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57. 성검과 자격 (2)
“할 이야기가 뭔지 말해.”
세네타가 먼저 입을 열어 미라에게 이야기를 유도했다.
“우선 이것 하나만 알아 둬. 난 인간이 싫었고, 휘둘리기도 싫었다는 것 말이야. 하지만 이젠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그래서 휘둘리기 싫은 건 어디까지나 능력 없는 것들에 한해서일 뿐이라고 다짐했지.”
“그거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세네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미라가 딱 잘라서 얘기했다.
“사역수로서 계약을 유선과 함께했지만, 검을 사용하는 것은 네가 내 또 다른 주인일 수도 있대.”
“주인······?”
무슨 말인지 세네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미라는 누더기에서 벗어나 준 새로운 옷 윗도리를 벗었다.
유선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서 보이는 굴곡 따위보다 정중앙에 박힌 동그란 구체가 신경 쓰여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가슴에 손을 얹어 봐.”
“······.”
세네타는 미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미라의 가슴에 박힌 구체가 반응했다. 그것은 점점 뽑혀 나오는가 싶더니 검 손잡이 형태를 이루었다.
세네타는 아직 그 손잡이를 쥐지 않은 상태였다. 미라는 가만히 있는 세네타를 보며 한 번 더 말했다.
“쥐어 봐.”
“이걸······ 쥐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악의로 하지 않음을 알았지만, 다짜고짜 쥐라니, 세네타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미라는 한숨을 내쉬며 세네타에게 설명해 주었다.
“용사로서 자격이 있는지, 그것뿐이야. 손만 얹어. 뽑으려고 하지 말고, 넣으려고도 하지 말고. 그저 잡고만 있어 봐.”
미라는 그렇게 말을 줄였다. 세네타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주춤하던 손을 다시 뻗어 그 손잡이를 잡았다.
세네타는 충동을 느꼈다. 아주 한순간이었지만, 그 검을 뽑을 뻔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고, 겨우 검을 가만히 두었다.
미라는 세네타를 보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유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선, 세네타를 도와줘.”
“뭘?”
“지금 계속해서 망설여. 어떤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을 거야. 천천히 손을 떼도록 유도해 줘.”
유선은 미라의 말에 세네타의 얼굴을 보았다. 세네타는 정말로 혼자서 무아지경이 된 채로 검에 집중했다. 그리고 미라의 말대로 조심스럽게 손잡이에서 손을 떼게 하자, 세네타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직은 무리네.”
“말한 대로 나는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미라가 말한 대로 세네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네타의 말처럼 검 손잡이를 잡은 채로 가만히 있던 것은 해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미라의 기준으로는 아니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아직 안 돼. 용사로서 자격이니까. 조금이라도 뭔가 사소한 것에 휘둘린다면, 내 주인으로 인정해 줄 수 없어.”
미라는 세네타가 잠시 고민하면서 느낀 미약한 움직임을 느꼈다. 세네타가 마음에 동요가 있음은 아직 지크벨트만 한 용사는 될 수 없는 거였다.
‘그래도 계속 경험하다 보면, 제 아비 못지않은 사람이 되겠는데.’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세네타에게는 아직 마음가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걸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유선은 세네타를 보며 물었다.
“신기하네. 검 한 번 잡는다고 그렇게 충동적이야?”
“호문쿨루스들이 쓰던 다른 검들보다 심한 것 같아요.”
“그래? 신기하네.”
별별 아이템이 다 있지만, 유선은 그런 기능이 있음이 별로 믿기지 않았다. 안일하게 생각하는 유선이 조금 마음에 안 들어, 미라가 유선에게 물었다.
“궁금하다면 너도 한번 시험해 볼래?”
몸을 틀어 유선에게 보였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상반신 탓에, 시선 처리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미라의 당당한 얼굴에 부끄러워하면 자신 혼자만 민망함을 알기에, 용기를 내었다.
유선이 주춤거리더니 곧 미라의 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세네타가 그랬던 것처럼 비슷하게 침묵이 이어졌다. 눈을 감은 채로 검을 쥐는 유선을 가만히 지켜보았고, 유선은 곧 미소 지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음······, 잘 모르겠네······.”
유선은 그렇게 말하며, 검에서 손을 떼었다. 미라는 그 모습을 보고 내심 놀라고 말았다.
‘잡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는 데다, 스스로 손을 뗐다고?’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심지어 그 지크벨트도 악마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 속에서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유선이 전문적으로 단련되지도 않은 그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데 그랬다는 건 믿기가 힘들었다.
‘아냐. 그저 욕심이라는 감각이 무뎌서 그럴 수도 있어.’
심각한 병을 앓아, 더는 이생에 미련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유선이 그런 사람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자격이 전혀 없거나 완전히 갖췄거나 둘 중 하나일 터인데······. 그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는 유선의 모습에 아리송하기만 했다.
‘약하다, 강하다······ 어느 것도 말할 수가 없네.’
유선은 이상했다. 처음에도 충분히 느끼던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끌렸을 터이고, 위험 대상으로 지목했으리라 믿었다. 미라는 유선이라는 인물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튼 이게 끝인 거야?”
“그래. 그게 끝이야.”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미라는 그의 물음에 얼른 대답했다.
“그럼 이제 옷 입고, 나가 줄래?”
이야기가 끝났다면, 세네타도 더는 미라를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미라는 손잡이가 돋아난 것을 다시 밀어 넣으며 윗옷을 다시 걸쳤다.
그동안 세네타는 수련을 준비했다. 유선이 누구보다 피곤함을 알기에, 세네타의 행동을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씻고 좀 쉬지, 그러니?”
“아직 쉬기는 좀 불편해서요. 조금만 검 연습하고 그만둘게요.”
자기 힘으로 제대로 쓰러트린 악마가 없다는 것이 세네타에게는 아직 충격이었다. 만약 지반이 약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미라와 대전을 계속 치렀다면, 그녀를 이길 방법은 과연 있었으며, 유선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에고르트 또한 과연 이겼을까 생각했다.
세네타는 아직도 자신에게 부족함이 많음을 인지했다.
그렇게 얘기할 때, 미라가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수련이라······! 그렇게 해서는 백날을 해도 실력이 질 것 같은데.”
“······뭐라고 했어?”
미라가 스쳐 지나가듯이 중얼거렸지만, 세네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세네타의 눈이 번뜩였다. 아니, 평소와 같은 눈이었지만, 그 속에 묘하게 자극되는 게 보였다. 경쟁심이 분명하리라.
“그 검법. 내가 보기엔, 지크벨트가 쓰는 것보다 한참 별로였으니까. 베는 맛이 없다고 할까, 절명시키기엔 부족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미라는 자신이 느낀 팩트로 세네타를 찔렀다.
“아버지 검술이 큼직큼직한 동작이 많긴 해. 그래서 그렇게 좁아터진 동굴 속에서는 그렇게 쓸 만한 검술이 아니거든. 그래서 나는 스타일이 다른 거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큼직한 움직임이라도, 네 아비는 힘으로 밀어붙이던 남자야. 고작 그런 거로 핑계를 대는 인간이 아니라 무지막지한 놈이라고. 아비가 딸을 너무 사랑해서 잘못 가르친 것 같네.”
“아버지는 언제나 엄했어.”
“그래서 나를 이겼나?”
서로 닮은 얼굴이 노려보았다. 격투기 시작 전에 서로 아이 콘택트를 하는 것처럼 두 눈에는 스파크가 튀었다.
분위기가 험해졌다. 보통 같으면 말려드는 게 맞겠지만, 유선은 계속 지켜보고 생각하다가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며 제안했다.
“얘들아, 적어도 아래층에 내려가서 서로 싸워 보는 건 어떨까? 거기는 안전하기도 하고, 목검이나 죽도 들고, 누가 강한지 겨룰 만한 장소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검사들 트레이닝 룸은 아주 견고하게 설계되어, 그들이 진심으로 덤벼들어도 목검이나 죽도 따위로는 부서질 일은 없을 것이다.
미라와 세네타는 유선의 말을 듣고 일리 있는 말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거로 할게요, 오빠.”
“장소를 따로 정한다고? 그래서 거기로 어떻게 가지?”
“세네타가 안내해 줄 거야. 같이 가서 치고받고 싸우고······ 무너트리지 않는 선에서만 좀 해줘.”
아무래도 싸움을 지속하면 감정이 격앙되는 경우도 있기에, 유선은 그 부분에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쪽으로 와.”
세네타의 목소리에 묘하게 힘이 실린 채로 미라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미라는 방을 나가며 유선에게 슬쩍 눈짓했다.
유선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고맙다는 의미였다.
유선은 왜 미라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았다.
‘대련해서 약점을 파악할 생각이구나.’
도발은 의도적이었다. 미라가 세네타보다 강함은 이름을 알 때부터 흘러들어 온 기억이었다. 그녀를 향한 적의가 아닌 순수한 의도였다. 자신은 아직 쥘 만큼 실력이 안 되니, 그 실력을 최소한 맞추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스승으로 모시고 싶겠지만, 그래도 세네타의 처지에선 미라는 라이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라이벌을 감히 스승으로 모시고 싶을까? 그래서 미라는 도발했다.
‘지금껏 대적해 온 것 중에서 실력이 엇비슷하다 싶은 애들도 없었으니까.’
미라가 그런 감정을 품는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고 여겼다. 세네타는 미라에게 도전할 것이고, 그 도전을 감행하면 할수록 미라도 성장하고, 동시에 세네타도 성장할 계기를 보일 것이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유선은 하루 동안 보지 못한 루데릭의 얼굴을 보러 발을 옮겼다. 그의 방에는 언제나 시끄러운 팬 소리가 문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유선은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었다.
“누구 멋대로 내 방 문을······ 아, 주인이구나. 무사히 돌아왔구나.”
“다녀왔어.”
루데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선을 반겼다.
“매번 도와주는 게 없어 미안하구나.”
“됐어. 어차피 너는 여기서 이렇게 일해 주는 것만으로 너를 보여 주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유선은 루데릭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데릭은 유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고르트, 그 늙은이를 없애 버렸더구나.”
에고르트의 죽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악마에게는 서로 간 죽음을 공유한다고 하였으니, 에고르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됐어.”
“그래, 그러면 됐다. 아버지를 따르던 놈이라도 지금은 주인의 안위가 내게는 먼저니 말이다. 그 늙은이의 운명이야 어차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었으리라 믿었으니, 신경 쓰진 않는다.”
그렇게 말했지만, 루데릭도 악마였다. 그리고 마왕의 자식이었기에, 에고르트에 관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따르던 유일하다시피 한 충신이었으니······. 본인도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좀 그렇구나.”
에고르트가 마왕의 충신임은 포어셰크와 있으면서 이야기했다. 다만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선은 그런 에고르트가 만들었던 미라의 성격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그런 유일한 충신이 자기 왕에게 반기를 드는 생명체를 만들었다?”
“무슨 말이냐? 에고르트가 그런 물건을 만들었단 말이냐?”
“내가 알기론······.”
유선은 미라에 관해서 얘기해 주었다. 성검 아발트가 바로 그 여자였고, 미라라는 이름으로 이제 더는 인간들에게 증오를 품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아 내었다.
유선은 똑똑히 기억했다. 세네타가 미라를 주인님을 향한 반기가 바로 마스터피스라는 말과 종말의 형태가 바뀌었다면서 중얼거렸던 소리를 말이다.
“성검······ 성검이라!”
루데릭은 성검이 마음에 걸려 중얼거렸다.
“성검으로 봉한 마왕이었는데, 그 성검을 뽑아냈다는 의미이겠구나.”
“그렇다는 건······.”
그렇다면 그 성검이 없는 마왕은 지금 무엇을 할까? 다시 자유의 몸을 되찾았으니, 마왕은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게 일이 커질까?”
유선이 걱정스럽게 묻자, 루데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주인이 살 때만큼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성검에 꽂힌 채였다는 건 힘이 많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루데릭이 그렇게 말했기에, 유선은 일단 안심하기로 했다.
그때, 루데릭의 책상 위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루데릭은 능숙하게 번호를 확인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어, 왜?”
루데릭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루데릭이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루데릭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누가 거기서 몰래 고기 구워 먹다가 가스 폭발이라도 했단 말이냐?”
하지만 그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니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런데 왜 검 쓰는 나부랭이들이 있는 트레이닝 룸이 폭발해?”
“······.”
그 이유는 유선도 잘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말하기가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