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56. 선택 (2)
유선은 처음에는 공포를 느꼈지만, 그것도 무거운 돌무더기가 그녀의 몸을 짓누른다는 것을 알기 전이었다. 더는 손쓸 방법이 없음을 알고, 유선은 아발트에게서 벗어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
‘본명은 아발트, 그리고······ 성검?’
아발트가 본래 차단하려 했던 자신의 정보가 유선의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그녀가 사실은 성검이고, 악마의 손에 개조되어 인간이 된 것까지 알았다.
아발트가 황금색 눈동자로 유선을 보며 말했다.
“살아 있었구나. 높이를 알아서 그 정도로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유선은 그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말에 묘하게 다행이라는 듯한 어투여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가 어떻게 된 곳인지 안다는 말이군요.”
“알아. 내가 만들어지고, 탈출했던 곳이니까.”
아발트는 커다란 쇠사슬이 달린 목걸이를 끊고, 이 미궁같이 엉킨 곳에서 벗어나려고 싸웠다. 처음에는 검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상처를 안은 채로 가까스로 탈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탈출을 위해 얼마나 발악했던가! 그 끝은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면, 이러지 말 걸 그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는 후회일 뿐, 아발트는 더는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유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죽여.”
“죽이라고······?”
유선은 놀라지 않았다. 자존심이 센 아발트라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내가 당신에게 하려고 했던 짓. 그에 대한 응보를 받아야지. 나를 이 자리에서 죽이고, 나를 취해 가. 그것은 당신에게 향한 적의의 보상과 권리야.”
그것이 마땅한 도리. 하지만 아발트가 직접 그 얘기를 꺼내니, 뭔가가 허무해지는 기분이었다. 유선은 그녀를 향해 겨누는 검을 잠시 거두며 물었다.
“당신도 생명을 얻었으니,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까?”
“살고 싶었어. 그것도 어디까지나 이런 상황이 오기 전까지 말이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발악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유선이 다가온다 해도 뭔가 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올 것은 죽음뿐이었다.
“주제가 넘었는지도 몰라. 평생 입이 없어 말도 못 하는 채로 그냥 생명을 베어 넘기는 일을 하던 놈이 한다는 게 복수라니 말이야.”
아발트는 꼼짝없이 있으니, 자신이 검으로 있으면서 감정과 이성을 압박했던 감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잡던 그 손들의 감각을 떠올렸다.
“아발트. 세계를 구원할 성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불리던 또 다른 이름을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받은 검.”
그녀는 자신이 사용되던 장소를 알았고, 자신을 사용하던 주인 또한 알았다. 그리고 성검이라고 불리기 이전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았다. 아발트는 문득 유선에게 자신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있지. 나는 사실 저주받은 검이야.”
애욕, 권력, 재물······. 아발트는 모든 사용자의 욕구를 자극했고, 그 욕구에 충실한 인간들이 되게 만들었다.
그녀는 성검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사람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려. 그 감정에 살게 만들어 모든 것을 베어 버려. 선인도, 악인도, 아이도, 노인도 모조리 내 검에 베여 넘어가게 만들어 버리지.”
아발트는 자신이 베던 수많은 사람, 아니 생명체들을 기억했다. 고통스러워하며 죽는 장면도, 순순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여 사라지는 것도, 의문도 못 품은 채로 죽은 것도.
“그런데 웃기게도 내게 이렇게들 말하더라고. 이것이 ‘정의’라고 말이야. 악을 심판하는 정의래. 정의가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저 휘둘리고, 똑같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정의였나? 악마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게 하는 것이 정의? 그런 생각이 들었어.”
부조리였다. 모든 것이 말도 안 되었고, 그저 허울뿐인 구실로 자신을 이용하려던 이들뿐이었다.
“탐욕은 끊이지 않고, 사람을 바뀌게 하더라.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다 없애 버리고 싶었어. 인간이든, 악마든 그게 그것들인 놈들이니까.”
아발트가 슬프게 중얼거리다 다시 유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메마른 눈동자였다. 하지만 유선에게는 그 눈에 습기가 차는 것이 보였다.
“자, 나를 죽여. 그리고 나를······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그 영원한 잠에 빠트려 줘.”
아발트는 모두의 재앙. 그렇기에 유선은 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을 향해 겨누어 들어 올렸다.
***
“하아······ 하아······.”
세네타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교전에 돌입한 것은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세네타가 아발트와 싸울 때보다 더욱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세네타는 그 짧은 몇 분 사이에 깨닫고 말았다.
‘이 녀석은 못 이긴다.’
이것은 아발트에게서 느끼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검술을 익히고 전투에 쓸 기술을 익힌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에고르트가 다루는 검들은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팔이 많으니, 따라잡을 수가 없어.’
속도 면에서는 어쩌면 다른 호문쿨루스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 말은 속도가 자신보다 아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똑같은 팔의 기준으로는 세네타가 우위를 점해도, 그게 수십, 수백 개가 날카롭게 자신을 노리면 완전히 달라졌다.
세네타가 공격에 들어가면, 에고르트 쪽에서도 곧바로 응수하는 수를 가지고 왔다. 수십 개 검이 순식간에 휙휙 도는데, 그걸 전부 피할 방법은 없었다. 칼날 서너 개는 어떻게든 몸을 스쳐 지나가야지 피했다는 범주로 취급할 정도였다.
세네타는 작전을 변경해, 에고르트의 팔을 지저분한 나뭇가지를 쳐 내는 격으로 팔을 잘라 보지만, 그거로 돌아오는 효과는 미미했다. 오히려 세네타의 상처가 한 개 늘어날 뿐이었다. 이것 또한 살을 취하고, 뼈를 내주는 격이었다.
“벌써 지쳤느냐······, 결함품아?”
에고르트가 느릿한 말로 도발해 왔다. 세네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용사라 해도 홀로는······ 나를 잡을 수······ 없다. 그 정도 버틴······ 것이 용하지. 넌 네 아비를······ 뛰어넘었어.”
에고르트가 세네타를 칭찬하지만, 세나타는 그런 칭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건 조롱에 불과했다. 지금이라도 지크벨트를 무참하게 도륙한다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까.
“네 아비는······ 그걸 어떻게든······ 그 망할 여자를 통해서 극복해 냈지······. 만약 그 여자와 함께였다면······ 나도 분명히 위험했을 거야.”
에고르트가 이렇게 칭찬을 늘어놓는 의미가 무엇일까? 에고르트가 천장을 올려다보다 다시 세네타에게 물었다.
“네 아비는······ 그런 동료가 있었는데······ 네게는 무엇이 있느냐?”
무엇이 있느냐고? 지금은 혼자뿐이었다.
쿵!
아니, 밖에 엘레노어와 오르넵토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바깥에 집중해 유선과 세네타의 일이 해결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그들의 방패였다. 안의 상황은 모를 것이고, 지금 이렇게 내몰린 사실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세네타는 혼자였다.
“그것이 네 한계······다, 아이야.”
에고르트가 느릿하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세네타를 마저 처리하려고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 말은 정정하는 게 좋겠군요.”
둘뿐이라 여기던 공간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흐음······, 그러고 보니······ 두 명하고 한 개가 왔군······. 바닥이 꺼져서······ 저 밑에 있었나?”
에고르트는 그 불청객을 금방 이해했다. 자신의 방에는 두 가지 통로가 있었고, 그들이 들어온 입구와 지하 작업실로 통하는 통로였고, 유선이 나온 곳은 후자였다.
“오빠······!”
세네타는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잡은 표정이었다. 세네타가 전투에만 집중해야 하다 유선을 보자마자 안심했다.
유선은 검을 들고 에고르트에게 다가갔다. 그의 검은 본래 차던 것이 아니었다. 더욱 화려하고, 이음새가 좋은 검이었다.
어디선가 탈취해 온 검이 분명해 보였다. 유선은 그 검을 들어 보여 에고르트를 겨누었다.
“세네타에게도 훌륭한 동료가 있습니다.”
에고르트는 그 검을 슬쩍 보고도 경계하지 않았다. 검이 좋아 봐야 뭘 하겠는가? 유선 자체의 능력을 보면 그 검이 아까울 정도였다. 에고르트는 그 스펙을 둘째로 치고, 유선의 거슬리는 발언에 질문을 던졌다.
“흠······, 그것이 설마······ 자네인가?”
에고르트가 그렇게 묻자, 유선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도 그들 중 한 명이죠.”
유선은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그 탓에 에고르트가 본의 아니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뻔뻔하구나, 미생아. 다른 인간들보다 재능이 없는 그 몸뚱어리로 겨우 발악하는 꼴이 그저 코미디일 것이다.”
하지만 에고르트의 웃음에 유선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글쎄요, 당신이 보는 게 전부라 생각합니까?”
유선은 당당하게 에고르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곧게 뻗은 폼이 멋이야 부리겠지만, 그건 결국 엉성한 재주꾼일 뿐임을 알리는 꼴이었다.
‘뭔가 지닌······다······ 라······.’
그렇다고 방심한다면, 그건 에고르트의 잘못이었다. 에고르트는 세네타와 싸우는 것과 비슷하게 검을 이빨처럼 세워 원형으로 유선을 겨누었다.
유선은 그 품으로 돌격했다.
“이야압!”
그리고 에고르트를 향해 힘껏 검을 내찔렀다. 에고르트는 유선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에고르트는 검으로 경계하던 것을 풀고, 다가오는 유선의 공격을 검으로 막아 내었다. 그리고 에고르트는 유선의 한 수를 앞질러 보고 그대로 넘어트렸다.
푸부부부북!
유선이 재빠르게 일어나려고 하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도록 유선의 몸 테두리를 노려 칼을 박아 넣었다. 단 1cm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경고의 행동이었다. 그는 유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역시나······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었군······.”
모든 것이 허세였다. 그럴싸한 검과 기백은 모두 눈속임일 뿐이었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돌격에 만약 에고르트가 세네타와 싸우듯 진심을 보였다면, 그의 검이 유선의 몸이 부족할 정도로 모두 꽂히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에고르트는 너무나도 어이없어, 그런 것조차 할 생각이 나지 않게 했다. 유선은 죽일 가치조차 없는 야바위꾼이었다.
“자, 그러면······ 그 의미 없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변명할 시간을 주지······.”
에고르트가 상당히 언짢은 표정으로 유선을 보며 말했다. 유선은 완전히 내몰린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시간을 끌려는 목적이려나?”
유선은 허허 웃었다. 수많은 검이 그의 묘비를 이루는 상황 속에서 유선은 담담했다. 그런 아픔은 이상하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당신의 상대는 제가 아니었어요.”
이런 상황도 반전될 것이고, 그러면 이제부터 당황할 것은 에고르트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또 다른 동료 중 하나는 누구지?”
에고르트는 남은 한 명의 정체를 물었고, 유선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그 중얼거림과 동시에 분위기는 한순간에 역전시켰다. 그 명령조 같던 말은 그대로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푹-.
에고르트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리고 에고르트는 고개를 떨어뜨려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검이 자신의 몸을 꿰뚫었다. 용사의 검으로는 절대로 허용해 주지 않던 부분이 이렇게 무참하게 꿰뚫렸다.
“그럴 만한······ 인물이라면······.”
에고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니길 부정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의 물건. 마왕의 몸을 봉인시키던 성검으로 만든 생명체. 자신의 마스터피스.
아발트였다.