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육합권 (5/62)

제5장. 육합권

거친 사막 바람만이 존재할 것 같은 감숙성에도 사람 사는 도시가 있다. 감숙 제일의 도시 난주(蘭州).

이 난주가 비록 중원의 호화로운 대도시와는 격이 다른 시골 도시일 따름이지만 천산 남북로를 따라 서역을 오가는 대상(隊商)들에겐 중원의 향기를 물씬 풍겨 주는 환락의 도시로, 강호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감숙성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더불어 최악의 플레이 환경으로 인해 최저의 유저 수를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난주에서 옥문관을 향해 북서쪽으로 1천 리가량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도시가 있다. 바로 무위(武威).

무위 일대를 북쪽에서 감싸 안은 모습의 만리장성 인근은 현재 감숙 무림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레벨 업 장소로 유명했다. 이 장성 부근에는 등격리 사막(騰格里沙漠)을 건너온 흉노 무리와 사나운 혈랑(血狼)들이 수도 없이 출현했다.

오늘도 이곳 등격리 사막의 가장자리에서 비풍단(飛風團)이라는 마적패를 열심히 사냥하고 있는 2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 사내는 무려 여덟이나 되는 마적패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달싹을 못하고 있었다.

챙! 채채채챙! 챙! 챙!

초승달처럼 굽은 곡도(曲刀)가 정신없이 청의인을 향해 내리쳐졌다. 그런데 그 정신없이 쏟아져 내리는 칼질에도 불구하고, 청의인은 마치 격이 다르다는 듯이 완벽한 방어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혹시 전설의 경지라는 검벽(劍壁)이 있다면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것일지도.

청의인이 완벽한 방어를 하고는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수비를 하기에도 정신이 없는 듯 이를 물리치기엔 쉽지 않아 보였다. 바로 그때!

펑! 펑!

멀찍이 떨어져 있던 젊은 권사가 어느새 다가와서는 강맹한 위력의 권을 마적단을 향해 뿜어댔다. 비록 권풍의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녹록해 보이지 않는 솜씨다.

나한권으로 보이는 위맹한 권력에 심한 부상을 입은 듯한 마적이 포위진을 풀고 떨어져 나왔다. 고통 때문에 잔뜩 찡그려진 얼굴로 자신을 공격한 이를 찾았다. 그리고 목표를 확인하자마자,

스팟!

고통이 심했던 탓인가! 마적의 월도(月刀)는 안타깝게도 허공을 긋고 말았으니. 그사이 청년의 나한권이 월도가 뿌려진 시간의 공백을 쫓아 마적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결국 마적은 그로 인해 마지막 생명줄을 놓아버렸다.

마적의 저승길은 심심치 않을 것이다. 이후에 그의 동료 7명이 어느새 그의 저승길에 동행했으니 말이다.

[레벨이 99에서 100으로 올랐습니다.]

“휴우, 이제 간신히 백 레벨 달성인가. 캐릭터창 오픈!”

[조연

신분:문주

호칭:없음

레벨:100

상태:정상

힘:10

지능:50(+5)

체질:13

근성:29

추가 능력:1

체력:1,721/1,945

내공:3,872/4,820

명성:3,011]

“뿌듯하네. 이제 드디어 고급 무공을 배워보는 건가? 이제 이 지긋지긋한 마적패들하고도 안녕이네. 잘 먹고 잘살고 있어라, 요놈들아! 형님은 집으로 돌아간다!”

난 추가 능력 1포인트를 근성에다 투자하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 * *

난주 소요파(逍遙派).

“돌아오셨습니까, 문주님.”

“어, 그래. 별일 없었고?”

“별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달리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일없어. 그만 가봐.”

염소수염 총관(아니, 왜 총관은 다 염소수염인 거야?)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총총히 사라진다. 갑자기 성질이 팍팍 난다.

“왜냐고? 저 총관 월급이 만 냥이야, 만 냥. 만 냥이라고. 일 년 연봉이 십이만 냥이야. 뭐, 좋아. 다 좋단 말이야. 대소요파의 총관이 저 정도 월급도 못 받으면 안 되지. 문제는… 저 총관 하는 일이 뭔지 알아? 그냥 저렇게 하루 종일 서 있어, 맨날. 정말이야. 맨날. 그러다가 가끔 내가 밖에서 돌아오면 저렇게 한마디씩 던져 주지. 저게 저 사람이 월급 받아 생활하는 방식이야. 좋지? 돈 주는 내 입장에서 한번 봐봐.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 아, 자르면 되지 않냐고? 못 잘라. 저 녀석이 내 부하이긴 하지만 나보다 상전이야. 문파에 기본으로 딸려 있는 필수 NPC거든.”

아! 내가 정말 미쳐 가나 보다. 혼잣말 길게 하기도 이젠 지겹다. 무슨 놈의 문파가 이렇게 썰렁해! 흠… 뭐, 다 내 탓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나도 핑계는 있다고!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겠어? 아마 그때 내 입장이라면 다들 내 꼴, 우리 문파 꼴 났을걸? 제기랄.

일단 무공이나 배우자. 진결육합권(眞結六合拳) 말이야. 그동안 필요 스탯이 모자라서 행낭에 처박아둔 물건인데 드디어 배울 수 있게 됐네.

[진결육합권을 배우시겠습니까?]

“네.”

[3분간 운기 행공 상태에 들어갑니다. 공격을 당하면 주화입마에 빠집니다.]

무공을 배울 때마다 이렇게 강제적으로 운공을 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적이 날 한 대라도 친다면, 아니 토끼한테 맞아도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주화입마는 그냥 사냥하다 죽는 것보다 페널티가 더 심한데, 레벨이 10이나 떨어지고 익히고 있던 모든 무공이 1성에서 3성씩 깎여 나간다. 재수 없으면 1, 2성짜리 무공은 사라지고 말이다. 당연히 배우려던 무공 비급도 사라진다. 하지만 말로만 들었지, 겪어보질 않아서 잘은 모른다.

황색 기류가 소용돌이치면서 내 몸 주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 나도 묘한 감흥에 빠져 들었다.

3분이 지나자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온다.

[진결육합권을 배웠습니다.]

[육합권이 자동으로 육합권(진결)으로 바뀌었습니다.]

[권 병기 숙련이 1성 향상됐습니다.]

[체력이 65 증가했습니다.]

[내공이 88 증가했습니다.]

“어라? 다른 무공이 아녔단 말야?”

어디에서도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기에, 막연히 기존의 삼류 무공 육합권과는 전혀 다른 무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뭘 뜻하는 거지? 일단 육합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나 보자.

“무공 상태창 오픈!”

[무공 상태

-병기 숙련

권:5성 89.11% 검:1성 11.27%

-무공 숙련

육합권(진결):1성

나한권:10성(現)

삼재검:2성

내공심법:나한기공 4성(現)

경공법:유운신법 2성(現)

보법:불영보 2성(現)

잡기:금나수 1성

잡기:지청술

잡기:진법(中), 사상검진 1

잡기:음공(中)

체질:불가(佛家), 양강지체(陽强之體)]

기존의 6성이던 육합권이 1성의 육합권(진결)으로 바뀌었다. 거기에 권 숙련치도 딱 1성 오르고.

그런데 체력과 내공은 왜 올랐지? 무공이 1성씩 오를 때 수치랑 비슷한데. 육합권이 새로이 갱신돼서 그런 건가?

에라이! 모르겠다. 짐작만 하면 뭘 하나! 힌트가 조금이라도 있어야 두드려 맞히지. 담에 생각하자.

“어이, 총관! 이리 좀 와봐!”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염소수염 총관을 불렀다. 사실은 집에 돌아온 이유가 이 일 때문이었다.

“총관, 전에 당신이 말했지? 다음 단계 문파 레벨 상승 조건이 삼천이라고.”

이번 사냥에서 명성 3천을 넘겼다. 명성은 네임드 몬스터를 잡으면 오른다. 관도의 산적패 우두머리 같은. 비풍단 패거리의 우두머리들도 마찬가지로 명성을 조금씩 준다. 참고로 비풍단의 진짜 우두머리(아마도 분위기상 있을 것 같다)는 구경도 못했다.

“네, 삼천이 맞습죠. 왜요? 문파 레벨 올리시게요?”

“음, 그럴까 하는데. 왜, 문제 있나?”

“문제 될 거야 없습니다만, 후회하실 텐데요.”

“어허, 이 사람! 장문인이 하자면 할 것이지, 무슨 잔말이 많아! 일단 뭐가 바뀌는지나 설명 좀 해봐.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관두지, 뭐.”

“딱 두 가지 바뀝니다요. 음… 그런데 문주님이 들으시면 기분 나빠하실 이야긴데, 말씀드려야 할지…….”

“아따, 그 사람! 뜸은 그만 들이고 말 좀 해줘!”

“그럼 욕먹을 각오로 말씀드리죠. 한 가지는, 제 월급이 오른답니다. 바람직한 일이긴 합니다만…….”

그래, 니가 왜 그리 뜸을 들였는지 알 만하다, 이놈아. 상용화되고 나서 강호 메인 컴퓨터의 봉인을 뜯었대나 어쨌다나. 하여간 이놈 말하는 게 이미 입력된 대화인지 원래의 생각인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딱 1만 냥짜리 월급쟁이다운 인공지능이긴 하다.

“십만 냥입니다.”

커억! 이런 날도둑놈 새끼! 지금도 하는 일 없이 돈만 받아먹는 주제에, 그 월급을 10배나 더 훔쳐 가겠다고? 아, 뒷골 당긴다.

“으음… 그래, 일단 두 번째도 들어보자.”

“원래는 세 가지가 바뀝니다요. 모든 중간급 이상 문파 제자들의 월급이 오르는데, 전 좀 과한 면이 있긴 하죠. 그런데 그게 강호의 법이라니 제가 뭘 어쩔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 소요파에 문도가 아무도 없으니 다행이죠.”

“총관, 시끄러우니 두 번째나 말해봐.”

그래도 나이 먹어 보이는 NPC라 닥치라는 말은 대놓고 못하겠다.

“필수적으로 네 명의 무사를 고용해야 합니다.”

“안 하면 안 되나?”

“해야 합니다. 문파의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에, 문주님도 위신에 신경을 좀 써야죠. 이 네 명이 문주님 호위무사로 배치됩니다. 물론 월급도 천 냥씩 줘야 하구요.”

“고용은 어떻게 하는데?”

“그냥 저한테 고용하겠다고 말만 하면 일 초 안에 대령해드립니다요. 아직은 이류 무사밖에 모집할 수 없지만, 추후 문파의 성세가 커질수록 더 실력 좋은 무사들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흠… 그건 좀 좋긴 하군. 아니, 원래는 안 좋은 건가? 하기야 보통의 문주라면 이류 무사의 호위는 순전히 월급 도둑놈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테니. 그래도 지금의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네?

“좋아! 총관, 문파 레벨 올리자. 무사도 바로 고용해서 배치해주고!”

“네, 시행하겠습니다.”

[소요파의 문파 레벨이 1에서 2로 상승했습니다. 증축 비용으로 은 200,000,000냥이 소모됐습니다.]

“음, 이억 냥이라… 이번엔 얼마 안 들었네. 처음에 돈 퍼지르고 나서 얼마나 후회했던지.”

그때, 딱 10억 냥 들었다. 장원 구입비 1억 냥(이만한 땅덩이를 낙양 같은 데서 구입하려 했으면 족히 20억 냥은 소모됐을지도 모르지만, 설마 1억이나 들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난주 지부에서 파는 문파 설립 신고서 5억 냥, 표국 설립 신고서 3억 냥, 그리고 기타 등등 잡비와 뇌물비로 1억.

지금은 그때의 후유증으로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거기에 이번 증축으로 인해 완전 거지가 돼버렸군.

“문주님, 호위무사 도착했습니다. 차례대로 매, 난, 국, 죽이라고 합니다.”

총관이 흉배에 청학이 그려진 백의 무사 4명을 데리고 왔다. 청학 표식은 처음에 문파 설립할 때 지정해둔 우리 소요파의 표식이다.

“소요파 문주 호위무사 매(梅)입니다.”

“소요파 문주 호위무사 난(蘭)입니다.”

“소요파 문주 호위무사 국(菊)입니다.”

“소요파 문주 호위무사 죽(竹)입니다.”

“어이, 총관. 이름이 너무 식상한걸? 바꾸면 안 될까?”

“문파 레벨이 더 높다면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못합니다.”

“어, 그래. 그럼 됐고. 그런데 얘들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하나?”

“필요하실 때 ‘소환! 호위!’라고 부르시고, 필요 없을 땐 ‘해산! 호위!’라고 외치시면 됩니다. 그게 싫다면 바꾸셔도 되구요.”

“그래, 그럼 가서 일봐. 아차차! 지금 문파 운영비가 얼마나 남았나?”

미리 저장된 운영비가 다 떨어지면 무슨 짓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마도 총관이 사라질 것 같다.

설마 총관이 자기 월급 안 준다고 장원 다 팔아먹고 튀는 건 아닐까? 설마…….

“지금 이억 사천삼백이십일만 냥 남았습니다. 대략 십육 년까진 운영비 부족할 일 없겠네요.”

다행히 총관이 운영비에서 말하는 시간은 현실 시간이었다. 현실 시간이 아니라 게임 속 시간이라면 따로 계산하느라 머리를 한참은 써야만 할 것이다.

총관은 내가 더 말이 없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까 서서 졸던 자리로.

“호위 상태창 오픈!”

[호위무사

소속:소요파 이류무사(매, 난, 국, 죽)

전투 타입:수비형

공격력:500

체력:3,000/3,000

내공:5,000/5,000]

딱 이류무사다운 능력치다.

지금 내 능력치랑 비슷비슷하네.

지금 내 성취가 보통의 강호 플레이어 레벨이라면 이류 중간 단계이다. 하지만 초반의 삽질(지능 50 올린) 덕에 이류 초입의 수준밖에 안 되는 지금의 내 상태는 호위무사들의 수준과 얼추 비슷했다.

“그럼 일단 소환 명령어나 바꿔볼까? 명령어 변경!”

명령어 변경 기능은 상용화되면서 업데이트된 기능이다.

[명령어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에서 **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소환! 호위에서 나와, 매난국죽으로!”

[명령어를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해산 명령어까지 바꾸고 호위무사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더 이상 문파에서 할 일이 없어졌다. 굳이 내가 없어도 문파는 알아서 잘 돌아갈 것이다.

레벨도 남들만큼 올려놨고, 골치 아픈 일들 몇 개도 해결했으니 이젠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강호행을 즐길 일만 남았다. 황금충 조연의 강호 출행을 기대하시라.

* * *

소요장은 난주성 서쪽 외곽에 있다.

난주성 동쪽엔 변방의 수비를 담당하기 위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군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난주성 동쪽이 전부 군역(軍域)에 속하게 돼서 문파를 비롯한 기타 유저들의 새로운 시설은 전부 난주성 서문 밖에서 할당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어디 가서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구나. 낙양에 있을 땐 오직 천하제일인이 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뛸 수 있었는데, 지금은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강호행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문밖을 나오긴 했다. 하지만 마음만 급급하고 계획한 대로 하자니 양심에 걸린다.

“일단은 아무 곳에나 퍼질러 앉아서 난주 무림인들하고 안면이나 익혀야겠다.”

원래 내 계획은 강호 최초 유저 설립 문파의 문주가 되어 최고수들을 영입하는 것이었다.

강호 최초의 무림 문파를 만드는 것까진 생각한 대로 됐다. 문젠 문파를 만들고 나니 들어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문파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선 12성을 대성한 무공을 문파 무공으로 등재해야 가능하단 걸 그제야 안 것이다.

난 돈만 벌 줄 알았지 무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문파라는 게 이렇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천하제일문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 따윈 생각지도 않았을 텐데. 이미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투입해버린 그땐 상황이 너무 늦어버렸다. 코 꿴 인생의 시작이었다.

하여간 가르치는 무공 하나 없이 난주의 땅덩이만 차지하고 있는 문파의 주인이 나다. 문도가 없어도 타 문파처럼 NPC들을 고용해서 문파 활동을 할 수는 있다. 유저들이 가입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파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호 유저들이 가입하지 않는 중소 문파들이 망하지 않고 잘 굴러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우리 염소수염 총관과 한동안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해봤지만, 결론은 별수 없었다. 유저가 만든 문파는 결국 유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밖에 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고용 가능한 문도의 수준은 삼류밖에 안 되고, NPC 문도들도 문파의 무공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투력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결국 문도를 받으면 유지비만 나가고, 타 문파와 구역 싸움을 한다고 치면 이건 쪽박 차는 지름길이니 문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겠다. 내가 머리가 더 좋아지면 새로운 꼼수가 생길지는.

하여간에 나는 이제 난주로 들어간다. 되든 안 되든 인간들하고 부딪치면서 살란다.

저 객잔이 좋겠다. 포매향(抱梅香)이라는 이름이 꽤 운치 있는걸?

“어서 옵쇼! 난주 최고의 객잔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난주 최고라고 해봤자 낙양 최하 수준의 객잔이잖아. 하긴 너 같은 시골 점소이가 어찌 그 고급스런 대도시의 분위기를 알 수 알겠냐.

“분주 한 병하고, 산랄황과(酸辣黃瓜)나 내오게.”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점소이가 요리를 내오는 동안 객잔을 훑어봤다.

객잔엔 나를 제외하고 두 무리의 손님들이 있었다. 한쪽은 험상궂게 생긴 사내 세 녀석이었고, 다른 한쪽은 척 보기에도 요사스러움이 줄줄 흘러내리는 듯한 아가씨 둘이었다.

저들이 유저일지 NPC일지는 알 수 없다. 그걸 판별할 만한 기준은 대화를 걸어보는 것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곤욕을 치를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님, 주문하신 분주와 산랄황과 나왔습니다.”

“그래, 수고하시게.”

점소이 손에 은자 1냥을 건넸다. 강호 홈페이지에서 알게 된 점소이하고 친해지는 방법은 이렇게 잔돈 몇 푼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하여간 처음이다. 요구하지 않은 돈을 건네본 것은.

[포매향 점소이 우칠과의 우호도가 1 상승했습니다.]

역시 배운 대로 해서 손해 볼 일 없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그런데 점소이하고 우호도가 올라가면, 이 자식 이거 나중에 손님인 나한테 반말하는 게 아닐까?

“저기요.”

갑자기 건너편 탁자에서 이야기하던 여인네 중의 한 명이 다가와선 말을 걸었다.

“네?”

“시간 있으세요?”

음… 이게 무슨……. 잠시 생각을 해야만 했다. 아니, 조금 길었다.

시간 있냐는 질문은 남자가 여자 꼬실 때 하는 작업 멘트 아니었나? 설마… 꽃뱀? 강호에서도 진정!!

아니지, 침착하자. 섣부른 짐작으로 손해 보는 짓도 그만 하자.

“네. 있기야 합니다만?”

“잘됐네요.”

“저희랑 같이 사냥 가요. 파티 구하시는 거 맞죠? 저희 꽤 괜찮거든요? 사냥 끝나고 나선 고맙다고 생각하실 정도로 잘해드릴게요.”

음… 어디서 많이 듣던 뉘앙스다. 뭔가 심대한 오류가 저 말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

정말 내가 사냥 끝나고 나서 쟤들한테 고맙다고 생각할 정도라면, 왜 저 인간들이 지금 이 마당에 객잔에서 파티를 구하고 있을까? 그 정도로 인기 절정인 인간들이라면, 이렇게 파티 구하러 객잔에 오도록 친구들이 내버려 두진 않을 거 아냐? 전형적인 사기꾼 수법이구만.

그래도 누가 죽어 나가는 사기도 아니니 한번 재미 삼아 사기극에 동참해볼까?

그때였다. 내 나름대로 간만에 착한 심성을 북돋아 사기 행각에 동참하려는 갸륵한 마음을 깨뜨린 인간이 출현한 게.

“어이! 안녕들 하신가!! 반가워. 반갑다구! 안 반가워? 야! 니네 나 안 반가워?”

“아! 네. 누님,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그동안 기체후 일향 만강하셨습니까?”

“하하! 나야 당연히 일향 만강하고도 남지. 근데 니들 아직도 여기서 뭐 하냐?”

“뭐, 뻔히 아시면서……. 그냥 그렇습니다.”

“그래그래, 니들 형편이야 내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다음에 한번 좋은 건수 생기면 니들 껴 줄게. 야! 근데 니들은 여기서 뭐 하고 자빠졌냐?”

갑자기 폭풍처럼 휘몰아친 저 과격한 여인네가 날 보고 작업하던 아가씨에게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아이~ 언니도 참. 우리 난주 낭인계의 법통에 따라서 초보 교육 좀 하고 있었죠. 왜요? 언니가 먼저 교육 좀 하실라우?”

이게 뭔 소린가? 내가 비록 망가진 스탯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초보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닐진대. 어찌 저 요사스런 여자가 이런 패악스런 소리를 해대는가?

“됐다. 넌 저쪽에 계속 찌그러져 있도록 하고. 어이! 이보슈, 형장!”

간단하게 눈앞에서 작업 걸던 여인네를 찌그러뜨린 패악스런 여인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근데… 이쁘장하네?

“네? 네, 말만 하십쇼. 분부 받들어 뫼시겠습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나 일파의 종주잖아!!

“하하! 너무 쫄지 말고, 내가 성격이 좀 괄괄하니 이해해주게나. 보아하니 여태 난주에서 혼자 어렵게 커온 처지 같은데, 맞나?”

“혼자 커오긴 했습니다만, 딱히 어렵게 컸는지는…….”

“지금 자네 레벨이 몇인데?”

“오늘 백 렙이 됐는데요.”

“하하! 거 보게나. 백 레벨이 되도록 내 눈에 한 번도 안 띄었다면 자넨 정말로 대단한 걸물일세. 뭐, 좋아! 비록 레벨이 조금 모자란 감이 있지만, 내 아량으로 자네에게 좋은 구경시켜 줌세. 뭐 하나! 어서 일어나 따라오지 않고.”

음… 저 요사스런 아낙네 패거리를 따라가는 게 나았으려나?

막무가내로 재촉하는 바람에 왠지 인생 조진(?)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객점을 나와 난주성 북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보조를 맞추어 걸어간다는 개념은 집에다 흘리고 온 것 같다. 처음 만난 파티원인데도 전혀 신경 써주지 않는다.

한참 걸어가 난주성 북문에 다다르자,

“이제부터 좀 달릴 거야. 잘 따라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자가 경공을 시전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 사람은 나이가 몇이기에 다짜고짜 반말이지? 성질 같아서는 혼자 열심히 달려가라고 내버려 두고 다시 객잔으로 돌아가 버릴까 보다.

그러나 그냥 이쁜 얼굴 보고 따라가 주기로 했다. 여자의 납치 행각엔 응해주는 게 사내의 기본 매너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야.

“경공 시전!”

경공 시전 명령어를 외치자마자 몸이 가볍게 떠오른다. 앞서 가던 여인을 향해 조심스레 신형을 옮겼다. 다리에 힘을 살짝 주자 무당파 독문신법인 유운신법이 발현됐다.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듯이 부드러운 신법이다.

상용화가 되기 전 며칠간의 서버 점검 기간에 산 강호 전용 컨트롤러가 기분을 날아갈 듯 좋게 만들어줬다. 귓가의 부드러운 바람 소리와 몸 전체를 감싸는 듯한 속도감. 역시 돈이란 좋은 거다.

먼저 달려가던 여인의 모습이 점점 다가왔다. 작은 점이 사람처럼 보이더니 조금씩 커져 간다. 붉은 옷, 붉은 바람. 그 뒤를 달리고 있자니 짙은 매괴 향이 흐르는 듯하다.

어느새 여인의 뒤에 달라붙었다. 뒤태가 볼 만하다. 저 여자는 알까? 내가 뒤에서 자기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그녀를 지나쳐 버릴까 염려스러워 잠시 경공을 멈췄다가 다시 시전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칼이 아름답다. 춘절(春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난초 잎새가 저렇던가! 붉은 비단 장포는 또 어떻고! 꿈에나 다시 볼 수 있으려나 이 아름다운 무림 여협객을…….

그러나 미인도 감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목표 지점에 도착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착한 지점에 남정네 하나가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었다.

“야! 일어나. 신참 구해왔다.”

“어? 금세도 왔네. 하여간 누님 수완엔 매번 놀란다니깐.”

“야! 이번엔 조심해라. 내 뒤 졸졸 따라붙으면서 미친 짓 하는 거 감당하느라 식은땀이 다 흐른다.”

헉!

“하하하. 예쁜 여우한테 홀려 버린 초짜가 또 나왔네. 하하. 사실, 누님이 좀 이쁘장하긴 하잖수. 누가 그러게 그렇게 이쁘게 캐릭터 키우래? 그나저나 신참 소개부터 받아야지? 어이, 신참! 반갑네. 난 독각룡이라고 하네만?”

음… 여우가 맞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전설의 삼목호(三目狐)?

“조연입니다.”

길게 말해봤자 내 꼴만 더 우스워진다.

독각룡은 그저 알겠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자기소개도 안 한 여우는 다짜고짜 파티 제의를 해온다.

[은소소 님의 파티에 합류하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거절할 이유는 없지. 그런데 여우 이름이 은소소였나? 무협 좀 봤나 보네.

“좋아. 그럼 바쁘니까 자리 잡으러 가자고. 조연이가 레벨이 백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자꾸 반말을 들으니 귀에 거슬리네. 나도 적은 나이 아니거든?

“저기요, 은소소 님. 죄송하지만 물어볼 게 있는데요.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어라? 갑자기 사위에 한기가 드는 느낌은…….

그녀의 입가에 어이없다는 듯, 조금은 기분 나쁘다는 듯, 그러면서 익숙하다는 듯한 미소가 새겨진다. 그리고는 비아냥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너 나한테 관심 있어? 여자한테 나이 물어보는 건 실례야. 그건 알고 있을 테고. 내가 반말해서 기분 나빴어? 그런데 어쩌지? 설령 그쪽이 나보다 나이 많다고 해도 존댓말 안 할 거거든. 궁금해 죽겠지? 호호호!”

“조연 씨, 저 미친 누님의 반말도 자꾸 듣다 보면 익숙해지니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리고 실제로 나이도 좀 많긴 해요. 좀만 더 먹으면 폐계(閉鷄)쯤 될 겁니다.”

“야! 각룡이 너 죽을래? 이 몸매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이 빌어먹을 새끼야!”

왠지 잘못 끌려온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리꽂힌다. 아, 객잔으로 돌아가서 그 요사스런 아가씨랑 알콩달콩 놀고파진다.

별로 볼 만하지도 않은 악다구니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사냥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어디로 갈 건지나 좀 알려 주시죠.”

짜증 섞인 말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어쩌겠어? 당신들은 나보다 더한걸.

“음… 그럼 그만 놀고 사냥이나 가볼까? 거긴 너보다 렙이 더 높은 몬스터가 우글우글거리니 미리 긴장 좀 해두라고. 그리고 이왕 파티에 들어왔으니 중간에 도망갈 생각도 말고. 흐흐흐!”

은소소는 내 질문에 섞인 짜증 따윈 가소롭다는 듯 신경조차 안 쓰는 눈치다. 그런데 어떤 몬스터기에 저렇게 미리부터 잔뜩 겁을 주는 거지?

은소소가 앞장서서 데리고 간 곳은 흔히 말하는 강시촌이었다. 난주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냥터인데,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비단 난이도뿐만 아니라 사냥법 자체가 귀찮기 그지없는 고약한 곳으로 유명했다.

악명 높은 사냥터라고 소문난 덕분인지 우리가 갔을 땐 역시나 한 명의 유저도 볼 수 없었다. 비슷한 난이도의 사냥터인, 혈랑 떼나 마적단이 나오는 만리장성 인근에 비하면 정말 인기 없는 사냥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잡으려는 녀석들은 ‘되살아난 시체’라는 녀석들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얘들은 강시 축에도 못 끼는 녀석들이다.

강시는 강제적이든, 아니면 운이 좋아서든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만들어지는 녀석들이다. 그 피부는 쇠보다 단단해서 고수의 공격이 아니면 피부에 흠집조차 내기 힘들다. 한마디로, 우리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라는 소리다.

반면에 이 되살아난 시체라는 녀석들은 강시가 되려다가 실패한 녀석들이다. 강시처럼 약간의 판단 능력이 있긴 하지만, 피부는 썩어 문드러져서 진물이 뚝뚝 흘렀다. 징그럽기는 했지만 긴장할 만큼 무서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이 녀석들 역시 썩어도 강시였다.

“여기야. 첨 와보지? 일단 저 마을 안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야. 마을 밖으로 한 마리씩 끌고 와서 사냥할 거야. 마을 안에 들어가는 일 없게 조심해. 순식간에 몰살당한다. 도망도 못 가. 우선 주의할 점은 저놈들은 중독도 시키고 출혈도 일으키거든? 중독은 해독제 먹으면 되고, 출혈은 지혈산 바르면 멈추니까 바로바로 풀어야 돼. 일단 조연이 넌 아직 무리니까 각룡이가 한 마리씩 끌고 올 거야. 이후는 그냥 막 조지면 돼. 이해됐지? 자, 그럼 시작하자!”

은소소는 설명을 끝내고 검을 꺼내 들었고, 독각룡은 철창을 꺼냈다. 그리고선 날 멀거니 바라봤다.

“음? 왜요?”

“준비하라니깐. 무기 안 꺼내고 뭐 해?”

무기 꺼냈잖아! 내 장갑 안 보여?

“저 권사(拳士)인데요?”

“…….”

권사라는 내 말에 갑자기 둘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묵룡수는 착용 조건에 힘이 30이나 들어간다. 아직 내 행낭에 묵룡수가 몇 개 남아 있긴 하지만, 착용하기엔 힘 스탯이 많이 모자랐다.

지금 착용하고 있는 장갑은 그나마 권사들이 많이 쓰는 흑문(黑雯)이라는 수투다. 별 효과도 없지만, 검은 표범 무늬의 문양이 예뻐서 폼으로 착용하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그것도 권사들끼리나 알아보지, 다른 병기 무공을 배운 이들에게 우리 같은 권사들의 장갑이 무기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권법을 사용한다는 게 저 둘의 침묵을 강요할 정도인가? 왜들 저러지?

“…혹시 지금 주력 무공이 뭔지 알 수 있을까?”

은소소가 뭔가 심각한 어투로 물어왔다.

대답 못해줄 것도 없지!

“육합권 씁니다.”

역시 이런 반응 보일 줄 짐작했다. 두 사람 얼굴이 뭐 밟았다는 표정으로 잔뜩 일그러진다.

진결이라는 옵션이 붙은 레어 무공이라는 걸 알려 줘야 했으려나? 뭐, 상관없겠지. 그러게 누가 다짜고짜 막 끌고 오랬나? 크큭.

“왜요? 지금까지 육합권으로도 사냥 잘만 하고 다녔는걸요? 무슨 문제 있나요?”

물론 육합권도 6성까지 올리긴 했지만, 내 주력 무공은 나한권이었다.

나한권은 나름대로 소림파의 독문무공이다. 위력도 괜찮을뿐더러, 내공과 체력이 골고루 잘 오르는 고급 무공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 오늘부턴 진결육합권만을 수련할 생각이어서 나한권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소림의 독문무공을 어떻게 입수했냐는 질문이 나온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돼버릴 것이다.

“육합권 말고 다른 무공은 안 배웠어?”

왜 이렇게 꼬치꼬치 물어보는 거지?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커왔다니까 그러네.

“몇 개 배우긴 했죠. 삼재검이랑 몇 가지 잡기 같은 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독각룡이 은소소한테 이를 드러내며 따졌다.

“아니, 누님! 알아보고 나서 데려왔어야죠! 아, 정말! 전 모릅니다! 알아서 합의 보세요!”

“휴…….”

땅 꺼지겠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들인지. 그런데 대체 왜 저러지? 아무래도 한마디 해줘야겠다.

“무슨 착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요, 제 육합권 수준이 두 분이 생각하시는 것과는 조금 다르거든요? 장담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사냥이나 좀 하죠.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정 도움이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땐 제가 알아서 나가도록 하죠.”

이렇게까지 말하는 내 기분도 좀 알아달라구.

그래도 한때 최고의 위치에 있던 나였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초보 유저들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파티 사냥하고 싶은 생각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어쩔 수 없겠지. 그런데 우리가 육합권이라서 뭐라고 하는 게 아냐. 그건 알아두라고. 일단 사냥하다 보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게 될 거야. 우선 사냥이나 시작하자. 각룡아, 한 마리 데려와라.”

은소소는 그래도 사람의 탈을 쓰고 있어서인지 쫓아내지는 않는다.

그럼 이제 드디어 시작인 건가?

파티 사냥은 처음이다. 아니지, 사실은 맨날 파티 사냥만 해왔었나? 하하.

독각룡이 긴 창으로 마을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는 시체 한 놈을 쿡 찌르자, 그 시체 주변의 다른 녀석 2마리도 독각룡을 인식하고 달려들었다. 생각보다 꽤 빠른 몸놀림이었다.

독각룡은 그렇게 3마리의 몬스터를 달고서는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조연이 너는 한 마리 따로 맡을 생각 하지 말고, 우리가 치는 녀석 협공해!”

집중해서 한 마리씩 잡는 식인가 보다. 파티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

철창이 세 몬스터를 찍고서는 빙그르르 휘돌려진다. 리듬이 좋은 창술이다.

독각룡이 그렇게 시체들을 공격하고서는 은소소와 내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시체들은 여전히 독각룡만을 바라보고 쫓아다녔다. 가끔 철창이 녀석들을 다시 찍고, 주인을 따라 돌아갔다.

은소소는 들고 있던 검으로 주위를 도는 시체들을 공격했다. 여자가 시전하는 검법이라고 보기엔 어색한, 기괴망측하고 붉은 혈광이 어려 있는 사이(邪異)한 검법이었다.

나도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다. 미리 현재 무공을 나한권에서 육합권으로 변경해뒀기에, 공격을 하자 자연스럽게 육합권의 투로가 내 손을 통해 이어졌다. 진결육합권의 첫 시전이었다.

확실히 변화된 육합권은 그 기풍부터가 달랐다. 이전의 육합권이 단순한 투로와 변초가 없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면, 진결육합권은 전사경의 수법이 가미되어 그 위력이 훨씬 커 보였다. 하지만 초식의 연계는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계속 치려니 시체가 독각룡을 따라서 가버린 것이다.

뭔가 상대가 있어야 무공 숙련도 하고 재미가 있지, 그런 식으로 자꾸 맥이 끊기니 점점 짜증이 났다.

그런 반면 은소소는 그래도 검이라는 병기의 이점 덕택에 시체들을 끊임없이 공격할 수 있었다. 이 거리의 문제 때문에 저들이 그렇게 질색했나 싶었다.

그러는 사이 되살아난 시체라는 녀석들과의 첫 전투가 끝났다.

독각룡이 시체가 떨어뜨린 쓰레기처럼 생긴 아이템을 수거하는 동안 은소소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도 권법은 쓸 만하네? 생각 밖인걸? 아무튼 수고했어. 그리고 이젠 권법 쓴다고 뭐라고 안 할게. 호호!”

“그래도 조연 씨 육합권이 위력이 좋아서 다행이죠. 보통의 권사라면 데미지는 주지도 못하고 거리 조절도 안 돼서 아무 쓸모가 없다구요. 그리고 조연 씨는 잘 모르고 그 경지까지 수련을 한 거 같은데요, 지금 난주 무림에는 고급 권법서가 없어요. 알다시피 한번 권법을 배우면 계속 권법을 배우는 게 이득이죠. 그런데 상위 단계 무공이 없는 마당에서 누가 계속 권법을 배우겠어요. 조연 씨는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구요. 어쨌든 방금 전엔 실력을 의심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독각룡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아니, 왜 권법 고급 무공서가 안 나오지? 보스급 몬스터를 잡아보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독각룡 님은 보아하니 양가창법을 배우신 것 같은데, 은소소 님의 검법은 처음 보네요? 무슨 무공인지 물어도 될까요?”

“하… 보는 눈은 있네? 이거 나름대로 고급 무공이야. 재수 없는 무공이기도 하고. 혈랑검법이야.”

이름이 혈랑검법이라면, 혈랑들을 잡고 얻은 무공인가?

“재수가 없다뇨?”

“전에 한번 혈랑대 보스가 떴다고 소문이 크게 나서 난주의 낭인들이 전부 서로 잡겠다고 달려갔던 적이 있었지.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많으면 뭐 해? 다들 실력도 안 되는데 욕심만 커서는 말이야. 서로 눈치만 보면서 협동을 안 하니깐 그 무서운 혈랑대주가 쉽게 잡혀 주겠어? 아마 그때 족히 백 명 정도는 죽었을 거야. 나도 뭐 눈치 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죽어버린 바보들처럼 욕심이 과하진 않았지. 내 실력은 알고 있었으니 말이야. 어쨌든 운이 좋았다고. 혈랑대주한테서 도망가려다가 칼 한 번 휘두르니 꼬꾸라지더라구. 하하. 그리고 이 비급을 먹었지. 덕분에 아직도 이거 때문에 욕먹고 살아. 혼자만 이득 챙겼다고.”

그럼 그렇지. 운이 없었다면 당신 주제에 어떻게 고급 무공서를 얻을 수 있었겠소!

사냥은 특별한 위험 없이 계속됐다. 독각룡과 은소소의 호흡은 톱니바퀴처럼 빈틈이 없었고, 나도 내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사실 컨트롤은 별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데려와서 패 죽이고, 또 데려와서 패 죽이고. 새로 산 컨트롤러에서 전해져 오는 진동과 타격감 덕분에 졸음이 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따분함은 어쩔 수 없었다.

뭐랄까? 너무 안전하다고 해야 할까? 항상 소환무사라는 양날의 검을 사용하는 긴장된 사냥만 했던 나에겐 너무 지루한 파티 사냥이었다. 다행히 시시한 파티 사냥도 끝날 때가 되었다.

몬스터를 몰아오던 독각룡도 따분함을 느꼈던지 이번엔 왕창 데려왔다. 총 9마리. 따분하긴 했지만 9마리는 좀 많았다. 너무 많이 데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독각룡도 난처하다는 기색이 역력했고, 은소소는 그런 독각룡을 보고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야, 이놈아! 우리를 몰살시키려고 작정했냐! 죽으려면 저리 가서 혼자 죽으라고! 이걸 다 데리고 오면 어떡하냐고!!”

은소소의 입은 욕을 하느라 바쁘고, 손은 검을 놀리느라 바빴다.

난 말할 정신도 없이 시체들을 향해 주먹을 연신 날렸다. 그런데 아뿔싸! 방금 내가 공격한 시체가 날 바라보는 게 아닌가! 이 시체는 아직 독각룡의 창이 적중되지 않은 녀석이었던 것이다.

독각룡은 내 위험한 상황을 알아보고 다가오려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뒤를 따라오는 시체 때문에 쉽지 않아 보였다. 나보다 레벨이 높아서 은연중에 보호해주고 있던 은소소도 이미 나처럼 시체 한 마리의 공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과 나는 일대일의 처지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크악!

시체의 공격은 다른 게 없었다.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시체 무리 덕분에 난 옴짝달싹못하고 그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입 냄새(강호에서 냄새는 지원하지 않는다) 가득한 물어뜯기 공격 말이다.

[출혈에 걸렸습니다. 1분간 지속적으로 체력과 내공이 소모됩니다.]

[중독에 걸렸습니다. 5분간 지속적으로 체력과 내공이 소모됩니다.]

재빨리 지혈산을 바르고 해독제를 먹었다. 그 와중에서도 육합권을 계속 시전했지만, 녀석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공격이 계속 적중됐지만, 이 망할 시체들의 체력은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곧 땅바닥에 몸을 뉘어야 할 것 같았다.

죽기는 싫으니 어쩔 수 없이 봉인을 풀어야 하는가?

“시전! 사상검진!”

[방어력이 1분간 2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한 시간 남았습니다.]

사상검진은 무당의 독문검진이다. 만약 무당의 내공과 검법을 사용하는 검수가 4명이라면 최대 효과 50퍼센트까지도 바라볼 수 있다. 다른 무공을 사용하고 숫자도 맞지 않았기에 최저 효과 20퍼센트밖에 나오지 않았다. 숙련치가 오르면 발동 시간이 증가하고, 재사용 시간이 줄어든다.

“헉! 이게 뭐야!”

아마 이런 효과를 본 건 처음이겠지.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은소소 씨.

“시전! 일성소(一聲笑)!”

[고양 상태가 되었습니다. 1분간 회피력이 10퍼센트 증가합니다. 재사용하려면 2시간 남았습니다.]

중급 음공을 수련하면 시전할 수 있는 잡기다. 구사할 수 있는 음공은 아직 이것밖에 없다.

방어와 회피가 좋아진 덕에 더 이상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진 않았다. 더구나 올라간 회피로 인해 공격 기회도 더 늘었다.

그렇게 내 몫의 시체를 다 잡고 나니 체력은 겨우 1할밖에 남지 않았다. 옆의 은소소를 보니 그녀도 그때서야 시체를 눕힐 수가 있었다.

일단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운기 행공을 했다. 급한 상황은 넘어갔다지만, 아직도 독각룡이 시체들을 달고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껴 둔 소림속명고를 꺼내 먹었다.

누런 황금빛 기류가 금세 나를 휩싸고선 소용돌이쳤다. 운기 속도가 2배가 되는 속명고 덕분에 평소보다 눈에 보이는 기류의 속도가 2배는 빨라 보였다.

재빨리 운기를 끝내고 은소소를 바라보니, 그녀도 운공을 하고 있었다. 하얀 기류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은소소의 무릎 근처에 고요히 머무르고 있는 게 전형적인 삼류 토납법인 양생도인술이 발동 걸린 모습이었다.

다행히 이번에 공격하는 시체들은 독각룡만 죽어라 쫓아다녔다. 아마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독각룡이 뒤늦게 조치를 취했으리라.

이후엔 별다른 일 없이 그렇게 시체 무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대체 무슨 무공이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배웠느냐까지.

그래서 어떡했냐고? 적당히 사기를 좀 쳐 줬지. 지능 스탯을 50까지 올려놓으니깐 책방에서 비급이 보이더라, 뭐 이런 식.

아마 저들이 절대 지능 스탯을 50까지 올릴 리는 없으니 부담 없는 거짓말이다. 어쨌든 자야 할 시간이다. 내일 또 보자는 은소소의 협박에 그냥 그러자고 하고선 로그아웃했다.

다음 날.

어제 사냥의 끝물에 보여 준 몇 가지 무공 덕택에 오늘은 특별히 태클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초보 취급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은소소의 나이를 알아낼 수 있었다. 32살. 나보다 3살이 많았다. 독각룡은 30살로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형, 누나로 부르면서 지내기로 했다.

호칭 문제가 편해지긴 했지만, 아직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적당히 둘러치긴 했지만, 그들도 내 무공에 대해선 뭔가 미심쩍은 게 많다는 걸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세히 질문하고 답변하는 건 강호의 법도가 아니다.

두 사람이 이곳을 딱히 좋아해서 썩어가는 시체들과 노는 건 아니었다. 한 명은 사정거리가 긴 창을 이용할 수 있고, 또 은소소는 공격력이 좋은 고급 무공을 갖췄기 때문에 이들만이 적응할 수 있는 사냥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은소소라는 사람이 그 괄괄한 성격 때문에 적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같은 동네에 산다는 독각룡이 챙겨 줘서 사냥이 가능하지, 은소소 혼자서 레벨 업을 하기에 다른 곳은 분위기가 안 좋았다. 사냥하다가 들은 이야기였다.

하기야, 난주 무림인 1백 명이 어쩌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혈랑대주에게서 그녀 혼자만 운 좋게 아이템을 독식했으니, 누군들 기분 좋게 생각할까? 강호처럼 죽음에 대한 페널티가 심한 곳에서 말이다.

아, 역시나 이곳은 너무 따분한 사냥터였다. 중독도 좋고 출혈도 좋다. 지저분한 면상을 자꾸 들이대는 저 시체들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문제는! 왜 한 종류의 몬스터밖에 없는 거냐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물리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살살 좀 꼬셔야겠다.

“소소 누님! 지겨워 죽겠어요. 우리 자리 좀 옮깁시다.”

“벌써 지겨워? 우린 별로 안 지겨운데. 너도 재미라는 녀석에 무신경해지도록 애써봐.”

독한 인간 같으니. 난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이 정도인데, 저 작자들은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거야?

“누님! 재미가 없다면 게임을 왜 하는 건데요? 우리 재밌는 데로 갑시다.”

“흠… 뭐 다른 데로 갈 수야 있긴 하지. 너만 제대로 따라와 준다면 말이야. 근데 어쩌지? 거긴 여기보다 더 센 데거든? 아직 썩어가는 시체 한 마리 제대로 감당 못하는 실력으론 어림없지.”

아직도 내 실력 가지고 놀리네.

“거참, 자꾸 그러시면 저 갑니다. 저도 혼자서 사냥 잘해요. 여태 그래왔으니.”

“야야!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말했지? 맘대로 못 나간다고. 너 난주 무림계에서 왕따 당하고 싶냐? 어디서 네 맘대로 나간다고 헛소리하는 거야?”

“왕따는 누님 이야기 아니었나요? 전 그렇게 들었습니다만, 크크.”

한 방 먹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안 삐치려나? 삐친 것 같네.

“좋아. 네 맘대로 해줄 테니깐 후회하지나 말어. 책임은 너한테 있다.”

냉랭한 분위기로 은소소가 협박을 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전부 다 내 책임이다? 이거 왠지 덜미 잡힌 듯한 느낌도 든다.

“누님, 그래도 괜찮을라나 모르겠네. 뭐, 나도 이 동네가 지겹긴 하지만, 그쪽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이기에 각룡이 형마저도 거리끼는 걸까?

그 대단한 곳은 먼 데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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