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72. 최종화-에필로그
도원과 똑같이 생겼는데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의 아우라가 한 번에 바뀌니 달라 보였다.
“하하, 아셨군요.”
공포에 떨던 도원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함이었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유선의 뒤편에 손을 내밀며 그에게 권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앉으라니, 설마 이 높은…….”
유선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유선에게 딱 맞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유선은 도원, 아니 마왕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정도원 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이 마왕의 인성이 나왔다면, 정도원 본인은 어떻게 됐는지, 유선은 궁금했다.
“그 남자라면 참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정도원 씨를 납치해 갔을 당시, 그 괴한들이 저항하려던 정도원 씨의 머리를 찍었습니다. 그때 바로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피를 흘렸고 충격이 심했거든요. 그래서 오래 버티진 못했습니다.”
“…….”
“고통스럽지 않게 갔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도와줬습니다.”
유선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고, 마왕은 그것을 알고 진정하라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유선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자는 자신이 마왕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살아 있습니까?”
“그자라면…… 크레이븐 말이군요. 그가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마왕도 그것에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어떤 의미로 보면 정말이지 충신이 따로 없는 녀석입니다. 그 아이에게 코어를 줬을 때, 마왕으로서 살아 보라고 했는데, 설마 그렇게 얘기했을 줄은…….”
마왕은 흡족한 듯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븐은 그저 광기에 잡혀 모든 것을 도륙해 낸 악마 중의 악마였을 뿐입니다. 그는 마왕이 될 그릇이 되지 못하는 악마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에게 코어를 줘서 이 지경으로 몰고 가셨습니까?”
“새로운 희망이 열리길 기도했습니다.”
유선은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은 그렇게 여길 수 없도록 무게를 지닌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질서의 세계수가 무너지고 마계도 엉망이었습니다. 질서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죠. 제가 성검에 꼼짝도 못 하고 봉인되고 터져 버렸지만 말이에요.”
“질서의 세계수가…….”
유선은 들은 적이 있었다. 엘프들은 모순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고, 드워프는 매몰되었다. 거의 모든 종족이 자살에 가까운 상태로 죽었던 것이 말이다.
마왕이 한 말이라면, 질서의 세계수의 영향은 악마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이었다.
“에고르트가 성검을 뽑아 준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지요. 마왕군이라고 할 세력들은 모조리 몰살당한 상태였습니다. 충신이던 에고르트와 크레이븐이 고작이었지요. 결국 지상의 모든 생명처럼 저도 제 종족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멸망할 운명이었지요.”
마왕은 한숨을 길게 내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저는 기괴하게 늘어진 시체들로 장난치는 크레이븐에게 마왕이 될 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마음대로 모든 것을 어지럽히라고 했죠. 크레이븐은 늘 자신이 바라 온 지위였기에 그걸 수락했고, 사내가 품던 구슬을 녀석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마왕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라고 했지요.”
마왕은 미소 지었다.
“뭐 그런 말을 안 해도 녀석은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홀로 살아남았을 테니까요.”
마왕이 바닥을 보며 말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유선과 마주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크레이븐이 전력을 다해 당신들을 죽이려 했지만…… 당신들은 막아 냈을 겁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막아 냈지요.”
마왕은 뭔가가 이상했다. 유선이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보았다. 그의 마지막 전력이 죽었는데도 그는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게 이렇게 앉아서 얘기하는 것밖에 없습니까?”
“아마 얘기만 중점으로 하겠지요.”
“어째서입니까?”
“저도 이젠 더는 이런 몸으로 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코어. 그걸 이미 크레이븐에게 건네주었고, 이젠 당신의 몸속에 있으니까요.”
“…….”
코어가 부서지면 악마는 모두 죽게 되었다. 유선은 그걸 알았고, 마왕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아마 마왕이기에 지금도 버티리라.
“이 몸으로 사는 것도 아마 몇 년, 아니 며칠도 못 갈 겁니다.”
마왕은 시한부 인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환자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서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새롭게 단장되는 세계. 그것이 다시 제 모습을 만든다면, 당신이 그 세계의 마왕이 되어 주십시오.”
“…….”
마왕의 말은 어이없었다. 유선이 잠깐 생각하다 그에 대한 대답을 건네주었다.
“거절……하고 싶습니다.”
“그렇겠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마왕인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마왕은 그것이 얼마나 뜬금없고 동시에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인지 알았다. 그리고 유선도 그런 뜬금없는 제안을 한 이유가 있음도 알았다.
“세계를 군림하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어떠한 생명체보다 위대해 보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여립니다. 쌓아 올린 지위를 위협받으며,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야 하고,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본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지위와 명예 때문에 말이지요.”
마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선에게 부탁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는 그런 무게를 지녀 본 적도 없습니다. 그저 코어를 삼킨 것밖에 없지요.”
“아뇨, 당신은 그 무게를 잘 압니다. 일찍이 황제의 본모습을 봐 왔으니까요.”
유선은 마왕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저와 연락하시지 않았습니까? 침공 당시에 말입니다. 신이 무슨 수작을 부려 놔서 바로 눈치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몇 번 얘기하니 제대로 알 것 같더군요.”
유선은 연락했다는 말에 번뜩 과거로 갔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왕의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유선을 보며 말했다.
“그게 당신……이었군요.”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정도원이라는 인간의 목소리와 매우 다르니까요.”
몰랐던 사실이다. 황제가 마왕과 긴밀하게 관계했다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우리는 갈라서야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세계를 존속시켜야 하는 운명이 만든 것뿐입니다. 그렇기에 균형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척, 그리고 동시에 서로에게 많은 정보를 나눠야만 했습니다.”
일찍이 엿들었던 성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면 이해가 갔다. 그 검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마왕이었으니까.
“……황제는 죽었습니까?”
“…….”
“그렇군요. 괜한 걸 물어봤습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만약 균형을 위해서라면, 그 상황에서 자비를 베풀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통치하는 세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했으니까.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왕은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유선에게 질문을 돌려 물었다. 유선은 잠깐 고민하다 그에게 대답했다.
“하겠습니다만…… 저는 어쩌면 됩니까?”
마왕으로서 해야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선은 그릇이 증명되었든 뭐든 완전히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마왕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그저 당신이 살던 삶을 사십시오. 이생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사랑해 주십시오. 아이들과 당신의 여인들을 말입니다. 당신의 정의감대로 후회 없이 인생을 살고 나면 당신은 한 번 더 새로이 태어날 겁니다. 그때는 완전히 마왕의 몸일 것이고,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당신은 완전히 재구축된 세상 속에서 엘레노어와 루데릭을 데리고 다시 세상을 만들려고 움직일 겁니다.”
눈에 그려진다는 듯이 즐거운 표정을 짓는 마왕.
“주책이 많았네요, 정유선 씨. 당신에게 미안하고 동시에 고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당신의 손으로 끝내서 감사합니다.”
모든 얘기가 끝났다. 마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로 마무리하려는 생각이었다. 유선은 바로 그의 손을 잡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한 번 보고 가십시오.”
“누구를…… 아, 그 아이 말이군요.”
마왕은 누군지 알겠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저는 감히 그 아이를 볼 낯짝이 되지 않습니다. 마왕이 될 수 없기에 그 누구보다 모질게 굴었고, 악마들처럼 잔혹하게 그 아이를 무시해 왔으니까요. 용서받을 자격도 없고, 뻔뻔하게 얼굴을 보일 수도 없습니다.”
“용서든, 뭐든 어찌 됐든 간에 당신은 아버지지 않습니까?”
“저는 아버지 따위가 아닙니다. 그저 제 이기심으로 만들어 낸 차선책 같은…… 그런 용도로 낳은 아이였을 뿐이지요.”
마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라고 한다면 당신이 더욱 어울립니다. 그 아이를 낳은 제가 아닌 그 아이를 인정해 준 당신이 말입니다.”
마왕은 내밀던 손으로 목을 긁적거렸다. 갑자기 몰려오는 궁금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궁금하군요. 이렇게 무르면서 동시에 멋진 사내의 곁에 있다니 말입니다.”
마왕, 아니 한 아이의 아버지가 유선에게 물었다.
“제 자식들은 아주 잘 지냅니까?”
“루데릭이라면…… 자식들?”
유선은 그것을 대답하려다, 마왕이 한 말에 놀라 되묻고 말았다. 마왕의 자식이라면, 루데릭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유선은 자식’들’이라는 말에 의아하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아, 모르셨군요. 뭐, 꾸준히 마계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아 온 제 자식도 몰랐으니까요.”
마왕은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엘레노어는 제 딸입니다.”
“켁…….”
유선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정색하며 마왕에게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죠.”
“하하,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실상 루데릭과 엘레노어는 이복 남매…… 자매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복지간입니다. 루데릭은 저 혼자서 낳은 아이이고, 엘레노어는 정말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낳은 아이였지요. 아, 우리에겐 암수 개념 자체가 희미하니까 뭔가 이상해 보여도 이해해 주십시오.”
유선은 허탈하게 웃었다. 엘레노어가 부르는 동생이라는 소리가 정말로 동생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영원히 비밀로 묻어야지.’
루데릭이 충격받을 게 훤히 보였다. 유선은 이런 불편한 진실은 어차피 후에 가서도 알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말을 아끼기로 했다.
“사랑하는 사람…… 황제와 그런 관계면서 잘도 갈라섰군요.”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었지요. 서로를 이해하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질서라는 것이 그런 모순을 지닌 이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니 말입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가 마왕이 되어서는 언젠가 엘레노어와 갈라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조그마한 꼬마가 과연 그걸 받아들일지, 그리고…….
“제가 그런 걸 견뎌 낼까요?”
유선 본인도 그걸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그러자 마왕은 유선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독였다.
“일찍이 말했듯, 당신은 이미 많은 걸 짊어졌습니다. 세계를 부술 힘들을 당신의 손에서 어떻게든 컨트롤해 냈습니다. 저는 그런 당신을 존경합니다. 지도자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그리고 유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한때 마왕의 모든 권력을 휘두른 그 손이 유선을 따뜻하게 감쌌다.
“새로운 세계를 부디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시오. 당신만의 방식으로.”
***
“아…….”
유선이 탄성을 지르고 눈을 뜨자,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러냐, 주인?”
루데릭이 옆에서 폰을 만지다 물었다.
“나 혹시 여기 언제 왔어?”
“언제 왔다니? 주인은 이곳에 계속 있었다.”
계속? 유선은 루데릭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데릭이 가지 말라고 불안해했으니, 결코 허투루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뭔가 불안한 징조라도 보인 게냐?”
유선의 반응에 루데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선은 그에게 대답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헛것을 본 것처럼 느껴지지만, 결코 그것은 헛것이 아니었으리라. 마왕은 그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끔 모든 것을 조작해 둔 상태일 것이다.
그러니 유선은 굳이 언급해 봐야 바보만 될 것 같았기에, 침대에 기대었다. 그러자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왔어요? 꼴이 아직 말이 아니군요.
기율이 누군가를 반기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이 대답했는지 홀로 말을 이어 갔다.
-네? 안에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 만날 수는 없습니다. 형님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다가왔다.
-아직 안 돼요! 형님은 휴식 중입니다!
막무가내인 녀석을 막아 보려고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런 기율의 행동에 화가 나 소리쳤다.
-싫어! 유선 님 볼 거야!
혀도 제대로 못 굴리는 소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정말 착한 아이라면 지금은 쉬게 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우와아악!
쿠당탕!
기율이 전력으로 막다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노어가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산해 버려 기율을 밀어냈으리라.
문이 드르륵 열렸다. 유선은 그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병실 앞을 지키던 기율이 사라지고, 두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성인 모습인 오르넵토스. 그리고 여전히 꼬마 모습을 한 하얀 머리의 소녀.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았을 뿐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무슨 말을 꺼낼지 생각을 다 해 놨는데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엘레노어가 선수 쳐 버렸다. 그녀는 언제나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다녀와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