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황금산장 (2/62)

제2장. 황금산장

그동안 게임이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사용자들의 건강을 위한 많은 보조 기구들이 나오기도 했지만(내가 쓰는 게임 고글은 꽤나 비싼 상품이다), 역시 밤늦은 시각까지 게임을 한 피로는 컸다.

처음 게임을 맞이한다는, 더군다나 5년이나 기다려 왔다는 흥분 때문에 어젯밤에는 너무 집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오후 2시를 알리는 시계 바늘이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강호를 얼마나 그리워했으며, 또 이왕 시작한 마당에 최고를 향해 경주하겠다는 마음도 먹었지만(처음이다), 이렇게 생활을 망가뜨리면서 그걸 쟁취하겠다는 욕심은 없다. 그건 과한 정도가 아니라 파멸의 수순을 밟아나가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마음 가는 대로 몸도 가는 법. 다만 최소한의 지킬 건 지키겠다는 마음만 가질 뿐이다.

내가 새삼 마음을 다잡는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강호의 매력이 거스르기 힘들 만큼 대단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 * *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IGM의 강호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직은 게임 초반이기에, 플레이보단 정보를 얻는 게 더 중요했다.

물론 정말 중요한 정보는 절대 공식 홈페이지에 오르지 않는 법이지만, 난 그마저도 아쉬운, 달랑 2시간 플레이해본 절대 초보였다.

자유 게시판 내용의 태반은 돈 버는 법을 물어보는 초보들의 질문이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초보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객잔의 점소이가 되는 법, 도끼를 사서 낙양성 외곽 숲에서 나무를 베어 상점에 파는 법, 그리고 힘 스탯이 2가 되면 토끼 사냥이 가능하니 사냥을 해서 레벨 업과 돈 버는 것을 병행하는 법.

대부분의 답변 속에서 레벌 1에 가능한 일은 점소이가 되거나 나무꾼이 되는 법, 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문제는, 점소이는 한 달이 지난 후에 월급이 지급되는 후불제인 대신에 식량이 필요 없고 노임이 1백 냥이라는 것이고, 나무꾼의 경우는 자영업(?)인 대신 하루 나뭇짐을 상점에 팔아봐야 2냥이라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별 볼일 없는 이야기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최적의 상태로 강호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난 병기점으로 갔다. 도끼 한 자루가 5냥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돈은 3냥 50문. 그 돈을 가장 가까운 객잔에 가서 전부 만두로 바꿨다.

분명 강호엔 숨겨진 돈벌이가 존재했다. 다만 유저들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묘한 트릭이 있을 뿐이다. 손쉽게 계산해서 하루에 들어가는 식품비를 빼면 나무꾼보단 객잔의 점소이가 되는 법이 훨씬 빠르게 돈을 버는 법일 것이다.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 게임 시간으로 한 달. 현실 시간으로 60시간을 객잔에서 버텨야만 무관 입관비 은자 1백 냥을 거머쥐는 것이다. 거기에 내 예상대로라면 무관에 다달이 납입해야 할 수련비와 생계비까지 합치면 점소이 생활 한 달로는 부족할 게 뻔하니, 최소 두 달은 객잔에서 허비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나무꾼이 되는 것이다.

도끼 한 자루와 만두 10개가 내 전 재산이었다. 버린 시간만큼 내 만두는 줄어든다.

서둘러 낙양성을 빠져나왔다.

성 밖에 나와 보니 낙양성 안의 번화한 모습과 달리 바깥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인가(人家)도 나무도 없이 오직 잡초와 붉은 땅밖에 보이질 않았다.

저 멀리 초목이 우거진 야산이 보였다. 내 발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으잇샤!”

“넘어가요~”

쿵- 쾅- 쾅!

산 곳곳에서 나무 찍는 도끼 소리와 잔가지 치는 소리가 시끌벅적하다. 바로 이곳이 강호의 저렙들이 호구지책과 입신양명을 위해 뛰고 있는 최전선, 벌채장이다.

나무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도끼를 갖다 댈 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대부분 이미 주인을 맞고 있는 나무들뿐이었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자 아름드리나무가 눈앞에 들어왔다. 소지품창의 도끼를 장착하고 나서 나무를 찍어 나가려는 찰나,

[아직 이 나무를 베기엔 능력이 모자랍니다.]

‘이게 무슨 지랄 같은 상황이냐. 나무면 나무지, 어떻게 도끼에 반항할 수 있느냔 말이야?’

난 한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다.

‘그래, 나무에도 자존심이 있단 말이지?’

대충 짐작을 한 난 아름드리나무를 접어두고 그 옆의 비실비실한 소나무에 도끼를 갖다 댔다.

탕!

다행히 소나무엔 도끼가 들어갔다. 도끼질은 굳이 따로 지정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계속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나무가 쓰러지고 장작으로 돼서 돈으로 변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그동안 지루해 죽을 뻔했다. 어른 팔뚝만 한 소나무 하나 베어 넘기는 데 무려 30분! 게임 속 시간으로 6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무를 토막 내고, 잔가지를 쳐내고, 장작으로 만드는 데 또 한나절이나 걸린 것이다. 비로소 강호의 험난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이 소나무 한 짐을 상점에 팔아봤자 2냥. 만두 값 빼면 구리돈 50문이 남는 셈이다.

하아~ 삶은 정말 처절하다.

* * *

정확히 낙양성에 나갔다가 나뭇짐을 팔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하루였다. 그동안에 난 구리돈 50문을 벌었고, 더불어 1레벨 업을 할 수 있었다.

레벨이 2로 바뀐 순간, 캐릭터창을 열어봤다. 바뀐 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추가 능력이 0에서 1로.

이제 강호를 시작하고 나서 두 번째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모든 성장형 게임에서는 이 첫 번째 스탯 조정이 앞날을 결정하게 된다.

난 지능에 1을 투자했다. 먹고살기 팍팍한 세상일수록 머리 좋은 놈이 성공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능 1이 더 올랐다고 해서 달라진 건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꾸준히 도끼질을 하는 와중에 주변의 나무꾼들에게 주워들은 바로는, 힘 스탯이 오를수록 도끼질이 빨라지고 덕분에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이 조금 나아진다는 점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그대로 따를 이유는 없다. 어차피 난 최고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일반적인 수순을 따를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묵묵히 도끼질을 한 지 8시간이 지나자 난 레벨이 5로 올랐고, 지능 스탯도 5가 됐다.

낙양성으로 들어와 장작을 상점에 팔아치우고 황금전장으로 향했다.

난 레벨 업을 하고 낙양에 들를 때마다 황금전장에 들렀다. 머리 좋은 놈이 쓰일 곳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거대한 전장은 꾸준히 날 무시했다. 하지만 난 내 직감을 믿었다. 모든 추가 능력을 지능 스탯에 올인한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것, 그래서 당분간은 황금전장에 들어갈 유저가 없다는 점을 말이다. 아직 신천지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결국 내 짐작이 맞아떨어졌다.

“무슨 일이오?”

평소의 문지기라면 ‘넌 아직 여길 출입할 수 없다’라는 말이 나왔을 텐데, 문지기의 반응이 달라졌다.

피곤한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왔습니다.”

겨우 레벨 5에 지능 5인 인간이 딱히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 이미 준비했던 질문이었다.

“기다려 보시오. 총관님께 연락을 드려 보리다.”

아마 10분은 기다렸을 것이다. 그때서야 좀 전의 문지기가 나와서는 총관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난 보았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황금장원을.

외곽에서 본 황금산장은 말 타고 산 보기, 딱 그 꼴이었다.

황금산장이 왜 황금산장으로 불리게 됐는가. 기와가 황금이라서? 아니다. 전장 안의 모든 건물, 시설들이 전부 황금이었다. 인공 연못 옆의 바위도 황금이었고, 지나가는 시비의 옷가지들도 금실로 짠 금의(金衣)였다. 심지어 연못의 잉어마저도 모두 금빛으로 빛나고 있어 눈이 부셨다.

문지기가 날 데리고 간 곳은 거대한 전각 옆의 조그만 건물이었다. 아마도 여기가 총관의 집무실인 모양이다.

“그래, 일자리를 찾는다고?”

염소수염의 백발노인이 물었다. 총관은 어디서나 염소수염인가 보다.

“일거리만 주신다면, 성심성의를 다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 된다면야 이 황금산장은 개나 소로 가득 찼을 걸세. 자네, 잘할 수 있는 게 뭔가?”

숨이 턱 막혔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니! 평생(나무 네 짐 할 시간뿐이었지만) 나무만 베던 놈한테 잘하는 게 뭐냐니……. 내가 잘하는 도끼질이라고 해봤자, 올려놓은 지능 스탯 깎아먹는 짓밖에 더 되겠는가?

취업하려고 수없이 만나왔던 그 면접관들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달리 뭐라고 말할 여지가 없었다.

“총관님이 믿어주시든 믿지 않으시든, 황금산장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상인의 길을 가기 위해선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게 신의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신의를 지키는 일뿐입니다. 황금산장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까? 강짜를 부려보는 수밖에.

다행히 그냥 그대로 내치지는 않는 듯했다.

“네 심성이 어떠한지는 내 알 수 있는 법이 없으니, 몇 가지 질문으로 대신하겠다. 잘 답해보거라.”

이제 진짜 운명을 가늠할 시험이 시작됐다는 것쯤은 다년간의 게임 경험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에 네가 백 년 묵은 산삼과 천 년 묵은 흑오공(黑蜈蚣)의 내단(內丹) 중에 하나를 얻을 수 있다고 하자. 둘 중에 어느 물건을 선택해서 먹겠느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이건 무협 소설을 웬만큼 읽고 약리(藥理)에 대해 약간의 상식만 가지고 있다면 간파할 수 있는 단순한 트릭이다.

물론, 난 문제의 답을 알고 있다. 둘 중 어느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정답이다.

1백 년 묵은 산삼은 몸에 좋기는 하지만 때론 독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열이 강하고, 흑오공의 내단은 내력 증진에 좋다지만 나 같은 일반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먹었다간 독기에 오장이 녹아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난 아무것도 취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답일까?

그게 맞다면, 이 총관이 앞서 말했던 것처럼 황금산장은 개나 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일 것이다.

난 머리를 한 번 더 굴리고 도박을 시도했다.

“흑오공의 내단을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먹지 않고, 황금산장에 그 내단을 팔겠습니다. 그 이유는 산삼이나 내단이 지금 제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독(毒)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물건이란 쓰일 곳에 쓰여야 옳은 일이니, 전 돈을 얻고 물건을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산삼을 취하지 않고 내단을 선택한 연유는, 산삼은 팔기도 쉽고 가격도 좋긴 합니다만 흑오공의 내단은 팔기가 지극히 어려운 반면, 팔 수만 있다면 가격은 산삼보다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다른 상방에 내단을 팔면 좋은 값을 받기 힘들겠지만, 황금산장처럼 넓은 판매망을 가진 곳이라면 충분히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훌륭하군! 훌륭해! 지금껏 이 황금산장의 문을 두드린 자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자네처럼 답변한 이는 아무도 없었네. 산장의 규칙대로라면 신분도 불분명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네만, 자네의 명민한 두뇌와 말솜씨를 믿어보겠네. 일단 외당에 주부 자리를 하나 만들어둘 테니, 거기서 시작해보게. 노임은 한 달에 이백 냥일세. 그럼 수고해보게나.”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총관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황금산장 총관의 질문’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신분이 변경됐습니다.]

캐릭터 정보창을 열어보니 메시지에서 말한 것처럼 바뀐 부분이 있었다. 신분이 일반에서 상인으로 변경됐다.

그렇게 난 황금산장에서 일하는 상인이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돈벌이가 시작됐다. 이미 목표한 상인이 된 마당에 총관의 눈 따위야 거리낄 게 없었다.

더구나 황금산장의 직원은 점소이처럼 객잔에 잡혀서 밖으로 못 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맡은 단 한 가지 일은 하루에 한 번 다른 상방의 시세를 보고 외당 당주에게 보고하는 일뿐이었다.

남는 건 시간이고, 몸은 자유로웠다.

내 돈벌이는 만두에서 시작됐다. 강호를 하기 위해선 누구나 하루 3개를 먹어야 하는 필수 아이템, 만두 말이다.

모든 물건엔 세금이 붙는다. 위대하신 황상께서 책정하는 나라에 내는 세금인 관세가 있고, 길을 가다 만나는 녹림들에겐 통행세를 낸다. 또 도시의 상인들은 흑도의 보호세와 정파 무림인에게 관리세도 낸다.

황금산장이 낙양 성내에 붙이는 세금 명목은 백도처럼 관리세였다. 물론 중요한 건 세금의 이름이 아니라 세금을 얼마나 내는가다.

내가 황금산장의 직원이 된 이후로 처음 시작한 일은 다시 시세 파악에 나선 것이다. 결과는 내 짐작과 같았다. 드디어 대박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낙양의 중소 무관 입관비는 예나 지금이나 1백 냥이었지만 만두 값은 달라졌다. 만두 1개에 45문이었다. 이전 가격이 50문이었으니, 그렇다면 황금산장이 객잔에 부여한 세율이 10퍼센트인 셈이었다.

난 그 길로 이미 알아둔 황금산장의 계열사인 황금전장으로 달려갔다. 바람과도 같이.

하하하. 눈앞에 돈 밭이 널렸는데, 들뜨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황금전장에서 은자 1백 냥을 빌렸다. 일반 상태에선 빌릴 수 없었는데, 상인이 되니 전장에서 돈도 빌려 주었다. 어떤 조건에서 전장이 대출을 해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자는 게임 시간으로 한 달에 10냥이었다.

이자는 접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유저들의 소지금에서 자동 인출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는 가격이 비싼 아이템부터 순서대로 차압된다.

나도 그 경고를 받아야만 했다. 남의 돈을 빌렸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까딱 잘못해서 실수로 은자를 채워놓지 않으면 한순간에 알거지가 될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젠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신경 쓸 건 얼마나 빨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가, 이거 하나였다.

이제부터 바야흐로 낙양 제일 거부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셈이다.

난 만두를 45문에 사서 49문에 팔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하루를 살기 위해선 만두 3개를 사야 하니, 한 사람의 하루를 12문으로 버는 셈이었다. 즉, 만두 한 개의 이문을 구리돈 4문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가진 돈을 전부 만두로 바꾸고선 노점을 열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날 반기고 있을 귀여운 돈들을 생각하며 로그아웃했다.

그렇게 나는 핑크빛 강호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음 날.

쌓인 은자를 만두로 바꿔놓았는데도 아침에 접속해보니 이미 모든 만두가 팔리고 난 후였다.

소지품창엔 은자 221냥만 달랑 있었다.

빚지고선 못 사는 성미이기에 황금전장에서 빌린 돈을 일시불로 갚아버렸다. 그리고 남은 돈을 전부 만두로 바꾸고 가만히 화면만 지켜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만두 240개가 팔리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30분 만에 내가 은자 9냥, 구리돈 60문을 번 셈이다.

난 이 돈을 그대로 다시 만두 사는 데에 투자했다.

정말이지 만두에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처음엔 몇 개씩 사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1백 개 단위로 사가는 사람마저 생겼다.

하기야 게임을 10시간 하려면 만두 15개가 소모되니, 1백 개씩 사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번 돈은 정확히 1,120냥 80문이었다.

* * *

며칠 동안 만두 장사를 하면서 내가 딱히 할 일이란 없었다. 그저 만두를 사다 쟁여 놓고, 다 팔리면 다시 쟁여 놓는 반복 작업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이 그 일뿐이라고 해서 그동안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호에 관련된 웹사이트를 샅샅이 뒤지며 자그마한 힌트라도 얻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눈여겨볼 만한 정보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어쩌면 상인뿐만 아니라 다른 클래스로의 전직에 이미 성공한 사람이 나 말고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두 장사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그 정보를 공개하길 꺼려 할 것이 분명했다.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가치가 있는 법이니깐 말이다.

결국 사이트에서 얻은 결과란 게, 쓸 만한 정보는 직접 발로 뛰면서 얻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없었다.

강호 홈페이지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다시 게임 속으로 돌아와 보니, 내 수중엔 단 한 개의 만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 체력은 아사(餓死) 직전이었다. 만두는 이미 다 팔렸는데 노점을 계속 열어뒀으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첫날은 어떻게 용케 굶어 죽지 않았나 신기할 따름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몸뚱이를 끌고 가까운 객잔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난 생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만두 장사는 계속 잘되었다. 하지만 이 간이 장사도 곧 끝내야 될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빨리도 찾아왔다. 바로 경쟁자가 생긴 것이다!

갑자기 급감하는 만두 판매량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나는 노점을 접고 상점가를 한 바퀴 훑어보았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저쪽 구석에서 나 같은 만두 장사꾼을 발견한 것이다. 더구나 그 녀석은 만두 한 개당 48문에 팔고 있었다.

이런 상도(商道)에 어긋나는 짓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밀긴 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돈을 계속 벌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난 그 인간한테 대화를 시도해야만 했다.

“여보세요, 만두 장수님.”

“네? 만두 사시게요? 그냥 클릭하시고 수량만 체크하시면 자동으로 돈은 인출되는데요?”

“지금 만두 사려는 게 아닌데요.”

“네? 그럼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저, 저쪽에서 만두 팔던 사람입니다.”

“아! 낙양성 최초의 만두 장사님이시군. 근데요?”

“음… 근데요가 아니라, 님이 지금 만두를 사십팔 문에 팔고 계시잖아요?”

“그럼 님은 저보다 더 싸게 파시면 되잖아요?”

‘허허, 이 사람이 장사를 계속하고 싶은 건가? 좋게 말하려고 했더니만 시비조네. 그래도 어쩌겠나, 살살 달래봐야지.’

“제가 사십칠 문에 팔면, 님은 사십육 문에 팔겠네요? 그럼 결국 저나 님이나 모두 손해를 보잖습니까? 그래서 그러니깐, 만두 값 사십구 문에 합의 봅시다. 아직 만두 장사는 님하고 저만 하니깐, 그러는 게 서로에게 좋잖아요. 어때요?”

“음… 저로서야 거절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뭐 일단은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별로 오래갈 것 같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녀석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무슨 뜻이냐고 묻진 않았다. 한 명의 경쟁자가 2명이 되고 3명이 되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쯤이야 나도 알기 때문이다. 결국 만두 장사는 곧 순식간에 사양 사업이 돼버릴 것이다.

별수 없이 난 만두 외에도 여러 물건들을 취급해야만 했다. 때마침 유저들이 게임 속 시간으로 한 달을 보내고 은자 1백 냥 이상의 거금들을 손에 쥘 때여서, 내 돈벌이에 도움이 되긴 했다.

서점에서 제일 싼 무공 서적이나 무관에 들어가서 사용할 목검, 목도 따위를 내 노점에서 취급하기 시작했다. 목검은 은자 10냥, 가장 싼 무공 서적인 육합권, 삼재검 따위도 은자 50냥짜리였기 때문에 비록 드문드문 팔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돈벌이는 짭짤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일요일 오후엔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경쟁자만도 5명이나 됐고, 아마 낙양성 내의 상인 숫자를 다 헤아린다면 수십 명에 다다를 정도로 상계(商界)가 폭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게임 시간 하루를 기준으로 해 족히 1천 냥은 벌던 한창때와 비교해 달랑 몇십 냥 얻는 장사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마 이제 갓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몇십 냥도 대박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수중에 1만 냥이 넘는 거금을 가지고 겨우 몇십 냥을 벌기 위해 시간을 버리는 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들여놓은 물건이 대충 팔리자마자 난 노점을 접었다.

“하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 가서 뭘 해야 이 돈을 제대로 뻥튀기할 수 있으려나?”

아마 지금 수중에 쥔 은자 1만 냥만 해도 낙양성 내에선 제일의 갑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솔직히 엄청난 액수는 아니었다.

병기점에서 파는 제일 비싼 검인 백련정강한 청강검 한 자루가 은자 1천 냥이었고, 서점에 파는 무공 서적 중에서 제일 비싼 양가창법은 은자 1만 냥짜리였다. 쓸 만한 물건들은 모두 터무니없이 비쌌다.

더구나 청강검은 보검도 아니고, 양가창법 역시 쓸 만하긴 해도 절세의 비급과는 거리가 한참 먼 물건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니 당연히 지금 수중에 들고 있는 돈은 푼돈이라면 푼돈이었다. 이도저도 하기 힘든 딱 어중간한 상태. 그게 바로 지금의 나였다.

“어라? 그러고 보니 돈벌이 상대들의 월급날이라고만 생각했지, 정작 내 월급 받을 때는 깜빡하고 있었네?”

그렇다. 나도 황금산장의 직원이니 월급을 받아야만 했다.

‘매일 안 잘리려고 시세 보고를 해온 품삯을 받아야지! 더군다나 은자 이백 냥이면 적은 액수도 아닌데, 그걸 깜빡하고 있었다니!’

월급이 자동으로 통장에 들어오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직접 월급을 받으러 산장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월급을 누구한테 받아야 하지?”

전엔 산장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NPC들뿐이었는데, 이젠 일반 플레이어들도 한두 명 눈에 띄었다. 아마 나처럼 상인 전직 퀘스트를 받으러 가는 사람이 태반이겠지만, 혹시나 이미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처럼 상인이 되어 시세 보고하러 온 사람도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만두 장사꾼들이 저렇게 많아졌겠지.

일단은 직속상관인 우리 외당의 당주님을 찾아갔다.

당주는 백의를 걸친 대머리 중년의 수사(修士)였는데, 항상 있던 자리에 있었다. 뭔가 숫자가 주르륵 적힌 문서를 보고 주판알을 튕기면서 말이다.

“당주님, 월급 주세요.”

“오! 조연, 잘 왔네. 일은 열심히 하고 있겠지? 아! 월급 말인가? 월급은 총관님을 찾아가야지, 왜 나한테 달라고 하나?”

솔직히 당주는 별로 비중 없어 보이는 NPC였다. 물어보면 항상 ‘그래, 보고하러 왔나?’ 아니면, ‘일은 열심히 하고 있지?’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

‘다행히 이번엔 도움이 되는 말도 해주는군.’

총관도 전에 만났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이번엔 좀 다행이다. 왜냐면 총관이 집무실에 있는 경우는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이 NPC는 무슨 할 일이 그렇게나 많은지, 넓디넓은 황금산장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느라 도통 얼굴 보기가 힘든 녀석이다.

“월급 줘요, 총관.”

다행히 게임이라서 윗사람한테 존댓말을 안 해도 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크큭.

“오, 조 주부 아닌가. 일했으니 당연히 줘야지. 받게나.”

[은자 2백 냥을 받았습니다.]

용건이 끝났으니 집무실을 나가면 그만이겠지만, 혹시 몰라 총관에게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총관, 주부에서 위 단계로 승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 아직 황금산장의 직급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가? 처음엔 주부로 시작해서 그 위로 집사, 서기, 외당 당주, 내당 당주, 그리고 마지막인 총관이 있지.”

총관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한 번 더 물어봤지만 똑같은 말만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승급에 관한 질문엔 원래 저렇게만 답하게 설정돼 있는 모양이었다.

총관에게 더 물어볼 말도 없어 집무실을 나왔다.

“아이고, 결국 승급하려면 또 직접 알아봐야 한단 소리네.”

정말이지 누구 물어볼 사람도 없고, 매번 이런 식이니 피곤했다.

“가만, 생각을 하자, 생각을. 내가 그동안 돈 버는 데 환장하느라 머리 쓰는 데 인색했구나. 우선 지능 5가 되면 상인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단 말이지……. 다른 스탯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고 말이야. 하긴 상인한테 힘이니 체질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 근성이라면 모르겠지만. 근데 아직 고레벨도 아닌데 근성이 필요할 것 같진 않고… 어라? 고레벨? 결국 레벨이 문제인 셈인가? 근데 상인이 레벨을 어떻게 올리지? 설마 이 나이에 또 도끼 들고 나무 베러 가야 하는 무식한 방법은 아닐 테고……. 흐유.”

내 생각엔 레벨이나 지능 스탯이 문제인 것 같은데, 도무지 상인 레벨 업에 대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집무실로 되돌아가 총관에게 물어봤지만,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비굴하게 낙양성의 장사꾼들한테 가서도 물어봤지만, 그들에게도 모른다는 답변만 받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어느 놈은 나무를 베면 레벨 오른다는 답을 해주기도 하더라. 머리가 나쁜 건지, 약을 올리는 건지.

낙양성을 다시 한 바퀴 둘러봤지만, 여전히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난 다시 황금산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어딘가에 감춰져 있을 레벨 업에 대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답은 정말이지 어이없게 해결됐다.

황금산장주 금적산의 얼굴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산장의 직원이면서도 말이다. 그건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산장의 외당뿐이어서 그랬는데, 금적산은 내당에 살고 있었다. 솔직히 내당에 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말이다.

갓 주부가 되었을 때는 내당에 출입할 수 없었던 걸로 보아 내당 출입 조건이 첫 월급을 받거나, 아니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은자 액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았다. 내 신상에 바뀐 부분은 이 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난 지금 내당에 출입할 수 있고, 금으로 도배된 내당의 한 전각 안에서 금적산을 볼 수 있었다.

“금적산, 안녕?”

상관한테 반말하는 게 재밌다. 어쩌면 습관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네는 누군가?”

‘헉! 자기 직원도 몰라보는 CEO라니. 역시 강호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게임이군.’

“외당 소속 조 주부지.”

“외당의 조 주부군그래. 그래, 무슨 일인가? 난 바쁜 몸이라네.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나가게나.”

‘바쁘긴 개뿔이. 안락의자에 앉아서 차나 마시면서. 주부 따위하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어쨌든 용건을 말해야겠지. 금적산아! 네가 마지막 희망이다!’

“장주님, 상인 레벨 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거야 당연히 돈이지. 상인은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한다네. 어때? 돈은 좀 들고 있나?”

금적산이 말을 마치자마자 눈앞에 메시지창 하나가 올라왔다.

[레벨을 5에서 6으로 올리시겠습니까? 은자 1백 냥이 필요합니다.]

‘아싸! 금적산 너밖에 없구나.’

감격의 눈물이 나올 뻔했다. 이걸 알려고 몇 시간을 헤맨 건지.

난 당연히 돈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 레벨 업을 했다.

그런 식으로 레벨 10이 되자, 그다음부터는 5백 냥이 필요했다. 그리고 15가 되니 1레벨 업에 은자 1천 냥씩 들어갔다.

그렇게 레벨 20이 되는 데 들어간 총 비용은 8천 냥이었다. 이제 내게 남은 돈은 5천 냥이 조금 안 됐다.

남은 돈은 다른 사업을 위한 종자돈으로 남겨야 하기에 더 이상의 레벨 업은 사실상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낙양에서 상인 최고의 레벨은 나일 거라는 확신은 가질 수 있었다.

레벨이 20이 되고, 모든 스탯을 지능으로 몰아넣어서 지능 스탯도 20이 되었다.

금적산은 레벨 업을 시켜 주긴 했지만, 승급을 해주지는 않았다. 난 다시 총관에게 돌아갔다. 역시 내 짐작대로 승급은 총관이 담당하고 있었다.

총관에게 다시 승급에 관해 질문하자, 예전과는 다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오, 조 주부. 자네의 일처리에 대해서 산장의 모든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더군. 그래서 내 이번에 승급 심사에서 자네를 강력히 추천했다네. 오늘부터 자네는 황금산장의 서기라네. 노임은 월 천 냥일세.”

분명 주부 위로는 집사고, 서기는 주부보다 두 단계나 위인데 갑자기 서기로 승급해버린 난 어리둥절했다.

겨우 레벨 20이 서기의 조건은 아닌 듯싶고, 그렇다면 지능 스탯 20이 서기의 충족 조건이라는 셈이었다.

결국 상인은 머리 하나로 먹고사는 인생이란 말인가?

여하튼, 난 은자 8천 냥과 황금산장의 서기 직책을 맞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서기의 혜택이 단순히 은자 8천 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사 상태에서는 어떤 혜택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서기인 지금 상태에서의 혜택은 상당했다.

우선 미구현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서기가 맡은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하는 일 없이 월급을 받아 가는 셈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된 이유는 상인이 레벨 업을 하려면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 돈 벌 시간을 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리고 어디에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명성 수치가 1백이 되었고, 황금산장 산하 전장에서의 대출 한도액이 1만 냥으로 껑충 뛰었다. 물론 이자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월 1할의 고리였지만, 1만 냥이란 돈을 융통할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은 엄청난 이득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더불어 무림맹의 외당과 낙양부중(洛陽府中)에도 출입할 수 있었다. 이들 외부 세력의 출입 제한이 직책일지, 명성에 제한을 받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른 유저들에 의해 밝혀질 게 뻔하지만.

그리고 행정 기관인 낙양부의 경우엔 단순히 출입의 기능만 추가된 셈이었지만, 무림맹의 외당은 경우가 달랐다.

비록 황금전장에서 1만 냥의 돈을 빌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돈을 함부로 빌려 쓸 수는 없다. 간단히 계산해서 한 달에 월 1천 냥의 이자를 납부해야 하고, 복리(複利)가 아니라 단리(單利)라고 하지만, 현실 시간으로 그 돈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접속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틀하고도 12시간이라는 시간은(게임 속 시간으로 딱 한 달)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자를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뻔하니, 함부로 전장에서 거액의 돈을 빌리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닐 것이다.

덕분에 만두 노점을 때려치운 나는 다시 생계를 고민해야 했다. 돈이 없으면 레벨 업을 못하는 상인의 특성상, 레벨을 위해선 다른 대박거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월 1천 냥씩의 서기 월급으로 레벨 업을 해야 할 텐데, 그건 정말 바보짓일 뿐이다. 월급은 플레이 시간으로 계산되어 지급되기 때문이다.

갚는 건 절대적인 시간이고, 수입은 상대적인 시간에 의해 제약받는 시스템은 언뜻 논리에 맞지 않는 듯하지만, 게임의 밸런스상 어쩔 수 없어 보였다.

* * *

무림맹에는 신기한 시스템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기부라는 이름의 갈취 시스템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기부라는 이름은 뇌물이란 말과 등가(等價)의 말이었다.

낙양부중에도 기부를 할 수 있는 인물이 있긴 했다. 관의 힘이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무협 게임이라는 기본적인 틀을 가지고 있는 게임에서라면 누구나 무림맹에 투자를 할 게 뻔했다.

투자에선 항상 선두에 서왔던 나로서도 무림맹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게 당연했다.

낙양성의 크기는 중원 최고의 도시답게 그 크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족히 수만 채는 되어 보이는 건물이 성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컸다.

물론 중요하거나 큰 건물은 대로변에 있고, 유저들의 노점도 대로변을 따라 형성되어 있어서 특별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가장 큰 대로는 성의 남문에서 북문을 향해 뚫린 직선로인데, 무림맹은 남문의 입구 근처에 있었다.

거대한 전각군으로 이루어진 무림맹은 낙양에서 제일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황금산장에선 간간이 볼 수 있었던 유저들을 단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나름대로 상인 클래스의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마저도 비슷한 세력의 서기라는 직책을 달고서야 문지기가 아니꼽지만 통과시켜 준다는 인상을 줬을 정도였으니,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무림맹이란 곳이 중원 거대 문파의 본산제자가 아니면 말단무사가 되기도 힘들고, 혹은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낭인, 협객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무공 수준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제 겨우 무관에서 삼재검이나 오금희 따위를 수련하고 있을 여타 유저들에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일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 낙양은 총단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더욱 일반적인 유저들의 출입이 안 보이는 건 너무나 당연할지도 모른다. 물론 강호의 기획자들이 무협 소설을 많이 봤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족히 수백은 돼 보이는 무림맹 무사들의 연병 모습을 뒤로하고 총총히 무림맹 외당의 순찰당으로 걸어갔다.

무림맹도 황금산장과 마찬가지로 내당과 외당을 구분 짓는 담이 존재했는데, 내당은 겨우 외부 세력의 미관말직인 나로서는 문 앞에서 딱지만 맞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순찰당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달랑 2개뿐인 전각 중의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접객당이었는데, 그곳은 손님을 맞는 역할을 하는 사내 한 명만 있을 뿐,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눈앞의 배불뚝이 중년 남성이 무림맹 낙양 총단 순찰당주라는 녀석이었다. 개기름이 자르르 흘러내리는 얼굴에 수염만 제법 그럴싸하게 기른 녀석인데, 정말 말이 많았다.

“강호의 흉신악살 따위는 이제 우리 무림맹 덕택에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

“혈교와 천마교를 제거하신 천무성군의 유지를 우리는 계속 이어가야만 하네. 강호 평화는 오직 무림맹만이 지속시켜 줄 수 있지. 하나, 무부에 불과한 우리가 강호 정의와 평화를 바라는 민초들의 정성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 요즘 우리 순찰당에서 낙양의 치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걱정이 많다네.”

도대체 저 인간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듣고 있는 와중에 로그아웃의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저 계산적인 답변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었는데, 이런 식이었다.

요새 순찰당의 무사 누구누구가 흉적과 싸우다 죽거나 다쳤는데 이미 정해진 예산으론 보상이 힘들다, 중원 무림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약간의 금전을 보태 달라, 뭐 이런 식이다. 그게 바로 뇌물을 받는 작업이었다.

내가 이권을 위해 뇌물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강탈에 가까운, 아무런 이유 없는 돈을 낼 리가 없기에, 처음 이 녀석의 말을 듣고선 무시한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다. 만두 사업을 계속하기에는 수익이 보장되지 않고, 남들보다 조금 넉넉한 자본금을 가지고 초급 무기와 무공서를 거래하는 것도 그렇게 이득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미친 척하고 도끼 들고 나무를 베거나 사냥을 하는 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이미 레벨이 20이나 되다 보니 그런 걸로 레벨 상승을 바라는 건 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론 황금산장 소속 상인들의 기본적인 업무인 각 지역의 물품 수송에 기대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매입 물량의 한계와 수익성의 한계 때문에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번 승부는 전적으로 직감에 의존한 도박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도박이 실패했다고 해서 딱히 내가 처할 위험이란 이전과 똑같을 뿐이다. 어차피 지금 가지고 있는 은자 5천 냥이란 돈은 이도저도 선택하기 힘든 어정쩡한 돈이기 때문이다.

난 5천 냥이란 돈을 무림맹에 버린다는 심정으로 임했다.

“…강호의 안녕을 위해 약간의 금전이 필요합니다. 대협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 순찰당주에게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1백 냥의 돈이 필요합니다.]

뇌물을 요구하는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거리낌 없이 응하겠다고 했다.

“돈을 주겠습니다.”

[무림맹에 은자 1백 냥을 기부하셨습니다. 무림맹과의 우호도가 1이 되었습니다.]

일반인들 한 달 월급인 은자 1백 냥이 겨우 우호도 1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셈이었다.

나는 재수 없는 순찰당주의 말을 계속 들어가면서 뇌물을 부어댔다. 열심히 은자 1천 냥을 부어댄 값으로 우호도 10을 달성했고, 순찰당주한테 의미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자네의 강호 평화를 염려하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네. 덕분에 우리 순찰당이 그나마 정상적인 운영을 계속할 수 있게 됐어. 비록 무림맹의 하급 무사지만 자네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자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은자 천 냥을 가지고 내게 오게나. 중원 최강의 무림맹 무사를 보내 자네에게 도움을 주도록 하겠네.”

‘캬! 이 망할 순찰당주 녀석. 사기 쳐서 돈을 우려내더니 재미를 붙였나. 하급 무사가 뭐, 은자 천 냥? 돈이 넘쳐나고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대(大)황금산장의 서기인 나도 월급이 천 냥에 불과한데,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이런 터무니없는 액수를 불러대는 거야? 하긴 지금은 돈이 문제가 아니지. 이 녀석에게 우호도를 올리면 뭔가 대단한 제의가 생길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투자한 셈이니까. 그래도 꽤 괜찮은 생각이었어.’

분명 대단한 일이긴 했다. 아무리 하급이라지만 엄연히 중원 최강 무력 단체에 소속된 무사이고, 지금처럼 고급 무사가 없는 시점에선 대단한 활용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시 돈을 지불했다. 우호도를 더 올리면 또 어떤 변화가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알아보면 되는 거고, 지금은 이 ‘무림맹 하급 무사 임대권’이란 아이템의 효용 가치를 알아보는 게 더 중요했다.

사용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지 못하기에 바로 사용해볼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난 이 무사의 능력을 알아볼 만한 자리를 찾아가야 했다.

* * *

강호를 처음 시작할 때 나무를 벴던 야산의 정체는 북망산(北邙山)이었다. 낙양이 역대 왕조의 수도였을 때에는 제왕, 명사, 귀인들의 무덤이 지천에 널려 있었겠지만, 지금은 나무꾼들의 수련 장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곳은 이런 야트막한 야산 정도가 아니다.

낙양에서 서안으로 가는 길목에는 화산(華山)이 있고, 그곳엔 중원 구대문파 중의 하나인 화산파가 있다. 비록 화산파가 있는 지역이 지금은 갈 수 없는 섬서성이라고는 하지만, 하남성의 서쪽 경계와는 지척이다 보니 그쪽 방면에 산적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뻔히 짐작이 되는데 그쪽으로 갈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동쪽 정주 방향은 평야 지대라 치안의 문젯거리가 있을 리 없다. 북쪽 낙하(洛河)를 건너면 험산준령이 쭉 이어져 있어 최적이긴 하지만, 거기는 산서였다.

낙양 서남쪽엔 복우산이 있다. 산의 크기가 수백 리는 넘어서, 산이 아니라 산맥이라고 불리는 게 맞을 정도다. 복우산의 끝자락은 낙양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고,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이 바로 이 복우산이었다.

복우산의 초입에선 사람들을 꽤 볼 수 있었다. 최초의 사냥터인 북망산에서 토끼나 여우 같은 몬스터를 사냥한 사람들의 후속 사냥터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파티로 곰이나 살쾡이, 늑대 따위를 사냥하는 일행을 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서버가 열리자마자 줄곧 게임 플레이를 진행한 최고렙들의 사냥물은 곰까지가 한계인 듯 보였다. 그나마도 혼자서는 잡지 못해 곰 한 마리를 서너 명이서 감당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나도 조심을 해야 했다. 몬스터들이 선공(先攻)형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실력으로는 재수 없게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게 단 한 방에 죽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소환! 무림맹 하급무사!”

[무림맹 하급무사를 소환했습니다. 60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무림맹으로 복귀합니다.]

소환 명령을 내리자마자 내 눈앞에 청의인 한 명이 나타났다. 복부에 맹(盟)이란 글자가 적혀 있고, 백련정강한 장검을 찬 모습이 무림맹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무사의 모습이었다.

일단, 난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어이, 자네!”

우선 혹시나 말귀를 알아듣나 해서 말을 걸어보았다.

“네, 명령을 내려 주십쇼.”

‘오호라, 대화가 되네? 역시 역대 최고의 인공지능을 탑재했다는 광고가 거짓은 아니었던 건가?’

“이름이 뭔가?”

“무림맹 순찰당 소속 조추산입니다.”

‘하하. 이거, 이거 골 때리는 게임이네. 소속이 있는 거야 그럴듯한데, 이름까지 가지고 있을 줄이야. 설마 모든 하급무사들의 이름이 다 조추산인 건 아니겠지?’

하여튼 이따위에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은 소환인에 대한 조작 방법을 익히는 게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 좋아. 조추산, 일단 만나서 반갑네. 그런데 자네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지? 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자세히 좀 알려 줬으면 하네만.”

“네, 저도 반갑습니다. 소환인에 대한 조작 방법은 소환 상태창을 열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시 모든 정보는 게임 속에 있다는 말이 맞나 보군.’

난 바로 소환 상태창 오픈을 외쳤다.

[소환 상태

소속:무림맹 하급무사

전투 타입:수비형

공격력:100

체력:2,000/2,000

내공:1,000/1,000]

유저들의 상태창과는 조금 달랐다. 유저들의 경우엔 공격력이 표시되지 않는데, 이 무사는 공격력이 100이라는 표시까지 보여 주고 있었다.

“조추산, 다른 건 알겠는데 전투 타입은 뭔가?”

“네. 전투 타입엔 수비형, 조화형, 공격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비형은 안전 위주의 전투를 하고, 공격형은 빠른 공격을 하는 타입입니다.”

“좋아. 그런데 정해진 전투 타입은 다시 바꿀 수 없는 건가?”

“타입 변경이라 외치고 원하는 상태를 말하면 됩니다.”

“그래? 타입 변경! 공격형!”

[소환인의 전투 타입이 공격형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타입을 일단 공격형으로 지정해두고 다시 조추산을 불렀다.

“조추산, 그런데 전투는 어떻게 시작하지?”

“소환이 시작되고 나서는 소환자가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피소환자는 전투에 참여합니다. 또는 목표물을 지정하고 공격이라고 외치시면 선택된 대상을 상대로 공격을 합니다. 피소환인은 단 두 가지 명령만 받습니다. 공격과 후퇴입니다.”

뭐 딱히 NPC를 상대로 복잡한 전투를 요구하면 사기에 가까울 테니, 단 두 가지 명령어만 알아듣는다고 해도 별로 문제가 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 안전을 위해서 무사를 소환하긴 했지만, 달려드는 몬스터는 없었다. 그래서 저쪽에서 어슬렁거리는 곰 한 마리를 목표로 다가갔다.

“공격!”

내가 손가락으로 곰을 가리키고 공격이라고 외치자 조추산이 곰을 향해 달려갔다. 상당히 빠른 몸놀림이었다.

서걱!

조추산의 칼놀림은 아까 봤던 여타 유저들의 것과는 급이 달랐다. 삼류 무관이나 서점에서 파는 쓰레기 무공과는 뭔가 급과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삼류이긴 하지만 역시 무림맹의 무사다웠다.

곰은 공격을 받자마자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조추산에게 앞발 공격을 해댔다. 하지만 그 공격은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다. 조추산이 표홀한 신법으로 곰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다시 검을 곰의 몸 곳곳에 쑤셔 넣었기 때문이다.

부상이 심해지자 곰은 더욱 발악을 했지만, 그도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은 그 큰 몸을 땅바닥에 뉘어야만 했다.

조추산이 곰 한 마리를 잡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조추산은 곰이 죽자마자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내가 잡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강호 생활 처음으로 몬스터를 사냥한 기분은 날아갈 듯이 좋았다. 여태 장사만 하고 있었으니, 이 기분을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을까!

곰이 죽고 그 자리에 떨군 것은 웅담(熊膽) 한 개였다. 웅담은 영약은 아니지만 귀한 한약재라, 아마 이 자리에서 계속 곰 사냥만 해도 조추산의 월급은 건질 것 같았다.

대략 10여 마리 정도의 곰을 더 사냥했지만, 웅담이 꼬박꼬박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 겨우 3개만을 더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사냥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우아! 저기 저 사람 좀 봐. 혼자서 곰을 잡는다.”

“헐! 뭐냐? 저 사람 운영자 아냐?”

“버그 사용하는 거 아냐?”

내 주위로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조추산이 곰을 잡는 모습을 구경하느라 북새통을 이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 저 사람은 누구냐, 어디서 무공을 배웠느냐 등등, 질문의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하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조추산이 일반 유저나 다름없어 보일 것이고, 시간상 그런 능력을 갖출 수는 없으니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상황처럼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난 조추산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는 복우산 끝자락에서 더 깊이 들어갔다. 점점 사냥하고 있는 유저들이 줄어들더니 어느 정도에 이르러선 아무도 볼 수 없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몬스터의 배치도 달라져 있었다. 이제 앞서 봤던 그런 곰은 볼 수 없고 대웅(大雄)이나 호랑이, 표범 따위의 맹수들만 보였다.

조추산은 호랑이를 상대하는 데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간혹 주위의 다른 맹수가 나를 보고 달려드는 통에, 내가 죽을 뻔한 경우가 수도 없이 이어졌다.

아직 한 대도 맞지 않았지만, 아마 호랑이 앞발질 한 번에 내 몸이 땅에 엎어질 가능성은 농후했다. 덕택에 사냥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다른 맹수가 나를 노릴 때는 조추산을 후퇴시킨 뒤 새 몬스터를 지정해서 공격해야만 했다. 그렇게 몬스터에게 검을 한 번씩 쑤셔 주면, 날 보고 달려들던 맹수들이 이제는 조추산을 보고 달려들었다.

이런 식이 자꾸 되풀이되다 보니 조추산에게 맹수들이 떼로 몰리게 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러면 아무리 조추산이 천하무적 무림맹 삼류 무사라도 맹수 따위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소환자인 내가 적절히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너무 몰리면 뒤돌아보지 않고 안전한 곳까지 도망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사냥은 꽤 재밌었다. 호랑이나 표범은 가죽을 떨궜고, 멧돼지는 이빨을 떨궜다. 멧돼지 이빨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정체가 의심스럽긴 했지만, 일단은 열심히 챙겨 두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경험치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직접 조추산이 그동안 잡은 몬스터를 다 잡았다고 치면 몇 번의 레벨 업은 족히 했을 텐데, 아무래도 이 점이 소환의 유일한 단점 같았다.

너무나 긴장한 상태로 사냥을 연속하자, 피로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날은 밤 12시가 되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강호에 접속하자마자 조추산은 바로 나타났다. 로그아웃을 하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를 봐야만 했다.

[무림맹 하급무사의 소환 시간이 42시간 35분 21초 남았습니다.]

분명 어제 조추산을 소환해서 사냥한 시간은 네다섯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소환 시간은 로그아웃을 해도 계속 흘러가는 셈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분명 게임 시간으로 한 달이라고 했으니……. 어쨌든, 오늘도 한번 달려 볼까?”

오늘은 호랑이보다 더 위험한 녀석을 잡아볼 생각이었다. 원래 내가 복우산으로 왔던 목적. 바로 산적 토벌 말이다.

복우산에는 작은 소로(小路)들이 꽤나 많았는데, 소로 근처에서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다. 일단 길가가 안전지대인 셈이다.

또 그 작은 오솔길과는 달리 관도(官道)도 존재했는데, 관도에는 간혹 NPC 상단이나 표국 행렬, 관의 파발마들이 달려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관도를 따라 한참을 가자, 비로소 산적 패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크하하. 겁도 없이 혼자서 이 복우산을 건너는 인간이 있을 줄이야! 뭐 하느냐? 어서 가진 물건들 몽땅 내려놓지 않고!”

[복우산 산적패에게 통행세 1백 냥을 지불하시겠습니까? (Y/N)]

역시 몬스터라도 인간형이라 그런지 말도 할 줄 알았다. 아마 통행세를 지불하면 무사통과를 시켜 주는 시스템인 모양인데, 1백 냥이 적은 돈도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조추산, 저 두목처럼 보이는 녀석부터 공격해!”

조추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자마자 난 바로 뒤로 빠졌다. 그리고 조추산이 두목을 공격하자마자 조추산의 공격 목표를 연이어 바꿔주었다.

그렇게 산적패 10여 명을 조추산에게 다 붙여 놓는 신기(神技)를 펼치고 나서는 느긋하게 우리 조추산 님이 날뛰는 모습을 편안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산적패들이 들고 있는 무기는 가지가지였다. 우두머리는 거대한 철퇴처럼 생긴 방편산을 들고 있었고, 어떤 놈은 박도, 누구는 대감도, 또 나무꾼이나 쓰는 도끼를 들고 있는 녀석들도 있었다.

무기가 다양한 만큼 공격도 가지가지였다. 눈치 보다가 찌르는 놈, 무식하게 저돌적으로 돌격하는 녀석 등.

역시 가장 무시무시한 녀석은 방편산을 휘두르는 놈이었다. 다른 공격은 느려 터졌는데 그 방편산 하나만은 휘익휘익 파공성을 내는 걸 보니, 까딱하다가는 조추산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조추산은 꽤 힘들게 산적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몸놀림이 좋아서 아직 치명타는 입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가 방편산에 제대로 맞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조추산, 후퇴! 후퇴!”

산적패한테서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조추산이 산적들의 공격에 두 번이나 맞고서야 떨쳐 버릴 수 있었다.

“헉헉! 에고 에고 힘드네. 일대일로는 아무것도 아닌 녀석들처럼 보이는데 뭉쳐 놓으니깐 정신을 못 차리게 공격을 해대는구만. 일단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나 볼까? 소환 상태창 오픈!”

[소환 상태

소속:무림맹 하급무사

전투 타입:공격형

공격력:100

체력:1,514/2,000

내공:725/1,000]

“음… 두 대를 맞았으니, 공격 한 번에 이백오십 정도가 깎여 나가는 셈이네. 겨우 잘 버텨야 여덟아홉 번의 공격을 허용하면 죽게 되는군. 뭐, 이젠 아까처럼 바보 같은 짓만 안 하면 되니까 별로 걱정은 되지 않지만. 그나저나 이제 무림맹 하급무사의 수준을 대충 파악할 수 있겠군. 호랑이 대여섯 마리가 붙어도 끄떡없지만, 작은 산적패 열 명의 합공에는 힘든 수준이란 말이지. 흠… 이제 체력도 회복되고 했으니 다시 가볼까?”

조추산의 손실된 체력 5백은 대략 5분 정도가 지나자 회복이 됐다.

난 다시 조추산을 끌고 아까 산적패가 나온 자리로 갔다. 저 멀리 우리를 골탕 먹인 산적들이 그 자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마 처음 공격은 매복 형식이고, 그 이후에 전투가 제대로 종결되지 않아서 다시 매복을 취하지 않은 상태 같았다. 시간이 더 흐르면 예전처럼 다시 매복을 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건 결코 내가 바라는 양상이 아니었다.

일단, 제일 외곽의 약해 보이는 녀석을 목표로 정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산적패와 나와의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이번엔 좀 더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했다.

조추산은 신법을 이용해서 재빨리 달려가더니 내가 지정한 산적을 일 검으로 양단해버렸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저 녀석도 아까 도망친 게 한이 맺혔나? 하하!”

물론 호랑이나 표범을 잡을 때도 저런 식의 치명타가 터진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때맞춰 한몫을 해주니 기분이 너무 좋아졌다.

“좋아. 이번엔 그 옆에 있는, 도끼 들고 있는 녀석. 공격!”

도끼는 파괴력은 있어 보이지만, 연타 공격이 힘든 병기였다. 그렇기에 몸놀림이 좋은 검수에겐 먹기 좋은 간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도끼 산적 역시 금방 조추산의 칼질 몇 번에 쓰러졌다.

그때쯤 산적 무리의 포위도 완성이 돼서, 이제 조추산은 다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나 역시 아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전투에 임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박도를 들고 있는 녀석이었다. 느린 중병기를 들고 있는 녀석을 먼저 해결하자는 생각에 거기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조금 가벼운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이나 우두머리는 아무래도 무기가 가볍기에 회피할 능력이 조금 높아 보였다.

중병기를 들고 무림맹 무사의 검법을 막는 건 아무래도 이런 산골 도적패의 능력으론 좀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비록 체력은 더 높을지 몰라도 아까보다 2명이 줄어든 공격 덕택에 조추산도 연신 방어만 하지는 않았고, 간간이 날리는 검격에 목표로 정한 박도 도적마저 쓰러지고 말았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또 다른 박도 든 녀석, 그리고 대감도, 장창, 검을 든 녀석까지! 무슨 합격진을 배운 건 아니겠지만, 공격수가 한 명 빠지면 그만큼 조추산이 방어에 시간을 두지 않아도 됐다.

결국 공격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한 명의 도적이 죽어 나갈 때마다 이후엔 점점 시간이 단축되었다.

마지막 방편산을 든 녀석은 우두머리답게 꽤 오래 버텼다. 하긴 파공성이 일 만큼 그 무거운 병기를 잘 다루는 녀석이니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그래봤자 녀석은 산적이고, 우리 조추산 형님은 대무림맹의 정예 무사다!

“끄윽… 천하의 오심걸이 복우산에서 뼈를 묻다니…….”

‘역시 우두머리라서 그런지 죽어갈 때 대사도 읊는구나. 역시 뭔가 다르군. 하하. 그럼 이제 전리품을 한번 살펴볼까?’

“에라이! 역시 시골 산적이라서 별수 없구만! 이게 뭐냐, 도대체!”

낡은 대감도, 낡은 방편산. 건진 건 달랑 2개였다. 은자 한 냥도 떨구지 않았다.

‘무슨 특별한 무림기보를 바란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아니잖아.’

대감도나 방편산은 상점에서 은자 2백 냥에 구할 수 있다. 팔 때는 살 때 가격의 절반밖에 쳐 주지 않으니 달랑 은자 1백 냥. 그나마도 ‘낡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걸로 봐서는 그것도 받기 힘들게 생겼다.

“에고 에고, 이 녀석들을 계속 사냥해야 하나? 경험치는 포기했으니 수입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말이야. 그냥 차라리 죽어라 호랑이 사냥이나 하는 게 나을까? 뭐, 아직은 정보 수집이 더 중요하니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볼까?”

그 후로도 오심걸 같은 패거리를 몇 번 더 만날 수 있었다. 유막심, 조철영, 막상, 철국진 등등. 신기하게 모든 우두머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를 알아낸 게 정보라면 정보일까?

건너갈 수 없는 호북성 경계까지 갔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숲 속의 관도를 걷다 보니 온갖 잡다한 두목 이름을 가진 산적패들을 다 만날 수 있었지만, 특별한 수입도 없고 레벨 업을 위해 특히 좋은 면도 없어 보였다. 때문에 다시 처음 오심걸을 만난 장소로 돌아온 것이다.

오심걸을 만난 곳을 중심으로 산속으로 들어가 산속 오솔길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오솔길은 안전지대라 공격당할 위험이 없기에 별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꼬박 서너 시간을 수색한 후에야 원하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마천채(摩天寨).

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무슨 산적 소굴이 이렇게 커? 설마 말로만 듣던 녹림맹 총타? 정말로 녹림맹 총타라면 괜히 건드렸다가 살아 나가긴 힘들 텐데…….’

다행히 마천채는 녹림맹 총타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 방대한 크기만큼이나 대단한 곳이긴 했다. 바로 녹림 72채 중의 한 곳이었던 것이다. 마천채 앞의 경계석에 분명 ‘녹림 72채 마천채’라고 써 있으니 맞긴 맞을 것이다.

일단 산채 입구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산적패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희한하게도 먼저 공격을 해오거나 하진 않았다.

“얘네들 산적 맞아? 설마 몬스터가 아니라 NPC 개념인 건가?”

일단 선공을 받지 않았기에 앞의 보초 중 한 녀석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마천채 호걸님?”

뭐, 일단은 띄워주고.

“그래, 황금산장에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어라? 먼저 공격하지 않은 이유가 내가 황금산장 소속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 별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니고… 이곳 채주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아니, 우리 채주님 성함도 모르고 찾아왔단 말이오? 위대한 마천채의 채주님 성함은 벽력수 왕곤이오!”

“뭐, 모를 수도 있는 일이지. 그거 가지고 그렇게 큰 소리를 낼 필요까지는 없잖소. 음… 하여간 수고하시오. 경계 잘 서시고.”

보초한테 물어볼 말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아무렇게나 물어봤는데, 저렇게 선선히 대답해줄 줄은 또 몰랐다.

‘하여간 채주쯤 되면 별호도 가지고 있나 보네. 벽력수로 봐서는 일격 필살의 권법을 사용하는 사람 같은데……. 뭐, 이것도 좋은 정보라면 정보겠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마천채가 백도문파나 관의 세력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난 황금산장 소속이고 조추산은 무림맹의 무사였다. 그래서 한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음… 이 정도면 거리도 충분하고, 이제 시작해볼까? 일단 오른쪽 녀석부터 건드려 봐야겠다. 자, 조추산 공격!”

바람처럼 조추산이 오른쪽 보초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공격을 하자마자,

땡땡땡땡!

“적의 침입이다! 적의 침입이다!!”

땡땡땡땡땡!

무슨 꽹과리 소리인지 종소리인지 갑자기 산채 전체에 비상경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많은 산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하고 다니는 행색도 대부분 호피 가죽옷을 걸치고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무기를 착용하고 있는 걸로 봐서, 만만해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야, 일단 튀자. 조추산 후퇴! 후퇴!”

이번엔 후퇴도 안 됐다. 이미 조추산은 목표로 정한 보초를 죽이긴 했지만, 후퇴를 할 만한 처지가 못 됐다. 험악한 산적들이 퇴로까지 봉쇄하고는 무식하게 칼질, 도끼질을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추산을 둘러싼 산적이 족히 1백 명은 돼 보였다. 우리 조추산 형님이 비록 조자룡이랑 같은 성씨라지만, 백만 대군 속을 질주하던 그 실력까지 똑같진 않으니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조추산은 연신 방어를 하다가 결국 몇 번의 공격을 받고는 억억, 소리를 내며 죽어버렸다.

“헉! 무슨 산적들이 저렇게 세? 역시 녹림 칠십이 채는 일반 산적패들이랑 급수가 다르다 이건가? 그럼 산적들이 저 정도면 구대문파니 오대세가니 하는 녀석들은 어떤 괴물들이란 말이야!”

조추산이 죽어서 안타깝긴 하지만, 더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유저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무림맹에 돌아갈 NPC에 불과했으니까.

어쨌든 조추산의 죽음으로 인해 중요한 정보 하나는 건질 수 있었다. 지금 내 실력으로 녹림 산채와의 전투는 어림도 없고, 그나마도 세력을 가지고 덤벼야 가능성이 조금 보인다는 걸 말이다.

오늘 사냥은 그걸로 끝났다. 난 낙양으로 다시 돌아와 로그아웃했다.

다음 날.

접속을 하자마자 어제 사냥한 물건들을 상점에 매각하러 갔다.

호피 가죽은 30냥, 표범 가죽 15냥, 웅담 10냥, 멧돼지 이빨은 2냥이었다. 생각만큼 값이 좋지 않았다.

다행히 산적패들한테서 얻은 병장기를 팔아치워 총 2천 냥에 가까운 수입을 얻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한 시간 동안 열심히 하면 5백 냥 정도의 수입은 나오는 셈이었다.

이 이상의 좋은 사냥터도 없고, 다른 대박 장사도 기대하긴 어려웠다. 앞으로 한동안은 산적패와 맹수 사냥을 해가면서 레벨 업에 신경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시 무림맹 순찰당주에게 1천 냥의 돈을 주고 무림맹 하급무사를 고용했다.

새 무사는 장호달이라 했고, 역시 검을 사용했다. 아마 하급무사들은 공통적으로 검을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모든 능력치도 일정했고, 사용하는 검술도 비슷했다.

비록 내가 레벨이 오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소환무사도 달라진 게 없지만, 사냥 효율은 처음하고는 판이하게 좋았다. 일견 당연했다. 이미 요령이야 익힐 대로 익혔고, 요 며칠처럼 딴 짓하고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마천채는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고, 관도를 따라 걸으면서 조무래기 산적만 골라잡았다. 이젠 10명이 몰려도 무림맹 무사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여러 공격 태세를 골라서 해보니, 다수를 상대하기엔 수비형이 월등히 나았다. 이것 또한 조금만 생각을 하니 이해가 갔다.

공격형은 몬스터가 한두 마리씩 나올 때 빠른 정리를 하기 위한 방법이고, 수비형은 다수를 상대하거나 강한 몬스터에게서 생존을 우선시하는 방법이었다. 덕분에 산적패를 상대로 할 때는 조화형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보다 한 등급 낮은 맹수들을 잡을 때는 공격형이 더 좋은 선택이고 말이다.

그날 하루 동안 몰살시킨 산적패가 몇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 1백 번까진 안 갔을 것이다. 산적패가 관도에 널려 있진 않으니 말이다. 다만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나온다는 건 몇 번 해보니 알 수 있었고, 그 리젠 타임을 잘만 맞추면 산적패를 쉬지 않고 만날 수도 있었다. 뭐, 그것도 지금 산적을 잡고 있는 유저가 나뿐이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경쟁자가 한 명이라도 더 생긴다면 보따리 싸서 도망가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조추산부터 시작해서 장호달, 유운비, 서마평, 그 외 수많은 NPC들. 동고동락한 위대한 무림맹 하급무사들을 영원히 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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