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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건달바왕(3권) (21/62)

제21장. 건달바왕

건달바왕을 잡겠다고 결정은 내렸지만,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많고 많은 준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정보였다. 건달바왕에 대한 확실한 정보.

파도는 설마 내가 진짜로 건달바왕을 잡을 생각인 줄은 몰랐는지 그저 놈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식으로만 말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젠 분명히 잡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상, 그런 대강의 이야기가 아닌 사소한 부분까지 알아둬야만 했다.

파도 일행은 건달바왕에게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일패도지했기에 진정한 놈의 전력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의미 있는 몇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건달바왕의 공격은 대부분 물리 공격이었다. 하지만 악신(樂神)이라는 별칭처럼 간혹 비파같이 생긴 악기를 꺼내들고 음공을 펼치기도 했다. 대비주(大悲呪)라는 이름의 이 음공은 주위 모든 사람의 체력이 상당량 빠져나가는 광역 공격기였다.

이 기술 말고도 세상이 거꾸로 보이고, 강호 컨트롤러에 저장해둔 모든 단축키들의 순서가 반대로 돼버리는 침향성(浸香城)이라는 광역 저주 기술도 있었다. 파도가 일러주길, 자신들은 전투 시작부터 이 침향성 기술을 맞고선 상황 파악도 못한 채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기술 외에 다른 광역 잡기들이 얼마나 더 숨겨져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드러난 기술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해야 했다.

다행히도 건달바왕의 물리 공격을 맞은 파도는 단 한 방에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반신급인 몬스터인데도 일단은 무식할 정도로 강한 편은 아니란 말이었다. 그 정도라면 최소한의 희망은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놈의 공격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일협이 두 번, 파도가 세 번을 가격당하고 사망했다니, 어쨌든 강력한 공격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었다. 난 놈의 이 물리 공격력이 가장 걱정스러웠다. 잡기는 찾아보면 파훼해볼 방법이 있을 것 같았지만, 물리 공격은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파도의 말 속에서 꽤 많은 정보를 얻긴 했지만, 아직 미진한 점이 있었다. 파도는 공격을 받기만 했지, 직접적인 타격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나 때려야 건달바왕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감 잡을 방도가 없었다.

그 부족한 부분, 건달바왕의 방어력을 알아내기 위해 흑점에 다시 들러야 했다.

하지만 흑점이라고 해서 완벽한 정보를 제공해주진 않았다. 당빈은 겨우 건달바왕의 레벨과 체력 정도만을 알려 줬을 뿐이었다.

건달바왕의 레벨은 800, 체력은 30만. 그리고 파신교주 사공척의 레벨이 600, 체력은 6만이었다.

레벨도 레벨이지만, 30만이라는 체력 수치는 일반 유저들로선 전혀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숫자였다.

지금 나는 레벨 303에 체력이 1만 7천이 조금 안 된다. 그동안 찍어둔 체질 스탯 때문에 앞으로 체력 수치가 전에 비해 더 많이 오르긴 하겠지만, 30만이라는 체력과 800레벨에 달성할 수는 없다. 파신교주의 체력과 비교해봐도 건달바왕의 경우는 확실히 일반적인 경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가 전멸하기 전까지 과연 건달바왕의 저 무지막지한 체력을 다 깎을 수 있을까?

평범한 공격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강호 최초의 레이드 몬스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게임에서 레이드 몬스터를 잡으려면, 수십 명의 인원이 함께하는 공격대를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엔,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 많은 인원을 모두 수용할 정도로 파신교주의 방은 넓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여 인원이 적으니 공격력도 문제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오랫동안 버텨 줘야 한다. 그런데 버티는 것도 문제다. 판타지 게임처럼 치유 마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대비책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었다.

공격대 구성원들 모두에게 환혼신단 한 개씩은 챙겨 주는 것.

일단 세 사람과는 사흘 후에 보기로 하고, 나 혼자서 난주로 돌아왔다.

소요파에는 내가 날린 전서구를 받은 간부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여차저차 설명을 하고 곧바로 고목문으로 향했다.

고목문의 작업은 예전보다 수월했다. 고목 존자가 있는 곳까지는 일반 유저들의 사냥터라서 시간 지체 없이 곧바로 갈 수 있었고, 그동안 우리도 꽤 강해져서 중간에 나오는 호법들을 상대하는 것도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독강시와 금강강시, 활강시는 여전히 상대하기 버거웠지만 말이다.

특히 독강시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놈이 피독단이 아니면 해독할 수도 없는 가공할 독기를 뿜어내는 절정급 강시라 해도, 예전보다 더 빨라진 데다 한 번의 경험이 있는 내겐 이전만큼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사실, 용독술 상급을 배운 상태라 놈의 독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역시나 해독과 용독은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단 하루 동안 우리는 피독단 8개를 다 소모하고 환혼신단 10개를 챙길 수 있었다. 덤이라고 하기엔 부피가 큰 절정급 비급 금강조 2개와 철포삼, 무영각 같은 쓸 만한 비급도 몇 개 챙기고 말이다.

금강조는 사실 절정급이라고 비급에 적혀 있긴 하지만, 배우기엔 애로 사항이 있는 물건이었다. 조법(爪法)이기 때문이다. 소요파에서 조법을 배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금강조를 배우려면 하급 조공을 수련해서 숙련치 10성의 경지를 쌓아야 하는데, 그 짓을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불가 계열 무공이라 더더욱 찬밥 신세일 게 뻔하고.

계륵 같은 금강조에 비하면 무영각은 훨씬 쓸모 있는 무공이었다. 불가, 도가 같은 계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치 일격기처럼 필요할 때마다 쓸 수 있는 단발성 무공이었다. 다만, 수비 쪽으론 큰 허점이 있는 게 문제였다.

만 하루 동안의 작업을 끝내고 간부진들 중에서 단둘만 데리고 하남성으로 향했다. 광우와 광견이었다.

흉인 상태인 이광을 사람들 눈에 띄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괜히 이 녀석들이 사고라도 치면 무조건 우리 손해니 말이다.

미리 전서구를 날려 둔 터라, 현운자 일행과 우린 파신묘 앞에서 다시 상봉할 수 있었다.

“조연 님, 오랜만!”

파도가 즐겁게 인사를 건넸다.

“아! 제가 너무 늦었습니다. 준비는 잘들 돼가시나요?”

세 사람에겐 침향성에 공격당했을 때를 대비한 연습을 하라고 해뒀었다. 요령은 간단했다. 컨트롤러에 저장된 처음 5개의 버튼을 뒤쪽에다가도 똑같이 지정해두면 되는 거였으니.

아주 간단한 요령이지만, 그걸 몸으로 익힌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다급한 전장에서 생각한 대로 행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냥 틈틈이 대련을 하면서 익혀 두라고 했고, 우리도 고목문에서 작업을 하던 틈틈이 계속 연습을 해둔 상태였다.

약속해둔 시간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 아직 건달바왕 공략을 위한 준비는 완벽하지 않았다.

공격대에 합류한 사람 중에서 가장 불리한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가진 무공 중 가장 희귀하고 좋은 무공인 반야신공이 겨우 1성이었기 때문에, 사망하면 무공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미 12성 대성한 진결육합권이나 불영보 같은 경우 최악의 페널티를 받아 9성까지 떨어질 수도 있지만, 숙련치 떨어지는 건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여간 이 반야신공 때문에 난 문파대전을 신청했다. 문파대전이 가능한 건 일주일 중 오직 일요일뿐이었고,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문파대전 중엔 사망해도 1레벨 하락이라는 페널티뿐, 무공을 상실할 염려는 없었다. 대전 상대는 감숙성 천수의 3레벨 흑도방파 가단회(歌壇會)였다.

우리 소요파가 그간 치른 모든 문파대전에서 패배 없이 승리만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문파대전에 졌다고 해서 무조건 문파 레벨이 하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혹여 건달바왕을 잡다가 문주인 내가 사망이라도 하게 된다면, 문파대전은 바로 우리의 패배로 끝나버린다. 나 혼자의 페널티를 줄이고자 그런 위험 부담을 안을 순 없었다.

다행히 문파 명성이 이 전쟁 패배에서 문파 등급 하락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3레벨인 지금 상태라면, 한 번의 패배에 문파 명성이 1만씩 깎여 나간다. 현재 소요파의 문파 명성은 3만 4천이니, 연거푸 세 번의 패배를 당하더라도 문파 등급이 하락하진 않는 것이다.

어쨌든 천수의 가단회를 치기로 결정하긴 했지만, 천수로 직접 쳐들어가서 전쟁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각룡이 형이 몇몇 문도들만 데리고 난주에서 수비를 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정추산 금사방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직 천수 지역 무림의 경계를 살 행동은 가급적 피해야 했다.

문파대전도 신청했겠다, 이제 남은 준비물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침향성의 경우는 꼼수로 어떻게 파훼를 할 수 있다지만,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공격대원의 체력이 상당량 빠져나간다는 대비주의 경우는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물리 공격도 아니어서 피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무조건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

보통의 무협 소설에서 음공에 대항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강한 내력을 바탕으로 음공에 저항하는 방법이다. 이론적으론 일리가 있지만,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 확인할 방도는 없다. 내가 800레벨쯤 돼서 건달바왕보다 내력이 더 많아진다면 모르겠다. 아니지, 놈의 무식한 체력 수치를 고려해본다면 아마 내공도 수백만은 될 테니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가 돼버린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두 번째 방법뿐이다. 음공엔 음공으로. 그 수단은 이미 알아둔 상태였다.

내가 찾는 물건은 사자후(獅子吼)나 창룡음(唱龍音) 같은 잡기 음공이었다. 이 기술들은 상대의 음공을 파훼하거나, 현혹이나 혼란 같은 저주 기술을 무마시키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다. 흑점에서 이 두 가지 무공이 대문파에서 가르쳐 주는 기본 무공이라는 것도 들었고, 강호에 비급 형식으로 풀렸다는 것도 확인했다.

이 두 무공 중에서도 건달바왕이 불가 계열의 반신(半神)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불가 무공인 사자후보다는 무속성인 창룡음이 더 상황에 맞을 것이다.

* * *

“창룡음 삽니다! 창룡음 삽니다!”

낙양 상점가에 돗자리 깔고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낙양에선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다. 오죽했으면 천잠보의를 구한다는 사람마저 있겠는가. 돈은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문파에 들렀다가 올 때 1억 냥을 횡령해왔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다 채워놓을 거다. 나중에 말이다.

“저기요, 거기 창룡음 사시는 분!”

맨들맨들한 머리의 한 여성 유저가 날 불렀다. 이런 모습 때문에 여성 유저들은 소림에 잘 안 들어가는 건데, 참 취향 하난 독특한 유저다.

“네? 창룡음 가지고 계신가요?”

“아니요. 사자후는 안 필요하세요? 창룡음이나 사자후나 효과는 똑같으니까 사자후 사가세요. 싸게 드릴게요.”

하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원하는 창룡음 가져오는 사람은 없고, 사자후 파는 사람만 득시글거렸다.

“에고, 제가 필요한 건 창룡음이거든요. 사자후라면 벌써 구했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안 되는데… 저기요, 장사꾼님. 정말 싸게 팔게요. 제발 사주세요.”

거참, 뭐가 안 된다는 건지. 그거야 사는 사람 맘이지. 필요 없는 물건 안 사는 게 잘못이라는 말인가?

“아니요, 정말로 사자후는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저한테 필요한 건 창룡음밖에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정말 안 되는데… 이거 팔아야 하는데… 제발 사주세요!”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이 여자가 말귀 알아들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딴 데 갔을 일이었다. 역시나 귀 막힌 사람답게 이 아가씨는 무턱대고 필요도 없는 사자후를 사달라고 떼를 썼고, 난 무시하고 창룡음 산다고 외쳤다.

그렇게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저기, 채영 님, 무슨 일인데요?”

그때, 웬 거지 한 명이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고 떼쟁이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떼쓰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분명 가던 길 계속 갔을 것이다.

“제가… 돈이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이 사자후를 안 사줘요!”

“…….”

참 절묘한 대답, 기가 막힌 말솜씨였다. 앞뒤 다 잘라먹고 저렇게 말하니까 내가 죄지은 것처럼 되잖은가?

나만큼이나 난감한 표정을 지은 개방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치를 줬지만, 내가 굳이 말해줄 이유는 없다. 장사나 계속하자.

“창룡음 삽니다! 창룡음 삽니다! 사자후는 안 삽니다. 창룡음 삽니다!”

역시나였다. 사내가 바로 미끼를 문다.

“창룡음 팝니다.”

‘흠, 이렇게 되는 건가?’

“대신 좀 싸게 드릴 테니까, 여기 채영 님 사자후도 같이 사주세요. 어때요? 그래주실 수 있나요?”

‘이놈아, 걔 꽃뱀일지도 몰라.’

“가격만 괜찮다면야…….”

“이게 시세가 있는 물건도 아니니까, 대충 정하죠. 창룡음 삼백만에 사자후 이백만이면 괜찮겠어요?”

“창룡음 백오십에 사자후 이백으로 하죠.”

어떻게 순간적으로 이런 절묘 극악한 말이 튀어나왔을까?

‘늬눔이 째려봤자지. 크하하! 이미 꽃뱀이 다 보고 있잖아.’

이 정도는 영업의 기본. 물건 살 사람이 아니라 지갑 든 사람을 공략하라!

여자의 물건 값은 그대로고 사내의 물건 값만 깎은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따지기엔, 아마 옆에서 보고 있는 여자의 눈이 부담될 것이다. 개방 거지의 속셈은 뻔했고, 너무 눈에 띄는 작업 탓에 스스로 덜미를 잡힌 꼴이었다.

난 결국 그 가격에 창룡음을 살 수 있었다. 사자후도 같이. 물론 작업 성공하라고 한마디 외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휴, 이제야 준비 다 끝났네. 그럼 이제 가볼까나?”

문파대전까지 남은 시간이 빠듯했다. 얼른 파신묘를 향해 달려갔다.

현운자와 파도, 일협은 지금 소요파가 문파대전 준비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솔직히 이 문제는 조금 고민을 했다. 다 같이 문파대전을 신청할 수 있었다면 이런 고민이 생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운자는 무당파의 일개 문도원이라서 문파대전을 이야기할 입장이 못 됐고, 파도와 일협의 경우는 겨우 몹 한 번 잡아보자고 문파를 건설한다거나 소요파에 가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소요파의 세 사람만 사망 페널티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전투를 하게 된 것이다.

건달바왕 잡자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문파대전을 이용하기로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때는 이들 처지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몇 번 고민도 해보고 그냥 말하지 않고 진행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괜히 숨겼다가 나중에 일이 더 커질지도 몰라서 결국 이야기를 해줬다.

파도와 일협 입장에선 당연히 손해 본다는 느낌을 받았을 텐데도 흔쾌히 인정을 해주었고, 그 보답으로 난 아이템 배분에서는 소요파가 한발 물러서기로 약속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환생단뿐이니, 다른 아이템은 포기하는 걸로 말이다.

이광과 세 랭커들은 내가 낙양에 갔다 오는 동안 별 탈 없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난 파신묘 3층에서 동료들을 다시 볼 수 있었고, 파티에 합류했다. 은열쇠는 이미 먹어둔 상태라 우리는 바로 4층으로 내려갔다.

중앙의 잡몹들을 정리하고 간부 방을 정리하는 일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2명의 인원이 더 추가됐다는 이유도 있었고, 한 번 겪어본 탓도 있었다.

현운자와 파도는 내가 난주에 갔다 오는 동안 줄곧 파신묘 3, 4층에서 파티 사냥을 해온 터라 호흡이 척척 맞았다. 그리고 이광은 원래부터 항상 붙어 다니던 녀석들이라 이런 방식의 협공에 능했고, 나는 강호 시작할 때부터 소환무사와 같이 파티 사냥을 해본 사람이다. 한마디로 파티 사냥의 달인들만 모인 셈이었으니, 4층 청소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난 사냥 틈틈이 새로 익힌 창룡음과 사자후 연습을 해봤다. 몹들이 쓰는 주술의 가짓수만큼이나 깨뜨리는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개념상실은 음공으로 전혀 풀리지 않았고, 혼란은 주문이 아직 완성되기 전에만 맥을 끊을 수 있었다. 반면에 현혹 같은 경우는 주술이 완성된 이후라도 파훼할 수 있었다. 건달바왕의 대비주가 제발 개념상실 같지만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창룡음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겨우 10초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도 알았고, 한 번 사용에 내공이 5천이나 소모돼버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음공의 성격상 발출한 기를 거둬들일 수 없다는 걸 생각하니 심한 내공 소모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막대한 내공을 지닌 내가 그 정도 내공 소모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중간 보스 상관월을 잡고, 잠시 운기 조식으로 체력을 회복하면서 작전을 다시 한 번 검토했다. 각자 맡은 역할과 몹 몰이 순서를 재확인하고, 나는 고목문에서 얻은 환혼신단을 동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문파대전은 4층을 청소하는 도중에 이미 활성화된 상태였고, 이제 더 이상 준비할 것이라곤 없었다. 남은 건 싸움과 그 결과뿐이었다.

“자, 자, 그럼 이제 확실히 이해하신 거죠? 광우랑 광견, 너네는 일타로 확실히 죽어줘야 한다. 알았지? 너네들 때문에 내가 이 고생하는 거고, 저 세 분들이 고생하는 거니까 말이야. 몸 사리면, 죽는다!”

“아따 거참, 그 이야긴 그만 좀 하쇼. 알았으니깐 얼른 시작이나 합시다. 최소한 건달 놈 시키 발모가지 하나는 끊어내고 죽을 테니깐!”

광견이 허풍을 치면서 돌바닥을 도끼 자루로 쿵쿵 찧었다.

“그럼 이제 시작합시다. 무사 소환들 하시고. 파도 님! 문 따주세요.”

나와 파도, 일협은 무림맹 무사를 소환했고, 그렇게 NPC 포함 총 아홉의 인원이 화려하게 치장된 파신교주 방 앞에 도열했다.

파도가 철문 가운데에 파인 조그만 홈에 금열쇠를 끼워 넣었다.

‘교주 혼자 있을 것인가, 건달바왕이 나올 것인가!’

환생단은 교주가 주는 아이템이다. 그렇다면 교주 혼자 있는 상황을 바라야 할 텐데, 왠지 모르게 건달바왕이 나왔으면 하는 묘한 기대감이 끼어드는 건 왜일까. 여태 고생 고생 준비해온 게 아까워서 그런 것일까…….

끼이익-

기분 나쁜 쇳소리와 함께 방문이 젖혀졌다.

문이 언제 닫힐지 모른다. 우린 재빨리 경공을 시전해서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열은 이미 교주 방에 난입하기 전부터 입을 맞춘 상태였다. 6명 모두 똑같은 거리를 유지하고 방 중앙을 바라보는 원진(圓陣)을 만들었다.

방 안엔 교주 혼자만 있었다!

안도감 한편으로 아쉬움이 끼어든다.

그렇게 안도하면서 교주 사냥을 하려는 찰나였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메시지가 출력되자 모두들 석고상처럼 몸이 굳어버렸고, 말로만 들었던 건달바왕 출현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파신교주 사공척은 핏빛 장포를 걸친 채 방 중앙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그 정면으로 운무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구름이 적당히 깔리자, 이번엔 거대한 황금색 빛기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금도끼 주는 산신령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연출이 참 유치했다. 화려한 그래픽 때문에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지만.

한 10초쯤 되자 곧 번쩍! 하는 소리와 함께 운무와 빛기둥은 섬광처럼 사라졌다. 이제 산신령이 나올 차례였다.

그 자리엔 키가 3장(丈)에 달하는 거대한 장수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전신에 묵직한 보갑(寶鉀)을 걸치고 한 손에 삼지창, 등에는 비파처럼 생긴 악기를 멘 건달바왕이었다.

건달바왕은 출현하자마자 삼지창을 들어 파신교주 사공척을 가리켰다. 그리고 장수가 적도들에게 겁을 주듯이 위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타가 일러준 대로구나! 네 이놈! 감히 흑야차 주제에 제 주군을 능멸한 것도 모자라 천계를 어지럽히려고 하다니! 내 네놈을 영원히 무간지옥에 유배시키고야 말겠다!>

건달바왕이 그렇게 외치자 그 다음 말은 사공척이 이어받았다.

<어, 어떻게 여길 알고! 부, 분명 무간(無間)의 결계로 철저하게 막아뒀는데!>

<그따위 잡술로 어찌 천계의 신장을 속일 수 있겠느냐! 만인혈의 고약한 냄새가 수미산 수정궁(水晶宮)에까지 흘러들었거늘, 향신(香神)인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느냐! 네놈은 이미 천마(天魔)의 사특한 권속! 내 너를 끌고 아비지옥으로 내려가 천마에게 죄를 묻겠다! 이제 그만 목을 내밀어 법계(法戒)를 받으라!>

<뭐, 뭐라고? 겨우 너 따위 잡신이 천마 님을 징치(懲治)하겠다고? 크하하! 네놈이나 여기서 몸 성히 빠져나갈 궁리하거라!>

[다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연극이 다 끝났는지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자, 우리도 시작해봅시다!”

소환무사를 포함한 9명 전원이 건달바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모두 가진 재간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타다탁!

퍼퍽!

까가가강!

그때, 사공척은 태사의에서 내려와 무언가를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건달바왕이 크게 노해 삼지창을 날렸다.

부웅, 소리를 내며 삼지창이 사공척의 가슴에 틀어박혔지만, 사공척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금강불괴라도 된 것처럼.

<네 이놈!!>

삼지창을 회수한 건달바왕이 그런 사공척에게 고함을 지르며 급하게 달려들었다.

무엇 때문에 위풍당당했던 건달바왕이 저렇게 허둥대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의 주적은 사공척이 아니라 건달바왕이다. 건달바왕이 저렇게 허둥댈 정도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겠지!

“어서 막아요!”

처음 사공척이 건달바왕하고 말싸움하는 걸 보면 서로가 만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애당초 둘의 급수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이미 우린 최대한 사공척 들러리를 서면서 건달바왕을 견제하기로 작전을 세워둔 상태였다. 일명 호가호위(狐假虎威) 작전. 최대한 사공척을 지키면서 건달바왕의 견제 역할을 시켜야 했다.

우린 사공척을 향해 달려드는 건달바왕 앞길을 막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이벤트 처음에 건달바왕이 말한 그 만인혈인지 뭔지 시뻘건 물건을 집어먹은 사공척은 건달바왕의 가공할 공격을 담담히 받아내면서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고 있었다. 파도 말로는 이다음에 사공척이 뭔가로 변신한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백중지세는 못 되더라도, 그럭저럭 약간의 시간은 버텨 줄 수 있을 만큼 사공척이 꽤 세진다고 했다.

건달바왕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알고 있는 듯 삼지창을 요란하게 휘둘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사공척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건달바왕의 별 효과 없어 보이는 공격이 서너 번쯤 진행됐을 때였다. 공간을 가르는 듯한 거대한 삼지창 사이로 건달바왕 등 뒤에 메어 있던 악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파는 5장쯤 올라갔을 때에야 움직임을 멈추었고, 곧 연주자도 없이 스스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이 울려 퍼지는 사이에 육합전성이라도 펼쳐진 듯 웅웅거리는 진언이 들려왔다.

-나모 다나다라 야야…….

악기에서 어떻게 진언이 들려오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게 무언지는 확실했다. 대비주!

“창룡음!”

준비했던 대로 창룡음을 펼치자, 용 한 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나오며 길게 창룡음을 토했다. 다행히 대비주 진언은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소멸됐다.

그런데 이놈의 악기가 내 노력이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대비주를 연주하는 게 아닌가!

10초의 재사용 시간이 짧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무도 두 번째 대비주를 막을 수 없었다.

-나모 다나다라 야야 나모 아르야 쟈나!

짧은 진언이 끝나자 공기의 파동이 파도가 밀려오듯 우릴 덮쳤다.

“컥! 컥!”

대비주의 음파 공격에 나와 파도를 제외한 7명은 구석에 처박혀 버렸다. 이번 한 방에 체력의 10퍼센트가 깎여 나가버렸다. 그나마 두 번을 끝으로 비파는 더 이상 대비주를 연주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건달바왕이 사공척에게 신경을 쓰는 동안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혀야 했다.

공격을 버텨 낸 파도와 나는 다시 건달바왕에게 달려들었고, 나뒹굴어진 사람들도 재빨리 일어나 공격에 합류했다.

그렇게 다들 건달바왕에 달라붙어서 공격하려는 찰나, 이번엔 건달바왕이 직접 외는 진언이 들려왔다.

-옴 아모가 미로자나 마하 모나라 마니바나마!

[침향성에 걸렸습니다.]

굳이 메시지가 아니어도 침향성에 빠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창 공격 중이던 파티원들의 동작이 강제로 멈췄고, 천지가 뒤바뀐 것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거꾸로 보였다.

그나마 다행으로 상하가 바뀌었을 뿐, 전후좌우가 바뀌진 않았다.

처음 겪는 상황에 잠시 혼란을 겪긴 했지만, 다들 침향성에 대비한 연습은 충분히 해뒀다. 정신을 차리고 건달바왕에게 재차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건달바왕은 여전히 사공척을 향해 삼지창을 휘둘러대고 있었고, 우린 그 틈을 타 맹렬히 공격했다. 어그로를 먹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공척을 살리기 위해서 건달바왕의 공격을 우리 쪽으로 돌리려는 게 원래 계획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공격을 퍼붓길 한 30초쯤 됐을까? 드디어 건달바왕의 공격이 우리에게 작렬했다.

<이놈들!>

꽈르릉!

삼지창이 번쩍하는 빛과 함께 지면에 폭발을 일으켰다. 들었던 대로 이 물리 공격마저 광역 기술이었다.

“흩어져요!”

공격을 맞고 사방으로 처박혀 버린 일행에게 외쳤다.

비록 별 힘도 못 쓰고 무림맹 무사 셋이 강제 소환돼버렸지만, 유저들 중에 사망자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준비한 대로 진행됐다. 이젠 건달바왕을 달고 계속 도망 다니는 게 우리 계획이다.

다들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가운데, 건달바왕이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면서 누군가를 쫓아다녔다. 놈의 몸집이 원체 큰 터라 도대체 누구를 타깃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야! 이광! 때리고 돌아!”

건달바왕 앞에서 요리조리 방향을 바꾸면서 도망치고 있던 광우가 내 말을 듣고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품속에서 혈죽선을 꺼내더니 건달바왕에게 암기를 날렸다.

저 새털만 한 암기가 키가 3장이나 되는 건달바왕에게 어찌 타격을 줄 수 있었는진 생각하지 말자. 하여간 건달바왕은 그 암기를 맞고 광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야 작전의 틀이 잡혀 가는 듯했다.

광우를 쫓아다니는 건달바왕 뒤로 남은 사람들 전부가 달라붙어서 공격을 가했다. 워낙에 몸집이 거대해서 때릴 곳은 많았다. 하지만 건달바왕이 계속 움직였기 때문에 집중 공격은 불가능했고, 전투가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안전하게 지속적으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아직 사공척은 죽지 않았다. 우린 사공척 주위로는 절대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실수로 사공척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이번 작전은 대실패로 끝날 것이다.

사공척은 파도가 말한 대로 변신을 완성한 상태였다. 붉은 장포는 갈가리 찢어져 없어진 지 오래였고, 족히 2장은 된 듯 커진 몸뚱이 뒤로 박쥐의 그것처럼 생긴 날개가 보였다.

사공척은 변신을 마치고는 쉬지 않고 건달바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건달바왕의 거대한 몸집에 가려서 직접 공격을 보진 못했지만, 귀곡성을 내면서 달려드는 환영들은 볼 수 있었다. 사공척이 주술과 수인을 맺으며 그 환영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신 공격인지 물리 공격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건달바왕에겐 어느 정도 타격을 주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가하는 공격보다 더 확실한 데미지를 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짐작이 맞았나 보다. 광우를 얼마간 쫓아다니던 건달바왕이 다시 사공척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쿵쾅거리며 사공척 앞에 다시 자리를 잡은 건달바왕은 삼지창 공격과 음공, 침향성을 차례로 시전했다. 그리고 우린 대비주 때문에 다시 한 번 이리저리 나뒹굴어야 했다. 이번에도 두 번째 대비주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환혼신단 먹어요!”

한 번의 물리 타격과 두 번의 대비주로 이미 체력은 절반 아래로 떨어진 상태였다. 마지막 수단을 썼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남은 건 없었다.

우린 마지막 수단을 써버린 상태인데도 건달바왕의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건달바왕이 사공척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에 다시 마음 놓고 맹공을 퍼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신나게 건달바왕의 종아리를 두들기고 있는데, 머리 위로 거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천마! 인간 세에 관여치 말라는 석존의 말씀을 잊었느냐!>

<크하하! 그게 언제 적 이야기더냐! 이거나 받아보거라!>

짧은 대화를 끝낸 사공척이 이번엔 뭔가 큰 주술을 펼치려 했다. 그러자 건달바왕이 헛짓 말라는 듯 삼지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다 쏟아 부어요! 어그로 뺏어 와야 합니다!”

사공척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을 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건달바왕이 지금 사공척의 주술을 파훼해버리면 상황이 더욱 암담해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동안 사공척이 준 데미지가 상당했던지, 건달바왕은 쉽사리 우리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나도 진결육합권과 단시간에 최대한의 공격력을 보여 주는 무영각을 연속적으로 시전했지만 건달바왕의 시선을 돌릴 수는 없었고, 신안은 건달바왕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반신(半神)에게 약점이 있을 리 만무했다.

사공척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요상한 주문을 외고 있었다. 주문 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허공에 천마의 귀상(鬼像)이 조금씩 커져 갔다. 이 바쁜 와중에 저런 느려 터진 기술을 쓰는 사공척이 한심했지만, 그저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천마상이 어느 정도 윤곽을 완성하자, 건달바왕은 목표를 사공척에서 천마상으로 바꿨다. 그 거대한 삼지창을 천마의 귀상을 향해 맹렬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발 사공척이 기술을 완성시켰으면 하는 우리 기대에도 불구하고, 점점 천마상은 형체를 잃고 흐릿해져 갔다.

모두들 총력을 들이붓는데도 안타깝게 이제 한두 번만 더 가격당하면 천마상이 깨지려던 찰나.

“물러서세요!”

현운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꽝! 쾅! 꽝! 쾅!

그리고 전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제대로 된 타격음이 흘러나왔다.

건달바왕의 오른쪽 다리에서 현운자가 그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운자의 평소 차분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태극 문양이 새겨진 푸른 도복이 떠날려 갈세라 펄럭거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선 새파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신술?’

물러나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우린 건달바왕한테서 멀찍이 떨어졌다.

“광우랑 광견! 준비해!”

우르릉~ 쾅!

건달바왕이 현운자를 향해 그 거대한 삼지창을 찍어 내렸다. 다행히 사공척의 천마상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현운자 님, 피해요!”

정통으로 공격을 당한 현운자는 몸을 피하지도 않고 계속 공격을 하고 있었다.

“저 못 피합니다! 곧 죽으니까 준비들 하세요!”

‘뭐, 뭐야!’

현운자 말대로였다. 건달바왕의 공격이 두어 번 더 격중될 때까지 현운자는 그대로 자리를 지키다 결국 죽고 말았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어차피 죽음은 이미 다들 각오하고 들어온 터였다.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없다.

현운자가 죽자, 이번엔 광견이 재빨리 혈죽선 암기를 날리며 건달바왕을 끌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경공을 시전하고 달리다가 삼지창이 떨어질 만하면 나려타곤으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계속 도망만 쳤다.

-끼요오오오오~

건달바왕 뒤를 쫓으며 공격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귀곡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사공척의 그 대단한 주술이 완성된 것이다!

순식간에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완벽한 어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만큼 밝은 것도 아니었다. 묘한 분위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크크크! 이번엔 어떤 놈이냐! 죽여라! 죽어!

갑자기 어둠 속에서 수십, 수백은 되는 듯한 정체 모를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가래 끓는 소리, 쇳소리 같은 소리, 듣기 싫은 온갖 소리의 총집합이었다. 건달바왕마저 그 소리가 듣기 싫은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다시 장내가 밝아졌다.

“제기랄, 이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짜증이 났다. 대단한 기술인 줄 알았건만, 온갖 잡스런 귀신들 수백 마리가 소환된 것이다!

“좀 쓸 만한 기술 좀 쓰지! 망할 새끼 같으니!”

별 도움 안 될 잡귀들은 무시하고, 우린 하던 대로 다시 광견을 공격해가는 건달바왕을 쫓았다.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 이 녀석들은 생긴 것과는 딴판이었다!

건달바왕이 광견에게 날린 삼지창 공격이 적중되지 못하고 땅바닥을 찍어갈 때마다, 그 공격에 잡귀들 수십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잡귀들이 그대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다른 놈들에게 육보시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동료를 집어삼킨 놈은 몸집을 불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들의 숫자는 줄었지만 살아남은 놈들은 점점 커져 갔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 때에는 거의 건달바왕 크기와 맞먹는 거대한 야차 한 마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오호라, 이제 구경만 하면 되는 건가?”

실력이 미심쩍긴 했지만, 최소한 놈의 허우대는 믿어볼 만했다.

선제공격은 거대 야차가 먼저 날렸다. 건달바왕은 줄곧 광견 뒤를 쿵쾅거리면서 쫓고 있었던 터라 야차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콰쾅!

주먹 크기만큼이나 엄청난 타격음!

난데없이 뒤통수를 가격당한 건달바왕이 야차를 노려봤다.

눈싸움은 아주 잠깐이었을 뿐, 곧 두 거인들은 상대를 향해 거대한 주먹과 발차기, 그리고 삼지창을 휘두르며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우린 멀찍이 떨어져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모두 소환단을 복용했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운기 행공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두 거인들의 박진감 넘치는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팍 하고 야차가 한 대 먹이면, 쾅 하고 건달바왕이 삼지창을 휘둘렀다. 서로의 몸에 공격이 적중될 때마다 거대한 파육음과 함께 장내가 들썩거렸다.

서로 방어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 막싸움이 연이어졌다.

‘그나저나 저 자식들 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새우 등 터져도 좋았다. 놈들의 남은 체력만 안다면 중간에 끼어서 적절히 양패구상을 도모할 수 있으련만!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놈이 사라질 때까지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천마상을 완성하고도 계속 주술 공격을 날리던 사공척이 갑자기 픽, 하고 쓰러져 버리는 건 또 무언가?

‘변신의 악영향인가, 야차 소환하느라고 내력 소모가 많았나?’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때 잘 죽어줬다는 생각도 들었다. 건달바왕의 체력도 상당히 깎인 상태고, 사공척은 주어진 임무를 할 만큼 했다. 괜히 건달바왕 다 잡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사공척까지 상대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골 때리는 상황이겠는가.

겉으로 보기엔 건달바왕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건달바왕의 공격 한 방에 야차의 몸뚱이가 뭉텅이로 찢겨 나가곤 했다. 그런데 찢겨져 나가는 살점들을 자세히 보니 최초의 조그만 귀신의 형체를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고, 본신(本身)에서 떨어진 놈들은 저절로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는 거대 야차의 몸을 복구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야차와 건달바왕의 싸움이 스무 합쯤 진행됐을 때였나 보다.

건달바왕이 야차의 재생 능력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삼지창의 가운데 창날을 뽑아들었다. 창에 박혀 있을 때엔 몰랐는데, 그건 완전한 형태의 금강저(金剛杵)였다.

<금강멸정(金剛滅定)이다! 이제 그만 명부로 돌아가라!>

건달바왕이 크게 외치면서 금강저로 땅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진동음과 함께 방 안이 황금빛 서기로 가득 찼다. 얼마나 강렬한 빛이었는지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거대 야차는 건달바왕의 필살기를 막지 못했다. 스멀스멀 녹아내리더니, 이내 곧 환영처럼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강력한 필살기에 너무도 허무한 종말이었다.

“이광아! 빨리 붙어!”

명령을 내렸는데 듣는 놈들이 안 보인다. 재빨리 장내를 둘러보니 상황이 이상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광우와 광견만 죽어 있는 게 아닌가!

‘미치겠네!’

쟤들이 왜 저렇게 됐는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남은 인원은 겨우 셋뿐이었고, 이젠 나도 몸 사릴 형편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건달바왕 몰이를 하게 됐다. 궁신탄형으로 뛰어 들어가서 무영각과 팔방풍우로 정신없이 몇 차례 가격을 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날 쫓아오는 건달바왕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쐐애액!

안 봐도 뻔했다. 재빨리 나려타곤으로 오른쪽으로 굴렀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그 자리에 쾅, 소리를 내며 삼지창이 꽂혀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곤 또 달렸다.

앞서 몹 몰이를 했던 이광과 달리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대비주 파훼.

-나모 다나다라 야야.

“창룡음!”

진언이 들리자마자 창룡음을 외쳤다. 하지만 역시나 이어지는 다음 대비주를 막진 못했다.

정말이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대비주 공격에도 파도와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일협만이 구석으로 처박혔을 뿐이었다. 내가 일협처럼 넘어졌다면, 바로 연이어 들어오는 건달바왕의 삼지창에 꼬치가 되어 그걸로 게임 끝이었을 것이다.

물리 공격은 열심히 도망 다니기만 하면 됐지만, 간혹 터져 나오는 대비주엔 점점 체력이 깎여 나갔다. 한 번 대비주에 맞을 때마다 체력이 10퍼센트나 깎였고, 이제 남은 체력은 겨우 5할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건달바왕을 달고 도망치던 나보다 일협이 먼저 사망하고 말았다. 그도 대비주 공격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일협 체력이 나보다 더 적었나?’

하여간에 이젠 상황이 더 급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달랑 둘!

짧은 순간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이대로 도망갈 것이냐! 아니면 둘 남은 우리가 전력을 부어서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느냐!

계산은 금방 나왔다. 이대로 계속 도망만 가다가 결국엔 대비주에 맞고 죽느니, 건달바왕의 체력이 얼마 안 남았다는 판단에 도박을 하기로!

“파도 님! 곧 붙겠습니다. 제가 붙으면 바로 마지막 공격 시작해봅시다!”

파도가 알았다고 외쳤고, 그 짧은 순간 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요량으로 매난국죽을 소환했다. 문파 등급이 3레벨이 된 덕에 이젠 이류 하급이 아니라 이류 상급으로 업그레이드된 매난국죽이었다.

“지금입니다!”

재빨리 뒤돌아서자 건달바왕이 바로 등 뒤에 서서 삼지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놈의 왼발 언저리로 뛰어들었다.

‘아, 제발… 제발!’

매난국죽과 파도, 그리고 나. 최후 생존자들의 무차별 난타가 시작됐다.

우르르르~ 쾅!

건달바왕의 바닥 찍기 공격이 떨어졌고, 우린 또 한 번 뒹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매난국죽은 전부 소멸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체력이라곤 겨우 1할!

누워 있을 틈이 없다. 다시 달라붙었다. 독사출동에 팔방풍우, 무영각을 정신없이 쏟아냈다.

<크아아아악!!>

[레벨이 303에서 333으로 상승했습니다.]

[명성이 27,210 상승했습니다.]

쿵!

건달바왕이 죽어가며 외치는 비명,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 마지막으로 그 거구가 꼬꾸라지는 소리가 연이어서 들려왔다.

‘휴, 용케 잡긴 잡았네.’

등은 땀으로 축축이 젖었고, 컨트롤러에도 땀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컨트롤러를 쥐고 있는 팔은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잔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아, 비사문천이여… 그대를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오…….>

건달바왕이 천계로 강제 소환당하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어쨌든 잡았다. 6명 참가해서 둘만 살아남았지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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