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59. 시간과 교감 (1)
“와응!”
“아야야, 엘레노어. 좀비 너무 아프다. 꼴까닥.”
유선은 대충 죽은 사람 시늉을 하며 놀아 주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본 우스꽝스러운 좀비들과 자신의 이빨에서 나오는 초록 독이 비슷해서였는지, 그런 장난을 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빨과 몸 전체에 퍼진 독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엘레노어가 과감하게 장난쳐 왔다. 그렇기에 물론 유선의 팔은 썩어들지 않았다.
루데릭이 그것을 지켜보다 못마땅한 얼굴로 엘레노어를 보며 경고했다.
“엘레노어, 주인에게 경솔한 행동하지 마라. 아무리 모두 제독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네 이빨에는 시체 독이 심했는데, 무슨 일이 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경솔이 뭐야?”
“바보 같은 짓이라는 뜻이야.”
“바보 아닌데······.”
오르넵토스가 대신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엘레노어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오르넵토스가 직접 확인했다니까, 그렇게 큰 걱정 할 건 없어 보이는데. 너무 과민하지 마.”
“아무리 정령왕이라도, 술주정뱅이지 않으냐? 너무 신뢰하지 마라. 주인도 제 안전을 위해선 조금은 의심해야 한다. 그러다가 대책 없이 당하면 정말로 큰일이지 않겠느냐?”
“요즘 잠잠하다 했더니, 어김없이 시비를 걸어오는구먼. 한판 떠? 엉?”
“알았어, 알았어, 얘들아. 너무 흥분하지 마.”
오르넵토스가 찬찬히 말하며 노려보면, 유선은 진지함을 알고 얼른 중재시켰다. 그들이 어떤 싸움을 벌이든 간에, 엘레노어는 관심 없다는 듯이 유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유선 님, 유선 님.”
“왜 그래? 책이라도 같이 읽을래?”
이미 질릴 정도로 읽은 것 같지만, 부족하지 않나 해서 물어보았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신 고개를 숙여 어디론가 보았다.
쿠션에 자리를 잡아 팔자 좋게 누운 멍멍이였다.
“오랜만에 멍멍이랑 밖에 나가서 놀래!”
흠칫!
멍멍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앳된 목소리에 깨어나고 말았다. 흡사 악몽을 꾼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악몽이 아니었다.
-주인님, 저 방금 이상한 꿈 꿨어요. 막 이상한 악마가 제 이름을······.
“멍멍이랑 놀아야지!”
-갸아아악! 꿈이 아니었어!
멍멍이가 거의 비몽사몽 중얼거리다 질겁하며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재밌게 놀자!”
멍멍이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오늘도 죽어 보자고. 거의 도마 위에 오른 생선처럼 파닥거렸지만, 엘레노어의 품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는 멍멍이를 들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멍멍이의 절규가 애처롭게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루데릭은 한심하다는 듯이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말했다.
“저 아이들은 언제 철들지 의문이구나.”
“한창 그럴 때겠지. 내버려 둬.”
엘레노어가 활기찬 모습이 가장 좋았다. 멍멍이한테는 조금 안타까운 이야기겠지만, 유선은 저 혈기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어?”
루데릭이 자신의 방에 왔음은 어떻게든 일이 있다는 의미였다.
“아, 그게······.”
루데릭은 태블릿을 가져와 유선에게 보여 주었다.
“이번에 신에너지 개발 쪽에 안건이 좋아 보여서 투자해 보려고 한다만, 주인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음······, 글쎄. 네가 말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신빙성이 있을 테고······. 안전한 데다 수입은 확실히 받아 낼 수단일 테니까 그렇겠지만, 내게 물어본 이유가 궁금하네?”
“최근에 그대가 투자에 별로 관심 없어서 이런 게 있으면 알아줬으면 하는 차원에서 말했다.”
동의를 얻으러 왔다기보다는 유선이 제출한 것이 어떤 게 있는지 꼼꼼하게 봐 주기를 원했다.
“투자해 봐. 그런데 나는 그렇게까지 재산을 불려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월급이 쪼들릴 때는 통장을 자주 들여다보았지만, 루데릭이 있는 이후로는 통장을 한 번도 거들떠본 적이 없었다. 돈이 알아서 굴러서 점점 불어나는 데다 자산 관리도 루데릭이 알아서 해 주는 바람에 유선이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덩이처럼 가속해 가는 통장을 볼 때면, 오히려 두려워져서 이제는 볼 수가 없었다.
루데릭은 말을 잘했다는 듯이 유선에게 따졌다.
“주인이 기부니 뭐니 하면서 돈을 자꾸 다른 방향으로 새게 하니까, 이러지 않겠냐? 누구는 이렇게 열심히 벌어 주는데, 그걸 남 준다고 생각해 보아라.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냐?”
유선은 정기적으로 거액의 후원금으로 불치병과 싸우는 사람들이나 소년 가장들을 상대로 도와주었고, 억울한 사람들이 한을 풀도록 전력 서포트해 주도록 거들어 주었다.
그게 단순히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면 좋은 생각이겠지만, 유선이 하는 기부는 정말로 순수했다. 홍보성도 없고,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이 루데릭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거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돈이 흐르는 게 좋으니까 그렇지.”
“인간들은 어차피 이기적이어야 한다, 주인. 재산을 어떻게든 불리려고 애써 보아라. 나누려 하지 말고, 사치와 향락도 하루 정도는 누려 보고, 한 번도 제대로 못 한 연애 같은 것도 해 보면 좋지 않겠느냐?”
“사치 부리는 건 내 타입이 아니라서. 연애도 뭐······ 한 번 정도는 해 보고 싶지만 너희가 있으니까, 별로 생각도 없고. 거기다가 돈은 평생 써도 다 못 쓸 것 같은데, 굳이 뭐 할 필요가 있겠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나눠 줘야지.”
이미지 관리 차원이 아닌 순수한 유선의 생각이었다. 루데릭은 졌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은 내가 없었다면, 다시 거지나 됐을 거다.”
“그래서 매번 너한테 감사하잖아.”
유선은 미소 지으며 허허 웃었다. 루데릭은 매번 유선의 웃음이 좋긴 했지만, 그거로 무마하려고 드는 것 같아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로만 감사한 게 끝인가?”
루데릭은 살짝 유선을 떠보았다.
“흐음······.”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라고 반사적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유선은 지금은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유선은 루데릭에게 이렇게 물었다.
“음······, 언제 한 번 공원에 갈까?”
“공원?”
루데릭의 인생에서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유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둘이서 같이 도시락 싸서, 공원 가자. 햇볕 쨍쨍한 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나무 그늘에 돗자리 깔고 자리 잡자. 그리고 함께 싸 온 도시락을 먹고, 아무 주제나 잡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그리고 눈이 감기면 그 자리에서 자고. 마음대로 하자. 어때?”
매번 시끄러운 기계음과 열대야처럼 뜨거운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루데릭을 볼 때면, 매번 챙겨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고 마주치는 일도 적어서 이야기할 게 적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게 하면 본인이 좋아할 거로 생각하나?”
말은 그렇게 했다. 말만. 루데릭의 머릿속에서 꽃밭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계획을 수정하려 했을 것이다.
유선은 미소 지으며 루데릭에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하는 게 그런 거뿐이네.”
“흐음······, 뭐 그렇다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셈이냐? 본인은 정처 없는 그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루데릭은 그렇게 말했지만, 할 생각이 가득했다. 루데릭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주제들을 대충 눈여겨보니, 찾아볼 수 없는 유선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 많았다.
“어릴 적 이야기도 해 줄게.”
그러자 눈에 띄다시피 반응이 왔다. 떠보려고 간 보던 루데릭의 멘트도 더는 숨길 수 없는지, 직설적으로 물었다.
“약속이다!”
“그래, 약속할게.”
어기면 죽일 것처럼 굴었다. 뭔가 엄청난 이득을 얻어 낸 듯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러면 스케줄을 본인이 한번 잡아 보마. 최소 3일 정도로 잡을 테니, 그동안 알아서 비워 놓아라.”
“그래,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루데릭은 방에서 나갔다. 마음을 봐서는 일주일 내로 시간을 잡을 생각인 모양이었고, 그전에 얼른 일을 해치워 버릴 생각인 듯했다.
유선은 혼자가 되어서는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당장에 기쁜 일들이 많았지만, 마음 한편에 놓아두었던, 생각이 그를 떠나가지 않았다.
-종말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종말의 형태. 루데릭이 말하는 종말의 형태가 대체 무엇일까? 그 주인이 마왕이라면, 왜 마왕의 종말을 반기는 듯 말했을까?
유선은 그 내용을 곰곰이 씹어 보지만, 썩 드는 생각이 없었다. 꾸준히 곱씹어 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다시 서랍장에 책을 꽂아 두듯 놓아두었다.
“단련이나 좀 해 보자.”
유선은 반지를 착용하고 얼마나 더 버티는지 계속해서 개발할 생각이었다. 미라가 자신을 부르던 그 소리를 따라갔을 때, 유선은 그 누구보다 차분해지고, 흔들림이 없었다. 만약 이걸 계속 해내기만 한다면, 반지의 부작용도 막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선은 반지를 착용했다.
-어리석은 놈.
-현석이는 참 좋은 사람이야.
-가끔 어리석어지는 게 참 문제긴 하지만······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해 주면 돼.
-아, 술 마시고 싶다. 친구 불러서 한잔해야지. 기필코 오늘은······.
-주인이랑 나들이라······ 좋아, 일을 빨리 해치워 버리자. 물어볼 것들도 목록으로 뽑아 버리고.
하나는 누구 생각인지 알 것 같았다. 개별적인 목소리마다 하나씩 집중하도록 연습해 보려 하지만, 역시나 그때처럼 극한의 상황에 몰리지 않아서 그런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집중할 목소리. 그것을 찾아야 했다. 먼저 그 최우선으로 잡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미라의 목소리는 뭐와 달랐을까? 왜 그 목소리에서 특별함을 느꼈는가? 유선은 미라가 남긴 기억을 통해서 그녀를 쫓았다.
다른 이들이 남길 수 없는 기억의 파편이 미라만큼은 남겼고, 그것이 유선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것이 극한에 몰린 상황이라 가능하지 않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애초에 특별했다면, 어찌 될까?
처음 시도하는 만큼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선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최대한 생각해 보며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잡아 보려 애썼다.
-아아, 맛있다!
-위험해!
-이번에는 어떤 임무려나? 던전에 들어가기도 힘들어 죽겠다.
-악마들이 쳐들어온다! 도망쳐! 얼른 도망치라고!
-돈벌이가 쏠쏠해서 이 짓도 한 5년만 해 먹고 끝내 버리자. 후우!
-도망치지 마라! 전력으로 막아라, 페르아의 기사들이여!
-신전이 함락될 위기입니다!
“모두 앞을 막아! 입구를 틀어막고, 최대한 버텨라! 교주님은, 교주님과 사제들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먼저 자리를 뜬 것 같습니다.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그 인간들이 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젠장! 우리는 신전과 성녀님을 사수한다!”
“뚫립니다! 입구가 뚫립니다!”
“악마가! 악마가 온다!”
“모두 전투태세로!”
냉정해져라, 정유선.
“허억······!”
주변이 한순간 암전된 것처럼 사라지고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유선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 이상한 감각에 반지를 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