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문파대전(2)
“야, 연아! 잠깐 얘기 좀 하자.”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건가?’
포매향에서 일전이 끝나고 문파로 돌아오자마자 얘기 좀 하자며 소소 누님이 날 잡아끌었다. 분명 나올 이야기는 뻔했다. 오히려 여태까지 참아준 게 조금은 고맙기도 했다.
“그러죠. 일단 집무실로 가서 이야기해요.”
슬그머니 내 소매를 잡고 있던 누님의 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같이 움직였던 문도들에겐 잠시 문파에서 대기하라고 말해두고, 어차피 다시 해야 할 말이기도 해서 조씨 형제들은 따라오도록 했다.
“말씀하세요.”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소소 누님의 말을 기다렸다.
“긴말 안 할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가 문주기 때문에 아까 거기선 그냥 참았지만, 문도들이 죽었는데도 복수를 안 해주는 문주가 세상에 어딨어! 더구나 이광이 그동안 한 일이 그렇게 너한테 무시당할 일이었어? 네 말도 이해가 가긴 하지만, 어쨌든 그때 그 상황에서 그대로 물러난 건 용납 못하겠어!”
역시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럼에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해줄 말이라곤 한 가지밖에 없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자건이나 립산이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그 자리에서 일단 가물치부터 죽이고 나서 나중에 뒷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해?”
“왜 그걸 쟤들한테 물어! 날 보고 대답하라고! 내가 물어본 말이잖아!”
말을 돌린다고 생각했는지 누님이 성을 냈다. 하지만 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난처해하는 둘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 문주야. 말해봐. 내가 잘못 가고 있다면 솔직히 말해주고, 간부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또 내가 그에 맞는 설명을 해주고. 그게 정상적인 문파 아니야? 솔직한 생각을 말해봐.”
그 말에 소소 누님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자건이 간신히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전투가 벌어져서 적을 죽이면 끝나는 건 줄 알았는데, 문주님이랑 그 가물치라는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제가 모르고 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역시 자건은 말이 없다. 겨우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모르오’라는 말만 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더 기다려도 말이 이어지지 않자 소소 누님은 기가 찼는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조립산에게 말해보라는 눈길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말을 이었다.
“문주님 생각, 계획은 충분히 알아듣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앞날을 대비한 것이지, 지금 상황에 맞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도들도 말은 안 했지만, 아마 속으론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문주님 능력이라면 사황성과 본격적으로 문제가 발생해도, 그땐 또 다른 수를 생각해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제 생각엔 그때 가물치를 죽였어야 합니다.”
역시 쌍둥이라고 해도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 그대로인가? 그런데 조립산이 날 너무 맹신하는 거 아냐?
“하나는 모르겠다, 둘은 죽여야 했다라…….”
갑자기 이야기하기가 피곤해진다. 립산이와 소소 누님이 같은 결론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했지만, 결국 내겐 똑같은 소리로 들렸다.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것.
그래도 이왕 꺼낸 얘기,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겠지.
“에헴! 그럼 시작해볼까요? 우선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사황성의 전력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단순히 랭킹 게시판에서 본 내용이 아니라, 실제 전투 능력 말입니다. 그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사황성 자신들도 모르겠죠. 물론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알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적의 전력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겠죠. 우선 제가 알고 있는 것부터 말씀드리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에 제가 본 기억으로는 사황성의 담경이라는 사람이 랭킹 육 위더군요. 며칠 만에 랭킹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아마 지금도 그 정도겠지요. 제 판단은 그렇습니다. 그 담경, 강호팔룡의 흑룡만이 저와 천하제일을 다툴 만하다고요.”
잠시 말을 끊고 세 사람의 반박을 기다렸지만, 다들 진짜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한다. 재미없는 사람들 같으니.
“천하제일이 뭘까요? 소설도 아니고, 게임에선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개발사의 밸런스에 맞추기 때문에 막가파식의 천하제일은 될 수 없어요. 천하제일이라 해도 천하제이의 고수 둘의 합공엔 이기지 못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죠. 그런데 말입니다. 현 상황에서 만약 저하고 흑룡, 둘이 힘을 합친다면, 랭킹 일 위에서 십 위까지의 합공을 이겨 낼 것 같기도 하거든요. 방금 립산이가 그랬지? 나라면 무슨 수를 내서라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내가 판단하기엔 흑룡도 어느 순간이든 묘수를 생각해낼 인물입니다. 아니, 아니. 이래선 이해를 못하겠군요.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할게요. 강호의 핵(核)은 소림의 하남성도, 당문의 사천도 아닙니다. 바로 여기! 감숙성이죠. 지금 말해봤자 진지하게 듣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야기할게요. 가장 단시간 내에 떼돈을 벌 수 있고, 가장 단시간 내에 유저 최고의 문파를 세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감숙성입니다. 그걸 판단한 사람은 수십만… 아니, 지금은 백만이 넘었다죠? 그 백만이 넘는 숫자 중에서 오직 단둘, 나와 흑룡뿐이었습니다. 다만 흑룡은 처음부터 같이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고, 난 혼자서 시작했다는 것에 차이가 있을 뿐이죠.”
“문주님! 잘 들었는데요, 본론을 이야기해주세요. 왠지 문주님 자랑만 늘어놓는 것 같은데요?”
조자건, 너마저 이광을 닮아가는 것이더냐.
“그래. 쩝! 내가 실수한 것 같구나. 뭐, 대충 할 얘긴 다 한 것 같으니, 짧게 이야기하죠. 제가 가물치를 안 친 이유는 포매향에서 이미 다 말했습니다. 달리 숨길 것도 없고, 숨겨 봤자 그 가물치라는 사람도 녹록한 인간이 아니니 다 알아차릴 게 뻔할 테니까요. 한마디로, 제가 염려하는 건 사황성이 아니라 광풍단입니다. 사황성이 두려운 게 아니라 백무가 두렵습니다. 착각하지 맙시다. 여기는 게임 속이라는 걸요.”
“그래도 이해 안 되는걸?”
이번엔 소소 누님이 따지고 들어왔다.
아! 제발 사람들이 머리 좀 굴리고 살았으면 좋겠다.
“백무가 게임을 접게 만들려고 그랬습니다. 그놈 성격을 보니까, 이대로 박살내봤자 승복 안 할 놈 같았거든요. 계획대로라면 척살단만으로 게임을 접을 정도로 좌절시켰어야 하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봐도 좀 과한 욕심이었네요. 두들겨 패도 안 되는 놈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면 별수 있나요. 희망이 전혀 없게 만들어야죠. 말이 동맹이지, 거의 후원자인 사황성한테도 외면을 당한다면 일은 간단해지겠죠. 그럼 이제 이해가 되나요?”
“백무가 그렇게 겁났냐?”
“그걸 겁이 난다고 이야기하기엔 좀 그러네요. 갈 길 먼 사람 바지 자락 붙잡는 녀석은 딱 질색이거든요. 시작은 깔끔하게 하고 싶습니다.”
“잔인한 놈.”
정말 똑똑하다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역시 소소 누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앙금이 깡그리 사라졌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고, 내 대답이 모두의 만족을 살 만큼 명쾌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싶진 않았다. 가물치에게 말했듯이 결국 그건 잠깐의 위안일 뿐, 그런 방식이 이어지면 결국 파국만이 기다릴 것을 알기에.
세 사람과 달리 사망 페널티가 끝나고 재접속한 이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녀석들은 접속을 하자마자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자기들의 기막힌 무용담을 떠들어대는 데 시간을 보냈다. 누가 복수를 해줬는지, 소소 누님은 무사했는지 등은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다.
마침 내 전서구를 받고 사냥터에서 돌아온 각룡이 형과 소봉이, 이광, 그리고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세 사람을 데리고 다시 한차례 회의를 가졌다. 포매향에 오지 않았던 이들은 분위기를 모르기에 이야기하기가 편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대충이나마 조정을 거쳤기에 이견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부문주인 각룡이 형은 예리했다.
“연아, 도대체 천하제일문이 뭐냐?”
회의를 마친 간부들이 모두 집무실에서 나가자,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각룡이 형이 진지한 얼굴로 물어왔다.
형의 의문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것 같았다. 가끔 나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내가 없었더라도 형이라면 감숙제일문의 자리를 충분히 차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걸 말이다. 내가 그렇게 인정하는 형이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무력. 모두가 적이 되길 꺼리는 집단. 그리고 정정당당한 결과의 산물이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말이다. 살다 보면 정당한 사람들끼리도 부딪치는 경우가 있단다. 게임이라서, 이겨야만 되는 구도라서, 억지로 적을 만들어 쓰러뜨려야만 하는 게 좋은 것일까? 결국 게임 개발사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밖에 더 될까?”
“각룡이 형, 저도 모르지 않아요. 저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백무하고 좋게 지낼 생각을 해본 적도 있고, 사황성을 적으로 두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싸우지 않고도 천하제일문파,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놔두질 않는 게 세상이죠. 제가 제 꿈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혹은 제 방식에 환멸을 느끼는 문도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문파를 해산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확언 드리지는 못합니다. 믿어달라고도 하지 않을 거고요.”
“그래, 알았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구나. 헛소리해서 미안하다.”
각룡이 형이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고 문주 집무실을 나갔다.
“하아… 대가리 해먹기도 힘드네.”
재미로 게임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한테 시달린 머릿속이 피곤하다고 외친다. 몸은 그냥 쉬라고 말하지만, 머리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소리친다. 난주 지부 대인에게 들러 내일 있을 문파대전을 신고해야 했다.
* * *
이번 문파대전은 저번처럼 합의고 뭐고 없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감숙맹은 정말 자금력이 바닥났는지, 여전히 문파 레벨이 1밖에 되지 않았다. 만약 이번 전쟁에서 진다면, 감숙맹은 말 그대로 멸문(滅門)이 돼버릴 것이다. 한마디로 사생결단의 전쟁이기 때문에, 서로 간에 요전처럼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아침 나절부터 속속들이 접속한 문파원들은 눈앞에 닥친 전쟁에 대한 긴장감보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광풍단이 이탈자들을 보충하지 못했고, 사황성에서 지원 왔다는 사람들도 겨우 3명밖에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는 별수 없이 공성전의 양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수가 적은 광풍단이 공격해올 리는 없기에, 우리가 쳐들어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문파대전 시작하기 한 시간 전.
감숙맹 멸문을 위해 소요파가 진군했다. 부문주인 각룡이 형의 지휘 아래 80명의 문도들이 감숙맹을 에워싸고 완벽한 포위진을 구축했다.
나는 20명의 문도들을 거느리고 소요파의 수비를 맡기로 했다.
“아, 따분해 죽겠네.”
문파대전이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쳐들어오는 놈들도 없고, 공격을 하러 간 사람들한테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소요파 정문 한쪽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문도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야, 향단아! 우리 감숙맹 놀러갈까?”
향단이는 소소 누님의 호위무사였다가 소집 해제당한 문도였다. 척살단 활동을 하느라 소소 누님이 알아서 호위들을 해산시켰던 것이다. 뭐, 내가 보기엔 이광이랑 노느라 걔들한테 신경을 못 써서 그런 것 같지만, 어쨌든 대외적으론 그랬다.
호위무사 출신인 매월이, 월향이, 금란이, 채란이는 지금 감숙맹 문짝을 부수고 있었다.
“오빠, 그럼 여기는 누가 지키고?”
오빠란다. 아흑, 귀여운 거!
“얘들이 지키면 되지!”
손가락으로 옆에 있던 문도들을 쓱 훑자, 녀석들이 눈꼬리를 치켜떴다.
“어허! 무엄한지고! 어디 감히 장문인한테 눈을 부라리는고!”
“문주님! 어찌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한 입 가지고 두말을 하시는 겁니까! 문주님이 직접 수비하시겠다고 했잖습니까! 장수라 할지라도 군령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고현이라는 놈이었다.
어쭈! 문주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다니!
“네 이놈! 네놈이 어찌 병략을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우리가 산처럼 고요히 있었던 것은 그만한 연유가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벼락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니 어찌 전장의 임기응변도 모르는 네 녀석이 삿된 말로 현혹하려 드는 게야!”
에헴! 이렇게 말했으면 알아서 들어가겠지.
“옳으신 말씀! 그럼 우리 다 같이 가죠. 우리도 여기가 지겨워 죽겠어요.”
어쭈? 녀석이 금세 돌변해서는 빌붙으려 한다. 그렇지만 네 녀석하고는 같이 가고 싶지 않은걸.
“아니 될 말! 모름지기 만사불여 튼튼이라고 했느니라. 고현이 넌 다른 사람들이랑 집이나 지키고 있거라. 향단이랑 나만 간다!”
“문주님! 어찌 또 한 입으로 두말을 하십니까! 벼락처럼 나간다고 했잖아요! 달랑 둘이서 가는 게 무슨 벼락입니까!”
“그게 바로 임기응변이라는 거다. 세상은 교과서로만 알기엔 너무 험난한 곳이지. 그럼 수고들 해라. 금방 다녀오마! 자, 자! 향단아, 가자꾸나.”
사기꾼이라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고로 영웅은 언제나 외로운 법이나니.
둘만 감숙맹을 향해 걸어가는데, 향단이가 물었다.
“오빠, 혹시 직업이 다단계?”
음… 뜬금없이 무슨 소린지……?
“뭔 소리야?”
“아니, 그냥요. 둘러대기를 참 잘하는 거 같아서요. 꼭 사기꾼 같아요. 킥!”
“비록 유사 직종에 있었던 적이 있긴 하지만, 오빠보고 사기꾼이라니!”
영업 일이라는 게 반쯤 사기스럽기는 하지.
생각해보니, 미르에서 영업과장을 하면서 둘러대기 하나는 제대로 교육받은 것 같다.
그나저나 날 뭘로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내가 그렇게 신뢰감 없는 타입인 건가?
흐음, 그나저나 다 왔군.
오늘은 저번보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사람들을 제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창 전투에 열중하고 있는 문도들이 보였다.
픽! 픽! 채챙!
문도 수가 80이나 됐지만, 실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감숙맹의 정문은 겨우 사람 둘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다닐 정도로 좁았는데, 그건 우리 소요파도 마찬가지였다. 광풍단의 간부급 유저들이 그 문을 꽉 틀어막고 있고, 소요파 간부들이 그 벽을 깨뜨리기 위해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마침 지금은 각룡이 형과 조자건이 공격을 하고 있었다.
일단, 차륜전을 펼치고 있는 간부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광은 금방 전투를 치렀는지 운기 조식을 하고 있어서 말도 못 걸어봤다.
“어떻게 잘 돼가?”
다음 차례인 듯 대기 중인 조립산에게 물었다.
“아, 오셨어요?”
“응. 하도 심심해서 그냥 한번 와봤어.”
“네. 상황은 그냥 그래요. 아직 저쪽이나 이쪽이나 한 명도 안 죽었어요. 이러다 해 떨어질 때까지 이대로 갈까 봐 신경 쓰이네요.”
“그래?”
조립산의 말대로였다. 각룡이 형과 조자건을 상대하던 광풍단 간부들은 체력이 어느 정도 소진되면 뒤에 대기하던 사람들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 시간차를 노리고 섣불리 진입했다가는 그 뒤에 도열한 적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당할 우려가 있어 쫓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왔냐?”
“네. 수고하셨어요.”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빠져나온 각룡이 형이 날 보고 말했다.
“하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해도 안 뚫리네. 이러다가 무승부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글쎄요. 무승부까지는 안 갈 것 같은데요.”
“뭐, 그렇겠지. 우리 문주님이라면 금방 돌파해버릴 테니!”
“깨줄까요?”
“아서라. 이것도 나름대로 재민데. 어차피 우리가 질 리는 없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부를 테니까 그때 힘 좀 써줘라.”
솔직히 내가 공격하면 저 정도 벽쯤이야 금방 뚫릴 것이다. 금나수로 잡아채서 신안으로 허점을 공격하면 순식간에 구멍이 뚫려 버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요파는 앞으로도 싸워야 할 상대가 많다. 광풍단 따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큰 문파들과의 싸움이 예약돼 있다. 일당백의 전사는 아닐지라도 최소 일당십의 전력은 모두 갖추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 그래서 이번엔 수비만 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그러니 나 혼자 잘해서 전투에 승리해봤자 그건 단지 한때의 재미일 뿐, 내가 의도했던 대로 문파의 전투력이 증진되진 않는다.
“그러고 보니, 소소 누님은 금나수 안 써봤대요?”
“말도 마라. 그게 수준이 좀 차이가 나야 걸리는 건지, 수십 번을 써봤는데 한 번도 성공 못했다더라. 이젠 완전 포기다.”
“어차피 난 구경하러 온 거니까 참견 안 할 겁니다. 알아서들 이기세요. 크큭!”
“그래. 구경이나 실컷 해라.”
각룡이 형은 더 이상 말을 않고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문도들이 호법을 서주려는 듯 둥글게 형을 감쌌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바라보니 조립산과 소봉이가 공격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조립산은 간부이기는 하지만, 레벨이나 무공 숙련도는 간부급 중에서 가장 낮았다. 그런데도 꽤 효율적인 공격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소봉이보다 나은 감이 있었다.
2대 2의 싸움이지만, 일격필살의 무공이 없는 한 상대를 잡기란 요원해 보였다. 그쪽도 판정으로 끝날 걸 기대하는지 무모한 공격을 하지 않았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직접 전투하는 당사자들로선 피 말리는 일이겠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선 참 지루했다.
체력이 소진된 둘이 돌아오고, 그 자리는 다시 광우와 광견으로 교체됐다. 원래 이광은 카오 상태여서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동안 쟤들한테 쌓인 게 많은 광풍단에게 집중 공격을 당할 것 같아, 공격조가 아니라 수비조로 세우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문파대전을 겪어보지 못한 녀석들의 아부와 협박에 수락하고 만 것이다.
이광은 졸라서 공격조에 들어간 만큼 나름대로 열심히 뛰는 것 같긴 했지만, 얘들도 입구를 뚫을 가망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집중력과 인내심으로 결판이 나는 것인가?
“에이 씨! 아, 연이 형! 구경만 하지 말고 저것 좀 어떻게 뚫어줘 봐요!”
방금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광견이 내 옆으로 오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흠, 직접 전투에 참여할 생각은 없지만, 몇 마디 조언 정도 해주는 거라면 괜찮겠지?
“글쎄… 이 나이 먹고 애들 싸움에 낄 생각은 별로 없지만, 훈수라면 해줄 수 있지.”
“참 나!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시끄럽고. 야, 광우야. 너 혈죽선 암기 써봤어?”
방금 전 전투에서 광우가 암기 쓰는 모습을 못 봤기에 물어봤다.
“네. 써봤는데 안 죽던데요? 맞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데미지가 약한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약하다고만 볼 수는 없지. 너 갈치 잡을 때 한번 생각해봐라. 그리고 지켜보니까 대략 체력이 절반 정도 남았을 때 돌아오는 것 같던데. 맞냐?”
“네. 대충 그 정도죠. 근데 체력은 거의 상관없고, 내공이 소진돼서 돌아오는 거예요. 쟤들 잡으려면 아무래도 내력 소모가 심한 무공을 써서 크리티컬 데미지가 떠야 하니까요.”
“그래? 그래서 그 크리티컬 데미지가 몇 번이나 떴는데?”
강호에서 크리티컬 데미지는 문자로 표시되는 게 아니라 공격에 적중된 상대의 모션이 일반 공격에 당했을 때보다 크게 움직이는 걸로 확인할 수 있다.
“세 번 떴는데, 한 명도 못 잡았죠.”
“정면 공격으로 암만 크리티컬 떠봤자 일격 필살은 안 된다. 더구나 너희들 체력이 절반일 때 빠져나온다면, 쟤들도 체력 절반은 항상 유지한다는 말이잖아. 그 체력을 정면에서 한두 방으로 잡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일단 그 무의미한 짓 그만두고, 혈죽선으로 잡을 생각을 해봐. 간부들 전원이 모여서 머리 굴려 보면 뚫을 수 있을 거다.”
자세히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알고 보면 참 간단한 일이다. 다 같이 모여서 의논하면 충분히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해줄 말도 없어서 난 구경하는 유저들 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만 갸웃거리던 이광은 각룡이 형한테로 달려갔다.
갑자기 전투가 중지됐다. 소요파 간부들이 둥글게 모여서 작전 회의를 시작했고, 그 덕에 광풍단 애들은 전투가 벌어진 지 2시간 만에 모처럼 쉴 수 있었다.
구경꾼들 속에 묻혀 있자니 내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오늘 문파대전은 왜 이리 재미가 없냐고 투덜댔다.
우리가 무슨 서커스단 광대들인가? 자기네들 재밌으라고 싸우게.
한참을 소곤거리던 간부들이 결론을 냈나 보다. 공격 순서를 다시 맞추고, 각룡이 형과 소봉이가 앞장을 섰다.
시작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달랑 둘만 공격에 참가했고, 여태 해왔던 대로 투덕거리면서 공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내가 이광에게 이야기한 것은 전에 광우가 사황성의 갈치라는 사내를 잡았을 때 한 것처럼, 누구 한 명이 죽음을 각오하고 길을 뚫길 바란 것이었다.
끈덕지게 늘어지면서 소요파의 두 간부들이 강한 무공을 한 명에게만 집중하며 혈죽선 암기까지 사용한다면, 일차 저지선은 충분히 뚫고도 남을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버티던 이들은 광풍단의 두 간부들에게 죽을 위험이 태반이고 말이다. 죽으란 소린 차마 못해서 돌려 말한 것인데, 간부들이 그걸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그렇게 일차 벽을 뚫더라도 문 바깥에서 감숙맹 안으로 진입하면 길게 늘어진 포위진의 집중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처음 벽이 뚫렸을 때가 중요한 것이다. 적들이 채 상황을 인식하기 전에 난입해야 한다.
이제 시간이 됐나 보다.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 중이던 이광이 조금씩 감숙맹 정문으로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다. 과연 어떤 계획을 짠 것일까?
“와우! 멋지다!”
“허허! 저거 무슨 무공이냐? 폼 하나는 죽여주네!”
구경꾼들이 갑자기 놀라 외쳤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헉! 저게 뭐야!”
난데없이 튀어나온 신기한 무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각룡이 형과 광우가 기막힌 동작을 보여 주고 있었다.
1검을 휘두르고 몸을 뒤집어 허공으로 솟은 각룡이 형이 마치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오듯 몸을 세운 채 하강하고 있었다. 족히 3미터는 뛰어오른 것 같다.
그리고 형이 그 신기한 초식을 써 하늘로 비상할 때, 광우가 그 틈을 타 재빨리 거리를 좁혀 각룡이 형의 자리를 대신했다. 형의 도약과 광우의 돌진은 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동시에 벌어졌다.
그리고 도대체 어떤 무식한 무공을 썼는지 쾅, 하는 소리가 나 있는 곳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일순간 지금까지의 느슨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장이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뚫렸나 보네.’
광우가 쳐들어갈 때 각룡이 형과 같은 상대를 놓고 협공하던 소봉이가 결국 그 광풍단 간부를 눕히고 철벽같은 방어진에 구멍 하나를 만들어냈다.
구멍은 다시 메워질 수 있다. 갑작스런 소란스러움은 그 시간을 잡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광우가 뛰어갔을 때 계획대로 진입을 시도한 소요파 사람들과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광풍단원들이 한 발자국 남짓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버텨! 밀리지 마!”
“똑바로 공격해! 다구리(집단 린치)엔 장사 없다!”
어느 쪽에서 하는 소린지, 무조건 버티라는 말 일색이었다.
구경꾼들 틈에 있자니 멀어서 실감이 안 났다. 나는 인파 속에서 몸을 빼내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걸어갔다. 구경꾼 몇 사람이 그런 날 따라오려다 경계를 서던 우리 문도의 제지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죽여주는구먼!”
돈 주고도 못 볼 멋진 전투가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너다. 말로 할 때 이리 와라!”
과격한 소소 누님은 말로 하자면서 손은 쉬지 않고 있었고, 이광은 그 좁은 공간에서 정말 미친놈들처럼 도끼를 들고 광분해 있었다. 이광만 그런 게 아니라 소봉이나 조씨 형제들도 정신없이 피하고 때리고 있었다.
그렇게 소요파 간부 일곱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일렬종대로 바짝 붙어서 진입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얼마나 집중을 하고 있었던지, 내가 바로 옆에 붙어도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어라? 저건 반칙 아닌감?”
반쯤 뚫린 입구 안으로 반원형의 포위진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는데, 그 속에 무림맹 무사들이 있었다.
최근에 패치된 내용 때문에(일격기 업데이트) 무림맹 절정무사라 한들 예전만큼 강력하진 않았지만, 지금 같은 협소한 공간의 전투에서는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혹여 무림맹 무사 때문에 간부 7명 중의 하나라도 이탈하게 된다면 나머지 여섯은 꼼짝없이 몰살당할 상황이었다.
아직까진 뚫린 감숙맹 방어벽이 메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난입의 호기는 놓쳐 버린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포위망을 뚫기도 전에 다들 체력이 바닥날 것 같았다.
‘힘 안 쓰기로 했는데… 별수 없지.’
공간이 좁아서 무림맹 무사를 소환할 수도 없고, 별로 상황에 맞지도 않았다.
나 홀로 전투 중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대열 후미의 소봉이 옆에 서서 광풍단원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이젠 신안을 통해 보는 사람들의 일그러짐이나 원색의 오러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이쪽부터 정리를 해야 들어갈 수 있겠군.’
일단 첫 타를 먹이고, 그 찰나에 오러의 색을 살피며 상대의 약점을 파악했다.
‘대략 오른쪽 상체가 부실한 편이군.’
일순간에 제압하지 못하면 상대는 뒤에 대기 중인 사람과 교체돼버린다. 그 상황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미 초식이 전개되고 있는 육합권의 권로를 살짝 틀어 녀석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확실히 약점이라 그런지 상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재빨리 금나수를 펼쳐 갑작스런 내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녀석의 맥문을 잡아채 앞으로 끌어당겼다. 금나수는 전적으로 일대일 무공. 이때 주위의 다른 적이 날 공격한다면 피하기가 힘들다. 빨리 쓰러뜨리지 않으면 내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미 이전 전투로 체력이 반쯤 닳아 없어진 것인지, 손목을 잡은 채로 시전한 평범한 원앙각에 겨우 얼굴 한 대를 맞고는 뻗어버렸다.
기뻐할 시간이 없다. 재빨리 그 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바로 새로운 상대를 잡아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안을 통해 약점을 파악한 뒤 금나수를 써서 도망도 못 가는 광풍단의 문도 2명을 더 때려눕혔다. 그러자 입구에 약간의 틈이 생겼고, 곧바로 궁신탄형을 시전해 광풍단의 방어벽을 돌파했다. 이내 서서히 포위 진형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열자 어느새 내 뒤를 따라 일반 문도들이 전투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압박에서 풀려난 간부들은 비로소 한숨을 쉬며 전권(戰圈)을 넓혀 갔다.
적의 전열이 붕괴됐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난전 속에서 잠깐 방심이라도 했다가는 무림맹 무사에게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하직할 수도 있었다.
파캉!
이 녀석처럼 말이다.
검을 막은 주먹이 큰 소리를 내며 크게 떨린다.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대열에서 너무 앞서나간 소봉이에게 무림맹 절정무사가 검을 휘둘러온 것이다.
“정신 차려라. 이럴 때 사망자 제일 많이 나온다. 그리고 넌 이젠 됐으니까 뒤로 빠져서 체력이나 채우고 다시 와.”
아직도 소봉이를 타깃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무림맹 무사에게 권을 날리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조종하는지는 몰라도, 그쪽도 지금 정신이 없나 보다. 아무리 절정무인이라 해도 결국 NPC에 불과한 몸. 녀석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문도들 틈으로 빠져나가는 소봉이를 쫓아가려고만 했지, 계속 공격을 먹이는 나는 신경 쓰지 못했다. 절정무인이라지만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12성의 진결육합권에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참, 너도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구나.”
아이템을 주는 몹(Mobile Character:사냥물을 일컫는 게임 용어)은 아니지만, 일류에 불과한 내가 절정무인을 잡았다는 건 역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광풍단의 무림맹 무사는 모두 셋. 이제 둘이 남았다.
신안을 켜 두면 누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어서 잠시 꺼두고 장내를 훑어보았다.
“이런!”
부문주답게 각룡이 형은 조씨 형제와 몇몇 문도들의 도움으로 무림맹 무사 하나를 맡고 있었다. 문제는 소소 누님과 이광이가 맡고 있는 다른 무사였다. 척살단에 한풀이라도 하고 망하겠다는 것인지, 광풍단 간부들이 전부 그쪽에 합세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환! 무림맹 절정무사! 소환! 매난국죽!”
달려가면서 나는 부하들을 불렀다. 나도 저놈들처럼 다구리 한번 해봐야겠다!
전투 중에 일일이 컨트롤하기는 불가능해서 뛰어가는 도중에 제일 가까운 파군을 타깃으로 설정해뒀다. 그리고 내 첫 공격도 파군에게 작렬했다.
스윽- 서걱! 팍! 서걱-
6명의 무인들에게 뒤에서 공격을 당하고도 파군은 죽지 않았다. 역시 한가락 한다는 것인가?
“뭐, 뭐야!”
파군이 갑작스런 공격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며 외쳤다.
“뭐긴! 저승사자지!”
파군에겐 흥미가 없다. 알아서 죽겠지. 일단 저 무림맹 무사부터 떨어뜨려야겠다.
바로 방어용 잡기들을 발동시키고 무림맹 무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세 사람을 포위망에서 구출하려면 잠깐이라도 광풍단 애들의 시선을 내 쪽으로 끌어와야 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역시 유명 인사는 어딜 가든 주목받기 마련인가 보다.
“조연이다! 얘들 버리고 조연이만 집중 공격해!”
“저놈을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 저놈만 공격해!”
‘이 썩을 놈들이 누구보고 놈이라고 하는 겨? 그리고 내가 바보냐? 네놈들 따위한테 포위당하게!’
그나저나 백무 저놈은 저번에 그렇게 때려 가면서 가르쳐 줬건만, 또 반말을 한다.
“너희들한테 당하면 내가 백무다!”
그새 파군이 강제 종료를 당했는지, 소환무사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내 무림맹 절정무사는 광풍단의 무림맹 무사에게 붙여 놓고, 호위들은 그냥 알아서 싸우게 따로 컨트롤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호위들은 항상 내 사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광풍단 녀석들이 일차로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매란국죽일 수밖에 없었다. 컨트롤하기 번거롭고 이류 초입에 불과한 호위무사들을 소환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잠깐 동안 훼방 놓기. 그 잠깐의 시간이 날 포위당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척살단은 뒤로 빠져요!”
포위망에서 빠져나온 세 사람이 이제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서 명령을 내려 줬다. 이미 일반 문도들이 수십이나 가세한 마당이라, 체력이 바닥인 세 사람은 쉬는 게 나았다.
“자, 자! 전 신경 쓰지 말고 광풍단을 포위하세요. 일망타진해봅시다!”
스물이나 되는 문도들이 마구잡이 싸움을 멈추고 포위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물 안엔 겨우 무림맹 무사 한 명을 포함해 7명밖에 없었지만, 백무라는 대어가 들어 있으니 수지는 그럭저럭 맞는 편이었다.
크헉!
[호위무사 국이 강제 소환당했습니다.]
내 호위무사 국이 강제 소환을 당할 즈음, 광풍단의 무림맹 절정무사도 사라졌다.
제일 센 녀석이 사라졌으니 이제 몹 몰이를 제대로 해볼까?
살짝살짝 자리를 조금씩 움직이며 삼면 이상 포위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포위하는 문도들도 주위를 돌면서 공격은 하지 않고 도망만 쳤다.
그렇게 내가 적들을 달고 움직이면, 문도들이 정신 나간 것처럼 내 뒤를 쫓기만 하는 광풍단원들을 향해 거침없는 공격을 가했다. 왠지 생각 없이 움직이는 광풍단원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유저가 아니라 NPC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녀석들은 정말로 날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투. 거미줄보다 가는 희망에 마지막 운을 맡기는 것이겠지.
사냥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다. 일곱이 여섯이 되었다가 다섯이 되고, 그렇게 한 명씩 사라지더니 마지막까지 백무와 함께 남은 사람은 사풍이었다. 하지만 광풍단의 부단주라는 사풍마저도 결국 검하고혼(劍下孤魂)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사풍이 쓰러지자, 난 더 이상 도망가는 걸 멈췄다. 계속 그 짓을 하고 있는 건, 마치 백무가 무서워 도망 다니는 형국이 아니겠는가.
간부들을 모두 잡느라 시간을 꽤 끌었다. 그사이에 감숙맹은 이미 소요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체력을 회복한 척살단과 다른 간부들도 포위진에 합류해, 이제 홀로 남은 백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
분위기가 그런지라 백무도 무의미한 공격을 멈추고는 내게 알아듣지 못할 씩씩거림만 내뱉었다.
그런데 그런 백무를 향해 우리 중 누구도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한번 휘두른 칼을 멈추면 다시 들기 어려운 법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일제 공격을 가한다면 사람들한테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순 없을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건가?
“백무 씨! 이제 쪽박 차게 생겼는데, 마지막으로 일대일 비무 한번 제대로 붙어봅시다. 명색이 강호인인데, 제대로 비무 한 번 못해보고 사라진다는 것도 우습잖아요? 어때요? 할래요? 싫으면 그냥 몰매 맞고 죽는 방법도 있고요.”
녀석은 내 말이 진심인지 되묻는 눈치였다. 믿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지만, 한참 장고를 한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기색은 지금까지 내가 알던 백무와는 판이하게 축 처져 있었다.
“아니. 어차피 비무로 내가 이긴다 해도 광풍단은 이미 끝났습니다. 실패하긴 했지만 해볼 만큼 다 해봤으니 미련도 없습니다. 패배를 인정할 테니 이후로 예전 광풍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말아주세요.”
어차피 이길 비무. 내심 진진이 백무에게 전수했다던 기술도 살펴보고 녀석의 실제 전투력도 살펴보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다.
그나저나 이런 분위기에서 저놈을 어찌 처리해야 하나? 혼자 죽이기 꺼림칙하니 역시 다구리밖에 없나?
그런데 용케 백무가 내 난감함을 알았는지 스스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엇! 도망갔다!”
“뭐, 뭐야!”
녀석이 접속 종료를 해버린 것이다.
“아, 놀랄 것 없어요. 문파대전 중에 로그아웃하면 문주 집무실에 NPC가 생성됩니다. 그 NPC만 잡으면 문파대전이 종료되니 일단 잡으러 갑시다. 어차피 분위기상 백무를 죽이는 것이 영 꺼림칙했는데, 알아서 피해주니 더 좋죠. 그럼 전쟁을 마무리 지으러 갑시다!”
기존에 이미 설립된 NPC 문파가 아닌 유저 설립 문파에선 문파대전 중 문주가 접속을 하지 않으면 임시로 NPC 문주가 생성된다.
그런데 그 NPC 전투력은 얼마나 되려나?
역시 일종의 페널티 성격이다 보니 NPC 문주는 문파의 총관보다 더 약했다. 굳이 레벨이 있다면 1레벨쯤 되려나?
겨우 주먹 한 대를 맞고 임시 NPC 문주는 죽어버렸고, 그렇게 광풍단은 멸문당하고 말았다.
“야호! 이겼다! 소요파 만세다!”
“드디어 끝났다!”
[소요파와 감숙맹의 문파대전에서 소요파가 승리했습니다.]
[감숙맹의 문파 레벨이 0으로 하락했습니다.]
[소요파의 문파 명성이 1천 상승했습니다.]
[소요파의 모든 문도원들의 명성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문파대전의 결과로 감숙맹이 강호에서 사라졌습니다.]
문도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주르륵 올라오는 시스템 메시지가 즐겁다. 특히 마지막 줄이.
“야! 안 끼기로 했잖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각룡이 형이었다.
“그런 말이 나와요?”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아깐 정말로 실패하는 줄 알았거든. 너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정리하지 못했을 거다. 잘했어!”
“뭘요, 잘하시던데요. 전 광풍단에서 무림맹 무사를 불렀기에 끼어든 것뿐이에요. 그런데 대체 그건 뭡니까?”
“뭐?”
“폼만 절정무공 같고 별로 내용은 없어 보이는 그 이상한 무공 말이에요.”
“크하하! 그게 효용이 없다? 그건 아닐걸. 다른 사람하고 같이 연계해서 쓰면 거의 살인기(殺人技)라고 해도 무방하지.”
그런가? 하긴 거의 시간차 없이 연달아 집중 공격이 가능하니 말 되네. 설령 상대가 차원이 다른 경지라 해도, 손이 4개가 아닌 이상 그 짧은 순간에 쏟아지는 다른 공격들을 다 막아낼 순 없겠지. 그때 그 광풍단 간부는 형과 소봉이, 그리고 광우의 공격에 혈죽선까지 총 네 번의 공격을 받았으니, 안 죽으면 인간이 아닐 거다.
“일격기야. 비룡재천이라고, 청랑채 철대광을 잡아서 나온 거다. 데미지는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이고. 다음에 비급을 먹으면 너 주마.”
“됐어요. 어차피 문파대전도 끝나고 했으니, 혼자 철대광 독식해서 먹으렵니다.”
“뭐, 맘대로 해.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백무는 신경 안 써도 되는 거야? 그리고 사황성에서 왔다는 그 사람들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지?”
갑자기 형이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그건 일단 문파로 돌아가서 회의하면서 이야기하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할 것도 있으니까요. 괜찮죠?”
“그러자.”
이제 슬슬 돌아갈 때인 것 같다.
“자, 자! 문파로 돌아갑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전체 회의를 할 거니깐 이탈하지 마시고 빠짐없이 문파로 따라오세요!”
* * *
소요파.
“…그래서 아직은 풀어질 때가 아닙니다. 일단 다음 주에 한 곳하고만 해보고, 여력이 남는다 싶으면 하루에 두 탕, 세 탕도 뛰어야 합니다.”
광풍단과의 문파대전이 양 문파의 수장인 나와 백무의 감정싸움 때문에 벌어진 양상을 띠기는 하지만, 어차피 예상됐던 일이었다.
산 하나에 호랑이 둘은 살지 못한다. 문파를 확장해간다면 필연적으로 난주의 이권 다툼에 빠져들 수밖에 없고, 언제든 건곤일척의 승부를 결해야 했다. 다만, 그게 청랑채 사건으로 인해 생각보다 빨리 적대 전선이 그어진 것일 뿐.
이제 유일한 적수가 사라졌으니 난주성에 자리 잡은 다른 문파들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지금 문도들에게 그 계획을 말하는 중이었다.
“문주님! 너무 과하게 잡으신 것 아닙니까?”
한 문도가 손을 들어 이견을 제시했다.
“네. 당연히 그런 의문이 생기겠죠. 그 대답을 해드리기 전에 우선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금 정리를 해봅시다. 우선,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같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 사황성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광우와 광견 장로의 정보에 의하면, 현재 사황성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죠. 전체 이 위라는 순위는 NPC들의 무력까지 합한 수치일 뿐입니다. 그리고 NPC가 문주로 있는 문파에선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없지만, 쉽게 난주로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강호 서열 이 위인 사황성의 중원 침공은 쉽게 결정되지 않을 겁니다. 분명 강호의 정파들이 어느 정도 그 충격을 감당할 만큼의 힘을 길렀을 때에야 개발사에서 사황성의 중원 진출을 허용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소요파에게 있어 이번 광풍단과의 문파대전 정도는 우스울 정도로 큰 위기가 될 것입니다.”
같은 지역에 전체 서열 2위의 문파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어느 누가 경계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소요파는 정파이고, 사황성은 사파인데 말이다. 문도들도 그런 사황성에 대해 종종 우려 섞인 말을 내뱉곤 했다.
하지만 앞날이 두렵다고 해서 소요파가 먼저 허리를 굽히고 사황성의 하부 조직으로 변해야 할까? 현실 속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머리를 떼놓고 사는 사람들의 일.
“처음 제가 소요파를 세울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중원의 어떤 랭커와 비무를 하더라도 지지 않을 실력을 갖게 하는 겁니다. 그건 게임하기 편한 하남이나 절강, 사천이 아닌, 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감숙을 택한 여러분의 뜻과 일치할 것입니다. 강자가 된다는 게 무엇일까요? 어차피 밸런스 유지가 가장 중요한 게임 속에서라면 결국엔 모두 동일한 끝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강호에서 강자란 언제나 한발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중원의 구대문파, 오대세가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앞서갈 수 있는 건, 강호에서의 경험밖에 없습니다. 더 빨리 한 지역의 패자가 되고 더 빨리 절정, 최절정, 그리고 초절정의 무공을 획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급한 게 아닙니다. 급하게 움직여야 살아남는 상황입니다. 가급적이면 한 달 안에 난주를 제압하고, 무위와 천수에도 진출할 생각입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두 달 안에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를 제외한 중소문파들 중에선 최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치고 문도들을 바라보니, 내 말에 수긍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광풍단은 어떻게 합니까?”
이번엔 각룡이 형이 질문을 던졌다.
광풍단이라… 전후 처리가 중요한 일이긴 하지.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냥 무시하는 게 낫겠지요. 일반 낭인들처럼 대하면 될 겁니다. 그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문파로 데려올 수도 있고요. 전쟁은 끝났습니다. 괜히 괴롭혀서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는 없겠죠. 그리고 백무가 계속 게임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백무가 하는 짓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무가 다시 게임을 한다고 해도 이제 특별히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습니다.”
질문을 했던 각룡이 형은 찬성을 표했고, 그 외에도 달리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질문 있으신가요? 조금 이따 간부들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잡는 회의를 해야 하니, 의견들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한 문도가 머뭇머뭇거리더니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이제 필드의 보스급 몬스터는 전부 우리 겁니까? 그리고 보스 몹을 잡아서 얻는 아이템들은 어떻게 분배하실 생각인가요?”
“필드 보스는 아직 우리 문파만 사냥이 가능하니 일단은 독식이겠죠. 하지만 작업장을 유지하려고 일반 유저들과 다툴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나중에 간부들하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만, 일단은 구역 통제 방식은 안 했으면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이템 분배는 그동안 문파 내 경매로 분배하는 방식이었는데, 거기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절정무공도 아니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공짜인데 굳이 돈 주고 배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후엔 필요한 사람만 돈을 내는 게 아니라 주사위를 굴려서 먹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단순한 골동품이나 귀금속은 문파 증축 비용으로 무조건 압류입니다. 다른 질문 있으신 분 있나요?”
잠시 기다렸지만 별다른 질문은 없었다. 나는 간부들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문파 레벨 올리는 건 언제쯤 가능할 것 같아?”
자리에 앉자마자 소소 누님이 물어왔다.
“글쎄요. 두 번 싸워서 이천이니까 만이 되려면 여덟 번 더 싸워야 하네요. 그럼 두 달 후쯤?”
“장난하지 말고, 이제 한 번에 여러 군데 칠 거라면서?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그거야 잘 모르죠. 듣기론 우리보다 레벨이 높은 문파를 이기면 더 준다고 하는데, 얼마나 주는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대략 삼 주 정도? 그쯤 되면 필요한 문파 명성은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일단 다음 주에 해봐야 제대로 가닥이 잡히겠지만요.”
“그럼 적어도 삼 주 후면 문도 수가 이백으로 증가하는 거예요?”
이번엔 조립산이 물어왔다. 녀석이 자기 친구들을 가입시키려고 한참이나 조르더니, 그게 제일 궁금했는가 보다.
“아니, 절대 불가능하다. 내 명성이나 문파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게 돈이거든. 지금 현재 문파 자금 비축해놓은 게 이천오백만 냥. 내 돈 이억 오천만 냥 있던 건 척살단 살리느라 뇌물로 다 처박아버렸고, 삼 레벨 되려면 아직 이억 칠천오백만 냥이 부족한데 그걸 무슨 수로 모아? 그리고 이제 문파 레벨 올리는 데 내 돈 꼴아 박을 생각은 별로 없어. 나도 저축 좀 하고 살아야지. 문도들처럼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말이야 거지인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아직 2천만 냥 정도 남은 현금에다 표국 설립 신고서만 반값에 팔아도 1억 5천은 나온다. 그리고 창고에 쟁여 놓은 온갖 잡템 다 팔아치우면 2억쯤 나오려나? 하지만 나 혼자 있었을 때야 내 돈으로 문파를 키우는 게 당연했지만, 이제 문도들도 있는 마당에 내 돈만 투입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 있으면 말해봐. 말만 하면 우선 간부들만이라도 각출해서 보태줄게. 지금 나한테 오백만 냥 정도 있고, 일반 문도들도 백만 냥 정도는 낼 수 있을 거야. 그럼 얼추 일억 정도만 더 모으면 되겠네.”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말이지만, 그 정도야 이미 고려해뒀다. 그럼 자기 집 증축하는 데 살고 있는 식구들이 돈 보탤 생각도 안 한단 말인가? 근데 저놈들은 왜 저리 떨어?
“야, 이광, 그러고 보니 너흰 알아주는 도적단 출신이라면서? 한때는 너희들이 강호 제일 갑부라고 생각했다며? 그럼 돈 많겠네?”
녀석들이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더니, 모두들 자신을 째려보고 있자 결국 광우가 실토했다.
“뭐, 숨길 것도 없죠. 어차피 그 동네 진출하면 다 아실 테니까요. 제가 오천 정도, 광견이가 또 오천 정도 있어요. 카오 상태라서 전장에 맡길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라 다른 계정에 담아놓고 다녀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어차피 그 돈 쓸 데도 없으니까.”
광우 녀석 통도 크다.
그런데 광견은 광우의 돌발 발언에 자기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현금으로 거의 오백만 원이나 하는 돈을 그냥 주겠다고? 미쳤냐? 아서라. 너희들이 뻘겋게 된 대가를 그냥 받을 수야 없지. 나중에 필요하면 다른 간부들하고 비슷하게 알아서 맞춰서 내. 그리고 돈 없는 사람한테 굳이 받을 생각도 없고. 어차피 예상대로라면 돈이 없어서 문파 증축을 못하는 경우는 없을 거야.”
“응?”
“저도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정확히는 말 못 드리겠고, 정 부족하면 이광이한테 임시로 돈 빌려다 쓰면 됩니다. 갚는 건 문파 비용으로 하면 되니까요. 그럼 문파 증축은 대충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만 아시면 되고, 일단 아까 나왔던 보스탐하고 아이템 배분 문제부터 논의해봅시다.”
작업장 문제는 별말들 없이 넘어갔지만, 아이템 문제는 개인들에겐 중요한 일이라 참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최종적으론 내 의견대로 사냥에 참가한 사람들이 알아서 주사위를 돌려 차지하는 걸로 결정됐다.
그 외에도 새 문도를 얼마나 받을 것인지와 사황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사황성의 경우엔 딱히 어떻게 접근할 처지가 못 됐다. 동맹인 광풍단을 멸문시켜 버린 우리에게 얼마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문파대전 당시 전장에선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구경하던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던 것일까?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구경은 하고 있었을 거라는 짐작은 갔다.
마음 같아서는 사절이라도 한 명 보내 협상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아직 사황성의 위치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황성 생각만 하면 영 찝찝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