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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기찰당주 (3/62)

제3장. 기찰당주

“오, 조연 아닌가. 요새 자네가 보여 준 수완에 놀라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세.”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시나, 금적산 씨. 아직 내 실력의 일 퍼센트도 보여 주지 않은 셈이라고.”

“하하.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이. 그나저나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귀한 발걸음을 하셨나?”

‘에잇, 이 능구렁이 같은 할아범! 정말 내 놀려 먹는 말을 이해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하여간 뇌물이라는 게 효과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총수인 금적산마저도 날 이렇게 반겨 대니 말이야. 어쨌든 총수가 이렇게 반겨 할 만큼 내가 돈을 쏟아 붓긴 했지. 족히 십만 냥은 집어넣었으니 말이야.’

무림맹이나 낙양지부만 뇌물을 받는 건 아니었다. 황금산장은 더했다. 더구나 황금산장의 우호도를 올리는 건 다른 곳보다 2배의 자금을 더 필요로 했고, 그렇게 올려놓으면 혜택이란 게 겨우 전장의 대출 제한 폭이 좀 올라가는 것 정도로 별 효용도 없었다.

“레벨 업하려고 왔어요. 레벨 올려 줘요, 금적산 씨.”

아직까지도 내 레벨은 서기를 달 때 그 레벨 20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내 수중엔 1백만 냥이 조금 안 되는 돈이 있고, 그 정도면 레벨 업 뻥튀기를 하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레벨? 아, 물론 올려 줘야지!”

[레벨을 20에서 21로 올리시겠습니까? 은자 2천 냥이 필요합니다.]

[레벨을 21에서 22로 올리시겠습니까? 은자 2천 냥이 필요합니다.]

……

[레벨을 49에서 50으로 올리시겠습니까? 은자 10만 냥이 필요합니다.]

“네, 올리겠습니다.”

[은자 10만 냥이 인출되었습니다.]

이미 계산까지 다 하고 온 거지만, 막상 빠져나가는 돈을 보니 서글퍼졌다.

‘다른 직업들도 이렇게 비싼 레벨 업을 하는 걸까? 어떻게 이십에서 오십까지 레벨 업을 하는 데 무려 구십삼만 오천 냥이나 들어가냐고!! 아, 그나저나 겨우 오십 레벨밖에 안 됐는데, 다음 레벨부터는 더 큰일이구만. 이제 일 레벨 업을 하는 데 이십만 냥이나 들어가니…….’

일단 상태창을 오픈해서 새로 얻은 능력치를 전부 지능으로 몰아줬다. 체력 100에 배운 무공은 하나도 없고, 이젠 돈도 몇 푼 가지고 있지 않은, 머리만 좋은 황금산장 상인. 그게 지금 내 상태다.

“황금산장 장주 금적산 씨. 이제 승급 좀 시켜 주죠? 나도 할 만큼 했잖아요?”

어느 정도 레벨도 올렸으니 승급이 될 것 같았다.

“오! 그래그래. 어찌 그 능력에 아직 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가? 그렇잖아도 최근 기찰당주 자리가 공석이 되어 누굴 앉힐까 걱정했는데, 마침 제때 잘 와주었네. 자네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지. 노임은 월 삼천 냥일세.”

[황금산장 기찰당주로 승급했습니다.]

[명성이 2,000 증가했습니다.]

[외부 지역으로의 이동 제한이 없어졌습니다.]

갑자기 올라오는 시스템 메시지.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외부 지역의 이동 제한이 풀렸다니? 지금은 오픈 베타 기간이라 못 가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기찰당주라면 한 조직에서도 손꼽히는 자리였다. 비리가 발생할 소지가 많은 상계에서 그 비리를 감찰하는 일이었기에 상인들에겐 거의 염라대왕과 호형호제할 만한 권력자였다. 아마 지금의 내 직급보다 높은 자리라면 금적산 밑의 몇몇 상두(商頭), 총관이나 산하 기업의 총수들, 그리고 호상단(護商團)의 단주 정도나 되려나?

일단 레벨도 오르고 직위도 올랐으니, 무림맹에 가서 또 어떤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확실히 세상을 살다 보면 껍데기가 중요하긴 한가 보다. 대(大)무림맹의 내당으로 들어가는데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저기는 청심전(淸心殿), 저기는 오룡각(五龍閣), 흠, 또 저건 뭐냐. 의천전(倚天殿)? 이름 보니 뭐 하는 곳인지 알기도 쉽구만. 의천전은 맹주 집무실일 테고, 청심전은 장로원쯤 되겠네. 오룡각은 무림맹 오단의 수뇌들 집무실쯤 되려나?”

살펴보니 대충은 맞았다. 의천전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건물이어서 맹주 집무실 같다는 짐작이 확실했고, 청심전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에서 보낸 장로들의 노인정이 맞았다. 단, 오룡각에 대한 예상만 틀렸다.

오룡각은 말 그대로 5층 누각이었다. 5층의 무게를 버티고 서 있는 그 거대한 대들보와 문설주의 크기가 얼마나 크던지. 역시 중원 무력의 최강 단체다웠다.

4, 5층은 들어갈 수 없어 정체를 알 수 없었고(아마 소림의 장경각처럼 비고(秘庫)가 아닐까 짐작된다), 3층은 총사와 무림맹 오단주들의 집무실, 2층은 기타 내단의 중요 부서들, 1층은 민원실(?)이었다. 이름은 점잖게 접객실이라고 불렸지만.

그리고 역시나 그 민원실에 내가 찾던 녀석이 있었다. 이름도 거창하다. 무림맹 접객당주 혼원벽력수(混元霹靂手) 노대광(盧大廣).

‘혼원벽력수라는 별호가 무척 낯이 익는데? 그런데 이 별호가 일개 접객당주에게 걸맞긴 하는 건가?’

“아, 어서 오시게나, 조 당주.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네.”

‘엥? 기다리고 있었다니, 뭔 말이야? 또 내 돈 강탈하려고 그러나?’

“올여름에 황하 지역에 내린 비로 수해가 엄청나지 않았나. 결국 수백만의 백성들이 터전을 잃고 유리걸식하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지. 황상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 구휼에 힘쓰고는 있지만, 관의 손길이 세상을 다 구할 순 없는 노릇이야. 그래서 우리 맹주님께서 이르셨지. 그동안 강호 안녕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지만, 지금의 천하 만민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찌 무림의 협사라고 불리길 원하느냐고.”

“…….”

“그래서 맹주님의 말씀도 있었고, 또 우리 무림맹 오단에 시간이 좀 남는 무사들이 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무인들이 백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겨우 칼 쓰기밖에 못하는데 말이야. 별로 안 비싸다네.”

“…….”

“이류급 무사 오천 냥, 일류는 이만 냥, 절정고수 십만 냥만 내시게.”

역시… 짐작이 맞았다. 날 반겨 주는 녀석들은 언제나 내 돈에 관심 있는 녀석들뿐이다. 그리고 나도 내 돈을 보고 날 반겨 주는 이들을 사랑한다. 얘네들 덕택에 내가 이만큼 큰 것도 사실이니, 좋은 관계가 아닌가.

그나저나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4만 냥도 안 되니, 겨우 일류 무사밖에 고용하지 못하네? 근데 일류 무사 가지고 뭐 하라구? 허접한 산적패는 무림맹 하급무사만으로도 되는데. 설마, 일류 무사 한 명 믿고 마천채를 쳐?

헉! 맞다. 마천채! 이 빌어먹을 우리 조추산 형님의 원수 집단!!

그런데 마천채를 치려면 최소 절정급 무사는 되어야 할 텐데. 과연 10만 냥어치의 값어치를 할 수 있을까? 마천채를 토벌해봤자 겨우 그 낡은 무기류밖에 떨어지지 않으면 완전 적잔데.

음… 일단 정리를 해보자.

지금 상황에서 안전하고 평범하게 간다면 이류나 일류급 무사를 고용해서 다른 지역의 적당한 사냥터를 물색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물론 그 사냥터가 낙양 근처엔 없다. 정주나 개봉은 대도시라서 가능성이 희박하고, 하북 쪽 접경 지역이라면 혹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문젠 그곳까지 걸어가는 데만 족히 하루는 걸린다는 것이다. 게임 시간으로 열흘 거리. 더구나 낙양까지 돌아올 생각을 한다면 왕복 이틀.

지역 간의 이동 제한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이마저도 거리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내가 무공을 배운 정상적인(!) 상태라면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난 60시간짜리 무사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무림맹에 매인 몸.

그러고 보니 내가 무림맹 소속인지 황금산장 소속인지 헷갈리네.

한마디로, 마천채밖에 없네. 결국 저 절정고수를 임대해야 한다는 거구. 며칠간 빡세게 사냥한다면 적자는 면하겠지만, 결국 본전치기잖아! 레벨 업도 안 되는데……. 별수 없지, 대박이 걸려들길 바라는 수밖에.

“아! 노 당주, 지금은 돈이 없으니 조금 이따 오겠네. 손님 잘 모시고 놀고 있게나.”

지금 내가 황금산장 소속의 전장에서 빌릴 수 있는 돈은 10만 냥이나 된다. 10만 냥이면 제법 큰돈이다. 떼먹고 도망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돈 떼먹으면 큰일 난다. 지닌 아이템들이 비싼 것부터 하나 둘 사라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명성은 마이너스가 된다. 그나마 내가 황금산장 소속이라서 신용 거래가 가능한 것이다.

황금산장 소속이라도 그만큼 투자한 레벨 업 비용과 우호도 비용이 이 빌릴 수 있는 한계치 10만 냥보다 훨씬 많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일반인들의 경우엔 담보물을 저당 잡히고서야 돈을 빌려 준단다. 그나마도 담보물의 70퍼센트까지만.

하여간, 전장에서 10만 냥을 빌린 난 노 당주에게서 절정 무사를 살 수 있었다.

[무림맹 절정 무사 임대권.]

마천채가 있는 곳은 알고 보니 복우산에서 제일 높은 마천령(摩天嶺)이었다.

다시 찾아가는 길은 쉬웠다. 젤 높은 곳으로만 가면 됐으니 말이다.

다 왔다. 녹림의 산채치고 말도 안 되는 크기를 자랑하는 산채. 다시 봐도 겁나게 생겼다.

“소환! 무림맹 절정 무사!”

대충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고, 나의 유일한 무기인 무사 소환을 외쳤다.

[무림맹 절정 무사를 소환했습니다. 60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무림맹으로 복귀합니다.]

“소환 상태창 오픈!”

[소환 상태

소속:무림맹 절정 무사

전투 타입:공격형

공격력:3,000

체력:10,000/10,000

내공:100,000/100,000]

“공격력은 하급무사의 서른 배나 되면서 체력은 겨우 다섯 배네. 거기에 내공은 백 배라니……. 정말 이 강호를 기획한 사람 무협 소설 많이 봤나 보네.”

단순히 모든 수치가 일정하게 오른 게 아니라 내공만 특출 나게 차이가 나는 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삼류 무사와 절정고수의 차이점을 잘 보여 주었다.

“타입 변경, 조화형!”

‘일단은 조화형으로 해보자구. 공격형으로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한번 둘러싸이면 도망치기가 힘드니.’

“좋아. 일단 준비는 됐고. 아차차! 그런데 자네 이름이 뭔가?”

굳이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최초로 강호에 절정 무공을 선보일 검객의 이름은 반드시 알아두는 것이 좋겠지. 더구나 NPC 이름을 알아두면 명령 내리기에도 좀 편한 게 있으니 말이다.

“무림맹 청룡단 소속 현풍자입니다. 사문은 무당입니다.”

“오호! 무당파라니. 댁이 말로만 듣던 구대문파 본산제자군요!”

절정무사쯤 되니 사문도 밝힌다. 신기하다. 더구나 무당파라면 소림파와 더불어 무림의 양대 봉우리, 중원 제일의 검파가 아닌가.

그런데 보통 절정무사라면 각 문파의 장로급을 말하는데, 이 장년인이 설마 무당의 장로일 리는 없고. 나이로 봐서는 일대제자쯤 되어 보이는데, 무림맹 장로원 소속이 아니라 오단 소속이라… 그렇게 무림맹이 대단했단 말인가? 그럼 내가 놀려 먹던 접객당주 노대광 씨는 절정을 넘어선 무사일 텐데, 대체 그 어리바리한 모습 어디에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을까?

무림에서 무공 수준의 고하는 무엇보다 우선시된다. 더구나 NPC가 아니던가. 게임사에서 철저하게 비교해 설정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현풍자의 성취가 절정급이면서 본산의 일대제자라면, 통념상의 무림 수준보다 한 단계 위라는 설정이 되는 셈이다. 결국 장로급은 최절정, 태상 장로나 장문인들은 초절정이 되는 식이다.

달리 현풍자가 무당 소속이라서가 아니다. 아마 구대문파 중에서 성세가 비교적 약한 청성이나 공동, 점창파 소속이라도 일대제자는 절정급 무사라고 말할 것이다. 중원 제일 검파 무당이라서 일대제자가 절정이 아니라는 소리다.

일반적인 구파일방의 수준이 그 정도라면 절대고수들의 수준은 초절정의 경지마저 넘어버린 수준이 되는 셈이다. 과연 그런 NPC 고수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 단계가 어떻게 불리는지는 차차 알 수 있겠지. 아마도 까마득한 뒷날에나 알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단순한 대화 속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해두는 건 좋은 일이다. 다음부턴 꼬박꼬박 NPC 캐릭터들한테 이름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이제 그럼 시작해보자구. 현풍자, 저기 오른쪽 보초부터 시작하지. 공격!”

현풍자는 절정의 경지라 그런지 삼류무사들과는 격이 다른 속도로 내가 지정한 오른쪽 경비에게 달려들었다.

서걱!

딱 한 번의 칼놀림이었다, 경비가 죽어 나자빠진 건.

땡땡땡땡!

“적의 침입이다!! 적의 침입이다!!”

땡땡땡땡땡!

예의 그 경계 발령 소리가 복우산을 진동시키고, 마천채의 입구에서부터 산적들이 우글우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난 현풍자에게 바로 공격 목표를 정해주었다. 새로운 목표가 할당될 때마다 어김없이 현풍자가 검을 날렸고, 그때마다 산적들의 수급이 땅에 떨어졌다. 꼭 한 번씩이었다.

한 번의 칼질. 한 사람의 목숨.

그런데 이런 절세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인해전술엔 별수가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산채를 둘러싼 외벽에 궁수까지 출현했고, 사방을 둘러싼 1백 명이 넘어가는 산적들로 인해 현풍자는 단 한 번의 공격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챙챙챙챙! 챙챙! 따꿍~

콩 볶는 소리만큼이나 요란한 소리가 계속 들렸다. 모두 현풍자가 산적들의 칼질을 검으로 막는 소리였다. 간혹 화살을 막는 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다행히 특별히 강한 상대가 없어서 모든 공격을 회피하고 방어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포위진이 완성된 상황에서 단 한 번도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내공이 다 소진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일단 물러나자. 현풍자, 후퇴다! 후퇴!”

예전의 조추산이 어설프게 물러나다 순식간에 도륙당한 것과는 달리, 현풍자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산적들의 머리를 밟는 듯한 모습으로 내게 돌아왔다. 정말이지 절정의 경지가 어떤 수준인지 한눈에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그런 현풍자의 신기(神技)에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수백이 넘어가는 산적들이 나와 현풍자에게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야, 텨텨!”

강호에 와서 잘 쓰지도 않는 말을 내뱉으면서 난 부리나케 오솔길로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도망치고 나서야 산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쉴 새도 없이 우린 다시 마천채로 돌아갔다. 아직 산채 입구에는 산적들이 바글바글했다. 다시 목표를 정하고 현풍자에게 돌격을 명했다.

아까처럼 아군의 무위에 놀라 컨트롤이 엉망이 되진 않았다. 현풍자의 검 아래에선 산적들이 모두 한칼에 죽는다는 걸 알았기에, 재깍재깍 새로운 목표물을 설정해줄 수 있었다.

“공격! 공격! 공격! …공격! 공격!”

역시나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현풍자는 아까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다. 나는 다시 후퇴 명령을 내렸고, 우린 좀 전처럼 한참을 도망쳤다.

그런 식으로 두어 번을 더 하고 나자 밖에 진을 치고 있던 마천채 산적을 싹쓸이할 수 있었다.

나는 일단 현풍자를 불러들였다.

“소환 상태창 오픈!”

[소환 상태

소속:무림맹 절정무사

전투 타입:조화형

공격력:3,000

체력:8,741/10,000

내공:23,400/100,000]

“체력은 별로 안 깎였는데, 내공 소모가 장난이 아니네. 무턱대고 산채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큰일 날 뻔했네.”

일단 현풍자의 상태를 최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마천채 입구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현풍자가 운기 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 무림맹 하급무사들하고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기야 하급무사들의 경우엔 내공보다 체력 소진이 더 심했으니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게 더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래도 NPC 캐릭터가 운기 조식을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은은한 광채에 싸여서 기가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란!

그런데 이럴 때 적이 나타나면 난 누가 지켜 주지?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현풍자!

설마, 위험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아는 건가? 정말 이 게임의 인공지능이 그걸 판단할 수준이란 말인가?

생사, 생존에 결부된 판단은 모든 동물에게 있어서 본능의 영역이다. 그걸 일개 컴퓨터가 인공지능으로 판단할 수 있다면, 다른 본능에 관한 부분도 알고 있다는 식이 된다. 모든 문제는 연관되어 있으므로.

일단 이 문제는 유보해둬야겠다. 이게 알고리즘의 허점인지, 아니면 인공지능적인 판단인지는 말이다.

이런 묘한 감상에 대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리려고 할 때, 현풍자의 운공도 끝이 났다.

체력과 내공이 완벽히 보충되진 않았지만 운공을 끝낸 현풍자의 모습을 보건대, 운기 조식이 급한 상황을 어느 정도 숨 돌릴 만하게 만들 뿐이지 최적으로 만들어주진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공 수치가 정확히 8만에서 멈춘 걸로 보아 운기 조식으로는 최적 상태의 80퍼센트까지밖에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 자, 현풍자! 적당히 쉬었으면 이제 밥값을 제대로 해보자구.”

현풍자가 산적패들을 쓸어버린 자리엔 온갖 병장비가 널려 있었다. 그게 바로 현풍자의 밥값이었다.

족히 2백 명의 산적을 도륙한 곳이니, 전리품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다행히 앞서 잡아왔던 산적패들이 주던 ‘낡은’이라는 옵션이 없는 깨끗한 아이템들뿐이었다. 녹림 72채의 수준을 말해주는 듯했다.

절정무사의 단칼에 죽어 나자빠지는 녀석들에게 특별히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이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드롭 아이템에 대해선 실망이 컸다.

대감도, 대부, 언월도, 장창, 박도, 방편산……. 뭐 하나 색다를 게 없는, 상점에서 파는 아이템들이었다. 딱 산적이나 쓸 만한 아이템. 일반 유저들은 이런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 상점행이 될 것이다.

대충 전리품을 챙기고 현풍자를 앞세워 마천채 입구를 통과했다. 입구 주변은 한산했다. 아마 경보가 울리자마자 근처의 산적들이 다 쏟아져 나온 듯했다. 그래도 아직 마천채는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과연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산적패들이 살고 있는 걸까?

마천채 입구를 주변으로 해서 좌우로 막사들이 즐비했다. 그 막사들에서 아까의 엄청난 산적들이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가운데는 광장이라고 불릴 만큼 넓은 공터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산채이다 보니 경사로 인해서 그저 넓은 오르막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저 멀리, 제대로 기와를 얹은 전각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꽤 강한 인상의 잘 차려입은 산적들이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그 전각 좌우로 비록 기와는 아니지만 꽤 큰 너와집이 몇 채 있었는데, 아마도 산채 중견 간부들의 집무실 같았다. 그리고 산채 외곽을 빙 둘러싸며 움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 아마 산적들의 식솔이 머무르는 장소 같았다.

대충 가늠해보니 족히 1천 호(戶)는 되어 보였다. 이 정도면 부락의 수준을 넘어 거의 읍(邑)이라고 해야 할까?

입구에서는 별일 없이 지나칠 수 있었지만, 정면의 전각을 향해 갈 때마다 산적 패거리들이 공격을 해왔다. 다행히 그 숫자가 처음처럼 무지막지하진 않아서, 따로 현풍자를 후퇴시킬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산적들의 무공 수위도 우리가 전진한 만큼 따라 올라가는지 점점 현풍자의 공격을 막는 녀석들이 나타났고, 단칼에 죽어 나가는 녀석은 거의 없었다. 이젠 두세 번 검을 휘둘러야 정리가 됐다.

그렇게 현풍자는 산적들을 정리해 나갔고, 나는 산적들이 떨군 아이템을 수거해가면서 새로운 공격 목표를 설정해주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더해서야 비로소 벽력수 왕곤이라는 마천채주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런 천하의 막돼먹은 종자 같으니! 죽지 못해 산으로 숨어든 양민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여 없애는 까닭이 무엇이냐!”

조금 찔리긴 했다. 강호가 실재(實在)하고 내가 지금 현풍자의 위치라면 상당히 찔릴 만한 일이겠지.

“현풍자! 신경 끄고 마저 쓸어버리자고. 저기, 채주 친위대처럼 보이는 녀석부터 공격해.”

기획자가 의도한 NPC의 대화 따위에 말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무림에서 칼질 한 번 못하는 식이 될 테고, 게임을 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핑계 없는 흉신악살이 어디 있을까.

채주 친위대들이라 그런지 무공이 상당했다. 직접 붙어보질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무림맹 하급무사들보단 강해 보였다. 다행히 그 친위대의 숫자는 10명밖에 되지 않았다.

벽력수 왕곤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왕곤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쩌면 절정 무공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대략 5분쯤 지나자 친위대를 다 정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채주 친위대들을 없애자마자 벽력수 왕곤이 현풍자에게 장풍을 쏘아댔다. 여지없이 장풍이 현풍자에게 격중됐다. 옆에서 보기엔 너무도 강력해 보이는 일격이었다. 재빨리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소환 상태창 오픈!”

[소환 상태

소속:무림맹 절정무사

전투 타입:조화형

공격력:3,000

체력:7,000/10,000

내공:65,000/100,000]

친위대들과 싸우기 전에 확인한 체력이 8천 정도였는데, 단 한 번의 장풍으로 체력이 1천이나 없어졌다. 일단 위험하진 않아서 두고 보자며 계속 공격을 시켰다.

펑! 펑! 서걱! 펑!

빗나가는 장풍과 현풍자의 검이 격중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벽력수라는 말에 걸맞게 왕곤의 무공은 일격필살의 권법을 구사했다. 아마 현풍자가 절정급 무사가 아니라 일류 무사만 됐어도 어쩌면 왕곤의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괜히 비싼 돈 들여서 고용했다는 생각이 절로 사그라졌다.

왕곤의 장풍이 강력하긴 했지만, 현풍자의 몸놀림은 더욱 표홀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장풍을 무력화시키곤 왕곤에게 매서운 일침을 가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연달아 검을 먹이다 보니 어느새 대녹림 72채 채주인 벽력수는 땅바닥에 몸을 눕히고 말았다.

“하하, 정말 대단하네. 현풍자! 자네는 오늘부터 무영검객이라고 칭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그렇게 대단한 무공은 처음 봤어!”

뭐, 내가 절정검객의 수준을 제대로 확인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솔직히 가끔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잘하고 있는 짓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나도 직접 무공을 배워서 이런 고수들과 손을 섞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아무리 허접한 산적패라도 직접 겨루고 싶은 생각이 하늘을 찌를 때가 있단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난 강호에서 최고를 먹기로 다짐했기에, 지금의 고뇌도 그에 따른 수고라고 생각할 수밖에.

채주라고 해서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떨궜을지 기대했건만, 역시 산적은 산적. 별게 없었다. 그저 ‘묵룡수(墨龍手)’라는 수투(手套) 하나와 ‘마천채 비고 열쇠’라는 조금은 기대를 가져 볼 만한 아이템 한 개뿐이었다.

[묵룡수(墨龍手)

공격력:500

사용 제한=힘:30 체질:20

교룡의 껍질을 천일 제련한 장갑. 권법에 소모되는 내공을 2할 줄여 주는 효용이 있다.]

내겐 필요 없다지만, 나름대로 권사(拳士)가 쓰기엔 쓸 만한 아이템이었다. 이걸 팔아야 되나? 그냥 보관해둬야 하나? 문제는 그거였다.

왕곤의 집무실, 즉 기와를 얹은 마천채 유일한 전각엔 예상대로 열쇠에 걸맞은 상자가 있었다. 보물 상자라고 말해야 하나?

상자를 열어서 3가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다.

금궤 3개, 벽력권이라는 권법 무공서, 초화앵령도(草花鶯玲圖)라는 그림 하나.

금궤야 상점에 팔아치우면 그만이지만, 도대체 그림 같은 골동품은 어디에 제값 받고 팔아야 한단 말인가?

하여간 대충 정리를 하고 나서 왕곤이 머물던 전각 뒤로 향했다. 물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NPC 캐릭터들, 그리고 몬스터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 생성된다. 그 기준은 그 캐릭터들이 소멸되고 난 이후부터 개별적으로 계산되는데, 같은 조직이라도 소멸된 시간에 따라서 재출현 시간의 차이가 생긴다.

이건 관도를 따라 산적들을 사냥할 때 이미 알아둔 사항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마천채에서도 최초에 쓸려 버린 입구 쪽의 하급 산적부터 시작해서 새로 NPC들이 생성될 것이다.

그런데 굳이 내가 그런 산적패들을 일일이 사냥할 필요가 있을까? 경험치도 얻을 수 없는데? 그 자잘한 병기들을 열심히 수집할 필요가 있다면 모를까, 정신력을 별 소득 없는 일로 소모하긴 싫었다. 그래서 난 마천채의 주력인 친위대와 왕곤만 노리기로 했다.

마천채주 왕곤이 다시 출현한 것은 정확히 4시간 후였다.

마찬가지로 왕곤의 식상한 대화를 들어주고 친위대부터 쓸어버린 후 왕곤을 없앴다. 왕곤이 이번에 떨군 아이템은 마천채 비고 열쇠와 백호피였다.

백호피는 그냥 값비싼 재료템일 뿐이었다. 비고를 열어 얻은 아이템은 금궤 2개, 벽력권, 모란초충도라는 그림 하나였다.

다시 4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서 로그아웃했다.

다음 날.

새 아침이 밝아오면 새로운 사냥이 시작된다. 그리고 새로운 아이템과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즐거움이 반겨 준다.

…라는 게 보통의 강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일진대! 이제 오픈 베타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상용화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 아직 왕곤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돈의 유혹이라는 마수. 벽력수가 아니라 세뱃돈 주는 할아버지의 재수(財手)로 보인다. 하하.

마천채 사냥 첫날이 환희의 도가니였다면, 둘째 날은 즐거움이 익숙해지는 시간. 셋째 날부터는 뭐랄까, 바람 빠진 풍선쯤? 이후는 모르겠다. 생각이 없어졌다.

그동안 얻은 아이템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나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 묵룡수라는 장갑을 한번 강호 홈페이지에 거래하겠다고 올렸다가 난리가 난 다음부터는 아이템 하나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묵룡수의 가치는 1백만 냥이었다. 도대체 이 가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유일한 공급원인 나도 잘 이해가 안 간다.

1백만 냥을 가지고 있는 유저가 있을까? 나 말고 말이다. 지금 열심히 저 밑에서 맹수 사냥을 하고 관도의 산적패를 잡고 있을 유저들의 수중엔 기껏해야 1, 2십만 냥의 돈만 있을 텐데. 그것도 그네들이 흔히 말하는 강호의 최고수들이 말이다.

하여튼 그 비싼 1백만 냥짜리 묵룡수를 그동안 3개나 팔아치웠다. 강호엔 기인이사가 많다고 하더니만, 숨은 갑부도 그에 못지않나 보다.

처음엔 돈이 없어서 ‘무림맹 절정무사 임대권’을 달랑 한 장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다시 낙양 무림맹으로 돌아갔을 땐 5장이나 들고 왔다. 완전한 폐관 수련, 은거 수련인 셈이다. 마천채 뒷담에 숨어서 몰래 보스만 잡아먹는, 어떻게 생각하면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냥법.

가끔 지나가던 유저들이 쳐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경계 발령이 뒷담까지 들려오곤 했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해보지만, 역시나 왕곤 앞까지 오는 사람들은 아직 한 명도 없었다. 하기야 파티를 맺고 온다고 치더라도 최소 수십 명의 이류급 이상의 무사가 동원돼야 할 것이고, 지금의 시간상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왜 어림도 없는 이야기냐고?

절세의 영단, 기보를 통해서 절정에 오를 기연을 얻는다고 쳐도, 보통은 5년, 10년이 흘러야 그 기세를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10년이라고 치면 현실 시간으로 1년쯤이다. 접속하자마자 소림의 대환단 10개를 마구 씹어 먹고 줄창 역근경, 세수경이니 하는 최고의 내공심법과 절세무공을 단련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1년인 것이다. 그 기연과 1년의 고련이 지나서야 지금 내 눈앞에서 왕곤을 때려잡는 청성의 백령자쯤 되는 절정고수가 된다.

“끄윽! 이 천하의 살인마들 같으니……. 끅.”

왕곤이 죽었다.

“이제 살인마 소리 듣는 것도 익숙해지네. 그나저나 이번엔 좀 색다른 것 좀 흘리셨나? 에게게, 또 묵룡수냐? 근데 이건 뭐냐? ‘흑점:낙양 분점 출입패’? 흑점이라… 흑점이라고? 정말 흑점이야? 푸하하하! 크하하하!! 아싸라삐야~ 드디어 내게도 기연이 찾아왔구나! 내 이날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푸하하! 드디어 금적산 노친네 부하 신세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구나!!”

흑점(黑店).

달리 말해 중원의 장물아비 집단이다. 드러내놓고 팔 수 없는 모든 물건을 팔며, 때론 주문 판매도 한다. 가격은 물론 터무니없이 높다. 아니, 애초에 가격이 설정될 수 없는 물건들이 나오기에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각 문파의 독문무공을 외부인이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그 문파에 가입한 자들만이 독문무공을 배울 수 있다.

지금 화산파나 소림파의 문하에 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무관 같은 곳에서 적당한 신체 단련을 하고 조건을 끌어올린 후, 소림사에 상당한 액수를 기부해야 가능하다.

게다가 그 전에 다른 문파의 무공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특히 내공심법은 오직 운기토납법 같은, 익히나 마나 한 수준의 것 이상을 배우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문하에 들고 난 이후가 더 문제이다. 소림은 나한권을 10성까지 수련하지 않으면 산문 밖에 나갈 수 없다. 화산파는 매화검을 마찬가지로 10성까지 수련해야 한다. 그런 대문파에 들면 월급도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밥은 준다더라.

그렇게 수련을 하고 밖에 나와서 강호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올리면 무공을 하나씩 더 알려 주는 식이다.

문제는 그렇게 간신히 올린 명성으로 배울 수 있는 무공이란 게 자문파에서 가르쳐 주는 것밖에 없다는 점이다. 소림파면 오직 소림의 무공만을 익힐 수 있다. 다른 문파의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파문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면 익힌 모든 무공이 사라지고 명성은 마이너스가 된다. 이건 못할 짓이다.

아직까진 이런 식으로 자문파의 무공만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적용되는 곳이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무공의 종류와 위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최고의 무공을 배우기 위해선 엄청난 시간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덕분에 그런 대문파에 들려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게 싫다면 무관에서 낭인무공을 배우고 몬스터를 잡아 나온 잡다한 무공을 배울 수밖에 없다.

왕곤의 보물 상자에서 나오는 벽력수 같은 무공이 바로 그런 낭인들에게 팔리는 무공서다.

그런 형편이니, 흑점의 출입증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겠는가. 비록 이미 문파에 가입한 이들에겐 그곳에서 구입한 다른 문파의 무공 비급 따윈 필요 없겠지만, 절세의 영약, 아이템들은 그들도 필요하다. 간단하게 돈만 지불하면. 막대한 돈이 들겠지만 말이다.

“어라? 그런데 흑점이 어디야? 죽어버린 왕곤한테 물어볼까? 낙양의 수만 채나 되는 집을 일일이 다 뒤져야 돼? 이거 참, 숟가락은 있는데 밥이 없는 꼴이네.”

뭐, 차차 알 수 있겠지.

어차피 이번에 소환된 절정무사가 마지막이었다. 시간도 마지막으로 왕곤을 한 번 더 때려잡을 정도는 남아 있고.

왕곤은 내 질문에 답변을 주지 않았다. 흑점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장풍이었다. 물론 나한테 보내는 장풍이 아니라, 내 호위 무사한테 보내는…….

마지막 왕곤 사냥을 끝내고 낙양으로 귀환했다. 금의환향이란 바로 지금의 나를 위해 있는 말일 게다. 1백만 냥짜리 묵룡수가 20개. 금궤는 또 몇 개더라? 아직 한 번도 풀지 않은 무공서 수십 권. 각종 보물과 몇몇 정체를 알 수 없는 재료 아이템.

* * *

흑점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건 생각만큼이나 힘들었다. 우리 황금산장의 대장 금적산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고(솔직히 금적산 정도라면 세상에 모를 일이 있을까? 황금산장에도 정보 집단이라는 게 존재할 텐데 말이다), 그나마 돈으로 친해진 무림맹의 순찰당주나 접객당주도 묵묵부답이었다.

조금이라도 정보를 던져 줄 만한 NPC들에겐 전부 접근해보았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하늘이 노랬다. 미친 듯이 몇 시간 동안 발품을 팔았더니 허탈과 짜증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흑점 출입패가 원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예 얻지를 못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왕곤 작업이나 하면서 다른 꼼수를 준비할 텐데.

그렇게 허탈감에 빠져 낙양 뒷골목을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으로 ‘다시 마천채로 복귀해야 하나’ 하고 가늠하고 있을 때,

“어이, 거기 공자! 불쌍한 거지한테 한 푼만 던져 주시면 염라대왕이 착하다고 해주실 거야!”

뭐냐. 저 거지는 배가 불렀나? 그렇잖아도 짜증나는데 저렇게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게 작업하면 입에 풀칠이나 하겠어? 왜 하필 염라대왕이야. 적선하고 바로 저승 구경 가라는 거야?

“어이, 거기 거지! 그래서는 산 입에 거미줄 치기 딱 좋겠네. 요새 몸보신 좀 한 거야? 그래서 밥이 먹기 싫어진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거지랑 싸움하는 줄 알겠네. 행인 한 명 없는 뒷골목이라서 다행이다.

“어이, 거기 공자! 불쌍한 거지한테 한 푼만 던져 주시면 염라대왕이 착하다고 해주실 거야!”

또 그 소리네.

“야, 거지! 말했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아무리 착한 졸부라도 구리돈 한 문 던져 주지 않는다고.”

“어이, 거기 공자! 불쌍한 거지한테 한 푼만 던져 주시면 염라대왕이 착하다고 해주실 거야!”

말을 먹네. 대화형 캐릭터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NPC에 불과한 건가? 시험해봐야지.

“야, 거지. 얼마야? 얼마 주면 돼? 내가 좀 돈이 많거든? 적선 좀 해줄게.”

“아이고! 나으리, 황송합니다. 제가 팔순 노모 봉양하랴, 골골거리는 마누라 병치레까지 하느라 가산 다 말아먹고 늙어서 이 짓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한 자식새끼들까지 딸려 있어서 말입니다. 많이만 주십쇼! 많기만 하면 됩니다.”

돈 준다니깐 그새 태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뭔 말이 이렇게 많냐.

[낙양 거지 호칠에게 은자 10냥을 적선하시겠습니까?]

커억! 은자 10냥? 평범한 직장인 월급의 10분의 1? 이 거지가 미쳤나. 생긴 것도 쥐새끼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도 딱 사기꾼이네. 그래, 좋아! 네놈 사기가 어디까지 가나 한번 응해주지!

“예, 적선하겠습니다.”

[은자 10냥이 인출되었습니다.]

“아이고, 나으리!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사기가 성공했으니 말이야.”

“어이, 거기 공자! 불쌍한 거지한테 한 푼만 던져 주시면 염라대왕이 착하다고 해주실 거야!”

“내가 네놈 또 이럴 줄 알았다. 그래, 돈 줄게.”

[은자 10냥이 인출되었습니다.]

[은자 10냥이 인출되었습니다.]

……

[은자 10냥이 인출되었습니다.]

대략 1백 냥쯤은 사기 행각에 보태줬나 보다. 언제까지 가나 했는데, 곧 떡밥의 효과가 나타났다.

“어이구, 조연 아닌가!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인가!”

하하, 귀엽네. 내 이름도 알아주고 말이야. 이제 한번 본래 목적대로 진행해볼까?

“그래, 호칠. 반가워. 내가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그래. 사람은 돈이 없어도 못 살지만, 궁금한 게 있어서도 못 살지. 말만 하게. 물론 약간의 성의 표시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야!”

역시 거지 근성을 버리지는 못하는구만.

“호칠, 자네 말이야. 혹시 소속이 있나? 자네 개방도가 아닌가?”

“그 정도야 특별히 사례를 받지 않고도 답해줄 수 있지. 개방 하남 분타 낙양 지부 소속이 맞네. 음… 직급은 보다시피, 아! 이거 보이지? 내 가슴팍에 달린 매듭 말이야. 개방 일결제자라는 표식이라네. 또 궁금한 게 있나? 돈만 주면 다 말해주지.”

역시나 개방도였던가? 그런데 개방에서 정보 장사도 하나 모르겠네.

“음, 별로 궁금한 건 아닌데 말이야. 자네 혹시 흑점에 대해서 들은 바 있나?”

“아, 흑점! 흑점 모르는 강호인이 어딨던가. 그 사악하기 그지없는 집단을 말이야. 나야 물론 흑점 자알~ 알지. 그런데 말이야, 딱 백 냥일세. 돈은 있나?”

[낙양 거지 호칠에게 정보비로 1백 냥을 적선하시겠습니까?]

[은자 1백 냥이 인출되었습니다.]

“흑점을 누가 세웠는지는 나도 모르네. 아마 걔네들도 모를 거야, 자기네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말이야. 어쨌든 걔네들 보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듣자하니 청성의 일대제자 한 녀석이 자기네 배경만 믿고 흑점에서 강짜 부리다 다음 날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된 일이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야.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예전에 공동파 장로들인 복마오검이 떼죽음 당한 일도 흑점에 연관돼서 그렇다고 하니, 어쨌든 조심해야지. 뭐, 자네 같은 사람하곤 관계없는 일이겠지만 말이야. 하여간에 며칠 전 옆 동네 우삼이한테 듣자하니 남경에서 모용세가의 파락호 누구누구가… 그래서 말이야,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지.”

듣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흑점에서 개기다가 누가 죽어 나자빠진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잖아, 이 친구야!

“그걸 듣고 싶은 게 아니네. 내가 알고 싶은 건 말이야, 호칠! 이 친구야, 잘 들어. 괜히 돈만 먹고 딴소리하지 말고. 여기 낙양에 흑점이 어디냐는 것일세. 알고 있나?”

“음… 그러니까 말이지, 조금만 기다려 보게. 가물가물해서 말이야……. 음, 이건 좀 비싼 것 같으이. 내 머릿속에서 이건 만 냥짜리 정보라고 하는데? 자네 돈 있나?”

[낙양 거지 호칠에게 정보비로 은자 1만 냥을 적선하시겠습니까?]

[은자 1만 냥이 인출되었습니다.]

“나는 잘 모르네. 우리 분타주님한테 가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실 게야. 흠흠. 그래, 또 궁금한 게 있나? 돈만 주면 다 말해주지.”

으아아악! 미치겠구만! 이 사악하기 그지없는 그지 새끼를 봤나!!

순간, 1만 냥이나 떼였다는 충격에 머리에 총 맞은 기분 저리 가라였다. 그래도 어쩔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손바닥으로 닦아가면서 호칠에게 다시 물어볼 수밖에.

“착한 친구, 호칠. 아쉬운 건 나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자네 상관인 낙양 지부장은 어딨는데?”

“음, 우리 지부장님을 찾고 있나? 뭐 세상에 내가 모르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말이야, 딱 천 냥일세. 자네 돈 있나?”

내가 다시 호칠을 찾는다면 인간이 아닐 게다. 겨우 자기네 대장 거지가 퍼질러 자고 있는 위치를 알려 주는 데 1천 냥이나 받아내는 저 극악한 거지는 세상에 둘도 없을 게다. 아니지… 설마? 모든 개방도가 다 저런 놈은 아닐까? 갑자기 울고 싶어지네.

* * *

개방 하남 분타 낙양 지부장 호이는 있을 만한 곳에 있었다. 거지가 머무를 곳이 다리 밑이랑 망한 사당 아니면 어디가 있을까.

북망산 초입의 쓰러져 가는 관제묘에서 호이의 소개를 받을 때, 순간 이 녀석이 호칠의 형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생긴 것도 비슷한 데다 이름을 들었을 땐 확실하다는 감이 팍팍 들었다. 그래도 원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역시 저놈이랑 호칠이랑 형제가 확실하구만. 어떻게 그 정도 정보 하나에 백십만 냥이나 들어가냐.”

관제묘를 나오면서 투덜대긴 했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110만 냥까지는 아니었다. 정보비는 10만밖에 안 했지만, 의뢰를 받아줄 만한 우호도 올리는 데 100만 냥이 들어서 문제였지.

아니, 그런데 무슨 놈의 거지 패거리가 그렇게 돈을 밝혀? 쟤들 현실에서처럼 작업 끝나면 벤츠 타고 집에 돌아가는 놈들이 아닐까 궁금해진다.

하여간 들어간 돈은 회수할 수 없으니 골치 아프게 더 신경 쓰지 말자. 더구나 이미 올려 둔 우호도가 떨어지진 않을 테니 다음엔 좀 싸게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자고!

“그런데 월향루가 어디야? 이름만 가지고는 뭘 알 수가 있어야지.”

낙양성 안으로 돌아와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 곳을 둘러보았지만, 월향루라는 간판을 가진 주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통 뵈질 않았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길 좀 물어볼게요.”

마침 지나가는 유저들이 있기에 길을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다행히 무시하지 않고 질문에 응해줬다.

“여기 월향루가 어디쯤에 있나요?

“월향루요? 음… 잠시만요. 야, 현호야! 월향루가 만상객점 옆에 있는 그 주루 맞냐?”

질문을 받은 유저가 동료인 듯한 옆의 유저를 보고 말했다.

“맞을걸? 지나가다 몇 번 본 거 같은데, 주루 갈 일이 있어야 말이지. 확실하진 않다.”

“그렇다네요. 뭐,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 만상객점은 시장의 황금전장이 있는 골목으로 쭉 가다가 제일 마지막 골목에서 꺾어 가면 있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뭐가 그리 바쁜지, 고맙단 말도 듣지 않고 바삐 가버린다. 하여간 고맙긴 하다. 나야 너무 바쁘게 살아서 낙양 지리엔 거의 까막눈 수준이니, 지금 만난 유저가 아니었으면 몇 시간을 헤매고도 남았을 일이다.

월향루(月香樓)는 한산했다. 구석에 자리 잡은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직 강호에서 주루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파리만 날리고도 가게 유지가 되나?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런데 뭐지? 보통은 손님이 주루에 들어오면 기녀가 오든 점소이가 오든 안내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어디 감히 황금산장 기찰당주님을 이렇게 오래도록 서 있게 만드는 거야?

한참을 더 서 있어 봤는데도 주인장은 계속 날 없는 사람 취급했다. 역시 여기가 흑점이 맞는 건가?

계산대에 다가가 주인장을 보고 섰다. 역시 말이 없다. 소지품창에서 ‘흑점:낙양 분점 출입패’를 꺼내 주인장에게 흔들어봤다. 이래도 반응이 없다.

“이보시오, 주인장. 여기가 흑점 낙양 분점이 맞소?”

역시 대답이 없다. 월향루에 다른 숨겨진 장소나 사람을 찾아야 하나 보다.

1층엔 주인장밖에 보이질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갔다. 기녀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 중에서도 흑점이란 말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패를 보여 줘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서 월향루에 있는 객실을 모두 다 뒤져 봤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설마 흑점이 이사 간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말로 이사를 가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흑점 시스템이 아직 미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아직 둘러보지 않은 마지막 장소인 주방으로 가봤다.

주방엔 숙수 2명과 보조 3명이 손님도 없는데 바쁘게 요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5명 모두 마찬가지였다. 반응이 없었다.

“하아… 결국은 아직 구현되지 않은 시스템인 건가? 아니면 오픈 베타라서 막아두고 있는 건가?”

또 다른 대박의 기회를 잡았다고 희희낙락거렸다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느낌이었다. 흑점 찾느라 보낸 시간이 아쉽기도 했지만, 갑자기 밀려오는 의욕 상실이 더 컸다.

별수 없이 일단 돌아가려고 하는데, 제일 막둥이 주방 보조가 뭔가를 튀기고 있던 숙수 옆의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설마?”

혹시나 싶어 문이 닫힐세라 나도 재빨리 녀석을 따라서 주방을 빠져나갔다.

녀석은 이름 모를 음식을 잔뜩 들고선 이웃한 만상객점과 월향루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계속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월향루는 배달도 하나?’

배달로 먹고사는 중국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따라갔더니, 어느새 월향루를 등지고 서 있는 작은 움막에 이르렀다. 움막 앞엔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남자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주방 보조는 그 남자 앞에 음식을 내려놓더니 뒤에 서 있던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날 똑바로 노려보며 걸어오는 녀석의 기미가 심상치 않아 순간 난 긴장했다

‘이놈, 이러다가 갑자기 칼침이라도 놓는 거 아냐? 지금 무사 임대권 한 장도 안 들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가서 절정무사 임대권 하나 사들고 다시 올까?’

이런저런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다행히 주방 보조 녀석이 날 그냥 지나쳐 월향루 주방실로 들어가 버린다. 십년감수했다.

한심한 상황에서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장면 배달을 시켰던 흑의 복면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뭐라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흑점 출입패를 보여 주었다.

“지금은 흑점 개시 시간이 아니니 다섯 시간 후에 오시오.”

5시간 후라고 한다. 괜히 청성파의 누구처럼 강짜를 놓다가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조용히 월향루를 나왔다.

“하아, 그래도 이제 대충 정리가 됐네. 흑점 한 번 출입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역시 역사를 개척하는 사람들의 간난신고가 이 정도쯤은 되는구나. 일단 다섯 시간 동안 물건 정리나 해볼까? 괜히 돈 모자라서 실컷 구경만 하다 오는 수도 있으니.”

* * *

강호 유저들이 가장 많이 시작하는 곳은 사천의 성도와 이곳 낙양이다. 이젠 어느 정도 정보가 많이 풀려서 최근에 시작하는 유저들의 경우엔 그런 편향이 더욱 심했다.

사천에는 청성파, 아미파, 점창파, 당문, 제갈세가 등 거대 문파에다 최적의 레벨 업 사냥터가 다수 존재했다. 사천에서 시작한 플레이어는 절정의 경지까지 성(省) 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다는 게 유저들의 판단이었다.

낙양이 있는 하남의 경우엔 무림맹과 황금산장 같은 거대 세력 때문에 색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소림파와 개방이라는 거대 문파들이 존재했다. 오직 이 두 지역만이 혜택이 많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유저들이 많이 몰려 버린 지금 같은 상태라면, 또 다른 불리한 상황을 안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노점에 물건을 내놓은 상황도 그런 상황 중의 한 장면이었다.

“아, 말씀드렸잖아요. 먼저 제시하셔야 한다구요.”

아까부터 이 사람과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아니, 무슨 무기 하나를 천만 냥에 올려놓아요. 저도 압니다. 그거 백만 냥에 팔린 물건이라는 거요. 그래서 백만 냥 드리겠다고 하잖습니까!”

“그때 시세랑 지금 시세는 또 다르지요. 일주일 전 백만 냥하고 지금 백만 냥하고 같다고 정말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님이 최대한 생각하시는 가격을 말씀하시라구요. 그래서 적당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손님들 제시 가격도 들어보고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낙찰이 되든 안 되든 연락은 확실하게 드릴게요.”

난 지금 유일한 공급자로서의 파워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는 중이다. 다른 물건들도 같이 팔려고 했다가 머리가 아파서 그건 포기했다. 일단 묵룡수만 딱 10개를 주어진 5시간 안에 정리할 생각이었다.

“저기요, 전 일단 이백만 냥까지 드릴 수 있어요. 보아하니 노점에 올려놓은 물건이 열 개는 되어 보이는데, 아무리 제시 가격이 높아도 지금 제가 드린 가격이면 낙찰이 가능해 보이는데, 일단 저한테 한 개 파시죠?”

날 살살 달래려고 하네? 날 뭘로 보고!

“음…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금 이백만 냥까지 가능하시다는 분들이 님까지 딱 열두 명이네요. 최고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알다시피 이 묵룡수는 절정급 기보입니다. 무슨 말인지 다들 아시겠죠? 더군다나 저, 더 이상 묵룡수 안 뿌립니다. 저번에 뿌린 세 개랑 이번에 뿌릴 열 개 빼고 향후 얼마간은 이런 무기 보기 힘드실 겁니다. 제대로 판단하고 제시해주세요.”

물론 절정급 기보라는 건 거짓말이다. 일류급 중에서 조금 나은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래도 저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릴 가능성은 전혀 없지. 나처럼 절정무사의 공격력을 알아보지 않는 한. 하하.

“휴우… 지금 제 수중의 돈으론 간당간당하네요. 저기요, 님! 그럼 언제까지 장사하실 건가요? 일단 시간에 맞춰 최대한 가격을 맞춰보겠습니다.”

한눈에 보기에 현재 강호에서 최고 레벨에 근접해 있는 낭인무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벌써 2백만 냥이나 모았단 말인가? 허허, 이 사람도 게임의 요령을 아는 사람이네.

“제가 네 시간 후에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하니까 그 전까지는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정확히 네 시간 후에 일괄 매각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담합이 있다고 여겨지면 한 개도 안 풀고, 다른 도시에 가서 팔아버리겠습니다. 참고로 저, 지역 간 이동 가능합니다. 사천까지도 못 갈 거 없습니다.”

“헉! 벌써 타 지역 이동이 가능하대! 오베(오픈 베타)라서 못 가는 거 아니었어?”

밝혀도 별로 상관없는 정보 하나 흘리니 주위가 어수선해진다. 어쨌든 좋다. 계속 배 째라 모드다.

그렇게 한참을 제시 가격을 받고 적절히 달래기도 하며 협박도 해가니, 묵룡수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다.

약속했던 시간이 됐다.

“집중해주세요. 약속했던 시간이 됐습니다. 저도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시 가격 받겠습니다. 먼저 제시하시는 분이 불리할 거라고 생각해서 제 임의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지금까지 받았던 제시 가격 중에서 최고 가격을 제시했던 세 분들을 호명하겠으니 묵룡수 받아 가세요.”

일단 양심적인 상인의 모습으로 가장을 하고 3개의 묵룡수를 건넸다. 받아 간 사람들도 이 경매 방식이 재밌다고 여겼는지 멀리 가지 않고 지켜볼 요량처럼 보였다. 솔직히 나도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강호에서 최초의 경매라고 할 수도 있잖은가.

“이제 일곱 개 남았습니다. 그 전에 앞서 한 가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뿌린 세 개 중에 최고가는 삼백오십만이었습니다. 다른 두 분도 이 가격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일 분 후에 마지막 제시 가격 받겠습니다. 제가 신호를 내리면 모두 최종 제시가를 외쳐 주시기 바랍니다. 일 초라도 늦으신 분은 자동 탈락입니다.”

곳곳에서 작전을 짜는 팀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350만 이상이 최저 낙찰가가 될 거라는 둥, 250만 정도가 지금 유저들의 재력으로는 한계라는 둥. 뭐, 내가 그걸 일일이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 난 그저 최고가 받을 작전만 짜면 되니까 말이다. 하하.

“그럼 신호 내리겠습니다. 제가 영이라고 외치는 순간 제시해주세요. 오… 사… 삼… 이… 일… 영!”

“삼백이십만 삼천이백칠십육 냥!”

“사백이십일만 냥!”

“삼백오십만 냥!”

“삼백오십만 일 냥!”

“사백오십만 구천구백구십구 냥!”

……

“이백오십사만 천백삼십오 냥!”

“끝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호명하시는 분들은 물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짭짤했다. 아니, 짭짤의 수준을 넘어섰다. 내가 방금 전에 최고 가격을 제시해서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준 덕택에 최저 낙찰가는 360만 냥이 되었으니, 묵룡수 10개를 팔아서 거의 4천만 냥에 달하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양심에 찔리진 않는다. 저 사람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거금을 들여서 아이템 하나를 장만한 이유도 정당할 테니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가격을 기준으로 타인에게 매각할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는 아마 1천만 냥을 호가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중에 마천채를 정벌할 때 사건의 진상을 알겠지만 말이다. 하하.

그건 그렇고, 이제 새로운 떡밥을 던져 줄 차례다.

“감사합니다. 약속드린 대로 더 이상 하남성에서는 묵룡수를 뿌리지 않겠습니다. 경쟁 관계인 사천 무림에도 마찬가지의 약속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거래의 신용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시길 바라고, 달리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쯤에서 잠시 쉬어주고,

“에… 무기만 있고, 그걸 제대로 사용할 무공이 없으면 안 되겠죠?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 묵룡수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이 무공을 배워야 합니다. 아! 속았다고 생각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단지 그 묵룡수를 얻은 몬스터가 이 비급도 같이 떨군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무공을 배우지는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은 없지만, 하여간 그 무공서도 내일 지금 시각에 경매에 붙이겠습니다. 일단 저도 배워보지 않아서 어느 정도로 좋은 무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몬스터는 이 무공으로 장풍을 사용했습니다. 못 잡아도 일류 무공이죠? 알아서 판단하시고 입찰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존 최강의 무공은 양가창법이었다. 특별한 보스 몬스터가 강호에서 발견되진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일반 유저를 통해 고급 무공서가 드러날 일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벽력권에 대해서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문파에 가입해서 시간이 지나면 훨씬 더 좋은 고급 무공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괜히 이런 잡스런 무공을 배운다면 오히려 해만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판다는 사람도 어떤 무공인지 알 수 없다고 말을 한 마당이니.

어쨌든, 급한 건 내가 지금 흑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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