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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만찬 (3) (12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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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만찬 (3)

유선은 잔 세 개를 준비했다. 오르넵토스 앞에 잔을 놓자, 그녀는 다른 구석으로 몰아 놓았다.

“잔을 왜 치우십니까?”

“친구와 산 제물 앞에서까지 굳이 격식을 따지며 마셔야겠나?”

준비한 다른 술 한 병을 몰래 머리카락 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병마개를 개봉하더니, 그대로 들이켰다.

‘병나발 부는 건 예전부터 아주 탁월했구먼.’

유선은 오르넵토스가 못 보는 틈에 한심하다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렇게 황제의 잔도 놓자, 오르넵토스도 잔을 한 곳으로 치워 두었다. 오르넵토스야 그렇다 치지만, 유선은 황제의 행동에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황제님도 병째로 마실 생각입니까?”

“그런 게 아니다.”

“술을 못 마시거든.”

“왜 술을 못······.”

뭔가 물으려고 했다. 유선은 곧바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말은 다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하루도 쉴 틈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그 말에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진중했기에, 쓸데없는 물음을 던진 자신이 바보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도 잠시, 오르넵토스가 재빠르게 초를 쳐 버렸다.

“라고 말했지만, 술이 몸에 안 맞아서 그래.”

오르넵토스의 말에 황제의 몸이 움찔거렸다.

“얘는 술을 잠깐 입만 대도, 곧바로 곯아떨어져.”

그녀와 오랜 친구인 만큼 그녀의 약점 또한 잘 알았다. 황제는 자신의 역린을 건드려 기분 나쁘다는 듯, 오르넵토스를 보았다.

“고작 그런 술 따위에 곯아떨어지리라 생각하느냐?”

“증명해 볼래?”

오르넵토스는 황제의 잔에 자신의 술을 담아 주며 황제를 도발했다.

“좋다.”

황제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잔을 들어 보였다.

***

“내 말이 맞지?”

“······그렇군요.”

말대로 황제는 바로 잠들어 버렸다. 비워진 잔을 든 채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잠에 빠졌다. 마치 잠깐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확실히 잠들었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숨소리를 들어 보면 잠든 게 분명했다.

“하여간 우리 황제님은 이렇게 금방 잠들어 버린다니까.”

오르넵토스는 겁도 없이 황제의 얼굴을 손으로 쿡쿡 찔렀다. 친구와 같은 존재이기에 가능했다.

“이렇게 잠드는데,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술을 입에 대면 이렇게 수면 상태로 들어가는데,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술자리를 나눈다고 해서 그 사람이랑 같이 마시면서 즐긴다는 말은 안 했는데?”

오르넵토스는 빙긋 웃었다.

“원래 이 성의 주인은 재미없어. 황제는 고지식하니까.”

오르넵토스는 투덜거리면서 한 병을 다 비우고 테이블 위에 병을 올려 두었다.

“이 술자리의 묘미는 바로 탐험에 있지.”

“탐험?”

“아주 재밌는 게 이 성에 존재하거든. 너는 그것도 몰라?”

몇 개월이나 있었지만, 오르넵토스가 말하는 재밌는 거라고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 성의 참 묘미도 모르는 채로 썩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네. 산 제물로 사는 것도 심심할 텐데, 내가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서 알려 주지.”

오르넵토스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 뒤에 숨겨 놓은 또 다른 술병을 꺼내어 입에다 가져다 대면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따라와.”

따라오라고 말은 했지만, 오르넵토스는 유선이 함부로 어디론가 새지 못하도록 몸을 묶어 버렸다. 유선은 어쩔 수 없이 오르넵토스의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유선은 얌전히 오르넵토스의 뒤를 따라갔다. 오르넵토스는 술을 마시며 걷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고, 정신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여기는 어째······.”

낯선 장소였다. 어째서 그렇게 낯선지 했는데, 유선에게는 함부로 가지 못하게, 그리고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다 왔다.”

오르넵토스가 커다란 문 앞에 서며 말했다. 그것은 다른 문들처럼 장식이 있는 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서 철저히 격리되려는 쇠문이었다. 순수하게 손잡이만 달린 철로만 된 문에, 견고한 벽이 확실하게 그런 인상을 남겼다.

이곳은 유선에게는 들어가게 허락해 주지 않은 곳이었다. 그런 곳에 서 있는 유선은 자신이 정말 여기에 있어도 되나 생각했다.

“우리 귀염둥이를 어디 한 번 볼까?”

오르넵토스는 술이 제대로 취한 사람처럼 히죽 웃으며 문에 다가갔다.

그때였다.

오르넵토스가 문에 손을 얹은 순간, 팔찌가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이 세계선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였다.

막아야 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유선은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르넵토스가 손잡이를 잡고 살짝 문이 열리면서 동시에 알듯 모르게 새어 나오는 공기를 맡자마자 드는 생각이었다.

들어가고 싶었다.

판도라가 자신의 상자를 열어 보려고 한 기분이 이런 것일까? 유선은 금단임을 알면서 호기심에 오르넵토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뭘 하는 것이냐?”

문이 완전히 열리려던 찰나, 유선의 뒤편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술에 취한 오르넵토스도 화들짝 놀라,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다시 원래대로 닫혔다. 그리고 팔찌의 진동이 사그라졌다.

“이키, 들켜 버렸네. 이거 네 산 제물이 같이하자고 해서 했어. 나는 잘못 없어.”

“내 산 제물이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네가 분명히 꼬드겨서 못 이겨 그대로 갔겠지.”

황제는 오르넵토스를 잘 알았다. 오르넵토스는 정곡을 찔려 눈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는 시늉을 했다.

“남의 집에 들렀는데 허튼짓까지 했으니, 용서가 안 되는군, 그래. 응당한 벌을 받겠나?”

“으, 벌이라니······! 알았어, 미안해. 사과할 테니까, 화내지 마. 오랜만에 그 애랑 같이 놀려고 한 건데, 너무하네. 정말······.”

오르넵토스는 뻔뻔하게 투덜거리며 황제에게 사과했다. 황제는 오르넵토스를 째려보며 창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당장 나가.”

“그래, 그래. 나갈 테니까, 머리 좀 식혀.”

오르넵토스는 등장처럼 다시 입자 형태로 분해되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그렇게 오르넵토스가 사라지고, 세계선이 바뀔 뻔한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무슨 짓을······.’

유선은 뭔가에 홀린 듯 오르넵토스의 행동을 지켜보다 머리가 식혀지면서 동시에 가슴이 철렁거렸다. 자신이 부나방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팔찌가 끊임없이 세계선이 바뀐다는 것을 알려 주었는데, 유선은 그걸 제지하려 들지도 않았고, 그저 불길에 뛰어드는 꼴이었다니!

황제는 오르넵토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유선을 보았다. 오르넵토스에게 한 것처럼 자신에게도 따끔하게 뭐라 할 생각인가 하며, 무슨 말이든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

하지만 황제는 유선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의미 없을 거라는 듯. 그녀는 등을 보이며, 집무실로 걸어갔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유선은 얼른 그녀에게 달려가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주인님, 괜찮으신지요?”

“괜찮다, 그저······ 이놈의 술은······ 버티기가 힘들구나.”

술 효과는 오르넵토스가 말한 것처럼 잘 들었다. 다만, 오르넵토스가 무슨 짓을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억지로 깨어난 몸이었다. 오르넵토스가 사라져 다시 긴장이 풀렸고, 버릇처럼 잠이 꾸벅꾸벅 몰려왔다.

“주무시지요.”

“아직 밀린 업무가 있다.”

“이런 몸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럴 때가 아니면 누구 탓으로 돌리면서 잠을 잘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유선은 황제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그녀의 무거운 몸짓들이 잊힐 만큼 가벼웠다.

“건방지구나, 감히 내 몸에······.”

“······.”

황제가 무어라 말해 보려 했지만, 끝까지 이어 가지 못했다. 그저 꾸벅꾸벅 졸리는 머리를 유선의 어깨에 기댈 뿐이었다. 유선은 황제를 안은 채로 침실로 옮겼다.

유선은 넓은 침대 안에 황제의 몸을 집어넣었다. 유선은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자 잠든 줄 믿은 황제가 유선의 손을 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붙잡았다.

“유선······ 유선······.”

미약하게 숨을 내뱉음과 함께 희미하게 유선의 이름을 불렀다. 유선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황제에게 대답했다.

“네.”

“세상이 멀어져 가. 모든 것이······ 우리의 존재를 심판하는 것 같아.”

유선은 잠꼬대인지, 말을 거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황제는 이미 세상이 망조를 보인다는 걸 짐작한다는 사실만 알았다.

그리고 미래에서 온 유선은 확실히 알았다. 이 세계는 멸망한다. 악마에게 잠식당하며, 왕들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단 한 명, 정령왕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세상이 멸망의 길을 걷는다면······ 모두의 왕인 내 잘못이야. 내가 능력이 있었더라면······.”

황제의 무게. 그것은 가끔 버거웠다. 수천 년을 살아와 세상 위를 군림했지만,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감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황제에게 유선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왕. 당신은 언제나 모두를 위해서 많은 짐을 짊어진 것을 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

황제가 눈을 감았다. 유선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당신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나 곁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유선이 그렇게 말하자, 안심되는지 유선의 손을 놓았다. 황제의 손이 침대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유선은 그녀의 팔을 올려 주고, 몸을 침대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황제는 긴장이 풀려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부서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파멸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

황제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왕좌에 앉을 때면 언제나 황제는 냉철한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모든 사람에게 왕다운 모습을 보였다.

수많은 소식을 접해 왔고, 황제는 그런 소식들에 늘 냉정하게 판단하더니, 이 소식에서만큼은 그런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세계수가 무너져 내렸다고······?”

질서의 세계수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하는 늙은 난쟁이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직도 저기 보이지 않느냐? 질서의 세계수가 아직도 저렇게 건실하게 서 있는데, 어떻게 무너져 내렸다는 말을 하느냐?”

황제는 창문 너머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그리고 인간인 유선의 눈에도 아주 잘 보이는 아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겉으로는 굳건하지만, 이미 속 내용물들은 모두 썩어 문드러져 그대로 내려앉은 지 오래입니다. 저 형상을 유지하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일 뿐. 그동안 질서가 파괴된 사실도 모른 채로 살아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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