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파신묘(1)
현운자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왠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현운자가 누굴까 생각을 기억을 더듬던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마치 날 우상처럼 대하던 이 사람은 당금 강호에서 오히려 나보다 더 유명한 인물이었다.
전체 랭킹 2위. 무당파 제일의 고수인 그 현운자였다.
“이거 참, 이제야 기억이 났네요. 랭킹 이 위인 그 현운자 님인 줄도 모르고 너무 막대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
“아닙니다. 랭킹은 별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하죠. 저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유명하신 조연 님을 만나게 돼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꼴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 사람 말투가 바뀐 거지? 내가 비급 분배하자고 했던 그때부터 그런 것 같은데… 장난은 그만하자는 건가?
“비급은 필요 없어요. 구대문파이다 보니 잡기술을 제외한 외부 무공은 배울 수 없거든요. 그나저나 저 NPC는 왜 죽인 건가요?”
그랬지. 구대문파, 오대세가와 같은 대문파들은 타 문파의 무공은 못 배운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저거 무영신투라고, 현상금 걸린 NPC였어요. 그나저나 비급이 필요 없다면 돈으로라도 드릴게요. 배우지 못한다고 해서 저 혼자 차지하는 건 말이 안 돼요. 현운자 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못 잡았을 테니까요.”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면서 현운자는 한사코 날 말렸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수중에 돈이 없는 관계로 현상금을 타기 위해 낙양 포도아문(捕盜衙門)을 찾았다.
낙양부 옆에는 낙양 포도아문이 있고, 책임자는 추관(追官)이다. 이 추관 밑으로 몇 명의 순검(巡檢)들이 있고, 그중 한 명이 현상 수배를 담당하고 있었다.
“허허, 대단하십니다! 특급 의뢰를 해결하시다니 놀랍습니다!”
검은 관건을 쓴 거만한 관리는 의뢰를 보고하자마자 태도가 싹 바뀌었다.
[은자 1억 냥을 획득했습니다.]
[명성이 3만 상승했습니다.]
[황금배첩을 한 개 획득했습니다.]
의뢰 완료라는 글이 뜨면서 몇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돈의 액수야 알고 있었지만, 명성의 상승폭은 장난이 아니었다.
3만의 명성이면 아까 무영신투를 잡으면서 떨어진 걸 만회하고도 2만 5천이나 오른 셈이었다. 난주를 통일하면서 대폭 상승한 명성치에 지금 먹은 것까지 합치면 이제 4만이 넘는다. 최소한 명성으로는 강호 제일이라고 자부해도 될 듯했다.
“그럼 또 수고해주십시오. 아무래도 일급 이상의 강호인들은 관아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면이 많으니까요.”
관리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날 상대해주지 않았다. 나도 뭐 더 볼일도 없고 해서 바로 포청에서 나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관공서란 역시 친해지기 어려운 곳이다.
“아, 이걸 어찌해야 하나…….”
“예? 왜 그러시는데요?”
“깜박했네요. 일정 등급 이상의 의뢰를 완수하면 배첩을 준다고 했는데, 방금 전에 그 배첩이라는 걸 받았거든요. 그것도 최상급으로 보이는 황금배첩을요. 근데 이게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아마 제가 받은 게 강호 최초의 황금배첩 같은데 말입니다.”
배첩(拜帖)이라고 하면 일종의 명함이다. 타인을 방문했을 때 객이 주인에게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알리는 용도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고 다음에 자기를 찾아올 때 신표로 쓰도록 하는 역할도 있다.
그런데 이 배첩의 색이란 건 아무렇게나 고를 수가 없다. 황금색은 황실에서만 쓸 수 있는 색. 그렇다면 이 황금배첩은 내가 쓰는 게 아니라 황실을 들락거릴 수 있는 일종의 초청장과 같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무인과 황실은 불가근불가원의 관계. 개와 닭 사이 정도겠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 혹시 운이 좋아 단서철권이라도 얻으면 이거야말로 운영자와 친구 먹는 기연이라고 봐도 되고.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어쩌면 이 배첩은 은자 1억 냥의 가치보다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급 NPC를 언제 또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특급이라고는 해도 무영신투는 빠르기만 했지 무공은 절정급이라고 봐주기도 어려웠으니… 다른 특급 의뢰는 애당초 꿈꾸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아니요. 그럼 더더욱 저는 신경 안 쓰시는 게 나을 겁니다. 돈이라면 모르겠지만, 배첩이라면 조연 님에게 더 유용할 테니까요. 무당파에 있다 보면 아쉬운 게 하나도 없답니다. 무공이야 성실하기만 하면 알아서 절정무공까지 제공해주고, 외부에서 위협받을 일도 없거든요. 조연 님은 대문파라는 배경이 있는 게 아니니 아마 요긴하게 쓸 데가 있을 겁니다.”
말이야 바른 소리지만, 욕심을 완전히 접어버릴 만큼 허섭한 아이템은 아닌데…….
하여간 무영신투 한 명 잡고 1억 냥과 초절정 신법비급 천리종무영, 거기다 황금배첩까지 얻었으니 엄청난 대박이었다.
다른 아이템에 대한 양보의 대가로 난 현운자에게 현상금 1억 전부를 그에게 건넸다. 가치상으론 아무리 봐도 동등한 분배가 아니었지만, 내가 더 이상 그에게 내줄 것도 없고, 그도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큰 도움을 받았기에 나는 현운자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강호에선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1억이라는 거액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난주에서 2억을 뿌려 양 문파의 싸움에 살인 면허까지 받은 적이 있는 내 경험으론, 무당파에서 충분히 현운자에게 면죄부를 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현운자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흑점에 정보 의뢰를 하러 간 게 아니었을까?
“현운자 님, 그런데 아까 흑점에 왜 갔던 겁니까? 혹시 무당파에 끌려가지 않는 법이라도 의뢰하려고 했던 거예요?”
“네? 아뇨, 아뇨. 그거랑 전혀 상관없어요. 그냥 무공 때문에 그랬어요. 음… 말해도 될라나 모르겠네요. 조연 님이라면 알고 계실지도 모르니 말씀드릴게요.”
“중요한 거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꼭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말씀드릴게요. 제가 태극권을…….”
현운자가 해준 이야기는 내가 흑점에서 의뢰했던 그 이야기와 똑같았다. 태극권 심결의 수련법을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삼류무공 육합권을 대문파의 진산절기 태극권에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겠지만, 난 당빈에게 들었던 그대로 현운자에게 일러주었다.
“이거 참, 좀 어이가 없네요. 열심히 한 사람들 발목 잡는 건 어느 게임을 가도 마찬가진가 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 하지만 그 간극을 잘 헤집으면 다른 기회가 오는 것이고. 하여간 심결무공의 경우는 확실히 좀 심한 부분이 있었다. 도대체 다른 무공을 수련하고 싶어도 못하니, 시간만 날리는 기분이다.
“능력이 대단해서 그런가 보죠. 일반 절정무공들보다 더 강력한 위력일 것은 뻔하고, 확실히 지금 풀어버리면 몇 명이서 천하 제패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까요.”
“그래도 좀 그러네요. 전 달랑 태극권 하나만 배우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남들보다 뒤처지게 되는 거잖아요.”
랭킹 2위라면 충분히 그런 하소연을 할 만도 하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한테 받는 압박이 나보다 훨씬 심할 테니까.
“그럼 전 이만 본산에 다녀올게요. 궁금한 것도 풀었고, 되든 안 되든 문파로 돌아가서 빌어봐야겠습니다.”
혹 좋게 해결이 되면 현운자는 전서구를 보내겠다면서 친구 등록을 하고 사라져 갔다.
“잘 될라나 모르겠네. 그럼 나도 사냥이나 하러 가봐야겠다.”
굳이 낙양에 더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난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2주라는 휴가 기간이 아직 한참 남은 데다, 난주의 삭막한 사막을 떠올리니 돌아갈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운자와 헤어지고 시간이 늦기도 해서 나도 바로 접속 종료를 했다. 그리고 간만에 강호 홈페이지 하남성 게시판에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봤다. 휴가를 즐기러 왔으니 여행지 정보를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다음 날.
밤새 홈페이지에서 알아놓은 사냥터에 들르기 전에, 간만에 내 랭킹을 확인하러 갔다. 무영신투를 잡아 크게 오른 명성 때문에 어쩌면 랭킹 10위 안에 이름이 올랐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낙양에 오기 전에 확인했을 때는 그간에 치른 문파대전 덕을 봐서 13위였었다.
[개인 순위
1위. 공갈대사(하남, 소림파)
2위. 현운자(하남, 무당파)
3위. 강호제일(사천, 당문)
4위. 담경(감숙, 사황성)
5위. 무룡(섬서, 화산파)
6위. 백두산호랑이(요동, 장백파)
7위. 파도(하남, 무소속)
8위. 일협(하남, 무소속)
9위. 조연(감숙, 소요파)
10위. 백발마녀(사천, 당문)]
[조연
현재 별호:일수경천
레벨(2,831위) 무공(16위) 명성(1위)
비무(32,917위) 문파대전 기여도(1위)
문파 가중치(+310 포인트)
특수 기술 가중치(+1만 포인트)
종합:9위]
분명 명성이 10위권 밖이었던 것 같은데 단숨에 1위로 올랐다. 그 덕분에 랭킹 9위에 이름이 올라왔고.
그나저나 비무 점수만 좀 올리면 랭킹 1위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쪽 점수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나냐.
강호에선 한 번 겨룬 인물과의 비무는 한 달이 지나야 다시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즉, 비무는 계속적으로 할 수 있지만, 랭킹 포인트는 획득하지 못한다. 그런 예방 장치 때문에 몇몇 지역에서는 비무 대회를 개최해 점수를 나눠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 없는 감숙성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사냥 첫날은 오랜만에 복우산의 마천채에 들렀다. 마천채는 이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냥터였다. 다만, 원체 좁은 공간인 데다 느린 몹 생성 속도까지 합쳐져 유저들의 경쟁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나 마천채주가 나오는 시간대에는 소림과 개방 출신의 고수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쏟아져 나와 작은 분쟁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들이 아예 마천채주에게 손도 못 대게 하는 상황까진 아니었지만, 분위기의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이유로 대문파 소속이 아닌 일반 유저들이 보스급 몬스터를 잡는 건 요원해 보였다.
마천채에서 본 그런 장면은 하남성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알려진 사냥터는 알려진 대로, 숨겨진 사냥터는 숨겨진 대로 어느 정도 수익이 나오는 사냥터에는 모두 소림과 개방의 인물들이 보였다.
특히 꽤 괜찮다고 알려진 곳에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양대 문파의 척살조들이 항상 주재하고 있었다. 이광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잦은 살인으로 얼굴이 흉측하게 변한 척살조들은 곳곳에서 적대 캐릭터들을 감시하고 분쟁을 해결한답시고 새로운 분쟁을 만들어내곤 했다.
강호 홈페이지에서 알아낸 파신묘(破神墓)라는 곳은 하남성 최고수급들이 최근에 레벨 업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홈페이지를 한참이나 뒤져 알아낸 파신묘의 위치는 개봉 서남쪽 방향으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낙양 기준으로는 2시간가량.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사냥 나흘째. 웬만한 곳은 이미 다 경험한 나는 이 파신묘를 오늘의 탐험지로 정했다.
대략의 위치만 알고 찾아 나선 길이라 낙양에서 겨우 2시간 거리라는 이곳을 한 시간을 더 헤맨 후에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파신묘는 이름처럼 다 쓰러져 가는 사당의 모습이었다. 밖에서 보기엔 도저히 사냥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손바닥만 한 사당이었다. 우연히 그곳에 들락거리는 소림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면, 영영 못 찾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사당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 밖에서 보이는 것은 겨우 파신묘의 입구밖에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부엔 사당에서 모시는 신상(神像)이나 제기(祭器) 따윈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지하로 뻗은 돌계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계단을 타고 조금씩 내려가자, 그제야 여기가 사냥터라는 걸 알려 주듯 몹 잡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화 소리, 외치는 소리를 제외하곤 타격음이라곤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컨트롤러 음성 출력 장치가 고장이 난 건가 하고 잠깐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계단을 다 내려오자 그 의문은 바로 풀렸다.
“우리 동넨 강시들이 날뛰더니만, 이 동넨 귀신인가?”
홈페이지에선 파신묘의 대략적인 위치만 언급하고 있어 몬스터의 종류까진 알지 못했다. 사당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살짝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귀신은 무인들이 잡는 게 아니라 도사나 승려들이 해결한다. 강시들을 상대하는 것도 그쪽 계열이 더 좋을 것이다. 때문에 이 원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들을 상대하는 데 내가 배운 무공의 특성은 맞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왜냐고? 나는 바보가 아니고, 저들 전부가 나보다 더 뛰어난 강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쟤들도 잡는데 나라고 못 잡을 리 없다.
일단 원귀들이 달라붙지 않게 계단에 앉아 어찌 잡는지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잠깐 살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간혹 소림의 승려들이 무슨 항마주를 펼치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다들 일반적인 무공으로 원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그냥 일반 무공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던 건가?’
시작도 안 해보고 겁먹을 이유는 없다. 정 안 되면 도망이라도 치면 그만이니.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 귀신 한 놈(?)을 살살 계단 쪽으로 끌고 왔다.
‘제길!’
진결육합권의 권로에서 나오는 파공성만 간간이 들리고, 타격음이라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물체감 없는 귀신 탓도 있겠지만, 정말로 한 대도 못 맞히고 있는 이유가 더 컸다. 혹시나 간혹 나오는 권풍이라면 이놈에게 타격을 줄 것 같아 우직하게 계속 버텨 봤지만, 역시나였다.
결국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후다닥 계단을 밟고 사당을 벗어나고도 한참을 더 달려서야 처녀 귀신의 구애를 떨칠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고 다시 파신묘 지하로 들어와 다른 사람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살펴봤지만, 혼자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별수 없이 께름칙하지만 앞에서 사냥하고 있던 소림 무승을 잡고 물어봤다.
“저기요, 어떻게 해야 원귀한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건가요?”
나름대로 정중히 물어봤건만, 무승은 날 힐끗 쳐다보더니 그냥 사냥만 계속할 뿐이었다.
‘거참, 동네 한번 삭막하네.’
비단 그 무승만이 아니었다. 그 옆의 사람에게 물어봐도 짜증난다는 듯이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너희들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서 잔머리의 대가 조연이 어딜 가겠냐! 나 혼자 알아서 다 해먹으마!’
아주 살짝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를 무너뜨린 놈들의 예의 없음에 오기가 솟구쳤다.
보통 게임에서 그 사냥터만의 특수 사냥 스킬은 사냥터 주변에서 나온다. 놈들이 알려 주지 않는 이유도 특별히 대단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대단하다면 이런 일반 던전이 아니라 출입부터 까다로운 특수 던전일 테니까.
몇 가지 가정을 세우고 잠시 궁리해보았다. 때론 뒤에서부터 접근하는 게 편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파신묘는 여러 층이 단계적으로 배치된 지하 던전이었다. 이 지하 1층에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1층에선 할 짓이 없었기에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의 몬스터 배치는 1층과 사뭇 달랐다. 내심 원귀들의 강화 버전이 나올까 염려했지만, 이곳은 무녀(巫女)와 검은 도포를 걸친 도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들은 생긴 것답지 않게 꽤나 앙칼진 면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왔느냐!”
내려가자마자 나하고 거리가 상당한데도 무녀가 날 인식하고는 대뜸 겁을 줬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뭐라 뭐라 중얼거리자 내가 딛고 있는 바닥에 괴상한 문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문자에서 일어난 이상야릇한 물체들이 내게 손을 휘두르며 몸을 부딪쳐 왔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갔다. 정황상 분명 공격형 주술 같은데, 내겐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장난하나?’
무녀가 주술을 외우는 동안, 도사도 한껏 폼을 잡고는 누런 부적에 피를 뿌리고 있었다. 피를 다 묻힌 부적이 도사의 손짓을 따라 허공을 너울너울 거슬러 와서는 내 눈앞에서 픽, 하고는 불이 붙었다.
‘이건 또 뭐냐?’
무녀의 어이없는 공격 때문이었을까? 도사의 짓거리도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심각하지 않은 공격이었다.
크악!
부적에서 나온 건 괴수였다. 생김새는 지옥에 있다는 야차쯤? 아니, 그보다는 급수가 떨어지는 귀졸(鬼卒)쯤으로 보였다. 비리비리한 몸에 놈이 들고 있는 곤봉이, 내 짐작이 맞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무녀가 불러낸 이상한 귀신들은 무시해도 괜찮았지만, 이 지옥의 나졸들은 그렇지 않았다. 생김새와는 달리 꽤 둔중한 타격감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추산과 무영신투 같은 고수들을 상대해본 내가 이따위에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고목문에서의 경험대로 소환수들은 무시하고 주술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역시 세지 않았다. 오히려 고목문 제자들보다 약했다. 겨우 두어 대를 맞고 놈들은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놈들이 불러낸 녀석들도 생명이 다해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이거 참… 도대체 뭐가 뭔지.”
수준이 너무 낮아서 난감했다. 1층은 말도 안 되게 강하고, 2층은 말도 안 되게 약했다. 그러고 보니 2층에서 사냥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뭐냐, 이게?”
레벨 업에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딱 1백 마리만 잡고 가기로 했다. 이유도 없이 몹을 배치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 지옥의 도깨비들도 잡아봤지만, 역시 소환수가 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옥에선 은자 쓸 일이 없으니 녀석들이 들고 다닐 일도 없겠지.
그렇게 대략 30마리쯤 잡았을 때였나? 무녀가 숨넘어가는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더니 비급 하나를 땅바닥에 흘렸다. 아이템을 집어 들자 획득 메시지가 하나 떴다.
[‘기성형’을 획득하셨습니다.]
“기성형은 또 뭐냐? 기를 형체화한다? 검기 같은 걸 만드는 것인가?”
기성형(氣成形)은 무공이 아니라 일격기였다. 정말 검기를 만드는 무공인지 테스트해보려면 일단 비급부터 배워야 했다.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운기 행공을 하기로 했다. 일격기는 운기 행공이 겨우 30초면 끝나니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무사히 운기를 마치고 기성형을 단축키에 저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큰 기대를 걸고 단축키를 눌러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아니, 뭐냐고, 이게!”
아무래도 일반적인 개념이 아닌 것 같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보통의 일격기는 단축키를 누르기만 하면 발동이 된다.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검기라는 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투로에 검기를 담아야 의미가 있지, 그냥 검기 발출만 해서는 멋 내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한참 동안 온갖 경우의 수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니 결국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기성형은 무공이 발동하는 동안 계속 버튼을 누르고 있어야 활성화되는 것이었다. 그건 상당히 손가락에 무리가 가는 일이었고, 오랜 시간 누르고 있으면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날 가능성도 많은 기술이었다.
기성형의 내공 소모는 거의 진결육합권만큼이나 됐고, 진결육합권과 같이 사용했을 땐 그래서 평소보다 2배에 가까운 내공이 소모됐다. 하지만 무한 내공에 가까운 나에게 그 정도는 약과라고 치부할 수 있다. 문제는 손가락 마비 증세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개발자 녀석들이 그것마저 고려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이제 일 층 귀신들한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알아봐야지?”
테스트는 충분히 해봤다. 남은 건 실전에서의 효용성뿐. 바로 1층으로 올라갔다.
2층과 달리 여남은 사람들이 1층에서 레벨 업을 하고 있었지만, 나 따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나도 이 건조한 사람들은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앞에서 얼쩡거리는 원귀 한 놈을 잡고선 테스트를 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기성형을 발동시키자 주먹에서 낮은 울림이 들려온다. 게임 큐브의 스틱에서도 미약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권기가 무언지 실감이 난다.
권기에 휩싸인 주먹이 육합권의 투로를 차근차근 펼쳐 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원귀의 공격은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 서너 번 주먹이 놈의 원신(原身)을 타격하자 허공에서 스러져 버렸다.
“이거 참, 여기 애들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일단 지금은 사냥터 탐색이 우선이다. 어떤 아이템을 주는지만 파악하면 다음 코스로 진출할 수 있다. 딱 1백 마리만 잡고 내려가기로 했다.
몇 마리를 잡고 보니, 원귀들 수준은 기를 발출할 경지만 되면 간단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한두 마리로는 성이 안 차 몹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곳으로 거리낌 없이 몸을 던졌다.
왠지 아니꼽다는 다른 유저들의 눈초리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긴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러게 요령을 알려 줬으면, 얌전하게 사냥했을 거 아니냐.
광장 중앙에 자리를 잡으니 순식간에 대량의 몹들에게 둘러싸였다. 족히 30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픽! 휘익!
하지만 원귀들의 공격은 빠르지도 세지도 않아서 별 위협은 되지 않았고, 내 주먹만 사방으로 춤을 추었다.
그렇게 대략 30분은 사냥을 했나 보다. 도무지 쉴 틈을 주지 않고 들어오는 공격 때문에 그사이에 멈출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이미 목표했던 1백 마리를 훌쩍 뛰어넘어 5백 마리쯤은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레벨이 302에서 303으로 올랐습니다.]
‘달랑 삼십 분 사냥했는데 레벨이 올라?’
역시나 최고렙들의 사냥터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그때 즈음부터는 원귀들도 득달같이 달려들진 않았고, 30분 만에 몹이 떨어뜨린 아이템을 회수할 시간을 갖게 됐다.
원귀들이 떨어뜨린 아이템이라곤 ‘기성형’ 비급 10권과 동열쇠 3개였다. 귀신들이 은자를 떨굴 일도 없고 특별한 아이템을 줄 몹도 아니라 별 기대를 않긴 했지만, 이렇게 거지들일 줄은 몰랐다.
기성형 비급은 너무 잘 떨어져서 제값 받긴 힘들 것 같았고, 열쇠는 아마 지하 2층에 있는 철문을 따는 데 쓰이는 일회성 아이템일 것이다. 그러니 30분 동안의 수입은 은자 0냥인 셈이었다. 한마디로 이 동네는 순전히 레벨 업 장소밖에 안 됐다.
대충 정리를 하고 2층으로 내려가면서 날 아니꼽게 바라보던 유저들을 흘겨봤다. 사냥할 때와는 왠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근처에 가니 무슨 죄라도 지은 양 움찔움찔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크큭. 하기야 내가 봐도 좀 괴물 같았지.’
무한에 가까운 내공에다 높은 회피력이 아니면 광장 중앙에서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마 녀석들도 처음엔 날 정신 나간 놈이라며 비웃었을 게 뻔하다.
왠지 꼭 복수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2층으로 내려갈 즈음이었다.
[현운자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일이 무사히 해결됐나?’
<수신자:조연
조연 님, 지금 어디세요? 전 낙양입니다.
발신자:현운자>
편지엔 별다른 내용 없이 그냥 내 위치만 묻고 있었다. 어찌 일이 잘 풀렸는지 적혀 있길 바랐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마도 잘 해결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결말이 아니라면 지금쯤 무당파 뇌옥에 갇혀 있을 테니, 아마 내 짐작이 맞을 것이다.
바로 현운자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괜히 나처럼 헤매지 않게 자세히 위치를 알려 주고,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혼자서 3층 탐험을 하려고 했는데, 현운자 때문에 사냥을 하면서 좀 기다리기로 했다.
2층에서 무녀와 사이비 도사를 상대로 두어 시간을 노니, 현운자가 파신묘 2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조연 님! 오랜만입니다!”
웃으며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일이 잘 풀렸나 보다.
“네,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잘 해결이 됐나 봅니다?”
“조연 님 덕분에요. 정말 강호에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나 봐요. 계율을 책임지는 사람이 그렇게 돈을 밝힐 줄이야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하. 그게 계율이랑은 상관없죠. 채소만 먹는 도사들이라고 해도 돈 쓸 일은 많으니까요. 어쨌든 잘 해결됐다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난 아직 파신묘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현운자에게 내가 겪은 일들을 잠깐 설명해주고 기성형 비급 하나를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배우세요. 그거 배우고 나서 삼 층 탐험이나 갑시다.”
그런데 현운자가 잠깐 비급을 쳐다보더니 도로 내게 돌려줬다.
“전 이미 이거 배웠어요. 전에 강호 패치되면서 문파에서 가르쳐 줬던 겁니다.”
현운자가 해준 말을 들으니, 왜 1층에서 대문파의 유저들이 짜증난 표정으로 날 무시했는지 이해가 갔다. 문파에선 거저 알려 주는 이런 잡기 하나 못 배운 난 여기서 사냥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다만, 말로 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짐작을 하니 놈들의 행태가 더 짜증났다. 자기들 고생해서 알아낸 사냥법을 알려 주기 싫어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단지 자신들은 문파에서 공짜로 얻은 무공을 가지고 날 멸시한 게 아닌가.
더욱 놈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달리 약올려줄 방법도 생각도 없었다. 아직까지는 그저 남남일 뿐이니.
“그럼 이거나 받으세요. 삼 층으로 내려갑시다. 원귀들은 검기가 아니면 잡지 못하니 염두에 두시고요.”
난 동열쇠 하나를 현운자에게 줬다. 달려드는 몹들을 무시하고 우린 광장을 재빨리 가로질러갔다.
내가 먼저 열쇠를 철문에 꽂았다.
끼이이익-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젖혀지고, 그 뒤로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갑시다!”
굳이 현운자의 열쇠를 쓸 필요도 없었다. 현운자가 철문을 통과할 때에야 문이 닫히는 걸로 봐서, 1인당 열쇠 1개는 아닌 듯했다.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이전의 계단들보다 조금 더 길었다. 계단 숫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공간이 크다는 의미.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열쇠까지 갖춰야 출입을 허용하는지 더욱 기대가 되었다.
계단 끝에 이르자 1, 2층보다 더 어두운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유등(油燈)이 몇 개 걸려 있긴 했지만, 광장을 다 비추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왜 아무것도 안 보이죠?”
“저도 여긴 처음입니다.”
“…죄송요.”
“일단 둘러보죠. 흩어지지 말고, 절대 광장 중앙으로 가지도 마세요.”
일단 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벽을 따라 조심히 발걸음을 옮기길 1분쯤 했을까? 꼭 지옥에서 튀어나온 야차처럼 생긴 녀석이 날 향해 거대한 박도를 휘둘러왔다.
“야, 야! 초면부터 칼질하는 게 어딨어! 우리 말로 하자!”
“키킥.”
생긴 게 무섭긴 했지만, 얼굴만큼 실력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녀석의 박도는 우릴 스치지도 못하고 애꿎은 바닥만 찍고 말았다. 그사이 현운자는 재빨리 부적을 꺼내 야차에게 날렸고, 나도 권기가 가득 담긴 육합권을 시전했다.
그런데 야차 녀석의 공격은 무시할 만했지만, 몸뚱이는 그렇지 않았다. 놈은 철갑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유효타를 먹여도 도무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현운자도 놈을 상대로 태극권을 펼치고 있었는데, 철갑이 적잖이 짜증났나 보다. 다시 부적을 꺼내더니 놈을 향해 뿌렸다.
“해갑(解鉀)!”
아마 갑옷 방어력을 낮추는 무공이었던지, 그제야 놈이 맞는 소리가 ‘텅텅’에서 ‘퍽퍽’으로 바뀌었다.
“이 지겨운 놈! 제발 좀 죽어라!”
그 말이 통했나 보다. 철갑 야차가 결국 꾸르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현운자가 쓰러진 야차를 보고 한마디 했다.
“징그러운 녀석.”
철갑 야차 한 마리를 잡는 데 무려 5분이나 걸렸으니, 충분히 그런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보내며 잡은 철갑 야차는 우리에게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았다. 은자 한 냥 떨구지 않는 놈을 보니 입맛이 썼다.
“계속 돌아보죠.”
철갑 야차의 무식함을 겪어봤기에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런데 아까 누가 웃은 거죠?”
“엥? 무슨 소리예요?”
“아니, 아까 누가 키킥, 그러고 웃었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난 현운자가 웃는 소린 줄 알았는데?
그때였다.
“접니다.”
앞만 보고 살금살금 전진하는 내 뒤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 게 재밌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사내가 정중히 사과를 해온다. 그런 사내의 등 뒤로 또 다른 사내 한 명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대답을 하고 사내를 바라보니 의외였다. 소림 승도 아니고 개방 거지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낭인이세요? 여긴 소림, 개방 사람들만 오는 줄 알았는데.”
“그런 구분이 있겠습니까? 그저 능력만 되면 어딜 가도 상관없지요.”
사내는 별 신경을 다 쓴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저흰 좀 둘러볼게요.”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사람들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현운자도 그런 낌새를 느낀 건지 내게 조용히 물어왔다.
“글쎄요, 두고 봐야죠. 근데 별로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네요. 사냥터에 사람이 있는 거야 당연한 거니까요.”
그렇게 계속 전진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도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까지 도달했다.
“별로 몹이 없나 봅니다. 한 바퀴 도는 데 겨우 한 마리 만난 걸 보면요.”
“그럼 광장으로 조금씩 가보죠.”
내가 할 말을 현운자가 미리 앞질러 말했다.
조금씩 광장 중앙으로 다가가자, 등잔 빛이 미치지 못한 탓에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끼얏-
그때, 어둠속에서 갈피를 못 잡는 날 향해 무언가가 공격을 해왔다. 다행히 보이지도 않는 상대의 공격을 보법이 흘려보낼 수 있었다.
어슴푸레 놈의 윤곽이 보인다. 최소한 반투명한, 1층의 원귀 같은 놈은 아닌 것 같았다.
“화광(和光)!”
현운자가 부적을 날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광장이 갑자기 밝아졌다. 불붙은 부적이 허공에 멈춰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이젠 라이트(Light) 마법까지 쓰네. 이거 무협 게임 맞아?’
하여간 현운자 덕택에 사냥이 훨씬 편해졌다.
부적 때문에 우리가 있던 주위 반경 5장쯤은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 중앙이라 그런지 꽤 많은 몬스터가 있었다. 그리고 날 공격했던 그놈도 볼 수 있었다.
아니, 놈은 아닌가? 생긴 건 완전 염라부 소속의 도깨비인데 수놈이 아니었다.
“아깐 야차더니 이번엔 나찰이네요.”
현운자 말대로 이 녀석 머리 위엔 ‘나찰’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찰의 공격은 좀 전의 철갑 야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반적인 물리 공격만 해왔다. 다만, 철갑 야차보다 약간 빨랐고, 좀 더 박투에 가까운 공격 패턴을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철갑 야차처럼 방어력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현운자가 그 해갑이라는 부적을 쓸 필요도 없이 우리의 합공에 야차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얘는 너무 약하네요.”
나찰도 별다른 아이템을 주진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 잡느라 조금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다른 몹들이 공격을 해오지 않는다. 단지 적 인식률을 낮게 설정해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어쨌든 놈들이 달려들지 않아서 사냥이 편해졌다.
그렇게 몇 마리 잡고는 아까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그 파티를 찾았다.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철갑 야차를 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광장 중앙엔 철갑 야차는 안 보이고, 그냥 야차와 나찰녀밖에 안 보였다.
얼마간 더 사냥을 하다 보니 좀 더 확실해졌다. 여기에 있는 놈들은 영양가 없는 놈들이라는 것이. 저 사람들은 여전히 구석을 돌며 계속 철갑 야차만을 사냥하고 있었다.
“현운자 님, 우리도 철갑 야차만 잡죠.”
현운자도 대충 눈치를 챘나 보다. 하긴 20마리쯤은 잡은 것 같은데 건진 게 구리돈 한 문도 안 되니,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철갑 야차는 생성되는 속도도 느리고 몇 마리 되지도 않았지만, 사냥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철갑이 가진 방어력 때문에 잡는 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내심 현운자가 해갑이라는 그 부적을 계속 날려 줬으면 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부적을 만드는 재료인 귀황지와 주사가 워낙 비싼 물건이라 현운자가 들고 있는 부적이 몇 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냥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서, 우린 저쪽 파티가 몇 번 쉬는 동안에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철갑 야차를 잡아갔다. 난 무식할 정도로 내공이 많아서, 현운자는 태극권 자체가 내력 소모가 심하지 않은 무공이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 철갑 야차를 잡아나갔나 보다. 우리 앞쪽에, 3층에 와서 처음 보는 몹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얼핏 놈의 이름을 보니 ‘사신교 은령 사자’ 라고 표기돼 있었다.
딱 놈의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내 손은 궁신탄형이 저장된 단축키를 누르고 있었다.
탁-
그리고 잡고 있던 철갑 야차를 포기하고 은령 사자를 향해 돌진했다. 야차와 나찰이 몇 마리 달라붙었지만, 무시하고 은령 사자에게만 공격을 퍼부어갔다.
현운자도 눈치 빠르게 철갑 야차를 포기하고 은령 사자에게 달라붙었다. 난 잡몹 3마리를 달고 현운자는 철갑 야차를 달고 있었지만, 우린 최대한 은령 사자의 공격에만 신경 썼다.
은령 사자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사이비 교단의 간부급이지만, 역시 종교 집단 녀석들은 별로 무공이 세지 않았다.
한참 두들겨 맞던 은령 사자가 갑자기 주문 비스무리한 소리를 냈다.
“오움 맛사하 구나리 타바하!”
놈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우리 발아래에 빠른 속도로 붉은색의 범어(梵語)로 된 문자진(文字陣)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제법(制法)!”
그때, 현운자가 재빨리 외치며 부적을 날렸다. 그러자 은령 사자가 채 주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문자진은 파훼돼버렸고, 놈은 별다른 수법을 더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네임드 몬스터가 아니어선지 죽어가면서 별다른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짐작대로 지루한 사냥터를 벗어날 아이템 하나를 선물해주긴 했다.
은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