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60. 거부할 수 없는 선택 (1)
정신을 차리고 보자, 반지를 끼던 손은 더는 수정구를 만지지 않았다. 룸 카페 그대로였고, 자신이 오던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다.
“하아······ 하아······.”
유선은 식은땀에 젖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축 늘어진 채로 벽에 기대었다. 졸음과 피로가 몰려와 눈꺼풀을 잡아당겨 내리려 들었다. 그래서인지 공간이 일그러져 보였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흩어지는 감각 속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것은 귀뿐이었다. 청각에 모든 게 집중되었다. 고요함. 그 잔잔한 호수 속에 떨어트리는 물방울처럼 울려오는 발소리.
발소리는 점점 커지며, 유선에게 다가왔다. 자신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유선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반투명한 유리창을 보았다.
그 유리창 너머에는 커다란 형상이 서 있었다. 딱 보고 느낀 것은 그것은 인간이 아님이 확실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 문 앞에 섰다.
덜컥-.
손잡이에 걸린 잠금장치가 걸려 있을 터인데, 매끄럽게 당겨 밀어냈다. 유선은 그 얼굴을 보았다.
흐릿했다. 만약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알아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사람은 이질적이었다. 유선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거대한 몸을 지닌 노인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뭔가 엿보는 듯한 기운이 있다 했는데, 그거 네가 했느냐?”
유선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떠한 형태로든 뭔가를 하기엔 힘이 부족했다. 노인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하기야 멋대로 시공에 간섭하려 들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노인은 유선이 건드리던 구슬을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들어 올려 그것을 확인했다. 그의 짐승 같은 눈이 구슬을 깨트릴 듯이 노려보았다.
“흠······, 이것이 원인이겠구나. 하지만 이 사태를 만들어 놓았다기엔 부족한데······.”
노인은 구슬을 거두어 감과 동시에 유선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더듬다가 오른손에 낀 반지를 만지고는 잠깐 멈칫했다. 유선의 오른손을 올리며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이거로군. 간섭하려 들었던 그 근원이 말이야.”
가져가지 마! 소리치고 싶지만, 유선에게 그런 힘은 없었다. 유선의 손가락에 달린 반지가 조용히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것이라고 소리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반지도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원인을 제공한 유선이었다.
노인이 반지를 뺀 것은 단순히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유선을 들고 가는 것에 변수를 두지 않으려는 안전 대책일 뿐.
“겁도 없이 시간에 손댄 것에 정당한 대가는 치러야지.”
노인은 그대로 유선을 짐짝처럼 어깨에 걸쳐 들었다. 그리고 유선은 의식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
“으으으······.”
몇 시간이 흘렀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유선은 어질한 머리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야, 여긴?”
주변이 온통 하얬다.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빛이 반사되지는 않았다. 유선은 몸을 일으켜 앞을 보았다. 하얀 공간 속에서 누런 원목 기둥 두 쌍이 비스듬히 세워진 것이 보였다. 유선은 그 기둥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유선은 두 가지를 알았다.
그것은 의자 다리였다는 사실과 키보다 한참 위에는 그림을 그리는 소녀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유선은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푸른색 머리, 몽환적인 하얀색이 넘실거림. 검은 눈, 우주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만약 세상을 표현했다면, 그 모든 것을 담은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 소녀가 그림을 그렸다. 커다란 캔버스 위에 푸른 바탕을 깔고, 팔레트에 색깔을 찍으며 열심히 그려 내었다.
‘나를 납치한 사람과 관계된 인간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한눈파는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했다. 그렇게 유선이 움직이려 발을 옮기자, 널브러진 페인트 통 하나가 발치에 닿았다.
깡! 깡!
페인트 통이 굴러 이동하면서 서로 닿아 소리를 요란하게 내었다.
‘이런 게 있었어?’
바닥을 내려다보니 페인트 통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한한 공간 속, 시야에 잡히지 않는 곳까지 많은 페인트 통이 굴러다니고 널브러졌다. 그것과 비슷한 숫자로 같이 널브러진 나무 의자도 있었다. 그 소녀가 앉은 의자와도 비슷했다.
“일어났어?”
소녀가 물었다. 그림에 눈을 떼지 않지만, 그것은 유선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알았다.
“어, 응.”
유선은 거역할 수 없는 듯 대답했다.
“그렇다면 페인트 좀 가져다줘.”
“페인트?”
“네 발치 아래에 있는 거.”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유선의 발아래에 정말로 비지 않은 페인트 통이 보였다. 검은색이었다. 유선은 그 페인트 통을 들고 소녀에게 다가가 건네주었다.
“여기.”
유선의 키보다 한참 큰 의자였기에, 페인트 통을 번쩍 들어 올려 보지만,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소녀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지닌 붓의 밑 부분을 손바닥으로 탁 치자, 접이 봉처럼 길게 늘어나며 고리가 생겼다.
소녀는 보지도 않고, 유선이 선 곳에 정확하게 고리를 내리고, 페인트 통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 의자에 걸린 수많은 페인트 통 중 하나처럼 의자 한 곳에 걸렸다.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어려워. 망친 그림을 다시 그린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란 말이지.”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붓을 팔레트에 찍어 굳혀 놓고, 그대로 의자에 걸어 두었다.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야.”
소녀는 그 누구를 지목하는 듯이 몸을 돌려 유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과 억양이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게이브.”
그러자 백지 공간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유선이 본 페인트 통과 의자들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그 노인도 똑같았다.
‘이 사람은······.’
유선이 기절하기 전에 언뜻 본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유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시하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회수해 온 것들을 넘겨줘.”
“명령대로.”
게이브라는 노인은 주머니를 하나 양손으로 들어 올려서 바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소녀는 그것도 능숙하게 고리를 이용해 건져 올렸다. 속에서 물건을 꺼내었다. 유선이 가지던 아르젤의 수정구와 교감 반지였다.
“이것들이었구나!”
“그것들, 돌려줘.”
유선이 소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소녀는 유선의 키에 닿지 않을 만큼 높이 있어 그가 어린애가 바동거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싫어. 네게 돌려줘서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소녀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유선에게 말했다.
“바벨탑을 지으려다가 화만 불러일으킨 어리석은 인간들에 관한 신화처럼,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드는 나쁜 아이가 있으면, 그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지, 안 그래? 그러니까 이건 몰수야.”
유선은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섣불리 뭐라 하지는 못했다. 그녀 옆에 선 덥수룩한 노인의 몸집은 유선의 배가 넘었고, 그의 머리통을 무자비하게 썰어 버릴 검도 지녔다.
꼭 노인이 있기에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녀도 위험하다고 그녀 자신이 감히 말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야? 여긴 어디고,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 속셈이지?”
“질문은 한 개씩만 해. 어차피 내가 있는 한 네게 시간은 많아.”
그렇게 말했지만, 유선은 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소녀는 미소 지으며 유선의 질문 중 하나에 대답했다.
“나는 코스, 시간의 감시자이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나부랭이야.”
그리고 소녀는 자신이 가진 봉으로 노인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 녀석은 게이브. 내 명령이라면, 목숨도 바칠 내 충직한 종이지.”
“······.”
노인은 말하지 않으며, 고개를 까닥여 예를 취했다. 소녀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유선과 자신이 있는 곳을 소개했다.
“그리고 여기는 나의 공간, 시간의 틈이라고 부르면 돼. 무수히 많이 이어진 시간 사이에 있는 아주 자그마한 틈이고, 그 틈 속에 담긴 무한한 공간들이야. 그리고 마지막은 뭔지 너도 알겠지?”
시간을 간섭해 데려왔다. 그렇게 말했으니 그런 것이리라.
“난 말이지, 뭔가 재밌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절망이든, 희망이든, 어떤 형태든지 상관없어. 내게 재밌는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어.”
코스가 히죽 웃었다. 유선은 이빨을 갈며 그녀에게 물었다.
“네 장단에 놀아나 달라?”
“흐음······, 그런 의미로 받으면 좀 그런데?”
코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동시에 씨익 웃었다. 어린아이의 웃음이라기에는 소름 끼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네가 내 그림에다가 후춧가루를 뿌려서 멋대로 간을 해 버린 탓에 국이 엄청 짜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물을 끼얹어서 밍밍해졌다고 해야 할까?”
유선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로 코스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면 분명히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에.
그런 표정으로 코스는 유선을 노려보다 코웃음을 치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너는 근래 내 심기를 거슬리게 한 유일한 인간이야. 금기라는 시간을 뛰어넘으려는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개짓거리를 했으니 말이지.”
역시 그건 시간을 넘은 거란 말이었다. 그것까진 알겠지만, 그 해답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 갔다.
‘어째서 내가 그들의 일원처럼 여겨지지?’
아르젤을 제외하고, 장군이나 다른 병사들은 마치 원래 안다는 듯이 굴었다. 절대로 이름을 언급하는 일은 없었지만, 유선은 그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코스는 그 생각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대답했다.
“당연히 네가 수작을 부린다는 걸 알 때부터 진즉 대책을 세워 놨지. 기억에 조작하고, 옷차림도 그 사람 중 하나로 바꿔 버리고 말이야. 바로 죽여 버리는 게 가장 쉽고 빠른 선택이지만······. 그러는 것은 세상을 만드는 데 썩 좋은 일이 아니니까.”
더 골치 아파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본래라면 이 차원 속에 가둬 버려서 이대로 영영 본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순리지만······. 내가 주는 임무 하나만 완수해 준다면, 얌전히 풀어 줄게.”
우위를 점한 듯한 그 표정. 유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임무를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데?”
유선은 그 일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코스라는 소녀의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아 무서웠다.
“호오? 거절할 의사를 생각했다 이 말이지?”
그러자 코스는 그 질문이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 웃으며 그것에 대해 대답했다.
“그렇다면 너를 그냥 풀어 줄 거야.”
“무슨······ 말이야?”
뭔가 다른 짓을 벌일 생각처럼 굴더니 순순히 풀어 준다는 말에, 유선은 불안해 코스에게 물었다.
“네가 벌여 놓고 거두지 못한 책임을 지는 것이지. 모든 것이 순리로 일어나도록 말이야.”
코스는 알았다. 유선이 절대로 거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코스는 봉을 들어 커다란 원을 하나 그렸다. 그러자 그 후크의 가운데가 황금빛을 내며 궤적을 만들어 깔끔한 원이 완성되었다.
그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가 영상처럼 띄워지며 유선에게 보였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본 유선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저건······.”
자신이었다. 유선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다른 것이라면, 유선이 평소처럼 아이들을 끼고 다니며 분주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이 보였다. 좁은 단칸방에 삶에 회의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