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64. 되돌아오다 (1)
시간과 공간의 방. 코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유선을 내려다보았다.
유선은 깨어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코스는 그런 유선을 내려다보았다. 경멸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경멸의 시선이 어째서 자신을 향하는지 유선은 알았다.
자신이 한 행동. 코스는 팔찌가 움직이는데도 멈추지 않던 그 행동에 화가 난 상태였다.
“넌 정말 몹쓸 인간이구나!”
“······.”
“네가 저지른 과오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었더니, 마지막에 와서 그걸 참지 못했다! 참, 웃기는 인간이야.”
세계선이 변하고 말았다.
유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임을 알기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든지 간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그렇기에 코스는 유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이거로 세계선은 다시 네가 살던 쓸쓸한 세계선으로 돌아갈 거야. 그 세계에서 어디 한 번 고독하게 살다가 죽어 보라고.”
코스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유선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 세계선엔······ 그 애들은 행복해?”
“뭐라고?”
“나를 만나지 않은 세계선으로 가도······ 모두 행복하냐고?”
제각각 행복한 인생을 누리는 세계일까? 차라리 홀로 불행해진 세계가 아니었을까? 유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그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었다면? 그러면 어쩔 생각이야?”
“그렇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자신을 만나지 않아 행복하다면, 유선은 기꺼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유선은 오랜 세월을 황제를 위해 살아오면서 자신의 이기심에 모든 것을 무너트린 것을 지켜봐 왔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행복을 앗아 가 불행으로 몰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행복에는 황제가 있었고, 세계의 황제조차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자신이었음을 떠올렸다. 유선은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자신이 희생한다면,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자 코스는 코웃음 쳤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받아들이고 자시고, 이미 그렇게 끝났어. 그 아이와 너의 관계는 거기서 끝났단 말이야. 알아들어? 너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그 인간 중에서 시간을 간섭한 녀석 중 하나였고, 그리고 드물게 내 기분을 더럽게 한 유일한 인간이지.”
코스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짓을 던졌다. 유선은 그런 시선조차 더는 감흥이 없었다. 망가질 것을 너무나도 많이 바라보았다. 유선은 끝내 엘레노어를 숨기는 데만 성공했기에, 어떤 모욕도 그에게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이제 네 세계로 보내 줄게. 네가 망가트려서 불행해진 세계로.”
코스는 지팡이를 들어 원을 그리려 했다.
“말씀 중에 죄송하옵니다만······.”
코스가 이야기하던 중 덥수룩한 노인, 게이브가 끼어들었다.
“뭔데?”
“이 사내가 돌아갈 세계선은 그대로입니다.”
“뭐? 말도 안 돼! 그렇게 울렸는데?”
게이브의 말에 코스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코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선이 조건을 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게이브는 담담하게 코스에게 말했다.
“그 팔찌가 울린 시간은 29초였습니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다가 끄트머리에서 멈춰 선 폭탄이었습니다.”
30초 이상 울리면 세계선은 바뀌었다. 코스는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게끔 만들어졌다. 유선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엘레노어에게 말을 걸었고, 그렇게 떠나는 것까지 걸린 제약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유선도 게이브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30초가 넘었으리라 생각했다.
“사기야! 29초에 겨우 멈췄다고, 과거가 안 바뀌는 게 뭐냐고? 시간이라는 게 딱딱 나뉘어서 완전하게 흐르는 물건이라지만, 무슨 말장난이냐고, 그게!”
“하나, 말씀하신 것처럼 똑같습니다. 그 룰은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절대적입니다.”
30초를 넘지 않았으니, 예정된 미래는 계속해서 흘러갔다. 게이브는 그렇게 말했지만, 코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싫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망치려 들었다. 코스라면 충분한 일이었다.
“그렇게 안 바뀐다면, 내가 그렇게 바꿔 버리겠어! 이 건방진 인간의 미래 같은 건 그냥 망쳐 버려도······!”
조잘거리던 입이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거친 손이 코스의 입을 잡아 말하지 못했다. 유선도 그런 행동을 하고 싶었지만, 누군가가 한발 앞서 그녀를 제압했다.
그 입을 막은 것은 게이브였다.
“······꼬맹이처럼 떼쓰는 건 이제 그만해라.”
“뭐, 우으으읍!”
코스는 게이브의 손에 들린 채로 바동바동했다. 어째서 네놈이? 라는 듯한 얼굴로 게이브를 노려보았다.
“네 부탁은 이미 들어주지 않았느냐? 네 지시를 받고 수정구와 사내의 반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 그거로 다시 주종 관계는 바뀌었다, 코스.”
게이브의 말에 코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목 끝부터 차고 올라오는 그녀의 성격에 무어라 하려고 했다.
“이, 이게······!”
“이게?”
게이브가 코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코스는 주춤하며 물러났다. 그녀는 겁에 질려 눈물을 머금은 동시에 이빨을 꽉 물며 말했다.
“크으으윽······ 알겠어요, 주인님.”
코스는 그대로 순종했다. 그리고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의 목에 개목걸이 같은 것이 생겨나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지금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지 유선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맹약인지, 아이처럼 제멋대로 굴던 코스는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게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페인트 통 사이에 널브러진 작은 의자 하나를 집어 들어 그곳에 앉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고통스러운 길을 끝까지 수행해 주어서 고맙네.”
노인은 의자에 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유선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변화에 놀라 게이브에게 물었다
“그 여자를 컨트롤합니까?”
“컨트롤한다고는 할 수 없지.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적이지 않네. 계급이라는 것은 유동적으로 변하지. 절대적인 것이 두 개가 만난다면,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모순일세.”
“그렇기에 신의 영역이기도 하지.”
코스는 키득 웃으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깐 게이브는 그녀의 목을 잡아 짓눌러 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대게 했다.
“너는 사과나 해라. 신이라는 이름으로 못된 송아지처럼 군 것을 말이야.”
“으윽······, 죄송합니다.”
“구체적인 죄목으로.”
“······약속을 어기고 함부로 세계선을 바꾸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코스가 자신의 잘못을 짚어 사과하자, 게이브는 유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나?”
“글쎄요.”
코스가 사과한다고 해서 무언가 바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사과 따위는 필요 없었기에 감흥이 전혀 없었다.
“이 녀석이 제멋대로 구는 행동이긴 했지만, 그건 결국 우리의 처지에서 자네를 배려해 준 것밖에 없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자네에게 어떻게든 기회를 줘서 다시 주워 담도록 해 준 셈이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게. 우리에게 감사하라거나 그런 의도로 한 소리는 아니니 기분 나빠하진 말게.”
기분 나빠할 생각도 없었고, 감사할 생각도 없었다. 유선은 지금 그 어느 것도 뭐라 하기에 기분이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자네가 망칠 뻔했던, 그리고 지키고자 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네. 이제 그 세계로 가서 조금은 쉬게나.”
게이브는 등을 돌려, 유선을 본래 세계로 보내 주려고 준비했다. 유선은 등을 보이는 게이브에게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제가 저지른 과오를 되돌릴 기회를 주십니까?”
신의 영역에 손을 댄 유선에게 엄벌하기는커녕,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궁금했다. 그러자 게이브는 대답했다.
“자네는 특별하니까.”
“시간을 건드린 애송이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어 낼 재료를 가진 녀석이거든.”
바닥에 앉은 코스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노예로 지위가 낮아졌는데도 기분 나쁘기 짝이 없는 눈웃음이었다. 유선은 그녀가 한 말 중에 거슬리는 단어 하나를 중얼거렸다.
“재미?”
게이브는 거슬린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코스의 목을 잡았다.
“흠, 오해는 하지 말게. 자네들이 생각하는 따분함에 바라는 유흥 따위가 아닐세.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바라는 결말은 있는 법일세.”
“으윽······, 왜냐하면 어떤 결말이냐에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지. 세계의 종말이 찾아오고, 에브레라티오스, 세계의 씨앗이 탄생한 것처럼 말이야.”
엘레노어, 그전에는 에브레라티오스, 그 뜻은 세계의 씨앗.
어째서 그녀를 그렇게 불렀는지 여태 알려 주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실히 알았다.
엘레노어는 모든 신의 힘을 받았고, 모든 신의 힘을 가졌기에, 그 신들이 필요로 하는 그 세계의 인간들에게는 아직 잉태되지 않은 세계나 다름없었다.
“엘레노어는 황제와 똑같은 길을 걷습니까?”
과거를 모두 알면, 분명히 미래도 알 것이다. 게이브는 그 대답에 주저했다. 하지만 코스는 그 대답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 꼬맹이도 언젠가는 네가 모셔 온 황제처럼 어엿한 여인이 될 것이고, 한 세상 아래에 신과 인간들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 세상 그 자체가 될 것이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지. 그리고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기에 새로운 원인이 만들어지는 연속이네. 파멸 끝에는 새로운 생명이 땅 아래에서 태동해 지상으로 뚫고 올라올 것이고, 먹구름도 결국엔 흩어져 세상을 밝히려 할 걸세. 그것이 세상이야.”
등을 돌린 게이브는 다시 유선을 보았다. 그리고 양손에는 뭔가를 들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회수해 간 수정구와 반지였다.
“이것들은 다시 가져가게. 수정구에 있는 이질적인 기운은 모두 회수했고, 반지에서 공명하는 울음도 멎게 했으니, 이제는 시간을 간섭하진 못할 거야. 그리고 자네가 가장 골치 아파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걸 컨트롤할 걸세.”
“······.”
유선은 게이브가 건네준 물건을 받았다. 실제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였다. 분명히 신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고, 유선은 그걸 보지 못하리라.
사용법이야 뻔하겠지. 반지를 착용하고, 수정구에 손을 대면 다시 본래 세계로 돌아가리라.
“자네가 지키고 싶은 것들.”
그렇게 본래 세계로 돌아가려던 중 게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것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고 해서 자네가 굳이 희생하려 하지 말게. 자네는 하찮은 인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가장 귀중한 사람일세. 그걸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또한 비극으로 치달을 테니, 자네에겐 슬픔만이 찾아올 걸세.”
“무슨 말입니까?”
“과거와 미래의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된다네. 자네는 세계의 순리를 어느 정도 봤을 테지. 그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게.”
게이브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분명히 자네가 바라던 슬픔으로만 얼룩진 세계는 없을 걸세.”
게이브의 말은 진지했다. 유선도 그 진지함이 분명히 답이 있으리라 확신하게 했다. 유선은 게이브가 한 말을 잊지 않으려 머릿속에 되뇌었다.
“제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게. 의미 있는 여행이었기를 바라네.”
유선은 반지를 착용해 수정구를 손에 들었다. 수정구가 환한 빛을 내뿜으며 유선을 집어삼켰다.
코스는 유선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돌아갔군.”
“아, 그래요. 조금 꼬이는 것 같아서 살짝 불안했지만, 그래도 예정대로 돌아갔죠.”
코스는 게이브를 따라 중얼거리며 뚱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게이브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나?”
“이제 슬슬 우리 주종이 바뀔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인데.”
“흠······, 그렇구먼.”
게이브는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코스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허름한 옷을 입은 게이브의 목에 코스에게 걸린 목걸이가 다시 돌아왔다. 게이브는 무릎을 꿇으며 코스에게 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소서.”
“······뭐라 할 맛도 안 난다. 다시 그림이나 그릴 거야.”
코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폴짝 뛰어올라 자신이 그리던 그림으로 갔다. 그렇게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부족하기 짝이 없는 흐릿한 그림. 완전한 형상으로 보기엔 아직 무리였다. 코스는 분명히 뭔가를 생각하고 밑바탕으로 이렇게 어지러이 그려 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게이브.”
“네, 주인님.”
“세계선은 바뀌었어.”
코스는 미소 지었다.
“하나 지금 보이는 세계는 그대로입니다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세계선이 아냐. 현재에서 미래를 잇는 세계선이 바뀌었어. 네놈이 준 그 힌트 때문에 말이지.”
코스는 게이브를 노려보았다.
“그것 또한 예정된 일이지 않겠습니까?”
게이브는 덤덤하게 반문했다. 코스는 ‘뻔뻔한 영감탱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아. 창작자의 영감이라는 게 이런 거겠지?”
코스는 그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 그리던 검은색, 찍어 놓은 그 선을 뭉개 버리고, 코스는 새로운 선을 그어 새로운 그림에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