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65. 기억을 잃은 남자 (2)
“하나 더 머글래.”
사내가 천천히 반쯤 먹을 때, 그사이에 엘레노어는 이미 하나를 다 먹은 상태였다. 국물까지 완전히 다 비워 내며 빈 종이 용기를 유선에게 건네었다.
“없어.”
“없어?”
“응, 정말 없어······. 그렇게 뒤져도 안 나와.”
엘레노어가 믿지 못하고 유선이 메는 가방에 들어갈 기세로 파고들어 찾아보았다. 라면을 먹는 사내가 엘레노어를 보다 유선에게 말했다.
“아이가 귀엽습니다.”
“하하, 귀엽죠. 그런데 귀엽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귀여운 게 끝이 아닙니까?”
“무지막지하게 강해요. 이 근방에 끼에에엑거리던 녀석들도 모두 이 꼬맹이가 해치웠거든요.”
단 일격이었다. 작은 주먹으로 그 녀석들의 몸을 날려 버린 것이 라면을 향한 열의를 보이는 저 손이었다. 사내는 호오! 하고 감탄하며 말했다.
“오, 상당히 거칠어 보이는 녀석들이던데······ 대단하군요.”
“그렇죠. 저라면 꿈도 못 꿀 것들을 이 녀석이 그냥 다 해치워 버려요. 그래서 가끔 제가 이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말이죠.”
유선은 엘레노어와 비교하면 한없이 약했다. 사내는 그에 대해서 몰랐지만, 유선의 말만 들어서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소녀를 다루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본래 자기보다 강한 이들을 다루는 그런 것도 능력이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뭐······ 제가 느끼기엔 그렇습니다.”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유선의 가방을 뒤지다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유선 님은 슈퍼맨이야.”
엘레노어가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엘레노어의 말을 듣고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슈퍼맨이라, 그렇군요. 흥미로운 별명입니다.”
사내는 유선을 보며 웃었고, 유선은 머쓱하다는 듯이 허허 웃으며 반응했다.
“유선 씨, 방금 통화하고 왔습니다.”
그때, 전파를 찾으러 이리저리 돌아다녀 눈앞에서 사라졌던, 현태가 돌아왔다.
“네, 신원 조회가 됐습니까?”
“그게 참······.”
현태는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듯이 유선에게 말했다.
“알아보니까 현재 실종자에 이렇게 생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없다고요?”
유선은 놀란 표정으로 한 번 더 물었고, 현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근 일주일 사이에 실종자가 있는지 물어보니 3명이라는데, 현재 인상착의와는 일치한 사람은 없다는군요.”
“그렇군요.”
차원 실종자들은 대부분 회사 소속이 있는 헌터이기 때문에, 어떤 회사에서 실종한 인물인지 금방 조회하고 알았다. 그렇기에 빠르게 일 처리가 가능했고, 바로 그 회사에 인도하면 되었다. 그러면 그 회사에서 어떻게 케어할지 다 알아서 해서 더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민간인인 경우에는 어느 소속도 아니기에, 인도할 장소가 없었다.
“물론 실종자들은 헌터라는 범주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건 좀 더 대중적이고 효과적인 곳으로 인도하시는 게 좋을 거로 생각합니다.”
“경찰 말이군요.”
그래서 공권력을 조금 활용해 주는 게 가장 훌륭한 대책이었다.
“이 좁은 한국 땅에서 실종된 사람이니 실종자로 찾기는 시간문제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쪽에서 전체 실종자 목록을 뽑아서 한 명씩 대조해 보면 알아서 나올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죠.”
그들이 붙잡는 것보다 효과적이리라 생각했다. 이계의 틈이 닫히면, 바로 지역 담당 경찰서로 데려가 실종자임을 알려 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계의 틈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
큐앤 헌터 컴퍼니 15층. 그곳은 헌터 회사에서 필요한 사무적인 일들이 행해지는 장소였다. 그 일들은 모두 차기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사원 하나가 서류를 들고 기율에게 다가왔다.
“이번 포션 납부에 관해서인데, 아무래도 정상적인 효능을 못 내는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아요.”
기율은 사원이 가지고 온 서류를 펼쳐 보며 그에게 물었다.
“조사는 해 봤습니까?”
“네, 공식적으로 하진 않고, 김현태 부장님이 몰래 의뢰해서 감정해 보니, 전부 수준 미달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프가 평균 포션 효능 수치보다 조금 높았지만, 큐앤이 요구하는 효능 수치와 비교해서는 낮았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사원이 기율에게 물었고, 그는 서류를 덮어 자신의 책상 한 곳에 올려 두며 그에게 말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가 직접 가서 말하고 오겠습니다.”
“사장님이 말씀입니까?”
기율의 판단에 놀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게······ 이런 일에서 굳이 사장님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김현태 부장님께서 직접 나서서 일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물품을 검수하고 납품받는 것이 모두 현태의 일이기에 김현태, 본인이 직접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원이 틀린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닙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큐앤을 상대로, 거기다가 이 회사의 부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사장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요.”
현태를 기만한 행위는 결국 현태가 얕보였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품질에 관해서 까다롭게 선별해 주던 그가 나서기보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지금 상황에선 더 효과적이리라 생각했다.
‘이 사람이 그 1, 2년 전만 해도 사고나 치고 다니던 사람이라고?’
사원은 입사 전에 기율의 명성을 잘 알았다. 큐앤의 망나니라고 여겨 오던 사람이었고, 거의 무시당하다시피,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해 왔다. 똑 부러지는 일 처리가 어째서인지, 그 명성이 사실은 거짓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들게 했다.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직원 복지에 지속해서 신경 쓰면서, 흔하게 일어나는 갑질 구조도 일어나지 않게 선을 확실히 지켰다.
망나니라는 사람이 결코 할 수 없을 법한 사장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처리할 테니, 이제 볼일 보세요.”
“아, 넵!”
사원은 벙쪄 빠릿빠릿하게 대답하며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흐음······.”
기율은 직원이 돌아가고 잠깐 책상에 앉아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지?’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가나?’
큐앤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직원들은 기율의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 물음표를 던졌다. 하지만 기율의 얼굴을 누구보다 많이 봐 온 이들의 생각에는 물음표가 달리지 않았다.
비상계단으로 갔다는 것은 내려간다는 말. 내려가도 고작해야 한두 층 내려가는 데 쓰였다. 기율이 가는 곳은 14층이 분명했다. 그리고 14층은 정유선과 그 사역수들이 지내는 방이 있는 장소였다.
기율은 루데릭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바탕 혼나러 가는구나.’
‘또 갈굼 당하러 가는구나.’
그리고 기율이 무슨 일을 당하는지조차 짐작하고, 다른 이들보다 더욱 익숙하게 자기 일에만 열중했다.
***
“그래서 그 포션 제조 회사 쪽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 알려 달라고 해서 왔나?”
시끄러운 펜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어린 목소리. 그 어린 목소리의 주인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밝게 빛나는 모니터를 응시한 채로 물었다.
“넵, 부탁드립니다!”
기율은 그 말에 허리를 지각으로 숙이며 그에게 부탁했다.
기율은 직접 나서겠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그 방법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인 루데릭에게 방법을 자문하러 왔다.
루데릭은 ‘흐음······.’ 하며 슬쩍 기율을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부탁하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직접 나서겠다고 생각한 게 마음에 드니, 제조 회사 쪽에 가진 약점 정도는 프린트해서 보내 주지. 키 카드는 충분히 쥐여 주겠지만, 그걸 모두 쓰는 것은 멍청한 짓. 최소한 최대 효과를 내도록 협박해야 할 거다. 네 요령껏.”
루데릭은 정신없는 카테고리 속에서 능숙하게 자료를 꺼내 기율에게 메일로 보내었다. 그렇게 말하는 루데릭의 방식이 조금 마음에 안 드는지, 기율은 홀로 중얼거렸다.
“가르쳐 주는 김에 다 가르쳐 주면 좋으련만······.”
기율은 말하다가 멈췄다. 루데릭의 눈이 붉게 빛나 기율을 노려보았다.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건 내가 알려 줄 요령 따위가 아니야. 인간의 종류는 6억 가지가 넘어서 네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법이 다 틀려. 내가 요령을 알려 준다고 해도, 먹히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 홀로 생각해 보도록.”
“······알겠습니다.”
기율은 그 부탁이 주제넘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데릭이 한심하다는 뉘앙스로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러는데도 루데릭은 이유가 있었다.
‘제 밥값은 확실히 하는 녀석이지.’
알려 주는 부분을 실수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같은 실수를 가끔 하는 법이었다. 기율은 그런 것을 포함하더라도 충분히 CEO 자질이 있었다.
만약 정말로 못 미더웠더라면, 루데릭도 기율에게 방법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이렇게 하면 뭔가 이룹니까?”
기율은 아직도 자신에게 확신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다른 인간들보다 많은 걸 가졌어. 그리고 그 머리도 썩 나쁘지 않으니 네 아비의 마음에 들어 네 형제를 기량으로 제치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형성된 인맥, 자본, 그리고 지금 지위에선 아직 다른 형제들에 꿀리는 몸이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 루데릭은 그 형제들 못지않은 상황을 만들었다.
내부 약점과 경영 방식에서 일어난 손실, 그리고 그걸 애써 눈속임하는 형제들의 진상이 루데릭의 손에 달렸다.
“고작 큐앤 그룹 하나를 얻자고 다른 형님들이나 누님을 치는 건 그래도 내 성미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고작 큐앤?”
루데릭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기율에게 말했다. 늘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춘 그 행동에, 기율은 긴장하고 말았다.
“큐앤 하나를 네 손에 쥐여 준다면, 진작 쥐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네 아버지가 일궈 놓은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냐. 이미 갈아 놓은 텃밭에 씨앗을 심어 놨는데, 그걸 한 번 더 갈아엎을 셈인가? 아버지가 일궈 놓은 것은 그 일궈 놓은 채로 두고, 너는 한 꺼풀 나아가 더욱더 미래를 봐. 열 길 너머 보이는 물건을 한 길 앞으로 가져다가 네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그 누구보다 앞서 나간다. 그렇게 큐앤 따위보다 더 큰 것을 가져.”
루데릭의 말에 기율은 전율했다. 마치 제국을 세우려던 수많은 황제의 눈처럼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새끼라면, 적어도 세계를 가져 보겠다는 이루지 못할 야망을 품어 봐야지 않겠냐?”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루데릭은 정말로 기율을 그렇게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악마와 거래하지 말라는 소리가 이런 걸까?’
루데릭의 말은 너무나도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 곁을 지키기만 해도 자신은 모든 것을 가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의문 같은 거 품지 말고, 내가 제대로 하라는 것만 해라. 그러면 어느새인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위상으로 만들어 줄 테니.”
“알겠습니다!”
기율은 믿음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이야기가 끝맺을 무렵, 루데릭의 어두컴컴한 방에 빛이 들어왔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루데릭, 혹시 차기율이 여기서······. 아, 기율아, 여기 있었네?”
“아, 형님, 무슨 일 있었소?”
기율이 자신을 찾기에 묻자, 유선은 대답해 주었다.
“차원 실종자가 한 명 있어 구출해 냈어.”
“아, 고생하셨소, 형님. 오랜만에 매스컴 한 번 제대로 타겠구려.”
큐앤 헌터 컴퍼니의 간판인 만큼 제대로 된 선행을 연달아 보여 주니, 기율의 처지에서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유선은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이게 평소와는 조금 달라. 혹시 그 사람한테 잠깐 머물 장소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장소를 말이오? 굳이 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실종자를 구출해 냈을 때와는 다른 대처 방식이었으니까. 유선은 이걸 얘기해야 하나 싶었지만, 기율이 장소를 구해 주니만큼 그에게 대화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게 말이야······.”
유선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