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61. 팔찌의 용도
단장은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소리쳤다.
“죽여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가 전해 받은 말과 사실만을 전할 뿐입니다! 하나 이 인간은 살아 있어서 거대한 악이 될 인물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 인간들의 뜻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여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왕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온 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부추기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여인은 눈을 돌려 유선을 보았다.
“너는 정말로 반역을 일으켜서 왔느냐?”
전후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유선은 마음속에서 뭔가 억울한 감정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기에, 여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여인의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유선. 그러자 순식간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여인은 유선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우우우웅-.
유선의 손목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코스가 준 팔찌가 내는 진동이었다. 붉은색을 띠며 뭔가를 경고해 왔다.
‘세계선이 바뀐다.’
그러면 이 세상에 날아오는 것은 의미 없었다. 유선은 고개를 조아리며, 상황에 맞게 대처했다.
“······죄송합니다. 미천한······ 신분으로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저는 반역한 자가 맞습니다.”
유선은 존댓말을 하며 자신에게 내려진 죄를 인정했다. 그 말 한마디를 고치자, 팔찌의 흔들림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그라졌다.
“······그래, 이번 산 제물을 받아들이마. 그대로 돌아가라.”
“가, 감사하옵니다!”
군기가 바짝 든 대답과 달리, 사내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 그대로 두 다리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가장 큰 호사였기 때문이다.
사내들은 끝까지 예의를 차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짤그락거림이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지자,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게, 주변에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쯧쯧, 이번 산 제물도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첫날부터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꼴을 보아하니, 일주일도 못 가서 또 죽겠어, 크헬헬.”
그것은 뒷얘기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컸고, 유선에게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였다. 비린 웃음을 터트리는 석상들. 석상들을 향해 슬쩍 눈짓해 보자, 조잘조잘 떠드는 것과 다르게 돌처럼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게 끝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산 제물.”
유선은 여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라니, 정말 드는 저 꼴을 봐.”
“눈치가 없다니까, 크헬헬.”
이러는 게 아니었나? 유선은 다시 고개를 조아릴까 생각했지만, 이미 눈을 마주친 탓에 다시 그러는 행동도 이미 의미가 없었다.
유선은 이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단 하나의 생각만 들었다.
‘엘레노어.’
하얀 옥좌. 그 옥좌보다 더욱 깨끗한 머리칼, 그리고 어떤 페인트로도 그 색을 표현할 수 없는 깨끗한 푸른색. 그 누군가에게는 미지의 공포로 느껴졌겠지만, 유선에게는 시선을 사로잡는 블랙홀이었다.
모든 것이 한 소녀의 특징을 잡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자신이 반역자가 되었고, 그것을 이 여인 앞에서 인정한다는 건, 이 여자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연관성이라는 것도 웃겼다. 코스는 분명히 이 조우를 인도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여인이 코스가 칭한 ‘세계의 마지막’ 그 호칭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직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생명인지, 아니면 세계의 마지막을 불러온 인물인지.
그런 의문도 이 의문과 비교하면, 하찮은 질문에 불과했다.
‘엘레노어일까?’
다만 그녀를 처음 들여다보았을 때 순수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만한 강인함과 뚜렷한 통찰력이 보였다. 성인인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 성인이 된 엘레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소녀, 과거에는 여인? 모순적이었다. 뭐가 있을까? 그 과정에서 대체 뭐가 일어났을까?
그런 의문에 빠질 동안 여인은 유선을 유심히 보더니,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
유선은 그녀의 말대로 그녀 자체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엇나가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저는 어떻게 됩니까?”
유선은 그녀에게 물었다.
“겁도 없이 묻는 꼴을 봐.”
“멍청한 인간, 크헬헬.”
하지만 이 물음이 그 미래를 바꾸는 데 큰 변동이 있는 행동이 아님을 알았다.
“본래라면, 산 제물로서 네 역할을 분담해 줄 것이다. 영겁의 시간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을 지닌 혼이라 해도 절대로 해낼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말이지. 그것은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여인이 말했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처사도 두렵지 않을 터.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네 운명을 직접 선택해 보아라.”
어떤 처사를 선택해야 할까? 답은 있었다. 그런데 이 답이 어째서인가 반감이 들었다. 그 시간의 틈 속에 있는 코스라는 소녀의 의도대로 흐르는 것 같았기에······.
하지만 유선은 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옆에 서고 싶습니다.”
“······.”
“······.”
조잘거림이 사라졌다. 유선을 비웃던 목소리들이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패닉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두둑!
쿠웅!
석상이 움직여 유선에게 다가왔다. 단순한 석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중무장한 도마뱀 머리였다. 만약 이대로 덤벼든다면 유선이 이길 확률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던 석상이 정색하는 목소리로 유선에게 말했다.
“배짱이 두둑하구나.”
“인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의 종결자에게 내뱉기엔 너무나도 무모한 말이었다, 인간.”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었다. 그들의 처지에선 유선이 그걸 넘어 버린 것만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였다.
“수호자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부디 이자의 무례에 응당한 벌을 내리게 허락해 주소서.”
수호자들의 요청에 오히려 그들을 째려보며 말했다.
“응당한 벌? 저 미련한 사내는 내가 하라는 말에 대답했을 뿐이다. 이것은 무례가 아니다. 주제 넘느니 한다면, 경들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
“······.”
여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석상들은 유선을 위협하기를 그만두고 물러났다.
“내 옆에 서게 해 달라는 말은 분명히 동등한 입장이 되어 달라는 말은 아닐 터. 만약 그런 목적이라도 그대의 소원은 이루어 줄 수 없다. 이것은 그대가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크고 많은 일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유선에게 손을 뻗었다.
“하나, 그대의 올곧음 하나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구나. 그러니 내 옆에 서서 나를 지켜보아라. 그리고 내가 차마 놓친 것이 있다면, 그대가 내게 알려 주어라.”
코스가 말한 것 그대로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녀를 보좌하는 일이었으니까.
유선은 그녀의 말에 내민 손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귀족들이 귀부인에게 하듯이 손등에 키스했다.
***
가을. 유선이 이 세상으로 날아온 지 4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식탁 위에 지루하게 앉은 하얀 여인이 탁자를 톡톡 치며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것이 왔다. 여인이 눈길을 스윽 돌리자, 한 남자가 요리를 한 손으로 가지고 왔다. 그녀는 따가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주인을 굶겨 죽일 셈이냐?”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 드셔야 할 음식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유선은 그녀의 화를 유연하게 넘겼다.
“화가 풀리시지 않는다면, 제게 벌을 내리셔도 됩니다.”
유선의 말에 여인은 그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이런 일로 화를 내면 바보 같은 일임을 알기에, 그녀는 마지못해 보류하는 척 말했다.
“일단 먹어 보고 생각하지.”
“식사하실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음식 맛을 제대로 즐길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이 된다면, 조금 늦은 것에 대한 마음도 풀리기 마련이었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 자리를 나와 다른 일을 하러 갔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나 다름없었다. 모든 청소와 빨래, 설거지 같은 가사가 그의 몫이었다.
그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자신의 단칸방만 한 이불을 업은 채로 빨래방으로 이동했다.
“사소한 것에 절대로 화를 안 내시는 분인데.”
“황제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군, 인간.”
중앙을 가로질러 가야 했기에, 석상들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들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런 말도 꺼낸 것이 비교적 최근이었으리라.
유선은 그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일주일도 못 가서 죽을 운명이라고 말한 것을 빼고도, 그들이 주옥같은 망언들을 쏟아 내었기 때문이다.
‘황제님의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에 맞춰 시중을 들겠다고? 같잖기 짝이 없군. 황제님은 잠깐의 취침조차 시간 낭비로 여기실 만큼 부지런한 분이시다. 인생의 3할을 잠에 바치는 인간들이 버틸 리 없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유선은 여인의 곁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틀 동안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황제처럼 정신이 맑은 채로 그녀 옆에 서 있었다.
‘황제님의 음식을 하겠다니, 의도가 아주 불손하겠군. 죽지 못해서 황제님께 대신 죽여 달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생식만 하다시피, 음식을 먹는 걸 보고, 첫 하루는 그녀의 취향을 맞춰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실패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어떻게든 입맛을 맞춰 별 탈 없이 넘어갔다.
‘황제님과 게임 상대가 되어 주겠다고? 그거야말로 아주 제대로 죽여 달라고 발악하는 거겠구나. 황제님께서 짜증을 내다가 널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릴 게 뻔하다.’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유선은 초심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엘레노어를 통해서 많이 배우고 요령을 터득한 지 오래였다. 적당히 장단에 놀아 주면, 그것도 금방 눈치채기에 가끔은 압도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그림을 만들어 그녀가 순순히 게임을 즐기게 했다.
그 석상들의 비웃음은 모두 빗나간 셈이었다. 유선은 그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제는 인정들 하죠?”
“그래, 졌다. 네 승리로군.”
“진작 진 게임이었지, 크헬헬.”
석상들은 전에 보이던 살기들이 완전히 사그라진 채로 유선의 말에 껄껄 웃었다. 지금 인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완전히 꼬리를 만 것은 마지막으로 중얼거리고 난 이후였다. 그 이후로는 유선의 능력을 모두 인정키로 했다.
그들의 인정을 얻으며, 동시에 황제에게도 상당히 많이 다가간 상태였다. 유선도 여인이 자신을 대하는 데 차츰 허물이 없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죽는 줄 알았지······.’
유선은 지난날을 떠올리며, 허탈하게 미소 지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지만, 그 순조로운 상황도 결코 거저 얻지 않았다.
유선은 여인을 따라가려고 잠과 시간을 포기하고 희생했던 것을 떠올렸다. 순수한 노력으로 손쉽게 한 것처럼 보였지만, 유선도 현재까지 오는 데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히 일찌감치 낙오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다 이 팔찌 덕분이다.’
코스가 준 경고용 팔찌. 여인의 감정 변화가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위기에 처한다면, 어김없이 세계선이 바뀐다고 알려 주어 적절하게 대처했다.
심지어 잠자는 틈조차 세계선이 바뀐다고 경고해 오니, 결코 잠조차 편하게 자지 못하고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새부터인가 덩달아 잠을 함께 자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