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장. 무영신투 (18/62)

제18장. 무영신투

“거참! 좀 들어갑시다!”

“소속이 확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아, 글쎄! 무당파라고 말했잖습니까!”

“미치겠네. 그러니까 무당파 누구 소개로 왔냐고요! 그걸 말해줘야죠!”

“돌아버리겠구먼. 아니, 아무나 들어가라고 만든 곳을 소개받은 사람만 출입시킨다는 게 말이 돼요?”

“흐유. 여보세요!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무당파라도 여기는 하남성입니다. 그렇게 흑점 구경이 하고 싶으면, 호북성 흑점으로 가시라구요!”

“난 거기 모른다니까! 아는 건 여기뿐이라고! 잡소리 집어치우고, 난 들어갈 거니까 또 막으면 가만 안 둘 줄 아쇼!”

월향루 안에서 소란스런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핏 보아하니 내가 당했던 일을 똑같이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아치들 말처럼 호북성의 무당파 사람이 굳이 다툼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하남성 흑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저 사람 말대로 여긴 또 어떻게 알고 왔을까?

별로 싸움 구경 따윈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바로 월향루를 나가려고 하는데, 양아치들의 말이 내 발을 멈추게 했다.

“아, 나 진짜! 아까 들어간 새끼도 열 받게 하더니만, 당신은 또 왜 그러는데? 야, 일단 조져!”

양아치 두목의 말이 끝나자, 구석진 테이블에서 사내 넷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4명 모두 척살이 임무인 듯, 아이디가 붉었다.

카오들이 무당파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이 개자식들!”

소란을 일으킨 사람은 뭐라 욕설을 하더니 곧바로 맞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무공에 꽤 자신이 있어 보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서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난 곧 제정신을 차렸다.

저 자식이 날보고 새끼라고 말했던가? 저 자식, 아까부터 맘에 안 드네.

바로 날 욕한 놈을 목표로 몸을 띄었다.

퍼퍽!

주먹이 녀석의 뒤통수를 가격하자마자 일격기인 원앙각을 시전했다.

“어? 또 뭐야!”

뒤를 가격당한 놈은 놀라서 뒤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놈이 채 뒤돌아서기도 전에 원앙각이 녀석의 사타구니를 직격했다.

퍽!

현실이라면 아마 깨져 버렸을 일격.

놈은 그렇게 겨우 2번의 공격에 사망해버렸다. 이놈이 약한 건지, 내가 강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명성이 1천 하락했습니다.]

“그러게 입조심을 하고 살았어야지.”

시체를 보고 한마디 해줬다.

그런데 너무 간단히 우두머리가 죽어서일까? 무당파와 양아치들 양쪽 모두 싸움을 멈추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계속 싸우세요. 난 이만 가볼 테니까. 그리고 안 보인다고 주둥이 함부로들 놀리지 맙시다.”

죽을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내 무위에 놀란 것인지 양아치들은 날 막지 않았다.

이제 흑점에서의 볼일은 다 끝났다. 이왕 시작한 거, 마저 일을 마치고 낙양 구경이나 해야겠다.

다음 목적지인 무림맹에 들르기 전에 잠깐 황금산장에 들러봤다.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황금산장에선 날 완전히 출가외인 취급밖에 해주지 않았다. 꽤 높은 명성치 덕택에 내원에 있는 금적산의 얼굴은 볼 수 있었지만, 녀석이 날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내심 강호 인공지능이 업그레이드됐다기에 잘 비벼서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을까 했건만, 순전히 계산 착오였다.

일반 유저와 똑같이 대하는 NPC들 때문에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여기 온 게 영 소득이 없지만은 않았다. 황금산장이 유저들에게 꽤 인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돌아다니면서 만난 유저들만 해도 몇십 명이나 됐으니, 황금산장에 소속된 전체 유저들의 수는 수천 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중 몇몇 유저들의 경우엔 호상단처럼 보이는 NPC들을 데리고 있었다. 한때 기찰당주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던 나도 구경 못한 호상단인데, 아마 그사이 새로 밝혀진 시스템이거나 업데이트가 된 것 같았다.

호상단이라는 무력 단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황금산장이 무림의 큰 축이 될 거라고는 가정할 수 없었다. 정말 상단을 수호하는 단체 정도의 무력일 뿐이지, 무림에서의 입지를 키워줄 실력일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고향 집 구경을 마치고 마지막 목적지인 무림맹을 찾아갔다. 무림맹 무사 임대권은 육합권을 팔고 나서야 구입이 가능한 것이었고, 오늘 찾아온 이유는 무림맹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무림맹 접객당주 노대광과 쌓아둔 우호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파의 문주가 된 데다 명성이 높아져서인지, 아랫사람 대하듯 하던 예전의 태도가 아니었다.

노대광과 몇 마디 말을 섞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맹주 처소인 의천전 쪽에서 시비가 쪼르르 달려와 면접 시간이 됐다고 알려 주었다.

노대광과 같이 의천전 앞에 이르자, 갑자기 튀어나온 맹주 직속 호위대가 이제는 신분 검색까지 했다. 참 가지가지 다 한다.

어쨌든 얌전히 놈들 하는 짓에 모두 응해주고 나서야 드디어 강호 최강 NPC인 무림맹주의 면상을 볼 수 있었다.

“오, 조 문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그래,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왕림하셨소?”

긴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온 호호 할아범이 마치 친한 친구를 맞듯 인사를 건넸다. ‘조운학’이라는 이름 옆의 별호가 이 양반이 얼마나 한가락 하는 양반인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달랑 두 자였다. 검신(劍神)이라는.

대단한 별호도 문제지만, 저번에 소환무사에게 된통 당한 이후로 NPC를 상대하는 게 예전처럼 편하지만은 않다. 난 예의 바른 척 맹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맹주님. 강호의 안녕을 위해 애쓰시느라 불철주야 노고가 많으십니다. 제가 오늘 찾아온 연유는 미력하나마 맹주님의 수고를 좀 덜어드릴까 해서입니다.”

“오, 그거 좋지! 좋아! 그런데 어떻게 이 늙은이의 수고를 덜어주실 참이오?”

늙은이가 눈치가 없는 건지, 능구렁이인지… 대충 말하면 알아서 들어줄 것이지.

“무림맹에 소요파도 동참을 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따로 가입 조건이 필요한지요?”

“흠… 그래요? 그거야 쉽지요. 가입 조건이란 건 필요 없습니다. 그저 강호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지요. 단, 의무 사항은 좀 많답니다.”

그게 그거지, 왜 이리 어렵게 돌려 말하는 것이냐.

“정말 무림맹의 행사에 동참하시겠다면, 당연히 귀하의 문파에서 문도들을 추려 맹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맹이 비록 겉은 그럴싸해도 속 빈 강정 꼴이나 마찬가지니, 문도들이 먹고 입을 것은 당연히 귀하의 문파에서 책임져야 할 것이고, 새로 식구가 늘었으니 머무를 숙소 신축비도 당연히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먹고 입고 자는 것만으로 무림의 평화를 도모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의당 맹의 활동에 쓰이는 운영비에도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겁니다. 아직 문파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다면 되레 맹에 피해만 입히게 될 터이니 신중히 생각해보시오, 조 문주.”

간단히 무림맹에 들어가리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세금을 내야 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어째 말하는 폼이 내 예상액을 우습게 뭉개버릴 것 같다.

“그게 대략 어느 정도나 들어갑니까? 그 자금이라는 것이요.”

“나도 잘 모르오. 궁금하면 오룡각의 외당 당주에게 물어보시오. 총사가 더 정확히 알겠지만, 그 사람은 너무 바빠서 나도 얼굴 보기가 힘드니, 원. 그럼 조 문주, 신중히 생각해보고 다시 볼 수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조운학이 말을 끝내고 그만 돌아가 보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의천전을 나와 오룡각으로 들어섰다. 노대광은 자기 방을 찾아갔고, 난 외당 당주를 만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수많은 문서들에 파묻힌 외당 당주는 참 보기 안쓰러웠다. NPC가 아니라면 참 물어보기 난감할 만큼 바빠 보였다.

어쨌든 일을 보러 왔으니 일을 봐야지.

하지만 간신히 몇 마디 말을 붙여 본 나는 외당 당주의 대답을 듣고는 쓰러질 뻔했다.

‘조! 운! 학! 이 망할 사기꾼 자식 같으니!!’

차출될 인원은 문파 최대 수용 인원의 20퍼센트였고, 부담금은 한 명당 연간 1만 냥. 그리고 특별 맹비로 1년에 무조건 1백 만 냥씩 납입!

얼핏 들었을 땐 그렇게 많은 액수처럼 안 들렸는데, 계산해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게임 속 시간 한 달은 현실 시간으로 겨우 이틀 반이다. 자, 그럼 계산해보자. 1년이면 바깥세상 시계로 며칠? 딱 30일이다. 지금 무림맹에 가입한다면 소요파 문도 2백 명 중의 2할인 40명을 보내야 하니, 한 달에 무려 140만 냥이 들어간다. 뭐, 이 정도야 부담이 안 간다. 하지만 문파 레벨 4면 2백만이 되고, 문파 레벨 5면 3백, 6이면 5백, 7이면 1천1백만…….

적금 부은 것처럼 나중에 도로 내게 오는 것도 아니고, 완전 소모성 자금이니 우습게볼 게 아니었다.

사실, 사황성을 견제할 방편으로 무림맹 가입을 생각한 거였다. 사황성 대 소요파의 전쟁이 아니라 사황성 대 무림맹의 전쟁으로 만들어버리려고 말이다.

그렇게 거창하게 써먹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만, 지금의 문파 재정으론 힘들었다. 문파 레벨이 올라갈수록 건물 증축비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그나마 세력권에서 걷힌 세금은 문파 운영비 대기도 간당간당한 마당이니, 결국 다른 수익 구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10만 마인을 거느린 마교나 개방 같은 경우야 특수한 케이스라고 차치하더라도, 구대문파 같은 경우 보통 문파 레벨이 8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럼 걔들은 다달이 2천1백만이나 내고 있단 말인가?

“이거 참, 무슨 보험 가격이 이렇게 세냐?”

어차피 지금 당장 가입하려던 게 아니라 조건을 알아보러 온 것이니, 기반이 더 탄탄해지면 가입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럼 이제 일은 다 끝난 건가? 얼른 육합권 팔아치우고 쇼핑이나 즐겨야겠다!”

육합권 파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낙양 상점가에 있다가 진결육합권을 산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으면 살짝 골목길로 끌고 가 팔면 됐으니, 일이랄 것도 없었다.

순식간에 5권을 팔고 나니 내 주머니엔 총 1억 냥이란 거금이 들어와 있었다. 겨우 반나절 만에 5천만 냥을 번 셈이었다.

반나절에 5천을 벌었다면, 대체 그놈들은 그동안 얼마나 챙긴 걸까?

몇 개를 더 팔아먹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그 뒷감당을 생각하니 귀찮았다.

2배로 뻥튀기한 돈을 들고 바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갔다. 광견에게 팔아먹을 혈죽선하고 금나수 3개. 그리고 내가 배울 용독술(中). 다른 비급이야 어차피 그게 그거라서 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용독술(下)은 아까 육합권 팔면서 시장 바닥의 유저에게 구입했으니, 바로 상급까지 배우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피독단도 몇 개 구입했다. 일회용인 주제에 한 알에 무려 3백만 냥이나 되는 놈이다. 그러고도 남은 돈은 무림맹 무사 임대권을 사는 데 다 써버렸다.

쇼핑을 끝내고 나니 남은 돈은 달랑 45만 냥. 반나절 만에 5천만 냥을 벌어서 그 절반의 시간 동안 1억 냥을 거의 써버렸다.

우선 전장에 물품들을 맡기고 나서 낙양의 번화가를 편안히 거닐어보기 시작했다.

* * *

확실히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하는 지역이라 그런지 모든 게 감숙의 분위기와 달랐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친구가 돼버리는 감숙과 달리, 대도시의 삭막함이 물씬 배어나오고 있었다.

거의 모든 장사꾼들이 상대가 어수룩해 보이면 입 발린 소리로 수작을 거는 모습이 그랬고, 파티 사냥을 가려고 동료를 구하는 사람들이 첫 대면에서부터 아이템 분배를 논하는 것도 그랬다.

고향에 왔지만, 고향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촌놈이 간만에 서울 구경하러 왔으니 배에 기름칠도 좀 해야 할 것 같아, 예전에 단골이었던 낙양제일루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감숙에선 여기에서 파는 동파육 같은 건 구경조차 못하니 말이다.

탁!

술 한 잔 시켜 놓고 감숙의 모래 바람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옆의 의자를 빼고는 다짜고짜 앉았다.

“안녕하시오!”

게슴츠레 눈을 떠 제멋대로인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어째 낯이 익다.

“나요, 나!”

“네가 누군데?”

“컥! 그새 까먹다니! 내 비록 생긴 게 개성이 없긴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잊힐 만한 인물은 아니거늘! 문제는 형장한테 있는 것 같소이다!”

“미친놈.”

녀석은 흑점에서 소란을 피우던 그 무당파 사람이었다. 녀석도 아마 여기가 낙양에서 제일 큰 주루라는 이야길 듣고 온 듯싶었다.

녀석의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도 심심했던 터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녀석은 결국 흑점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해주었다. 이미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와 버린 후라, 내가 빠져나온 후의 분위기는 더 험악해져서 도저히 강짜 부릴 상황이 아니었단다.

“근데 왜 거길 못 들어가서 안달인 거야? 결혼할 여자가 흑점에 납치라도 됐나?”

“그게 농담이라면 너무 재미없고, 진담이라면 날 잘못 봤소. 도사가 결혼이라니!”

아무리 봐도 정신 상태가 이상한 놈이다. 웃으라고 하는 소린가?

“정말 모르고 묻는 거요?”

“뭘?”

“이거 참…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것 같으니 내 넓은 아량으로 그대의 무지를 깨주겠소. 현재 강호에서 흑점의 소재가 파악된 곳은 단 세 곳. 사천과 여기 하남, 그리고 해남도뿐이라오. 왜 세 곳뿐인지 아시오? 해남은 크기가 작아서, 사천은 위치가 너무 뻔해서. 사천은 대도(大都)라고는 성도(成都)뿐이라 흑점 찾기가 쉬웠소. 반면, 여기 하남은 대도시가 너무 많소. 낙양, 정주, 개봉, 허창. 아마 당신이 아니었다면 흑점 찾기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오. 소문에 듣자하니 그것도 누가 당신 뒤를 밟아서 발견했다고 하는데, 퍽 일리가 있는 말이오. 하여간 호북성의 흑점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오. 그러니 어쩌겠소? 제일 가까운 하남성으로 올 수밖에. 흑점패야 사냥하다 보면 종종 나오는 편이고. 이제 좀 이해가 되오?”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굳이 흑점에 가야만 하는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무당파면 무공 비급 때문에 갔을 리는 없고. 무당파의 부드러운 성격에 장백설삼이 필요한 것도 아닐 테고. 도대체 왜 간 건데?”

“음… 내가 조연 님이니깐 알려 드리겠소. 정보 의뢰하려고 그랬소. 더 이상은 말 못하오.”

후후, 이건 살짝 흥미가 생긴다.

살살 달래봐도 녀석은 한사코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나름대로 감추고 싶은 비밀이라는 건가?

“근데 내가 조연인지 어찌 알아?”

“놈들이 말해줬소.”

“그런데 언제까지 이랬소, 저랬소 할 건가? 별로 재미없소.”

“재미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 난 재밌소. 그러니 내 맘대로 하겠소.”

“당신 맘대로 하구려.”

더 이상 상대해봤자 건더기는커녕 국물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놈이다. 분명 내 정체를 듣고선 뭐라도 건져 먹으려고 접근한 놈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이 재미없어졌다. 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녀석은 그런 내 맘도 모르고 계속 입을 놀렸다.

면장이 어쩌고 태극의 이치가 어쩌고, 사량발천근이니 하는 소리를 녀석은 쉬지 않고 쏟아내고 있었다. 결국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렇게 무당이 좋으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지 그래?”

“이미 사고치고 왔소. 그래서 갈 수 없소.”

“무슨 사곤데?”

나중에서야 후회했다. 녀석은 원래 그리 말이 많은지, 아니면 하소연 들어줄 사람을 용케 만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참 동안이나 쉬지 않고 입을 놀려 댔다. 괜히 물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녀석의 말을 요약해보면, 동료와 사냥을 갔다가 주위 몬스터들을 다 정리하자 심심해서 비무를 했단다. 그런데 때마침 비무를 하고 있던 자리에 몬스터가 재생성돼서 공격을 했고, 재수 없게도 비무를 하느라 체력이 거의 없었던 무당파 동료가 죽어버렸다. 그리고 자기는 동료가 죽게 된 상황에 일정 정도 책임이 있다고 여겨져 무당파 계율원에 끌려갔단다.

분명 동료가 죽었을 때 이 사람은 명성치가 떨어졌을 것이다. 마지막 가격을 안 했다곤 해도, 그 전에 준 데미지로 명성 하락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동문 살해범이라는 인공지능의 판단도 일리가 있었다.

다행히 계율원주는 파문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서의 1년간 참회를 명했고, 도저히 그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던 녀석은 결국 탈옥을 해서 여기 낙양까지 도망쳐 온 것이란다.

거기까지 들으니 도무지 생각이 있는 녀석인지 궁금해졌다. 1년이라고 해봤자 현실 시간으로는 겨우 한 달이다. 탈옥을 해서 죄는 더 가중됐을 터. 언젠간 무당에 돌아가 고급 무공을 배워야 할 텐데, 그때는 더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상황이 황당하긴 했지만, 그러게 사냥터에서 누가 비무 따위를 하라고 했던가.

어쨌든 녀석은 이 이야기를 하는 데만 날 족히 30분은 잡고 있었다. 간신히 이야기의 끝을 보자,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녀석의 쉼 없이 쏟아지는 말 덕택에 미뤄뒀던 사냥할 마음이 생겼다. 하남 유저들의 사냥법을 견식도 할 겸, 용돈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마천채로 가볼 생각이었다.

“어! 어디 가는 거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단 말이오! 이제 본편이 시작된단 말이오!”

무시하고 주루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날 따라오는 건데? 에라, 모르겠다. 없는 인간처럼 상대 안 해주면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가겠지.

툭-

입구가 좁아 나오는 길에 누군가와 부딪쳤다. 게임 속이지만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고, 어쩐지 낯이 익은 그 노인은 괜찮다고 말하며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낙양제일루 밖은 번화가 중에서도 그 중심부였다. 마치 재래시장처럼 노점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고, 곳곳에선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디 가실 참이오?”

아까 부딪친 낯익은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고 있는데, 무당파 탈옥수가 물어왔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속으로만 대답하고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그나저나 저놈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다. 방금 전 어깨를 부딪친 그 녀석은 바로 현상금이 1억짜리인 무영신투였다!

“보자, 보자. 저놈을 어떻게 잡아야 잘 잡았다고 소문이 날까나? 지금은 그물에 들어간 셈인데, 힘이 만만치 않은 놈이라 그물이 찢어지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설마 날보고 하는 말이오?”

“일단 길부터 막아야 하니 애들이나 불러야겠다.”

무당파 녀석이 보건 말건 호위들과 무림맹 무사를 소환했다.

그렇게 5명의 조력자를 데리고 다시 낙양제일루로 들어갔다. 유저들에게 욕먹을 걸 각오하고, 주루 입구를 NPC 무사들로 틀어막았다.

“얘가 어디로 갔을라나? 보자, 보자… 찾았다! 저기 있네!”

마치 발코니처럼 생긴 주루 2층에서 차를 홀짝이고 있는 무영신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도둑놈 주제에 편안히 차 마시는 꼴이라니.

놈은 특급 현상범이다. 도둑놈 주제에 특급이니 분명 빠르기가 족제비보다 더할 것이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놈이 도망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했다.

눈치 채지 못하게 태연히 놈에게 걸어가면서 신안을 켰다. 아직 놈은 내 의도를 모르는 듯 무공을 발동시키지 않았다. 오러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가까이 갈수록 놈의 몸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놈을 지척에 두고서야 물빛 오러가 물결치듯이 몸을 감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오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혹시나 하고 금나수로 무영신투의 팔목을 잡아갔다.

“헛!”

도대체 뭐였을까? 분명 내 금나수가 놈의 손목을 잡았는데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영신투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회피 동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귀신이 조화를 부렸다면 모를까!

재차 금나수를 똑같이 시전해봤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연출됐다.

뭐랄까? 버그 캐릭터를 상대한다는 느낌이 불현듯 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재밌나? 내가 무슨 여염집 처자도 아닌데, 왜 그리 내 손목을 잡고 싶어 안달인가?”

무영신투가 쥐꼬리 같은 수염을 들썩이면서 히쭉 웃는다.

미치겠다. 자꾸 헛손질만 하니 슬슬 화가 났다. 내가 배운 무공 중에서 가장 빠른 독사출동의 수법으로 육합권을 펼쳐 보았다.

쌔액-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놈에게 돌진했지만, 의자에 앉아 있는 무영신투를 맞히지도 못하고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뭐냐고, 이게!”

포기해야 하나…….

“대체 왜 애꿎은 사람한테 무공을 쓰는 것이오?”

언제 따라왔는지 무당파 탈옥수가 그렇잖아도 짜증나는 내 화를 돋운다.

“그러게 말일세. 조용히 앉아 차 마시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 그에게 무영신투도 제 짝을 만난 듯 호응했다. 아주 쌍으로 날 가지고 노는 것 같다.

무공을 펼쳐도 실체가 잡히지 않고, 놈은 날 아주 무시하고 있으니 남은 수는 뻔했다.

굳이 무공을 쓸 필요도 없이 무영신투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뻔히 내 다음 동작을 알 만할 텐데도, 놈은 그런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은 채 바로 무릎 공격을 가했다. 무공도 아닌 단순한 공격을!

하지만 이번에도 무영신투는 간단히 내 공격을 무위로 돌리면서 탁자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옮겨 갔다.

“거참, 재롱이 과하구먼!”

무영신투가 드디어 화가 났나 보다. 솔직히 말해서 완전 허공에 삽질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무영신투가 강했기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정추산 1백 마리가 붙어도 이기지 못할 놈이 내게 힘을 쓴다면 한 방에 죽어버릴 게 뻔했으니 말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애 때문에 여기선 못 놀겠구먼.”

뭐라 중얼거리더니 무영신투가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이었다.

“저거 NPC요?”

이 녀석 말은 무시하고 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무영신투는 버그 캐릭터가 아니다. 모든 공격을 통과시키진 못한다는 말이다. 놈이 정말 그런 기술이 있다면 마지막 내 무릎 공격에 도망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흐릿하게나마 놈의 잔상을 볼 수 있었다. 신투라는 말처럼 금나수를 펼쳤을 때의 손동작은 너무 빨라서 아예 잔상조차 볼 수 없었지만.

어쨌건 공격이 통한다는 점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영신투를 공격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내겐 놈의 화를 온전히 받아낼 실력이 없었으니, 오히려 놈이 그냥 가준 게 다행이었다.

“저놈 이제 안 잡을 거요?”

하아… 이 인간도 참 대단하다. 이 정도 무시했으면, 보통 사람이라면 대충 자기 싫어하는 줄 알고 떨어져 나가는 게 정상일 텐데.

“저거 잡아봤자 명성치나 깎일 텐데 왜 잡겠다는 건지 모르겠네.”

녀석이 혼자 중얼거린다.

NPC도 카오들은 붉은색 아이디로 표시된다. 그리고 뚜렷하게 맡은 역할이 있는 주점이나 상점의 NPC들은 아이디가 표시되지만, 없는 NPC들도 많다. 아이디 없는 NPC들을 잡으면 이 녀석 말처럼 명성이 하락한다.

‘근데 얘가 금방 뭐라고 말했지? 넌 내가 허공에 주먹질하는 걸 못 봐서 그런 소릴 하는 거냐? 그런 걱정은 일단 잡고 나서 해도 안 늦어!’

“도와드려도 되오?”

‘엥? 네가 도와준다고 잡을 수 있을까?’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는데 녀석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결국 찰거머리 무시하기 작전은 용도 폐기가 돼버린 것이다.

“저놈 움직임을 봤을 텐데?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거야?”

“음… 뾰족한 수가 있긴 한데, 잡는 건 아무래도 조연 님이 해야 할 것 같소. 저렇게 센 놈이라면 분명 명성이 수천은 떨어지고도 남을 테고, 그럼 지금 내 상태로는 카오가 될 것 같소. 난 일단 움직임만 좀 느리게 해줄 테니, 잡는 건 조연 님이 알아서 하시오. 그나저나 자신이 있긴 하오?”

움직임을 늦출 수 있다고 해서 무영신투의 무공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 하지만 내 취미는 무협 소설 읽기였단 말이다. 모든 무협 소설에서 이르기를, 신투라는 놈들은 경공만 잘나고 무공은 영 젬병이라는 것! 이 가정에 내 목숨을 걸어보겠다.

“자신이 있건 없건, 까짓것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잘라봐야지. 일단 내려가 보자고!”

1층 상황은 웃겼다. 아무리 말은 그럴싸하게 해도, 역시 인공지능의 한계랄까?

“하하하!”

“크크큭!”

우리 둘 다 무영신투의 꼴을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야, 이놈들아! 길 안 비킬래!”

그 잘난 무영신투가 주루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내 NPC들을 상대로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벽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게 가능하면 무인이 아니라 초능력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작하겠습니다.”

무당파가 그렇게 말하고 행낭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노란 종이에 지렁이 춤추듯 붉은 글씨가 새겨진 물건. 바로 부적이었다.

무당파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 수인을 맺고는 무영신투를 향해 부적을 날리며 소리쳤다.

“완형(緩形)!”

부적은 마치 연어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듯 허공을 날아가 무영신투의 등판에 착, 하고 달라붙었다.

“이제 공격하면 돼요.”

녀석이 날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부적이 데미지를 주지는 않았는지, 무영신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아직도 NPC들을 상대로 한심한 짓을 하고 있었다.

완형이라는 부적이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시작한 일, 멈출 수는 없었다.

일단 잡기들을 모두 켜고 시작했다. 시작은 궁신탄형에 이은 팔방풍우였다.

파파파팟!

놈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허공에다 아무렇게나 주먹질을 내지르는 팔방풍우를 시전한 것이다.

핏!

맞았다!

“뭐, 뭐야!”

무영신투가 뭐라 외치든 상관없이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해뒀던 연계기가 주욱 이어졌다. 아직 갈피를 못 잡는 무영신투에게 태산압정의 초식이 전개되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는 놈에게 다시 궁신탄형으로 따라붙으며 선인지로를 구사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놈 꼴이 딱 그 모양이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그 말이 의미 있는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놈이 헛소리를 내뱉는 순간에도 원앙각에 이은 독사출동과 금나수가 연달아 펼쳐졌다.

비록 적중되진 않았지만, 각법에 핑그르르 돈 내 몸이 독사가 굴 밖으로 튀어나가듯 놈에게 붙었고, 주먹이 녀석의 머리에 적중될 순간에 금나수를 시전해 놈의 어깨를 짚었다.

“어… 어!”

일단 잡힌 이상 일격기는 필요 없다. 서서히 12성의 진결육합권의 권로가 놈에게 연달아 퍼부어졌다.

권법이라고 주먹질만 하라는 법은 없다. 진정한 박투술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려는 듯, 왼손으로 금나수를 시전해 놈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양 다리와 오른 주먹이 쉴 새 없이 춤을 췄다.

팍! 퍽! 파팍! 퍽!

이제야 제대로 타격감이 느껴진다. 놈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스윽-

어느 망할 놈이 말했던가! 희망은 깨지라고 있다고! 순간, 그놈 말처럼 무영신투가 미꾸라지라도 된 듯 금나수에서 벗어나버리고 말았다.

“나 정말 화났다!”

화가 나든 말든 신경 안 쓴다. 여태 공격기를 한 번도 쓰지 않은 놈의 말에 위화감 따윈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쾌영수!”

갑자기 뭔 짓이냐!

쾌영수라고 외치면서 놈이 처음으로 날 향해 공격을 가했다. 객잔 2층에서 본 손놀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는 아니었지만, 내 불영보는 쾌영수를 회피하지 못했다.

추욱!

가슴을 순식간에 꿰뚫은 무영신투의 손이 다시 주인 곁으로 돌아가더니, 또다시 날 향해 쏘아져 왔다.

피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였지만, 미련하게 그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놈의 공격 따윈 무시하고 그대로 몸을 앞으로 던져 무영신투를 공격했다.

푹! 퍽!

놈의 수법이 내 가슴을 뚫었고, 내 권도 놈에게 정확히 틀어박혔다. 그러자 무영신투가 너무 거리가 가까웠던 탓인지 신형을 뒤로 뺐다.

하지만 거리를 준다면 아까 같은 무식한 빠르기의 공격이 또 이어질 터! 난 재차 몸을 날려 놈에게 달라붙었다.

놈의 공격이 시작되자 혼자서 놈을 잡을 거란 생각은 버려야 했다. 무당파에게 도움을 바라는 건 무리였기에 난 새로운 지원군을 불렀다. 바로 내 절정맹 무사를. 입구는 호위들이 단단히 막고 있으니 무리 없는 선택이었다.

무림맹 무사의 공격도 무영신투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한 가지 이점은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이점은 지금 같은 상황에선 최고의 도움을 주었다.

소환무사의 공격은 매번 헛되이 허공을 갈랐지만, 나와 무영신투 사이에서 적절히 놈의 공격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무영신투의 공격은 도저히 회피가 불가능한 무공이었지만, 무림맹 무사라는 방어벽이 존재했기에 난 꼼수를 쓸 수 있었다.

생각은 감각으로 바로 행해졌고, 난 NPC를 이용해 적절한 연계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적절히 페인트 동작을 취하며 놈의 공격이 무림맹 무사에게 적중되도록 유도했다. 강호에서의 모든 공격 동작들은 상대방에게 적중하게 되면 약간의 틈이 생기는데, 난 그 틈을 노린 것이다.

퍽! 퍽!

놈은 무림맹 무사에게 공격을 먹였고, 난 놈에게 공격을 먹였다.

그렇게 몇 차례 내 계략대로 진행되었다. 역시 NPC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놈의 대응은 한심했다.

똑같은 동작이 몇 번 계속되자, 내 무사는 결국 강제 소환을 당했다.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고 좀 전처럼 무영신투에게 몸을 붙였다. 무사마저 사라진 마당에 그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무영신투의 쾌영수는 정말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 거리 조절이 안 되면 한사코 놈은 뒤로 빠지려 했다. 난 끊임없이 궁신탄형의 수법으로 놈에게 몸을 붙였고, 비록 놈에게 적중되진 않았지만 빠른 일격기를 토해냈다.

놈과 나는 족히 수십 합은 될 정도로 똑같은 상황을 계속적으로 연출했다. 그동안 몇 번쯤 나는 쾌영수에 가슴을 꿰뚫렸지만,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었다.

가슴을 뚫리는 건 보통 심각한 중상이겠지만, 쾌영수의 공격력은 크지 않았다. 내가 이런 동귀어진의 수법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경공에 특화된 사람은 체력이 보잘것없다는 짐작 때문이었다.

어느새 놈은 더 이상 말이 없어졌고, 내 내공은 서서히 바닥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일격기는 패시브 무공보다 내공 잡아먹는 속도가 훨씬 빨랐으니까.

하지만 그건 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겨우 1할이 남은 내공으로 승부를 봐야 할 처지가 되자, 난 놈을 향해 몸을 던지면서 연신 금나수만 날렸다. 수십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겨우 놈의 맥문을 짚을 수 있었다.

다시 진결육합권이 연속적으로 놈에게 퍼부어졌다. 안면 2대, 복부 3대, 무릎 공격에 이은 박치기까지. 근거리 접전이다 보니 순식간에 10여 번의 공격이 놈을 흠씬 두들겨 팼다.

아까와 달리 무영신투는 쉽게 내 금나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도 내력이 거의 다 떨어져서 그런 듯.

손과 발이 내는 경쾌한 격타음을 들으며, 드디어 놈을 잡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생각한 대로 결과가 나왔다.

[레벨이 300에서 302로 올랐습니다.]

[무영신투를 잡았습니다.]

[‘현상 수배:무영신투’ 의뢰를 성공했습니다.]

[명성이 5천 하락했습니다.]

[별호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별호를 입력해주십시오.]

어느 것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게 없다. 겨우 몹 한 마리가 레벨을 2나 올려 주는 것부터 해서 명성의 대폭 하락이나 별호 획득까지…….

마지막 메시지가 출력되고 내 앞으로 입력창 하나가 커서를 껌벅이며 출현했다. 별호를 입력하는 창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시체가 돼버린 무영신투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백도의 무인에게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다니… 내 협행이 모두 헛된 것이었던가. 헛되도다. 헛되도다…….”

역시 네임드 몬스터라서 그런지, 죽어가면서 헛소리하는 건 변함이 없다.

“대단하오!”

무당파가 다가와 날 칭찬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요.”

우선 눈앞에서 깜빡거리는 창부터 없애야 했다.

강호에서 처음 상태창을 열어 별호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난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별호가 있었다. 이제 강호 개발진들이 자기들 맘대로 입력해놓은 황금룡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별호가 ‘일수경천’으로 바뀌었습니다. 별호는 별호 상태창에서 변경하실 수 있습니다.]

일수경천(一手驚天).

한 수에 하늘을 놀래킨다. 권왕이나 권신처럼 유치하지 않고 딱 적절하다.

별호는 아이디처럼 숨길 수 있다. 괜히 정체를 드러내면서 살 생각은 없기에 활성화시키지는 않았다.

별호 때문에 사실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무영신투가 죽으면서 드롭한 아이템을 바로 회수하지 않은 것이다. 호위들이 입구를 막고 있긴 하지만, 낙양제일루엔 우리 말고도 몇 명의 강호 유저들이 들어와 있었다. 다행히 유저들이나 무당파가 아이템을 건드리진 않았다.

아이템을 집고 NPC들을 강제 소환시켰다. 공공시설인 주루 입구를 한참이나 막고 있었던 건 사실 욕먹어도 싼 행동이었다. 그나마 나와 무영신투의 대결이 그들에겐 볼 만한 구경거리였기에 참아준 것뿐이리라.

“죄송했습니다. 현상 수배범을 잡느라고 그랬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재밌었어요.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요, 뭐. 덕분에 재미난 구경하고 갑니다.”

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주루를 빠져나가는 유저들은 다행히 화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무영신투가 준 비급을 제대로 확인해보았다.

[천리종무영(千里從無影)

무영신투의 독문경공술. 전설의 축지성촌에 가장 근접한 경공술이라 일컬어진다.

만박자는 천리종무영을 여타의 신법과 그 궤를 달리하는 유일한 초절정무공이라고 평가했다.

수련 제한:레벨 500

수련 제한:지능 100

수련 제한:체질 150

수련 제한:근성 100]

초절정이라는 말이 잠깐 날 현혹시켰지만, 그 밑의 수련 제한이 내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이건 마치 7살짜리 꼬마애가 로또 1등에 당첨된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감당할 능력이 없는 이에게 너무 좋은 상황이 닥친 꼴이었다.

강호 생활 7개월 만에 겨우 3백 레벨을 찍었다. 그렇다면 점점 레벨 업 속도가 둔화되는 게임의 속성상, 저 수련 제한에 적힌 5백 레벨이 되려면 족히 1년은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최절정, 초절정의 무공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으니 로또 1등에 당첨된 것처럼 기뻐할 만한 비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게 쓸모가 없다고 이 고급 무공서를 팔아먹을 수도 없다. 혹시라도 무영신투가 금사방의 정추산처럼 1회성 NPC라면? 그럼 천리종무영은 다시는 구할 수 없는 희대의 비급이란 말이 된다. 더군다나 설령 팔게 되더라도 지금 이걸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으니, 제값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마디로 1년 후에나 배울 수 있는 걸 지금 얻은 꼴이니, 보기에만 흐뭇한 물건이었다.

어쨌든 당장의 전력 상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천리종무영을 쓰레기 취급할 순 없었다. 단지 이걸 배우려면 1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상황이 충분히 기뻐해야 할 날 그러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

“어떠시오? 만족할 만큼 좋은 물건이오?”

이걸 어찌해야 할까 뚫어지라 비급만 바라보고 있는 내게 무당파가 물어왔다.

만족할 리가 없다. 그저 레벨 제한이 4백 정도만 됐어도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을.

하지만 그건 내 입장이었고, 분명 이 무당파 사람의 부적술이 없었다면 무영신투를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김칫국물부터 마시고 있었다.

“한번 보세요.”

내가 잡긴 했지만, 무당파 없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아이템 분배는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무당파에게 비급을 건넸다.

“음… 좋네요. 근데 이걸 어느 세월에 배우시려고?”

“일단 아이템 이야기부터 하지요. 어떻게 할까요? 팔까요? 아니면 예상되는 시세를 정해서 다른 아이템으로 쪼갤까요?”

“아니요, 전 됐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어야지요. 달랑 부적 던진 것밖에 없는데요. 애초에 아무 욕심도 없다가 이제 와서 제 몫을 챙기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정말 자기가 무욕의 경지를 이룬 도사라고 착각하는 건가?

“그럴 순 없습니다. 님도 아시다시피 그 부적술이 없었다면 저 혼자 잡는 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제가 좀 더 위험한 일을 했다 뿐이지, 결과적으론 각자 절반의 공이 있었다고 생각되네요.”

“…….”

내가 턱도 없는 양심을 부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탐나는 물건임엔 분명하지만,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해서 끝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럴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하죠?”

“……?”

“난주 소요파 장문인 황금룡 조연입니다. 아니, 일수경천 조연이라고 합니다.”

여태 우린 통성명도 안 한 사이.

“아, 네. 무당도인 현운자라고 합니다.”

“네, 늦었지만 반갑습니다. 일단 자리 잡고 마저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뭔가 상당히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우린 이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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