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56. 선택 (3)
쿠웅!
아발트가 바위에 깔렸을 당시. 그리고 유선이 아발트의 목에 검을 꽂아 넣기 전이었다. 유선은 그녀의 목을 겨누던 검을 거두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여인은 수 초가 지나도 자신의 몸에 반응이 없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리고 유선이 무엇을 하는지 시선을 내려 그를 보았다.
유선은 돌을 치웠다. 자신의 몸을 무참하게 깔아뭉갠 그 돌들을 하나씩 치워 냈다. 그 의도는 묻지 않아도 알았다. 자신을 살려 주려는 일이 분명했다.
“어째서······ 나를 살려 주지?”
유선은 바위를 걷어 내며 말했다.
“그야, 이렇게 깔렸잖아요. 이러면 이야기가 제대로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죠.”
바위를 하나씩 던져 냈다. 묵직한 바위가 흘러내려 위험해 보였지만, 유선은 그것도 조심해 가면서 아발트를 구하려 했다.
“이야기하겠다고? 너한테 검을 휘둘러 죽이려 했던 놈을? 그 돌들을 치워 내면 내가 너를 찌를 수도 있어.”
“글쎄요, 제가 당신을 보기엔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네요.”
이미 머릿속에 들어온 그녀는 뒤통수를 칠 만큼 비겁하게 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악마가 싫었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들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 욕망을 부추기는 자신이 더욱더 싫었다. 그녀는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자기혐오가 가득 찼다.
잃게 한 죄악감, 그리고 그로 인한 증오. 그 증오로 인한 잘못된 판단. 뭔가를 많이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 유선에게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을 싫어하는 그 감정은 유선에게 아주 뚜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선인도, 악인도 모두 베는 것은 당연해요. 검은 누구에게나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그건 전부 그 사람들이 감당할 몫이잖아요. 저도 검을 든다면 벨 거예요. 제 욕망을 위해서 말이에요.”
유선은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래서 그 상처를 주는 것이 두려워 소극적이던 나날이 많았다.
유선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양손으로 집었다.
“그건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건 어디까지나아아아아!”
쿠웅!
유선은 간신히 돌무더기 하나를 아발트의 몸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건 다 그 사람 몫이죠. 당신은 그저 저항도 못 하는 상태에서 남에게 휘둘렸으니까······ 애초에 당신에게 잘못은 없어요. 당신 스스로 저주받은 검이라고 욕하지 않아도 돼요.”
“나 스스로······.”
자신을 미워했나? 그렇기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담담했나?
“누군가를 그 욕망에 잘 물들인다면······ 좋은 사람에게 좋은 쪽으로 물들인 채로 있으면 돼요. 그리고 그 좋은 사람에게 물들인 채로 있으면 당신이 미워하던 악마도, 인간도, 그리고 자신도 뭔가 다르게 볼 거예요.”
“당신도 내가 좋게 보리라는 확신은 없다는 말이네. 만약 내가 악마를 좋아하고, 인간들을 미워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유선과 완전히 적으로 지내는 관계가 되어 버리고, 그거로 완전히 자기 생각이 잡혔다면? 유선은 자신이 한 모든 것이 후회로 얼룩졌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몰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유선을 보니 그런 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냥 믿지 마세요. 그건 불안한 것일 뿐이죠. 쓸데없는 거로 불안해하면 스스로 옭아맬 거예요.”
“······.”
유선은 아발트를 깔아뭉갠 돌무더기를 치우려고 고생했다. 말도 하고, 돌덩이도 치우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움직이게 됐어.”
“고마워요. 거들어 줘서······.”
어깨가 드러나자, 아발트는 손으로 자신을 깔아뭉개는 돌 하나를 직접 치웠다. 생각보다 작은 돌들을 치우지만, 아발트가 거들어 주면서 답이 없다고 생각한 돌무더기가 어느 정도 치워졌다.
아발트는 문득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했다. 아발트가 말한 것처럼 유선을 찌를 만큼 손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아발트는 유선을 찌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선이 자신을 살려 주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이딴 인간에게 도움을 받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던 것이······ 어째서 이런 일을 할까?
그거야 답은 당연히 알았다. 이제는 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아발트는 자신의 뒤를 되짚어 보았다. 아주 최근의 일이 아니었다. 더 먼 옛날, 이 대륙이 한창 인간들과 생명으로 가득하던 시절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차가운 냉기의 마찰.
푸른 숲, 맑은 강, 내리쬐는 햇볕.
뛰어다니는 엘프. 까르르 웃는 정령. 투사가 되려고 단련하는 오크.
무리를 이루는 동물.
불타는 성.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
기습과 약탈.
긴 굶주림에 허덕이다 느끼는 만복의 기쁨.
이상과 신념으로 만들어 내는 전쟁.
언젠가는 종식될 피바람.
그리고 오는 평화.
웃는 얼굴.
그 얼굴은 용사와 성녀.
“사는 게 뭐지?”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내뱉는 물음. 삶은 이상했다. 모순도 어쩌면 맞아떨어지고, 가끔 말도 안 되는 것을 해내기도 했다. 단순한 논리도 없이 돌파해 버리는 미련함과 복잡한 공식을 간소화해 내는 천재성이 멀지만 동시에 종이 한 장처럼 여겨지는 그런 것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아발트는 그 궁금증을 내버려 둔 채로 다시 침묵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알고 싶었다. 쓸데없는 증오심에 사로잡힌 채, 가증스럽다 여긴 것들을 베어 모두 없애기보다 생명체로서 살고 싶은 이 욕망이 가장 먼저였다.
“사는 게 뭘까요? 당신도 모르겠죠?”
“······.”
“제가 살아 본 건 겨우 29년 정도뿐이지만······ 그래도 인간으로 29년 정도는 살아 봤어요.”
유선이 돌 하나를 치우자, 아발트의 상반신이 거의 다 드러났다.
“검으로 있으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못 살아 봤다면, 제가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줄게요.”
유선은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발트는 처음 유선을 대면하던 것이 떠올랐다. 이름도, 신분도, 목적도 모르는 자신에게 선뜻 물을 내주던 남자의 얼굴. 그 얼굴에 미소 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리고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유선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럼 이것부터 묻지. 인간처럼 살려면 가장 먼저 뭘 해야 하지?”
“으음······.”
유선은 그 물음에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뭔가 비슷한 답이 생각났는지, 아발트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선 누군가에게 묶이는 연습부터 해 보죠.”
“······.”
여인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자유롭게 사는 것을 생각한 것과 다르게 유선이 한 말은 모순적이라 여겼다.
“묶이라니! 그건 내가 도구로 살았을 때와 다를 게 없잖아!”
“어······ 음······,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만, 좀 달라요.”
“······.”
“······하하, 어쩔 수 있나요. 이게 인간입니다.”
아발트가 째려보자, 유선은 바보처럼 웃으며 아발트에게 말했다.
“예속되기 싫어도 예속되는 운명을 지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죠. 검처럼 누군가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유선이 잘 알았다. 세 아이를 둔 아버지 같은 심정이 뭔지, 그에 묶인 이유. 유선은 잘 알았다.
“다만 다르다면, 인간은 직접 다가가서 스스로 묶이길 바라요. 그러니까 선택하는 거예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 사람을 직접 찾을 수가 있죠.”
유선은 아발트의 상반신을 깔아뭉개는 돌들을 모두 치워 내는 데 성공했다. 아발트가 상체를 들 만큼 어느 정도 비워졌고, 유선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덜 최악인 인간에게 처음으로 묶이면서 관계라는 걸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싫다면 거부해도 돼요.”
그렇게 말했지만, 그 손, 무심코 내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 손은 자신을 예속시켜 버릴 게 분명했다. 저 손을 잡는다면, 자신은 분명히 다시 검이었을 때로 돌아가듯 누군가에게 묶일 것이다. 아발트는 잘 알았다.
그녀는 뜻과 반하는 행동, 특히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는 알 것 같아. 정말 인간들은 뻔뻔하고 질리게 한다는 것.”
하지만 아발트의 손은 이미 유선의 손을 잡았다. 따스한 그 손을 잡은 아발트는 말과 다르게 얼굴은 안심했다.
***
아발트 씨.
아발트라고 부르지 마.
당신 이름인데, 그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내가 붙인 이름도 아니잖아. 나를 싫어하고, 이용하던 놈들이 지은 이름이라서 꺼려져.
그럼 이름부터 하나 새로 지을까요?
네가 지어 줄 거야?
생각해 둔 이름이 하나 있어요. 그 이름이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겠지만······.
일단 말해 봐.
제가 당신을 부르고 싶은 이름은······.
***
“고마워, 미라.”
자신의 몸을 둘러싼 검들에서 벗어나며 아발트, 아니 미라에게 말했다.
그 짧은 대화 속에 에고르트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미라?”
에고르트는 유선이 자신의 피조물을 부르는 호칭을 중얼거렸다. 충격을 받은 에고르트는 어찌 됐든 상관없기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뭘 하면 되지?”
미라가 물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말이다. 자신의 주인님을 향하던 반발. 그리고 그 반발 못지않게 인간들을 증오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걸작품이던 주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아발트가 남과 함께 있는 것을 허락했다?’
그 설계가 무너져 버려 에고르트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보다 더욱더 기분이 나빴다.
“저와 세네타를 죽이려던 자예요.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겠죠.”
“그에 합당한 벌이라······! 뭔지 알겠어.”
그의 몸을 관통하던 검이 뽑혀 나갔다.
분명히 이대로 싸운다면, 제아무리 자신의 걸작품이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해 잠잠하게 해 버릴 것이다. 호문쿨루스들의 기억을 통해 실력은 이미 체크했다. 창조주인 만큼 아발트의 신체가 얼마나 성장했고, 얼마나 성숙했는지 알기에, 아발트는 절대로 자신을 이길 수 없었다.
“미라?”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미라에게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에고르트는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선을 위협하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한 단어만 중얼거렸다.
미라가 팔꿈치에서 다른 검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날이 선 그녀의 검이 에고르트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석!
서걱!
미라가 검을 휘두르자, 팔이 떨어져 나갔다. 검을 쥐던 그 손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더니, 곧 힘을 잃고 사라졌다.
에고르트는 그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 미라는 자비 없이 검을 쥔 손들을 잘라 내기 시작했다. 검이 난무했다. 유선과 세네타를 위협하던 그 이빨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피가 홍수처럼 뿜어져도, 에고르트는 아프지 않았다. 아플 틈이 없었다.
“미라? 그것이 내 걸작품······ 내 걸작품의 이름이란 말이냐? 그것에 응하였다······ 그 말이냐?”
마침내 남은 하나의 팔까지 모두 잘라내 버렸다. 검을 들 손이 더는 없는 에고르트는 이제는 위협적인 악마가 아니었다.
“감히 내······ 내 걸작품에! 이름 따위를······! 붙이다니!”
에고르트는 눈을 부릅뜨며 유선에게 달려들었다.
수백 개의 손, 그 손에 들린 검들은 모두 겨울철 가지치기를 한 것처럼 우수수 잘려 나간 지, 오래. 그런데도 에고르트는 분노에 눈이 멀어 유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더는 가진 것이 없는 에고르트의 돌격은 그저 부나방이 불빛을 따라 뛰어드는 몸짓일 뿐이었다. 유선은 검을 들어 에고르트를 겨누며 말했다.
“내가 이름을 붙여 준 게 아냐.”
그리고 달려드는 에고르트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서걱-.
정확하게 두 동강이 나는 몸. 그 의미 없는 몸짓도 부들거리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직접 선택했어.”
유선은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다. 그리고 에고르트의 심장에서 굴러다니던 붉은 코어가 그의 발치 아래로 굴러왔다.
콰직!
그것도 마저 파괴해 에고르트의 몸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