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난주이광(蘭洲二狂)(1)
게임 강호에서 벌어진 최초의 유저 설립 문파 간의 문파대전은 소요파의 승리로 끝났다. 소요파 문도들의 피해가 크긴 했지만 2배가 넘는 적, 그것도 감숙성에서 최강의 단합을 보여 줬던 광풍단을 상대로 승리하리란 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구경을 하던 일반 유저들도 그 결과에 놀람을 금치 못했는데, 감숙맹 본인들이야 어떠했겠는가.
문파대전 종료 5시간이 지난 감숙맹 취의청.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적의 전력 파악을 제대로 못한 제 잘못입니다.”
백무는 사망 딜레이가 끝나자마자 다시 접속한 문도들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문파대전의 사망 페널티가 다른 죽음에 비해 훨씬 가벼운 겨우 1레벨 다운뿐이지만, 이번 전쟁 결과의 여파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기지 못했는데 어떻게 다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이미 문파 레벨이 1레벨로 다운된 상황에서 다음 전쟁의 패배는 문파의 소멸로 이어질 것이다.
상황이 이토록 암담하다는 걸 모두들 알고 있기에, 취의청의 분위기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백무가 계속 사과를 하고는 있지만, 굳게 입을 닫은 문도들의 냉랭한 분위기는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맹주님! 맹주님의 사과는 지금 상황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어차피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잖아요. 만약 어떤 희망도 없었다면, 전쟁에 패한 맹도들이 이렇게 오늘 다시 모일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동안 보여 준 맹주님의 역량이라면, 이 정도 난관은 충분히 뛰어넘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믿기에 사망 딜레이 끝나자마자 다들 맹주님의 말 한마디를 들으러 온 거잖습니까. 사과는 충분히 들었으니 다음 계획을 들었으면 합니다.”
한 문도가 일어나 백무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데 자기 문파의 우두머리의 모습이 애처로워서 한 발언인지, 아니면 못 미더워서 하는 소린지 판단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 문도의 말이 시발점이 되어, 곳곳에서 이후의 행동 지침을 요구하는 문도들의 요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후 행보입니다. 그걸 얘기해주십시오!”
“저도 동감합니다. 맹주님, 다음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하지만 백무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애초에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육반산의 청랑채에서 조연이 소환한 무림맹의 무사를 알아차렸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 입수 경로를 짐작하고 2명의 간부진들과 함께 무림맹 절정무사를 손에 넣었을 때, 이번 전쟁에서 패할 가능성이란 눈곱만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소요파의 문도 수가 적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NPC 제거를 위한 궁수 훈련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승리를 자신했는데도 결국 전쟁에서 패해버렸다. 더군다나 지금 이런 상황이 예상됐기에 최후의 방법으로 소요파와의 휴전이나 연합을 꾀하기 위해 조연을 찾아갔는데 그마저도 실패해버렸다. 도무지 문도들에게 뭐라 변명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맹주님, 그 무림맹 무사를 더 많이 고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 문도가 백무의 생각을 도와주려는 듯 물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백무의 짧은 답변에 마음이 상한 듯 질문을 던졌던 무인이 재차 물었다.
“후우… 다들 무림맹의 절정무사를 소환하기 위해선 이천이라는 명성이 필요하다는 건 아실 테지요? 그 명성 수치를 높이는 작업에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무림맹이 있는 낙양까지는 왕복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고요. 때문에 다음 문파대전까지 시간을 맞추기가 불가능합니다. 설령 몇 명이 더 무림맹 무사를 소환할 수 있다 해도, 지금 분위기론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 문파대전의 결과 때문에 소요파의 전력이 더 늘어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백무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히 설명해주었지만, 그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바닥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런 대책도 없는 겁니까!”
다른 문도가 격앙된 어조로 백무를 질타했다.
“아직 전투가 끝난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말고 제게도 믿음을 주세요. 저도 죽었습니다. 저도 화가 납니다. 그러나 우리 광풍단은 한 번의 패배로 쓰러지진 않습니다. 설령 다음 문파대전으로 문파가 소멸된다고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어차피 불과 십 일 전만 해도 문파 없이도 최고의 단결력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지난 사 개월의 경험을 잊지 말아주세요.”
백무의 말에 좌중의 소란이 점점 잦아들었다.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문도들이 백무를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될 분위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백무는 해산을 명했고, 문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패배의 여파로 대부분의 문도들은 사냥할 마음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대부분 로그아웃을 해서 나가버렸고, 몇몇은 취의청 바깥으로 나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반 문도들이 그렇게 취의청을 빠져나가고, 백무는 간부 3명만 남게 한 뒤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이야.”
“그게 어떻게 형님 탓이에요. 솔직히 문도들이 말을 이상하게 해서 그렇지, 우리 작전이 그런대로 잘 먹혔잖습니까!”
“사풍아, 그런 위로도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을 때에나 가능한 거야. 온갖 계책을 꾸몄는데도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수의 적한테 패배해버렸단 말이다. 비슷한 수였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백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강호에서 구사할 수 있는 작전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귀계(鬼計)가 난무하는 고대의 전장이 아니란 말이다. 결국은 힘 대 힘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는데, 그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힘이 안 된다면 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데, 소요파 문주와는 어떻게 해볼 여지가 전혀 없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셈이었고, 연합할 만한 다른 문파나 세력이라곤 감숙에 없었다. 도무지 자력으로 지금 상황을 타개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백무는 3명의 간부진에게 좋은 계책이 없냐고 의견을 물었지만, 몇 마디 나온 말이라곤 죄다 허황되거나 급한 실정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뿐이었다.
그때, 한 명의 문도가 취의청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전 고목문에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는, 파군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문도였다.
“백무 형! 일이 요상하게 돌아가네요.”
파군이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백무가 파군을 보며 또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애들 몇몇이 탈퇴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잘 다독거리긴 했는데, 이미 작정한 거 같더라구요.”
“무슨 소리야! 겨우 전쟁에서 한 번 졌다고 탈퇴하는 인간이 어딨어!”
백무가 파군의 말에 놀라 버럭 화를 냈다.
“아, 정말입니다. 저도 처음에 그 소리 듣고 얼마나 열 받았는데요.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 조금 이해가 가긴 하더라구요. 우선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다독거리긴 했는데, 조금 힘들 거 같네요.”
“무슨 소리야! 탈퇴한다는 게 어떻게 이해가 된다는 거야? 그놈들이 누구누구야!”
파군의 말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사풍이 따졌다.
“아, 사풍 형님, 왜 저한테 화를 내고 그러세요. 제가 탈퇴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나가겠다고 하는 그놈들을 다독거리고 왔다니까요? 칭찬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해집니다.”
파군이 비아냥거림이 묻어나는 하소연을 사풍에게 하자, 백무는 두 사람이 쓸데없는 일로 싸울까 미리 차단하고 나섰다.
“야, 파군아, 똑바로 말해봐라. 사풍이가 말한 대로 몇 명이나 그런 이야길 하는지,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말이야.”
파군은 백무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서너 명이 주동해서, 거의 스물의 인원이 감숙맹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라는 것도.
“그래서 자기네는 이용만 당했다고 말했단 말이냐?”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긴 안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내일의 희망이 보이질 않으니 과거의 고생이 한순간에 삽질로 변해버린 격이다. 가장 일선에서 광풍단의 미래를 보고 거리낌 없이 죽어줬던 이들이 모두 탈퇴를 결심했다는 파군의 말이었다.
물론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이번 결정은 그동안 쌓여 왔던 의문이 폭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파군의 말에 간부진은 모두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광풍단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이 문제는 오래전부터 빈번하게 터져 나온 고질병이었다. 그때는 나중을 바라보자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로 때울 만한 상황도 못 됐다.
“후우… 어쩔 수 없네. 내 손에서 해결할 만한 일이 아니게 돼버렸어.”
한참을 장고하던 백무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리곤 다시 중얼거리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형님한테 연락해야겠다. 응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이 되면 결론을 지을 수 있겠지.”
백무가 알 수 없는 인물을 거론했는데도 파군과 간부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가 말한 형님이란 인물은 대체 누구기에 이토록 신뢰받는 것인가?
* * *
소요파.
문파대전이 끝나자, 소요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총관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4시간 동안 문파 기능이 거의 정지되다시피 해서 더욱 그렇다. 다행히 총관이 다시 부활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백무가 다른 아이템을 빼돌리진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을 다독여 주고, 전투 당시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또 앞으로 감숙맹의 대응에 대한 의견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후 감숙맹은 무조건 해산시키는 쪽으로 결론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백무를 더 이상 강호에서 안 봤으면 좋겠지만, 게임이다 보니 그렇게 할 방법은 없었다. 녀석이 무슨 짓을 해도 철저히 짓밟아서 의욕을 상실하도록 하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감숙맹에서 소환한 무림맹 무사에 대한 대응은 조금 골치가 아팠다. 명성 2천은 돼야 절정급 무사를 임대할 수 있는데, 그나마 문파에서 두 번째로 명성이 높은 각룡이 형도 이제 겨우 1천2백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문파대전 승리 보너스인 3백의 명성을 합쳐서다. 낙양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다음 문파대전까지 무사 소환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에 받쳐 있을 광풍단과 백무를 생각하자니, 어쩔 수 없이 결국 꼬불쳐 둔 비급들을 꺼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문도들에게 뿌릴 수는 없다. 간부들에게만 흑점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나눠줬다.
그동안 내가 일러준 대로 꾸준히 스탯을 지능에 투자했던 각룡이 형과 소소 누님은 다행히 매화검진을 배울 자격이 됐다. 거기에 형은 호위무사가 있었고, 소소 누님은 항상 파티 상태인 수하(?) 다섯이 있기에 검진 발동 효과를 크게 볼 수 있었다. 소봉이에겐 개방의 보법인 취보(醉步)를 가르쳐 주었다.
진법과 보법 모두 회피력을 올릴 수 있는 기술들이다. 간부들이 약간의 시간만 버텨 준다면 절정무사를 잡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이다.
간간이 건네주는 무공 때문에 세 사람의 의심을 조금 사긴 했다. 뭔가 또 꼬불쳐 둔 게 없냐면서 어차피 줄려면 지금 다 달라는 협박까지 받았다. 하지만 내가 뭐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아무리 같은 문파의 형, 동생들이라지만 힘들게 모은 재산을 막 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깝기도 했지만,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다. 문주란 사람이 배고프다고 입 벌리면 먹이 던져 주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혹시라도 착각할까 봐 단단히 못을 박았다. 같은 문파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임의 재미는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문파대전에서 나와 함께 포위됐던 사람 중에서 소봉, 조자건과 같이 끝까지 살아남은 문도의 이름은 조립산이다. 놀랍게도 조립산과 조자건, 둘은 쌍둥이 형제였다.
조립산은 내가 진진을 만나고 있을 때 조자건의 추천으로 가입했단다. 둘이 쌍둥이 형제라는 사실은 문파대전 준비에 정신이 없었던 나만 모르고 있었지,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
여하튼 문파대전이 끝나자 미리 결정했던 대로 조자건은 새로운 장로가 되었고, 형인 조립산도 동생 덕에 장로로 전격 임명되었다. 신분은 문파의 장로지만, 우리끼리 정한 직책은 단주였다.
단주가 생겼지만, 무슨 무슨 단이니 하는 체계는 만들지 않았다. 아직 단을 구성하기엔 인원이 많지도 않았고, 이제 갓 시작하는 문파에서 파벌이 생길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꽤 많은 조치가 취해졌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새로운 문도를 받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문파대전이 있던 날, 회의를 통해 새 문도들을 받기로 결정하자마자 소요장은 발 디딜 새도 없는 시장 바닥이 돼버렸다. 기존의 문도들이 각자 아는 사람을 추천해왔고, 문파대전을 구경하던 유저들도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은 많았지만 쓸 만한 인재는 몇 없었다. 문파에 남은 자리는 겨우 50자리뿐이었고, 우리는 지금 당장 전력에 보탬이 될 만한 사람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보니 혹시 모를 광풍단의 첩자를 염려해서,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아침에 로그인을 하니, 행낭에 운영자의 공지 메일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강호에서 운영자의 편지는 처음 접속했을 때 본 그 무성의한 매뉴얼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다.
<안녕하세요. 강호가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전체 공지를 드리게 됐습니다. 이렇게 공지를 하게 된 이유는, 어제 감숙성에서 유저들 간에 최초의 문파대전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서비스 초기라서 봉인해둔 몇 가지 사항이 이제 제대로 작동하게 됩니다.
다음은 이번에 바뀐 사항입니다.
1. 그동안 지역 간 이동을 하기 위해선 명성 수치나 악명 수치 1천이 필요했지만, 문파 레벨 5등급 이상의 문도원들은 명성 수치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5등급 미만 문파는 이전과 동일한 조건이 적용됩니다.
2. 문파 전쟁으로 인해 강호의 정세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NPC 문주들이 외부 활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문파 간 우호도는 총관 NPC를 통해 확인이 가능합니다.
3. 캐릭터와 문파의 랭킹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각 도시의 랭킹 게시판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랭킹 순위는 레벨, 무공, 명성, 전적, 문파 조건 등을 종합해 산출됩니다. 최상위 10위까지의 강호인, 문파는 무료로 열람이 가능하며, 자신의 상태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은자 1천 냥이 필요합니다. 랭킹 시스템은 매일 자정을 기점으로 갱신됩니다.
4. 그동안 일반 몬스터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기보들의 드롭률을 상향 조정했습니다. 유저들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처입니다. 앞으로 드롭률은 강호 인공지능이 수시로 바꿉니다.
5. 효율전인 전투를 위해 강호 전용 컨트롤러의 기능이 업데이트됐습니다. 단축키와 토글 기능, 음성인식 기능이 향상됐습니다. 홈페이지에서 패치 프로그램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6. 몇 가지 새로운 개념의 무공들이 추가됐습니다. 이로 인해 전투가 훨씬 복잡해집니다.
7. 오픈 초기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돼, 그동안 억제하고 있던 자유도를 상향시켰습니다.
8. 흉한(凶漢) 상태의 인물을 수배할 수 있습니다. 각 도시의 관아에서 담당합니다.
9. NPC들의 인공지능이 향상됐습니다.
이상입니다. 그럼 즐거운 강호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많이도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가 문파대전을 한 게 게임 환경을 바꿔버릴 정도로 대단했단 말인가?
뭐, 이유가 없지만은 않겠네. 서버 초기에 이렇게 묶어두지 않았다면 엄청 혼란스러웠을 테니 말이다. 그럼 이제 유저들끼리 문파대전을 할 정도라서, 어느 정도의 혼란은 자체적으로 수습이 가능하다고 여긴 것인가?
다른 거야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이고, 역시 제일 궁금한 건 랭킹이었다.
내가 10위 안에 들어갈까? 일단 빨리 난주성으로 가보자.
난주성 중앙 광장에 위치한 랭킹 게시판은 먼저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한 10여 분을 낑낑대다 간신히 사람들을 비집고 게시판을 볼 수 있었다.
[문파 순위
1위. 마교
2위. 사황성
3위. 무당파
4위. 소림파
5위. 당문
6위. 화산파
7위. 남궁세가
8위. 종남파
9위. 개방
10위. 장백파]
소요파가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마교가 1위인 건 알겠는데, 사황성은 또 뭐야? 전에 무위의 객잔에서 꼬맹이 진진한테 들었던 곳이긴 한데, 그 사황성이 무당과 소림을 능가할 정도로 대문파였단 말인가?
이거 참, 문제가 또 꼬이네. 그냥 중견 문파 수준인 줄 알았던 사황성이 이렇게 대단한 거라면, 감숙성을 통일한다는 계획은 이제 전면 수정해야 하는 건가? 그나마 사파라서 유저들이 가입을 별로 안 할 것 같은 게 다행일 뿐이다.
그런데 당문 따위가 5위씩이나 하는 건 또 뭐냐? 사천성의 다른 문파들이 안 보이는 걸로 봐서, 유저 대부분이 당문에 들어갔다고 봐야 하는 셈이 되나?
그리고 무당이 소림을 이긴 것도 재밌지만, 장백파가 10위라는 건 골 때리는 상황이네. 장백파는 어쩌다 가끔 구대문파에 속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론 중견 문파 취급이나 받으면 다행인 곳이다.
크큭. 알 만하다. 그래도 한국산 게임이라고 IGM에서 좀 쓸 만하게 설정해뒀나 보네. 유저들도 꽤 많이 가입한 거 같고 말이야.
그럼 이제 우리 소요파 등수나 검색해볼까?
검색해서 알아본 소요파의 순위는 1,021위였다. 생각보다 높은 편이다. 척박한 감숙성에만 문파 수가 수십 개나 되고, 보통 중원의 한 개 성(省)에 문파가 1백 개는 넘으니, 대략 밑바닥은 아니란 말이었다.
이제 갓 간판을 단 소요파의 랭킹보다 더 궁금한 건 내 순위였다. 문파 순위는 강호 시작부터 이미 설립되어 있던 문파들까지 합산해서 나오지만, 개인 순위는 순수하게 유저들끼리만 비교하기 때문이다.
[개인 순위
1위. 공갈대사(하남, 소림파)
2위. 현운자(하남, 무당파)
3위. 강호제일(사천, 당문)
4위. 백두산호랑이(요동, 장백파)
5위. 무룡(섬서, 화산파)
6위. 담경(감숙, 사황성)
7위. 일협(하남, 무소속)
8위. 황비홍(광동, 무소속)
9위. 파도(하남, 무소속)
10위. 백발마녀(사천, 당문)]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아이디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돈 가지고 랭킹 매기는 건 아닐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지금은 돈도 얼마 안 남은 상태고.
그런데 저 중의 몇 명은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공갈대사, 백발마녀, 파도는 흑점에서 들어봤고, 담경은 진진에게서 들었던 인물이다.
다시 1천 냥을 투입하고 알아낸 내 랭킹은 17위였다. 강호 전체 유저가 수십만인 걸 감안하면 만족할 만한 순위였다. 그리고 자신이 검색할 때만 볼 수 있는 기능인지 상세 보기라는 기능도 있었다.
[조연
현재 별호:황금룡
레벨(3,219위) 무공(17위) 명성(58위)
비무(51,278위) 문파대전 기여도(1위)
문파 가중치(+21 포인트) 특수 기술 가중치(+10,000 포인트)
종합:17위]
상세 보기를 하니 랭킹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 파악되었다. 비무 결과까지 전적에 포함된다면, 이젠 비무도 재미 삼아서 할 순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특수 기술 가중치는 또 뭐지? 문파 가중치와 비교해서 엄청나게 많이도 주네? 레벨하고 비무 순위가 저 모양인데도 17위나 된 건 이 가중치가 커서 그런 것 같은데 말이야. 특수 기술이라곤 신안뿐인데, 설마 신안이 저렇게나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기술이란 말인가?
1천 냥이라는 요금은 내게 별 부담이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들을 다 검색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게시판을 붙잡고 있기엔 계속 밀려드는 다른 유저들의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고 해서 나는 일단 문파로 돌아갔다. 문도원의 면접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도는 내가 직접 면접을 보고 뽑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사냥을 하러 나갔고, 문파엔 새로 가입한 문도들의 교육을 위해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어제저녁부터 시작한 면접은 잠깐 난주성에 들렀다 오고도 계속됐다. 어제 이야기를 못한 사람들은 오늘 오전 중에 이미 다 만나보았고, 지금은 늦게 소식을 접하고 띄엄띄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렇게 늦게 온 사람들은 어제 만난 사람들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분위기를 타서 너도 나도 생각 없이 가입을 요구하던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의지가 굳어 보였다.
그렇게 하나 둘 문도를 받고 보니 이제 남은 자리는 다섯.
문파 레벨 3을 달성하려면 3억 냥의 돈과 문파 명성 1만이 필요하다. 1, 2레벨과는 달리 문주의 명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돈도 그렇지만, 문파 명성을 올리는 덴 꽤 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이 다섯 자리는 확실히 인상 깊은 사람이 아닌 한 함부로 내줄 수 없다. 그래서 앞서 받은 문도들보다 능력이 더 출중해도 계속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렇게 한동안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는데, 내 앞으로 여태 보아왔던 사람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괴인 둘이 다가왔다. 둘 다 내가 여태 강호에서 봐왔던 면상들 중에서 최악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우두마면(牛頭馬面), 흉신악살(凶神惡殺)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파고들 정도였다.
짐승 같은 면상에 눈에선 시뻘건 흉광을 쏘아대고, 얼굴 곳곳에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한 칼자국이 수십 개나 들어서 있었다.
거기다가 이 둘의 머리 위엔 빨간색 아이디가 자랑하듯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카오틱 상태도 풀지 않은 살인자들이란 소리였다.
아이디도 하고 있는 행색과 참 잘 어울렸다. 광견(狂犬)과 광우(狂牛).
그런데 설마 저 얼굴을 들이대면서 가입시켜 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마 다른 용건이 있어서일 거야.
“가입하러 왔소.”
광견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흉한이 더러운 면상을 내 앞에 들이대며 헛소리를 했다.
나는 기가 차서 멍하니 ‘미친놈!’이라는 말을 머릿속에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얘들 인상으로 봐선, 그 말을 내뱉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다.
뭐라 대답해야 안 맞고 넘어갈지 한참 고민하는데도 광견은 흉측한 얼굴을 치울 생각을 안 한다.
이거 원. 적당히 못생겼으면 일없다고 쫓아 보내기라도 하지, 이따위로 얼굴을 망가뜨릴 정도로 험하게 살아온 인간한테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조연 님! 우리 가입하러 왔다니까요. 언넝 가입시켜 주세요.”
광견 뒤에 서 있던 광우라는 작자가 망가진 면상을 광견 대가리 옆에 나란히 세우면서 말했다.
‘이거 참, 쌍으로 놓고 보니 우열을 가릴 수 없네. 대체 어떻게 게임을 했기에 얼굴이 이따위냐! 그리고 언넝 가입시켜 달라고? 여기가 지들이 맘만 먹으면 무조건 통하는 덴 줄 아나?’
“음…….”
뭐라고 살살 달래서 쫓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얼굴 맞대고 말하기엔 짜증나고 부담스러운 놈들이다.
그래서 한참 동안 신음 소리만 내며 대충 반기지 않는 눈치를 줬는데도, 놈들은 흉기 같은 얼굴을 물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그러고 있을 것 같아 결국 나는 한마디 던져야 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소요파는 정파랍니다. 아이디 빨간 분은… 죄송합니다.”
아! 이놈들은 이렇게 돌려서 말하면 절대 물러설 면상들이 아닌데, 실수다!
“아, 물 빼는 거야 금방이니깐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자구요. 언넝 가입이나 시켜 주세요.”
아이고, 이놈들!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후우…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희도 나름대로 기준을 두고 문도를 받고 있답니다. 문파라는 게 아무나 막 받아서는 제대로 관리가 안 되거든요. 두 분은 소요파 입장하고는 많이 다른 분들이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니! 뭐라구요? 여기 오려고 어제저녁부터 잠도 안 자고 달려왔구먼, 그게 뭔 소리예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가욕관에서 달려왔습니다.”
가욕관(嘉山+谷關)이라면 만리장성의 서쪽 끝이자, 국경의 관문이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먼 곳.
그런데 잠도 안 자고 달려왔단 말이 진짜일까?
“그 먼 가욕관까지 우리 문파 이야기가 퍼졌단 말입니까?”
“아니, 지금 감숙에서 소요파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그리고 가욕관에서 들은 게 아니라, 홈페이지 보고 온 겁니다. 강호 홈페이지에 문파대전 한다고 소문난 게 언젠데요!”
쓸데없는 이야기만 올라오기에 홈페이지 접속을 안 했더니 그런 상황인 줄 몰랐다.
그런데 얘 말이 정말이라면, 지금 소요파는 감숙성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주목하는 문파란 말이 된다.
“후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 먼 곳에서 오셨는데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따, 거참! 너무 짜게 굴지 맙시다. 대체 우리가 소요파 입장이라는 거하고 뭐가 안 맞아서 그러는 겁니까?”
‘전부!’라고 외치고 싶었다.
“흐유, 이해를 못하시는 거 같으니 다시 설명을 드리죠. 소요파는 정파 계열입니다. 두 분의 인상을 보아하니 마공을 익히신 것 같고, 체질도 이미 마공에 적합하게 바뀌신 것 같네요. 거기다가 살인을 밥 먹듯이 하셨구요. 설령 두 분이 소요파에 가입을 하시더라도 배울 무공은 없습니다. 직접 마공을 구해서 배우셔야죠. 마인이 정파 무공을 배운다면 결과는 뻔한 거 아닙니까? 아마 주화입마에 걸려서 캐릭터를 삭제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마공은 소요파의 다른 문도들하고 공유할 수도 없으니 소요파에 전혀 득이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태 제가 새 문도를 받으면서 가장 많이 거부한 이유가 캐릭터 인상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살인을 몇 번만 해도 얼굴이 바뀌는 건 잘 알고 계시겠죠?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는데 여기서 두 분을 가입시켜 주면 전 거짓말쟁이가 돼버립니다. 전 그런 거짓말쟁이 문주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 피곤하고 짜증났다. 이래도 강짜를 부린다면 손님으로 대우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을 해줬는데도 이놈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그 찢어진 입으로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 크하하! 결국 광우 네 말이 맞았다. 안 받아줄 게 뻔하다더니만, 딱 그 꼴이 돼버렸네. 이제 난 모르겠으니까 네가 마무리 지어라.”
광우라는 놈이 큰 소리로 말하는 광견의 그 말을 받았다.
“하하하! 역시 소문대로 보통이 아닙니다, 조연 님. 그런데 그걸 아십니까? 문주만 문도를 가리는 게 아니라, 문도들도 문주를 가린다는 거 말입니다!”
이놈들 뭐야?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다더냐!
“처음부터 다짜고짜 윽박지른 건 죄송합니다. 조금 무례하긴 했죠? 하지만! 우리도 문주를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작부터 우리 인상에 쫄아버리거나 막무가내로 쫓아내버린다면 우리도 여기 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이 말입니다! 이해되셨나요?”
돌아도 적당히 돌아야 밥이라도 얻어먹고 살지. 이놈들은 심각하게 돈 놈들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좀 있다 이거냐?
하여간 지들이 싹싹 비벼 대도 가당찮을 판에 되레 협박하는 짓거리에 한숨만 나온다.
“아뇨. 그거야 댁들 사정이고, 별로 재밌지도 않아요. 바쁘니까 그만 가주시죠.”
이번엔 내 말이 놈들의 예상치를 벗어났나 보다. 놈들 입에서 징그러운 웃음이 가셨다. 그런데 그것도 순간의 착각.
“크하하! 역시 일파의 종주쯤 되면 유머도 있어야 하지요! 감복했습니다, 문주님! 그럼 일단 가입하기 전에 우리 실력을 보여 드려야겠지요? 야, 광견아! 준비해라! 문주님, 문도 네 명만 준비해주시죠.”
하이고,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녀석들 둘이서 우리 문도 4명을 상대로 비무를 할 생각이었나 보다. 한마디로, 실력으로라도 비집고 들어올 계산이었다.
말로 해서 나갈 놈들도 아니고, 그 먼 가욕관에서 달려온 고집으로 봐선 이번에 쫓아낸다고 해도 다시 얼굴을 내밀 놈들이었다. 결국 얼굴을 못 들게 망가뜨려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문파엔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간부들은 모두 사냥을 가버렸고, 남은 문도들 중에는 놈들을 깔아뭉갤 정도로 실력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실력 파악이 제대로 안 될 테니, 제가 상대해드리죠.”
“문주님 혼자서 우리 둘을 상대하겠단 소리요? 힘들 텐데…….”
후후, 건방지기까지.
“절 이기시면 무조건 가입시켜 드리죠. 대신, 지면 다시는 소요파의 문지방도 넘어오지 마세요.”
“뭐, 그렇다면야!”
[광견 님이 비무에 초대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광견과 광우는 이기면 무조건 가입이라는 말 때문인지 수락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예고도 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정말 생긴 대로 논다.
“시전, 일성소! 시전, 사상검진! 시전, 철포삼! 시전, 신안!”
[방어력이 1분간 2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한 시간 남았습니다.]
[고양 상태가 되었습니다. 1분간 회피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2시간 남았습니다.]
[외문기공이 발동되었습니다. 방어력이 10퍼센트 향상됩니다. 재사용하려면 30분 남았습니다.]
[신안이 발동됐습니다. 회피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공격 명중률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잡기들을 켜자마자 광견의 핏빛 도가 붉은 기운을 가득 담아 머리 위로 내리쳐 왔다.
그 기세는 거셌지만, 너무 단조로운 공격. 가볍게 오른쪽으로 보법을 밟아가며 신형을 옮겼다.
어라? 그런데 도가 기세를 멈추지 않고 날 따라서 옆으로 꺾어져 들어온다.
이번엔 도의 움직임이 제법 그럴싸했지만 속도감이 없다. 몸이 저절로 뒤로 한 발 물러서고 다시 옆으로 한 발 움직이니 광견의 도는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헛! 그런데 피했다고 생각한 광견의 칼이 다시 내 쪽으로 꺾어져 들어왔다. 거기다가 그동안 조용하던 광우가 폭발하듯이 대도(大刀)를 내 가슴 위로 내리쳤다. 앞뒤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훌륭한 연수합격!
“좋고!”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이 사용하는 도법은 기세가 꺾이지 않고 상대를 쫓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법이었다. 그렇게 자주 변화를 일으키려면 힘에 어느 정도 여력을 남겨야 할 텐데, 신안에 비친 칼의 붉은색 오러는 여유 따윈 없다는 듯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수준이 그 수준.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도법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한 번 피하면 계속 피해야만 하는 법. 일단 칼의 움직임을 봉쇄하기로 했다.
파직!
그그극!
진결육합권이 계속 따라붙는 2개의 도 옆구리를 가격해서 주인에게 돌려줬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은 무공이라, 맨손으로 검과 부딪쳐도 피해는 없었다.
주먹이 도면(刀面)을 때리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광견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콰직!
내 팔꿈치 공격이 광견의 가슴팍에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틀어박혔다. 이대로 몇 대만 더 치면 광견이 쓰러지겠지만, 안 봐도 뻔하다. 광우의 칼이 내 등을 노리고 휘둘러지는 게.
오른발을 들어 광견의 오른쪽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려세웠다. 그렇게 단 한 번의 발걸음으로 나는 광견의 뒤를 차지했다. 그러자 자칫 광견을 그대로 베어버릴 뻔한 광우의 도가 황급히 진로를 바꾸는 게 보였다.
“일단 한 명 가시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광견의 뒤통수를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퍼걱!
주먹이 광견의 양쪽 관자놀이에 연달아 처박혔다. 실제 상황이라면 머리가 터져 버릴 만한 일격이었다.
“아이고! 아퍼라! 아퍼!”
“엥?”
근거리에서 터지는 이런 급소 공격들은 일종의 크리티컬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설령 각룡이 형이라고 해도 견디기 힘든 공격이었을 텐데, 광견은 아직 여력이 남은 듯 엄살을 피웠다. 살짝 괴물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은 끝나서도 할 수 있으니, 일단은 눕혀 놓고 보자.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광견은 날 상대할 생각을 버리고 재빨리 앞으로 뛰어나가 광우와 나란히 섰다. 그리곤 마치 둘이서 음양진(陰陽陣)이라도 펼칠 자세를 잡았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도발을 해도 공격해오지 않는다.
“그럼 먼저 갑니다.”
나는 경고를 하고 몸을 띄워 전면의 광견에게 달려들었다.
끼이익!
얼라려? 광견을 향해 뻗어가던 주먹이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스치며 쇠 긁히는 소리를 냈다. 광우가 갑자기 꺼내든 검을 들고 내 권을 방해한 것이다.
갑자기 웬 검법이란 말인가?
대단한 척 엄살을 피우긴 했지만, 분명 광견의 체력은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견을 먼저 없애려고 했는데, 둘의 호흡이 절묘했다.
광우는 도에서 검으로 바꿔들고는 꼬박꼬박 육합권의 투로를 흩트렸고, 광견이 그 틈을 노리고 일도를 날리는 식이었다.
광우의 검법은 위력은 약해 보였는데 방어용으론 훌륭했다. 양강의 육합권을 부드럽게 제압하는 수법이 마치 무당의 사량발천근을 보는 것 같았다.
광우의 검법처럼 부드러운 무공을 상대하려면 변화가 많고 빠른 무공을 구사해야 하는데, 난 그런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
비무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한 합, 한 합 그렇게 거의 20번의 접전이 벌어지도록 결론이 나지 않자 점점 짜증이 났다. 다른 수가 필요했다.
‘보통 무협 소설에선 이럴 때 살을 내주고 뼈를 자른다고 하던가?’
광견은 아무것도 아니다. 광우라는 장애물만 없어진다면 주먹 몇 대면 끝낼 수 있었다.
난 일단 광우를 잡기 위해 오래전에 배워만 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무공을 사용하기로 했다.
“시전! 금나수!”
몇 달 만에 처음 써보는 무공이다. 순간, 겨우 1성의 금나수가 광견의 검을 집으러 갔다.
서걱!
검과 손가락이 부딪쳤지만, 나만 손해를 보고 검은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다시 금나수를 시전했다. 또다시 검이 손가락을 자르고 빠져나갔다. 한 번 실패할 때마다 체력이 죽죽 빠졌다.
결국 2번 더 금나수를 시전했을 때에야 광우의 검을 움켜쥘 수 있었다.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검날을 잡고 있어서인지 체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광우는 검을 잡는 인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지 잠깐 동작이 멈춰버렸다. 마찬가지로 광우 뒤에 숨어 있던 광견도 처음 보는 공격에 공격 시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기회는 잠깐이다. 둘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광우의 품을 향해 뛰어들었다.
비무를 시작할 때 선보였던 동작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하고, 양 주먹이 광우의 턱을 사정없이 갈겼다. 턱을 가격당한 광우의 머리가 좌우로 계속 흔들렸다. 광견은 광우의 등 뒤에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 도울 방법이 없었다.
[광우 님이 비무에서 퇴장당했습니다.]
광우의 몸이 축 늘어지면서 바닥에 꼬꾸라졌다. 금나수로 검을 봉쇄하고 광우를 쓰러뜨리기까지는 겨우 한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우가 엎어지자 그 뒤에 있던 광견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광견을 보고 씨익 웃어줬다.
“이제 한 명 보냈네. 그럼 마저 끝내볼까요?”
그 말에 광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러더니 양손을 하늘로 번쩍 든다.
“아! 항복이야, 항복!”
[광견 님이 항복했습니다. 비무에서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어찌 비무에서 항복할 생각을 한단 말이냐!
멍하니 서 있는 둘을 내버려 두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사이 몇 명의 사람들이 면접을 보기 위해 더 들어와 있었다. 비무 때문인지, 이들의 태도가 여태 봐왔던 사람들과는 달리 공손하단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일찍 왔더라도 모두 한자리 내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깝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휴! 괜히 시간만 낭비하는 거 같네. 역시 쓸 만한 사람은 직접 구하러 다녀야 하는가 보다.”
면접도 그만둘까 생각하는데,
“문주님! 제발 좀 받아주세요!”
“문주님! 가입 좀 시켜 주세요!”
얘들 뭐야?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거냐.
“두 분, 사나이답게 졌으면 그만 물러서세요. 자꾸 그러시면 더 이상 안 참습니다. 설마 지금 흉한 상태인 걸 깜빡하신 건 아니겠죠?”
계속 헛소리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은 좀 통했나 보다. 두 사람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이들이 꽤 강하긴 하지만 놀랄 만한 실력은 아니었고, 장래성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소요파의 일반 문도들보다 한심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전투 상황에서 보여 준 임기응변이 꽤 괜찮긴 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행낭에서 검을 찾아 재빨리 무공을 전환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단순히 사상검진처럼 회피율이나 방어력이 올라가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검진 같은 합격진을 보일 줄이야.
녀석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비무를 회상하는데,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당시 비무를 구경했던 문도를 찾아 물었다.
“거기 추자량 님, 아까 비무할 때 말입니다. 저 사람들이 무공을 바꾸면서 뭐라고 외치지 않던가요?”
추자량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정확하진 않지만, 들은 기억이 없네요.”
나도 못 듣고 추자량도 못 들었다? 다른 문도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대답뿐이었다.
“추자량 님! 얼른 뛰어가서 아까 나갔던 그 사람들을 빨리 데리고 오세요!”
추자량은 무슨 일인지 모르면서도 상황이 급하다는 걸 눈치 채고는 빨리 경공을 써서 뛰쳐나갔다.
강호 컨트롤러는 기본적으로 음성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특정 무공과 인터페이스 명령어가 이 음성인식을 통해 구현된다.
일반적인 행동은 양다리와 양팔을 감싸고 있는 패드의 센서로 동작을 제어하고, 손에 쥐는 패드로는 힘의 강약과 몇 개의 단축키를 사용할 수 있다. 단축키에는 행낭을 열어본다거나 체력 게이지를 볼 수 있는 기능, 떨어진 아이템을 줍는 토글 기능 등이 저장되어 있다. 버튼이 좀 많아서 익숙해지기엔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런데 저들은 무공을 바꿀 때 음성 명령을 사용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방법이었을까?
“문주님, 데려왔습니다.”
멀리 가진 않았었나 보다. 추자량이 금세 둘을 데리고 왔다.
“무슨 일이슈?”
삐친 듯 광견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수?”
광우도 삐치긴 했지만, 그래도 말에서 한 가닥 기대가 묻어나왔다.
“음… 물어볼 게 있어서 말입니다. 잘만 대답해주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야 당연하죠! 뭐든 물어보세요! 궁금한 거 다 풀어드리겠습니다!”
네가 개방 방주냐? 궁금한 거 다 풀어주게.
“아까 광우 님이 쓰셨던 무공을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처음 건 혈염도법, 두 번째 건 음풍검이죠.”
“무공 바꾸실 때 음성 명령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쓰신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신 거죠?”
“그게 궁금한 겁니까? 그거 알려 드리면 가입이 되는 건가요?”
“일단 들어보고요.”
“아니요. 일단 가입시켜 주시면 알려 드릴게요. 특급 비밀입니다.”
특급 비밀? 미친놈들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까짓것 대답이 맘에 안 들면 추방시켜 버리면 그만이니.
“흐유… 그렇게 합시다.”
[광견 님이 소요파의 새 문도로 가입했습니다.]
[광우 님이 소요파의 새 문도로 가입했습니다.]
“이제 말씀해주시죠.”
“홈페이지에 가보시면 패치 파일이 떠 있습니다. 설명서도 있으니까 조금만 읽어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
망할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