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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부조리극 (1) (127/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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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부조리극 (1)

“어째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그저······ 뿌리가 썩어들어 가는 것을 보았고, 그거로 겨우 눈치챈 것밖에 없습니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얼굴은 누군가에게 보여 줄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져라.”

“네?”

난쟁이가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되묻자, 그녀는 한 번 더 대답해 주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 했다.”

황제의 푸른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살기. 난쟁이는 그것에 짓눌려 당황했다.

“······네, 네!”

난쟁이는 죽기 싫어 억지로 달려 문으로 빠져나갔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만 있었기에, 유선은 어쩔 수 없이 걱정이 어린 목소리로 황제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아.”

황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답지 않은 표정으로 유선에게 말했다.

“어째서 그 굳건하던 나무가······ 신들조차 모르게 썩어 간단 말인가!”

남들 모르게 썩어들어 가는 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신조차 모르게 일어나기는 불가능했다.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아직 완전한 절망은 이르다 생각했다. 황제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신은 그 방법을 알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황제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마나를 끄트머리로 능숙하게 응집시켰다. 고밀도의 마나가 모여들자, 황제는 짧게 두 단어를 외웠다.

“카 투스.”

그것은 신을 부르는 울림. 황제가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치자, 지팡이 끄트머리에 결집한 마나가 전방을 향해 퍼져 나가 원을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벽이 되었고, 곧 또 다른 세상의 거울이 되어 무언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주였다. 언뜻 보면 우주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얼굴들이었다. 별이 눈이 되고, 우주에서 넘실거리는 오로라가 코가 되며, 불타는 유성들이 하나씩 몸 부위가 되어 은은하게 비추었다.

형상은 유선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흐릿한 형체가 오히려 그들이 온전한 존재임을 알려 주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존재.

-그대의 부름에 답했다. 우리를 불렀는가?

“네, 그렇습니다. 이 세계의 창조주들이여!”

신이었다. 첫 물음을 뗀 위엄 넘치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가 황제에게 물었다. 골골대는 노인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세계의 대제가 우리를 부를 줄이야!

-정말 놀랄 일이로구나. 그토록 세상을 이끌어 가는 데 자신해 놓았던 계집이 말이다. 우리를 부를 일이 생겼다니······!

여인의 목소리가 거들었다. 그 부름에 썩 내켜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보다 일이 먼저였다.

“지금 세계수가 썩어 갑니다. 그 어떤 존재들도 모르는 채로 속부터 썩어들어 가 부서집니다.”

-안다. 그대로 놔둔다면 분명히 완전히 썩어 부서지겠지.

“안다니······?”

세계를 유지하는 세계수가 무너지는데, 그것을 방관한다는 말이었다.

“어째서 그것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신이시여!”

-그것은 예견된 일.

-모든 것이 주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니라.

황제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더 먼 곳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이미 세계수가 부서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세계를 관리하고 왕에게는 그것을 숨긴 채로 말이다.

“주신의 뜻? 지금 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까?”

목소리에서 침착함이 흔들렸다. 울컥 쏟아져 나올 듯한 말들을 애써 집어삼키며 물었다.

-이 세계는 불안정한 세상이었다.

-모든 마법과 호기심이 이계의 영역에서 벗어나 신들의 영역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신들의 영역에 간섭하기 시작한다는 말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상태.

-그렇기에 주신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불가침이라는 영역이 함락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모든 것을 놓았다. 황제는 이해했다. 그렇기에 분노가 그녀의 이성을 잡아먹으려 했다.

“그렇다면 설마 당신들이 일부러······!”

-그렇다.

-질서의 세계수가 썩어 가게 한 것은 우리다.

주범은 다름 아닌 신들이었다. 그것은 유선도 모르던 이야기였기에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오르넵토스에게 그저 악마들이 세계수를 무너트렸다는 것밖에 듣지 못했다. 오르넵토스와 루데릭이 거짓말한 것일 리 없었다.

조작되었다나? 세계를 무너트리려던 것이 바로 신들이 주범이라니!

-그러니 이제 그대도 이 세계를 포기해라.

-남는 것은 이제 파멸뿐.

-모든 것은 새로이 시작된다.

신들은 황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면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게 도와주겠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도망치는 것을 망설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아님을 깨달았다.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나는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신은 황제의 대답을 듣자, 뻗은 손을 거두었다.

-흠······, 그 말이 진심이렷다!

“나는 왕이다. 이것은 나의 세계. 관리자인 나는 이 세계의 끝을 함께 지켜보겠다.”

황제는 굳건해진 얼굴로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신들이 잠깐 침묵하더니 근엄한 목소리가 대표해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신념을 알겠군. 그 용기에 우리가 해 줄 것은 하나뿐이다.

굳건한 목소리가 다시 손을 뻗었다. 별빛이 한 곳으로 응집해 황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이것은 모든 신의 힘이다. 필요하다면 네가 한번 이 세계를 일으켜 보아라.

-하지만 그것은 결국 무의미한 짓임을 깨달을 것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균형은 한곳으로 치우칠 것이고.

-치우친다면, 모든 것이 저울 속에서 빠져나가고.

-결국 균형에 의해 세상은 다시 만들어질 것이니.

그렇게 할 말을 마치고 신들은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거울이 닫히고, 벽이 사라졌다.

별빛이 황제의 몸을 감싸던 것도 잠깐이었다. 별빛이 사그라지자, 황제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유선은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그녀를 부축해 다시 일으켰다.

“괜찮으십니까, 주인님?”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황제는 강했지만, 그만한 힘을 감당할 만큼 강한 힘을 지니진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쓰러진 것은 그 힘이 버거워서가 아니었다.

“모든 신이 포기했어.”

신들이 포기한 데 대한 설움, 배신감, 그리고 여태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 했던 것을 알지 못했다는 무지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건 이 세계, 이 공간, 신을 잃은 자들은 악에 물들어······ 아니, 그저 미쳐 버려 스스로 파멸하게 할 생각인 거야. 그리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야.”

“······.”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 신의 힘들을 가진다 해서 내가 모든 것을 관장할 수는 없다. 나는 모두의 왕이지만, 몰려오는 모든 악을 떨쳐 낼 몸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냔 말이다.”

황제가 많은 힘을 지닌다고 해서 마냥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이외에는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선 안 되는 몸이었다. 유선은 그녀의 옆에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기에, 이해했다.

황제는 단순한 영역 싸움 같은 것이 아니라 모순을 일으키는 것들과 싸워 왔으며, 과도한 악이 세상을 완전히 멸하려는 것에서부터 균형을 맞추려고 분주하게 세상을 관리해 왔다.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고 작은 추를 하나씩 덜 수는 있어도, 세계수라는 저울의 접시가 사라지면서 바닥으로 쏟아지는 추를 다시 올릴 수단이 없어졌다.

그렇기에 신들의 힘을 가졌다 해서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해내지는 않았다. 도구를 잔뜩 가져다주고 재주껏 고쳐 보라는 심보밖에 되지 않았다. 애초에 신들은 그런 목적이었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는 황제를 보며 조롱했다.

유선은 그것에 대한 답을 알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황제에게 어떤 위로든 해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킴을 알기에 황제 옆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답을 찾을까? 어떻게? 어떻게 해야······.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였다. 백색 궁전 안에서 백색 빛이 갑작스럽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먹구름을 뚫고 나오는 한 줄기의 빛처럼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유선과 황제는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세계에 희망을 품는다면, 아직 제가 남아 있답니다, 세계의 왕이여!”

그것은 여인의 형상을 한 빛이었다. 유선은 그것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황제에게는 익숙한 인물이었다.

“페르아······.”

페르아? 유선은 언급을 많이 해서 알았다. 페르아는 희망의 신이었다.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남아 있습니까?”

“희망은 어떠한 곳에서도 가슴 깊은 곳에 남겨 두기에 희망입니다. 모든 신이 져 버린다 해도 희망이 남은 한 저는 이곳에 있을 겁니다.”

페르아는 미소 지었다. 그 빛이 강하지만, 유선은 그 미소만큼은 똑바로 보았다.

누군가와 닮았다. 자애로운 그 미소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페르아시여!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을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세계의 왕. 그렇기에 이 세계를 직접 간섭하려 해선 안 됩니다. 그런다면 모든 것이 다시 꼬일 테지요. 그건 당신도 잘 아는 일이지요. 안 그런가요?”

“······.”

황제는 긍정의 의미로 침묵했다.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페르아······ 당신이 직접······ 말입니까?”

희망의 신이 직접 나서 준다고 하자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페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신도들은 성녀를 만들려고 희망이 없는 공간을 만들어 내지요. 그 어떠한 곳에서도 희망을 품게끔 말이에요. 하지만 그곳에서는 절대로 희망을 품을 수 없어요. 인간이라면 분명히 희망 대신 절망을 택하는 곳이니까요. 그렇다면······.”

페르아의 형상이 바뀌었다. 크게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아름다웠던 희망의 빛이 점점 사그라졌고, 그녀의 절대적이었던 모습이 인간에 가깝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상이 완전해지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져 인간과 똑같은 형태가 되었다.

“희망인 제가 직접 나서면 되지요.”

유선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것이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면, 분명히 그렇게 의심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보는 인물이 아니었다.

용사 지크벨트와 함께 여행하며, 악을 물리치려고 여정을 떠나던 한 여인.

“아르젤······.”

아르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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