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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시간과 교감 (2) (11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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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시간과 교감 (2)

홀렸다.

뭔가에 단단히 홀려 버렸다······라는 그런 느낌이었다.

잠을 깨듯 팍하고 오는 줄 알았지만, 유선은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장면이 바뀌며, 그것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고 서서히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이 사라지게끔 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유선의 머릿속에는 더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이건 무슨······.”

그리고 그럴 생각도 할 게 아니었다. 분명히 그 수련을 하겠답시고, 자리 잡은 곳은 자신의 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선은 일어섰고, 그것뿐만 아니라 세네타의 방이었다. 세네타는 미라와 수행하면서 동시에 인간들의 힘으로는 클리어할 수 없는 던전들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공간에 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제시하듯 유선의 앞에는 구슬이 있었다. 유선은 그 구슬이 뭔지 알았다.

“이게 왜······?”

아르젤의 지팡이, 구슬. 그게 어째서 유선 앞에 있을까? 둘러보니, 세네타의 서랍 안에 있는 그대로였고, 유선은 그 수정구를 꺼내려고 손을 댄 것만 같았다.

조금 전의 목소리. 그건 분명히 유선의 귓가에 소용돌이치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마치 그 현실에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슷한 것이라면, 미라를 쫓을 때 썼던 흔적과 유사했다. 하지만 미라가 남기고 간 자취에서 느낀 것보다 더욱 강렬했다.

유선은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 과거를 느꼈다. 그것을 자각했다.

“오빠?”

그때, 문이 열리며 세네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유선은 세네타의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왔니?”

“네, 그런데 제 방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평소라면 남의 방에 잘 들어오지 않는 유선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게······. 혹시 여기에 뭐 더 필요한 건 없나 싶어서 한번 둘러보러 왔어.”

유선은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대충 둘러대었다. 세네타는 그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았다. 유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은 필요한 게 없을 거예요.”

“어, 그런 것 같네. 미안해. 괜히 네 방에 들어와서······.”

“아니에요. 사적인 물건이 있지도 않고 불쾌한 것은 없어요.”

세네타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그래, 편하게 쉬렴.”

유선은 세네타를 방에 두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고는 유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한숨을 내쉴까?

그것은 분명히 수정구를 들키지 않아 안도하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유선은 감춘 수정구를 다시 들어 보았다.

유선은 세네타가 오면서 동시에 수정구를 감춰 버렸다.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고, 가만히 있는지 유선은 알 수 없었다.

수정구를 그대로 들고 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질적인 감각에 이끌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다.

유선은 그 메시지가 듣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 메시지를 홀로 들을 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어딘가에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유선은 밖으로 몸을 옮겼다. 홀로 있을 만한 장소를 모색하려고······.

?????????

유선이 그렇게 찾은 곳은 조용한 룸 카페였다. 칸막이로 방마다 막아 놓은 데다, 조용히만 있다면, 유선이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관심 없으리라 여겼다.

“좋아.”

유선은 수정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둔 반지를 다시 꺼내어, 손가락에 끼워 다시 착용했다.

힘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증폭되는 오감. 그리고 구슬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푸른색 안개가 든 구슬이 뭔가를 보여 주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 손을 댄다면, 분명히 소용돌이쳤던 목소리들이 다시 전장에 선 것처럼 생생해질 것이다.

유선은 마음을 가다듬고, 아르젤의 수정구에 손을 대었다.

집중했다.

그리고 유선이 느낀 꿈속으로 들어가는 그 감각이 한 번 더 시작되었다.

-더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단장님, 다른 곳들을 모두 무너트려 들어올 수 없도록 막았습니다!”

목소리들이 또렷해졌다. 단순한 속삭임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바로 앞, 옆, 그리고 뒤에서 유선을 둘러싸는 것 같았다.

청각이 완전히 잠식되었다고 여겼을 때, 유선은 자신의 시야도 바뀜을 알았다. 작은 단칸방이 점점 확장되고, 한순간 암전됨과 동시에, 형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또렷하게 유선의 눈앞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막는 병사들. 그 너머 속에서 들어오려 몸부림치며 들썩거리는 문. 한순간, 철제문이 고무로 만든 듯 착각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쿠웅!

그렇기에 병사들은 모두 철제문에 기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보다 약한 나무 가구들을 동원해서라도 입구를 틀어막아 버렸다. 그것이 결국 미봉책임을 아는데도.

무엇을 위해 이 신전에 그렇게 목숨을 걸까? 총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상처를 안은 채로 서 있었다. 숨을 쉬기가 버거워 보이지만, 튼튼한 두 다리와 자신의 몸뚱이보다 클 법한 대검을 든 채로 서 있었다. 유선은 그가 장군임을 확신했다. 단순히 견자의 유무 문제가 아니었다. 지휘관은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으니까.

유선은 가만히 지휘관을 보았다. 그러자 장군은 유선과 눈을 마주쳤다. 다른 사람을 보나 했지만, 그가 다가오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완전히 다가와, 자신의 몸뚱이를 붙잡는 것까지 보고 확실하게 자신을 본다는 걸 알았다.

“자네, 여기서 뭐 하나?”

“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해? 기사로서 임무를 해라! 얼른 입구를 봉할 것들을 찾아와!”

장군은 유선의 몸을 내동댕이치듯 밀었다. 그의 지시에 유선은 얼떨결에 다른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처럼 물건들을 끌고 와 쌓는 데 일조했다.

‘나를 어떻게 알지?’

그러고 보니, 유선 자신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었다. 그들 중 하나처럼 보였지만, 전신 갑주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평범한 병사들은 아님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몸에 빙의했다는 말인가! 빙의한 채로 과거의 시간을 경험하나?

“됐어요, 더는 쌓을 필요 없답니다.”

그때, 혼란스러운 전장의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은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지쳐 가는 병사들이 아는 목소리였고, 유선도 그 목소리를 잘 알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이대로 무너질 겁니다.”

아르젤이었다. 그녀가 영체의 모습이 아닌, 순수한 성녀의 복장을 한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세계수의 스태프를 쥔 채로 서 있었다.

“희망을 안고 가야 할 성녀님께서 어찌 우리에게 이런 소리를 하십니까?”

장군이 아르젤의 부정적인 모습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르젤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짙은 어둠 틈새로 흘러나오는 빛줄기 따위가 아닙니다.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이 희망이지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장군도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에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성유물.”

아니, 한 가지가 있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기에, 생각하지 못한 물건이지, 용사가 세계를 구하는 데 실패하면 악마의 힘이 닿지 않도록 결계를 치도록 해 놓은 물건이었다.

“성유물이라면, 이 난관을 벗어날지 모릅니다.”

그의 말에 아르젤이 미소 지었다. 가능성을 찾아 기뻐했다.

“그렇다면 성유물을 찾을 곳으로 가 보지요.”

“성유물이라면, 분명히 창고 쪽에 있을 겁니다. 다니엘, 클로젯, 맨슨, 그리고 자네도! 따라오게!”

마지막으로 유선까지 지목하며, 성녀를 호위하는 데 도왔다.

쿠웅! 쿠웅!

부서질 것처럼 움직이는 문을 애써 무시하며, 그들을 따라갔다. 그렇게 그들을 따라 뛰어갈 때, 주변 풍경이 낯설지 않은 것을 보고, 유선은 여기가 어딘지 금방 눈치챘다.

‘페르아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었구나.’

이미 한 번 와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이 앞······ 이 앞이라면······.’

유선은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지 알았다. 무수한 뼈 무더기, 그리고 녹슨 칼들의 흔적, 서로를 찔러 죽이며, 피를 흩뿌려 양분으로 만들던 그 자리.

그것이 아마 이때 일어났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선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잠잠해야 할 창고 안에서 비명이 흘렀다. 그리고 그 밑으로 내려가자, 참혹한 살육의 현장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내 거야!”

“이 금들은 모두 내 것이다!”

“욕심만 가득한 늙은이 같으니!”

“그렇다면 죽어라, 너도!”

“히히힛!”

처음에는 물욕으로 인한 약탈, 그리고 더욱더 가져가고 싶은 탐욕으로 이어 갔으며, 그 탐욕에 이성이 잡아먹혀 그대로 검을 들었다.

죽여라! 그리고 뺏어라!

그 논리로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한 손에는 황금 무더기를 들고, 한 손은 단검과 피. 그리고 탐욕을 쥔 채로 서로를 겨누었다.

그 광경은 전후 사정을 모르는 유선도 알았다. 이 신전은 이미 타락했다. 타락조차 자각하지 못하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했다. 그 많던 금과 재물들이 피로 물들어 가고, 무아지경으로 도달하고, 서로 본 목적마저 잃게 했다.

“캬아아악!”

“이런 씨X!”

장군은 커다란 대검으로 성녀에게 검을 들이미는 성직자의 목을 베었다. 탈출할 수 있는 성유물조차 가져갈 여건이 되지 않았다.

타락한 성직자와 신도들을 보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장군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성유물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돌파해라! 이성이 없는 이 괴물들을 모조리 죽여라!”

기사들은 황금에 광기를 흘리는 이들을 모두 무자비하게 베어 버렸다. 그 과정은 유선도 함께 참여했다. 검으로 같은 사람을 죽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살아야 했기에, 그들을 죽여야만 했다.

그렇게 내부 성직자들이 모두 죽어 나갔고, 한 명만 남았다.

“거, 검을 거두어라! 죽이지 마라! 나는 아직 타락하지 않았다!”

그 남은 이는 공교롭게도 교황이었다. 그들은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을 보고 검을 내려놓았다. 아르젤이 교황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죠?”

“모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성녀님, 모두가 제 욕심에 타락해 신을 등 돌리고, 악마들을 섬겼습니다.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단이 이미 진행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의 사상을 흔들고, 신도들에게 신의 얼굴로 위장해 선동했습니다.”

교황은 정신이 완전히 붕괴했다. 현 상황을 이겨 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교황은 아기처럼 아르젤에게 기어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아아, 성녀님. 우리는, 우리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아르젤은 성녀였다. 그리고 그 성녀답게 미소 지으며, 교황에게 희망을 심어 주려고, 절망하는 교황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페르아 여신님은 언제나 미소 짓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려고 노력하실 겁니다.”

숨죽여 우는 교황의 등을 포개며 조심스럽게 그를 달래었다. 그런 자상함이라면 분명히 교황도 다시 희망을 찾으리라 모두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소 짓지 않아······.”

푸욱-.

“페르아는 더는 나를 보고 미소 짓지 않아.”

악의 침투는 이미 끝난 상태였고, 그것은 교황에게도 이미 미친 상태였다.

“모든 것은 파멸뿐! 더는 앞은 보이지 않아, 그분의 목소리가 짙어진다, 아아! 크켈켈켈!”

서걱!

유선은 바로 교황의 목을 베어 넘겨 버렸다. 그 목이 기괴한 웃음을 지은 채로 꿈틀거리며 다른 시체들처럼 널브러졌다.

이곳에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내분으로 모두 황금을 탐하며 죽을 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성녀님?”

“네, 저는 괜찮답니다. 다만······.”

아르젤은 묘하게 불안하게 미소 지으며 교황이 있던 자리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르젤의 눈이 향하는 곳은 황금과 거리가 먼 나무 조각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성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성유물은 부숴 버리려고 내려친 흔적이 가득했다. 타락해 버린 교황이 이미 최후의 수단마저 앗아 가 버렸다.

“이런······.”

이제 최후의 수단마저 사라져 버렸다. 장군은 한순간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될까?

아르젤은 뭔가를 참는 기색이 강했다. 그러다가 아르젤은 유선을 보며 유선 이외에 들을 수 없도록 조용히 장군에게 말했다.

“제 옆을 지켜 주세요. 이름 모를 낯선 이여!”

아르젤은 유선을 알아보았다. 다른 기사들과 다르게 페르아를 모시는 기사들이 아니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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