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고목문(枯木門)
감숙 고목문의 유래는 오래되지 않았다.
원영(元靈)을 단련시키는 수련을 하던 도사가 있었다. 도교의 헤아릴 수 없는 방술 중에서 그는 이 원영 수련을 통해 불사지신이 되기를 바랐다.
단지 거기에 그쳤다면 이 고목문이라는 문파가 그저 그런 도교의 일맥(一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겠지만, 그에게 두 사람이 찾아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한 사람은 삼국시대 명의 화타의 의맥(醫脈)을 이어오고 있던 새화타(塞華陀) 갈충이었고, 다른 한 명은 명대(明代)에 이르러 이제 흔적조차 찾기 힘든 남소림(南少林)의 외문무공을 계승하고 있던 금강신(金剛身) 보월이었다. 세 사람의 꿈은 모두 같았다. 바로 불사(不死), 한 가지. 그러나 어디 신선이나 부처가 아닌 다음에야 인간의 노력으로 어찌 불사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들은 불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한 줌 강호의 풍진으로 스러져 간 지 50여 년이나 지났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는 제자 고목 존자에 의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목문은 바로 그런 불사의 꿈을 좇고 있는 난주의 사도 문파 중 한곳이었다.
그리고 은소소가 조연을 데리고 간 그곳이기도 했다.
* * *
우리는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이동했다. 괜스레 왠지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에 말 한마디 않고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시체가 나오는 마을을 정중앙에서 그대로 돌파했다. 경공을 시전해서 재빨리 이동하긴 했지만, 그 안에 바글바글거리는 시체들의 손길은 매서웠다. 다행히 빠르게 이동해서 별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렇게 빠져나온 마을 북쪽은 양옆이 숲으로 우거진 언덕이었다. 일종의 높지 않은 완만한 계곡. 시체 마을은 계곡의 입구를 막고 있었던 셈이었다.
다행히 마을 북쪽, 계곡 초입은 특별한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공터였다. 거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은소소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긴장해. 정말 조심하라고. 여기서부턴 저런 썩은 시체가 아닌 제대로 된 강시가 나오니까. 위험하면 우리도 너 모르는 셈 칠 거야. 너도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죽어도 책임 못 진다. 알았지?”
진짜 강시 잡으러 왔나 보다. 강시라면… 원래는 영환 도사님이 아니면 못 잡는 절대고수가 아닌가? 그래도 잡을 만하니깐 여기까지 데려왔겠지? 일단 계속 가보자구. 그래봤자 한 번 죽기밖에 더하겠어?
하지만 내가 처음 만난 몬스터는 강시가 아니었다. 고목문(枯木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대문을 앞에 두고 우린 고목문 제자, 사람을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은소소가 거리낌 없이 검을 날렸다. 입구를 지키던 고목문 제자가 둘뿐이라서 다행이었다. 은소소가 한 명을 맡았고, 독각룡이 또 한 명을 맡았다. 그 틈에 끼어 나도 나한권을 시전했다. 하도 겁을 줘서 아직 숙련이 안 된 육합권을 버리고 나한권으로 바꿔둔 상태였다.
제자들은 무림인이라고 말할 수준도 못 됐다. 거의 일반인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임무 하나는 제대로 했다. 나로서는 너무 익숙한 소리였다.
땡땡땡땡!
“적의 침입이다!! 적의 침입이다!!”
땡땡땡땡땡!
경보 소리가 울리자마자,
“야! 도망가, 빨리! 마을 밖으로 도망가!”
나도 그 정도쯤은 안다. 벌집 건드려 놓고 그 자리에 있을 바보가 어딨겠어? 나도 경험 많다구.
그렇게 고목문이라는 벌집을 한번 쑤셔 놓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 앞엔 온갖 강시들과 고목문 제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파란 강시, 빨간 강시, 만들다 만 강시. 가지각색이었다. 역시 몬스터 종류가 이렇게 좀 다양해야 사냥할 맛이 나는 법!
“누님, 형님, 그럼 이제 강시 요리를 시작해봅시다!”
호기롭게 외쳤으나,
“너나 요리당하지 말아라.”
핀잔만 들었다.
강시들의 숫자는 대략 고목문 제자들의 수자랑 엇비슷했다. 고목문 제자들의 손에는 피리, 방울, 검 등 가지가지의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아마 저들이 강시를 조종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물건을 들고 있는 제자들만 제거하면 강시는 허수아비가 되는 건가?
일단은 여느 때처럼 독각룡이 강시 몇 마리를 데리러 앞으로 달려갔다. 살살 조금씩 거리를 좁혀 가서, 약간의 반응이 보이자마자 다시 원래 자리로 도망쳐 왔다. 그런 독각룡을 따라서 몇몇 고목문 제자들이 강시들을 조종해서 우리를 공격해왔다.
크아악!
이건 확실히 앞서 사냥한 시체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대충 거리가 3장쯤에 이르자, 강시가 그 거리를 한순간에 좁히며 쇄도해 들어왔다. 더구나 그 공격마저도 유치한 목 물어뜯기 따위가 아니었다.
얼굴이 새파란 청강시 하나가 내 머리통을 노리고 푸르스름한 기로 덮인 수도를 내리쳤다. 간신히 불영보를 시전해서 그 순간은 모면할 수 있었지만 다시 올려치는 강사의 발길질에는 복부를 걷어차이고 말았다.
무슨 강시가 관절 공격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머릿속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공격력이 너무 셌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내 체력 5분의 1이 날아가 버렸다.
재빨리 일성소를 외치고 검진마저 발동시켰다. 이젠 다른 청강시 한 놈까지 내게 달라붙었다. 공격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간신히 증가된 방어력과 회피를 믿고 연신 불영보만을 시전했다.
불영보는 소림의 독문보법인데, 보법은 일단 발동만 시켜 두면 저절로 작동하는 패시브 기술이다. 나한권이나 육합권도 타깃을 정하고 공격만 하면 저절로 초식이 전개되는 패시브 기술이긴 하지만, 보법처럼 완전한 패시브 기술은 아니었다. 적이 공격을 하는 타이밍에 적절히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회피는 전혀 되지 않는다. 나름대로 시간을 재며 상대의 공격의 틈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강시들의 공격에 혼쭐나고 있는 동안 내 체력은 3분의 1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검진과 음공의 시전 효과마저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버프 받았다는 표식인 아이콘 2개가 깜박거리며 내 사망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쥘쥘… 괜히 오자고 했네.
짧은 찰나, 오만 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어라? 강시가 멈췄다.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은소소와 독각룡이 다가왔다.
“어쭈? 죽을 줄 알았는데 용케 버티네? 호호호. 하여간 대단한 초보라니깐.”
이 양반들이!! 같은 파티원이 다 죽어가도록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오는 거야?
“응? 뭐 하다 왔냐고? 뭐 하다 오긴, 저 강시들 멈추게 했잖아. 네 눈엔 안 보이냐?”
역시나 강시들은 조종하는 고목문 제자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왜 항상 내 짐작은 맞기만 하는 걸까?
“그럼 이 강시들은 이제 죽은 건가요?”
독각룡에게 물었다.
“아니. 이제 죽은 게 아니라, 원래 죽은 놈들이지. 너 설마 그것도 몰랐냐?”
“쩝. 그게 아니라!”
“크크크. 알어, 알어. 네 말대로 강시들이 죽었다면 아마 땅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있어야지, 이렇게 서 있겠냐? 그냥 이제부턴 줄창 패기만 하면 돼. 거의 무관에 있는 허수아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무공 숙련치 올리는 덴 짱이지!”
독각룡 말대로 강시 녀석들은 허수아비가 레벨 250 정도 된 느낌이었다. 한 마리 죽이는 데 셋 모두 내공이 전부 소진돼서야 끝이 났을 정도였다.
줄창 강시를 상대로 무공을 난사해대니 무공 숙련치가 잘 오르긴 했다. 왠지 모르게 또 하나의 기발한 생각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저기 누님, 형님,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한 명이 강시를 잡아두고 그사이에 다른 두 사람이 강시 조종하는 고목문 제자를 제거해야 하잖아요?”
“잘 아네. 그런데?”
“그런데 지금 보시다시피 제 수준으로는 두 마리 상대로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라고요. 세 마리면 바로 사망이죠. 거기다가 아까는 한 시간짜리 잡기 써서 간신히 버틴 거구요. 한마디로 이제 한 시간 동안 못 쓴다는 거죠.”
“나도 알아. 너한테 이 동네가 얼마나 무서운지 겁주려고 데려온 거다. 이제 정신 좀 차렸을 테니 아까 그 시체 밭에서 한참 더 뒹굴러 가야지.”
“아뇨. 제 말은요, 여기 사냥하기 괜찮은데요? 지겨워질 때까지 여기서 했으면 하는데요.”
“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말대로 우리 여기서 더 이상 못 버티잖아. 아무리 강시들이 무공 숙련치 올리는 덴 좋다고 해도, 수준이 맞아야 여기서 사냥을 하지!”
“지금 우리 수준으로는 그렇지만, 제가 아는 형님이 한 분 계시거든요? 그 형님이 레벨이 좀 높으시니깐, 여기로 와서 몸빵 좀 시키죠. 제 말이라면 잘 들어주시거든요.”
“그러면 좋지만… 그런데 민폐가 아닐라나? 그 형님이라는 분도 레벨 업해야 하지 않겠어?”
“요새 레벨 업 지겹다고 맨날 딴 짓 하러 다녀요. 며칠 저 도와주겠다고 했으니깐 괜찮을 거예요. 난주 근방에서 논다고 했으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한 오 분이면 오실 거예요.”
그렇게 은소소를 달래놓고 무림맹 무사를 부르러 갔다. 잽싸게 시체 마을을 통과해서 한적한 곳에 이르자 ‘우리 형님’이 오셨다. 이 형님 이름은 사기친(司奇親)이란다. 그럼 형님 소개를 하러 가볼까?
우선, 사기친을 방어형으로 바꿨다. 괜히 공격을 해서 강시를 일 검에 도륙하는 만행을 못하게 말이다.
적당히 시간을 지체한 뒤 형님을 데리고 가 은소소 앞에 멈췄다.
“누님, 형님, 소개드릴게요. 기친이 형님이라고, 검법 고수입니다. 게임에 관한 한 거의 천재죠. 저도 모르는 요상한 꼼수를 상당히 많이 알고 있는데 절대 안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깐 질문은 절대 하지 마세요. 기분 나쁘면 그냥 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도 극히 꺼리는 스타일이니깐, 아예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냥 사냥 도와주러 온 고수라고만 생각하세요. 대충 형님한테 어떻게 사냥할지는 말해뒀으니까요. 그럼 각룡이 형, 이제 시작해보죠. 얼른 강시 데리고 오세요. 강시는 형님이 맡을 거예요.”
나는 소소 누님과 각룡이 형이 우리 기친이 형님한테 인사라도 할까 봐 얼른 공격부터 시켰다.
미리 말을 해둬서인지, 아니면 정말 고수라서 위축된 건지는 몰라도 각룡이 형이 아까처럼 강시를 데리고 왔다. 이번엔 3마리였다. 강시 뒤로는 3마리의 고목문 제자가 방울, 피리 따위를 들고 따라왔다.
적당히 달라붙었다고 생각되자, 사기친을 강시에게 붙였다.
“기친이 형! 저쪽 놈부터 공격해요. 옳지! 그리고 이제 저놈이요.”
한 마리 찌르고, 다음 타깃 정해서 또 한 마리. 이렇게 3마리를 붙여 놓고 나도 고목문 제자들에게 나한권을 가격했다.
아까는 강시를 상대하느라 고목문 제자가 어떻게 싸우는지 볼 수 없었지만, 자세히 보니 싸움 방식이 독특했다. 피리를 불고 있던 녀석은 피리를 사용해서 검법 비슷하게 공격을 해댔고, 방울을 든 녀석은 방울을 유성추 날리듯이 휘둘렀다. 다행히 강시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하긴 강시만큼 강력했다면 은소소가 날 데리고 이런 험한 곳에 올 이유도 없었겠다.
그렇게 마지막 강시술사를 없애자마자 또 한 번의 연기를 해야 했다.
“형님! 이제 그만요. 후퇴하세요. 이제 우리가 잡을게요.”
사기친은 통나무처럼 뻣뻣이 굳어버린 강시를 내버려 두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몰래 얼마나 체력이 소모됐는지 소환 상태라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명령어는 미리 바꿔놓지 못했다. 좀 이따가 쉴 때 몰래 바꿔야지.
한동안 이런 식으로 편안한 사냥이 계속됐다.
서너 번의 사냥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자, 역시나 은소소가 낌새를 챘나 보다. 마지막 강시를 쓰러뜨리고 나자 은소소가 물었다.
“조연아, 근데 왜 그쪽 형 되는 사람은 말을 한마디도 안 해? 과묵하다고 미리 듣긴 했지만, 귀신이랑 비슷한 것 같네? 그리고 왜 파티하자고 신호를 보냈는데도 무시하는 거지? 이건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컥! 파티 의뢰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네.
머리가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누님, 잠시만요. 이 형님이 다른 분들하고 이야기 안 하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파티 사냥에 대해서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일단 시간을 벌어놓고 사기친을 데리고 말이 퍼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걸어갔다.
음… 대략 1분간 뭐라고 말하는 척만 했다. 물론 실제로 사기친한테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단지 소환무사 명령어의 ‘후퇴’만 ‘그만’이라고 바꿨을 뿐이다. 후퇴라는 말은 어딘지 어색했으니까.
아차! 소환 상태창 오픈도 바꿔야지.
“아, 형님이 아까 그건 죄송하다고 하시네요. 사기친 형님, 은소소 누님한테 죄송하다고 말씀하세요.”
“죄송합니다.”
“네. 뭐, 파티하기 싫다는 데야 어쩔 수 없죠. 더군다나 우리가 도움받고 있는 입장인데 괜찮아요.”
은소소 성깔로 봐서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이놈 저놈이 난무했겠지만, 공짜로 경험치 먹는 입장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겠지. 그래도 죄송하다는 말은 할 줄 아네? 안 통했으면 또 무마하느라 애먹을 뻔했다.
“형님 말로는 지금 자기 레벨에 파티해봤자 경험치도 안 준대요. 더군다나 강시 상대로는 무공 숙련치도 안 오르고요. 괜히 자기 레벨 알려 주기 싫어서 그냥 따로 있겠다네요. 누님이 이해하세요.”
파티를 하면 레벨이 보인다. 레벨은 특별히 알려 주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그러니 생판 모르는 사람끼리 이런 문제 때문에 파티를 안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렵게 무마를 하고 사냥을 계속했다. 둘 모두 우리 형님에 대해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눈치였지만, 사냥을 계속하다 보니 그저 대인 기피증이 좀 있고 머리가 좀 모자란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동생이라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행동하고, 꼬박꼬박 공격이 끝날 때마다 내 옆으로 찰싹 붙는 모습이 정상인처럼은 안 보였을 것이다.
아, 편하게 사냥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렇게 고목문의 입구 앞에서 형, 누님들과 파티 사냥을 시작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우리 모두 레벨과 무공 숙련치가 상당히 올랐지만, 지금 실력으로 안마당 구경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략 고목문 앞에 노숙한 지 2주일여가 지났을 때, 그럴 일이 생겼다.
* * *
진결육합권도 어느새 10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강호의 다른 유저들이라면 이렇게 빠른 진전을 보일 순 없을 것이다. 육합권이야 특별한 계통의 무공이 아니었지만, 진결육합권은 비급에 설명된 대로 소림의 스님이 엮은 무공이다. 한마디로 소림파의 무공이라는 것이다.
나는 소림의 내공심법인 나한기공을 기본 내공심법으로 하고 있다. 계열에 맞는 내공심법만을 가지고 있어도 무공의 숙련치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거기에 50퍼센트의 증진 속도를 더해주는 장백설삼을 복용했으니, 말 다한 셈이다.
또한 육합권이 진화하는 무공이라는 특성도 한몫했을 테고(익혀야 할 단계가 많으니 아무래도 필요한 숙련치 양이 적은 듯싶었다), 지능 스탯이 주는 효과인 무공 숙련치 향상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지능 스탯 수치 55가 주는 효과가 어느 정도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2주일 남짓한 시간에 나름대로 고급 무공이랄 수 있는 무공을 이 정도로 익힌 걸로 봐서는 상당한 것 같다.
간단한 비교를 하자면, 나보다 먼저 혈랑검법이라는 고급 무공을 익힌 은소소는 이제 겨우 4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더구나 6성부터는 천천히 오르니 엄청난 차이가 나는 셈이다.
지금의 내 육합권으로는 청강시 하나 때려잡는 데 20초도 안 걸린다. 처음과 비교하자면 3배는 빨라진 속도였다(단순한 공격력 증가보다는 레벨에 따른 페널티가 감소했기에 가능하다).
그렇게 허수아비 청강시를 흠씬 두들겨 패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웬일인가 싶어서 강시 때리던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웬 무림인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야~ 여기서 사냥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있었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걸?”
“아니, 그런데 이게 누구야? 혈랑마녀 은소소 아냐? 독각룡도 있었네? 그동안 하도 안 보이기에 게임 그만둔 줄 알았는데 여기 숨어 있었던 거야?”
파군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한 사내가 앞으로 나와서는 뭐라고 이죽거렸다.
꽤 거슬리네. 그나저나 같이 온 사람이 1백 명은 되는 것 같다.
“야, 못난이 파군아. 그래, 사람 쪽수 믿고 지금 엉기는 거야? 밖에서 볼 땐 설설 기던 녀석이 그새 많이 컸네? 그래, 얼마나 컸는지 한번 볼까?”
독각룡은 창을 땅에 박은 채 그냥 듣고 있고, 은소소가 화사한 미소와 함께 응수했다.
내공이 대단하긴 하다. 말과 표정이 저렇게 다르다니.
그런데 설마 PK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비무하자는 소린가?
“흥! 그래, 우리는 다 죽어 나가는데 혼자 독식한 그 대단하신 혈랑검법 믿고 그러는 거냐? 착각하지 마. 지금 우리 중에 혈랑검법 익힌 자만 족히 열 명은 될 걸?”
그 옛날 삼류무사들 1백 명으로도 잡기 힘들었던 혈랑대주이니, 지금 눈앞의 패거리들이라면 충분히 가지고 놀 수 있었겠다. 상당한 희생이 있었을 텐데 그걸 감수하고 혈랑대주를 잡았다니 대단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군 형님, 그냥 무시하고 계획대로 갑시다. 괜히 PK라도 하면 체면 문제도 있고 괜히 신경만 더 쓰입니다.”
저쪽 무리 중에서 한 사람이 나와 중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나 은소소의 성깔이 문제였다.
“야, 인마! 파군! 너 이 새끼,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난주에다 퍼뜨리고 다니냐? 물론 내가 니들 다 죽고 무공서 건진 건 맞어. 그런데 내가 니들을 죽였냐? 니들이 죽어 나가도록 방치를 했냐? 실력도 없는 놈이 한 방에 죽어 나가서는 무슨 욕심이 그리 많어? 그럼 내가 비급을 백 토막으로 찢어서 나눠주리? 어디서 같잖은 말이나 하고 있어.”
하아… 대충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 것 같긴 한데, 심각해지네. 이제 나도 살인마의 길로 빠져 들게 되나?
“야, 파군. 너 그만 하고, 누님도 그만둬. 애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그런 일 가지고 왈가왈부할 거야. 그리고 백무, 너는 나중에 나 좀 보자.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한참 형한테 동생 놈이 반말 찍찍대게 내버려 두는 거야.”
엥? 과묵하기만 하던 각룡이 형도 한 카리스마 하네? 그런데 백무는 누구야?
“철창 형님, 그건 죄송했습니다. 야, 이 새끼 파군! 철창 형님한테 사과해라. 안 하면 너 오늘부터 광풍단에서 쫓겨날 줄 알어.”
파군이 우두머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저렇게 성질이 개차반인 놈이 1백 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끌 리가 없겠지.
“쩝. 죄송했습니다, 철창 형님. 간만에 봬서 말이 헛 나왔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지요.”
왠지 아니꼽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사과였지만, 각룡이 형은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광풍단이라 불리는 난주 낭인 패거리와의 어색한, 아니 살기등등한 첫 만남은 그럭저럭 넘어갔다.
녀석들은 아마 고목문을 쓸러 온 듯했다. 혈랑대주는 출현 빈도도 상당히 낮고 출현 장소도 광범위해서, 1백 명이라는 인원이 사냥하기 곤란한 보스급 몬스터였다. 그런 반면 고목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한결 수월하다고 생각해서 온 것 같았다.
그런데 과연 저들 실력으로 여길 정리할 수 있을까?
우린 잡고 있던 강시를 마저 정리하고 조용히 광풍단의 사냥 장면을 견식해주기로 했다. 광풍단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곧 백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는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대충 눈으로 보기에 10여 명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10개의 진형을 만들었다. 빠르게 진형을 짜는 걸로 봐서 미리 준비를 해온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듯하자, 백무가 직접 10여 마리의 강시를 꼬여 왔다. 검사로만 짜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각각 지정된 강시 한 마리씩을 맡는 게 보였다. 그 짧은 시간에 혼란 없이 주어진 역할을 하다니 대단했다.
“대단하네.”
그 모습을 보고 각룡이 형은 감탄했고, 소소 누님은 콧방귀를 뀌었다.
10명의 고목문 제자들이 정리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강시술사 한 명에 10명의 이류고수들이 달려들어 공격을 해대니 순식간에 전멸되는 게 당연했다.
모든 게 순식간에 진행됐다. 그 막강한 방어력과 체력을 지닌 강시를 때려잡는 것도 1백 명의 숫자 앞에선 너무나 무기력했다.
그런 식으로 광풍단은 천천히 고목문을 점령해 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마지막 광풍 단원마저도 고목문 내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우리도 따라가 보자.”
소소 누님이 고목문 정문 문턱을 넘어선 광풍 단원을 바라보다 넌지시 말을 꺼냈다. 물론 밖에서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광풍단에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아요.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요.”
소소 누님을 견제하는 멘트를 날려 주고 나도 이번에 새로 뽑은 팽가위 형님을 데리고 따라갔다(새로운 형님이 오실 때마다 사기친 형님의 친구 분이라고 소개를 시켜야 했던 나의 연기력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정문 입구에서 바라보니 안에서는 치열한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입구 밖에서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각 진형의 리더인 듯한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쳐 대고 있었고, 몇몇 유저들은 강시들에게 이미 당한 듯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기에 갑자기 이렇게 당하게 된 걸까?
곳곳에서 들려오는 광풍단의 고함 소리가 그 이유를 알려 주고 있었다.
“단주님! 생강시(生彊屍)가 너무 많아요! 후퇴합시다!!”
“조금만 더 버텨! 생강시가 그렇게 많은 건 아냐! 아직은 후퇴할 때가 아니다!!”
백무는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멀리서 상황을 엿보고 있던 내 눈에는 그다지 좋은 형편이 아닌 듯했다. 지금은 쓰러진 유저들이 겨우 서넛에 불과하지만, 생강시의 힘은 버텨서 될 만한 게 아니었다.
고목문 내부에 있던 강시술사들은 모두 전멸했다. 살아남은 강시술사들은 단지 둘뿐이었는데, 아마도 중간 보스인 듯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백무를 비롯한 광풍단 간부진들 두 무리가 그 중간 보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강시 12마리를 담당하는 부하들이 그때까지 버텨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생강시는 우리가 잡아오던 파란 청강시나 빨간 혈강시와는 움직임 자체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절정은 아닌 듯해도 최하중급 일류고수의 움직임이었다.
다행히 생강시를 맡던 진영의 리더가 그때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 전력을 12등분해서 생강시를 따로 맡는다면 전혀 버틸 재간이 없기에, 조를 꾸며 생강시를 달고 뛰도록 만들었다.
생강시의 공격에 도망치던 광풍 단원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 갔지만, 수십 명의 합공에 생강시 또한 조금씩 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생강시가 4마리 남았을 때, 중간 보스를 잡던 간부진들이 합세했다. 간부진이라고 해봐야 일반 단원들보다 약간 뛰어나 보였지만, 아무래도 효율적인 전투가 뭔지는 아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무와 다른 3명의 간부진들이 한 마리의 생강시를 요리하는 모습은 환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멋들어졌다.
몬스터는 자신을 처음 공격한 사람을 더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막강한 공격력의 생강시를 여러 명이 합공하는 경우라도 최단 시간에 죽여 버릴 정도의 타격이 아닌 한 몇 명의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생강시가 공격 도중 목표를 바꿀 경우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이 셋은 그런 기본적인 사항을 알고 있는 듯, 강시의 타깃이 된 사람들은 공격을 그만두고 보법을 시전해서 회피에 주력했다. 그렇게 회피만을 하다가 이전 목표보다 더 많은 타격을 입힌 다른 사람에게 강시를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보법 비급 구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오직 그 간부진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지만, 시의 적절하게 넘기는 패턴을 볼 때 그 전투 감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간부진들의 대단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강시가 죽었을 때 광풍단의 생존자는 단지 11명에 불과했다. 아직 고목 존자라는 최종 보스가 저 앞에 3명의 호위를 거느린 채 보고 있는데 말이다.
고목 존자는 불사전(不死殿)이라 적힌 전각 앞에 깡마른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사람인지 강시인지 분간이 안 됐다. 그 앞에 있는 호법들의 모습은 고목 존자보다 더 위험하게 생겼다. 멀리 몬스터의 이름이 희미하게 보였다. 독강시(毒彊屍), 활강시(活彊屍), 금강강시(金剛彊屍).
백무는 쓰러진 유저들이 떨어뜨린 소지품을 수집했다. 미리 정해둔 듯 오직 백무만이 아이템을 수거하러 다녔다. 그것만 봐도 광풍 단원들의 백무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이템을 다 수거하고 나자 광풍단주 백무는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데리고 회의를 하는 것 같았다.
굳이 들어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지금 남은 전력으로 고목 존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지 헤아려 보는 것일 테지. 하지만 누가 봐도 지금 상황에선 전멸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무슨 회의가 필요할까? 당연히 철수하는 게 다음 수순 아닐까?
어이없게도 내 짐작은 틀렸다. 광풍 단원 11명이 새로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 저들도 자기들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일까? 마치 불나방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저 불나방 패거리를 도와줘야겠다는 한심한 생각은 갑자기 왜 생긴 걸까? 저 고목존자를 확실하게 정리할 자신은 나도 없는데. 나도 불나방이 되어버린 건가? 하하.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먼저 독각룡과 은소소의 의중을 떠보았다.
“각룡이 형, 왠지 자살하려는 것 같지요?”
“그런 것 같은데……. 왠지 불쌍하네. 아이템 욕심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각룡이 형도 측은한 마음이 있긴 한 것 같아 선수를 쳤다.
“형, 우리 도와줄까요?”
“엥? 어떻게?”
“난 싫어!”
각룡이 형의 대답과 동시에 소소 누나는 강하게 반대를 했다. 소소 누나의 광풍단에 대한 적개심은 알 만했지만, 이번엔 소소 누나를 위해서도 달래야 했다.
“누님, 이 좁디좁은 난주 무림에서 언제까지 저들하고 척지고 살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게 지금 쟤들 도와주려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지? 더구나 네가 그동안 보여 준 능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하는걸?”
“방법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면 나올 수 있어요. 그것보다는 누님이 저들을 도와줄 마음이 있냐는 거지요. 이번에 우리가 손해를 볼수록 저들과의 사이도 한결 잘 풀리게 될 겁니다. 고목 존자를 죽이든, 우리가 죽든 간에요.”
“…….”
소소 누님은 내 말을 따져 보느라 조금 궁리하는 듯했다. 난 각룡이 형에게 재차 확답을 요구했고, 다행히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사이에 충분히 궁리를 했을 텐데도 소소 누님은 특별히 승낙의 말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여간에 저 자존심은.
다행히 광풍단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직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서 백무를 보고 말했다.
“저기요! 광풍단주님! 아직 공격하지 마시고 잠시 제 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광풍단주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우선 공격보다는 제 말 좀 들어보시지요. 손해는 없을 겁니다.”
그때서야 내가 은소소와 같이 있던 사람인 걸 알아본 듯, 힐끗 독각룡을 일별해본 백무가 내게 주의를 기울였다. 아마도 내가 독각룡의 말을 전한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은소소야 전혀 광풍단하고 엮이고 싶은 맘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시죠, 조연 님?”
“대충 보아하니 무리한 공격을 하시려는 것 같은데요, 저희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었기에.
“글쎄요. 왜 지금 그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무리한 공격이라니요? 나름대로 자신 있으니 도전하고 있습니다.”
진심인가?
“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죠. 제가 생각하기에 저기 앞에 있는 고목 존자나 세 마리 강시는 절정급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백무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건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건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백무 님도 알다시피 저 중에 독강시라는 녀석은 보통의 녀석이 아니라고 짐작됩니다. 보통 책에서 보이는 독강시는 절정고수도 녹여 버릴 정도의 녀석이니까요. 더구나 광범위의 독공을 사용할 가능성도 크고요. 그 점도 고려하고 계신가요?”
내가 판단하기에 고목 존자를 없애는 데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저 독강시였다. 도무지 저놈을 제대로 처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건 백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음… 그걸 알고 계시는군요. 저 역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것도 있지요. 꼭 책에서 본 대로 독강시가 대단하다고 미리 짐작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왠지 조연 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지네요.”
백무는 자신처럼 독강시의 위력을 미리 짐작한 나를 괜찮게 본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백무의 주의를 돌릴 수 있었고, 백무와 자리를 따로 해서 작전을 짤 수 있었다.
“…다시 정리를 해보죠. 먼저 조연 님의 형님 되시는 분은 고목 존자에게 선공을 가해 전담 수비만 하고, 그사이에 조연 님은 독강시를 달고 자리를 먼저 피하시겠다. 그리고 공격력과 이동력이 약해 보이는 금강강시를 경신법이 뛰어난 사람들 몇 명이 릴레이처럼 달고 뛰고, 활강시는 대여섯 명이 방어만 하면서 버틴다라……. 맞습니까?”
“네, 정확하네요. 중요한 건 제가 독강시에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마 삼 분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강시들이 순간적인 민첩은 떨어지지만 일단 경공을 시전하면 저보다 빠르거든요. 아마 금세 따라잡힐 겁니다. 거기에 활강시는 말대로 가장 빠를 테지요. 금강강시가 예상보다 빨라서 담당 인원이 다 쓰러진다면, 활강시를 맡고 있던 팀이나 고목 존자를 공격하는 팀이 관심 있게 보다가 적절히 인원을 증원하면 될 겁니다. 강시들은 못 쓰러뜨려도 되니 삼 분 안에 고목 존자를 없애는 게 중요합니다. 저 절정급 강시의 체력은 지금으로선 삼 분 안에 없애는 게 불가능 할 것 같으니까요.”
“좋습니다. 우리만으론 솔직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연 님 말씀을 들어보니 희망이 보이는 것 같네요. 만약에 성공한다면 제일 좋은 아이템을 조연 님께 드리지요. 독강시를 맡아주시니까요.”
백무라는 사람, 눈치가 좀 있군. 하지만 여기서 겨우 아이템 따위에 연연해서는 황금충이라는 이름이 아깝겠지?
“아닙니다. 저희가 나중에 합류한 셈이니까, 아이템은 바라지 않습니다. 혹 성공한다면 우선 백무 님께서 거두시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저희 팀원 분들에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과연 성공하려나? 정말 복잡하고, 서로 간의 호흡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전이다. 나 혼자 잘한다고 해서 이겨 낼 만한 전투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동안 지켜본 각룡이 형과 소소 누님의 호흡, 방금 보여 준 광풍단원들의 호홉을 믿어볼 뿐이다.
이후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광풍단원들은 특별히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몰살이라는 단어가 희망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는 걸 기뻐하는 눈치였다.
각룡이 형도 내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소소 누님도 말은 안 했지만 찬성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난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죽을 가능성이 절반 이상이라는 말을 해야만 했다. 이미 죽음을 불사한 광풍단원들과, 구경하다 죽음에 직면한 두 사람은 다른 입장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고목문의 혈투가 시작됐다.
“형님! 고목 존자를 지금 공격하세요.”
우리 팽가위 형님은 하북 팽가 출신답게 도를 들고 고목 존자에게 순식간에 달려들어 일도양단을 가했다. 그러나 공격은 단 한 번뿐, 이후엔 오호단문도법을 시전하며 고목 존자의 조공을 정신없이 막기만 했다.
나는 팽가위가 고목 존자에게 달려들자마자 신법을 발휘해서 독강시에게 뛰어들었다. 독강시는 고목 존자를 공격하는 팽가위를 공격하려는지 그쪽으로 향했지만, 다행히 내가 먼저 진결육합권을 시전해서 독강시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첫 공격이 적중하자마자 난 뒤돌아서 경공 시전을 외치고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독강시가 따라오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경공을 시전하면 뒤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뒤돌아보면 몸도 뒤돌아가는 시스템이다. 강호 컨트롤러가 그렇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정해진 역할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목문 정문을 향해 20여 초를 뛰어가는 사이, 결국 독강시에게 덜미를 잡혔다. 이류고수와 절정급 강시의 수준 차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중독에 걸렸습니다. 체력과 내공이 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이런, 젠장 할! 한 시간짜리 중독이구나.”
뒤로는 강시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해독약을 먹고 계속 뛰었다. 어떻게든 3분을 버텨야 했다. 내가 죽으면 독강시는 고목 존자에게로 돌아가 난동을 부릴 것이다.
헉! 그런데 해독약을 먹어도 중독이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욕을 버럭버럭 하면서 혹시나 싶어 흑점에서 사둔 귀한 아이템을 꺼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살아난다 해도 본전 찾기는 이미 글러버렸다.
[피독단(避毒丹)
성수곡에서 만든 천고의 해독제.
1분간 모든 독에 면역된다.
가격:1,000,000냥]
단 한 알밖에 없는 피독단을 먹어서 중독 효과는 사라졌지만, 강시의 공격에 의한 체력 소모는 피할 수 없었다. 독강시의 물리 공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체력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갔다.
결국 체력이 10분의 1이 남은 상태에서 걸음을 멈춰 마지막 비장의 수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매난국죽! 저놈의 강시 새끼 빨리 공격해!”
처음으로 소환해보는 대소요파의 호위무사인 매난국죽. 다행히 소환된 매난국죽은 내 명령을 빠르게 이행했다.
그렇게 호위무사들이 독강시를 묶어두는 순간 재빨리 앉은 난 운기 조식을 시작했다.
[소림소환단을 복용했습니다. 1분간 운기 속도가 10배 증가합니다.]
정신이 없었다. 호위무사 소환해서 독강시에게 붙여 놓고, 소환단 먹고 나한기공을 운용해 운기 조식하기까지, 정신없는 과정이 연이어 이어졌다.
그렇게 평소보다 10배가 빠른 운기 조식으로 체력의 80퍼센트를 회복한 나는 다시 뛸 준비를 했다. 하지만 독강시와의 거리를 벌렸을 때, 원래 자리로 돌아갈까 봐 마지막 호위무사가 죽을 때까지 먼저 출발하지도 못했다.
[호위무사 난이 강제 소환당했습니다.]
“난아! 네 원한은 내가 꼭 갚아주마!”
다시 독강시를 달고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달리기 시작해서 아까보단 더 오래 버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남은 피독단도 없다. 걸리면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한참을 달렸다. 뒤돌아볼 수 없어 독강시에 대한 공포가 더 커져 갔다. 1초만 더 있다가는 독강시의 손이 뒤통수에 닿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약속했던 3분이 가까워져 가자 달리면서 갖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어차피 난 곧 죽겠지’라는 생각, ‘고목 존자는 잡았으려나? 못 잡았으면 은소소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라는 생각들.
[중독에 걸렸습니다. 체력과 내공이 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드디어 독강시가 달라붙었다. 지금쯤 약속한 3분은 지났을 테다. 더 이상 달리는 것도 의미 없는 것 같아 달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서 독강시를 바라보았다.
흉측했다. 녹색의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전신이 녹색이었고, 피부에는 섬뜩한 독액이 진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녀석 봐라. 내 미모에 홀린 것처럼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하네?
“독강시 선생, 자네 여잔가? 내 아무리 여자 가리지 않는 처지이네만, 자네 같은 여자라면 아무리 나라도 좀… 그렇다네. 이해하시게.”
아무리 독강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몰래 자리를 피했다.
체력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독강시의 독은 보통의 독이랑 수준이 달랐다. 고목문 정문을 지나 불사전 앞으로 갔다. 다행히 고목 존자는 이미 쓰러져 있었고, 금강강시, 활강시도 뻣뻣이 굳어 전각 앞에 서 있었다.
내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기뻤다.
전투는 이제 갓 정리돼서 모두 경황이 없어 보였다.
고목 존자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지 팽가위도 살아남아 있었다. 그 외에도 죽은 사람은 몇 없었다. 겨우 2명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제 곧 세 자리가 비겠지만.
나는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백무 님, 축하드립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강호 생활 최초의 사망을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