 불가 계열이라도 어떻게 음양 중에 한쪽 계열만 계속 배울 수 있겠는가? 소림파 본산제자도 아닌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자.

아이템 정리도 끝나고, 서로 궁금한 것도 다 풀었다. 그럼 이제 난주로 돌아갈 차례다.

“현운자 님, 정리도 다 끝났으니 그럼 이제 가볼까요?”

“예? 어디로요?”

또 어딜 가냐는 듯 현운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디 가긴요? 우리 집에 가야죠. 갑시다, 난주로!”

난 현운자를 감숙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우리 소요파의 빈객(賓客)으로 눌러 앉히는 게 목표고 말이다. 하하.

현운자는 잠시 갈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마 별수 없을 것이다. 날 따라서 가는 수밖에.

호북성 출신인 현운자에게 있어 여기 하남성이나 감숙성이나 어차피 타향살이인 것은 매한가지다. 현운자가 호북성으로 돌아가 폐관 수련이라도 할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하남보단 감숙이 생활하기 편할 것이다.

하남에선 개방과 소림 사람들의 안 좋은 꼴도 자주 보게 될 것이고, 유저들이 너무 많아서 레벨 업하기도 힘들다. 반면, 감숙엔 인간이 너무 없고 몹이 너무 많아서 문제니, 현운자에겐 훨씬 좋은 환경이 아닌가.

그리고 호북성에 굳이 돌아갈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저 다른 무공을 배울 때쯤 돼서 본산에 잠깐 다녀오면 될 것이다.

“그러죠. 대신 밥은 잘 주셔야 합니다.”

고민이 끝났는지 현운자가 웃으며 농담으로 대답했다.

“어디 밥뿐이겠습니까? 술도 잘 사드릴게요.”

도사가 어찌 술을 입에 대냐며 현운자의 재미없는 농담이 이어졌다.

그렇게 난주를 떠나온 지 열흘 만에 옛 고향을 등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그 짧은 시간에 최고급 아이템들을 얻고, 강호 최고수를 데리고 돌아갈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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