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진진 (8/62)

제8장. 진진

소요파가 문호를 개방하고 문파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도 이제 2주일이나 지났다. 그동안 다들 정신없이 무공 숙련도를 높이는 데 열중했다. 그동안 새로 받아들인 문도는 육소봉이라는 20살 남자 애가 유일했다.

녀석과 만나게 된 상황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다. 처음엔 NPC인 줄 알았다. 육소봉이라는 이름이 내겐 너무 친근하게 느껴져서일까? 녀석은 난주성 안의 어느 객잔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자기 좀 키워달라고 생떼를 쓰면서. 아직도 저런 정신 나간 인간이 있나 싶을 정도였었다.

물론 녀석에게도 핑계가 있긴 했다. 난주 근처에서 혼자 어찌어찌 야수 따위를 잡아가며 50레벨까지는 키웠지만, 그 이후로는 파티 사냥이 필수일 정도로 몬스터가 세져 버렸단다. 게임을 너무 늦게 시작해서 주위에 파티를 맺을 만한 동료는 찾아볼 수도 없고, 별수 없이 그렇게 파티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단다. 나중에 알아보니 충분히 이해가 갈 만큼 난주의 강호 플레이어 숫자는 적었다.

소봉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중을 생각해서 아직 초보 딱지도 떼지 못한 아이지만 처음부터 데리고 다니면서 키워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무공 비급을 제공하고 사냥법도 가르쳐 주면서 스무 날이 지난 지금, 내게 있어 소봉이는 친동생이나 제자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히히! 어때요? 이제 저도 한 사람 몫은 하는 거죠?”

녀석, 겨우 혈랑 한 마리를 제 손으로 잡고선 기분이 살아나는가 보다. 하긴 그동안 레벨이 너무 낮아서 받아먹기만 했던 것이 미안함이 생기기에 충분했겠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 주눅 든 모습이 보기 좋은 건 아니었어.

“그래, 이제 내가 없어도 충분할 거 같다. 꼭 아들놈 장가보내는 것 같네. 하하.”

“연이 형, 장가라뇨? 형 덕분에 이렇게 빨리 크긴 했지만 독립하기엔 어림도 없는 실력이라구요.”

“뭐, 그렇긴 하지. 몇 번이나 말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해주마. 강호는 운이 칠이고, 재주가 삼이야. 운은 경험이 만들지. 명심해둬라. 실력보단 경험이야.”

소봉이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경험이란 아무리 겪어도 항상 부족한 법이니까.

“그래, 그런데 지금 분광검법 몇 성이야?”

녀석에겐 점창의 분광검법을 배우게 했다. 소요파를 도가 계열 문파로 만들려는 게 내 의도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불가 계열로 체질마저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세 사람의 무공만이라도 일관성을 갖게 해야 했다.

“아직 육 성이에요. 육 성부터는 정말 안 오르네요. 어떻게 연이 형은 나한권을 십이 성까지 올리셨는지, 정말 대단해요.”

“그래, 육 성에서 진도가 안 나가네. 각룡이 형하고 소소 누님도 아직 칠 성밖에 안 된 상태고. 문파 기본 무공들인데도 이렇게 더뎌서야……. 흠… 그건 그렇고, 이제 너도 백 레벨이 됐으니까 우리 자리를 좀 옮기자. 나도 육합권을 마저 대성시켜야지.”

“예? 어디로 가시려구요? 전 아직 혈랑 한 마리도 겨우 잡는 수준이라구요! 여기보다 더 센 곳은 감당이 안 돼요!”

“이놈아, 남자가 도전 정신이 있어야지! 걱정 마라. 무식하게 무서운 곳은 아니다. 곧 소요파 개파대전도 해야 해서 돈이 좀 모자란 감이 있다. 무공 비급도 좀 알아봐야 하고.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니 일단 가자. 죽기밖에 더하겠어? 하하.”

우리가 사냥하던 곳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가면 육반산(六盤山)이 나온다. 육반산엔 복우산의 마천채처럼 녹림 72채 중의 한곳인 청랑채가 나온다. 채주는 혈섬추혼 철대광. 소봉을 데리고 간 곳이 그 청랑채였다.

소봉과 함께하면서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된 무림맹 무사를 오랜만에 소환해 순조롭게 청랑채를 쓸어가기 시작했다.

11성에 이른 나의 진결육합권과 이제 한 사람의 몫을 해주는 소봉이까지 가세하니 청랑채 졸개들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한 시간도 안 됐다.

간만에 신나게 사냥을 했더니 기분이 상큼하다.

소봉이는 무림맹 절정무사를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적들을 상대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무림맹 무사를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짜식,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기는.

혈섬추혼 철대광의 성명절기는 창술이었다. 마적처럼 생긴 것답게 산채에서 말을 타고 덤비는 무식한 녀석이었다. 온몸이 시커먼 오추마를 타고 붉은 창을 든 녀석은 꼭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 같았다. 얼굴은 마적인데…….

공격은 참 단순했다. 오추마가 앞발을 들었다가 땅을 내리찍고 그냥 돌진한다. 철대광은 그저 말만 몰면서 타깃이 가까이 오면 창으로 돌려 치고 내려치고 휘돌아 벤다. 딱 3번 공격하고 물러섰다가 다시 좀 전처럼 반복 공격을 하는 식이었다. 수비고 뭐고 없다. 그냥 너 죽고 나 죽기였다. 그런데 그게 더 무시무시했다.

퍼억! 퍼억! 탁! 히이이힝~

정말 단조롭기 그지없는 창법이었지만, 도무지 깰 방도가 없었다. 딱 3번뿐인 공격은 무시하기엔 너무 위력적이어서 어쨌든 최대한 회피와 방어에만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다가 한 대 때려 보려 하면, 바람처럼 도망가 버린다.

망할 말 새끼!

“소봉아, 안 되겠다. 이러다가 절정무사가 먼저 죽어버리겠다.”

또 허공을 향해 육합권을 날려 버리고 소봉이를 불렀다. 소봉이는 한 대 맞고 죽어버릴 것 같아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형!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그냥 포기하고 내려가요!”

녀석, 또 약한 소리 하네.

“야, 소봉아.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포기하면 안 되지. 일단 이리 와봐. 저놈 잡을 방법이 생각났다.”

소봉이가 가까이 오자 호위무사들을 소환했다.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조금 얍삽했다. 말이 도망 못 가게 길 막기.

다시 철대광이 창을 비껴들고 쇄도해왔다. 그가 첫 공격을 절정무사에게 날리자마자 나는 신호를 내렸다.

“소봉아! 지금!”

나는 재빨리 오추마의 정면을 막아섰고, 매난국죽도 오추마를 빙 둘러쌌다. 그리고 소봉이도 한 방위를 막았다.

흐흐흐, 이젠 죽어라 패기만 하면 된다.

철대광은 절정무사만을 인식하는 상태였기에, 우리는 안전하게 혈섬추혼을 요리할 수 있었다. 장력이 난발하고, 소봉이도 분광검을 연신 펼쳐 냈다.

[철대광을 잡았습니다. 명성이 112 상승했습니다.]

“우아! 형, 저 명성 올랐어요! 무려 팔이나 올랐어요!”

에라이, 관도의 산적패를 잡아도 그만큼은 준다.

“그래? 소봉이 대단하네. 이름 가지고 있는 몬스터 잡으면 명성이 올라. 사냥할 때 명성도 좀 신경 쓰면서 하고.”

그래도 112의 명성치면 꽤 괜찮은 편이다. 이렇게 많은 명성치를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니.

역시 녹림채라서 그런지 여기도 보물 상자가 있었다. 몇 가지 아이템을 챙겼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4시간은 더 기다려야 철대광이 출현할 걸 알기에, 무공도 익힐 겸 되살아나는 산적패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떼거리가 아니라 한둘씩 재출현해서 소봉과 내가 사냥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다음 보스 탐을 기다리는데, 또 걔네들을 만나게 돼버렸다. 쟤들 왜 이리 자주 보게 되는 거냐.

“이거 참. 난주 무림계가 좁긴 하지만, 조연 님을 이런 곳에서 또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광풍단의 백무였다. 그리고 역시나 그 1백 명이나 되는 패거리 전부를 몰고 왔다.

이번엔 청랑채인가?

“백무 님, 반갑네요. 그런데 청랑채 토벌하러 오신 건가요?”

일단은 반겨 주고.

“네. 저번 고목문의 경우엔 우리 실력이 너무 모자랐으니까요. 그 일 이후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아무리 봐도 여기만 한 곳이 없는 것 같네요. 그런데 조연 님은 여기서 계속 사냥하고 계셨던 건가요?”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채주는 방금 전에 잡았구요.”

어차피 알게 될 거,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와우! 대단하시네요. 일곱 분밖에 안 되시는 거 같은데 절정급 몬스터를 잡으셨다니. 매번 놀라게 하시네요.”

짜식, 놀라는 척하기는. 네놈 성격이 빈틈없다는 건 고목문에서 전투할 때 이미 다 눈치 챘어, 이놈아. 네 칭찬에 놀아날 생각은 전혀 없다구. 그런데 뭘 그리 두리번거리시나?

“아마 두어 시간 지나면 다시 나올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어떻게 하다뇨? 아, 이번 탐 말씀이시죠? 음… 저만 왔다면야 이대로 물러나겠지만, 보시다시피 백 명이나 와버리게 돼서요. 이해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만.”

흠, 이해 못할 거야 없지. 근데 이 상황에서 이해해달라는 건 뭐지? 왠지 자기들 숫자 많다고 비켜 달라는 말 같잖아.

“이해라……. 이해야 당연히 하지요. 그런데 어느 쪽으로 이해를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네요. 저도 보시다시피 혼자 온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한때 고목문에서 같이 싸웠던 적도 있으니, 우선 이번 탐은 양보해드리지요.”

솔직히 저들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조금 버거운 사냥터다. 상식적으론 먼저 와서 기다린 우리에게 선점권이 있지만, 왠지 조금 즐거운 상상이 떠올라버려서 대기표를 넘겨줬다.

“좋습니다. 한 번 잡으셨다니 다음번에도 충분히 잡으시겠죠. 저희가 껴든 것 같은데도 양보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럼 사냥 계속 즐기고 계세요.”

협상은 끝났다. 백무와 말을 섞게 되면 왜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녀석의 말속에 가득 배인 버터 냄새가 골수에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1백 명이나 되는 광풍단 덕택에 사냥은 거의 불가능했다.

백무 이놈, 그 숫자 데리고 와서 시장 바닥을 만들어놓고 뭘 계속 즐기라는 거야!!

“연이 형, 왜 이번 탐을 우리가 양보해야 하죠? 우리가 이번 탐 뛰려고 철대광을 두 시간이나 기다렸잖아요. 형이 알아서 했겠지만, 조금 이해가 안 가요.”

말해주고 싶지만, 지나가는 광풍단원들이 들을까 봐 차마 말을 못해주겠다.

“그냥… 우리야 뭐 남는 게 시간이고, 저 사람들 백 명이서 여기까지 온 게 얼마나 대단하냐. 신경 쓰지 마. 광풍단 실력 좋으니까, 좋은 구경 하게 됐다고 생각해라.”

말을 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안 풀리는지 소봉인 뭐라고 계속 쫑알쫑알댔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무림계에 자리를 잡고자 난주 무림계 속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이곳은 광풍단을 중심으로 저 백무라는 사내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비록 마음에 맞는 형, 동생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아직 내가 가야 할 꿈속의 그곳은 이젠 손을 뻗는 정도로는 닿지 않는다. 아마도 백무라는 저 사내가 그곳에 더 가까울 테지.

백무만 없었다면, 낙양에서 난주 무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진출했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더 나았을 수도…….

다 부질없는 미련이다. 그때 내 판단엔 무리가 없었다. 지금 당시의 판단을 부정해버리는 건, 그나마 이뤄낸 나의 현재를 부정해버리는 일이다.

“떴어요! 모여 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이 상념을 깨뜨렸다. 이제 시작인가?

“자리 잡으세요! 자리 잡으세요! 빨리빨리 움직여 주세요!”

왁자지껄 소란스러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그 대열이 갖춰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십 조는 생성되는 산적들 담당해주고, 우선 일 조가 막습니다! 모두 전투 중의 대화는 절대 사절입니다. 빠른 어그로(몬스터가 인식하는 플레이어의 위협 수준) 전환이 필요하니, 다음 조는 바로바로 준비해주세요!”

“그럼 시작합니다! 일 조 따라오세요!”

백무가 선두에 서서 철대광에게 가장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검법을 보니 혈랑검법이었다.

우리를 당황시켰던 철대광의 그 무식한 공격이 백무에게 작렬했다.

툭! 툭! 탁!

백무는 시작부터 회피에 주력했지만, 철대광의 3번의 공격 중 2번의 공격은 막아내지 못했다. 특히 제대로 격중된 마지막 휘돌려 베기엔 몸뚱이가 수 장이나 튕겨져 버릴 정도였다.

하얀 백의를 입은 백무가 튕겨져 가는 모습은 허공에서 나려타곤을 시전하는 아름다운 흰 당나귀의 모습같았다. 하지만 백무는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쉽다. 좀 더 엎어져 있지. 보기 좋았는데. 이 좋은 구경 하려고 양보까지 해준 건데. 크큭.

굳이 백무가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아도 광풍단은 알아서 척척이었다. 간부로 보이는 유저들이 이어지는 공격을 백무처럼 전담해서 막아냈다. 그리고 또 희르륵 날아가서 철퍼덕 꼬꾸라지기의 연속. 한번 공격을 받은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를 이탈해서 운공을 했다.

상당히 아팠겠지. 안 맞아봤지만 곁에서 보니 꽤나 아프겠더라.

몇 명은 그렇게 운기 행공을 할 정도로 체력을 남겼지만, 실력이 없거나 운이 없는 사람들은 패대기쳐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결국 데미지는 조금도 주지 못하고 몇 명의 희생자들만 남긴 채 백무가 급히 간부진을 모았다.

아쉽다. 조금만 구경시켜 주지.

백무도 결국 내가 짰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을 했다. 조금 스케일이 크긴 했지만, 앞서 1개 조가 담당했던 것처럼 따로 방어를 담당할 인원을 두지 않았다. 그저 둘러싸고 집단 구타. 그뿐이었다.

바보 무리들. 평소처럼 했으면 몇 명의 손실은 줄일 수 있었을걸.

철대광은 강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도망갈 길만 막고 수십 명이 공격을 퍼부어대면 순식간에 발라당 넘어지고 만다. 그중에 공격을 받은 이들의 희생이 어느 정도 있겠지만, 3연격 이후에 약간 주춤하는 시간이 있어서 많은 희생을 치르지도 않는다.

철대광이 곧 억억하더니 오추마와 함께 쓰러지자, 광풍단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들의 방식은 뭐랄까… 난주 무림의 한계 같기도 하고, 왠지 간부급들에게 이용당하는 모습 같기도 하달까? 고급 무공서를 구하기 위해 무리해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한다고는 하지만, 왜 항상 간부진들은 피해가 없는 걸까? 능력이 좋아서?

능력이 좋아서 살아남고, 능력이 없어서 죽어 나간다면, 이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이야 절정급도 아닌 녀석이지만, 곧 더 센 녀석을 찾아가겠지. 그때도 죽어 나가는 건 광풍단의 약자들일 것이다.

백무가 전리품을 수습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조연 님,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엔 저희가 양보해드릴게요.”

“여보세요, 광풍단주님! 양보라니요? 뭘 양보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애당초 양보해준 건 우리였어요.”

아이고, 이 철딱서니 없는 소봉아! 저 양반은 그렇게 대해선 안 된다구!!

계속 내버려 뒀다간 무슨 소리가 나올지 몰라 얼른 말을 잘랐다.

“이런. 죄송합니다, 백무 님. 이 녀석은 아는 동생인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경우가 없습니다. 말이 거칠어도 이해해주세요. 소봉아, 광풍단주님께 사과드려라.”

이놈아, 말 좀 들어라! 뭘 그렇게 쭈뼛쭈뼛거리는 거야?

소봉은 내가 한참 동안 노려보고 있자, 겨우겨우 백무에게 사과를 했다.

이후가 어떻게 되든, 일단 다음 차례는 우리였다.

광풍단에게 차례가 오려면 앞으로 8시간이나 남았기에, 대부분의 광풍단 유저들이 로그아웃으로 자리를 떠났다. 다만, 백무와 몇몇 간부진들만 우리를 정찰할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사냥터를 찾아가기가 귀찮아서인지 주변에서 산적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쉬엄쉬엄 산적을 잡으면서 묘한 신경전이 지루하게 지속됐다. 무림맹 무사와 호위무사들은 그저 세워두기만 한 채 소봉이와 둘이서 사냥을 계속했다. 솔직히 지금 정도라면 이들의 정체를 들킨다고 해서 별로 큰일도 아니다.

이미 백무는 내가 황금충인 걸 알아버린 후니까 별로 놀라지도 않겠지. 광풍단 간부들도 아마 들어서 알고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백무처럼 잔머리 좋은 녀석이 뻔히 바라보고 있는데 철대광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4시간이 지나자 다시 혈섬추혼 철대광이 출현했다. 굳이 숨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무가 보든 말든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퍽! 서걱! 챙!

역시 광풍단 같은 오합지졸과 급이 다른 우리 무사 형님! 공격에 정통으로 맞긴 했지만 꿋꿋이 자리를 지켜 낸다.

무림맹 무사와 오추마의 첫 격돌이 벌어졌을 때 우린 이미 진형을 갖추었다. 순식간이었다. 철대광이 쓰러지는 데 30초 정도 걸렸으려나? 우리가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광풍단이 부러움과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떨어진 아이템을 수습하는데, 백무가 다가왔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무림맹 무사에게 백무가 말을 건넨다. 하하.

“…….”

대답해줄 리가 없지.

무사는 그저 나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매난국죽도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상태였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서 나도 보고만 있었다.

역시 머리 좋은 녀석이었다. 백무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나 보다. 대광풍단주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는 정체 모를 고수에게 주눅 든 표정에서, 이내 뭔가를 알아차린 듯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실컷 웃어라, 바보야. 네 딴에는 지금 알아차린 게 꽤 빠른 편이라고 자신하고 있겠지. 그래봤자 바보다, 넌. 고목문에서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이거, 이거, 이제야 알아채다니. 제가 모자란 건지, 조연 님이 뛰어나신 건지. 하하하! 그러니까 저기 맹(盟) 표식의 무사가 무림맹의 무사인가요? 그곳밖에는 없겠지요. 낙양엔 무림맹이 있고, 흔히 무림맹의 무사들은 다들 저렇게 ‘맹’자를 표식으로 삼으니까요. 그런데 저 네 사람은 또 누굴까요? 소매의 표식으로 보아선 모두 같은 문파 출신 같은데……. 이번엔 설마 황금산장의 호상단인가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백무야. 내가 꼭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고생해서 알아낸 거라. 설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시겠죠?”

당연한 내 대답에 백무가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길어지는 백무의 침묵이 부담이 됐다.

한참을 골똘히 잔머리를 굴리던 백무가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답을 받았으면 합니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냥 넘어가선 안 될 문제 같군요.”

“무슨 소리죠? 제가 광풍단에 피해를 줬나요?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죠?”

이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조연 님께서 지금 하시는 행동이 딱히 매도당할 일은 아니겠지요. 버그라면 IGM에서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운영진의 입장이고, 지금 조연 님이 활동하고 계신 이 난주의 강호인들이 생각하는 건 또 다르지요. 전 난주 무림인을 대표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정도라면 어쭙잖지만 이런 요구를 해야겠지요.”

흠… 자기 생각이 아니라 난주 무림을 끌어들이는군. 이거 참 머리 좋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기껏 생각했다는 게 무협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정파의 논리랑 다를 바가 없잖아.

“휴, 피곤해지네요. 일단은! 제가 굴러온 돌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피차 피곤하게 머리 굴리지 맙시다. 저 네 명, 제가 있는 문파의 NPC 문도들입니다. 난주에서 가진 돈으로 자그마한 문파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나요? 백무 님도 보아하니 조만간 문파 하나 만들 것 같은데, 그때 되면 저 NPC가 뭔지 알 겁니다. 그럼 피차 똑같은 상황이 되지요. 이해되셨나요? 백무 님도 아시다시피 강호라는 게임은 길고 긴 여행입니다. 제가 지금은 낙양에서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이방인 취급을 받지만, 시간이 흐르면 충분히 난주 무림계에 힘을 보탤 수 있지요. 이렇게 절 몰아세우실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예, 압니다. 그렇겠지요. 이대로 조연 님이 하시던 대로 방치해둔다면 난주 무림계에서 조연 님이 입지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걸요.”

이 자식, 뭐라고 하는 거야!

“이보세요, 백무 님!”

“제 말을 마저 들어주셨으면 하네요. 제가 지금 조연 님의 입장을 고려해본다면, 결론은 뻔하겠지요. 낙양에서 그 많은 유저들의 돈을 빼돌려서 부를 축적시켰다. 그리고 그 부가 제대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난주 무림으로 들어왔다. 난주 무림은 무공 비급도 없고 돈도 없으니, 조연 님의 재산을 증식하는 데엔 이보다 더 좋은 공간이 없겠죠. 한편으론 무공 비급을 풀고, 다른 한편으론 가진 은자를 현금 거래 사이트를 이용해 풀 수 있으니 말이죠. 제 짐작이 틀린 건가요?”

개자식. 네 말이 맞다면, 난 난주에 도착하자마자 그 짓을 해야 했잖아!

“이봐요!”

“마저 들어주세요, 조연 님. 아직 제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령 조연 님이 방금 제가 말한 의도를 지녔다고 해서 특별히 나쁜 짓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저도 현금 거래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조연 님은 돈을 벌고, 난주 사람들은 필요한 사람들끼리 그만큼 강호에서의 위상이 좋아지니까요. 하지만! 지금 난주에서 그나마 유저들이 고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이런 작업장에 조연 님이 관여한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나요? 제 말은 끝났습니다만, 조연 님의 답변이 궁금하네요.”

“흐음… 인정할 부분도 있고, 오해도 있네요. 한 가지만 물어보죠. 절 적으로 삼을 건가요? 백무 님이 대의 운운하는 게 별로 마음에 와 닿질 않아서 말입니다.”

“하하! 조연 님, 바다에선 큰 물고기가 무슨 짓을 해도 알아차릴 수 없지만, 난주처럼 좁은 연못에선 큰 고기가 살 수 없지요. 아직 제 말을 이해 못하시나 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지금 조연 님처럼 NPC를 이용해서 보스급 몬스터를 잡는 건 난주 무림계를 대표하는 광풍단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됐나요?”

그러냐? 결국 이런 식이었냐! 정당한 방법이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난주의 상황을 이용해 날 핍박하려는 것이냐!

“백무 님, 마지막으로 묻지요. 그럼 제가 어찌 해야 할까요?”

“흠…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안 되죠. 난주 무림계엔 애당초 조연 님의 존재가 필요 없었으니까요. 이런 식의 혼란을 일으키는 플레이를 하시려면 난주를 떠나시는 게 가장 좋겠지요?”

크크큭. 개자식.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황금산장에서 갈고 닦은… 아니, 미르에서 겪은 경험이 내 화를 간신히 잡아챘다. 마음 같아선 문파 대전이라도 한바탕 치르고 싶었지만, 한 번의 싸움으로 그동안 쌓은 공을 돌릴 순 없었다.

“좋습니다. 백무 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일단은 이 청랑채 작업장은 양보해드리지요.”

개자식한테 사람 말이 통할 리 없지.

나는 소봉을 데리고 청랑채에서 하산했다. 강호를 하면서 기분이 제일 더러운 하루였다.

육반산을 내려오면서 어딘가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형, 누나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광풍단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회의가 필요했다.

* * *

심난한 마음도 추스르고, 앞으로의 계획을 궁리하느라 경공도 쓰지 않고 천천히 산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진짜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바람에 나뭇잎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산새 소리가 싱그럽게 들려오자 헝클어졌던 마음이 조금은 풀려 가는 것 같았다.

“형…….”

뒤에서 따라오던 소봉이가 부른다.

“왜?”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광풍단이랑 전쟁하는 건가요? 아깐 왜 그냥 물러섰어요? 저쪽은 겨우 일곱 명이었잖아요. 우리도 일곱 명이고, 거기에 무림맹 무사까지 있잖아요. 연이 형이 따로 생각이 있었겠지만, 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광풍단 이야기는 나중에 각룡이 형하고 소소 누님 오면 다시 하자.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아까 상태에서 붙었다면 우리가 필패라는 거다. 우리는 일곱 명이 아니라 두 명이야. 너하고 나. NPC에 불과한 무림맹 무사는 내가 죽으면 바로 사라질 뿐이다. 물러서는 게 최선이었다.”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소봉이의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라? 근데 웬 갈림길이지? 올라올 땐 갈림길 없었는데.

“소봉아, 올라올 때 우리가 어느 방향에서 왔지? 갈림길이네.”

“글쎄요, 전 형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어서…….”

“쩝. 어쩔 수 없지. 보자… 육반산이 난주에서 동쪽에 있으니까, 오른쪽 길로 가면 되겠네.”

그렇게 한참을 가자, 또 갈림길이 나왔다. 이번에도 오른쪽 선택. 그렇게 네 번의 갈림길을 지나쳤다.

“형! 왠지 잘못 가고 있다는 느낌이 머리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네 머리뿐만이 아니다. 내 머리도 그 느낌이라는 녀석이 강타하고 있다.”

아, 이거 복잡해지네. 올라올 때야 갈림길이 같은 방향에서 시작됐으니까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이렇게나 많은데 몰랐을까? 아무리 경공을 시전해서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다. 분명 첫 갈림길에서 잘못 선택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런데 대체 이 미로 같은 길 끝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복잡해?

간만에 황금충 시절의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이유 없이 유저들을 헤매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소봉아, 조금 짜증나더라도 날 믿고 계속 가보자. 강호에서 아직 이런 식으로 미로처럼 만들어놓은 산길은 본 적이 없다. 분명 끝에 뭔가 있을 거야.”

이후로도 모두 오른쪽만 선택해서 3개의 갈림길을 더 지났다. 그리고 결국 길의 끝에 도착했다.

원태조릉(元太祖陵).

“무슨 황제 무덤 같은 건가요? 근데 원태조가 누구예요? 첨 들어보는 사람이네.”

이런 무식한 것.

“칭기즈칸 무덤이다. 나중에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우고 시호를 태조로 추증했고. 그나저나 칭기즈칸은 원래 고향 불칸산에 매장됐다고 하던데……. 하긴 그것도 이야기만 그렇지 아무도 발견 못했으니.”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육반산에 왔다가 여기서 죽었다. 시신을 몽고 기병들이 평소 칭기즈칸이 원했던 흥안령 산맥(興安嶺山脈) 불칸산에 매장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진로상의 모든 생명을 말살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일단 들어가 보자. 보통 이런 데는 기관 장치가 있으니까 조심하고, 내 뒤만 졸졸 따라오다가 내가 죽으면 그냥 소요파로 돌아가라. 괜히 떨어진 아이템 수습하다가 너도 죽지 말고. 알았지?”

경고를 단단히 주고 먼저 앞서 갔다.

사실, 여기에 칭기즈칸 무덤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더구나 세상에 어느 황제가 이렇게 자기 무덤이라고 광고까지 하고 들어갈 입구까지 제공할까? 뭐, 게임이니까……. 어라? 근데 쟤는 왜 안 따라와?

“야! 뭐 해?”

대답도 안 하네. 엥? 입 벌리는 걸로 봐서는 뭐라고 말은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다시 동부(洞府)를 나갔다.

“뭐 하냐? 안 따라오고.”

“형! 제 말 안 들려요? 저 못 들어간다니까요!”

“뭔 소리야. 왜 못 들어가?”

“몰라요. 그냥 안 들어가져요. 무덤 입구에서 벽에 부딪힌 것처럼 안 들어가지던데요?”

이건 또 뭔 상황이야? 나는 잘만 들어가지는데, 얘는 못 들어가고. 또 왜 안에 있으면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 뭔가 자격 제한이 있는 건가?

“알았다. 그럼 일단 나만 먼저 들어가 보마. 대충 둘러만 보고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아니다. 그냥 로그아웃하고 한 시간 후에 다시 보자. 그럼 이따 봐.”

소봉이는 곧 로그아웃해서 접속을 끊었다.

나는 무림맹 무사와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무덤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왠지 바닥을 밟으면 발동이 되는 기관진식 같은 게 있을지 몰라서 무사들을 먼저 앞장서게 했다.

알다시피 무사들은 공격과 후퇴밖에 모른다. 타깃도 없는데 어떻게 앞장을 서겠는가? 호위무사는 언제나 내 사방을 에워싼다. 그러니 한 명은 항상 내 앞이다. 절정무사도 잠깐잠깐 방향을 바꿔주면 앞에 서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식으로 거북이보다 살짝 빠른 속도로 무덤 탐험을 계속해갔다.

쉭! 쉬쉬쉬익!

커억!

[호위무사 죽이 강제 소환당했습니다.]

느닷없이 오른쪽 벽에서 강전(强箭)이 쏘아지더니 호위무사가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좁디좁은 통로에서 벌어진 상황이라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죽이 죽어버리자, 이번엔 다른 호위가 내 앞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기관은 일회용인지, 아니면 시간차를 두고 있었는지 바로 발동하지는 않았다. 나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쉭! 쉬쉬쉬익!

커억!

[호위무사 매가 강제 소환당했습니다.]

매마저 죽어버렸다.

그렇게 한 명의 죽음을 대가로 전진이 계속됐다.

시간이 흐르고 난, 국도 뒤를 따랐다. 이제 남은 건 무림맹 절정무사뿐.

전진 속도는 아까와 비교도 안 되게 더뎠지만, 다행히 절정무사는 강전에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간간이 검으로 쳐내기도 하고, 때론 회피하기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빌어먹을 통로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와우!”

통로를 통과하자 상당한 크기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벽에 달린 유등(油燈)이 곳곳에서 불을 밝히는 가운데, 동혈(洞穴) 네 곳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광장에 아무것도 없는데 시커먼 구멍만 있다 보니, 왠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느낌마저 들었다.

우선 첫 번째 동굴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절정무사를 먼저 앞세우고 뒤따라 나도 어둠 속에 몸을 던졌다.

“아직 그대는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동굴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 앞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굉음으로 정신을 차리기 힘든 몸이 동혈 밖으로 패대기쳐졌다.

“뭐야, 이거!”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뒹굴어진 게 기분이 나쁘다. 그리고 그 기분 나쁜 경험을 이후의 세 동굴에서도 똑같이 당해야 했다.

“아니! 이거 뭔가 힌트라도 줘야 재도전이라도 할 거 아냐. 무슨 열쇠가 필요하다느니, 언제 오라느니 이런 말도 없이 튕겨 내는 게 어딨어!”

말해봤자 들어주는 이도 없다. 이거 정말 아직 개발도 안 된 던전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 괜히 시간 낭비만 한 꼴이다.

에휴… 일단 나가자. 얼추 한 시간이 다 돼가네.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칭기즈칸의 무덤 구경을 하고 소봉과 같이 소요파로 돌아왔다. 형과 누나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광풍단하고 싸우기라도 한 거야?”

“소소 누님, 일단 설명부터 들어주세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둘에게 육반산에서 겪은 일을 한동안 설명해줬다. 거기에 내가 지금 생각하는 소요파의 위치와 광풍단에 대한 판단까지 곁들여서. 둘뿐만 아니라, 소봉이도 그제야 조금 감을 잡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계획대로라면 두어 달 후에 있을 일이 갑자기 닥친 건가?”

“네, 각룡이 형. 두 달 정도면 문도 수도 충분해지니 광풍단 해산시키는 것도 힘든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돼요.”

“흠, 글쎄…….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지금 같아선 새로 문도를 받는다는 게 네 생각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저도 알고 있긴 해요. 그래도 설마 난주의 낭인이 광풍단원들 빼고 백 명도 안 될까요?”

“백 명 안 돼. 문파로 돌아오다가 난주성을 잠깐 지나쳤는데 유저들 씨가 말랐더라. 아무것도 모르고 갓 시작하는 유저들도 없고, 노점도 겨우 몇 명만 열고 있어.”

이건 또 뭔 청천벽력이야!

“각룡이 형, 진짜 백 명 모으기도 힘들어요? 정말요?”

“그냥 가입만 시킨다면야 모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광풍단과 싸울 실력자들은 이제 난주에 없다. 다 떠났지, 저 위로.”

“떠나다뇨? 지금 유저들이 혈랑하고 마적 떼 잡을 수준을 벌써 넘어섰단 말인가요?”

“그런 정도는 아니겠지. 누님이랑 나 정도면 감숙에서 상급의 실력인데도 아직 비풍단 같은 애들을 잡는걸, 뭐. 다만, 굳이 난주까지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거지. 지금 무위가 감숙 무림계의 거점이야. 초보들은 감숙에서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것 같고.”

그러고 보니, 무위에 가본 지 오래됐네. 100레벨 달성하고 그 근처는 얼씬도 안 했으니 한 달 반은 된 건가?

“그럼 문도 영입은 난주가 아니라 무위에서 해야겠네요. 그나저나 두 사람 무공 숙련은 지금 어느 정도나 됐어요? 전 조금만 더하면 육합권 십이 성 될 것 같은데.”

소요파의 입장에서는 두 사람의 무공이 내 무공보다 중요하다. 소요파를 도가 계열의 검파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복마검법이 구 성이다. 그런데 구 성이 된 지 한참은 된 것 같은데 잘 안 오르네. 누님 매화검법은 팔 성이고.”

“와! 그래도 엄청 빠른 편인걸요! 역시 같은 계열의 심법을 배워서 상승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지금도 빠르지만, 그래도 상황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니 한 가지 물건을 더 드릴게요. 장백설삼이라고 양강무공 숙련 속도를 올려 주는 영약인데, 효과가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복마검은 양강무공이 확실해 보이는데, 매화검은 감이 안 잡히거든요. 소봉이가 배우는 분광검은 음유 계열이 확실하고요. 듣기엔 음한 계열은 설지(雪芝)라는 버섯이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하는데, 아직 한 번도 보진 못했네요.”

장백설삼은 이제 5뿌리밖에 남지 않아서, 아직 계열이 확실하지 않은 무공에 쓸 수 없었다. 소림의 무공은 대부분이 양강무공이고, 무당은 음유한 무공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다른 문파들의 무공 성질이 어떻다는 건 들어보질 못했다. 하지만 이젠 하루라도 빨리 무공 등재를 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됐기에, 꼭꼭 숨겨 둔 설삼을 내놓아야 했다.

“그거 비싼 거예요. 꼭꼭 잘 씹어 드세요. 잔뿌리 하나 남기지 말고요. 소봉이는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너한텐 전혀 도움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다들 레벨 업하시면 스탯은 일단 지능에 투자하세요. 오십까지는요. 그리고 언제 쓰일지 모르지만, 근성에 투자하는 것도 고려하고요. 그럼 이제 이야기 마무리 지을게요. 세 사람은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하니까 제가 문도를 영입하러 다니겠습니다. 일단 육합권만 완성시키면 한 달 정도 무위에서 옥문관, 돈황 근처까지 훑어볼게요. 영입될 때마다 본파로 바로 보낼 거니까 소봉이가 접객을 담당해. 그리고 각룡이 형은 누님하고 같이 무위 근처에서 사냥하시면서 만나는 낭인들 영입 좀 해주시고요. 그리고 형은 문도 영입이 가능한 부문주로 승급시켜 드릴게요. 소봉이도 장로로 올려 줄게. 무공 등록을 하긴 해야 하니. 자! 그럼 다들 새로 정신 무장들 좀 하시고 소요파를 중원 최강 문파로 만들어봅시다!”

“야, 나는? 난 뭐 없냐?”

윽! 저 아줌마 태클 걸 줄 알고 후다닥 마치려고 했는데, 기대를 안 저버리네.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잡기 중의 하나인 음공 초급서 하나를 주고 떨궈냈다. 아직 지능이 모자라서 배우지도 못할 텐데.

이틀 후.

진결육합권을 대성했다. 그리고 ‘육합권 심결(心結)’이라는 무공 비급이 자동으로 행낭에 들어왔다.

소요파에 들러 문파 무공으로 나한권과 진결육합권을 등록했다. 내공심법도 같이 등록했으면 좋겠지만, 심법은 정말 안 오른다. 그래도 이번 여행을 다녀오면 심법, 보법, 경공법도 등록할 수 있으리라.

진결육합권은 당주급 이상만 배울 수 있게 설정해뒀다. 수련에 단계를 만들어둬야 문도들이 쉽게 도망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진결육합권의 무공 등록을 마치고 심결육합권을 배우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아직 수련할 조건이 안 됐다는 메시지만 떴다.

레벨이 부족한 건가, 아니면 다른 조건이 필요한 건가? 무공 비급엔 어떤 필요조건도 쓰여 있지 않았다. 심지어 진결의 경우처럼 누가 만들었다는 식의 설명 한 줄 없었다.

난주엔 개방 분타도 없어서 물어볼 곳도 없는데. 달랑 제목만 적혀 있는 이 절정급 무공서를 어찌해야 할꼬.

굳이 만나서 인사를 할 필요도 없어 세 사람에게 전서구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장기간의 여행인지라 만일을 위해 물건들을 꼼꼼히 챙겼다.

한 달간 감숙성을 샅샅이 조사해볼 생각이다. 좋은 인연과 강자들을 만나길 기대하며.

* * *

나는 지금 난주에서 북서쪽으로 천여 리 떨어진 도시, 무위(武威)에 와 있다. 이곳 무위는 한때 이민족의 수도였던 적도 있고, 예로부터 난주와 더불어 감숙성의 대도(大都)였다. 떠나오기 전의 난주와 비교하면 비교적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어제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노점에서 어떤 물건들을 사고파는지 둘러보는 것이었다. 결론은 아직도 낙양의 흑점에서 파는 수준급의 무공 비급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요파의 무공이라면 매력이 충분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접속을 하자마자 주점에 들렀다. 파티를 구하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문파 가입을 권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지금까지 3명의 사람을 소요파의 새 문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모두 고급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말을 더듬거릴 정도로 흥분했다.

다만, 아직 소요파가 있는 난주로 보내지는 않았다. 지금 가봐야 달랑 나한권 하나만이 기다릴 테니 말이다. 나한권이 고급 무공이긴 하지만, 그 수준은 매화검법이나 분광검법 등에 비해 다소 손색이 있었다.

가입한 세 사람이 소문을 퍼뜨린 건지, 옆에서 주워들은 건지 내 앞은 이내 소요파에 가입하겠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조연 님, 저도 좀 가입하면 안 될까요? 백육십 레벨입니다. 제발, 제발 가입 좀 시켜 주세요.”

아, 피곤하다. 지금 줄 선 사람들을 일일이 면접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1백 명은 얼굴을 맞댄 것 같은데, 이놈의 줄이라는 게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인다.

“힘들겠는데요. 자, 그럼 다음 분!”

얼굴이 못생겼다.

강호의 독특한 시스템 중 하나가 게임 속의 행동에 따라 얼굴이 조금씩 변한다는 점이다. 처음 시작 지점과 체질에 따라 골격이 바뀌고, 정파나 상단의 NPC를 사냥하면 얼굴이 흉한처럼 변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착하게 살면 예뻐진다. 이 성형 시스템이 어떤 조건으로 작동되는지 아직 나도 잘 모르겠다.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사람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편하게 강호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난 감숙이라는 이 거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한 얼굴의 사람이 아니면 면담 자체를 거부했다.

“이름은 조자건. 참응도법을 배웠습니다.”

선이 굵은 얼굴에 상처가 몇 개 보인다. 무뚝뚝한 어투만큼이나 조금 험악한 얼굴이지만 눈에 사기(邪氣)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던 사람이다. 별 질문 없이 그 자리에서 가입을 시켰다.

그렇게 몇 명을 받고, 또 몇십 명을 돌려보내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어린 여자 아이와 비파를 등에 멘 노인 한 명이 주점에 들어오더니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별의 순간에

그대가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어

사랑받는 즐거움에 빠져

눈물마저 잊어버렸는데

우리의 만남은 아름다웠지

아무런 결과도 없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

꿈같은 사랑

난 아무런 원망도 없어

작사/작곡:웅미령 노래:진숙화 ‘옹포아(擁抱我)’ 中

노랫소리가 잦아들자, 소녀의 노래에 반주를 타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 만금을 지녔다 한들 사람의 마음은 쉬이 얻지 못하고, 천지를 꿰는 신산의 지혜를 지녔다 한들 지나간 사랑은 되돌릴 수 없어라.”

노인이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자 소녀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말로 대응한다.

“하나의 장작을 만들려면 나무의 결을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 상대를 대함에 있어 언제나 진정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데, 어찌 노해덕은 자신을 감추고 심 소저를 상대했을까요.”

“사랑은 부질없고, 지나간 사랑은 아픔밖에 남지 않네. 하물며 듣기에 좋지도 않은 남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꾸나. 진진아, 그나저나 오늘은 강호인들이 제법 많으니 좀 더 재미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너는 황금산장의 장주 금적산 노해덕이 중원 제일의 갑부란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황상께선 중원 만물의 소유자지만, 그 만물을 움직이는 이는 금적산이라. 강남북 마흔여덟 개 지부를 거느리고, 중원 대소상단의 연합체 명상회(明商會)의 태상두인 그를 어찌 모르겠어요. 다만 할아버지의 말엔 약간의 어폐가 있네요. 금적산이 비록 드러난 사람 중엔 재물이 가장 많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흑점 주인이 더 큰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무시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가끔 주점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저렇게 이야기를 파는 매담꾼들이 등장하곤 한다. 보통은 재밌는 강호기사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느 마을의 총각이 그 마을의 지체 높은 아가씨를 사모해 야반도주하다 다리몽둥이가 부러졌다는 등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어린 소녀를 대동하며 그럴싸한 노래까지 부르는 매담꾼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구나 한때는 친하게 지낸 사이인 금적산의 이야기가 나오자 흥미가 솟았다.

“그래, 진진 네 말대로 흑점주란 사람의 이야기는 이 늙은 할아비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때때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비록 흑점의 지배인이 금적산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그 신비함이 크긴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스갯소리로 넘겨 버린단다.”

“음… 듣고 보니 할아버지의 말씀이 맞겠지요. 흑점 주인은 드러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당금 강호팔룡이라고 불리는 인물 중에 금적산의 최고 심복이었던 황금충이라면, 그 재주로 보아 금적산이 쌓아오던 부의 명성에 약간의 흠집을 낼 수준은 되지 않을까요?”

“하하하. 진진아, 황금충이란 인물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가 비록 큰 이문을 취하긴 했지만, 금적산의 배경이 아니었으면 그리하지 못했을 터. 아들의 선행이 부모의 명예를 높이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이겠느냐.”

“할아버지! 그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말씀처럼 그런 유리함이 있기는 했었겠죠. 하지만 두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지겠어요? 어찌 여러 황금산장의 일꾼들 중에서 유독 황금충만이 큰 이문과 명성을 얻었겠어요? 비록 지금 그 행적을 알 순 없지만, 어딘가에서 황금충은 금적산을 넘어설 비책을 만들고 있을 거예요.”

한참 설전을 거듭하던 두 노소(老小)는 여기까지 말을 하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는 좌중을 한바탕 훑어봤다. 뭐랄까? 재미난 미끼를 던지기 전에 하는 의례적인 행동이랄까?

“더구나 최근의 풍문에 의하면, 강호팔룡 중에서 세 마리의 용은 감숙에 웅크리고 있다고 하잖아요? 다른 흑백룡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돈밖에 모르는 황금룡이 감숙에 터를 잡았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거예요!”

헉! 저, 저… 꼬맹이가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이야! 내 비록 돈 자랑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매일매일 돈 꿔달라고 사람 찾아오는 건 질색이단 말이다! 그런데 저 꼬맹이는 왜 날 보고 있는 건데? 망할 NPC 같으니! 이러다가 곧바로 내 정체까지 까발리는 거 아냐?

아니다! 저 NPC는 분명 나를 알고 있고, 나를 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런 정도의 계획을 꾸밀 수 있다면, 나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시오, 진진 낭자. 소저의 이야기에 큰 재미를 느꼈소. 하지만 조금 이상하게 느끼는 점이 있는데, 내 생각을 들어볼 의향이 있소?”

“저는 다른 이의 말을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처럼 잘 들어준답니다. 공자께서 궁금하신 점이 있다면 어떤 사심도 없이 답변해드릴 용의가 있어요.”

“황금충이라는 낙양의 그 사람은 바깥세상에서 이름을 얻게 된 걸로 알고 있소. 그런데 어떻게 소저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가 첫 번째 의문이고, 두 번째는 강호팔룡 중 세 명이나 되는 인물들이 이 척박한 감숙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들이 누구요?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 이미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소만?”

첫 질문은 두 사람의 정체를 묻는 것이었고, 이후 질문은 목적을 묻는 질문이었다. 과연 이해가 될 만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진진의 귀여운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새겨지더니, 이내 원하던 답을 들려주었다.

“공자께선 강호를 잘 알고 계시네요. 하지만 명성을 얻고 별호를 얻는 행위가 모두 강호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랍니다. 간혹 예외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생겨나면 언제든 강호 속에 적용을 시킨답니다. 강호팔룡이란 후기지수들이 모두 그렇게 생겼죠. 이걸로 첫 번째 의문이 풀리셨길 바랄게요. 그럼 이제 두 번째 질문도 답해드릴게요. 먼저, 난주 광풍단의 단주님이신 백무 님이 강호팔룡이랍니다. 다른 일곱에 비해 조금 손색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실력만으로 정상에 오른 실력자죠. 두 번째는 현재 강호 최강자인 사황성의 흑룡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지금은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말을 끝내면서 날 보며 살짝 눈웃음을 짓는다.

진진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광풍단의 백무야 그 활약상을 모르는 이들이 없으니 강호팔룡에 들어간 게 그럴듯했고, 황금충의 소재야 드러나면 피곤해질 소지가 많아서 밝히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황성은 또 무언가? 아직 감숙에 사황성이라는 집단이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보질 못했다. 더구나 그 사황성의 흑룡이란 사람이 현재 강호 최강의 실력자라니! 그렇다면 백무보다 더 강한 경쟁자가 아니겠는가.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진 게 아니었던지, 내게 퇴짜를 맞긴 했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황급히 주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마 강호팔룡의 하나라는 백무나 사황성의 흑룡을 찾아가는 것이겠지. 지금보다 더 소문이 퍼진다면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소란함이 조금씩 가라앉아 가는데 진진과 노인은 떠날 기색이었다. 왠지 이상했다. 분명 어떤 이유로 인해서 온 인물들인데 왜 이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걸까? 내게 단지 사황성 흑룡의 정체를 알려 주려고 왔던 것일까? 왜? 무엇 때문에 그런 호의를?

앞서 약간의 대화로 저 사람들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도무지 답을 찾기 힘들었다. 분명 보통의 NPC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예전 낙양 흑점에서 봤던 당빈이라는 IGM의 직원 냄새도 났다. 그렇지만 남들이 보고 있는 데서 운영자냐고 물어보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젠 물어볼 시간조차 없었다. 진진과 그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고 일어나더니 주점을 거침없이 나가 버린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 급하게 절 찾는 전서구가 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의 면접이 불가능할 것 같네요. 내일 이 시각에 다시 오겠으니 소요파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그때 또 뵀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후다닥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내일을 기약하고는 나도 주점을 나갔다. 다행히 두 사람이 저 멀리 건물 모퉁이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서둘러 뒤따라 달려갔다.

“이보시오, 진진 낭자!”

방금 주점에서 1백 보가량 떨어진 건물의 모퉁이에서 진진을 불러 세울 수 있었다.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듣고 두 사람이 이내 발걸음을 멈추더니 날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연 공자.”

그렇게 웃지 마라, 진진아. 꼬맹이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진진의 말 때문에 망태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가 돼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진진 씨, 진짜 정체가 뭐요? NPC는 아닌 것 같은데, IGM의 사원인가요?”

“음… 인사를 드리지요. 전 NPC도 아니고, 개발사 직원도 아니에요. 일종의 개발사 아르바이트생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맞겠네요. 깔깔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는 행동으로 봐선 아르바이트생과는 너무 거리가 먼데. 그리고 요 꼬맹이가 누굴 보고 깔깔거려!

“좋아요. 당신 정체에 대해선 일단 넘어가기로 하죠.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데 내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던데, 왜 그냥 나가 버린 거지요?”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고, 용건이 있으니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저 주점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구요.”

“에? 주위에 사람이 있어서 말을 못 꺼낸다면, 귀띔이라도 해주던가!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면 되는 일이잖아요!”

“그건 너무 쉽잖아요! 기회란 구하는 자에게만 온다고 아까 눈치 줬었는데.”

진진은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마치 날 조롱하듯이 말했다.

“기회라니? 진진 씨, 대체 바라는 게 뭐요?”

힘들여 얻은 행운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란 언제나 불운의 전조일 뿐이다. 진진은 말을 잘못했다. 난 어수룩한 놈이 아니다.

“황금충 나으리, 머리 굴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기회가 맞아요. 이런 행운은 절대 쉽게 오지 않는 거라구요. 그 기회를 얻고 싶다면 절 따라오세요. 싫으면 안 따라와도 돼요.”

진진은 노인을 앞장세우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로 기회일지, 예고된 불운일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경험을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는가. 답은 간단했다. 내 몸은 어느새 진진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왜 이 동네 비밀 장소는 전부 건물 뒤편에 있는 거야?’

우린 건물 뒤편의 조그마한 문을 열고 하나씩 안으로 몸을 던졌다.

이 건물의 용도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사용 건물이었다. 유저도, NPC 캐릭터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진진과 노인은 익숙한 듯 앞서 나가더니 건물 중앙에 이르러 멈춰 섰다. 그리고는 바닥의 널빤지 하나를 들어올렸다.

널빤지 하나를 들어내자 한 사람은 거뜬히 빠져나갈 구멍 하나가 생겼다. 또 다른 비밀 통로인 셈이었다.

간신히 구멍을 통해 암흑 속으로 떨어졌지만, 어느새 어둠은 사라지고 눈부신 햇살이 가득한 죽림(竹林)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푸른 청대나무가 울울창창하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진진과 노인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듯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날 여기로 데려오는 게 그들의 임무였던 건가?

댓잎이 수북이 떨어져 있는 소로(小路)가 눈에 띈다. 소로를 따라 죽림을 거닐었다. 바람이 대숲을 한 번씩 쓸고 지나갈 때마다 이파리가 한두 개씩 허공에 뿌려지는 모습이 운치 있었다.

대숲은 크지 않았다. 그리고 저 앞에 곱게 기와를 얹은 조그만 정자가 연못가에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신기하게 그 정자에서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있었다. 강호 생활을 한 지 벌써 몇 달째인데,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을 오늘만 두 번이나 듣게 되다니.

세심정(洗心亭)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에선 아까의 진진이란 꼬마와 친자매라고 해도 될 만큼 똑같은 차림을 하고 똑같은 얼굴을 한 여인이 앉아 얼후(二胡)를 연주하고 있었다.

즐겁게 이야기했었죠

삼 년간 보지 말자고요

우리의 사랑은 시간을 머물게 할 수 있다고

그댄 웃으며 말했어요

이게 우리의 시험이라고

우리의 약속

그렇게 삼 년이 지났네요

그리고 난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전 기억해요, 우리의 약속을

전보다 훨씬 더 당신을 사랑해요

바람을 맞으며 웃었죠

바람은 꼭 당신께 말해줄 거예요

제가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됐다는걸

(說好的 三年不見面 用我們的愛把時間留住

훏笑著說 這是我們的考驗 我們的約定

就這樣 三年又過了 我還是回到這個地方

我會記得 我們的約定 我比以前還更愛훏了

迎著風我也笑了 ?一定會告訴훏的 我更愛훏了)

-작사/작곡/노래:광량 편곡:진건기 ‘약정(約定)’ 中

흰 배꽃 무늬가 점점이 박힌 붉은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흑단 같은 머리를 한번 말아 올려 늘어뜨린 고혹적인 자태가 마치 선녀가 강림한 듯하다. 월궁의 항아가 내려온 것일까? 왕소군이 현세에 돌아와 한마디 금을 타는 듯했다.

그렇게 내가 물끄러미 여인의 미색에 취해 바라보고 있는데도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르던 노래를 계속했다.

한참 옥음에 취해 미풍에 취해 그렇게 나를 잊은 채 망중한을 보내는데, 어느 순간 음악이 끊겼다. 멋쩍은 기색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입가에 엷은 미소를 담은 채 내게 인사를 건넨다.

“어서 오세요, 연 공자.”

“객을 청하는 방식이 어디선가 본 듯하네요. 제게 옥피리가 있었다면 소오강호지곡을 합주하고 싶어지는걸요. 하하.”

“호호호. 제가 좀 예쁘긴 하지만 임영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답니다.”

받아치는 말이 재밌다. 아무리 봐도 직접 사람이 플레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호의 인공지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수준의 대화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소개를 하지요. 진진이라고 합니다.”

엥? 왜 다들 이름이 진진인 것이야? 강호 개발자들의 작명 센스가 한계에 이른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꼬마와 이 아가씨처럼 가까운 관계인 사람에게 같은 이름을 준다는 것은…….

“연 공자, 힘들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 애가 저고, 제가 그 아이니까요.”

빙긋 웃으며 진진이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대답을 했다.

그런데 무슨 말이지? 진진이라는 여인의 말이 맞다면, 굳이 서로 다른 캐릭터를 운용할 필요가 있을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는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만 있었는데, 일어선 모습은 기품까지 더해져 마치 빛나는 석양의 노을을 보는 것 같았다.

현실에서 이런 여자를 본다면 잔뜩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겠지.

정자를 나가려는 그녀를 잠시 불러 세웠다.

“진 소저,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절 데리고 왔던 꼬마애가 지금 진 소저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두 캐릭터를 한 사람이 다룬다는 뜻인가요? 그렇다면 굳이 캐릭터를 둘로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진 소저가 직접 날 보러 와도 되잖습니까?”

진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보니 겁나게 이쁘긴 하네.

“연 공자, 연 공자도 지금 보고 알다시피 제가 한 미모 하잖아요? 미인은 그림 속에 숨어야지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공자는 만나야 하고 제가 직접 만나러 가지는 못하니 어쩌겠어요. 이해되셨으면 이제 공자를 초대한 이유를 알려 드릴게요. 잠시만 따라오세요.”

당신 정도의 미인이 주점에 들어온다면 너무 소란스러워지겠지. 그래서 뚝딱 캐릭터 하나를 만들어서 보냈다? 하나의 캐릭터를 만든다는 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일까? 말 한마디를 더 들을 때마다 점점 알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네.

진진은 세심정에서 대숲을 등진 방향으로 날 이끌고 걸어갔다. 정자가 아스라이 보일 정도의 거리까지 가자, 널찍한 마당을 가진 작은 초옥을 볼 수 있었다.

“다 왔어요. 연 공자, 일단 앉으세요.”

오늘은 정말 신기한 경험을 많이도 해본다.

우린 대청에 올라가 마당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항상 무언가를 향해 쫓기듯 바삐 게임을 하다가 이렇게 가슴 떨릴 정도의 미인과 바짝 붙어 시간을 보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렇게 앉아 있자니 여인의 향기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연 공자, 미인과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으시겠죠? 강호는 정말 좋아요. 그런 꿈같은 일도 가능하게 해주니까요. 호호.”

“진 소저 같은 미인은 이야기를 나눠보기는커녕 실제로 본 적도 없답니다.”

정말 미인이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 게임 속에서만일지라도 이렇게 즐거운 대화가 가능한 미인이라면 몇날 며칠이라도 이대로 있고 싶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는데, 진진이 먼저 침묵을 깼다.

“다른 사람들은 잘만 찾아오는데, 연 공자는 아주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어요. 시작은 조금이었겠지만, 어쩌면 이젠 늦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무슨 소리죠?”

“이렇게 강호팔룡을 초청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앞서 넷은 절 만나고 팔룡의 일원이 됐고, 뒤의 셋은 스스로 절 찾아왔거든요. 마지막 손님을 받은 지 벌써 스무 날이나 지나버렸어요.”

진 소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게 다들 자기 발로 찾아와야 하는 일이란 게 무엇이고, 왜 나만 강호 시스템이 직접 개입한단 말인가?

“한동안은 계속 기다릴 생각만 했지요. 감숙의 다른 두 사람이 저를 찾아왔으니 공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시작부터 잘못됐더군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마치 비사(秘事)라도 들려주듯이 진진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강호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간혹 혼란이 올 수도 있지요. 아직 불완전한, 아니 아무런 대비도 없이 시작해버린 셈이니까요. 지금 그걸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사람마저도 희망이라는 착각에 빠져 앞일에 대한 대비가 없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근본적인 결함이란 건 또 뭐고, 대체 그 혼란이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 겁을 주는 건가. 그래봤자 겨우 게임 속의 이야기일 뿐인데,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딨을까?

내용과는 달리 무심한 듯 나지막이 마당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던 진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말을 이었다.

“제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죠. 후우…….”

한숨이라……. 잠깐은, 아주 잠시 그녀의 한숨에 나를 잊었다. 하지만 곧 모르는 이의 여행에 동참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말을 듣자니 바깥세상의 한 명은 당신이 아닌 것 같군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젠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군요. 전 모든 문제는 소통에서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말을 멈추고 진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마치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고민을 하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우리는 적막이 주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은 채로 있었다. 고즈넉함이 어색함으로 변하기 전에 그녀가 복잡한 느낌을 주는 눈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깨주었다.

“제가 연 공자를 찾은 이유도 그런 이유겠죠. 알면서도 항상 여유를 두고 행동을 하지요. 고마워요. 공자가 세심정에서 저를 보고 소오강호지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하셨죠. 소오강호라… 후후, 사람만이 느끼겠죠. 정말이지 저는 아직 먼 듯해요.”

잠시 동안의 착각은 산산이 깨져 버리고, 확인된 사실만이 주위를 배회했다.

짐작대로 진진은 강호 안의 저 NPC라는 생명 없는 프로그램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던가. ‘아니! 단순한 코드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난 인공지능을 인간처럼 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또 다른 혼란을 몰고 왔다.

내가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내 착각이 아까워서? 아니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이 여자를 인정하지 못해서?

“전에 친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죠. 원래 소통이란 건 없다고요. 그런데 우스워요. 흔히들 말이란 건 하면 할수록 해를 끼친다고 하면서, 왜 말을 하라고 하는 걸까요? 연 공자의 질문엔 대답을 드리지 않겠어요.”

처연하게 말을 이어가던 진진의 마지막 말투가 숨을 막히게 했다.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그녀는 다짐하듯이 말을 토해내더니 갑자기 일어섰다. 나는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해서 바라보기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 공자는 지금부터 제가 주는 퀘스트를 해결해야 공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나갈 수 있어요. 실패는 없어요.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도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야 그녀가 처음의 목적으로 돌아온 듯하다. 시원하면서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에게 너무 끌려가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손을 한 번 휘젓자 초옥 앞에 자리한 마당에 갑자기 몇몇의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도사의 복장을 하고, 또 다른 이는 소림의 승려인 것처럼 한쪽 어깨를 드러낸 가사를 입고, 또 누구는 녹림의 산적인 것처럼 호피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 제각각 행색을 달리한 채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기만 했다. 진진의 수하들인가,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시작하세요.”

진진이 마당 앞에 시립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짧은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서로를 향해 매서운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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