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난주제일문
어제를 끝으로 광풍단과의 문제는 정리되었기에 오늘은 간만에 사냥을 나갔다.
강호에선 레벨보다 무공 숙련치가 더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레벨이 너무 뒤처진 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공이란 건 시간만 투자하면 언젠간 모두들 12성이라는 끝을 밟게 되지만, 강호의 레벨이란 건 그 끝이 없는 것. 먼 훗날에는 레벨이 무공보다 더 중요하게 될 것이 뻔하다. 최고의 무공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꾸준히 레벨 관리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지금 내 레벨은 221. 280대인 이광보다 한참 모자랐고, 조자건보다도 30레벨이나 낮은 상태였다. 간부들 중에선 겨우 소봉이만 내 밑인 215였는데, 그나마도 곧 추월당할 기세였다.
문도들은 청랑채로 끼리끼리 작업을 하러 떠났고, 덕분에 그 비룡재천인가 하는 무공 비급을 구하러 갈 계획도 수정해야 했다. 주사위 굴려서 수십이나 되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걸 먹을 정도의 운이라면 로또에 취미 붙이는 게 나을 것이다. 또 그 인간들 바글바글거리는 곳에서 레벨 업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말이다.
정처 없이 집을 나섰지만 갈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좀 더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직 못 가본 곳이나 돌아다니면서 숨겨진 명당을 찾아보겠지만 그럴 만한 시간은 없었고, 결국 택한 곳이 고목문이었다.
이젠 주먹 한 방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는 ‘되살아난 시체’는 무시하고 바로 고목문으로 향했다.
옛날 생각이 났다. 경계 서는 문지기들을 때려잡을 때 들려오던 시끄러운 종소리를 들어본 지도 꽤 됐다. 하지만 오늘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야, 야, 잘 좀 해봐!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하냐?”
“우씨! 나 안 해! 몹 몰아오는 건 쉬운 줄 아냐? 너도 세 시간 동안 이 짓 해봐라! 난 이제부터 놀면서 잡을 테니깐, 잘난 네가 부지런히 해봐!”
벌써 선객(先客)이 와 있었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2명의 파티 외에 고목문 안쪽에서도 누군가 사냥을 하고 있는지 희미하게 타격음이 들려왔다.
고목문 강시의 레벨은 250 정도. 형, 누나하고 처음 여기 왔을 때가 거의 2달 전이니, 그사이 이렇게 사람들이 붐비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볼까?”
예전에 비해 실력이 많이 늘긴 했지만, 10마리가 넘게 붙는다면 자신이 없었다.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놀려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고목문 내부의 익숙한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짐작대로 그 안엔 두 파티가 사냥 중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내 사냥법은 남에게 보여 주기가 좀 그렇다.
“소환! 무림맹 절정무사!”
[무림맹 절정무사를 소환했습니다. 60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무림맹으로 복귀합니다.]
“에고. 그러고 보니 이제 무사 임대권도 몇 장 안 남았네. 낙양에 들르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하는데. 쩝, 어쩔 수 없지. 이제 사냥할 때는 안 써야겠다.”
어차피 낙양엔 한번 들러야 했다. 이번에 금나수의 효용을 알았으니 간부들에게 하나씩 돌릴 정도는 사와야 하고, 예전에 먹은 용독술(上)의 전 단계 비급들도 구해봐야 했다. 그러고 보니 쌓인 일이 한둘이 아니다. 표국은 언제 세우고, 심결육합권은 언제 수련하냐!
용독술하니 생각이 난다. 그때 먹은 환혼신단이나 작업해서 팔아볼까? 비록 연속으로 복용할 순 없지만, 순간 회복 50퍼센트라면 충분히 매력 있는 아이템인데 말이야.
에고, 이 한심한! 내가 돈에 쪼들리다 보니 정신이 없구나. 이제 피독단도 없는데 어찌 독강시를 해결하려고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하는지, 원. 잡생각은 때려치우고 얌전히 레벨 업이나 하자.
“어이! 자네 이름이 뭐라고?”
자주 볼 얼굴이 아니니 간만에 통성명이나 해봐야겠다.
“아직 알려 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딴 놈들은 고분고분 잘도 대답하더니만!
“야! 주인이 물어보면 재깍재깍 대답을 해야지! 감히 되물어?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봤나!”
녀석의 반응이 재미있어 화내는 척을 해봤다.
근데 어째 상황이 심상치 않네. 쟤 왜 저런다냐?
“이… 이! 내 비록 생활이 어려워 남의 보표 되길 자청하긴 했지만, 난 무인이오! 어찌 무림맹의 무사를 이토록 모욕할 수 있단 말이오!”
허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놈의 퍼포먼스가 제법 멋들어지긴 했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강호 인공지능이 이젠 무림맹 소환무사들마저 제어할 정도가 되었단 말인가?
게임이 현실감 있다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줄만 알았는데, NPC한테 장난치다가 무안을 당하는 꼴이 되고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 아닌 것한테도 예의를 따져야 하는 팍팍한 세상이라니. 더 놀렸다간 종놈하고 드잡이질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이거 참, NPC를 달래야 하다니 기가 막히는구먼.
“아이고!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그려! 이제 보니 며칠 전에 왔던 그 보표가 아니군요! 이거 참, 사람 얼굴도 제대로 안 보고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에고, 요 주둥아리! 요 주둥아리가 문제죠!”
손바닥으로 내 뺨을 몇 대 쳐 주는 시늉까지 해 보이며 말했다. 근데 하다 보니 재밌네? 하여간 연기력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그나저나 누가 이 꼴을 볼까 두렵긴 하다.
“흠흠. 아, 그러셨소이까? 뭐, 살다 보면 사람 잘못 보고 실수할 때도 있으니까요. 되레 제가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럼 제 소개를 드리지요. 우화통이라고 합니다. 절강 풍파문 출신이고요. 당분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녀석이 말을 끝내고 검을 눈앞으로 가져가 거꾸로 쥐더니 포권(抱券)을 해왔다. 참 가지가지 한다.
“난주 소요파 장문인 조연입니다. 좀 전의 실수는 잊어버리고, 일단 작업이나 합시다.”
다행히 녀석은 더 이상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분고분하던 소환무사가 이 정도라면, 그 낙양의 악질 거지 호칠이나 무림맹의 접객당주 같은 놈들은 대체 얼마나 더 사악하게 변했을까? 앞으로 걔들하곤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겠다.
정말 다행히도 사냥하는 방법이 달라지진 않았다. 혹시 사냥이 뭐고 공격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해야 한다면, 대체 이놈들을 누가 데려다 쓸까?
인공지능이 강화돼서 실제 전투력도 좀 나아졌으리라 기대했지만, 그건 예전과 똑같았다. 유저들처럼 일격기를 사용하지는 못하고, 정해진 무공만 사용했다.
간만에 사냥을 하니 시작은 좀 굼떴지만 이내 요령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추 한 시간이 지났을 땐 거의 잔머리가 극에 달한 수준이 되었는데, 그 요령이 이랬다.
몹을 한 20마리 정도 고목문의 이름 모를 건물 벽 쪽으로 끌고 온다. 그리고는 벽에 바짝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일반적인 근접 공격은 8군데밖에 되지 않고, 벽이 그중 3군데 방위를 막아주니 5방위의 공격만 받는다. 그걸 내 호위무사들이 3군데의 길을 틀어막고(작업을 위해 한 마리는 죽여 버렸다), 한 군데는 무림맹 무사가 틀어막는다. 그럼 남은 건 한 군데 방위뿐.
예전에 했던 게임에서 비슷한 작업을 했던 게 기억나서 해봤는데, 다행히 통했다. 몹들이 소환수를 자기들과 동류라고 여기는 일종의 버그를 이용한 방법이었다.
나보다 레벨이 30이나 더 높은 몹들을 쉬지 않고 잡으니 레벨 업은 완전 거저먹기였다. 내공 관리만 적절히 해주면 한 시간에 1레벨을 올릴 정도였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일주일 안에 3백 레벨을 찍는 게 꿈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꿈은 깨지라고 있다고. 그 누군가의 말이 맞았다. 몇 번 그렇게 대량의 몹들을 몰아와 학살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몹이 씨가 마른 것이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순 없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고목 존자와 호법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사냥하고 있는 주변을 얼쩡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봤을 때 그쪽은 몹이 남아도는 상황이어서 별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략 그렇게 그쪽 몹을 3번쯤 몰아왔을 때였다.
한바탕 작업을 끝내고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님! 저희도 작업 중이니 좀 자제하시죠?”
아이템을 집느라 허리를 굽힌 상태였다.
‘뭔 소리야? 남는 거 가져가는 게 뭐 잘못한 일이라고?’
속으론 그랬지만, 대놓고 그런 말은 절대 못한다. 그래도 난주 바닥에선 유명 인사인 덕에, 이런 문제에선 무조건 내가 불리한 것이다. 욕먹을 짓은 피해야 했다.
일단 아이템을 모두 수거하고 나서야 따지러 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쪽에 몹이 없어서 그랬는데… 어쨌든 주의하겠습니다.”
일단 사과를 먼저 하고 그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낯이 익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아이디를 숨기고 있으니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면서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도 이상타.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는 게 아닌가.
“알아주셨으니 됐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사내는 더 이상 얘기하길 마다하고 바로 돌아가 버렸다.
대(大)소요파의 문주님 얼굴을 알고 있다면 한마디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은 게 정상일 텐데, 그냥 돌아간 모양새가 왠지 께름칙하다.
누굴까? 서로 알 만한 사람이라면…….
내가 강호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우리 문도들과 문파에 가입하기 위해 면접을 봤던 사람들밖에 없다. 낙양에서 장사하면서 경매할 때 얼굴을 익힌 사람도 있겠지만, 그 사람들이 지금 날 알아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무공이 상승한 데다 문파의 문주가 되었기에, 내 얼굴은 그때의 비리비리한 상인 같은 모습이 아니라 마치 대협의 얼굴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광풍단인데. 광풍단의 누구지? 내가 아는 광풍단 사람이라고는 간부들밖에 없는데. 그중엔 없다. 아니지, 아니야.
광풍단 간부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서 대조해보자, 아까 그 사람의 얼굴이 왠지 사풍이라는 사람과 닮아 보였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사풍과는 뭐랄까, 확연히 분위기가 달려졌다고 해야 할까? 분명 둘의 사진을 대놓고 비교해보면 같은 사람이라고 할 만했지만, 떼어놓고 본다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야’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관상쟁이도 아니고, 남의 얼굴 알아보는 일에 왜 신경을 쓰는지……. 신경 끄자. 어차피 그쪽 사람들하고 인연 맺을 일 따윈 없을 테니까.
결국 핑크빛 작업장은 제대로 가동한 지 겨우 한 시간 만에 문을 닫아야 했고, 난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새로 생성되는 강시들을 한두 마리씩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생성된 녀석을 잡다가, 저 멀리서 다시 나타난 녀석을 잡는 방식이 지루하게 반복됐다. 그래도 내 레벨에 이만한 사냥터도 없어서 어디 다른 데로 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비전 없어 보이는 사냥을 하다 보니, 어쩌다가 사풍이라고 의심되는 그 파티 주변까지 가게 됐다. 그 사람을 포함해 모두 3명인 파티였다.
‘참 보면 볼수록 닮았단 말이야. 그런데 왜 저리 안색이 안 좋을까? 예전엔 눈망울도 초롱초롱하고 얼굴도 깨끗했었는데, 지금은 완전 썩은 동태 눈깔에 얼굴도 파리하잖아. 완전 패배주의자의 몰골이네.’
어차피 몹도 없고 해서 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걔들 하는 모양새나 구경했다.
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파티 같아 보였다. 몰이꾼은 몰이꾼대로, 데미지 딜러들은 딜러대로 모두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동료가 위험할 것 같으면 미리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고, 중간에 쉬는 시간이 없도록 내공 안배도 적절히 조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아까 내가 겉으로 보기에 몹이 남아도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실상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들은 몹의 재생성 시간까지 재가면서 사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 몹들을 데려가 버렸으니 연속적이던 사냥 사이클이 깨진 셈이었고,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여간 그런 것까지 계산하면서 게임을 하다니,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광이 들어오고서도 아직 문파에 빈자리가 3개 남아 있었던가?
딱 숫자에 맞게 남은 빈자리가 있다는 걸 생각하니 저 사람들이 탐났다. 여기서 단 3명만으로 수월하게 사냥할 능력이라면 못 돼도 레벨이 모두 250은 넘을 테고, 겉으로 보기에도 게임 감각이 보통은 넘어 보였다. 한동안 살펴보다가 바로 간부로 올려도 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아까 내게 따지러 왔던 사내가 사냥을 하다 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조연 님, 뭡니까?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엥? 내가 놀렸던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예? 무슨 말씀이신지? 그리고 절 아는 분이셨나요? 어쨌든 지금 몹이 없어서 쉬는 중입니다. 그런데 놀린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 성격 참 무섭네. 몇 분만 더 구경했다가는 몇 대 맞겠다. 어쨌든 신경 쓰인다니 알아서 피해주겠수.
엉덩이를 들고 자리를 뜨려는데, 그 사람이 다시 쏘아붙였다.
“소요파가 광풍단한테 이겼다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전직 간부들이 사냥하는 데 와서 몹 끌어가고, 옆에서 조롱하듯이 앉아서 구경하는 게 놀리는 게 아니면 뭡니까!”
뭐, 뭐냐! 네가 정녕 사풍이었단 말이더냐! 정말 사풍이라면 나 정말 나쁜 놈이었네?
“하아… 이거 참,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보세요, 사풍 님. 거기 같은 동료 분한테 물어보시죠. 오늘 얼굴하고 어제 얼굴하고 같은 얼굴이냐고요. 그렇게 바뀐 얼굴에 이름도 감추고 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알아봅니까? 그리고 설령 사풍 님을 알고 있었다 해도, 제가 왜 예전 광풍단 분들을 놀리겠습니까? 어차피 이제 난주에 문파라곤 우리 문파밖에 없고, 언젠간 한배에 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내 말에 사풍이 뒤돌아서더니, 마찬가지로 사냥을 그만두고 따라온 사내들을 보고 물었다.
“적월아, 내 얼굴이 정말 그 정도냐?”
“어. 거울 좀 보고 살아라.”
“강호에 거울이 어딨냐!”
“판다, 잡화점에. 바보 같은 놈.”
자기들끼리 몇 마디 말을 섞더니 사풍이 다시 날 보고 말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전 정말로 조연 님이 절 알아보고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사풍은 두 번, 세 번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때 적이긴 했지만 괜찮은 녀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새 문도 영입은 물 건너간 것인가?
“그런데 사풍 님, 얼굴이 왜 그렇게 변하신 겁니까? 사망하면 흉터가 생기고, 살인하면 눈에 혈광이 생기거나 신체 색깔이 변하는 건 알고 있지만, 하룻밤 새 병자처럼 바뀌는 건 처음 보네요?”
“그게… 저도 제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거든요.”
사풍이 그 말을 꺼내자, 적월이라는 사내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옜다. 이걸로 네 꼬라지 한번 봐라. 광풍단이 망했다기에 여태껏 말 안 했지만, 솔직히 보기 짜증나는 얼굴이다.”
사내가 건넨 건 거울이었다.
강호에서 자기 얼굴을 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현실처럼 생활 속에서 거울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보니, 자기 얼굴을 보려면 작은 손거울을 사서 확인해야 했다. 그런 번거로움 때문에, 이광처럼 안면 불감증 환자들이 많아진 것 같기도 하다.
나도 물론 손거울이 있다. 그것도 제일 비싼 걸로. 천하제일인이 되려면 외모도 좀 가꾸고 살아야 하니까.
“끙.”
자기 얼굴을 처음 보게 된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더구나 그 얼굴이 저런 얼굴이라면.
실제라면 자기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감수해낼 게 사람이지만, 게임이라서 현실감이 떨어진 것일까? 사풍은 오늘에서야 강호에서의 자기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조연 님 말대로 골골거리는 병자가 딱 맞네요. 크크큭. 그런데 어제 얼굴이 어땠는지도 모르는 제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를 어떻게 대답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굳이 사풍이 말해주지 않아도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문파는 일종의 가족과도 같은 것. 식구들이 집을 잃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그들의 얼굴이 병든 사람처럼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뭐,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요. 어차피 강호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다시 예전 얼굴을 찾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같이 파티하시는 분들은 첨 뵙는데, 친구들인가요?”
“네. 현실 친구들이죠.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이기도 하구요. 조연 님이 몰라보는 것도 당연해요. 이 친구들은 광풍단이 아니었으니까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난주 소요파의 문주인 조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사냥하다 종종 보게 될 텐데, 잘 지내봐요.”
먼저 인사를 하자, 두 사람도 반갑다며 인사를 건넸다. 친구가 부문주로 있던 문파를 멸문시킨 장본인이라는 걸 알 텐데도 그런 내색은 전혀 없었다.
한 명은 아까 들었듯이 적월이라는 아이디를 가졌고, 다른 한명은 일향이라는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연 님, 아까 말씀하시는 도중에 말입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예전에 광풍단 생활한 사람들한테 따로 척살령 같은 건 안 내린 건가요?
인사도 하고 해서 분위기가 좀 풀어지자 사풍이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척살이라뇨? 할 이유도 없고, 저 게임 속에서 그렇게 막나가는 거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한 번 말한 건 지키는 사람이고요. 그 옛날 낙양 조연상회의 신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겠죠?”
하하. 그때 나름대로 뱉은 말을 지키긴 했지. 다 계산속이었지만 말이다.
“네, 다행이네요. 간부들이야 괜찮지만 사실 일반 단원들은 배운 무공도 없는 데다, 하도 많이 죽어서 레벨도 낮은 상태거든요. 그래서 소요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지금 제대로 게임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예전 고목문하고 청랑채에서 광풍단이 사냥하는 방법을 볼 때부터 짐작은 했다. 일반 문도들을 착취하면서 제 뱃속을 챙기는 백무의 방식을.
나만 아니었으면 그 문도들도 백무가 호언장담했던 것처럼 조만간 그 ‘괜찮은 대우’라는 걸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맘처럼 될까. 그때그때 잘해줬어야지.
그러고 보니 백무는 지금 뭐 할까? 물어볼 사람이 생겼으니 지금이 기회 같다.
“사풍 님, 지금 백무는 뭐 하나요? 게임 계속한대요?”
“백무 형은 게임 접었어요. 어젯밤에 전화 왔는데, 더 이상 미련 없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봐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어쨌든 이야기가 좀 복잡해요.”
그놈 말은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해놓고 저 멀리 항주 같은 데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지도 모르는 놈이다. 어쨌든 놈이 그동안 벌여 놓은 짓이 있으니 더 이상 감숙에서 그 얼굴을 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우린 그 후로도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해보니 모두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광풍단의 부문주라는 직위에 있었기에 내게 상당한 적대감이 있을 줄 알았던 사풍은 별로 그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날 상당히 미워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그 감정이 우습더란다. 나도 그 말에 동감했다. 그동안 무수히 해왔던 게임 속에서 나 역시 그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일장춘몽이 있듯, 그런 깨져 버린 꿈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어제 일을 오늘 보면 한바탕 웃음으로 지워버릴 일이 너무도 많은 게 세상인데, 게임 속에서마저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는 없잖은가.
너무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너무 마음에 들다 보니 결국 마음속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말았다. 하지만 사풍은 정중히 사양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제 그런 골 아픈 문파 생활엔 더 이상 미련이 없단다. 더구나 이미 앞으로의 계획을 잡아놨다고 했다. 두 친구들과 같이 신강에서 남만까지, 요동에서 해남까지 탐험해 강호의 끝을 보고 싶다고.
비록 단 한 명뿐이었지만, 분명 미움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광풍단 사람과의 관계가 풀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때, 하늘에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삑 소리를 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추자량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수신자:조연
문주님, 사황성 사람들이 지금 문파에 와 있습니다. 이야기할 게 있다는데, 일단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발신자:추자량>
‘이제야 계획이 잡힌 건가?’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었다. 급할 건 없지만, 어쨌든 매듭을 지어야 할 사람들.
추자량에게 언제쯤 도착할 것이라는 전서구를 날리고, 사풍과 그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일단 3백 레벨이 될 때까진 감숙성에 있을 거라니, 당분간은 종종 보게 될 것이다.
“시전! 유운신법!”
* * *
문파에는 전서구를 보낸 추자량과 다른 두 문도, 그리고 포매향에서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는 가물치를 비롯한 사황성의 손님 셋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가물치 님.”
“아, 네.”
낯익은 얼굴에게 인사를 건네자, 가물치가 엉거주춤 인사를 받았다.
“일단 집무실로 들어가지요. 세 분은 그만 사냥 가셔도 돼요. 접대하느라 수고하셨고요.”
집무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질문을 던졌다.
“어제 문파대전은 잘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재미는 있으셨나요?”
세 사람은 무슨 황당한 질문이냐는 표정을 짓다가, 곧 아이디가 상어라는 사람이 말문을 텄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괜히 조연 님하고 이야기했다가는 여기 이 가물치라는 친구처럼 어떻게 속아 넘어가게 될지 모르니까요. 먼저 사황성의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는 광풍단이 해주기로 했지만, 이젠 소요파가 그 역할을 해주셔야겠습니다. 가욕관 이남의 소요파 지분을 인정해드릴 테니, 가욕관 바깥의 사황성 지분을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상어는 간단히 그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단순히 불가침 조약 정도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웬 땅따먹기 이야기란 말인가. 사황성에겐 이 구역 정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이광에게 들었던 대로라면 분명 그곳은 여태 강호에 알려진 사냥터 중에선 최고라 할 만하고, 때문에 사황성이 이렇게 나오는 것에도 일리가 있다. 최단 시간에 경쟁자 없이 자금을 확보하기에는 그곳만 한 장소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가욕관 이남에는 무슨 이권이 있는 거지? 보장해준다고 해도 무슨 혜택이 있어야 서로 거래가 될 게 아닌가.
어쨌든 불가침이 아니라 지분 이야기를 들고 나온 건, 가욕관 밖에서 작업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말라는 뜻이 분명했다.
“상어 님, 제가 듣기로 가욕관 바깥은 신천지라고 하더군요. 이광이 거기 출신이란 건 아실 테고, 그렇다면 별로 감출 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어차피 실크로드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테고, 거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지속적으로 사황성에게 자금을 대주는 작업장이 되겠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난주가 정리되면 그곳에 잠깐 발을 담가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감숙성에서 돈 버는 건 너무 힘이 들거든요. 유저가 적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쉽게 아이템을 얻고는 있지만, 그것도 사람이 적어서 팔아봤자 얼마 돈이 안 됩니다. 더군다나 문파 레벨을 올리려면 그런 푼돈으로는 어림도 없답니다. 방금 상어 님이 말씀하신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우린 영원히 강호의 삼류문파로 남을 수밖에 없겠지요. 도대체 그 제안이 소요파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군요.”
“이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요. 향후 사황성이 중원무림에 개입할 때 소요파와 싸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음… 상황을 제대로 알려 드리기 위해 말씀드리죠. 광풍단에 우리 돈만 삼억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광풍단은 이미 파산해버렸으니 어디에서 그 돈을 회수해야 할까요? 삼억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기분 문제죠. 지금 사황성 안에서는 말이 많습니다. 제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금방이라도 소요파를 밀어버리자는 분위기니까요. 그렇다면 제 제안이 소요파에게 이득을 주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손해 볼 것도 없다는 게 되겠지요.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사기치고 있네. 날 너무 띄엄띄엄 보는 거 아냐? 3억은 적은 돈도 아니고, 사황성이 전쟁할 여력이 없다는 것도 모를 줄 아나?
사황성은 무림 문파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고, 더구나 변방에서 대병력이 가욕관 안으로 쏟아진다면 분명 군대가 출동할 것이다.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걸 가지고 협박하다니. 이놈 이거 백무보다도 한심한 놈이다.
녀석이 사기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었다. 준비했던 대로 계속 말하는 수밖에.
“음…….”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해주고.
대략 20초쯤 그렇게 폼을 잡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 나중에 소요파와 적대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죠?”
“네, 그건 확언 드리겠습니다. 소요파에서 우리 입장을 이해해준다면, 충분히 동지적인 관계를 계속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 좋아하네. 늑대랑 한 이불 덮고 자는 게 낫겠다. 똑같은 사람이 하는 게임이라지만, 너흰 결국 사파의 논리대로 이빨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좋습니다. 어차피 그쪽까지 가서 사냥하기엔 본파와 거리 문제도 있고, 악명이 쌓이는 문제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그건 사황성도 마찬가지겠지만요. 다만…….”
“다만, 뭔가요?”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돈이 문제죠. 아! 오해는 마시고요. 난주나 천수를 소요파가 장악한다 해도, 기껏 주루에서 나오는 세금은 문도들 월급 주기도 빠듯한 수준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알아보니, 문파에서 할 수 있는 사업 중에 표국이라는 게 있더군요. 표국이 뭔지는 아시죠?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거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분명 가욕관 바깥으로 갈 일도 있을 것이고……. 그러니 그건 확실하게 보장해주셔야겠습니다. 지금은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혹시라도 우리 표행이 공격당하면 복잡해지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정도야 당연하죠.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길만 이용하는 건데, 그걸 털어먹으면 우린 정말 나쁜 놈입니다. 그럼 저희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건가요?”
표국 이야기는 절대 가볍지 않은 문제였다. 지금이야 좋다고 희희낙락하지만, 나중엔 살짝 배가 아플 것이다. 자신들이 소요 표국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 꼴이란 걸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난 이광처럼 문도들을 혈인(血人)으로 만드는 작업 따윈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다.
사황성 사람들은 만족하고 웃으면서 돌아갔다. 나도 계획했던 대로 일이 진행돼 만족스러웠다.
이제 등 뒤를 노리는 사람도 없어졌으니, 소요파의 날개를 활짝 펼치는 일만 남았다.
* * *
일주일 동안은 아무 생각 없이 레벨 업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드디어 첫 NPC 문파를 상대로 문파대전이 벌어졌다.
상대는 문파 레벨 3인 오사회(烏沙會).
문도가 2백 명이나 됐지만, 간부를 빼고는 전부 삼류 수준이었다. 게다가 문주마저도 기껏 잘 봐줘야 일류 중급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당연히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순식간에 문파대전은 승리로 끝이 났고, 오사회는 2레벨로 강등당했다.
그리고 전투의 마지막, 오사회 문주를 잡았을 때에는 상당한 돈과 보물들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은자로 환산하면 거의 5백만 냥에 달했다.
오사회와의 문파대전이 종결됐을 때, 광풍단 때와는 다른 메시지 하나가 출력됐다. 난주의 소요파 지배력이 0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증가됐다는 메시지였다.
이건 처음 문파를 세웠을 때 총관에게 들어서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이 지배력의 수치에 비례해 난주성의 주루와 기루에서 내는 보호비가 달마다 문파로 들어온다.
게임 속의 시간 한 달은 현실 시간으로 이틀 반이다. 사흘째 되는 날 3퍼센트의 세금이 어느 정도 액수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만 6천 냥이 조금 넘는 액수였다.
3퍼센트가 이 정도라면 지배력이 60퍼센트일 때 현실 시간으로 7일 반이면, 대충 거둬들이는 수입이 1백만 냥이었다. 문도들과 총관에게 지급되는 운영비를 감당하고도 남을 만한 액수이긴 하지만, 문파가 발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2번째 난주 공략 때에는 동시에 다섯 문파와 전쟁을 치렀다. 일주일 전의 문파대전으로 NPC 문파들의 실력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5군데와 전쟁을 치른다고 해서 병력이 5등분되지는 않는다. 3분지 1은 문파 수비를 하고, 나머지 병력은 한데 뭉쳐 순서대로 적들을 공략했다.
난주의 무림 문파는 모두 여섯. 제일 강한 금사방(金沙幇)을 제외한 모든 문파와 전투를 치른 그날도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지, 손실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전 주와 마찬가지로 NPC 문주들은 죽으면서 짭짤한 용돈을 기부해주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난주 공략전의 첫 난관은 셋째 주에 벌어졌다. 제일 나중에 공략할 생각으로 미뤄뒀던 금사방에서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쳐들어온 것이다.
이 금사방의 문파 레벨은 5나 되고, NPC 문도들의 수만 해도 자그마치 1천 명이다.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마침 전 주에 문파대전을 치렀던 문파들에게 선전포고를 해버린 상태였던지라, 난주 무림계 전부를 상대하게 돼버렸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날은 말 그대로 소요장 주변이 시산혈해(屍山血海)가 돼버린 날이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수성전(守成戰)이 오후 늦게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더구나 미리 계획한 것처럼 그동안 우리가 쳐들어가기 전엔 먼저 공격해온 적이 없던 다섯 문파가 금사방과 연합해 쳐들어왔다.
죽이고 또 죽여도 문파 입구로 계속해서 적들이 밀어닥쳤고, 때때로 금사방의 절정무인들에게 입구를 침탈당하기도 했다.
아마 NPC 문도들이 유저들처럼 사망하고 4시간이 지나면 부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면, 우린 그 인해전술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쉴 새 없이 몰아닥치던 적의 도발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이 바쁜 하루를 만든 장본인을 대면할 수 있었다.
금사방주 정추산이 마치 유람이라도 온 듯이 어슬렁거리며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저 자식이야? 우릴 이렇게 바쁘게 만든 인간이!”
소소 누님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전에 금사방 절정무인에게 한 번 사망을 했기에 더 힘이 들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누님뿐만이 아니다. 일반 문도들의 경우 두 번이나 사망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정말 험난한 하루였다.
이미 다섯 문파는 전멸했고, 금사방도 방주인 정추산을 제외하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이놈만 꺾으면 고단했던 하루도 끝이었다.
“모두 물러서요! 간부들이 일 진으로 서고, 체력 되는 사람만 이 진으로 서세요. 나머지는 뒤에서 운기하시고요!”
간간이 입구를 돌파했던 금사방의 간부들 수준이 절정급이란 걸 알았기에, 문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간부가 그 정도라면 정추산은 더 위험한 놈일 게 뻔했으니.
하지만 주의를 준다는 게 너무 늦어버렸다. 느긋한 태도로 들어오던 정추산이 갑자기 궁보(弓步)를 밟더니 한 문도에게 돌진해간 것이다.
펑! 컥!
단 한 방이었다. 정추산의 무지막지한 장력에 격중당한 문도는 쓰러져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간부들! 빨리 붙어요!”
내가 제일 먼저 달려들며 외쳤다. 놈을 잠시라도 풀어두면 장내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놈의 등에 첫 일격을 먹이자마자 바로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그런데 검진에 일성소, 그리고 철포삼과 신안까지 전부 발동시켰는데도 체력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그 짧은 시간, 정추산의 현란한 장법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수비 동작이 공격을 못 따라갈 정도였다. 처음엔 겨우 몇 분의 1초 정도 수비 동작이 늦었지만, 갈수록 그 차이가 벌어져 어느 샌가 아무렇게나 손발을 내젓는 모양새가 돼버렸다.
펑!
현란한 장법에 수비가 뚫리고, 결국 가슴에 정타(正打)를 허용하고 말았다!
아까 죽은 일반 문도처럼 즉사는 면했지만,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하면 바로 사망하게 될 상황.
쾅! 쾅!
내게 큰 공격을 먹이느라 동작이 커진 정추산에게 그제야 겨우 광우의 도끼가 연달아 적중됐다. 그러자 다행히도 정추산은 나를 제쳐 두고 광우를 상대로 공격해가기 시작했다.
“광우야, 피해! 다른 사람들은 못 따라가게 길 막아요!”
부법(釜法)으로 저 현란한 장법을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일단 한숨 돌린 나는 직접 정추산을 담당할 생각을 버렸다. 처음엔 너무 급해서, 그 후엔 수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제어하지 못한 무림맹 무사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광우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도망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광우를 살리고자 정추산의 진로를 막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절정의 경지를 넘긴 무인은 사방팔방이 아니라 36방위를 모두 사용한다고 했던가. 정추산은 가볍게 소요파 문도들의 공격을 뛰어넘으며 광우를 향해 장력을 내지르곤 했다.
난 급한 마음에 마치 리모트 컨트롤을 하듯 무림맹 무사를 정추산에게 붙이기 위해 정신을 쏟았다. 하지만 공격 거리가 됐다 싶어 검을 휘두르면 어느새 정추산은 저만치 멀어져 버렸고, 그런 상황이 몇 번이나 계속됐다. 무림맹 무사를 붙이기 위해 광우에게 멈추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발을 멈추면 바로 죽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태위태하게 간신히 도망을 치던 광우는 눈앞의 상대를 훌쩍 뛰어넘은 정추산의 손바닥에 끝내 등을 내주고 말았다.
퍽!
그 체력 좋은 광우가 장력 한 방에 로그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서야 내 절정무인의 공격이 정추산에게 적중했다. 정추산이 내 무사를 향해 달려드는 걸 보자마자 재빨리 타입을 방어형으로 전환하고 외쳤다.
“둘러싸요!”
산만해진 대형이 정추산 주위로 몰려들고, 녀석을 옥죄기 시작했다.
NPC 무사가 방어를 전담하고 있어 부담감을 던 사람들이 맘껏 재간을 토하기 시작했다. 도검이 연달아 정추산을 향해 베어지고, 나도 정추산의 약점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무림맹 무사에게 몰린 어그로가 풀리지 않게 무사 공격 타입을 때때로 바꿔주면서, 단순하면서도 빠른 일격기가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기본 무공인 육합권의 속성과 데미지를 지닌 독사출동, 선인지로, 태산압정 등의 초식이 쉼 없이 전개됐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정추산은 날 인식하게 돼버렸다.
‘제기랄.’
지금 내 체력은 겨우 절반도 안 되는 상태. 단 한 번의 정타만 허용해도 문파대전은 패배로 끝나버린다. 더구나 검진과 일성소는 이미 사용 시간이 지나버려 방어력은 아까보다 더 낮은 상태.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꼭꼭 숨겨 둔 환혼신단을 복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공격을 막아가면서 행낭에서 재빨리 환혼신단을 찾아 복용했다.
[체력이 5할 회복되었습니다. 재사용 시간이 한 시간 남았습니다.]
체력이 회복됐다고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어그로를 무림맹 무사에게 돌리려면 상태를 공격 태세로 전환해야 했다. 연신 보법과 나려타곤을 시전하면서 간신히 상태 변경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땅바닥을 열심히 굴러다니는 동안 소요파 사람들은 정추산에게 계속 공격을 먹였고, 이번엔 정추산이 내가 원했던 무림맹 무사가 아니라 각룡이 형을 인식했다. 형은 내가 했던 것처럼 공격을 멈추고 수비에만 신경을 쓰고, 나는 방어를 풀고 공격만 했다.
그 후로도 정추산은 몇 번이나 상대를 바꿔 공격했고, 그렇게 어그로를 분산시킬 수 있었던 우린 드디어 고단한 하루를 종결지을 수 있게 됐다.
[소요파가 금사방과의 문파대전에서 승리했습니다.]
[금사방의 문파 레벨이 4로 하락했습니다.]
[소요파의 문파 명성이 8천 상승했습니다.]
[소요파의 모든 문도원들의 명성이 매우 크게 상승했습니다.]
문파 명성이 무려 8천이나 증가했다는 메시지는 놀라운 것이었다. 상위 레벨의 문파와 싸운 결과가 이렇게 대단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추산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아이템도 상당히 좋았다. 다른 문파의 문주들은 이류 하급의 무공서만 줘도 다행이었고, 보통은 상점에서 몇십 만에 팔리는 금괴나 도자기, 서화 따위의 골동품만 줬었다. 그런데 정추산이 떨군 아이템은 그것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템 이름을 확인한 순간, 하루의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반야신공(般若神功)
소림 72종 절예. 소림 비전의 독문기공
효과:10성 수련 후 호신기공 가능
수련 제한:나한기공 10성
수련 제한:레벨 300
수련 제한:명성 5,000
수련 제한:체질 80
수련 제한:지능 50
수련 제한:근성 50]
“야호! 푸하하!”
사망자가 속출한 전투라 자제해야 했지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는 힘들었다.
드디어 절정무공을 입수한 것이다! 그것도 마침 제일 필요했고, 내게 딱 맞는 내공심법을 말이다!
처음엔 문도들이 저 사람이 갑자기 미쳤나 하고 쳐다봤다. 하지만 내가 건넨 아이템을 보고는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기쁘게 축하해주었다. 다른 무공이었다면 처리가 곤란했겠지만, 다들 내가 배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축하해준 것이다.
어찌 됐든 그날을 끝으로 문파 레벨 1이었던 오사회는 멸문을 당했고, 그 다음 주에는 다른 문파 셋의 이름이 강호에서 지워졌다.
방주인 정추산 개인의 무공이 대단하긴 했지만, 우린 첫 전투 이후로 쉬지 않고 금사방을 공략했다. 어차피 문파대전의 사망 페널티는 아무리 이광처럼 흉인(凶人) 상태라도 겨우 1레벨 다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별 부담 없이 금사방 공략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4주 후에는 끝까지 버티던 금사방도 결국 멸문을 당했고, 우리 소요파가 난주를 일통(一統)하게 되었다.
정추산이 그 네 번의 전투 동안 떨어뜨린 무공 비급은 팔괘보라는 절정보법 하나뿐이었는데, 많은 논란 속에 팔괘보는 광견의 손으로 넘어갔다. 결국 경매에 붙일 수밖에 없었던 비급을, 녀석이 광우가 꼬불쳐 둔 돈까지 빼내어 질러버린 것이다.
덕택에 문파 운영 자금이 단숨에 1억이나 늘었으니, 녀석의 선택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지능 제한이 80이나 되는 걸 녀석이 어느 세월에 배울 수 있을지, 그게 조금 걱정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