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부조리극 (4) (130/148)

 # 131

63. 부조리극 (4)

황제는 조심스럽게 유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이 든 엘레노어를 들어 올려, 유선에게 건네주며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지하로 가면 하수도가 있다.”

“주인님······.”

“냄새는 고약해서 딱 한 번 가 봤지만······ 그곳으로 이동한다면, 분명히 너도 이 아이도 안전하게 벗어날 것이다.”

황제의 말이 침착하고 생기가 돌았다. 죽어 가던 여인의 모습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선은 더욱더 불안했다.

“함께 가셔야 합니다.”

이것이 황제의 마지막일 것 같았기에,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선의 예상대로 그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성에 남아야 한다. 이 성에서 마지막을 볼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겠습니다.”

유선은 황제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힘없는 그녀를 그대로 이끌려고 했다.

그러자 팔찌가 진동했다. 세계선이 바뀌는 게 확실했다. 이 행동을 한다면 분명히 황제는 살 수 있다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유선에게 주어진 특이 사항과는 맞지 않았다. 유선은 팔찌가 부르르 떨려 왔지만, 그녀의 손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놓아라.”

유선은 한 대를 얻어맞은 것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실제로 맞지는 않았다. 그녀가 미소 지어 보이자, 유선이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다.

“나는 세계와 이어진 몸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하지. 그것이 내가 이세계에서 황제로서 살아가는 이유다.”

“······.”

“그러니 이제 더는 후회 없다. 여한이 없게 살아왔으니. 이제 내 세상의 종말을 함께 지켜보마.”

황제의 말에 유선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녀의 작은 손이 유선에게서 벗어나자, 시끄럽게 진동하던 팔찌가 다시 잠잠해졌다.

“부디······ 그대는 살아남게. 내게 그랬듯이 이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다오.”

황제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유선은 이를 악물고,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살아남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엘레노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면 해야 할 것들을 유선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유선은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선은 한 손으로는 엘레노어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언제든지 검을 뽑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유선은 황제가 한 말을 모두 기억했다. 하수구로 가기 위한 길. 그곳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그 하수구를 거쳐서 어디로 가고, 어디로 도달하는지까지.

유선은 엘레노어를 안아 든 채로 정신없이 그 하수도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였다. 말대로 두 산 사이에 있는 좁은 협곡 아래였다.

쿠르르릉!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선은 고개를 들어 궁전을 올려다보았다.

궁전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 내려다보면 훤히 보이지만, 그것은 올려다보면 볼 수가 없는 곳. 그렇기에 황제가 살아온 장소라 하였다.

이게 궁전이 무너지는 소리인지, 아니면 단순한 먹구름이 일으키는 천둥 번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더는 뒤는 없었다. 유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제의 미소가 멀어지는 것을 더는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엘레노어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실리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철그럭-. 철그럭-.

한참을 걷던 중, 갑옷이 부딪치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유선이 가는 경로에 서 있었다. 이 땅에 유선과 우호적인 생명체는 더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재빠르게 검을 들어 전투를 준비했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유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페르아 교단의 갑옷을 입은 언데드 나이트가 검을 뽑은 채로 유선을 향해 걸어왔다.

유선은 예정대로 그 병사와 만났다. 언데드 나이트가 된 자신의 육체. 그것이 노인을 죽이고, 아이를 빼앗아, 결국에 과거의 유선과의 조우 자체를 없애 버렸다.

모든 것이 코스가 보여 주던 광경과 비슷했다. 계곡들 사이와 낙엽들로 수북한 바닥, 그리고 느끼던 불협적인 광경마저.

그렇기에 유선은 마음먹었다.

이 녀석이다. 이 녀석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후우······ 후우······.”

소렌의 기적 같은 것도 없었다. 유선은 그저 늙은 몸일 뿐이었다. 검을 쥐었지만, 그 검을 계속해서 똑바로 쥘지조차 의문인 노인일 뿐이었다.

언데드 나이트인 이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녀석은 유선의 그런 틈도 치고 들어와 위협했다.

팅!

“우욱!”

유선은 언데드 나이트의 검을 받아 냈다. 버거웠다. 한 손으로 잡은 검이 초록 검기를 뿜어내는 그 검을 이겨 낼 방도는 없어 보였다. 유선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았다.

그것이 비웃었다. 유선은 얼굴이 보이지 않고, 그저 해골인 상태인데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이 뭔가 말하는 것처럼 턱을 덜그럭거렸다. 소리가 없었기에 듣지 못했지만, 유선은 그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운명. 이게 네 운명이라며 비웃었다.

언데드 나이트는 유선의 몸을 밀었다. 힘이 우위인 언데드 나이트였기에, 유선은 그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언데드 나이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유선을 다시 공격하려는 자세였다.

유선은 이 상황을 알았다. 이 검을 피하면, 분명히 이다음 일격을 유선의 몸으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 엘레노어는 언데드 나이트에게 잡힌 세계선으로 갈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수 없었기에 유선은 언데드 나이트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를 향해 날아드는 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서걱!

그렇게 유선의 오른쪽 어깨가 그 검날에 날아갔다. 유선은 몸을 빼지 않았다. 그대로 언데드 나이트에게 다가갔고, 더는 공격할 수단도 없을 법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머리를 최대한 뒤로 빼며 기합을 질렀다.

“으아아아!”

쾅!

자신의 머리를 둔기로 삼아 언데드 나이트의 머리를 들이박았다. 언데드 나이트가 그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큰 타격이 되지 못했다. 유선은 쓰러진 언데드 나이트의 머리를 한 번 더 들이박았다 .

쾅!

완전히 쓰러진 언데드 나이트. 그것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일어서려고 부르르 떨었다. 유선은 그것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유선은 발을 크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온 힘을 짜내며 비명 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아아아아아악!”

콰직!

부서졌다. 두개골이 부서지며, 불안하게 뿜어내던 안광도, 움찔거리던 몸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우, 후우······.”

유선은 숨을 골랐다. 팔이 베일 때 막연하게 아프리라는 생각과 다르게 어떤 생각도 지금 들지 않았다. 유선이 지키고자 했던 미래를 지켜 냈음에 그저 약간의 환희에 젖을 뿐이었다.

“좋아······.”

유선은 엘레노어가 곤히 잠든 것을 다시 확인하고 여정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는 팔 하나가 잘린 채로 재빠르게 황제가 말한 물건을 찾으려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유선은 그 물건을 발견했다. 계곡 속에 눈에 띄지 않는 장소, 그곳에 자연적으로 새겨졌다기엔 너무나도 형상이 뚜렷한 석상 하나가 있었다.

유선은 그곳에서 해야 할 말을 꺼내었다.

“해가 져도 영원한 어둠은 오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괴수의 동상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벗듯 돌 껍질을 스스로 벗겨 내며 안에 있는 하얀 보석을 드러냈다.

그리고 공간을 뒤집는 하얀 원이 생겨났다. 유선은 그다음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엘레노어를 안아 든 채로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곳이 엘레노어를 지켜 줄 그 어떤 악도 간섭하지 못하는 장소.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었으며, 하얀 백지처럼 흰 공간들뿐이었다.

“하아, 하아······.”

붉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유선의 흔적은 그곳에 남지 않았다. 마치 신성한 장소라는 듯, 그 순수를 더럽힐 수단이 없다는 듯이 사라졌다.

그 장소의 끝이 어디고, 어디에 엘레노어를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있는 장소는 어디든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유선은 빈혈 증세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더 걷기는 무리였다. 엘레노어를 안아 든 채로 이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끝이었다. 유선은 엘레노어를 그곳에 놓았다. 그녀가 잠에 취한 채로 그 바닥에 엎드려 자게끔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하면 끝인가? 유선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이 공간을 나가는 것까지 해서 마지막이리라 생각했다.

유선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엘레노어를 내버려 두고, 이 공간 속을 나오려고 걸었다.

엘레노어가 유선을 향해 손을 뻗으며 힘겹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어무아.”

엄마를 찾는 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알았다. 엘레노어는 황제를 찾았다. 이름도 없이 그저 세계의 모순 속에서 싸워 홀로 세계를 지켜 온 황제를.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떠났다.

그렇기에 황제는 어머니가 될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저 황제인 채로 최후를 맞이했다.

“나······.”

팔찌가 흔들렸다. 세계선이 바뀌고 있었다. 유선이 여기서 말한다면 엘레노어와의 세계선은 또다시 바뀔 것이다.

유선은 그렇게 돌아서서 가야 했다. 그녀와의 세계를 다시 만나려면 돌아가야 했다.

유선은······ 그렇게······.

다시 돌아가 엘레노어를 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의 눈동자를 와락 안아 들었다.

수천 년 동안 그저 세계를 위해서 무엇도 보지 못하고, 무엇도 말하지 못하는 채로 그 어두운 곳에서 보내온 그녀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예정된 운명에 묶인 채로 엘레노어는 이곳에서 수십 년을 다시 홀로 보낼 테니까. 그 속에서 다시 막연한 공포와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이 예정된 미래, 그것은 자신의 욕심이기도 한 일이었기에, 엘레노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반드시 돌아올게······.”

그렇기에 유선은 약속했다. 팔찌의 울림조차 무시한 채로 엘레노어에게 말했다.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잔뜩 웃고, 잔뜩 가르쳐 줄게. 그리고 이렇게······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게······.”

유선은 세계선이 바뀐다는 그 경고조차 무시한 채로 자신이 할 말만을 내뱉었다. 그러자 엘레노어가 조심스럽게 유선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늘 짓는다고 생각하던 그 미소였다. 유선은 그 순수한 눈이 얼마나 안심되는지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 유선은 그거면 충분했다. 눈물로 젖은 그의 시야는 더는 엘레노어에 두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천천히 게이트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게이트의 끝자락에 닿는 순간, 방전된 로봇처럼 유선의 생은 거기서 끝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