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난주이광(蘭洲二狂)(2)
홈페이지에 올라온 패치 파일은 단순한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바뀐 건 음성을 녹음시켜 단축키에 저장할 수 있는 기능 단 한 가지였지만, 이로 인해 더 이상 전투 중에 꼬박꼬박 음성 명령을 외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처리되는 시간이 짧아졌기 때문에 유저들은 보다 빠른 반응을 보일 수 있었고, 때문에 전투 시 순발력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강호 전용 컨트롤러에 달린 버튼의 개수는 모두 10개. 조합해서 쓴다면 수십만 가지의 기능을 저장할 수 있다. 이 엄청난 가짓수로 인해, 이제 전용 컨트롤러에 붙은 마이크는 단지 대화용으로 전락해버렸다.
전투가 편리해진 것 외에도, 전투의 개념을 바꿀 만한 또 다른 변화가 추가됐다. 전날 발표된 공지대로 새로운 개념의 무공이 출현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목표 지점의 거리와 상대의 초식에 따라 항상 일정한 패턴의 대응만 가능했는데, 그게 바뀌었다. 바로 액티브 성격의 일격기 무공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 일격기는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무공을 발출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유저가 직접 초식의 종류를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강호 홈페이지에 올라온 내용으론 모든 명문대파에 사량발천근의 성격을 지닌 무공들이 새로 등재됐다고 한다. 거기에 철판교나 천근추, 나려타곤 같은 회피용 신법과 선인지로, 일도양단, 팔방풍우 같은 간단한 저급 공격 스킬도 출현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그동안 강호 무공 시스템의 성격상 구현이 불가능했던 이화접옥, 흡성대법, 심지어 이기어검술 같은 절세의 무공 개념마저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드디어 강호에서 싸움다운 싸움, 무공다운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 일은 모든 유저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모든 강호 유저들이 패치 내용에 익숙해지기 위해 정신을 쏟았다. 강호가 막 오픈했을 때의 그 용광로 같은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도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우리 소요파도 마찬가지였다.
사냥을 하고 돌아온 문도들이 일반 몬스터를 잡고 나온 일격기들을 내게 건네주었는데, 선인지로, 독사출동, 나려타곤 따위의 무공들이었다. 이런 종류의 저급 무공은 하루만 사냥하면 풀세트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마구 쏟아진다고 했다.
사냥도 안 한 나는 문도들 덕에 일반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일격기를 배울 수 있었다.
연무장에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문도들이 모두 일대일 비무를 하고 있었다. 실전만큼 기술에 빨리 익숙해지는 방법도 없다. 내가 강조한 것도 있긴 하지만,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모두들 새로운 시스템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다들 알아서 열심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역량으로도 부족할 게 없는 상태지만, 광풍단을 확실하게 눌러버리려면 각자의 전투 기술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만 했다. 광풍단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이 수련은 또 다른 형식의 전투라고 불릴 만했다.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일반 문도들은 상대가 되지 않아서 단주급 이상의 간부들이 내 비무 상대가 돼주었다. 모두와 이미 한차례씩 손을 섞어보았다. 하지만 진진의 퀘스트에서 최절정무사들의 대련을 보아서인지, 다들 상대가 안 됐다. 심지어 보법을 전혀 안 쓰고 그중 최고수인 각룡이 형과 대련을 해보았는데도 너무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오늘 패치된 내용에 가장 빨리 익숙해진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매번 어찌어찌 승리를 하긴 했지만, 이들 둘은 나보다 더 전투 감각이 좋았다.
“야, 이광(二狂)아! 한 번만 더 놀자!”
광견과 광우, 이놈들한테 어이없게 속았는데도 쫓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남아일언 중천금이 어쩌고저쩌고 가소로운 협박도 있긴 했지만, 내 양심의 저항이 더 컸다.
녀석들의 나이는 모두 24살로, 이제 갓 군대를 제대했다고 한다. 같은 동네 친구로, 군대도 같은 곳으로 간 이상한 놈들이었다.
녀석들이 들려준 강호 시작부터의 경험담은 꽤 재밌었다.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다.
처음 1백 레벨 정도까지는 남들처럼 파티 사냥도 하면서 폐인처럼 레벨 업에만 열중을 했단다. 그렇게 매일 만리장성 밑바닥에서 마적들을 잡는 게 어느 순간 지겨워지니깐, 장성 너머가 궁금해졌고 한다.
사실, 장성 너머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얘들뿐이겠는가? 그래도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간단히 그 너머가 단지 사막뿐인 무인 지대라는 걸 알고 포기할 텐데, 이놈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막 속에 분명 무언가 있을 거라고 열심히 착각을 하고선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흘을 달리고 달려 도달한 곳이 장성의 서쪽 끝 관문인 가욕관. 그 가욕관을 지나 다시 장성을 따라 동쪽으로 갔지만, 뭐 별게 있었겠는가? 당연히 모래 먼지만 실컷 들이켜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이후, 얘들이 벌인 이야기가 재밌다. 한번 바보짓을 하고 나니 정상적인 짓거리가 하기 싫어졌단다. 남들처럼 똑같이 재미없는 사냥만 하는 데 질려 버린 것이다. 더구나 마침 놈들 입맛에 맞는 짓을 발견할 수 있었단다. 그것은 바로 상단 약탈.
실크로드를 따라 난주에서 출발한 상단들은 가욕관을 필수로 거치고, 이후 신강의 투르판으로 가거나 아니면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 산맥의 경계, 즉 서역 남로를 따라 이동한다. 이들이 노린 상단은 투르판으로 가는 천산 남북로의 상단들이었다.
처음엔 상단을 털다가 죽기도 참 많이 죽었단다. 지들 수준도 모르고 까분 대가라고나 할까? 하지만 삽질도 자꾸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고, 결국엔 새외 최강의 도적들이 될 수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중원 제일의 부자라고 생각했단다. 서역으로 가는 물건이니 얼마나 비싼 물건들뿐이었겠는가? 거기에 호상단 우두머리는 그럭저럭 쓸 만한 잡다한 무공 비급도 주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놈들에겐 최고의 사냥터였다. 그에 대한 대가로는 그저 강호 최악의 면상과 악명 수치 10만이었을 뿐이고 말이다.
놈들은 그땐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을 안 썼단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강호 최고의 문파를 건설하자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난 거기까지 들었을 때, 녀석들이 나하곤 정반대의 짓거리를 하고 다녔는데도 결국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게 상당히 기분 나빴다. 난 양지에서만 놀았단 말이다.
하지만 문파 건설이란 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뚝딱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문파를 세웠다가 바보가 돼봤으니 안다. 이게 한번 해보지 않으면 반드시 피 보는 일이라는 걸. 녀석들의 말로가 짐작됐다.
일단, 악명을 가진 카오틱 상태로는 문파 건설이 불가능하다. 거기에 아무리 놈들이 새외 최강의 도적단으로 돈을 긁어모았다고 해도, 솔직히 문파를 건설할 만큼의 돈은 되지 않을 것이다. 땅값에 설립 신고서만 하더라도 6억 냥인데, 그걸 달랑 2명의 도둑질로 벌 수 있을까? 그게 도둑질로 된다면 나도 다 때려치우고 지금이라도 그 짓에 팔 걷어붙이고 나서겠다.
결국 녀석들이 할 수 있는 짓이라곤 평생 아이디가 뻘건 상태로 사는 살인마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신기한 건 그렇게 악명 수치가 높은데도 관(官)과의 충돌이 없었다는 점이다.
알려진 바로는, 강호에서 악명 수치가 1천이 넘어가면 관아의 포쾌들이 잡으러 다니고, 2천이 넘으면 관병이 출동한다는데, 놈들은 단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욕관 밖은 명나라 땅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외국에서 일어난 살인 행위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가 잡으러 오지 않는다고 해도 살인마로 사는 건 만만치 않았다. 흉한 상태일 때는 한 번 죽었을 때의 페널티가 장난이 아니다. 10레벨 다운에 모든 무공이 최고 3성까지 하락한다. 거기다가 일반 유저들에게 사냥당할 가능성도 많다. 만약 카오틱 상태로 대도시를 활보한다면, 순식간에 몰매 맞아 죽어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악명을 풀기도 쉽지 않다. 사냥을 하면 조금씩 악명이 풀리긴 하지만, 10만이란 수치를 어느 세월에 풀겠는가? 결국 최대한 안 죽는 방법밖에 없고, 놈들의 싸움 기술은 생존의 압박 덕에 나날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살인마로 계속 살 것이지, 왜 지금 와서 굳이 문파에 가입하려고 기를 썼던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놈들보다 더한 살인마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쪽도 못 써보고 무조건 물러날 수밖에 없는 대단한 고수들이 말이다. 바로 사황성의 흑룡 패거리라는…….
몇 번 반항도 해봤지만, 도저히 흑룡과 12전사들에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수하로 들어오라는 권유도 받긴 했지만, 그건 죽기보다 싫었단다. 자기들이 주인 행세를 하던 작업장을 뺏기고, 그걸 빼앗은 놈들 밑으로 들어가기엔 자존심이 상했다나?
놈들이 내 앞에서 벌인 짓거리로 봐서 자존심 센 놈들처럼은 안 보였지만, 일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는 주었다.
놈들 말을 다 믿어줄 수는 없지만, 유저들을 살인해서 얻은 악명이 아니었기에 결국 문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놈들을 제대로 써먹어볼 계획도 하나 생각났고 말이다.
“야! 내 말 안 들려? 한 번 더 붙자니깐!”
“에이 씨! 형한테 쥐어터지려고 소요파에 들어온 거 아닌데…….”
“어쭈? 에이 씨? 기분 나쁘면 지금이라도 말해. 탈퇴시켜 줄게.”
소요파에서 탈퇴하면 놈들은 갈 데가 없다. 카오틱 상태로 어딜 가겠는가. 매일같이 유저들한테 쥐어터지고, 며칠이면 1레벨까지 떨어지고 말 텐데 말이다.
“쳇! 치사합니다. 갈 데 없는 불쌍한 동생들을 상대로 협박이나 하는 문주라니!”
광우 녀석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광견의 손을 잡아끌고 자기가 먼저 비무 신청을 걸었다.
휘익! 착!
“호오! 갈수록 요령이 느는걸?”
광견은 장병기인 창을 들고선 검법을 구사하는 광우와 어울려 절묘한 협공을 해왔다. 확실히 녀석들의 조합은 공격 거리가 짧을 수밖에 없는 내겐 상당히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녀석들의 조합을 깨뜨리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의미일 뿐, 승패는 어차피 정해져 있다.
바뀐 환경엔 충분히 익숙해졌으니, 이젠 녀석들을 상대로 신안 수련이나 해봐야겠다. 나는 미리 입력해둔 신안의 단축키를 지그시 눌렀다.
확실히 단축키를 사용하니 전에 비해 게임하기가 훨씬 편해졌다. 더구나 단순히 편해진 것뿐 아니라, 이런 유의 잡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무공도 아니다 보니 녀석들은 내가 신안을 발동시켰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알아차린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 신안이 어떤 개념의 무공인지 아는 사람은 강호에 아마 나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야, 야! 뭐 하냐? 제대로 좀 해봐!”
“우이 씨! 그러는 형이나 좀 제대로 해보슈! 뭡니까? 미꾸라지처럼 도망만 다니면서!”
“크크큭!”
이번엔 반드시 이겨 볼 요량이었는지, 놈들이 잘도 도망간다. 내가 한 발자국 들어가면, 세 발자국은 물러서버린다. 한번 제대로 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승부가 나버리곤 했으니, 놈들이 신중하게 나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긴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너무 재미가 없잖은가.
그나저나 도대체 신안의 숨겨진 기능이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전혀 안 잡힌다. 전에 기술을 전수해주던 진진은 마치 신안이 최절정의 단계를 넘어선, 초절정의 영역인 것처럼 말했다. 거기에 강호 랭킹 게시판에서 확인한 보너스 수치를 감안한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힌트라곤 진진의 말밖에 없다. 그때 그녀가 뭐라 했었지? 분명 나 정도라면 버겁겠지만 빨리 익숙해질 수 있다고 했었나? 익숙해진다라… 익숙해진다? 금방 찾아낼 수 있다가 아니라, 익숙해진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게 사실 전부란 말일 텐데.’
푹!
한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광견의 장창이 오른쪽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어쭈?”
“푸헤헤! 아싸, 한 방 먹였다! 이번엔 확실하게 눕혀 드리겠소, 조 문주!!”
“크하하하!!”
망할 놈들이 그 큰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선 재수 없게 웃어댔다.
이 자식들아, 내가 딴생각만 안 했어도 네놈들에게 맞을 일은 없었다!
어이없고 괘씸해서 혼내주려고 하는데, 녀석들은 겨우 공격 한 번 성공시키고선 또 계속 도망만 다닌다. 이놈들도 방금 공격이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익숙해진다는 말은 무언가? 무작정 시간만 소비한다고 해서 익숙해지진 않는다. 익숙해진다는 건, 속속들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이해할 대상을 확실하게 분석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걸 진정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익숙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안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신안의 효과인 상대의 오러를 분석하는 게 첫 단계일 것이다.
꽝!
“얼라려? 이번엔 잘도 막네요?”
“내가 바보로 보이냐?”
또 딴생각을 하다 창에 꿰뚫릴 뻔한 걸 간신히 막았다.
그나저나 이놈들 예리한 놈들일세. 딴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나?
신안(神眼).
신의 안목을 말한다. 이 이름이 괜히 정해진 건 아닐 것이다. 무인들에게 있어 좋은 눈이란 무공의 수준을 가를 정도로 필수 요건이다. 때문에 안법 수련은 전통 있는 무가(武家)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고, 비전으로 전승될 만큼 가치가 높다.
신안은 분명 이 안법 수련의 궁극의 경지를 뜻할 것이다. 궁극의 경지라면 단순히 무공의 분석을 넘어서 상대의 체질과 무공 연원, 심지어 그걸 초월해 상대의 마음까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감히 신(神)의 눈이란 소리가 어울릴 것이다.
“야, 이광아! 장난은 그만 하고, 형이 좀 알아볼 게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좀 해봐라.”
대충 생각은 그 정도에서 끝내고, 내 짐작이 맞는지 이광을 상대로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장난이라뇨! 지금 점수 내면 우리가 판정승으로 이기는 건데. 아따, 조 문주! 겁나면 겁난다고 말하슈! 크하하!”
이 빌어먹을 놈들은 꼭 맞아야만 정신을 차릴 놈들이다.
이광을 제압하는 데는 30초도 안 걸렸다. 그동안 상대하면서 놈들에게 쥐약은 금나수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금나수를 쓰면 너무 쉽게 끝나버려서, 놈들은 반칙 기술이라고 절대 인정 못한다고 헛소리를 해댔지만 말이다.
놈들은 잘 참다가 갑자기 비무를 끝내버린 내 모습을 보고서야 지금이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닌 걸 눈치 챘다.
“이놈들아, 농담하는 거 아니니 떠들지 말고 잘 들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정말 탈퇴시켜 버린다! 둘 다 무조건 다른 무공을 써서 공격하고, 광우는 이번에 배운 일격기를 주로 사용해라. 그리고 내가 ‘체인지’라고 외치면 다른 무공으로 바꾸고 말이야. 난 공격은 안 하고 회피만 할 테니깐 맘껏 공격해봐라. 알았지?”
“정말 공격 안 할 거유?”
“그래. 한 시간 줄 테니 능력껏 죽여 봐라. 단, 내가 체인지라고 외치면 바로 다른 무공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만 잘 지키면 비무에 져 줄 수도 있지.”
이광은 이번에야말로 날 때려눕힐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나 보다. 광견이 희희낙락거리면서 바로 비무를 신청했다.
이광의 체질은 마공 수련자들의 첫 단계인 마인지체(魔人之體)를 넘어선 단계였다. 바로 혈마지체(血魔之體). 이 혈마지체가 되면 다른 계열의 무공을 써도 페널티 없이 원래 무공의 위력이 그대로 발휘된다고 한다. 또 동일 속성인 마공을 사용한다면 상당한 수준의 공격력 증가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러니 녀석들이 처음 가입하러 왔을 때 그토록 기고만장했던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그런 데다, 녀석들이 배운 무공의 가짓수도 적지 않았다. 무려 20가지가 넘었다. 다른 속성의 무공이 페널티 없이 발휘된다는 걸 알고 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온갖 잡다한 무공을 다 배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배운 무공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체력과 내공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많아지긴 하지만, 익혀야 할 게 많으니 숙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빠른 사냥이 불가능한 것이다.
거기에 내 짐작이 맞는다면, 상극의 속성을 가진 무공들이 양쪽 모두의 성취를 방해하는 게 분명하다. 놈들의 레벨이 나보다 30이나 높은 280레벨임에도 불구하고 6성 이상 되는 무공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쨌든 단 하나 좋은 게 있다면, 이렇게 테스트로 써먹기엔 딱 알맞은 놈들이라는 점이다. 원체 가진 무공이 많으니 말이다.
“그럼 시작해봐.”
나는 자세를 잡은 뒤 이광을 보고 외쳤다. 회피는 거의 극성에 다다른 11성의 불영보가 알아서 해줄 터. 녀석들이 간간이 쏘아내는 일격기에만 신경 써주면 된다.
광견은 낭인 무공으로 바꾼 듯 빨간 오러가 하얀색으로 변했고, 광우는 여전히 붉은색 오러 상태였다.
“갑니다! 죽고 나서 땡깡 부리기 없기!”
끙.
“시끄럽고, 얼른 시작해!”
방어할 필요가 없어진 녀석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광견은 제 놈이 배운 무공 중 가장 현란한 파풍검법(破風劍法)을 펼쳤고, 광우 놈은 광견보다 더 머리를 굴렸다. 진짜 막무가내의 두서없는 일격기의 난무였다.
“개놈들!”
아무리 내 보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피할 순 없다. 귀찮지만 회피용 일격기를 써서 맞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광의 지랄 같은 공격을 한참 동안이나 받았지만, 신안에서 특별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야, 야, 체인지! 무공 바꿔봐!”
이번엔 둘의 오러가 모두 붉은색이었다.
“야! 광우, 넌 안 바꿔?”
“아, 바꿨어요! 보면 몰라요?”
오러의 색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광우의 도법이 검법으로 바뀐 것도 몰랐다.
어라? 그런데 이번엔 좀 이상하다.
오러의 색과 크기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똑같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다른 부분이 꽤 있었다. 광견은 단전과 우측 팔 부분이 다른 부위의 오러에서 생겨나는 불꽃보다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광우의 경우는 등 쪽과 양발의 오러가 그런 식이었다. 거기에다 똑같은 붉은색이긴 하지만, 색의 선명도가 부위별로 아주 약간 달랐다.
만약 둘의 무공 속성이 달랐다면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차이였다. 그리고 이광이 체질도 똑같고, 레벨도 똑같은 쌍둥이 같은 녀석들이 아니었다면 이 차이를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눈으로 확인되니 정리하기는 쉬웠다. 오러가 다른 곳보다 활성화된 부위는 무공의 성질을 보여 주는 격이었다.
광견은 모든 공격이 오른쪽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때문에 왼쪽 부위의 수비는 오른쪽에 비해 한결 허술해 보였다. 광우 같은 경우는 말만 검법이지, 퇴법과 신법에 치중한 무공을 구사했다.
하지만 오러의 선명하고 탁함에 대한 차이를 감으로 잡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왠지 방어가 허술한 부위를 나타내는 곳 같았는데, 그걸 알려면 공격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음 판 비무까지 져 준다는 조건을 걸고서야 녀석들을 꼬여 낼 수 있었다. 상위 랭킹의 유저와의 비무에서 승리하면 훨씬 많은 비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들의 계략이었다.
공격을 해보니 내 예상이 확실해졌다. 오러의 세기가 허술한 부분을 공략하니 주먹 몇 대로 비무가 끝나버린 것이다.
“거참, 어떻게 된 게 갈수록 세지냐! 혹시 우리 피 빨아먹는 무공이라도 쓰는 거 아냐? 거 왜 있잖아, 흡혈신공이라든가.”
“음, 그동안 저 작자가 보여 준 행태로 봐서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아암!”
“근데 그런 거 쓰면 운영자가 안 잡아가냐? 이거 완전 사기 무공이잖아!”
허무하게 마지막 비무에 져 버린 이광이 이젠 대놓고 날 씹어댔다.
“한심한 소리 그만 하고, 일어나봐라. 이젠 네놈들하고 놀자는 소리도 안 할 테니까 안심하고.”
일단 놈들에게 약속한 대로 두 번 연속으로 비무에 져 줬다.
그럼 이제 슬슬 작업을 시작해볼까?
“일어나봐라.”
비무가 끝나고 실실 쪼개는 이광을 불렀다.
“왜, 또 뭔 짓을 시키려고?”
트집을 잡는 광견을 무시하고 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밥값 하러 나가봐야지 않겠어? 네놈들 한 명당 월급이 오백 냥이다, 이놈들아.”
“거 무슨 소리슈? 우린 아직 월급 받아본 적도 없는데!”
“너희 군대 있을 때 먼저 월급 주고 나서 일 시키든? 일해야 돈을 주지, 이놈들아!”
한심한 놈들 같으니.
마지못해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저쪽에서 호위무사들과 잡담을 하고 있는 은소소에게 다가갔다.
“누님, 잠깐 좀 따라오세요.”
“왜? 지금 바쁜데.”
잡담이 일인가? 뭐가 바쁘다는 건지, 거참……. 그나저나 이놈의 문파는 왜 이런 인간들밖에 없는 거야!
이광하고 똑같은 인간이 한 명 더 있다는 생각에 짜증이 일었다.
한참 인상을 찌푸리고 노려만 보고 있으니, 그제야 소소 누님이 분위기 파악을 한 듯 따라왔다. 난 셋을 데리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재밌는 일거리 좀 드리겠습니다.”
재미있다는 소리에 그들의 얼굴에 잔뜩 호기심이 인다.
“지금 이 시각부터 세 분은 소요파 척살단입니다. 할 일은 광풍단 척살. 누구를 어떻게 죽이느냐는 알아서 결정하시고, 소소 누님은 전에 제가 드린 금나수 배우셨죠? 제가 이광이랑 비무할 때 본 것처럼 금나수로 적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하시면 됩니다. 그래야 최대한 빨리 죽일 수 있으니까요. 다만, 절대 마지막 일격을 가해서 살인자가 되지는 마세요. 뭐, 광우나 광견의 얼굴이 부러우면 살인하셔도 무방하구요.”
“연아, 근데 내 호위무사들도 데리고 가면 안 돼?”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머리가 없는 건지 철이 안 든 건지 모르겠다.
“놀러가는 거 아닙니다.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가서 지켜 줄 자신 있으세요? 최대한 많이 죽여서 다음 문파대전 전까지 광풍단의 이탈자를 많이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당연히 문파대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비일비재할 겁니다. 누님 호위들이 그 상황에서 버텨 낼 수 있겠어요? 그 사람들은 놔두고 가세요. 그리고 살인은 하되, 언행에 조심하세요. 괜히 말 잘못했다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더 지독하게 달라붙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이광을 받아들인 이유가 이거였다. 어차피 강호에서 얘들은 어찌 구제할 도리가 없는 글러버린 인생이다. 어차피 음지에서 살아야 할 인생이니 척살단을 한다고 해도 나쁠 게 없다. 이광도 자신들이 소요파에서 할 일이라곤 이것뿐이란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광우하고 광견이는 문파대전이 끝나면 장로로 올려 주마. 그러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해봐. 절대 죽지는 말고. 소소 누님은 이제 더 이상 드릴 게 없네요. 하지만 다음에 좋은 아이템 얻으면 최우선으로 드릴게요. 그럼 그만 가보세요. 접속 종료는 무조건 소요파에 와서 하시고요.”
돌아서 나가는 세 사람을 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까먹고 있던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고 얼른 광우를 불러 세웠다. 같이 지낸 건 잠깐이지만, 아무래도 미친개보단 소가 좀 더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광우야, 이거 들고 가라.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야 착용이 안 돼서 써보지도 않았으니, 사용법은 알아서 익히고.”
광우에게 곰팡이가 날 정도로 묵혀 둔 아이템을 건넸다. 그것은 옵션이 신기해 흑점에서 사둔 혈죽선이었다.
[혈죽선(血竹扇)
피를 머금고 자란 혈죽으로 만든 부채
공격력:800
사용 제한:지능 30 악명 2,000
소지 효과:지능 +10 악명 +500
특수 효과:한 시간에 1회, 공격력 2,000의 암기 발사 기능]
건네려고 보니, 지능 30이 맘에 걸리네. 설마 280레벨이란 놈이 지능 30도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쓸 만하네요. 다행히 사용 제한에도 턱걸이로 들어가고요.”
“그래? 다행이다. 가진 게 이거 하나뿐이라서 광견한텐 못 준 거니까, 광견 눈에 안 띄도록 해라. 그놈 땡깡 부리는 거 보기 싫다.”
광우가 소리 없이 히죽 웃더니 인사를 하고 나갔다.
“흐음, 어디 보자……. 저 인간들의 뒤를 맡길 사람은 누구로 할까? 역시 진중한 사람이 낫겠지?”
위험한 일을 맡기면서 세 사람을 아무 대책 없이 떨어뜨리면 안 될 일이다.
조자건과 조립산을 불러 세 사람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가 위급할 때에만 도와주라고 명을 내렸다. 두 사람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세 사람의 목적을 대충이나마 파악한 듯 질문 없이 동의했다.
뒤를 맡긴 걸로 일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총관을 불러 최소한의 운영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들고 소요파를 나섰다.
* * *
뒤에 2명의 조력자가 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소요파 척살단원들은 실컷 몸을 풀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한참 농담 따먹기를 계속하면서 목표도 없이 걷던 이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은소소가 나름 심각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야, 야! 근데 어디로 가지?”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누님만 믿고 따라가는 겁니다!”
“옳소!”
“하긴 너희들은 이 동네에 오랜만에 왔으니까 모를 만도 하겠다. 그럼 일단 광풍단 아지트까지는 같이 가줄 테니까 너희들이 정찰 좀 하고 와봐. 그럼 되지?”
은소소의 말에 이광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줄은 상상도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누님… 우리는요, 들키면 바로 아웃이에요! 모르시겠어요? 들키면 바로 두들겨 맞는 카오 상태라구요. 그런데 대놓고 광풍단에 쳐들어가서 정찰을 하고 오라니요!!”
“그렇구나.”
전혀 미안하지 않은 듯한 소소의 말에 이광의 얼굴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럼 내가 갔다 올게. 너희들 여기서 꼼짝도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금방 갔다 올 테니.”
은소소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공을 써서 감숙맹이 자리 잡은 곳으로 달려갔다.
“광우야, 말려야 되지 않았을까?”
“글쎄…….”
가만히 있기엔 불안했다. 결국 너무 가까이 가지만 말자고 약속하고 둘은 은소소가 달려간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남겨진 사람들은 잔뜩 불안에 떨고 있는데, 정작 은소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방 돌아왔다.
“능력이 좋은 건가?”
“얼굴이 예쁜 거지.”
멀리서 무사히 돌아오는 은소소를 보며 이광이 헛소리를 했다.
“얘들아, 지금 광풍단 애들 집에 아무도 없네? 일단 따라와 봐. 재밌는 거 생각났다.”
“……?”
“……?”
누님만 따라가겠다고 다짐을 해뒀으니 별수 없었다. 그냥 따라갈 수밖에.
은소소가 이광을 데리고 감숙맹 정문에 섰다.
“부숴!”
“엥? 들어갔다면서요?”
“미친, 내가 어떻게 들어가냐? 문 몇 번 두드려도 아무도 안 나오기에 없는 줄 아는 거지. 잔말 말고 얼른 부숴.”
“끙.”
세 사람은 열심히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광은 문짝 부수는 데는 도끼질이 최고라는 듯 어느새 대부를 들고 찍어 내리고 있었다.
쾅! 쾅! 콰직-
요란한 소리가 한동안 이어지더니 결국 감숙맹 정문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버렸다.
“빨리 따라와라!”
역시나! 은소소가 향한 곳은 총관이 있는 문주 집무실이었다. 저번 문파대전에서처럼 총관을 잡아 아이템을 주워 먹으러 온 것이다.
“소요파의 주구들이 이곳엔 무슨 일이냐! 썩 물러가라!”
총관은 적대 세력의 문도들이 들어오자 삿대질을 해가며 고함을 질러댔다.
“쟤 죽여라, 총관이라고 써 있는 놈.”
“누님은?”
“내가 잡으면 명성이 깎이잖아.”
무인도 아닌 총관이 일류고수인 이광의 칼질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겨우 두어 대 맞고 피 질질 흘리며 철퍼덕 엎어지고야 말았다.
“에게게! 요게 뭐야? 달랑 이만 냥?”
“우아! 이만 냥이나 주네?”
이광으로선 예전 문파대전 당시 총관이 흘린 돈을 본 적이 없으니, 겨우 2만 냥을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총관이 2만 냥이나 떨군 것도 꽤 많은 편이었다. 지금 같은 평상시에 총관이 문파대전 때와 같은 확률의 드롭률을 보인다면, 모든 문파에선 평소에도 집 지키느라 전전긍긍해야 할 테니 말이다.
“자, 일단 이거 받고, 나중에 술이나 한잔씩 사먹어.”
은소소가 총관에게서 떨어진 은자 주머니를 회수하고는 돈을 분배해주었다.
“엥? 웬 오천 냥?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싫어? 그럼 내가 다 가진다?”
“아뇨, 아뇨! 얼른 주세요. 감사합니다!!”
은소소가 아니었다면 단돈 한 푼도 못 건졌을 테니, 자연스럽게 비굴해질 수 있는 이광이었다.
더 이상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바로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감숙맹의 정문을 막 빠져나가려는 찰나.
“엇! 소요파다!”
“엇! 광풍단이다!”
공교롭게도 본거지로 막 들어오던 광풍단 무리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쳐!”
어느 쪽이 외친 소리인지는 몰라도 쌍방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다행히 소요파 척살단으로선 운이 좋았다. 광풍단은 모두 일곱이나 됐지만, 마침 문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팟! 퍼퍽! 취리릭-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몇 차례 손속이 오가더니, 금세 대치 구도가 만들어졌다. 은소소는 조연이 시킨 대로 자기 몫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어느새 금나수를 시전해 광풍단원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달리 말이 필요 없었다. 적의 손을 잡고 있는 상태이다 보니, 은소소는 공격을 회피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빨리 이광이 도와주지 않으면 위험에 처하게 될 상황이었다.
촤악!
쉬이익!
광견의 대부와 광우의 장창이 소소에게 맥문이 잡힌 광풍단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피하고 자실 필요도 없이 즉사였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사람이 죽었다. 그러자 뒤에 대기하던 다른 단원이 공간이 생긴 걸 알고는 앞뒤 재보지도 않고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은 판단! 어느새 은소소의 금나수가 새 먹잇감의 멱살을 잡아버렸다.
촤악!
쉬이익!
이번에도 즉사였다. 도저히 싸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일방적인 전투였다.
“또 한 명 가시고!”
“야, 야! 연이가 전투 중엔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 그랬던가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은소소가 타박을 놓았지만, 광견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야! 너희들 빨리 이리 안 와!”
은소소가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광풍단을 보고 외쳤다. 그런데 들어가면 바로 사망이라는 걸 아는 이들이 그 말에 따르겠는가?
“들어오기 겁나면 내가 가주마!”
은소소느 그새 사람 때려잡는 짓에 맛을 들였는지 거침없이 전진했다.
“어? 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광풍단이 그녀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라 손을 허우적대면서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공간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은소소의 독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리 와!”
순식간에 적의 손길에 동료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광풍단원들이 황급히 공격을 해댔지만, 은소소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공격들을 몸으로 맞으면서 뒤로 빠져나가버렸다.
은소소는 마치 한 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는 개미지옥 같았다. 3명의 광풍단원을 이미 깨끗하게 처치하고도 아직 성이 안 찬 듯, 그 후로도 똑같은 행동을 2번이나 더 되풀이했다.
광풍단원들로선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입구를 틀어막고 적당히 시간을 벌면 사냥을 나갔던 다른 단원들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 희망은 싹도 트기 전에 깨져 버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동료를 채가는 은소소의 금나수가 그들에겐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공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다가 겨우 2명만이 남게 된 광풍단원들은 그제야 서로의 형세가 뒤바뀌었다는 걸 알고는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도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지만, 자기 집이 털렸다는 사실에 끝내 미련을 가진 게 그들이 저지른 마지막 실수였다.
“크하하하! 게 섰거라!”
도망가는 광풍단을 쫓아가는 광견과 광우의 모습은 영락없는 산적의 모습이었다.
“으악!”
“커억!”
열심히 도망치던 광풍단원들이 이광의 도끼질과 칼질에 단말마를 외치고 쓰러졌다. 악마와도 같은 면상에 시뻘건 흉광,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뒤에서 도륙해버리는 이들의 모습은 멀리서 구경하던 조자건과 조립산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멋있었다.
“크카카!”
“우헤헤!”
이광은 일곱이나 되는 적들을 자신들만으로 이겼다는 기분에 잔뜩 도취되어 살인마 흉내를 내고 있었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도끼를 혀로 핥으면서.
“또라이 새끼들!”
그사이 옆으로 다가온 은소소가 잔뜩 폼을 잡는 이광에게 찬물을 끼얹어주었다.
“곧 연락받고 딴 놈들이 우르르 몰려올 테니까 일단 자리나 옮기자.”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여자가 보기엔 너무 잔인했던지라, 은소소는 이광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이광도 자신들이 조금 지나쳤다는 걸 알기에 은소소의 욕을 듣고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은소소는 이광에게 더 이상 신경 쓰는 게 피곤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경공을 시전해 난주성 남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 같이 가요, 누님!”
그 모습에 이광이 누님을 외쳐 부르며 따라 달려갔다.
그들 뒤로 도끼질에 부서져 내린 문짝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체들로 어지럽혀진 감숙맹이 초라한 모습으로 멀어져 갔다.
* * *
은소소와 이광은 감숙맹 본부 타격으로 시작해 거침없는 피의 행보를 이어갔다.
살인자에겐 무조건 적대적인 관병들 때문에 난주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난주성과 멀지 않은 주변 지역의 사냥터를 훑으며 PK를 하고 다녔다.
처음엔 손쉽게 한두 명만 상대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 보통은 대여섯, 때때로 10명에 가까운 적을 상대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광풍단의 일반 문도들보다 한 단계 위의 실력인 데다, 싸움에 관해선 천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때때로 위기가 있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척살단의 사망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그 PK 실력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진화하고 있었다.
타격 목표들의 소재는 은소소의 호위무사인 그녀의 봉황단(은소소의 작명 센스가 이렇다)이 알려 주었는데, 그건 조연이 조자건의 계획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셋의 호흡은 너무 잘 맞았고, 겉보기와 다르게 은소소와 이광은 대책 없이 무모한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경험이 쌓이자 지형지물에도 신경을 썼고, 퇴로가 확보되지 않는 전장은 무조건 피하고 있었다.
덕분에 자주 전투를 벌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조씨 형제들로선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시간만 보내기가 아까웠던 조자건은 척살단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았다. 백무와 광풍단 간부들이 모여 있는 곳을 멀리서 관찰한 뒤 이동 상황을 전서구로 보내주면, 조연이 은소소의 호위무사 중 한 명을 시켜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식이었다.
그때, 직접 싸움을 담당하고 있던 척살단과 조씨 형제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조연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아무리 문파대전을 치렀던 적이라지만, 이런 식의 무차별적인 PK 플레이어들을 왜 강호의 NPC 포졸들이 잡으러 다니지 않았을까? 더구나 척살단이 살해한 유저의 숫자가 족히 50은 넘었으니, 그 정도라면 관아가 아니라 위소(衛所)의 군대가 잡으러 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조연이 소요파에서 들고 나온 2억 냥이라는 거금이 이 뒤처리에 쓰였다. 난주에 자리 잡고 있는 감숙성 포정사와 도지휘사, 제형 안찰사, 난주 지부 대인들에게 뇌물로 건네진 것이다.
조연이 뇌물을 뿌릴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건, 강호 인공지능이 강화됐다는 공지 덕택이었다.
보통 소설 속 강호 무림계에서의 살인은 관아에서 쉬쉬하며 넘어가곤 하지만, 강호의 게임 환경상 살인은 그대로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힘이 센 강자들이 단순히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약자들을 살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강화된 강호 인공지능은 감숙맹과 소요파의 뿌리 깊은 적대감을 인정해주었고, 거기에 상당량의 뇌물을 받고 나자 소요파에게 1주일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의 면죄부를 부여해주었다.
기본적으론 척살단이 골치 아픈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의도였지만, 길게 보면 멸문지화를 미연에 방지한 면도 있었다. 이광의 성격상 관병이 잡으러 온다면 분명히 치고받고 싸울 게 뻔하다. 그렇다면 소요파는 바로 관의 행사에 불복한 역당의 무리로 낙인찍히게 돼버릴 것이다.
어쨌든, 조연의 적절한 대응으로 소요파 척살단은 세상이 내 것인 양 활보할 수 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살인 행각을 벌이고 다니자, 이광은 유저들에게 난주이광(蘭州二狂)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고, 최소한 난주에서는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광풍단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겐 관리들에게 뇌물을 줄 만큼의 돈도 남아 있지 않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카오틱 상태를 감내할 자원자를 뽑아서 소요파에 맞대응한다는 계획도 실행하지 못했다. 조연이 미리 알고 모든 문도들에게 항상 같이 행동하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대응할 길이 막히자, 광풍단의 모든 문도들은 감숙맹 본부에 웅크리고 앉아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현상 유지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를 불러왔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지도부에 실망한 이탈자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대놓고 지도부에게 성토를 가하고 스스로 파문을 해버리고 나가는 문도가 있는가 하면, 며칠째 접속을 끊어버리고 잠수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무로서는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참담한 시간이 계속됐다. 하지만 꼭 죽으라는 법은 없듯이, 절망에 빠져 있던 백무에게도 한 가닥 희망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바로 백무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그 ‘형님’이라는 사람이 보내준 조력자들이 감숙맹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