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69. 선전 포고 (2)
유선의 손을 붙잡았다. 순간이지만, 아주 강한 힘으로 자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치 사후 경직이라도 되는 듯 그 힘은 한 번에 빠지며 손은 다시 축 늘어졌다.
“도원 씨!”
유선은 도원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가 깨어났으리라는 생각에 귓가에 대고 한 번 더 이름을 불러 보았다.
“도원 씨, 괜찮아요? 제 말 들리세요?”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묵묵부답이라고 생각한 그에게서 뭔가가 들리기 시작했다.
-네, 어느 정도 들립니다.
도원의 생각이 읽혔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기에, 유선은 그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거로 믿어, 한 방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당신을 습격한 사람들, 그 사람들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유선은 그가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얼른 물어보았다. 습격한 인간들에게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겼다.
-압니다. 누군지 하나씩 봤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찾는 건 이제 의미가 없어요.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들은 죽었습니다. 모두 한 사람의 손에 말이에요.
“한 사람 말입니까?”
유선은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토끼를 잡았으니 개는 이제 필요 없어졌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도원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였다.
-그 남자입니다.
유선은 도원이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이름은 모르지만, 탁월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사내.
-그 남자가 왔습니다, 정유선 씨.
도원은 뭔가 겁에 질린 것에 가까웠다.
-그 남자가 나타나 모든 것을 죽이고, 정리했습니다. 그들을 불태우면서 제 몸에 있던 것을 가져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깊숙하게 박힌 작은 실험용 코어를 말입니다······.
“······.”
-최대한 저항해 보았지만······ 그를 거역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원래 이 몸이 마치 그를 위한 몸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그대로 허용해 줬습니다.
도원은 불가피했다는 소리를 하며 허우적거렸다. 그를 어르고 달랠 시간은 없었다. 유선은 그의 손을 강하게 쥐며 물었다.
“도원 씨, 그 코어가 유출되면 얼마나 위험한가요? 그것만 알려 주세요.”
-그건, 그건······. 임상 시험에서 제겐 아무런 영향이 없었습니다만······ 그래서 더욱 위험합니다. C 랭크 헌터에게도 안겨 주는 힘이 그렇게 강한데, 만일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걷잡을 수 없다는 그 말에 유선은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지금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다는 말이었으니까. 말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만······.
하지만 휴대폰은 울리고.
-오빠, 지금 어디예요? 할 얘기가 있어요.
어디론가 도피할 새도 없이 유선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
도원이 있는 병원을 빠져나와 유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비어야 할 거실에는 세네타와 미라가 앉아 있었다.
“······.”
아니, 루데릭도 함께 있었다. 그가 세네타와 미라가 거실로 들어오게 문을 열어 주었기에 깨었다.
그리고 전화로는 듣지 못한 모든 것을 들은 상태였기에 표정은 세네타와 미라만큼 좋지 않았다.
“왔는가, 주인?”
“응, 그래······.”
“정령 계집은 지금 엘레노어를 재우는 중이다.”
“그렇구나······.”
유선은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유선은 어떻게든 힘내서 대답했을 텐데 입을 다문 모습에 세네타는 걱정스레 유선에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
“나? 나······ 괜찮아. 응, 괜찮을 거야······.”
유선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씁쓸한 미소가 결코 괜찮다고 말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마왕이······. 너희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갔다, 이 말이지?”
“네.”
“그렇구나······.”
유선은 혼란스러웠다. 그 많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 머릿속에서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정말 모든 것이 멸망하려 드나? 어째서 자신에게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유선은 골이 아파지는 것 같았다.
미라가 유선의 표정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상황은 생각처럼 그렇게 최악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우리 공격이 막힌 것도 어디까지나 기습적으로 한 방에 죽이겠다고 감행해 그것이 막혔다고 해서 방법이 없지는 않다.”
세네타가 미라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거들었다.
“말 그대로예요.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거기다가 든든한 전력으로 정령왕 님과 엘레노어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어렵게 갈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마라.”
“그렇겠지?”
엘레노어는 EX급 힘을 내는 드래곤이고, 오르넵토스는 엘레노어와 본 세계에서 마나만 충분하다면 그들이 싸울 조건은 충분했다.
마왕이 제아무리 강해도 그만한 공세에는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유선을 끊임없이 괴롭히려 들었다.
“미안하지만 계약자······.”
몰래 그 상황을 듣던 오르넵토스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평소 같은 꼬마의 모습인 채였다. 다른 것이라면 머리카락처럼 길게 늘어진 붉은 잎들이 요람을 만들었다.
그 안에서 엘레노어가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엘레노어는 싸우지 못해.”
사형 선고라도 내려지듯 분위기를 싸하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계약자의 곁에서 싸울 수 없어.”
희망을 한풀 꺾는 것만 같았다. 유선은 두근두근하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세네타가 오르넵토스의 말에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엘레노어는 지금 가장 큰 전력인데, 그 아이가 싸우지 못한다는 건······.”
“싸우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지금 나도 여러모로 괴롭고, 그 녀석도 지금 괴로워해.”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 줘.”
오르넵토스가 입술을 깨물다 다시 입을 열며 그들에게 말했다.
“지금 엘레노어도 싸우는 중이야.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고 브레스를 뿜어내는 그런 외적인 싸움이 아니야. 세상을 유지하려고 신의 권능들이 발현되는 거야. 이 아이의 몸속 모든 권능이 세계수를 지키려고 분투하는 중이야.”
오르넵토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유선에게 말했다.
“본 세계에서는 지금 균형이 흔들려. 수십 년 동안 잠잠하던 마왕이 드디어 제 본색을 드러내서 세상을 완전히 없애 버릴 생각을 하는 모양이라고.”
“뭐?”
유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자기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데, 대체?”
악마가 바라는 것은 황제의 세계를 가지는 것. 그렇기에 수많은 종족을 몰살시키고, 코어를 남겨 놓아 타락시킨 생명체들이 세계를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그거로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세계마저 흔들려는 속셈을 보였다. 그러다가 이제는 세상을 완전히 부숴 버리겠답시고, 본 세계의 세계수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모든 게 무너지면 결국 무로 돌아가는데도 녀석은 계속 그러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오르넵토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것을 이해할 만한 구조가 아니었다.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껴서 그저 세계가 멸망하기 바란다는 것인가?
“아버지가······ 그런 선택을 했다······.”
루데릭도 마왕이 그 결단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매번 이성적인 판단 타령하면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관심에 쏟아붓고, 나한테는 전혀 관심을 안 주던 놈이 이제 와서 모든 걸 파괴하겠다고?”
루데릭은 마왕의 욕망을 잘 알았다. 그가 원하는 건 무분별한 파괴 따위가 아니었다. 눈에 띄어서 안 되는 것은 은밀하게 움직여 이뤄 내고, 눈에 띄어야 하는 것은 과감하게 보이며 그들의 전력을 과시해 보였다.
마왕은 정복자이며, 모두의 우상인 리더였다.
“결국 원하는 걸 이루면서 미쳐 버렸다는 건가······.”
루데릭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용사의 성검에 맞아 다시 봉인되어 영영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비이성적일 줄은 몰랐다. 설마 세계수를 건드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완전히 부숴 버리려는 상상을 누가 했겠는가!
유선은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마왕이나 세계수에 관한 것보다는 엘레노어가 먼저였다.
“하아······, 그래서 엘레노어는 괜찮을까?”
오르넵토스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것도 솔직히 미지수야. 마왕이 본 세계에서 얼마나 날뛰는가가 가장 커. 그걸 막지 못하고 계속 방치해 둔다면······.”
본 세계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본 세계로 돌아가 봐야 해. 그리고 엘레노어도 함께······.”
힘을 주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엘레노어도 본인의 의지로 그 수면 상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오르넵토스도 제아무리 유선과 계약했다지만, 본 세계를 사수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마왕에게서 도와줄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
유선은 그렇기에 그들을 보내 주었다.
“너희는 너희의 세계를 지켜. 이건 우리의 일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게.”
유선은 어쩌면 이기적으로 보인 오르넵토스의 말을 이해해 주었다. 그렇기에 오르넵토스는 그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계약자.”
“미안할 필요 없어.”
그 많은 짐을 떠안아야 하지만 익숙했다. 유선은 표정이 좋지 않은 오르넵토스를 꼭 안아 주었다.
“엘레노어를 부탁해. 끝까지 지켜 줘. 대신해서······.”
“······.”
오르넵토스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유선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이상 말하는 것은 그를 더 힘들게 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르넵토스는 조심스럽게 엘레노어를 안았다. 그녀의 몸은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나가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믿을 만한 전력 둘이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유선은 그들이 간 자리를 보며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미라도, 세네타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것은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었으니까.
믿었던 전력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자신은 누구를 믿어야 할까?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 던전에 들어갈 아이들은 없었다. 세네타와 미라 둘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유선의 손을 감싸는 작은 손. 부드러운 그 감촉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루데릭이었다.
“내가 있지 않으냐?”
그리고 루데릭이 부드럽게 속삭이며, 유선의 마음을 달랬다.
“나는 정유선, 그대의 그림자, 언제나 그대의 곁을 지켜 줄 수 있다. 설령 내 목숨이 다하더라도, 주인을 지켜 주마. 그대는 소중한 나의 주인, 내가 그대에게 보이는 증명이다.”
아직 유선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