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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만찬 (1) (12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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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만찬 (1)

그 여인에 대한 호칭은 현재 주인님으로 고정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입에 익지 않아서 상당히 애먹었지만, 그래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듯이 금세 입에 붙었다.

그것이 아직 엘레노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여인, 혹은 황제라는 칭호만으로 칭할 수밖에 없었다.

끼야아아악!

유선은 독수리가 우는 소리에 빨래하다 창문 쪽에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의 발톱에 쥐어진 채인 두루마리를 보고 서신이 왔음을 알았다.

“노예, 서신이야.”

“아, 네.”

유선은 독수리의 발톱에 쥐어진 커다란 두루마리를 받았다. 통을 따서 안에 든 문서를 들어 읽어 보았다.

“엘프어인가······.”

배우지도 않았지만, 황제가 하사한 몇 안 되는 능력으로 간단한 통역은 가능했다. 번역체로 완전히 읽히지는 않았지만, 재량껏 생각해 이어 맞추면 내용은 금세 알았다.

“만찬에 초대하는 거로군요.”

미사여구가 상당히 많은데, 그걸 전부 빼서 종합해 보면 각 종족을 대표하는 이들이 직접 와서 만찬을 벌인다는 내용이 틀림없었다.

“그래. 황제는 분명히 읽을 생각이 없을 테니, 늘 그렇듯이 알려 주기만 해 줘.”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노예.”

독수리는 다시 날아갔다. 그녀의 일과를 정리하는 것도 유선이 하는 일 중 하나였고, 유선은 그것을 수행하려 발을 옮겼다.

지금쯤이라면 집무실에 앉아 있을 테니, 유선은 집무실 앞에 섰다. 본래라면 노크하고, 동의를 구한 다음에 문을 여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허술한 행동이었다.

“그런 게 만들어졌다고?”

문틈에서 나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노크하지 못하고 손을 그대로 멈췄다.

“말도 안 돼. 정말로 모든 게 끝난다는 징조라도 일어난단 말인가!”

유선은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보이는 황제를 보았다. 그녀가 수정구를 내려다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정구에는 남성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그려졌다.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얼굴도 컴컴한 방 속에서 보는 것처럼 얼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보관해 둔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지야 않겠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남자의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어떻게든 뭔가 더 듣겠다 싶어서, 유선은 좀 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끼익-.

그러다가 문 경첩 맞물리는 소리가 나고 말았다. 그러자 모든 게 빠르게 움직였다. 수정구에 그려진 남자의 얼굴이 한 번에 사라지고 황제는 재빠르게 이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선이냐?”

“네, 전갈이 날아와서 주인님께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엘레노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듯이, 유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왜 노크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는가?”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노크하려고 보니 문이 열려 있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뭐, 상관없다. 그래서 할 말이 무엇이냐?”

유선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황제는 주제를 바꿔 그에게 물었다.

“오늘은 왕들과 만찬을 나눌 예정입니다. 수확제가 다가와 이번 일을 결산도 할 겸······.”

“장소는?”

“엘프 왕의 궁전, 연회장이라고 합니다.”

“엘프들이라······.”

여인은 엘프들이라는 말에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 근엄한 표정이 어찌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유선은 그녀가 어떤 것이 문제인지 금방 짐작했다.

“음식이 걱정되십니까?”

“주제넘은 소리다. 내가 이것저것 가리는 애 같으냐?”

여인은 이를 바득 갈며 말했다.

“단지 그 풀떼기들을 주면서 융숭한 대접으로 여기는 꼬락서니를 떠올리자니,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

똑같은 말이었다. 엘프들의 음식은 대체로 그대로 먹는 경우여서 간이 되지 않은 자연의 맛을 선호했다. 입맛이 특별히 까다롭지 않은데도 그런 증오를 보이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엉망인 듯했다.

“이번 만찬에서는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해 보는 건 어떠신지요?”

“됐다. 엘프의 왕이 꼬리 치면서 순종하는 개처럼 구는 것은 보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나.”

거기다가 엘프들 자체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보통 자연과 동화된 엘프들을 보면, 좋아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황제는 그들의 존재를 유난히 싫어했다.

“만찬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라. 유선, 그대도 동행할 것이니.”

“그래도 되겠습니까?”

만찬에 자신을 함께 데리고 가 준다는 말에, 유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 그녀가 이 넓은 궁전 밖을 나가도록 허락해 준 유일한 시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뭔가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저 미천한 몸으로 가도 되나 해서······.”

“21명의 왕이 이야기하는 자리일 뿐이다. 어차피 그대는 나의 종, 누구든 그대에게 함부로 무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가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저 눈을 보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빌빌 기는데, 그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주인님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 동행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이만 나가 보아라.”

황제는 그렇게 말했고, 유선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

유선은 황제를 따라 텔레포트 마법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이계의 틈이나 다른 틈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텔레포트 된 장소는 만찬이 벌어지는 회장 발코니였다. 가운데는 붉은 카펫이 깔려 많은 이가 이곳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만찬에는 많은 왕이 미리 모였다. 서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었고, 웃어 화기애애하다는 것과, 으르렁거리는 모습으로 서로 증오하는 것도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의 왕이시여!”

하지만 그들의 행동도 모두 그들끼리만 하는 일일 뿐. 엘프의 왕이 가장 먼저 황제를 반기자, 모두가 하던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황제는 빈 가장 끄트머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른 왕들은 황제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묵묵히 일어났고, 그녀가 쉬는 것을 허락함과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유선은 황제의 옆에 선 채로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모든 왕의 얼굴을 쓰윽 보면서 말했다.

“모든 왕이······ 왔다기엔 아직 안 온 녀석이 보이는군.”

그것도 바로 자신의 옆자리였다. 왕들은 곤란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돌렸다. 주최자인 엘프의 왕이 어쩔 수 없이 황제에게 말했다.

“오시기 전에 미리 연락해 보니, 곧 도착한다고 하십니다.”

“알겠다.”

황제는 그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부재중인 왕······ 그 녀석을 말하나?’

유선은 일단 왕이라고 하기에 생각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기 무섭게, 발코니 쪽에서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그리고 그 강풍이 카펫 중앙에서 소용돌이쳤다. 입자가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빈 소용돌이 속에서 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형상이 완전해지자, 유선은 빈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도착했어, 늦지는 않았지?”

“네, 늦지 않았습니다, 오르넵토스 님.”

오르넵토스! 엘프의 왕은 가장 먼저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황제를 제외한 다른 몇 왕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오르넵토스를 반겼다.

황제가 상당히 심기가 거슬린 채로 오르넵토스를 보며 말했다.

“일찍 왔구나, 오르넵토스.”

“이곳의 시간 개념은 영 우리랑 맞지 않아서 말이야. 지각해서 미안해.”

오르넵토스는 정중하게 황제에게 말했다. 황제는 더는 추궁하지 않으며,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오르넵토스는 바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 모든 왕이 모였군.”

모든 왕이? 유선은 반대편에 비워진 자리를 보며 속으로 물었다. 아직 한 명이 덜 왔다고 말은 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장님이 아닌 이상, 그 자리가 빈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 빈자리의 주인이 누굴까? 유선은 대충 모인 왕들의 종족을 확인했다. 그리고 빈자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다.

‘인간의 자리인가 보네.’

단 한 종족, 인간만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인간이 없는 상태로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최근에 악마들이 유난히 활개 치는 날이었던 것 같은데, 대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구나. 한 명씩 말해 보아라.”

“네, 뾰족 부리 산의 족장이자, 모든 드워프를 대표해서 온 드워프의 왕이 인사 올립니다. 우리는 굳건한 요새를 지어, 무자비한 악마들의 무리가 쳐들어와도 언제든지 막을 대비 태세를 이룹니다.”

“검은 호수의 수호자로서, 운명의 여신을 들여다보는 대행자, 그리고 모든 엘프를 대표해서 엘프의 왕이 인사 올립니다. 우리는 하나로 결속된 생각으로 악마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강한 정신력과 무력을 무장합니다.”

그렇게 인간을 제외한 20명의 왕이 자신들의 대비 방법들을 말해 주었다. 모두 들어 보면 제각각 자신들의 장점을 이용한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망했나?’

악마들은 그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모든 것을 무너트렸다. 마음 같아선 유선이 지금 나서서 그들의 약점을 집어 말하고 싶었다.

‘말하면 위험한 데다, 정작······ 말해도 별일은 없겠지.’

미친놈의 헛소리, 더 나아가면 일개 노예 주제에 건방지게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비웃듯이 여겨져 괘씸하게 볼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유선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들이 저지른 안일함을.

그렇게 말하다가, 마지막은 정령왕인 오르넵토스에게 돌아왔다. 가만히 앉은 오르넵토스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령들의 세계는 간섭받을 일이 없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상당히 자만하듯 말했다. 거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오르넵토스의 말대로 정말 세상에 남은 것은 정령뿐이었다.

‘실력은 있는 놈이라니까.’

뭔가 흐뭇해져서 유선은 슬쩍 미소 띤 채, 오르넵토스를 보았다. 유선이 그녀를 본다는 것을 의식한 오르넵토스가 유선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서슴없이 보는 행동에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어디서 인간이 굴러들어와 여기에 자리 잡았지?”

유선은 아차 싶어 고개 숙이며 눈을 피했다. 처음 볼 때처럼 독기가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빠했다.

엘레노어와 함께 있을 때,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다짜고짜 죽이려 들었던 그때와 다르게 오르넵토스는 기분이 나쁜 것밖에 없었다.

“내 산 제물이다.”

“산 제물? 인간들이 주기적으로 바친다는?”

“그래.”

황제는 짧게 말했다. 그러자, 오르넵토스는 흥미롭다는 듯 황제와 유선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산 제물을 바칠 시기는 아직 아닐 테고, 거기다가 네가 끼고 다닐 리도 없는데······. 우리조차 부릴 수 없는 기묘한 묘기라도 가졌나 보지?”

“기묘한 묘기라 하면 기묘한 묘기가 있긴 하지.”

“어떤 기묘한 묘기인데?”

오르넵토스는 황제가 그런 소리를 하자 신기해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농담 식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보라는 식이었다.

오르넵토스는 흥미에 찬 표정으로 유선에게 물었다.

“그래, 산 제물이 죽은 제물이 되지 않고 버틴 묘기를 한 번 보자고. 눈치가 얼마나 있는지 볼까?”

저 장난기. 오르넵토스는 대놓고 보이지 않았지만, 장난기 어린 눈으로 유선을 보았다. 이걸 여기서, 거기다가 관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곳에서 경험하니, 유선은 기분이 나빴다.

오르넵토스는 양손을 펼치며 식탁 위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있는 음식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가져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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