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63. 부조리극 (3)
유선이 악을 연기함으로써 예정대로 용사는 탄생했다. 성검 아발트와 성녀 아르젤이 함께 여정을 떠나며, 악마들과 싸움을 벌여 왔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였다. 인간들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고, 용사와 아르젤은 그 희망을 향한 여정을 벌여 왔다. 유선도 더는 소렌의 힘으로 악마가 온다는 전조를 몸소 보일 필요가 없었다.
도사리던 악마들이 기어오르고, 끊임없이 인간들을 괴롭히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전쟁은 순조로이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물론 한순간일 뿐이었다.
“쿨럭, 쿨럭.”
예정대로 된다고,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예정된 미래는 곧 파멸이었기에, 유선은 그 파멸과 함께 늙어 갔다.
노쇠해져 갔다. 그래, 유선은 자신의 몸이 늙어 감이 느껴졌다. 황제를 따라다니던 몸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천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질병에 걸리지 않은 황제가 침대에 누워야만 하는 몸이 되었다.
황제의 병은 세계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깊어져서, 머지않아 죽음에 도달하리라는 것을 예견했다.
“유선.”
황제가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예사롭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주인님.”
“다른 왕들의 소식은…… 어떻게 됐느냐?”
유선은 그녀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진행됩니다. 황제께서 우려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이 없겠구나.”
황제는 안심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안심하는 표정과 달리 유선은 근심 어린 얼굴이 가시지 않았다.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유선은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황제의 만찬에 참여하던 20명의 왕. 그 자리는 해가 지날수록 한 자리씩 비어 갔다. 유선은 그것을 소식으로 지속해서 접했다.
왕의 부재는 말 그대로 종족의 멸망. 드래곤이 가장 먼저 멸했고, 엘프 왕은 자결했으며, 튼튼하다 자부하던 드워프 왕은 결국 자만으로 광산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소식을 안겨 주던 그 독수리마저 죽고 말았다.
정령왕을 제외한 마지막 왕이 자리를 비우면서 이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만한 수단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적어도 유선에게는 그러했다.
드래곤 왕인 황제가 살아남은 이유는 의심할 것도 없이 이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신의 힘이 있는 한 그녀는 드래곤 왕으로서 죽을 수 없었다.
드래곤 왕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고, 이제 세계의 왕만이 남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목숨은 점점 위태로워져 갔다.
유선이 황제에게 현재 돌아가는 것들을 알려 주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그녀가 좀 더 오래 살려면 이런 소식들로 스트레스를 안겨 줘선 안 되었다. 지금은 황제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세계는 황제가 필요했다. 다시 기적을 안겨 줄 그녀의 신의 권능이 필요했다.
황제를 보좌하면서 할 최선이 이것이었다. 유선은 그녀의 옆을 지키며, 그녀가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
하나, 황제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악화해 갔다. 머리카락이 윤기를 잃었고, 근육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제는 허기조차 느끼지 못했다. 억지로 먹이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더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 가지를 유선에게 요구했다.
“유선, 수정구를 가져다 다오.”
“수정구를 말입니까?”
“그래.”
수정구를 쓰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역할을 하는지 알았다. 누군가와 연락할 때 쓰던 물건이었다.
아직 연락할 사람이 남았나? 헛수고일 수 있지만, 그래도 필요하다기에, 유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유선은 그 자리를 비워 황제의 집무실로 가 수정구를 찾았다. 문틈으로 보면 항상 보이는 수정구였기에, 그걸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선은 그 수정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수정구가 반응했다. 푸른색으로 크게 번쩍이더니, 붉게 물들며 그 안에서 형상이 하나 그려져 나왔다.
-당신인가? 오랫동안 연락을 못 했더니, 다시 정신을 차린 것 같군.
대화 대상이 황제와 유선을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만큼, 그도 유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말이 없군. 어차피 대화하겠다고 자네에게 말을 건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흔들리는 신앙에 믿음을 잃은 인간들은 모두 파멸을 맞이했어. 용사는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고 이 땅을 떠났고…… 곧 있으면 당신, 그리고 대규모 병력이 자네의 성을 침범할 거야. 불가피한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지. 당신은 그걸 막지 못할 거야.
대규모 병력? 그런 게 온다는 걸 안다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구인가? 유선은 가만히 있으려다 그 말을 하는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야?”
-……우리의 대화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당신이 사라진다면 결국 이 땅에는 하나만 남을 것이고, 신들의 바람대로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
“이봐, 대답해!”
사내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유선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지 않는다는 듯한 행위였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고통만 있는 인생이 아니었길 바라마.
파창!
유선은 화들짝 놀라며, 그 수정구를 떨어트렸다. 말 맺음과 동시에 부서져 버렸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그 파편이 유선에게 튀었을 것이다.
“젠장…….”
수정구가 깨져 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까? 유선은 우선 급한 대로 수정구 파편을 모아 보려 했다.
쿠그그긍!
그때, 벽에 배치된 석상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령에는 미동도 하지 않던 석상병들도 다 같이 움직였다. 평소에 같이 말을 걸던 석상에게 현 상황을 물어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침입자가 온다, 노예.
-모순의 근원이 황제의 영역을 침범해 온다.
-겁도 없는 친구로군, 크헬헬.
석상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바깥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선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창밖을 보았다.
황제가 바라보는 시선. 그 아래에 보이던 나무들이 말라 죽고, 대지가 황폐해진 자리. 우중충한 날씨가 대지가 검게 물든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그것보다 더 검은 것들이 대지를 물들이며 진군해 오는 게 보였다.
10만? 100만? 숫자가 가늠되지 않았다. 진형도 없이 그저 몰려오는 것밖에 없으니, 숫자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숫자만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들에는 수많은 악마가 섞였을 것이고, 영웅급에 맞먹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저것이 수정구가 말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그리고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의 석상들은 모두 뛰어난 전투력을 지녔다. 모든 종족이 동시에 몰려와도 석상들을 막을 방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만한 대군에는 대항해 봤자, 그저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젠장.”
유선은 황제의 침소로 재빠르게 이동했다.
“주인님, 지금 밖에 군대가 몰려옵니다.”
“군대가 말이냐?”
“얼른 대피하셔야 합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도 눈치챘다.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미약한 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선. 우선이 몸을 일으켜다오.”
유선은 황제의 말대로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가벼웠다. 살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때의 감각이 사라지고, 이제는 뼈와 가죽만 남아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부축해다오. 함께 가자꾸나.”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길은 알려 주마. 나를 이끌어다오. 그곳으로…….”
유선은 함께 늙은 몸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눈꺼풀조차 뜨기 힘들어 보이는 그녀가 한 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고, 몸을 꺾고, 복도를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가는 곳은 탈출구와 먼 것만 같았다.
“탈출구가 이쪽입니까?”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쪽으로 가십니까?”
“꺼내야 할 것이 있다.”
“뭘 꺼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황제님의 목숨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제 넘으려, 쿨럭……. 하지 마라. 내 목숨을 더 깎을 셈이냐?”
황제는 힘겹게 기침을 내뱉었다.
“내 생은 내가 잘 안다. 네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해가 바뀌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탄생과 죽음을 보았다. 그렇기에 잘 안다. 이 몸은 얼마 가지 못해 부서질 것이다. 모든 필멸자들의 생처럼 종말을 맞이할 것이야. 그러니 제발 이쪽으로 가자꾸나.”
“…….”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얘기했다. 유선은 그런 말을 하기에 더욱더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선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췌해져 버린 그녀의 몸을 이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철문이었다. 유선은 이곳을 언뜻 알았다.
오르넵토스가 황제를 재우고 몰래 왔던, 오려 했던 장소였다.
“여기는 어째서…….”
“나는 내버려 두고 이제 문을 열어다오.”
묵묵히 유선에게 명령만 내렸다. 유선은 그녀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철문의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끼이이이익-.
무겁기 짝이 없는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어두컴컴한 방 하나가 먹구름 낀 하늘 아래 희미한 빛에 차츰 밝아져 갔다.
그곳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어둠에 몸을 맡긴 채로 작은 조약돌을 크레파스로, 그리고 바닥을 도화지로 삼아 그림을 그리는 작은 소녀였다.
유선은 그 소녀를 알았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처음에 보던 황제의 모습과 유사함, 그렇지만 자신이 아는 소녀에게 부족하던 순수함이 없어서 엘레노어라 추측만 했을 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선은 그 순수함마저 가진 완전해진 특징을 보고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엘레노어였다. 과거의 엘레노어가 여전히 아이인 채로 이 세상에 있었다.
바닥을 긁던 소녀가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황제를 보았다.
“아, 아아…….”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아이가 돌부리를 놓고 황제에게 다가왔다. 환희도, 슬픔도,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이끌린 것밖에 없었다.
황제는 슬픈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나의 아가, 나의 모든 것, 나의 죄로 준 고독…….”
황제가 그 아이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했다. 소녀는 그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마주 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에브레라티오스, 세계의 씨앗이여!”
황제는 마지막 호칭을 중얼거렸다. 황제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별빛이 솟아올라 작은 소녀의 몸에 하나씩 깃들기 시작했다. 그 힘을 받은 아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는 황제다. 그렇기에 너를 이 작은 곳에 가둔 채로……. 너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구나.”
황제의 남은 빛줄기 하나마저 작은 소녀의 몸에 깃들자, 소녀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