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장. 신안(神眼) (9/62)

제9장. 신안(神眼)

한데 섞여 패싸움을 벌이진 않았다. 각자 한 명씩 상대를 맞아 겨루는 대련 형식이었다.

팡! 팡!

서걱! 채챙! 팟!

현란했다. 검기가 난무하고 바람에 날린 흙먼지가 순식간에 장내를 뿌옇게 뒤덮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켜보았다.

도사가 허공을 몇 번이나 디뎌 가며 상대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어느새 신형을 비틀어 검기를 발출하고, 상대인 스님은 암연소혼장을 익힌 듯 가사 소매를 뒤집어 광패한 기풍(氣風)으로 응수했다.

시퍼런 검기가 채 해소되기도 전에 스님이 단순한 원앙각을 마치 무영각이나 된 듯 연달아 시전했다. 도사는 연신 뒷걸음치며 전권(戰圈)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물러섬이 맘에 안 들었던지 스님이 갑자기 신형을 허공으로 띄우더니 도사의 머리를 향해 마치 가위치기 같은 퇴법을 구사했다. 이 용아각(龍牙脚)의 수법은 정말로 시의 적절해서 이번엔 도사도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막 사나운 용의 이빨이 도사의 머리를 물어뜯으려는 찰나, 갑자기 도사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철판교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무릎을 굽혀 상체를 젖히는 정도의 평범한 철판교가 아니었다. 발끝을 이용해 몸 전체를 단번에 뒤로 젖혀 버린 것이다. 이런 번신(飜身)의 수법은 몸과 기가 일체화되지 못하면 구사할 수 없는 절정의 수법이었다.

도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어느새 나려타곤의 수법으로 몸을 구르더니, 아직 용아각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스님의 옆구리 방향을 차지했다.

이젠 스님이 위기에 처했다! 도사가 누운 상태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스님을 향해 벼락같은 기세로 쾌검을 내질렀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초절의 기교란 말인가! 스님이 이어번신(鯉魚飜身)의 수법으로 몸을 휘돌리더니 왼 소매로는 매섭게 짓쳐 오는 검면을 후려치고, 오른 소매로는 아직 땅에 몸을 뉘고 있는 도사의 몸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게 아닌가!

놀라운 무공과 임기응변에 완전히 몰입해 구경을 하고 있는데, 진진이 내 정신을 깨웠다.

“호호. 완전히 빠져 버렸군요, 연 공자. 역시 황금이 많다고 해서 강호의 후기지수가 될 수는 없었겠죠. 연 공자의 무(武)에 대한 능력도 당연히 포함됐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계속 보고만 있을 건가요?”

아! 시작할 때 뭔가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한 편의 재미난 무협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정신을 잃고 있었네. 하긴 이렇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그래픽과 효과음이 있는데 영화라고 불려도 무방하겠지.

“너무 재밌어서 정신을 잃고 있었네요. 대충 보아하니 저들의 대련이 진 소저가 주는 퀘스트와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맞나요?”

“예. 이렇게 무인들의 대련을 보여 주는 게 제가 공자를 비롯해 다른 칠룡들에게도 주었던 퀘스트이고, 제가 강호에서 맡고 있는 유일한 일거리이기도 합니다. 그럼 제대로 설명을 해드리지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그녀가 잠시 숨을 골랐다.

“저 여섯 명의 무인들, 즉 세 쌍의 대련은 공자가 퀘스트를 통과하기 전까지 영원히 계속될 거예요. 그리고 앞서 말해드렸듯이 공자는 퀘스트를 통과하기 전까진 이곳을 벗어날 수 없지요. 접속 중지를 하고 다시 와도 이곳에서 시작한답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욘 없어요. 다른 분들도 모두 통과하셨으니까요.”

부담? 이보다 더한 도박도 수없이 해봤네요, 진진 소저.

“저도 통과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이렇다면 어떨까요? 이 퀘스트가 성적순이라면요? 호호호! 참고로 최고의 성적은 기대도 안 하지만, 중간 정도의 성과를 보이고 나간 사람도 단 둘뿐이었어요. 공자가 그 두 사람을 능가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겠죠. 그럼 주의 사항은 이걸로 된 것 같고……. 퀘스트는 참 간단해요. 저들의 대련을 지켜보고 느낀 감상을 제게 말해주면 된답니다. 왜 이런 퀘스트가 생겼는지는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연 공자 정도라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간 이런 어색한 퀘스트가 아니라 강호의 모든 유저가 비슷한 퀘스트를 받을 날이 오겠죠. 제게 결론을 말씀하실 땐 신중히 해주세요. 그럼 공부 열심히 하세요. 전 저기에 계속 앉아 있을게요.”

말을 끝내고 진진은 몸을 돌려 초옥으로 걸어가 마루에 턱하니 걸터앉았다.

진진은 내가 무슨 초절정 천재라고 착각이라도 하고 있나 보다.

어이, 진 소저. 내가 이 퀘스트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알겠어? 지금도 여기에 왜 초대됐는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고만.

내가 한참 진진에게 퀘스트 설명을 받는 동안에도 무인들의 대련은 계속되고 있었다. 도사와 스님의 싸움은 그렇게 살벌했는데도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고, 다른 쪽의 도끼를 든 녹림도와 장창을 쓰는 무인, 혈겸의 마인과 협봉검을 든 중년 미부의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 퀘스트를 받은 것은 기회가 맞을 것이다. 처음 넷은 진진을 만나고 팔룡의 일원이 됐다고 하니, 아무리 낮은 성적을 받았어도 대단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팔룡인 내가 아무도 달성하지 못한 최고 성적을 받으면 강호 최강자가 된다는 말인가? 흐흐흐. 이거 괜찮네?

그런데 이런 퀘스트를 왜 하는 걸까? 특정 유저들에게 이렇게 혜택을 부여하는 걸까?

아니, 진진의 말에 힌트가 있긴 했다. 언젠간 강호 모든 유저들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퀘스트라는. 그럼 우리 8명은 테스터인 셈인가? 뭐, 좋다! 테스터든 마루타든 어쨌든 보상이 좋다니까!

일단 아까 보다 말았던 도사와 스님의 대련을 마저 보기로 결정했다. 솔직히 이쪽이 보는 맛이 꽤 있었다.

처음엔 기기묘묘한 공수(攻守)의 수법 때문에 금방 승부가 날 것처럼 보였다. 덕분에 긴장과 흥미를 느꼈었던 거고. 그런데 이젠 느긋하게 관람이 된다. 마치 잘 짜인 연희단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스님은 적수공권의 박투술을 구사했다.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정한 계율 그대로였다. 하지만 가사의 소매를 이용한 수법은 위력이 상당했고, 도사의 검을 방어하는 데에도 꽤 효과적이었다.

도사도 자세히 보니 동귀어진의 수법 같은 악랄한 수법은 쓰지 않았다. 검첨(劍尖)이 향하는 방향도 언제나 약간의 여유를 두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조금씩 여유를 두다 보니 각자 가진 재간들을 무리 없이 펼치게 되고, 보고 있는 내 눈도 즐거웠다.

대략 30여 분을 그렇게 재미나게 보고 있었나 보다.

둘의 싸움 패턴은 정해진 형식이 없는 마구잡이처럼 보였다. 물론 외통수에 걸렸을 때 빠져나오는 구명절초들은 거의 똑같았지만, 상대의 초식에 항상 같은 초식으로 대응하진 않았다.

때론 회피만 하거나, 때론 사량발천근(四倆撥千斤)의 수법으로 흘려보내고 반격을 꾀했다. 이도저도 아닐 때는 이유도 없이 뒤로 물러서기만 했고, 어쩔 땐 정심한 장력을 내보내 주위를 위진시키기도 했다.

재밌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일개 프로그램 따위의 패턴은 금방 드러날 거라는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대련은 패턴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퀘스트를 통과할 수 있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대련을 구경만 한다면 진진에게 해야 할 말은 딱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재밌었소.”

아마 그딴 답변을 한다면 역대 최하 점수를 주겠지.

분명 이 퀘스트는 3쌍의 무인들의 대련을 보고 어떤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이다. 하나하나의 대련 속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을 테고, 그 3개의 의미를 통합해서 궁극의 답을 추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진이 요구하는 최상의 답은 그것조차 초월한 것일 테다. 그리고 그 3개의 답을 통합 추론했던 인물들은 중급의 결과를 가져갔던 2명뿐일 테고.

살다 보면 문제라는 녀석은 혼자 오지 않는다. 이 녀석은 외롭고도 소심한 종족이라 항상 친구들과 같이 찾아온다.

문제를 정면에서 바라보기만 해선 이겨 낼 수 없다. 험한 녀석이라면 잠시 물러서 보기도 하고, 이렇게 패거리로 오는 녀석들은 물러서 봐야 더욱 잘 보인다. 멀리서 보면 문제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한 개로 보이기도 하니깐.

아직 도사와 스님의 싸움을 분석조차 하지 못했지만, 다음 싸움을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도끼를 든 녹림도와 장창을 든 낭인 무사의 대결도 나름대로 재밌었다. 앞서 싸움에서는 적수공권인 스님이 박투술을 전개했기에 대련의 속도감과 임기응변이 대단했었다. 반면, 이 둘의 싸움은 힘과 패기의 싸움이었다.

장창(長槍)을 든 낭인의 기교는 정말 대단했다. 마치 단창을 구사하듯 창대와 창날을 번개처럼 쏟아내고선 빙그르르 산적의 뒤로 돌아가 진각과 함께 강력한 찌르기를 펼쳐 댔다. 산적의 뒤로 돌아가는 수법은 분명 이화접옥(移花接玉)의 수법과도 같았다. 도저히 반격을 받으면서 나오기 힘든 동작이었다.

낭인의 수법이 빠르고 강맹하다면, 대부(大斧)를 들고 그 빠른 수법을 막아내는 녹림도는 낭인보다 더 대단했다.

부드럽고 가벼우면 능히 무겁고 강함을 이겨 낼 수 있다. 하지만 이 대부라는 물건으로 어찌 저 매섭고 빠른 창영(槍影)을 모조리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파파파파파팟!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창날을 막는 대부에서 정신없이 쏟아져 나왔다.

난 사량(四倆)으로 발천근(撥千斤)한단 소리는 들어봤어도, 천근으로 발사량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걸 이 대부를 사용하는 녹림도에게서 보고 있다.

마지막 공격을 막은 대부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각도로 돌아가더니 도끼날로 창대를 내리눌렀다. 낭인은 이에 이화접옥의 수법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사량발천근의 수준이 아니라 흡자결(吸字結)이나 된 듯이 압박하는 대부의 기세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쥐새끼가 소발에 잡힌 식이었다. 도끼가 천방지축 날뛰던 창대를 결국 땅에 눕히고 말았다.

녹림도는 이내 천근추의 수법을 사용해 창대를 발로 짓누르고는 독사출동(毒蛇出洞)의 초식으로 상대를 향해 쾌속무비한 공격을 가했다.

대련의 방식이니 무기를 놓으면 지는 상황! 낭인은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까?

허헛, 낭인의 대응은 기가 막혔다. 마치 처음 대부가 창대를 제압했을 때부터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듯, 그새 모아둔 내력을 창으로 흘려보내 이어타정(移魚打湞)의 수법으로 솟아오르게 했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분명 도끼날에 낭인의 목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 내력이 충분했던지 낭인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녹림도는 창대에 몸을 전부 싣고 있었기 때문에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고, 이는 장창을 사용하는 낭인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계속 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어차피 도사와 스님처럼 끝없이 물고 물리는 혈전이 될 테니 말이다.

이제 대충 싸움의 방식을 파악했으니, 마지막 대결을 살펴보기로 했다.

혈겸(血鎌)을 든 사내와 호리호리한 협봉검(狹鋒劍)을 든 중년 미부의 싸움은 다른 두 대결에 비해 상당히 정적이었다. 가끔 노려보다가 일격을 날리는 방식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공격 기회를 잡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갔다.

검신의 폭이 좁은 협봉검은 검이라기보다는 오직 찌르기에 특화된 기병(奇兵)이라고 보는 게 맞다. 혈겸 역시도 마찬가지로 사파의 마인들이나 사용하는 기병이었다.

그런 기병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이 저렇게 정적인 전투를 벌이다니……. 진진아, 얘들 설정 잘못된 거 아니냐?

현란한 수법도 보이지 않고, 공격권에 들어가기 위해 수없이 자리 이동을 하는 거리 재기 때문에 지루함만 심해졌다. 더 이상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마침 로그아웃해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초옥의 마루에 앉아 말없이 날 바라보는 진진에게 잠깐 눈인사를 건네고 접속을 종료했다.

다음 날.

아무리 재밌는 영화라도 자꾸 보면 지겨워진다. 그래도 아직은 참고 봐줄 만했다.

어제처럼 정신 쏟아 가까이서 살펴보는 건 오전 나절에 때려치웠다.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은 세 대련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명당에 멍하니 앉아 있다. 옆에 초절정 미인을 하나 앉혀 두고.

그러고 보니,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보여 주는 쌈 구경이라 해도 금세 질려 버렸는데, 진진의 얼굴은 아무리 계속 봐도 질리지가 않네?

참 잘생겼소, 진 소저!

“진 소저, 소저 얼굴은 대체 누가 만든 거요? 캐릭터 만드는 게 취미인 걸로 봐서는 진 소저 얼굴도 본인이 직접 만든 것 같은데…….”

미인을 옆에 두면 농을 걸고 싶어지는 게 늑대의 마음. 그런데 이 아가씨, 계속 안 놀아준다. 에고, 문제나 풀자.

“흠, 정리를 한번 해보자. 문제는 세 개고, 세 개는 다 다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는 않다. 완전히 다르다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본질은 같으면서도 다른 그런 개념을 찾아야 하는 건가?”

대략 이 정도까지는 알아낼 수 있지만, 저 세 패거리들이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언가가 뭐냔 말이야!

대련은 보지도 않고 한참을 머리 숙여 고민해봤지만, 결국 정리는커녕 잡생각만 들고, 조금 방법을 달리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에서 내려와 가장 재밌게 봤던 도사와 승려의 대련장에 다가갔다. 그리곤 그들의 전권(戰圈)에 몸을 밀어 넣었다.

펑! 퍼펑!

휘익! 휘르르륵.

날 사이에 두고 격타음과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왔다. 머릿속이 얼얼했다.

갑자기 스님의 소매가 눈앞을 가렸다. 눈앞엔 소맷자락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야를 확보하려고 뒷걸음치려는데, 소맷자락이 사라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도 하기 전에 도사의 장검이 내 눈을 향해 섬전같이 쇄도해왔다. 그에 채 대응하기도 전에 도사의 검이 내 눈을 후벼 파고는 이내 머리통을 관통해버렸다.

싸움 속에 끼어들 때부터 환영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좋은 기분일 리는 없었다.

일단은 도사의 몸놀림을 따라 해보기로 했다. 사실은 그게 될 리가 없다. 가상현실 게임이라지만, 강호 유저들의 몸놀림은 특정 초식이나 임기응변식의 초식 구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넋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도사가 이렇게 움직이면 그쪽으로 걸어가고, 선인지로의 초식을 쓰면 나도 손을 내뻗어봤다. 스님의 공격이 다가오면 도사를 따라 몸을 이동해보고, 어떤 초식을 구사해볼지 순간적인 판단을 해보기도 했다.

절정급 고수들의 대련이라 그런지 순간적인 전개와 머리싸움이 대단했다. 겉에서 보기엔 한낱 재밌는 유희일 뿐이었는데, 직접 대련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여 보니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30분도 안 돼서 나는 완전히 지쳐 밖으로 빠져나와야 했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게 무공을 수련하자는 것은 아니다. 무협 소설에서처럼 고수들의 동작을 따라 하면서 무공을 배운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좋게 봐서 게임 컨트롤러 움직이는 게 운동이라고 해도 현실의 내 몸이 갑자기 건강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모르지, 한 몇 년 여기서 이런 식으로 삽질하다 보면 건강해질지도.

내 행동이 무의미해졌기에, 도사들을 따라 하려는 생각은 접었다. 지금은 그저 도사의 등 뒤에 숨어 스님이 무공을 펼치는 걸 정면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고 있다. 옆에 앉아서 보기에는 현실감이 떨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한 방편이었다.

확실히 이 방법은 제삼자가 되어서 구경하는 것과는 모든 게 달랐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빠르게 전개되는 대련을 미리 짐작하며 봐야 했기에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다.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더니 어느덧, 실제 내가 대련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조금씩 쌓여 갔다. 시의 적절하게 초식을 구사하는 방법을.

무엇보다 대단한 건, 특정 초식에 대해서 왜 그리 많은 대응 방법이 생기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는 것이다.

무공이란 기(氣)의 수발(受發)이다. 상대의 공격에 똑같은 방어 초식을 구사했을 때, 그다음 동작은 언제나 같을까? 도사와 스님의 공수(攻守)에서는 그게 항상 같지 않았다. 이건 기의 수발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다면 알아차릴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분명 이들의 내력이 무한정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오랫동안 내력의 고갈 없이 대련이 가능했다. 본신 내력의 수발이 뛰어나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경력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몸에 끝없는 데미지를 준다. 허공에 대고 쏘아 보내는 경력이나, 단순히 소맷자락으로 검면을 때렸을 때도 격공장이나 침투경의 원리에 의해 상대에게 지속적인 충격을 준다.

이런 상식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게임 속에서 구현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건 정말 복잡한 알고리즘이다. 물론 복잡하기만 하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끊임없이 축적된 데미지를 내부적으로 계산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한계를 넘어섰을 때는 탄(彈)의 원리를 이용해 외부로부터 들어온 경력을 방출하고, 또 너무 강맹한 위력의 순간 데미지일 때는 적당히 흘려보내는 식으로 대응. 이런 건 프로그램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이를 알고 게임 속에 접목시켰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걸 알아차리긴 정말 힘들었다. 자잘한 데미지는 완전히 숨겨진 상태로 계산됐기에 제쳐 두고, 흘리기와 탄자결의 수법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승려의 공격은 흘려보내기 힘든 게 많았다. 강맹한 권법으로 도사를 몰아세우고, 이를 벗어나려고 하면 어느새 괴이한 경로로 소매가 나타나 퇴로를 막아버린다. 하지만 도사도 만만치 않아서 온갖 수법으로 위기를 벗어나고는 신기막측한 검공을 구사했다.

이때, 이 도사의 벗어나는 수법이 힌트였다. 한참 도사의 몸놀림을 주시하니 가장 많이 나오는 대응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이럴 땐 이런 동작이 나올 것이다, 라고 짐작이 가능하게 됐다.

그렇다고 항상 그게 맞지도 않았다. 도저히 불리한 상황이라서 정면 대결이 안 될 텐데도 검막이나 검강 같은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는 무공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절정 검공이 튀어나오는 시각도 어느 정도 지나니 일정한 간격이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간격이란 일정 시간이 아니라 일정한 데미지를 받았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도 조금 지나니 알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도사의 편에 서서 상황을 헤아리다 보니, 이 대련은 기의 수발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설정됐다고 결론지을 수 있었다.

다음 날은 녹림도와 낭인의 대련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제의 경우처럼 한쪽의 입장에서 관전해보기로 했다. 우선 움직임이 덜한 녹림도의 뒤로 가서 관전을 했다.

이 둘의 싸움은 기의 수발 따윈 아예 제쳐 두고 있었다. 어제 도사의 대련을 관전할 때 보니 얘들은 한참 싸우는 와중에 약속이나 한 듯 동작을 멈추고는 앉아서 쉬는 게 아닌가? 그렇게 한참 쉬다 일어나 다시 싸우는 광경을 보곤 어이없을 정도였다.

미리 어제의 상황을 봐둔 덕분에 내공의 분배라는, 고려해야 할 사항 하나를 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주안점이 사라졌다고 해서 역시 쉽게 파악되는 퀘스트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제보다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하긴 어제는 거의 운으로 알아낸 셈이었고, 그 결론이 반드시 정답일 리도 없다. 한 인간의 평생이 담긴 무리(武理)를 어찌 말 몇 마디로 정리하겠는가.

얼핏 보기엔 창이라는 장병기와 대부라는 중병기에서 오는 병기의 차이, 혹은 싸움에서의 거리 재기나 호흡에 대한 문제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사량발천근의 요령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둘의 싸움에선 병기의 차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런 묘리가 눈의 띄게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무협 소설 읽는 게 취미인 사람에게나 눈에 띄지, 보통의 유저들이라면 절대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일이다.

둘의 싸움은 도사와 스님의 톱니바퀴 맞물리듯 공수가 민활한 대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혀 상상도 못하는 초식과 임기응변의 연속이었다. 잠깐의 방심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절초들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어제의 방식이 곧 아무 쓸데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봐도 상대의 대응을 짐작할 수 없는데, 굳이 녹림도와 시선을 같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진진은 마루에 앉아 꼼짝도 안 하고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앉아도 미동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했다. 재미없다. 잠깐 손이라도 만져 볼까 했다가 관뒀다. 인형 같아서 재미가 없어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대련 모습을 살폈다. 여태 보았던 것처럼 똑같았다. 기기묘묘, 신묘막측의 연속.

‘어라? 기기묘묘? 신묘막측!!’

갑자기 내가 뱉은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불현듯 이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더니 해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 필사의 노력만이 오묘함을 가져온다! 저들이 저렇게 기괴한 싸움을 하는 건 모두 죽기 살기로 싸우기 때문인 거고!”

생사의 갈림길이 지척인데, 내공 안배가 무슨 소용일까.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야 간신히 적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정도인데.

그럼 이 대련은 싸움의 자세와 기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정말 재미없는 마인과 중년 미부의 싸움뿐.

세 번째 대련은 일주일이나 걸려서 간신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 대련도 첫 번째 대련처럼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진행됐는데, 세 대련 중 유일하게 결론이 나버렸다. 어느 순간, 마인의 혈겸이 여인의 목을 그어버린 것이다. 황당했다.

이후로도 중년 미부는 다시 생성되지 않았고, 마인은 하릴없이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했다. 갑자기 결론이 난 것은, 정신력이든 내공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들 역시 내공 안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뭔가 결론이 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두 번째처럼 기세의 문제도 아닐 것이고.

알고 있는 온갖 지식과 추측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상극(相剋)이였다.

중년 미부는 분위기를 봐서 분명 정파 사람이었다. 마도인과 정파인, 남자와 여자, 무공 수준은 비슷한 절정의 경지. 거기에 둘 모두 기병이라는 점까지 갖춰서 일격필살의 대련이 된 것이다. 결국은 내력이 조금 부족했던 중년 미부가 죽어버린 것이고.

서로가 상극일 땐 피해야지, 붙는다면 누군가 죽어야 끝난다. 두 번째 녹림도와 낭인의 대련은 그것과는 다르다. 서로 같은 성질이고 비슷하니, 죽도록 싸워야 우열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은 났다.

아무리 대단한 혜택이 주어지는 퀘스트라도 한곳에 꼼짝없이 묶여서 열흘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는 건 고역이었다. 진진이 말상대라도 해줬으면 심심함이 조금은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여길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들뜬 기분이 됐다. 이제 진진에게 답안지만 제출하면 해방이었다.

“진 소저, 답을 말씀드리겠소.”

“오래 걸리셨네요. 제가 받은 손님 중에 가장 오래 걸리셨어요. 걸린 시간만큼 많은 공부가 되셨길 바랍니다. 그럼, 답을 들어볼까요?”

여태 아무리 농담을 해도 인형처럼 반응이 전혀 없더니만, 답안 제출이라는 말에 눈에 생기가 돌았다.

“도사와 스님의 대결은 내력의 수발에 대한 이야기였소. 두 번째 낭인과 녹림도의 대련은 싸움이란 남김없이 모든 걸 토해야 하는 기세에 대한 조언이었고, 마지막인 마인과 중년 여인의 대결에선 상극인 사람과 싸움을 한다면 반드시 누군가 해를 입는다는 걸 깨달았소.”

“답변은 그게 전부인가요?”

여기서 멈추면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아니오. 내력의 수발이란 자신을 지키는 일이고, 기세에 대한 두 번째 대련에선 적을 상대함에 있어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대련에선 감당치 못할 상대는 피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소.”

“그게 공자님이 이곳에서 깨달은 모든 것인가요?”

“어찌 몇 마디 말로 깨달음을 이야기하겠소만, 무공을 어떻게 쓰는지를 깨달았다고 하겠소. 지킬 땐 지키고, 싸울 땐 싸우고, 피할 땐 피하는 것. 그게 내가 깨달은 것이오.”

더 이상 해야 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다.

진진이 살짝 눈을 감고 조금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연 공자의 답변은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군요. 제가 가장 듣기 좋은 답변이란 이런 식이었죠. 무공엔 부드러움과 강함이 있고, 그 기세를 조절하며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요. 그런데 지금 연 공자의 답변은 너무 동떨어져 있어요. 마치 삼류 무사가 초절정의 경지를 엿본다고나 할까요? 연 공자는 이를 감내할 수 있나요?”

뭘 감내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내가 감내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닥쳐 봐야 알지 않겠소? 나는 진 소저의 답변만을 기다리겠소.”

“좋아요.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연 공자가 퀘스트를 통과했다고 인정하겠어요. 그리고 약속한 대로 선물을 드리지요.”

[특수 스킬 신안(神眼)을 획득했습니다.]

“신안이 뭡니까?”

“그건 직접 알아보세요. 연 공자라면 버겁겠지만, 빠른 시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작별 선물입니다.”

진진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붉은색의 비단 주머니였다.

“언젠가 긴요히 쓰일 날이 있을 거예요.”

[사향 주머니를 획득했습니다.]

“그럼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됐군요.”

말을 마치고 진진이 수인(手印)을 그렸다. 그리고 마치 마법이 펼쳐진 것처럼 투명한 문이 내 앞에 드러났다.

“들어가세요.”

이렇게 이 문에 들어가면 이젠 끝인가? 왠지 아쉽다.

“진 소저, 내가 이 문으로 들어가면 우린 다시 볼 수 없습니까?”

진진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들어갈 생각 없이 계속 바라만 보자, 진진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을 거예요. 그땐 제가 연 공자를 도와드린 것처럼 연 공자에게 제가 도움을 구할지도 모르겠어요. 모른 척하지만 말아주세요. 그럼 이만.”

진진은 등을 돌리고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난 진진의 의미 모를 마지막 말에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탈출구에 몸을 던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바뀌고, 난 무위의 그 객잔 앞으로 이동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삐- 삐- 삐-

신호음이 연달아 들렸다.

[독각룡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독각룡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독각룡 님으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퀘스트 지역이 폐쇄 공간이라서 그동안 쌓인 편지가 한꺼번에 접수되는 소리였다.

<복마검법을 문파 무공으로 등록했다. 소소 누님 매화검법도 곧 될 것 같다. 넌 어때? 잘돼 가냐?>

<백무가 난주에 문파를 세웠다. 뭔가 대응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한 달은 너무 긴 것 같다. 대충 정리하고 난주로 와봐라. 누님이 매화검법을 문파 무공으로 등록했다.>

<왜 답변이 없는 거야? 지금 난주 분위기 심상치 않다. 빨리 연락 좀 주라.>

백무가 문파를 세웠군. 돈은 어디서 났을까? 일단 난주로 돌아가자.

전서구로 전 문도 소집령을 내리고 난주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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