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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부조리극 (2) (128/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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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부조리극 (2)

유선이 가만히 입을 다물다 무심코 그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아르젤?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여신님. 넋을 놓고 그저 아무 이름이나 내뱉고 말았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길…….”

“괜찮습니다. 그저 이름일 뿐이지요. 아르젤…… 아르젤이라! 좋은 이름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연인 같은 울림이로군요.”

페르아는 미소 지었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 지은 그 미소가 아르젤과 닮았다. 아니, 아르젤이 페르아였기에 그런 미소가 가능했다.

“아무튼 제가 갖은 고문을 견디고 진정한 성녀로 거듭나면, 그들은 저에게 희망을 품을 겁니다.”

페르아가 제시한 방법이 어느 정도 말은 됐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안일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하나, 당신만으로는 이 세계를 다시 세울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는 것은 희망만으로는 너무나 가혹하며 터무니없이 부족한 전력입니다.”

신을 잃은 인간은 내일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히고, 남은 이성마저 모두 잡아먹힐 것이다. 그러자 페르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종말이 다가온다는 예언을 접한 적이 있지 않았는지요?”

“예언이라…… 아!”

황제는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지팡이로 재빠르게 마법진을 그려 냈다.

“종말의 예언이라면 이 검이 만들어진 거로군요.”

그녀가 꺼낸 검은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검날과 손잡이 그 두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달리지 않았다. 사용 용도에만 충실한 그런 검의 모양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감정을 자극해 그 감정으로 인간들을 잡아먹는 검이로군요.”

페르아는 그 검을 들어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만약 이용만 한다면 충분히 대항할 무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악의 근원이라 여기는 그것도 분명히 모두 부숴 버리겠죠. 그렇다면, 질서의 세계수가 부서져도 세상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일지 모릅니다.”

성공만 한다면, 신의 기적만을 믿어 온 이들은 스스로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탐욕이 앞서는 이들입니다. 우리 신도도, 교주도 그 누구도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완전히 방법이 없지는 않지요. 증오라는 감정을 이용하면 됩니다.”

“증오라……. 그건 죄악시 여겨지는군요.”

모든 탐욕이 불러오는 감정 중 가장 강렬했다. 페르아도 늘 증오를 경계해 왔지만, 그녀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대의 생각이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희망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하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 어떻게 그만한 분노를 지닌 자를 찾겠습니까?”

증오라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악이어야 했다. 어떤 사람에게도 그 증오의 감정을 품어선 안 되었다.

“희망에 어울리는 것은 절망입니다. 극한의 절망을 맛본 이들이 증오를 품을 줄 알죠. 그저 절망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야 하는…… 그런 이들이라면 분명히 이 검을 다룰 겁니다.”

“그런 이들이 있겠습니까?”

지크벨트.

유선은 알았다. 지크벨트라는 사내가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물리치려고 성검인 아발트를 들고, 아르젤과 여정을 떠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악은 찾아올 테지요. 그것은 이 세상을 관리하는 당신도 잘 아는 일이지요?”

“……무자비하게 찾아올 것입니다.”

세계수가 무너진 것은 가장 큰 틈. 그동안 야금야금 먹어 오던 영역을 확실하게 확장할 수단이었다. 앞을 가로막던 커다란 장벽이 부서졌으니, 그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그 악이 오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악이 모든 것을 불태워, 그 불길로 자신을 녹이며, 복수에 뼈를 갈아 자신의 몸을 칼날로 만드는 남자가 나올 때까지?”

황제는 어떤 형식으로 닥쳐올지, 잘 알았다.

“그들은 준비를 한 번에 마칠 것이고, 한 번에 덮쳐 올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희망의 틈을 줄 리 없었다. 설령 그 틈에 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마왕을 물리치리란 보장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만들기에 턱없이 시간이 부족하다면…….”

“만들어야 할 겁니다.”

유선이 페르아의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구체적인 그 계획을 말해 주었다.

“누군가가 악마로 위장해, 악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한 소년에게 걷잡을 수 없는 증오를 새겨 줘야 합니다.”

“그렇군요. 일리 있는 말입니다.”

페르아는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 그대로 만들어야겠지요. 이런 궂은일을 하는 데다,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하며, 유선은 그 적합자가 누군지 알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가…… 제가…… 악을 만들겠습니다.”

유선이 말했다.

“한 마을을 불태우고, 한 소년의 가족들을 눈앞에서 모두 죽이겠습니다. 그 소년이 만약 숨이 붙어 있다면……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완전한 복수심에 피눈물을 흘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겠습니다.”

“……좋은 계획입니다.”

페르아는 미소 짓지 않았다. 희망의 신이 절망을 가져다주는 데 찬성하다니!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 세상이 존속하기만 한다면, 한 소년의 삶이 비뚤어지더라도…… 포기해야만 했다.

***

계획을 시작하기 전, 유선은 숲에 숨어, 한 마을을 지켜보았다. 저녁노을이 지고, 저마다 집으로 들어갔다.

화목하기 짝이 없는 작은 촌. 큰 사건이라고는 동네 꼬마들이 일으키는 부주의한 일들뿐인 그런 마을.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사건들조차 상기하지 못하도록 파멸할 마을이었다.

유선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힘을 한 번 더 상기해 보았다.

“이것이 검의 신, 소렌의 힘…….”

유선은 머릿속에서 모든 검의 사용법이 흘러들어 왔다. 언제 어떤 무기를 써도 유연하게 상황을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것이 검의 신이 가진 기지와 기술이었다.

완벽한 작전을 진행하려고 모든 신의 힘을 가진 황제가 빌려준 능력이었다. 그 어떤 이들과 싸워도 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 유선은 무심코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그의 손목에 달린 팔찌. 그것은 붉은색으로 물들지도 않고, 진동도 하지 않았다. 잠잠했다. 그 말은 세계선은 바뀌지 않았다는 뜻. 그리고 그것은 예정된 미래를 향하는 열쇠였다.

운명의 노예 같으니.

유선은 허탈한 표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발치 아래에 둔 투구를 들었다. 그의 몸이 움직이자 검은색 플레이트 아머가 맞물리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유선은 자신의 투구를 보았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해골. 위협적인 뿔을 단 미소 짓는 해골이었다. 그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든 채로 마을을 헤집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충분했다. 누군가의 공포, 그리고 그걸 뛰어넘는 증오이기에 충분했다. 소렌의 힘을 받은 상태라면, 그 누구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나갈 것이 유선의 눈앞에 그려졌다.

“…….”

유선은 망설여졌다. 아무런 죄도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니! 어제까지만 해도 그저 내일은 무엇을 먹고살아야 하나 걱정하던 인간의 등에 칼을 꽂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크벨트를 증오로 무장해 악과 끊임없이 싸우게 한다는 게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쑥대밭을 만든 것은 자신인데 모든 것은 악마 탓으로 돌린다니!

웃기지 않은가!

“아냐.”

유선은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을 떨쳐 내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야. 어차피…….”

하지만 유선은 투구를 써야 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그들에겐 미소 짓는 악마로, 살인귀로 보이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걷던 세계선을 가고자.

황제를 위해.

유선은 악마가 되었다.

***

유선은 검을 떨어뜨렸다. 불그스름한 시선과 함께 떨군 채로 숨을 골랐다. 힘든가? 그렇지 않았다. 소렌의 힘으로는 이 정도로 힘들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에 고개를 떨구었을까? 물음과 함께 유선은 고개를 들었다.

붉었다. 이것이 피로 뒤집어써서 붉어졌는지, 아니면 이 불꽃들 때문에 온통 붉은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둘 다일지도 몰랐다. 유선은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살육하고 불태워 버렸으니까. 철저히 악마가 되려고 무자비하게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박탈해 댔으니까.

“아…….”

유선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가 생각할 수 없도록 하는 것만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보고 버티라고 한다면, 그리고 자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죽인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

그때였다. 소년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유선은 고개를 그곳으로 돌렸다. 한 소년이 유선의 발아래로 시선을 둔 채로 겁먹은 표정으로 보았다. 소년은 한 단어를 내뱉었다.

“아, 아버지…….”

그것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어서 가라. 아가……. 너만이라도…….”

유선은 그의 부름에 화답하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유선이 뭔가를 밟은 건 한 남자의 몸이었다. 그제야 유선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이 남자만 죽이면 모든 계획이 끝난다.

이 남자를 죽임으로써 아이는 완전한 분노, 증오로 사로잡힐 것이고, 인류를 구원할 용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실패하겠지만…….

유선은 검을 거두려 했다. 어차피 실패한다면 굳이 죽여서 뭐 한단 말인가! 새로운 용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그 용사가 오히려 세상을 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유선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운명이 그에게 손짓했다. 팔찌가 흔들렸다. 세계선의 변동이 다가왔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유선은 예정된 운명을 위해 이 남자를 죽이고, 저 소년의 시야 속에 증오를 채워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

유선은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그보다 고통스럽게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악마 같은 미소를 띠는 살인마처럼 잔혹하게 보이게.

유선은 한 소년의 아버지를 죽였다. 유선은 근육이 꿈틀거림이 멎을 때까지 가슴을 꿰뚫은 검을 거두지 않았다.

피로 번져 가는 바닥, 그리고 소년을 향해 뻗은 거친 손이 부들거렸다. 그리고 멎어 들었다. 유선은 소년이 완전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확인하고 검을 거두었다.

소년의 눈에 보이는 절망. 그것은 연료가 되어 불타오르는 증오가 될 것이고, 악마를 향해 싸우는 용사가 될 것이다.

유선은 소년을 내버려 두고 나왔다. 마을이 불타올라 저 먼 곳까지 밝혔으니, 지원군이 뒤늦게 뛰어올 것이고, 머지않아 소년을 발견해, 그는 증오심과 독기에 어린 악마들의 절망일 테니.

유선은 할 일을 모두 다 했다.

이 세계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황제를 위해.

그렇기에 조금은 주저앉았다.

그렇기에 조금은 바람 소리에 묻혀, 빗소리에 묻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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