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62. 만찬 (2)
오르넵토스의 말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유선은 이미 알지 않던가!
‘하지만······.’
이게 단순한 문제였다면 좋겠지만, 유선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20명의 왕, 그리고 그 만찬에 올린 것들.
엘프의 왕은 나름대로 왕들의 만찬에 어울리는 음식들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만찬들 속에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건 확실했다.
‘하나.’
그들의 왕 중 왕이라 불리는 황제도 음식에 대해서 내색하지 않았다. 음식 투정도 거의 유선에게만 해 봤다고 했으니, 겉으로 드러낼 리가 없었다. 제멋대로인 오르넵토스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지 않다면, 오르넵토스의 만찬에 많은 음식을 올릴 리가 없었다. 신성한 은색 접시에 올린 과일과 풀, 그리고 많은 열매로 만든 음료수······. 말 그대로 음료수였다. 알코올이 아닌.
많은 왕이 지켜보았다. 외줄 타기를 하는 광대를 보는 듯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유선을 지켜보았다.
‘오르넵토스가 좋아한다면 역시······.’
술이었다. 이건 유선의 목숨을 걸고서 확신했다. 만찬에는 눈에 띄지 않게 가운데에 장식된 채로 병뚜껑도 개봉 안 한 상태였다. 단둘이라면, 유선은 고민할 필요 없이 포도주를 선택하러 이동했겠지만, 함부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도 좋아하는 게 술이 맞을까?’
유선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눈치 있는지 본다······고 했잖아!’
그 눈치가 과연 뭘까? 유선은 생각했다. 그리고 오르넵토스가 준 힌트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
“이것입니다.”
유선이 들어 보인 것은 오르넵토스의 만찬에 올린 것이 아닌 가운데에 놓인 포도주였다.
“······.”
“······.”
오르넵토스는 흠칫하고 놀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소 세상의 정령왕이라면, 품위를 유지하는 목적으로 술을 몰래 공수해 가져와 마실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틀렸다!”
엘프의 왕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그녀가 유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감히 타락의 근원으로 왕을 능멸하려 하다니! 만물을 이루며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정령왕께서 술을 즐긴다? 감히 너 따위의 인간이······.”
“됐어. 그만해라.”
오르넵토스는 엘프 왕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녀는 스리슬쩍 웃었다. 확실히 정답이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선이 어째서 다른 왕들조차 모르는 자신의 취미를 아는지 궁금했다.
“포도주라! 정말 기막힌 발상이로구나. 어디 내가 이걸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 보아라.”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 모두가 유선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유선은 애써 자신이 틀린 선택을 하지 않았음을 해명해야만 했다.
네가 술 마시는 모습을 내가 똑똑히 지켜봐 왔기 때문이지. 아주 간단하지만, 그대로 말한다면, 나 미래에서 온 몸이오!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유선은 일단 어떻게든 둘러대려고 망설이지 않은 척 즉답했다.
“술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신성하다?”
저질렀다. 하지만 첫 문을 떼는 게 가장 어려운 만큼 두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술은 인간들의 의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니, 산 제물인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정령왕을 타락했다고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렇게 함부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유선은 슬쩍 엘프 왕을 떠보았다. 오르넵토스가 잠잠히 그 이야기를 듣다 대꾸했다.
“그것도 말이 되는구나. 인간들은 그날 곡식이 만들어지면, 술을 빚어서 내게 바쳤다. 그러니 신의 음료라고 생각해 왔겠지. 참 귀찮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라니까.”
오르넵토스는 잡아떼면서 귀찮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이걸 기회로 엘프 왕에게 물었다.
“뭐, 많은 인간의 격언 속에서 선인도 취하면 심장 속에 악마가 꿈틀거린다고 하지. 그렇기에 술이 악마의 유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만······.”
엘프 왕이 긴장했다. 자신을 보는 그 눈 속에서 위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이 술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겼다면, 그대는 나를 타락했다고 여길 것 같은데······. 나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냐? 너희가 지켜 보살펴 온 것들과 다르지 않은 이들을!”
그것이 정답이든 아니든, 엘프 왕은 상관없었다. 이 물음이 엘프 왕은 역으로 궁지에 몰려 버리고 말았다. 엘프 왕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정령들이 화를 내면 걷잡을 수 없고, 그 관계가 다시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제가 만물을 이루는 정령왕께 감히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엘프 왕이 무릎을 꿇으면서 열띠던 분위기는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그쯤 해라.”
황제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고 말했다.
“청문회 분위기가 된 것 같아 기분 나쁘다. 이 만찬에 어울리지 않는구나. 겨우 두 녀석 때문에 이런 기분으로 밥을 먹어야겠느냐?”
“죄, 죄송합니다, 왕이시여!”
엘프 왕에게도 심기가 거슬린다는 눈을 보냈지만, 유선에게 가장 따갑게 보냈다. 아무래도 미천한 신분이나 다름없는 인물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주인님.”
유선은 침착하게 그녀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엘프 왕과 차원이 다른 침착한 행동이었다.
다른 왕들은 유선의 행동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만물의 왕에게도 저만큼 침착한 인간이라니······!’
‘미쳐 버려 겁이 없는지, 용감한지 구분이 안 되는군.’
수년 넘도록 얼굴을 봐 오던 이들도 아직,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는 드래곤의 왕, 그리고 그 이전에 모든 세상 위에 군림하던 왕이었기에, 그녀의 어마어마한 악명과 공포는 단순히 시간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선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다리로 멀쩡히 옆에 섰던 것이 말이다.
드래곤 피어와 살기는 예전부터 충분히 받은 몸이었기에, 유선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역시 저 표정은 심장에 안 좋긴 하네.’
그래도 긴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유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르넵토스는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유선을 보면서 말했다.
“뭐 인간이 선택한 술이 틀리긴 했지만, 그 기발한 생각이 아주 감탄스럽구나.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잔 정도는 예의상 마셔 주지.”
오르넵토스는 음료수로 채워진 잔을 물잔처럼 재빠르게 비웠다. 그리고 엘프 시종 중 하나에게 들어 보였다.
“어디 한 잔 줘 보아라.”
엘프 시종은 조심스럽게 그 잔을 채웠다. 오르넵토스는 유선을 보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그녀가 바라는 눈치. 그건 상상의 범주 외의 행동이었다. 오르넵토스는 자신이 술에 입을 댈 정당한 조건을 어떻게든 만들어 낸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만찬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건방 떠는 엘프 녀석의 표정을 보니, 내 속이 저절로 풀리는 것 같더구나.”
만찬 끝나고 똑같은 텔레포트 마법을 이용해 집무실로 돌아오며 말했다. 황제는 멋대로 유선에게 화를 내다가 제대로 얻어맞은 엘프 왕을 떠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제게 화가 나신 게 아닌지요?”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지. 오랫동안 만찬을 했지만, 이토록 즐거운 상황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더구나.”
언제나 격식이 우선이었다. 그렇기에 왕들은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서로 기분 나쁜 부분은 건들지 않으며 대화를 진행해서, 서로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 정중하게 대했다. 말 그대로 황제가 직접 나서서 그 잘못들을 지적하지 않으면 영양가가 없는 만찬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주제넘은 짓은 함부로 하지 마라. 그대는 인간이다. 제아무리 내 옆에 선다고 해서 너도 드래곤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제 분수를 알라는 말이었다. 이것은 경고가 아닌 염려. 유선이 자만하여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유선은 그 말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고개 숙였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문이 열리며 강풍이 불어왔다.
휘이이잉!
그 느닷없는 바람은 만찬 때와 비슷했다. 회오리치며, 발부터 입자가 생겨나는 것과 형상마저 모두 똑같았다.
“내 오랜 벗이여, 내가 왔노라!”
아니나 다를까, 오르넵토스의 등장이었다.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오랜 친구인 만큼 잠깐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 해서 왔어. 시간 있나?”
“안 될 것은 없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르넵토스를 기꺼이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유선은 두 왕이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를 내줘야겠다 싶어 인사하며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너도, 인간.”
나가려는 찰나, 유선의 발에 어느새 덩굴 하나가 옥죄었다. 움직이려고 하면 더욱더 세게 조여 와 발목을 끊어 버릴 것 같았다. 오르넵토스가 다가왔다.
“건방진 인간이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나는데 말이야.”
거기서 심기가 거슬렸다는 듯 유선에게 말했다. 강하게 쥐어진 덩굴이 발목에서 종아리,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스멀스멀 기어올라 감쌌다. 점점 압박해 오는 것이 터트려 없애 버리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절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맞나 싶었다. 하지만 유선은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을 눈치챘다.
“이번 만찬에서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오르넵토스가 티 내지 않으려 하지만, 장난기 어린 얼굴로 묻는 걸 보고 확신했다. 만찬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은 표정이었다. 유선은 어째서일까 생각하다가, 만찬에서처럼 대담하게 대답했다.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선은 그녀가 만찬 중에 술을 입에 한 번 댄 것이 끝인 걸 보았다. 기본으로 한 병은 마셔야 만족스러웠을 텐데, 유선은 상당히 참은 게 눈에 보였다.
“흐음, 과연······ 그때, 했던 말은 단순히 인간들이 그렇다고 해서 내뱉은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렷다!”
그런 조잡한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이미 꿰뚫어 보았다. 오르넵토스는 식물로 엮은 유선의 몸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놓은 머리카락 뒤에 숨겨 놓은 술을 꺼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도 한 잔 낄 영광을 줄 텐데, 어쩔 텐가?”
오르넵토스가 술을 찰랑거리며 물었다. 현대와는 먼 술병 모양이지만, 양각으로 새겨진 조각이 고급스러운 술이 분명했다.
수확제 때 있던 술 중 하나였을 것이고, 유선은 그중에 최고급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술에 관심이 없는 유선도 고급주의 맛은 보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술을 마셔 버리고 실수하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일이었고,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릴 수 있었다.
“하나, 저는 제 주인님에게 묶인 몸입니다. 주인님의 허락이 없다면······.”
“내가 허락하마. 그대도 동석에 앉아라.”
귀신같이 말을 받아치는 황제.
망했다. 황제가 허락하면서 이제 거절할 수단은 없었다. 유선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오르넵토스에게 정중하게 허리 숙이며 말했다.
“그, 그렇다면······ 염치를 무릅쓰고 함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
오르넵토스는 씨익 미소 지었다. 그렇게 세 명이 한 테이블에 술병을 올리고 또 다른 만찬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