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장. 문파대전(1)(2권) (11/62)

제11장. 문파대전(1)

아침부터 몰려든 유저들로 난주 북문 앞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기천 명은 돼 보이는 유저들의 대열에 늦게나마 소식을 접한 구경꾼들이 속속 참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문파로선 생사대전일지 몰라도, 저들 입장에선 그저 한판 멋들어진 구경거리일 뿐이리라. 어쨌든 이 소요파와 감숙맹의 문파대전은 강호 역사상 최초로 벌어지는 유저들 간의 문파대전으로 기록될 것이었다.

전투 개시 한 시간 전에 소요파는 인원 점검을 끝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전을 다시 정리하고 북문 앞으로 이동했다.

광풍단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문의 동쪽 방향에 자리 잡은 그들의 머리 위로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보였다. 게임 속에선 아직 구현되지 않은 조건이지만, 해를 등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백무에 대한 경각심이 일었다.

광풍단은 예상한 대로 문파 레벨 2를 달성한 듯 1백 명의 인원이 광풍단 마크를 단 채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고, 문주 마크를 머리 위에 단 백무가 그 대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50이 채 안 되는 48명의 소요파 문도들도 광풍단과 20여 장의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NPC 무사들은 따로 조종할 수 없어서, 전투가 시작되면 이곳으로 달려오게 돼 있었다.

문도들이 대열을 척척 맞춰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감이 드는 한편, 제대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점점 나를 잠식해갔다.

‘준비된 대로만 하자!’

쓸데없는 걱정을 떨쳐 내려 애썼다. 백무도 긴장하기는 나 못지않으리라.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하리라.

숫자상으론 턱없이 부족했지만, 선제공격과 정면 승부를 선택한 우리의 기세, 그리고 이렇게 많은 참관인이 모이도록 한 작전은 너구리 백무를 적잖이 혼란시켰을 것이다.

진영이 자리를 갖추자 백무 앞으로 걸어갔다. 다가서는 나를 본 백무 역시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조연 님이 이러실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좀 대단하지요. 백무 님도 잘 알고 있지 않으셨나요?”

“하하하. 역시 전직 장사꾼답게 말씀하시네요. 여하튼 이번 문파대전은 실수하시는 겁니다, 조연 님. 전 또 선제공격을 한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전력을 끌고 올지 아주 약간은 걱정도 했습니다만, 겨우 저 숫자로 우리 감숙맹을 어찌해볼 생각을 가지셨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요. 하하. 상대가 돼야 말이라도 해보지요. 그럼 열심히 발악해보십시오.”

한껏 비아냥거린 백무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려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먼저 한바탕 약을 올릴 생각이었는데, 순식간에 당한 꼴이 돼버렸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시점부터 문파대전은 시작된 셈이었다. 백무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소요파 진영으로 돌아온 나도 문도들을 향해 미리 준비한 대로 움직이라고 지시했다.

문도들이 자리를 조금씩 이동하더니 6개 조로 나뉘어졌다. 백무의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에도 그때까지 광풍단은 어떤 공격 태세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신안을 잠시 발동시켰다. 짐작대로 광풍단은 사파 무공인 혈랑검을 배운 듯 대부분이 붉은 오러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오러들은 소요파 문도들의 것보다 미약했다. 백무와 몇몇 간부급으로 보이는 이들만 다른 사람들보다 선명한 붉은색 오러를 뿜어내고 있을 뿐, 그 외의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양 진영은 전투 준비가 끝났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런 상황이 몇 분간이나 지속됐다.

문파대전의 양상에선 확실히 공격보다 방어가 유리한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소요파의 입장에선 이미 기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지루한 대결 국면은 진만 뺀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문도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전체 십 보 전진!”

문도들이 진중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열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광풍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점점 불안한 느낌이 가중된다. 왜 숫자가 더 많은 광풍단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것인가!

“전체 십 보 전진!”

다시 문도들이 10보를 전진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겨우 10여 장. 경공을 시전해 돌격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적에게 1검을 날릴 수 있는 거리였다.

이렇게 가까워졌는데도 광풍단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때, 백무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궁사 착궁(着弓)!”

광풍단의 후미에 대기하던 50여 명이 일제히 검을 집어넣고 행낭에서 활을 꺼내들더니, 시위에 활을 재는 모습이 보였다.

활이라니!

강호에 활이란 무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보통 초저렙일 때 사냥용으로만 쓰이지, 레벨이 높아지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연사 속도나 공격력이 쓸모가 없을 정도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처 돌격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백무가 재빠르게 발사 명령을 내려 버렸다.

“사(射)!”

말도 안 된다는 상념은 비 오듯 쏟아지는 수십 개의 화살에 갈가리 찢겨져 갔다.

“전원 회피하면서 후퇴하세요! 뒤돌아서지 말고 물러서세요!”

하지만 이미 몇몇은 하늘을 가득 메운 화살 비를 보고 뒤돌아서고 있었다.

슈욱. 슉슉슉.

퍽! 퍽!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태반은 땅바닥에 박혔지만, 몇 대의 화살이 등을 돌리고 도망가던 문도들의 몸에 사정없이 꽂혔다. 하지만 보기에만 위험할 뿐, 원체 약한 화살의 공격력 때문에 사망자가 생기진 않았다.

“화살에 신경 쓰지 마세요! 진형을 유지하면서 후퇴하세요!!”

한번 화살 세례를 받아본 문도들은 그제야 화살이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슈슈슈욱! 슉슉!

광풍단 후진에서 재차 화살이 쏟아졌지만, 이번엔 목표물을 잃고 전부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선위대 돌격!”

백무는 화살 공격이 별 효과 없이 끝나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옵니다! 준비하세요!”

아주 약간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결국 광풍단이 의도했던 대로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50의 광풍단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짓쳐들어왔다. 난전 탓인지 화살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소요파 진영 앞에 다다른 광풍단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몇 명의 타깃을 잡고는 집중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콰쾅! 팍!

광풍단의 공격을 받아낸 문도들의 검에서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첫 격돌과 동시에 집중 공격을 피한 문도들이 주위 동료들과 신호를 주고받고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일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슥! 스윽! 서걱!

우리 문도를 공격하던 광풍단원이 갑자기 쏟아지는 공격에 순식간에 도륙당하고 만다. 방어력이 좋은 문도를 앞에 세워둔 탓인지 우리 쪽은 아직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적을 해치운 문도들이 차근차근 다음 목표를 찾아 검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광풍단원 예닐곱이 그렇게 사라져 갔다.

갑작스런 아군의 사망에 놀란 광풍단의 진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사(射)!”

멀찍이 떨어진 백무가 다시 사격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일까? 하지만 지금은 적아(敵我) 구분이 안 되는 난전이란 말이다, 이 미친 백무야!

그러나 미친 짓이 아니었다. 호위무사들에 둘러싸여 있던 나를 중심으로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 가득 메운 화살이 보기에 겁나긴 했지만, 패시브 스킬인 불영보가 저절로 발동되며 신묘한 움직임을 토해냈다. 소름 끼치는 귀곡성을 내면서 화살들이 내 몸을 스쳐 갔다.

수십 발의 화살이 그렇게 내 몸을 통과해간 시간은 극히 짧았다. 하늘을 가득 메우던 화살들이 연출한 흉험한 분위기가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화살 공격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날 둘러싸면서 호위하고 있던 매난국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화살 비를 피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NPC 캐릭터인 탓일까, 아니면 아직 경지가 겨우 이류 초입이라서 그런 것일까? 어쩐지 백무는 내가 아니라 이 호위무사들을 노리고 화살 공격을 준비해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길, 그렇다면 지금 소요파에서 이 참마평으로 달려오는 50의 NPC들은 전황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인가!

써보지도 못한 패 하나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자, 전장에 갑자기 암운이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그때, 백무가 또다시 화살 공격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정말로 소요파와 광풍단이 난전을 벌이는 전장에 화살이 쏟아졌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화살들이 한창 전투 중인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너희들은 아군한테도 활을 쏘냐!”

제 편에게 공격당한 광풍단원들은 묵묵히 칼질만 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 문도들이 광풍단 궁수들의 행동에 기가 막혀서 욕을 해댔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가 우세했다. 화살 공격 때문에 공격 기회가 줄고 회피에 신경을 써야 하긴 했지만, 화살 때문에 사망한 문도는 아직 한 명도 없었다. 겨우 화살 따위로 무공을 배운 무인들을 어찌해볼 생각을 하는 건 백무 따위나 하는 짓이었다.

돌격을 감행했던 광풍단은 사수들의 지원 사격 속에서도 이미 10명에 가까운 인원이 전장을 이탈한 상태였다.

그렇게 원거리 공격을 했는데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자, 광풍단은 겨우 10장밖에 안 남은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저 인원이 전부 돌격할 생각인가?

그럭저럭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난전이 벌어진다면, 숫자가 많은 광풍단에게만 유리할 것이다.

이번엔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어차피 난전이 벌어질 거라면 우리가 먼저 공격하는 게 나았다.

“전군 돌격! 이대로 뚫고 갑니다!”

돌격 명령과 함께 무림맹 절정무사를 소환했다. 소요파의 NPC들을 기대할 수 없게 됐으니, 위험하더라도 직접 몸을 움직여야 했다.

후방 40여 명의 적들을 남겨 두고 전방의 광풍단을 향해 우린 일제히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포위될 수도 있기에, 모두 그대로 뚫고 가야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광풍단 역시 바보 무리는 아니었나 보다. 조금의 시간만 버텨 주면 우리를 포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전면의 적들이 활을 버리고 다시 검을 들었던 것이다.

채채채채챙-

쇠 부딪치는 소리가 진동을 했다. 각룡이 형이나 소봉이는 가볍게 일선을 돌파했지만, 태반의 문도들은 방어진을 허물지 못했다. 빨리 뚫지 못하면 포위된단 말이다!

결국 탄탄한 정면을 버리고 측면으로 빠지기로 재빨리 결정했다.

“소요파! 전원 좌측을 뚫습니다!”

우리 쪽의 움직임에 포위진을 구축하려는 듯 백무가 재빨리 후미의 병력을 좌우로 배치하는 게 보였다. 그나마 아직 진이 완성되기 전인 지금 빠져나가야 했다. 앞이나 뒤를 돌파하기엔 적들이 너무 두터웠다.

절정무사를 앞세우고 내가 선두에 섰다. 그러자 날 지키려고 주위에서 문도들 몇이 달라붙었다.

“무조건 달립니다!”

옆에 붙은 문도들에게 한마디 던지고는 앞만 보며 달려 나갔다.

서걱! 펑! 서걱! 펑!

절정무사의 검과 내 육합권이 정신없이 쏟아지며 앞을 가로막는 광풍단원들에게 작렬했다. 한 명 쓰러뜨리고 한 발자국 전진하기를 계속했다. 난 정면의 적들만 상대하고, 날 포위하려는 광풍단원들은 문도들이 검을 휘둘러 막아주었다.

정신이 없었다. 절정무사에게 새로운 타깃을 정해주고 나도 진결육합권을 시전해야 했다. 내 주위로만 화살들이 비 오듯 쏟아졌고, 나만 잡으면 된다는 듯 주위의 적들이 방어는 도외시한 채 몸을 던져 공격해왔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안 보였다. 뒤를 보니 10명 정도의 문도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후위는 조자건과 소봉이가 맡아주고 있어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광풍단이 내 주위로 몰려든 덕택에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포위될 뻔한 문도들이 한시름 놓게 됐다. 그리고는 이내 각룡이 형과 소소 누님의 지휘로 전장의 우측에 재집결하기 시작했다.

“헉! 이놈들 뭐야? 문주님!”

뒤에 서 있던 조자건이 무언가에 크게 놀란 듯이 소리쳐 나를 불렀다.

‘바빠 죽겠구만. 길 뚫어야 하는데.’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마지막 공격을 퍼붓고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니, 조자건은 한 광풍단원이 정신없이 토해내는 공격을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그의 검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도세(刀勢) 때문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게 뭐야? 광풍단에 저런 숨은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

그때, 갑자기 그 광풍단원이 거창한 공격을 하려는 듯 칼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드는 동작을 취했다. 그리고 난 무사의 가슴팍에 선명히 새겨진 글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아흑, 이 망할 백무 자식!

맹(盟) 자였다.

어떻게 백무가 무림맹 무사를 손에 넣었는지 따져 볼 여유는 없었다. 조자건이 쓰러지면 간신히 버티고 있던 진형이 단번에 와해돼버릴 것이다.

일단 앞쪽에서 길을 뚫고 있던 내 절정무사를 조자건을 공격하는 광풍단의 무림맹 무사 쪽으로 돌렸다.

“자건 님! 뒤로 조금씩 빠지세요!”

조자건에게 외치고 주위의 문도들에게도 다시 명령을 내렸다. 무림맹 무사를 쓰러뜨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러는 사이에 포위돼버릴 것이다.

애초의 의도는 내가 앞장서 길을 뚫고 전 병력이 포위방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전열은 두 동강 나버렸고,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버렸다. 어서 빨리 각룡이 형의 본진과 합세하는 게 그나마 최선의 방편이었다.

“다시 돌아갑니다! 부문주와 합류하겠습니다!”

힐끗 저 너머를 살펴보니, 각룡이 형과 30명의 소요파 문도들이 우리를 둘러싼 포위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절정무사끼리 싸움이 벌어지고 나서야 겨우 몸을 빼낸 소봉이와 조자건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 무림맹 무사부터 쓰러뜨려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쓰러뜨리고 합류합시다!”

합류하는 길목을 무림맹 무사가 막고 있어서, 최대한 집중해서 쓰러뜨리기로 했다.

좌측에 조자건이 서고 우측으로 소봉이가 돌아왔다. 남은 문도들이 광풍단의 공격에 맞대응하면서 그 뒤로 재빨리 대열을 맞추며 겨우겨우 쐐기진을 이룰 수 있었다.

“갑시다!”

끈덕지게 늘어지는 광풍단원에게 주먹 한 방을 먹이고는 무림맹 무사를 향해 달려갔다. 뒤따르는 문도들은 내가 흘려보낸 광풍단원에게 잇달아 공격을 먹이면서 따라왔다.

“포위하세요!”

그 소리에 눈앞에 있던 광풍단의 무림맹 무사가 조금 전까지 상대하던 내 무사를 무시하고서는 나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왔다. 백무가 날 타깃으로 지정한 것이다.

꼭 백무의 유인계에 걸려든 것만 같다. 하지만 백무가 정말 이걸 유인 작전이라고 썼다면 내겐 되레 고마운 일이었다. 절정급 NPC를 상대하는 일은 이젠 지겨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시전, 사상검진! 시전, 일성소! 시전, 철포삼! 시전, 신안!”

[방어력이 1분간 2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한 시간 남았습니다.]

[고양 상태가 되었습니다. 1분간 회피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2시간 남았습니다.]

[외문기공이 발동되었습니다. 방어력이 10퍼센트 향상됩니다. 재사용하려면 30분 남았습니다.]

[신안이 발동됐습니다. 회피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공격 명중률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진결육합권과 나한권을 12성 대성한 지금 내 수준은 일류 중급의 경지. 거기에 고급 보법 무공인 불영보와 4가지 잡기 무공을 발동시켰다. 살아남는 데에만 신경 쓴다면 아무리 절정무사라 해도 NPC한테 당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문도들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날 목표로 달려들게 해준 백무가 고마울 지경이다.

“저 신경 쓰지 말고, NPC 무사부터 제거하세요!”

내가 포위되지 않도록 주위를 지켜 주고 있던 문도에게 걱정 말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휙! 샤악!

픽! 퍼억! 촤악!

절정무사와 광풍단원들의 공격이 나를 향해 거세게 쏟아져 왔다. 우리도 사력을 다해 무림맹 무사에게 공격을 집중했다. 어서 빨리 저놈을 해치우고 후방의 문도와 합류해야 한다.

다행히 더 이상의 화살 공격은 없었다. 뒤에 남겨진 문도들이 광풍단의 배후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악!”

열심히 광풍단 무사를 공격하던 문도 한 명이 체력이 다 소진되었는지 죽어버렸다. 내 눈으로 처음 목격한 문도의 죽음이었다.

“으악! 컥!”

그리고 다른 문도가 무림맹 무사에게 일 검을 날리고는 다시 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험한 전투가 오래되다 보니 문도들의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두 번째 문도의 죽음을 끝으로 광풍단의 절정무사도 곧바로 쓰러졌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동하겠습니다!”

얼마 안 남긴 했다. 체력이 간당간당한 상태였지만, 포위되고 난 이후로 10명 남짓한 우리가 없앤 광풍단의 숫자만 해도 20이 넘었다. 광풍단의 포위진은 절반 가까운 인원이 죽어버려서 이미 와해됐다고도 할 수 있었다.

적의 압박이 느슨해지자 실력의 차이가 더 확실해졌다. 일대일로는 확실히 광풍단은 소요파의 상대가 안 됐다.

한결 빠른 움직임으로 각룡이 형을 향해 문도들을 이끌고 가는데,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미치겠네.”

또 무림맹 무사가 등장한 것이다.

무림맹 무사는 한 번 소환하면 72시간 동안 다시 소환할 수 없다. 강제 소환당해도 똑같은 시간을 적용받는다. 그렇다면 광풍단에서 무사 소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백무 한 명이 아니라는 소리다.

이번에도 무림맹 무사가 날 목표로 달려들었다. 신안은 여전히 발동된 상태였지만, 다른 회피용 잡기들은 시간 제약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아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된 것이다.

아까 그놈과 같은 복장의 무리맹 무사를 본 문도들이 알아서 집중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으악!”

“컥!”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2명의 문도가 또 죽고 말았다. 이젠 정말 체력의 한계다. 남은 인원은 나를 포함해서 문도 6명과 무림맹 무사뿐이다.

아군의 숫자가 줄어서 공격력도 약해졌고, 수비하기도 더 힘들어졌다. 나도 떨어진 회피력 때문에 이미 몇 번이나 광풍단원의 공격에 적중돼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 문도가 아웃당했다. 내 체력도 이젠 절반이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체력이 바닥난 우리에게, 광풍단은 마지막이라고 여긴 듯 발악적인 공격을 해댔다. 나는 공격할 엄두도 못 낸 채 정신없이 회피 동작만을 해야 했다.

몇 번의 공격이 다시 내게 적중했고, 또 몇 명의 문도들이 광풍단의 공격에 몸을 뉘였다.

다행히 불사신 같던 광풍단의 무림맹 무사가 내 절정무사의 공격에 제대로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의 기쁨. 내 절정무사도 이내 광풍단의 집중 공격을 받고 강제 소환을 당하고 말았다.

아,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그때였다.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전장에 수십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속속 몸을 날려 투입되기 시작했다.

펑! 서걱! 펑!

“이제 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소요파의 NPC 무인들이었다. NPC 문도들은 나를 먼저 구하려는 듯 광풍단의 무사들을 맞아 싸워가기 시작했다.

삼류무사들이긴 했지만, 50이나 되는 머릿수 덕택에 주위에 있던 광풍단이 한순간에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절망에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희망의 끝자락을 움켜쥔 셈이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몇 안 남은 문도들의 얼굴에 이젠 살았다는 듯 기쁨의 미소가 번져 갔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그 많던 광풍단원들은 그사이 상당한 사망자를 내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자 눈치 빠른 사람들은 재빨리 백무가 있는 후방의 광풍단 본진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 버렸고, 몇몇은 느린 판단 덕택에 NPC 무인들의 사정없는 손속에 강제 종료되고 말았다.

그렇게 주위가 정리되자 NPC 문도들이 새 먹잇감을 찾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제대로 쓸어보자구요!”

소요파 NPC들 덕에 깨끗해진 주위를 한 번 훑어본 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난전으로 흩어진 문도들을 규합하러 갈 차례다.

‘그런데 각룡이 형은 상황이 호전됐다는 걸 충분히 알아차렸을 텐데, 왜 아직도 병력을 뒤로 빼지 않고 저렇게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거지? NPC 무인들이 광풍단을 상대하는 사이에 체력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는 게 손실을 줄이는 건데 말이야.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닌데.’

멀리서 바라본 그쪽 상황이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했고,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일단은 어서 빨리 모두 뭉치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 살아남은 3명의 문도들을 데리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합류하고 보니 문도들의 상황이 참담했다. 분명 서른이 넘는 숫자가 있었고, 문주인 내가 있던 쪽보다도 압박이 덜했을 텐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숫자는 겨우 열다섯 정도였다. 생각과 너무 다른 모습에 소봉이마저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몇 명 되진 않지만, 문주인 내가 와서인지 소요파 문도들이 한시름 놓는 듯했다.

어쨌든 의문은 나중에 풀어도 되는 문제고, 급한 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장을 정리하는 것이다.

NPC들이 합세한 덕에 더 이상 포위를 당할 위험도 없기에 난 문파대전이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마음껏 육합권을 뿜어냈다. 그건 소봉이와 조자건도 마찬가지였고, 한결 상황이 좋아진 각룡이 형과 여타 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적 우세가 역전돼버리니 모두의 공격력은 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결국 일방적인 몰아치기로 맞붙어 싸우던 광풍단은 순식간에 전멸해버리고, 백무와 녀석 주위의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만이 남게 됐다.

그제야 백무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부하들도 다 죽어 나갔는데 그냥 같이 죽어주지, 그 잘난 목숨 연명하겠다고 도망치는 모습이 과연 백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는 광풍단을 소요파 NPC들이 뒤쫓아 가기 시작했다. 지친 우리는 NPC들을 쫓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두 제자리에서 멍하니 손을 놓고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소요파와 감숙맹의 참마평 전투는 끝이 났다.

승리를 하긴 했지만, 2배가 넘는 적을 맞아 이기긴 했지만, 살아남은 문도들은 환호성을 지르지 않았다. 승리했다는 기쁨보다 혈투의 피로가 더 컸기 때문도 아니다. 승리의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소요파 문도는 18명. 총 48명이 참전해 30이란 숫자가 전장에서 희생된 것이다.

더 이상 위협이 없어졌기에 문도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운기를 시작했다. 그런 문도들을 지켜 주기 위해서 각룡이 형은 나머지 인원들과 호법을 서주고 있었다.

“왜 숫자가 이것밖에 안 남았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형에게 다가간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휴… 말 마라.”

형이 짧게 대답하고 만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

자신이 너무 성의 없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는지, 형이 마음을 가다듬고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미안하다. 너한테 화낸 게 아니다. 아까의 전투가 너무 열 받고 황당해서 그랬다. 백무가 어떻게 해서 얻었는지는 몰라도, 무림맹 절정무사를 소환했다. 그놈 때문에 한참 애먹었지. 누가 컨트롤하는지 몰라도 약한 문도들만 골라서 공격하는 통에 피해가 장난이 아니었다. 간신히 NPC들이 오기 전에 잡을 수 있긴 했지만, 백무가 공세를 늦추지 않더라. 널 잡긴 힘들 것 같으니, 우리라도 잡아서 숫자를 줄일 요량인 거 같더라고. 하여간 너랑 NPC 무인들이 제때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 전멸당할 뻔했다. 나도 체력이 간당간당했으니 말할 것도 없지.”

망할! 무림맹 무사가 둘도 아니고 셋이었단 말인가!

“형, 우리 쪽에도 무림맹 무사가 둘이나 나왔어요. 우리도 그놈들 때문에 전멸당할 뻔했다가 겨우 살았어요.”

각룡이 형이 내 말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인다.

“허! 세 명이라! 까딱했으면 여기가 소요파의 무덤이 될 수도 있었겠네. 대체 백무가 어떻게 무림맹 무사를 입수한 걸까?”

“짐작 가는 게 있긴 해요.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죠. 형! 그나저나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니까 대충 정리하고 감숙맹으로 가죠.”

문파대전은 오늘 밤 12시까지 계속된다. 죽어버린 사람들은 4시간의 제한이 풀리면 다시 접속이 가능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아직 전투가 끝난 게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문파에서 부활하기 때문에 감숙맹 본거지를 점거해서 부활하지 못하게 해야 문파대전에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전 문도들이 운기를 끝마쳤다.

“이제 전쟁을 끝마치러 갑시다! 지금까지도 수고하셨지만, 조금만 더 수고하시면 우리 소요파가 감숙 최고의 문파가 될 수 있습니다. 힘들 냅시다!”

간부들이 제각각 한마디씩 던지며 문도들을 추슬렀다. 승리가 코앞에 보이니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고 말이다.

감숙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유저들의 문파는 난주성 서쪽에만 설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요파와 겨우 5분 거리였고, 이곳 참마평과도 한 마장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18명의 문도들이 일제히 경공을 시전하고는 감숙맹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을 하던 감숙의 무림인들도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감숙맹은 채 1분도 안 돼 도달할 수 있었다. 문도들이 다 모이자 나는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리를 잡으세요! 또 어떤 계략이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간부진들이 먼저 들어가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들어오세요!”

조심하란 말밖엔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문파를 점거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다른 게임에서의 공성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긴 성(城)이 아니라 그저 큰 건물일 뿐이다. 성벽도 없고, 사수도 없으며, 해자도 없다.

“그럼 형하고 소봉이는 절 따라오세요. 제가 앞장설게요.”

감숙맹 정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백무 이놈은 자기가 제갈량이라도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긴장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 들어가 보았다. 연무장을 지나치고 대전을 향해 걸어가도,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완전히 텅텅 비어 있었다. 백무도 없고, 광풍단원도 없었다. 그들의 뒤를 쫓던 소요파의 NPC들도 볼 수 없었다.

“이게 뭐야? 도망간 놈들이 다 죽어버린 건가? 왜 아무도 없어?”

뒤따라오던 소소 누님이 적들의 코빼기도 안 보이자 희희낙락하며 외쳤다.

그런데 정말 다들 어디에 간 거지? 백무 놈 하는 짓을 봐서는 NPC 따위한테 죽을 놈이 아닌데……. 설마 소요파로 쳐들어갔을까?

아니다. 아무도 없는 소요파에서 백무가 할 짓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혹 몇 시간 지나서 부활하는 우리 문도들을 암습할 생각이라면 모를까, 지금 거기로 향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간 것일까?

문파대전은 문주가 죽거나 12시에 전투가 종료됐을 때 최종 사망 숫자가 적은 쪽이 이긴다. 아직 승리 메시지가 올라오지 않은 걸로 봐서 백무는 죽지 않았다.

결론은 뻔하다. 우리 NPC 무인들을 꽁무니에 달고 열심히 도망 중이거나, 어디서 오들오들 떨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거나.

감숙맹의 취의청은 우리 문도들에 의해 점거됐다. 이곳 총관은 문도들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고, 신기하게도 상당량의 은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려 3백만 냥에 가까운 돈이었다.

무심코 그 돈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큰일 났다! 각룡이 형! 우리 총관을 지키러 가야겠어요. 열 명만 저를 따라오세요! 급합니다!”

총관이 죽고 나서 돈을 떨군다는 건 우리도 이제 알았으니 백무가 알고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백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니 혹 모르더라도 재미 삼아 우리 총관을 잡았다면 이건 또 문제가 조금 심각해진다. 우리 총관이 들고 있는 돈은 2억 냥이 넘으니 1할만 떨어뜨린다고 해도 2천만 냥이 되기 때문이다.

내겐 2천만 냥이 그리 큰돈은 아니지만, 백무 입장에선 충분히 매력 있는 액수일 것이다. 어차피 진 전쟁, 돈이라도 조금 챙겨 가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다.

난 서둘러 소요파로 달려갔다.

“제기랄!”

욕이 저절로 나왔다. 우리가 참마평으로 출진할 때 굳게 닫아둔 문이 박살나 있었다. NPC들이 들락날락한다고 해도 전쟁 시엔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어야 했다.

난 서둘러 총관이 있는 문주 집무실로 몸을 움직였다.

“늦었군요, 조연 님.”

백무 혼자 내 집무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총관은 방금 죽은 듯 아직 시체가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이 잔머리꾼이 어쩌자고 적진에 혼자 남아 있는 걸까? 그리고 놈을 쫓아갔던 NPC들은 또 어딜 가고? 혹시 백무를 안전히 보내려고 다른 광풍단원들이 NPC들을 유인하고 있는 중인가?

그나저나 백무가 너무 태연스럽게 나오는 바람에 나와 문도들은 공격 타이밍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후후!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모르겠네. 무슨 꼼수가 있는지는 몰라도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요, 백무 씨.”

나는 말을 끝내자마자 뒤에 서 있는 문도들에게 눈짓을 주었고, 문도들은 유일한 탈출구인 문을 막아섰다.

내 반말이 언짢았는지, 순간 백무의 능글맞은 기색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적이라도 문주 정도 되면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주실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스럽군요.”

“지금 이 상황에서 예의 따위를 왜 찾지? 후후. 그래, 네가 그렇게 예의를 좋아한다면 전쟁 중의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보여 주지.”

난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무와의 그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고 공격해 들어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에 백무가 놀라서 황급히 보법을 시전했지만, 대성한 육합권은 적을 놓치지 않았다. 흑문을 낀 오른 주먹이 시원스럽게 백무의 안면에 적중했다.

“살아서 갈 생각은 마라!”

다시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왼 주먹이 복부를 강타했다. 연이어 양손에서 권풍이 쏘아지며 백무의 몸뚱이에 어김없이 꽂혀 들어갔다.

“그리고 말이야, 들어보니 너 스물여섯 살이라며? 나 스물아홉이거든? 반말 좀 한 게 그리 기분 나빠?”

백무 녀석의 나이를 각룡이 형한테서 듣고서는 얼마나 억울하던지…….

“이거 참, 조연 님! 나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없소. 죽어주긴 할 테니, 일단 이야기 좀 나눕시다!”

정신없이 맞고 있던 백무가 다 죽어가면서도 입을 놀린다.

하하, 이 자식 봐라? 이제 보니 협상하려고 온 건가?

“협상하려고 왔었수? 그럼 일단 한번 죽고 나서 이야기합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야 돈 드는 일도 아니니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간특한 녀석은 일단 노곤하게 패줘야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백무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패자, 너무 어이없었는지 백무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나저나 확실히 백무도 여간내기가 아니다. 광풍단 일반 문도들은 서너 대 맞고 죽어버리던데, 백무는 열 번이나 공격을 당하고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백무 씨, 오래 버티네?”

신안을 통해 백무의 붉은색 오러의 움직임이 잦아드는 게 보였다. 한 대만 더 때리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음… 그럼 이쯤 해둘까? 대충 그 이야기란 걸 나눠볼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으니.”

그제야 손을 멈추고 녀석을 보며 말했다.

“왜? 왜 공격을 멈추지? 한 번 죽이고 이야기하자던 그 작자는 어딜 갔나?”

짜식, 이젠 아주 대놓고 반말하네? 화났나 보다. 크큭.

“음, 그럴까 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더라고. 살려 둘 이유가 하나 생각나서 말이지.”

“……?”

“백무 씨, 우리 총관은 왜 죽였지?”

“아! 설마 겨우 NPC 총관을 죽였다고 다짜고짜 공격한 건가? 총관을 죽인 건 우연이었을 뿐이야. 하도 침입자니 나가라느니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후후. 백무 녀석, 또 잔머리 굴리네.

“겨우라… 겨우가 아닐 텐데? 다 알고 있으니 물건이나 돌려줘. 그게 네 목숨 값이다.”

녀석이 당황한 눈치를 보인다. 하긴 아무 말도 안 했다면 모를까, 이미 거짓말한 꼴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백무가 자꾸 미적거리기에 녀석의 눈앞에 어서 빨리 물건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니 어쩔 수 없네요. 돌려줄 이유는 없지만, 협상 선물이라고 생각하죠.”

끝내 말로는 지지 않으려는 백무다.

그나저나 그새 반말에서 다시 존대를 하네? 상대할수록 짜증나는 놈이다.

백무가 소지품을 한참 뒤적거리더니 내 손에 2개의 아이템을 올려놓았다. 공동파의 독문무공인 복마권법과 청성의 사일검법서였다. 돈이 아니라 아이템이라면, 총관이 맡고 있는 창고의 아이템도 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것뿐이지?

“돈은 어쩌고?”

백무의 표정이 또 일그러졌다.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바보 자식 같으니. 애초에 돈만 줬으면 몰랐을 걸, 누가 먼저 아이템을 주랬냐?

녀석이 1천만 냥을 건넸다.

아, 정말 피곤하다. 백무 녀석, 현실에서 친구가 있을지 궁금해지네.

그러고도 한참을 더 신경전을 벌인 후에야 녀석에게서 2천만 냥이 넘는 돈을 회수할 수 있었다. 먼저 건넨 비급의 가치는 겨우 5백만 냥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래서 이렇게 돈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마음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정도가 심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뿐. 광풍단의 자금이 바닥을 보인다는 것.

그나저나 용건은 다 끝난 것 같다.

“그럼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

가볍게 육합권을 시전하곤 녀석과 작별 인사를 했다. 녀석이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내 주먹이 더 빨랐다.

[소요파와 감숙맹의 문파대전에서 소요파가 승리했습니다.]

[감숙맹의 문파 레벨이 1로 하락했습니다.]

[소요파의 문파 명성이 1,000 상승했습니다.]

[소요파의 모든 문도원들의 명성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백무가 죽고 나니 문파대전이 종료되면서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쏟아져 나왔다.

“백무야, 네 잔머리가 대단하긴 하지만 아직 나를 따라오려면 멀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백무의 시체를 보고 한마디 던져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