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64. 되돌아오다 (2)
“아······.”
유선은 눈을 떴다. 얕은 잠에서 깨어나 번뜩 눈을 뜬 사람처럼 정신이 말짱해졌다.
“······.”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유선은 눈을 굴려 책상 위로 올려놓은 자신의 팔을 보았다. 주름지지 않았다. 노년기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청년이던 유선의 손이었다.
부드럽다기보다는 거칠기만 하던 자신의 손. 그리고 집게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
그리고 그전에는 자신이 건드리던 수정구가 보였다. 수정구에는 미세하지만 금이 갔다. 분명히 게이브가 손을 봐 놨다는 게 이 금이 아닐까 생각했다.
“후우······.”
유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돌아왔다는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심경이 폐 속을 가득 채워 그것을 빼낸다는 생각으로 지은 한숨이었다.
유선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길었다. 너무나도 긴 악몽이었다.
그렇기에 유선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더 수정구를 건드려 보았다. 그의 손이 제대로 수정구에 닿는데도 수정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말 다 했다.
나는 완전히 돌아왔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판타지에 너무 오래 머물러 현실에 어떤 것이 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찌 잊겠는가! 그걸 잊지 않으려 해도 매일같이 생각나 유선의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녔는데. 모든 것이 꿈처럼 휙 지나가 머릿속에서 뭉개졌다.
유선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 내었다. 그리고 꺼 놓은 휴대폰을 켰다. 1시간 정도가 지났다.
수십 년이 흘러갔는데, 정작 흐른 건 고작 1시간이었다.
그리고 상단에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세네타가 보냈다.
-오빠, 혹시 수정구 안에 들어 있는 거 가져가셨어요?
문자를 보낸 시각은 지금 시각에서 3분 전. 다시 현실로 돌아온 시점에서 정확하게 울렸다.
유선은 답장을 보내지 않고 그대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후유증이 온몸에 힘을 빼서 비틀걸음을 걸었지만, 유선은 똑바로 앞을 향해 걸었다.
***
큐앤 헌터 컴퍼니 본사 14층. 세네타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세네타가 보낸 자신의 문자. 그것에 빈 아래 칸을 보았다.
답장이 오질 않았다. 평소라면 자신의 문자에도 칼같이 답장해 주는 사람인데, 어째서 잠잠한가? 불안한 심정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에 대고 노크했다. 세네타는 반사적이다시피 ‘들어오세요.’라고 말했다. 문이 열리고 그 방문객의 얼굴을 보자, 세네타는 띄워 놓은 문자 메시지 창을 꺼 버렸다.
자신이 문자를 보낸 유선이었기 때문이다.
“오빠, 돌아오셨어요?”
“응.”
“제가 보낸 문자는 읽어 보셨나요?”
유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답지 않게 힘겨워 보이는 얼굴이 어째서인지 불안하게 했다.
“오빠가 가져가셨나요?”
“······내가 가져갔어.”
“돌려주실래요?”
세네타는 양손을 들어 정중하게 유선에게 부탁했다. 유선은 수정구를 꺼내 세네타에게 돌려주었다. 수정구를 받은 세네타는 그 수정구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금이 갔······네요.”
“미안해. 소중한 물건인데, 그렇게 만들어 버렸네.”
유선은 세네타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세네타는 고개를 저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제게 그렇게 소중한 물건도 아니고······ 오빠라면 제 물건을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겠죠.”
유선은 친절하고, 남에게 너무나도 따뜻한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세네타는 너그럽게 유선을 용서해 주었다.
유선은 세네타에게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네타는 용사의 딸, 지크벨트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지크벨트는 자신과 연관 있는 남자였다.
“세네타,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
“네, 괜찮아요.”
유독 유선의 표정이 불안해 세네타는 심상치 않은 이야기임을 느꼈다. 유선은 안으로 들어와 세네타에게 가장 먼저 이렇게 말했다.
“우선······, 미안해.”
“뭐가 말인가요?”
세네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유선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운명에 의해 용사, 지크벨트에게서 앗아 간 행복, 그리고 자신이 불행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네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력하던 시절, 거대한 악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던 장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지크벨트가 얘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크벨트가 악마를 증오하게 했고, 그 증오를 원동력으로 아발트의 힘을 끌어올려 왔다는 것도 미라를 통해서 알았다.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제 할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이로군요.”
“······그래.”
유선은 세네타의 말에 인정했다. 세네타는 충격받은 표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는······ 행복했나요?”
“뭐가?”
“제 할아버지인 사람을 죽여서······ 아버지가 용사라는 이름으로 악마들을 죽이는 고통을 받게 했음을 알고 행복해하셨나요?”
유선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오히려 괴로웠다. 지크벨트의 인간성이 떨어지게 하고, 딸인 세네타에게 무관심하게 대하도록 한 그 장본인이 되어야 했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렇다면 제가 더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할 말이 없다고?”
유선은 세네타의 반응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세네타가 고개를 숙이며 유선에게 말했다.
“오빠는 용서나 비난······ 그 둘 중 하나를 바라고 오셨잖아요. 아마 비난해 주기를 가장 바라고······ 제게 그 어려운 말을 꺼내셨을 거예요.”
세네타는 괴롭다는 듯이 유선에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어요. 그게 오빠에게 어떤 식으로든 좋은 게 되지 못하니까요. 저는 그저······ 그저 오빠가 운명에 따른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옳은 일······.”
“그 옳은 일은 용서받을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죠. 그저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세네타는 자신의 양손을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오빠가 자상하기만 해서 할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아버지가 용사가 되지 않았다면, 제가 과연 이 세상에 건너와 이렇게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을까요? 아마 아버지 또한 그 세계에서 무력하게 죽는 희생양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세네타는 이런 현실을 가져다준 것에 결코 분노하지도, 비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운명에 순종해야 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 많이 알았던 사실이다.
“운명에 묶여야 함은 아버지가 가장 잘 알던 저주예요. 그런 운명을 이끌어야 했다면······ 이렇게 본래 세계로 만들어야 했다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 거예요.”
세네타의 목소리에서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그런 옳은 일을 한······. 오빠를 감히 어떻게 비난하겠어요? 어떻게 욕하겠어요? 제가 아파한 시간이 제아무리 오빠가 원인이라 한들······ 그것이 어떻게 오빠를 욕하는 이유가 되겠어요?”
“세네타······.”
“아버지는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하지만 그 고통을 안겨 줘야 하는 오빠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누구보다 자상한 오빠가 아무 죄도 없는, 연관도 없는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오빠는 그 순간을 절대로 즐기지 않았잖아요.”
세네타는 유선을 끌어안았다. 외롭고 힘들 때면, 다정하게 다가와 살며시 끌어안아 주던 손길처럼 그를 감싸 주었다.
“그러니 제가 미워하길 바라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도 미워해 주길 바라지 말아 주세요.”
그 말이 위안이 되긴 어려웠지만, 한편으로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풀려나갔다.
“미안해.”
유선은 조심스럽게 세네타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리고 고마워.”
그렇게 숨을 죽인 채 서로를 끌어안았다. 진정된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까지.
***
유선은 세네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쌓아 놓은 울분을 털어놓은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거로 안심하지는 않았다.
엘레노어.
유선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엘레노어를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감정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평소대로 하는 게 어떤 것인지, 갑자기 감이 잡히지 않았다. 궁전 속에 갇히던 엘레노어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거기다가 엘레노어는 황제의 모습과 아주 빼다 박았다.
엘레노어를 다시 떠올리면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그 안에서 갇힌 채로 지내 온 소녀의 모습과 수십 년을 걸쳐서 함께해 온 황제의 모습이 동시에 비쳤다.
엘레노어를 보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그리고 평소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지는 않을지, 유선은 그 막연한 불안감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 놓자고 엘레노어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하려던 찰나였다.
“멍멍이는 정령들보다 약하잖아. 내가 불러낸 작은 땅의 정령도 못 이겼으니까 엄청 약한 거야.”
“멍멍이는 강해!”
엘리베이터가 열리지도 않았는데, 울리는 두 목소리가 누군지 알게 해 주었다.
오르넵토스, 그리고 멍멍이를 꼭 껴안은 작은 소녀. 삐친 듯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지만, 그 푸른 눈이 자신을 발견하자 바로 환희에 차, 유선을 향해 달려왔다.
“유선 님!”
엘레노어!
그 얼굴을 보자, 유선은 모든 것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막연하던 불안감이 사라졌다. 눈물을 쏟을 것만 같던 그 미안함과 설움 따위도 없었다.
현실에 있던 것처럼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유선 님, 들어?”
“응?”
“안 들었어. 부으······.”
“계약자가 늘 그랬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엘레노어는 볼을 부풀리며, 유선의 행동에 실망한 표정을 보였고, 오르넵토스는 거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미안해.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엘레노어 말도 못 들었네.”
“무슨 생각 했어?”
“음······, 엄마 생각일까?”
“엄마?”
“엘레노어는 잘 모르는 사람일 거야.”
엘레노어를 보호하려고, 철문을 열고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이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엘레노어가 무슨 얘기하고 싶어서 그런지 얘기해 볼래?”
“됐어. 그러면서 시간 없다고 안 들어주잖아.”
“그랬나?”
“유선 님, 늘 그래.”
평소에 신경을 많이 써 준다고 생각했지만, 유선도 엘레노어 처지에선 그저 바쁜 사회인처럼 아이들에게 신경을 안 써 준다고 비쳤다. 유선이 충분히 들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이에겐 그저 이야기의 시작밖에 되지 않았다.
“괜찮아, 오늘은 다 들어줄게. 엘레노어가 지칠 때까지 말이야.”
“정말?”
“응.”
유선은 엘레노어의 볼을 만지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
그러자 엘레노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말이 사실인지 중요하진 않았다. 어찌 됐든, 유선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시간은 많았다. 언제나 늘 똑같은 24시간이지만, 오늘 하루는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평소에는 약간의 잡담에도 시간을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엘레노어가 하는 이야기, 서두 없이 흐름대로 말하는 그녀의 서사가, 때로는 되풀이되고, 과장되는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듣기에 너무나도 시간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