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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포매향 혈투(抱梅香 血鬪) (14/62)

제14장. 포매향 혈투(抱梅香 血鬪)

난주 감숙맹(蘭州 甘肅盟).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문도의 안내를 받으며 취의청 안으로 들어오는 3명의 이방인들을 향해 감숙맹주 백무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런데 세 손님은 정파를 표방하는 감숙맹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피로 물들인 듯 섬뜩한 붉은 머리칼의 강퍅한 사내도 그렇고, 다른 둘 역시 찢어진 뱁새눈과 기형적인 체형이 도저히 정파의 인사 같지 않았다.

“네. 어쨌든 반갑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연락을 한 겁니까? 분명 우리가 만날 시기가 지금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붉은 머리 사내는 백무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예의 따위는 물리치고 바로 용건을 말했다.

“형님한테 내용을 듣지 못하셨나요?”

“알고는 있지요. 하지만 담 형님이 받아들이는 것과 제가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르지요.”

“형님께서 달리 계획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나요?”

백무는 넌지시 결국 최종 책임자는 담 형님이라는 사람이 아니냐는 투로 되물었다.

“어이! 이봐, 백무! 말조심해!”

백무의 말뜻을 알아채고 푸른 눈의 사내가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야, 갈치! 조용히 해라.”

어색해진 상황 속에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자 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무 님, 착각하지 말아요. 형님과 아무리 형제라고 해도 그건 둘의 관계일 뿐이지, 우리 십이전사와의 관계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더구나 저와 형님의 관계도 한배를 탄 동지의 관계이지, 상하의 관계는 아닙니다. 광풍단과 사황성의 레벨이 같다고 혼동하지 말아요.”

나긋나긋한 어조의 협박에 백무가 진땀을 흘렸다. 이들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일파의 종주인 백무가 이토록 곤혹스러워하는 걸까?

“다시 묻지요, 백무 님. 왜 이렇게 빨리 사황성에 손길을 내밀었습니까?”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백무가 정말 진땀을 닦는 듯 손으로 이마를 한 번 쓸고는 입을 열었다.

“후우… 그게, 그러니까…….”

백무는 한참 동안 사황성의 인물들에게 소요파와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지금은 감숙맹만으로는 도저히 소요파를 이겨 낼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난주에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하면, 처음에 세운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직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연락을 한 이유입니다.”

백무의 말이 끝났지만, 한참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황성 인물들은 백무의 말 속에 가감된 진실을 파악하느라 골몰해 있었고, 백무는 더 이상 말하면 자신의 꼴만 우스워질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계산이 다 끝난 듯 사안의 주재자인 붉은 머리 사내가 입을 열어 이 적막을 깼다.

“이거 참, 완전 엉망진창이구먼! 아니, 도대체 형님은 뭘 보고 이런 애송이한테 감숙성 백도를 장악하라고 시켰단 말이야? 참 나, 정말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네.”

백무를 애송이라고 부르다니? 도대체 무엇이 사내를 이토록 분노케 한 걸까?

갑작스런 사내의 바뀐 태도에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싹 변했다. 거기에 당사자인 백무는 분노와 당혹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은 네놈이 망쳐 놓고 우리보고 뒤처리해라, 이거 아니냐? 맞지? 야, 이 빠가사리 같은 놈아! 애초에 조연이라는 그놈을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건데? 살살 달래서 광풍단으로 끌어들이거나, 그게 안 되면 연합이라도 했으면 됐잖아! 그리고 조연 밑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뒤집어엎는 수도 있는 건데, 왜 처음부터 적대시한 거지? 전부 네놈이 대장 하려고 욕심 부린 것 때문에 생긴 일이잖아! 네놈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쳐 놓고선 이제 와서 밑 닦아달라고? 이런 개념 없는 새끼!”

사내는 말을 잇다가 아예 대놓고 쌍욕을 했다. 너무 막나가는 듯하자, 결국 좌우의 다른 사황성 사람들이 사내를 만류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 상어 형님! 진정하세요. 분명 백무가 잘못을 하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돌아갈 순 없지 않습니까! 큰형님 체면도 생각을 해주셔야죠. 백무 기죽이는 건 그만 합시다. 일단 이 바닥 정리부터 하고, 그때 가서 백무를 다시 혼내든가 해요.”

갈치라는 사내가 상어라 불린 사내를 진정시키면서 하는 소리가 백무를 더 절망에 빠뜨렸다. 자기를 장기판의 졸 취급하니,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하지만 어찌 반항해볼 여지도 없다. 상어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가 왜 조연을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단일 문파로 강호 전체를 감당할 순 없으니, 조연의 소요파와 연합이라도 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이봐, 백무.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과묵한 인상의 거인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게… 그게…….”

“어물거리지 말고 얼른 말해라. 짜증난다.”

거인의 위압적인 말투에 백무가 바로 말을 꺼냈다.

“솔직히 세 분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형님들 실력이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지금 상황이 세 분만으론 좀 힘들거든요. 그리고 지금 문파 재정도 바닥이 난지라, 문파대전 종료하고 떨어진 문파 레벨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져나간 문도들의 자리를 충원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고요. 담경 형한테 그 이야기도 드렸는데… 죄송하지만, 돈은 좀 가지고 오셨는지…….”

거인을 보고 이야기했는데, 상어가 그 말을 받는다.

“돈 없다. 네가 그랬다면서? 이억 냥이 필요하다고. 야! 이억 냥이 네가 가져오라면 바로 갖다 줄 수 있는 돈이냐? 지금 현거래 시세가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이천만 원이다! 거기다가 감숙맹 세울 때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으휴, 이 망할 자식! 너 이놈! 그때 빌려 간 삼억 냥 갚을 자신이나 있어? 그런 마당에 또 돈을 빌려 달라? 아후! 열불 난다, 열불 나!”

그랬던 것인가? 최소 문파 건립 비용은 6억 냥. 그 절반인 3억이란 돈을 차입해서 문파를 세웠는데, 이젠 갚을 여력도 없으니 부도 위기인 건가?

상황이 이러니 채권자인 사황성 사람들이 이렇게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을 부라리며 백무에게 삿대질을 하던 상어가 다시 갈치의 만류에 자리에 앉았다.

다시 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거인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주었다.

“백무야, 넌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널 도우러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형님께서 우릴 보낼 때 하신 말씀이 있다. 알아서 판단하라고.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충분히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겠다.”

거인의 말대로라면, 사황성은 조력자가 아니라 방관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백무도 알아들었는지 그렇지 않아도 닫힌 입이 더 무거워졌다.

그때, 감숙맹 부맹주인 사풍이 맹주 집무실로 바쁜 걸음으로 들어왔다. 사풍은 백무 옆에 다가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문주님, 이광이 지금 포매향에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 아직 손님들하고 이야기 안 끝났으니 일단 나가서 대기하고 있어봐. 좀 이따가 그놈들 면상이나…….”

사풍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상어가 백무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이광이라면 요새 설치고 다닌다는 그놈들 말인가?”

“네, 걔들입니다.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그놈들 카오이면서도 설치고 다닌다며?”

“예. 어떻게 된 건지 경비들까지 살인을 저지른 놈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아서 더 골치죠.”

“호오! 그럼 놈들 실력을 보는 걸로 일을 시작해볼까?”

“예? 형님들, 지금 카오 상태라서 성안에 못 들어가지 않나요?”

“그건 염려 말게. 녀석들이 카오라면 손속을 겨룰 순 있을 거야. 어이, 거기! 사풍이란 친구! 우릴 그 포매향인가 하는 곳으로 좀 안내해주겠나?”

사풍이 상어와 백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무언의 눈길을 백무에게 보냈다.

“안내해드려라. 앞으로 이분들 말을 내 말처럼 여기면 된다.”

백무가 사풍을 향해 짤막히 명을 내렸다.

“따라오세요.”

사풍은 백무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하고는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흐음…….”

“이거 실전은 간만인걸? 흐흐흐!”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 사람이 사풍을 따라 앉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이광과 은소소는 간만에 난주성 안에 있는 주루, 포매향에 들렀다. 주문한 안주와 산서분주가 나오자, 광견이 호탕한 웃음으로 주루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크하하!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술이더냐! 자, 자, 누님, 쭈욱~ 한잔 드십시다! 광우, 넌 뭐 하냐! 누님 잔 비었다!”

“하하! 그래요, 누님. 제 술 한잔 받으세요. 오늘은 싸움일랑 잊고 여기서 시간이나 보냅시다. 광풍단이야 쥐새끼들처럼 계속 숨어만 있으니 맘 편히 놀아봐요. 자, 받으세요.”

은소소가 술잔을 들어 광우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술병에 술잔을 갖다 대자, 투명하고 맑은 액체가 조르륵 소리를 내며 술잔을 채웠다. 비록 맛도 향기도 없는 술이지만, 분위기만은 정말 술집에 온 느낌이었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이야기하며 시간이나 때우자. 이제 광풍단하고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으니 말이야. 근데 연이가 좀 진즉에 알려 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입니다. 연이 형도 참 재주가 좋아요. 어떻게 관리들을 구워삶을 생각을 다 했을까요? 우리 같은 인간들은 도저히 생각도 못할 일을 잘도 해낸다니까요.”

척살단은 방금 전에야 조연에게 관리들을 매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맘 놓고 성안에 들어와 놀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니 문주지. 걔가 좀 싸가지가 없긴 해도, 정도 많고 머리도 좋잖아. 요즘 같아서는 연이 말대로 정말 소요파가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은소소가 술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렇죠. 연이 형이 좀 네 가지가 없긴 하죠. 크크큭! 아차차! 제가 이 말 했다고 고자질하면 안 됩니다. 그럼 누님이랑 앞으로 안 놀아줄 거예요.”

“얌마, 술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는 술자리에서 끝! 그것도 몰라? 이 혈서시 은소소가 그런 거 고자질할 사람으로 보여?”

“아니죠, 아니죠! 아이고, 제가 실수했습니다! 그런데 혈서시는 또 뭡니까?”

광우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과장된 몸짓으로 사과를 하더니 별로 아름답지 않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헤헤. 내 별호지 뭐야! 서시(西施) 몰라? 중국 이 대 미인 말이야.”

“알기야 알죠. 그런데 누가 누님한테 그런 별호를…….”

“어쭈! 지금 개기는 거냐? 내가 붙였다, 이놈아! 왜, 기분 나쁘냐?”

은소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비아냥거린 광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어이쿠! 인정! 인정!”

가볍게 주먹을 몇 대 맞고 광견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호호호!”

“하하하!”

쾅!

한참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는데, 갑자기 청천벽력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척살단원뿐 아니라 NPC인 주루의 일꾼들까지 모두 굉음의 진원지를 찾아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포매향 출입구의 문짝이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그리고 갈무리되지 않는 마기를 흘리며 3명의 괴한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헉! 저… 저 새끼들이 왜!”

“뭐… 뭐야!”

괴한들의 얼굴을 본 이광이 학질이라도 걸린 듯 사시나무처럼 몸을 부르르 떤다.

“야, 너희들 왜 그래? 저 빨간 놈들 때문이야?”

“누… 누님, 쉿! 조용히 좀 하세요.”

“누님, 조용히 하고 잘 들으세요. 저놈들은 우리 실력으로 어떻게 해볼 놈들이 아니니까, 제가 소리치면 냅다 달리세요. 무조건 문파까지 달리시는 겁니다. 알았죠?”

광우가 몸을 굽혀 머리를 은소소 가까이 하고 소곤거렸다.

“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설마 저 상어, 갈치, 가물치라는 생선들이 그렇게 무서운 거야?”

광우와 광견이 은소소의 말에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들의 탈출 계획은 어긋나버렸다. 3명의 흉한들이 어느새 그들이 앉아 있던 탁자 앞에 멈춰 선 것이다.

“이게 누구신가? 이광이 누군가 했더니, 미친개 새끼랑 미친소 새끼였네? 하하하!”

“난 또 활약이 대단하다기에 숨어 있던 은거 기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겨우 너희들이었어? 이거 참, 난주 바닥이 수준 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희들 정도에 농락당할 정도로 한심한 동네인 줄은 몰랐네.”

“이… 이……!”

생선들이 비아냥거렸지만, 광견은 신음성만 흘릴 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어이, 이광! 어떻게 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줄까? 아니면 나갈까? 아니지, 아니야. 나가면 분명 토깽이처럼 도망갈 게 뻔하니 여기서 밟아줘야겠네? 일단 일어나봐. 무방비로 앉은 상대한테 칼질하기도 꺼림칙하니 말이야.”

상어가 한껏 이광을 도발하고선 탁자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섰다. 이광은 주루의 입구를 힐끗 쳐다봤지만, 역시나 광풍단의 간부들이 입구를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번천지복의 실력이 아닌 한 도망가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누님에겐 아마 손을 안 쓸 겁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꾹 참으세요. 절대 저 새끼들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세요. 복수할 시간은 많으니까요.”

광우가 은소소에게 사뭇 비장하게 주의를 주면서 일어섰다. 광견도 은소소의 얼굴을 한 번 쓰윽 쳐다보며 주루 한가운데로 몸을 끌었다.

흉한(兇漢) 상태인 사람이 성안에서 일반 상태인 사람을 공격해 죽이면 바로 관병이 출동한다. 일반적이라면 절대 은소소가 공격당할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은소소가 흉한 상태인 사황성 패거리를 공격한다면, 저들은 관병 따윈 무시하고 그녀를 죽이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광우의 조언은 이런 상황을 계산하고 나온 말이었다.

꽝! 퍼퍽!

우당탕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다섯 사내들이 비호처럼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광은 방어엔 신경을 쓰지 않고 상어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상어에게 유독 원한이 깊었던 것일까?

“어쭈! 이 자식들 봐라?”

상어는 이광이 자기만 집중적으로 노리고 달려들자,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광의 등이 자연스럽게 가물치와 갈치에게 노출되었고, 곧 그들은 포위를 당한 형국이 돼버렸다.

이광에겐 희망이 없었다. 주루에서 사황성 패거리를 보자마자 조연에게 긴급을 요하는 전서구를 재빠르게 날리긴 했지만, 조연이 소식을 듣기까지는 10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명이라도 저승길 동무로 삼는 일밖에 없었다.

채채챙! 서걱! 퍼펑!

안전 따윈 도외시하고 상어를 공격했지만, 녀석은 버티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등을 내준 탓에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져 가는데도, 생명이 다하기 전에 적을 길동무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무공 수준은 떨어졌지만, 이광의 체력은 사황성 무사들보다 더 높았다. 그리고 방어를 도외시한다고 해도, 그간의 싸움 경험으로 위험한 공격은 용케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못 본 사이에 좀 강해진 줄 알았더니, 어째 실력이 늘질 않냐? 귀찮으니 그만 끝내자. 시전! 사황혈적진(死皇血積陣)!”

상어가 진법을 시전하자, 사황성 무사들의 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말 그대로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만 뒈져라!”

계속 수비만 하던 상어가 광견의 가슴을 향해 거치도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광견의 등으로 갈치와 가물치의 공격이 쇄도해왔다.

이광은 상어가 혈적진을 발동시킬 때 이미 죽음을 예감했다. 예전 천산 북로에서 이들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일대일로는 비등한 실력이었지만, 이들 12전사들이 사황성의 기괴한 무공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도저히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특히 혈적진이 발동된 후엔 살아서 도망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꼴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광견은 상어가 자신을 타깃으로 잡고 공격하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순간적인 전투 감각은 자신이 광우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쉬익! 서걱! 푹!

꾸르륵!

앞뒤로 3자루의 도가 광견을 훑으며 피거품 이는 소리를 자아냈다.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광견은 만족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한 방 먹였다는 희열만이 가득했다.

“이… 이 새끼! 이 지독한 새끼!!”

상어의 가슴에 광견의 도끼가 깊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상어는 더 이상 분노할 시간이 없었다.

서걱-

광견의 동귀어진의 수법에 놀라 잠시 집중이 흐려진 찰나, 광우의 도가 상어의 목덜미를 베고 지나갔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피 분수와 함께 머리통이 하늘로 날아올랐을 법한 상황. 광견을 욕하던 상어가 죽었다.

“현재 스코어 일 대 일.”

광우가 비릿하게 웃으며 가물치와 갈치를 조롱했다.

가물치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말았다. 관외(關外)에서 수없이 충돌했었지만, 오늘처럼 이광에게 당해 사망자가 나온 전투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분노에 몸을 맡긴 건 가물치보다 갈치가 빨랐다. 혈적진은 체력이 절반이나 소모되는 대신 파괴력과 스피드가 갑절에 가깝게 상승하는 천고의 절진. 갈치의 움직임은 절정고수의 수준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광우는 오래 버틸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이미 상어를 공격하면서 축적된 데미지가 죽음을 재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갈치가 혼자 공격을 해오자 웃음이 나왔다.

‘고맙군.’

동패구사라는 건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쉬운 기술이 아니었다. 적의 투로를 막고, 그 찰나에 자신의 무기를 적의 급소에 쑤셔 넣어야 하는 고도의 순발력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었다.

채채채챙!

광우의 칼이 갈치의 도신을 훑고 지나갔다. 몸은 이미 갈치가 뒤로 빠져나갈 수 없게끔 가까이 붙여 놓은 상태.

상어가 죽고, 갈치가 뛰어나가고, 광우가 대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숨 한 번 쉬는 시간보다도 짧았다. 그렇기에 가물치는 광우의 도가 갈치의 도와 엇갈리면서 서로의 가슴을 뚫고 지나갈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푹! 푹!

“이… 이… 미친 또라이 자식들!”

가슴이 꿰뚫리는 중상을 입긴 했지만, 갈치의 체력은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광우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곧 죽을 정도의 빈사 상태. 그래도 갈치는 이대로 녀석을 곱게 보내기가 싫었다. 그는 다리를 들어 광우의 가슴을 밀어버리고 박힌 칼을 뽑아들었다.

“그만 뒈져!”

갈치의 칼이 허공을 가르고 광우의 머리로 쏟아져 내렸다.

“그래, 그만 뒈져라.”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광우가 고개를 들어 갈치를 보고 히죽 웃었다.

핑-

어느 새 빼든 것인지, 광우의 손에는 혈죽선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피로 물든 부채 속에서 암기 하나가 조그만 소리를 내며 갈치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현재 스코어 이 대 이.”

혈죽선의 암기에 맞아 갈치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본 광우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광우도 강제 종료를 당하고 말았다.

* * *

[조자건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엥? 웬 전서구지? 광풍단 애들이라면 집에 꼭꼭 숨어 있을 텐데.”

조자건에게 맡긴 임무가 가볍지 않았기에, 날아온 전서구를 재빨리 확인해보았다.

<수신자:조연

문주님, 광풍단으로 카오틱 상태인 세 사람이 들어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도 꽤 강한 사람들 같습니다. 그리고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광풍단 간부들 몇 명하고 같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문제는 놈들이 가는 방향이 난주성 안으로 보입니다. 카오틱 상태인 사람들을 데리고 말입니다. 지금 척살단이 포매향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어쩐지 그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발신자:조자건>

“이건 또 어떤 놈들이야?”

카오틱 상태인 사람들이 버젓이 관병이 우글거리는 성안으로 들어갔다면, 딱 한 가지 가정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욕관 바깥에서 왔다는 것. 비상이었다!

일단, 사냥을 하고 있는 간부들과 문도들에게 급히 돌아오라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리고 소요파 안에 머무르고 있던 몇몇 문도들을 데리고 난주성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난주성 남문을 통과할 때쯤, 다시 2통의 전서구가 도착했다.

[광우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수신자:조연

포매향. 급히 지원 바람!

발신자:광우>

[조자건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수신자:조연

포매향에서 전투 벌어졌음. 광풍단 애들이 입구를 틀어막아서 안의 상황을 확인할 길이 없음. 급히 지원 바람.

발신자:조자건>

편지를 확인하고 나니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신법은 내 맘처럼 빨라지지 않았다. 경지의 차이에 따라 문도들이 내 뒤로 길게 꼬리를 만들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지막 전서구를 받고 몇 분을 더 달리자, 그제야 포매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조자건과 조립산이 건물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따라와!”

둘을 그대로 지나치며 고함을 질렀다. 급한 상황 속에서도 내 명령에 따라 대기 상태로 기다려야만 했던 두 사람이 그제야 족쇄를 풀고 내 뒤를 따랐다.

“입구만 뚫고 바로 진입한다!”

조씨 형제를 보고 소리친 후에 즉시 신안을 켰다.

포매향 입구는 사풍이라는 사람과 한 명의 광풍단 무인이 틀어막고 있었다. 간부급인 사풍은 제쳐 두고 비실비실해 보이는 희탁이라는 녀석을 먼저 뚫기로 마음먹었다.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몸을 날리자, 12성 진결육합권의 권로가 희탁의 가슴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녀석들은 바깥엔 신경도 안 쓰고 안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에 우리가 공격하기 전까지 적이 출현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콰쾅! 슥-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명성이 821 하락했습니다.]

“뭐, 뭐야!”

희탁이 죽고서야 우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사풍이 기겁했다.

“오랜만, 사풍 씨!”

나는 안으로 바로 진입했고, 이미 뚫린 입구로 문도들이 분분히 따라 들어왔다.

포매향에서 처음 본 장면은 한 편의 도살극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체 모를 괴인들 둘이 쓰러져 있고, 이광 역시 시체가 돼 있었다. 소소 누님은 주루의 탁자에 손을 짚고 얼굴을 돌리고 있고, 붉은색 아이디가 선명하게 빛나는 가물치라는 인물만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문도들에게 입구를 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소소 누님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죠. 가물치라는 사람을 잡으면 되는 건가요?”

소소 누님은 충격이 심했는지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뒤돌아 가물치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소요파 문주시오?”

“궁금하면 그쪽 먼저 정체를 밝히는 게 강호의 법도라고 알고 있소만?”

“사황성 십이 전사단 부단주 가물치요. 다시 묻겠소. 소요파 문주시오?”

“소요파 문주 황금룡 조연이오.”

결국 사황성이었던가? 마교 다음 자리를 차지한 강호 제2의 문파. 소림과 무당마저 아래로 보는 그 문파의 간부급이라……. 그 순간, 갑자기 끓어오르던 피가 식으며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녀석이 왜 말을 걸었을까? 어차피 죽을 텐데, 인사 따윌 왜 할까? 부단주나 된다면 죽는 걸 겁낼 인간도 아닐 텐데 말이야!

포매향에 들어와 보니, 이광의 복수는 운운할 계제가 못 됐다. 이광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그들은 매번 사황성 인물들에게 놀림감이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시당했던 이광이 저렇게 사황성의 전사 둘을 저승길 동무로 삼았다면, 우리보다 오히려 사황성 사람들이 더 화가 치밀 만한 상황. 그런데도 가물치는 대화를 걸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참이오?”

목을 길게 내빼고 망나니의 칼질을 받길 기다리는 사형수 꼴인 가물치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힐끗 입구 쪽을 쳐다보니 광풍단의 사풍이 보이지 않았다.

“사풍이는 어디 갔어?”

“간만에 몸 좀 풀었습니다.”

입구에 서 있던 조자건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야기가 새어나갈 염려도 없어졌으니, 이제 작업을 시작해도 되겠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묻지요. 사황성이 감숙맹의 후원자입니까?”

“아니오. 동맹 관계요.”

“동맹이라… 말은 좋군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사황성은 감숙맹의 위기에 이렇게 도움을 주러 왔는데, 감숙맹은 전혀 그렇질 않으니 말입니다.”

“……?”

가물치가 무슨 꼼수를 부리냐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백무도 우리 정보망이 녹록치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이 사지로 댁들을 보냈을까요? 설령 척살단 전부를 손해 없이 제거했다 해도, 당신들은 오늘 여기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돼 있는데 말입니다. 백무가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조 문주! 이간계를 쓰는 거라면 사람을 잘못 봤소!”

“잘 아시네요. 이간계를 쓰고 있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이간계란 그저 의심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지, 없던 걸 만드는 건 아니지요.”

“끙!”

“그럼 이간계의 마무리를 지어볼까요? 백무에게 전서구를 날려 보십시오. 그가 오나 안 오나 말이죠. 동맹 관계라면, 더구나 먼 데서 자신들을 도우러 온 손님이라면, 설사 구원하러 오는 자신들이 위험하더라도 예의를 다해야 할 터. 백무가 온다면 저희는 순순히 물러나지요. 하지만 이십 분이 지나도 백무가 직접 오지 않는다면, 가물치 님도 생각을 좀 해보셔야 할 것 같네요.”

“저의가 무언가?”

내 의도를 알아차린 가물치가 노골적으로 물어왔다.

“아직은 사황성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거지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무리 사황성이 강호 이대문파라고 해도, 그건 NPC들의 무력. 지금 상황에서 붙으면 양패구상,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흑룡 님이나 저나 갈 길이 먼 사람들 아닙니까?”

떡밥도 충분히 뿌렸고, 미끼도 좋다. 그리고 원래 가물치란 놈들은 미끼가 없어도 잘도 낚시 바늘을 물곤 한다.

“보냈습니다. 기다려 보지요.”

물었다!

더 이상 서서 할 일이 없기에 다들 탁자를 찾아 앉아서 백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겨우 10명 남짓한 문도만 포매향에 집결해 있지만, 설령 백무가 전 광풍단원을 끌고 오더라도 질 리가 없다. 입구가 좁아 수성만 하면서 기다리면 되니 말이다.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굳이 가물치가 들어도 상관없기에, 나는 소소 누님에게 이광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역시 녀석들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금나수로 놈들을 묶어놓고 두들겨 팬 수법의 응용인 건가? 녀석들, 나중에 꼭 금나수법을 구해다 줘야겠네.’

그러고도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다. 모두 침묵만 유지한 채 지루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고, 결국 끝을 볼 수 있었다.

“제 말이 맞지요?”

가물치는 팔짱을 낀 상태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가 내 말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가겠습니다.”

가물치가 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리곤 바로 몸을 일으켜 주루 입구로 향했고, 내 눈짓을 받은 문도들이 길을 터주었다.

일은 잘 마무리됐다. 내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사기꾼도 아니고, 어차피 불거질 두 문파의 문제를 약간 빨리 확인시켜 줬을 뿐이다.

“자, 그만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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