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59. 시간과 교감 (3)
유선은 아르젤의 말대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기대었다.
“성녀님······.”
“이대로 가만히 있어 주세요.”
아르젤이 어째서 자신에게 기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이미 타락해 버렸습니다.”
“타락?”
“세 명의 기사들의 마음속에서 어둠이 보여요. 자신들을 믿고 따라온 형제들의 타락이 원인이겠지요. 곧 있으면 그 어둠에 잠식되어 버릴 거랍니다. 이 상황에서 희망의 끈을 놓치고 말 거예요. 곧 있으면 이성을 잃을 겁니다. 언제 제게 칼을 들이밀어도 이상하지 않답니다.”
그렇기에 믿을 것은 두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장군에게 기댈 수는 없었다.
“단장은 지금 상황에서 냉정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분명······히 저를 지키지 못했다고 후회하며, 판단이 흐려질 겁니다.”
“지키지 못했다니, 그건 무슨······.”
무슨 소리냐고 말하기도 전에, 유선은 아르젤이 맞댄 복부 쪽에서 뜨겁게 뭔가 흘러나옴을 느꼈다.
“지금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작은 날 덩이에 당했으리라 아무도······ 상상 못 하겠지요.”
아르젤은 아주 조심스럽게 감추던 손을 보였다. 피가 묻어 나왔다. 그리고 유선은 아르젤의 피가 피부로 느껴졌다.
“얼른 치유하지 않고······.”
“무리랍니다. 교황은 이미 모든 것을 생각해 두고 왔습니다. 저를 무조건 죽이겠다는 악의, 그 악의를 독으로 만들어 제게 치유할 수 없는 저주를 심었지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이라고 손짓하기에······. 이대로 저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예정된 운명이었죠.”
아르젤은 단념하며 미소 지어 보였다. 피가 흐르면서도 꿋꿋한 정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기분 나쁜 장소에서 신을 찾아 성녀로서 발탁받았으리라.
아르젤이 죽는 것은 예견된 일. 어쩔 수가 없었다.
“다니엘, 클로젯, 그리고 맨슨.”
“네, 성녀님.”
세 명의 기사는 성녀의 부름에 응답했다.
“제 방으로 가 주세요. 제 방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방 말입니까?”
“네, 그 안에 제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들이지요. 부디 페르아의 수호검으로서 그곳으로 먼저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들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아르젤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지키는 것도 자신들의 일이었으니까.
아르젤의 명령을 받아들인 세 명의 기사는 그렇게 밖으로 먼저 뛰어나갔다. 그렇게 타락할 세 명의 기사를 떨쳐 내는 데 성공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유선은 아르젤에게 물었다.
“부디 저를 이대로 안아 들어 주십시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가 비틀걸음을 걷지 않도록.”
유선은 아르젤의 말대로 그녀의 몸을 들었다. 그러자 장군이 그 행동을 보며 발끈하고 화를 냈다.
“성녀님을 함부로 안아 들다니, 이게 무슨 짓······.”
“침착하세요. 제가 해 달라고 했습니다. 발목을 잡을 것 같기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했으니, 너무 무어라 하지 말아 주세요. 지금 실력으로는 그대만 믿을 수밖에 없답니다.”
“······.”
성녀의 선택이라기에 어쩔 수 없이 유선에게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성유물도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그 성소로 가요.”
“그 성소라 하면······.”
“네, 제가 한 줄기 희망을 잡았던 그곳으로······.”
유선도 그곳이 어딘지 알았다. 사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군은 앞장서서 성소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유선은 아르젤을 안아 들고, 그의 뒤를 정신없이 따라갔다.
장군이 앞길을 트며 유선과 아르젤이 지나갈 길을 만드는 동안, 아르젤은 유선에게 안긴 채로 말했다.
“잘 들으세요, 이방인이여! 제 목숨도 이제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저를 제단으로 데려가서는 이 스태프를 들고 다른 교단으로 가셔야 해요. 그곳에 마지막을 맡겨야만 합니다.”
아르젤이 쥔 스태프. 그것은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지팡이임을 알았다. 아르젤의 목숨을 대신해서 힘을 가져다주는 저주와도 같은 지팡이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입구는 막혔고, 다른 침입 가능성은 모두 부숴 트려 버렸다. 이곳에서 나갈 길은 없었다. 엘레노어가 있을 때는 제단을 부수고 나가는 방법으로 가능했지만, 유선이 일개 병사의 몸으로 그것을 이길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 길을 당신은 알 테지요.”
유선이 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걸 어디로 가져가야 아르젤이 준 임무를 완수한다는 말인가!
그들은 더는 묻지도 못하고, 대답도 하지 않으며 성소에 도착했다. 불쾌함이 가득한 공간 너머 아주 신성한 그 성소였다. 유선이 처음 환영처럼 봤을 때의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
그것을 파괴하려고 해머를 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다.
“이 망할 놈들!”
장군은 성소를 파괴하려고 드는 불한당들을 거침없이 베어 버렸다. 망치를 든 병사들의 목이 몸과 분리되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간발의 차로 파괴되기 전에 도착해, 성소는 원 형태를 유지했다.
“성녀님, 도착했습니다.”
“······.”
“성녀님······.”
“······.”
아르젤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이 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유선의 가슴에 파묻혔다. 기절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죽음이 분명했다.
아르젤은 그대로 죽었다. 자신의 스태프를 꼭 쥔 채로 영원한 잠에 빠졌다.
“성녀님은······ 그대로 갔나?”
“······그렇습니다.”
유선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장군은 탄식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장군은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고 다짐했기에, 마지막까지도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그래, 애송이. 마지막 말이라도 들었을 테지. 그게 뭔가?”
“저보고 스태프를 가지고 이곳을 벗어나라 했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으라고······.”
유선은 그 희망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주인이라도 찾으라는 의미였을까? 그러자 장군은 그를 보며 그렇군, 이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은 쉬지 않고, 대검으로 후벼 파던 시체들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 내가 이곳을 막겠다.”
“그게······. 혼자 힘으로 가능합니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었다. 장군이 언제까지고 버틸지 몰랐기에, 유선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언제부터 애송이에게 걱정이나 끼치는 몸이 되었는지 모르겠군.”
사내는 같잖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이 나의 사명, 이미 목숨은 여신께 바치고 왔다. 그러니, 더는 이생에는 여한이 없다.”
자신이 죽인 병사들의 시체를 일렬로 늘어놓고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아직 그가 만든 커다란 벽은 무리였다.
그것은 분명히 이곳으로 오는 자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무덤이었으리라.
“이 자리는 내가 지키겠다, 어리바리한 애송이. 그러니까 너는 이곳을 나가라. 이곳을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라. 페르아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면, 소렌, 소렌도 되지 않는다면, 투르다에게. 누구든 불러와라! 이 악을 막을 것들을 말이다.”
또 다른 희망을 찾으려고, 사내는 굴복하지 않았다. 유선은 그 외침을 듣고 정신이 고무됨을 느꼈다. 그 엔딩을 아는데도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가리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 같았다.
유선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또 다른 출구를 찾으러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마냥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르르르······.”
길목을 막는 지배당한 병사들과 마주했다. 그들은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유선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을 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예전에 반응하던 스태프도 이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고, 마나도 반응하려 들지 않았다.
유선이 지팡이를 처음 잡았을 적에 아르젤이 한 말을 떠올린다면, 이게 원래 맞았다.
“죽어라!”
“웃!”
유선은 지팡이와 검으로 그 일격을 막아 내고 떨쳐 내 버렸다. 그리고 보인 틈을 이용해 그것의 목을 베어 넘겨 버렸다.
답은 하나뿐이었다. 검으로든 어떻게 버텨 내어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종말이 다가온다!”
“종말! 종말을 받아들여라!”
쉴 새 없이 몰려오는 병사들. 그전까지만 해도 수성하려고 버텨 오던 병사들이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유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들어올 때는 그렇게 순조롭던 곳이 나가려니 이렇게나 어렵다니!’
말 그대로 물밀 듯이 왔다. 10분이 지나도 달려오는 병사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았다.
좀 더 강했더라면, 이것을 돌파했을까? 아니, 그래도 이것들을 모두 이겨 내기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유선은 이 모든 것이 설계되는 것같이 느껴졌다. 운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굴복하는 인간의 모습 같았다.
지쳐 갔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몸이 움직여 가는 게 힘들어졌다.
정신력, 정신력으로 모든 게 가능했다. 정신 차려라, 정유선.
그런 말이 있었지만, 몸은 이미 한계였다. 그것이 모든 정신력을 끌어모아 버틴 결과였다. 새로운 희망. 유선은 그것을 위해서 스태프를 다른 교단으로 전달해야만 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였고, 유선은 한순간 정신이 팍 드는 것을 느꼈다.
회광반조라는 것인가! 사람이 목숨을 잃기 전에 극한의 에너지를 끌어온다고 했다. 안타까운 것은 반전을 노리는 그런 반짝임이 아니었다. 유선은 그 번쩍거리는 정신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쿨럭.”
유선의 가슴이 꿰뚫렸다. 체력을 버티지 못하고, 미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병사가 다시 일어나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뒤틀리는 감각이 유선을 아프게 했다. 유선은 힘이 빠져나감을 느끼며, 그가 쥔 스태프도 그만 놓고 말았다.
“아······.”
스태프가 또르르 굴러갔다. 그것이 굴러간 자리로 눈을 돌렸다.
익숙했다. 여기가 어딘가 눈을 돌려 보니, 엘레노어가 천장을 뚫고 온 장소와 똑같았다. 그리고 스태프를 발견한 장소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였다. 문이 부서지고, 시야 속에는 지배당한 병사들이 떼 지어 달려갔다. 그들 중 일부는 창고를 털 것이고, 일부는 모든 성물을 파괴하고, 또 일부는 분명히 아르젤이 있는 장소로 달려갈 것이다.
유선은 그다음 장면을 알았다. 이대로 침공을 끝마치고, 다시 돌아갈 것이다. 성녀, 아르젤은 장군의 손에 의해 지켜질 것이고, 성녀의 집무실에는 기사들이 타락한 언데드 시체가 되어 그대로 자리를 지킬 것이고.
스태프는 저 자리에 있었다. 아르젤의 영혼이 담긴 채로······.
유선은 그 속에서 마지막으로 의문이 생겼다.
이것은 누군가의 몸에 들어가 자신이 조종한다고 여기는지, 아니면 이것이 자신의 의지를 가진 완전한 자기 몸이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답해 줄 것은 결국 아무도 없었다. 유선은 꿈속에서 헤매다가 깨어나듯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